3. 치료의 과정 

1)치료목표
  치료체계의 기본목표는 개인으로 하여금 자유가 두렵다는 것과 행동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을 수용하고 행동하게 돕는 것이다. 실존치료는 인간은 자유로부터 도피 할 수 없으며 그 자유는 책임과 관련되어 있다는 전제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실존치료는 엄격한 생활궤도에서 벗어나서 그들의 자유를 막아 버리는 편협하고 충동적인 성향에 도전하도록 한다. 비록 이 과정은 개인에에게 해방감과 자발성을 주지만 새로운 자유는 불안을 야기한다. 자유는 새로운 길로 가는 모험이며 거기에는 우리를 안내할 어떤 확실성도 없다. 이런 "현기증"(dizziness)과 자유에 대한 공포는 성장하려면 반드시 직면해야 한다.(May, 1981). 자신이 현재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장차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 사람은 두려움을 지닌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 친근한 것에 매달려야 하는지 아니면 확실하지 않은 보다 도전적인 삶을 열기 위한 모험을 감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선택을 해야 한다. 삶에는 아무런 보증이 없다는 것에서 불안이 야기된다. 그래서 실존치료는 내담자가 자신은 단지 외계의 어떤 결정적인 힘의 희생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수용하고 선탱에 따른 불안을 수용하도록 돕는 데 그 목적을 둔다.


  메이에 의하면 내담자들은 내적으로 구속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치료자)가 자유롭게 해주기를 기대하는 자기봉사적(self-serving)인 환상을 갖고 치료를 받으러 온다고한다. 그래서 그는 "심리치료의 목적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내담자의 '치료'에 있지 않으며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삶에서의 그런 희생적 역할 속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자각하도옥 돕는 데 있다."(1981)고 기술하고 있다. 러셀은 이것을 "치료를 통해 사람들은 전에 손해를 입고 고통을 당했던 사건에 책임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책임을 수용하게 된다. 치료과정은 개인으로 하여금 전에 '우연히 일어났던'( happening)것으로 간주하던 것을 자신이 스스로 '행한 것으로서'(as doing)자각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표현하였다.

  다음의 편지는 나의 옛날 내담자가 쓴 것으로 그녀의 동의를 얻어 여기에 실었다. 그녀의 글은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끌어 나가기 위해 매일매일 결심을 하면서 느꼈던 인식, 자유, 책임 그리고 불안과의 싸움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때때로 나는 한 인간으로서의 실제의 나와 내가 느끼는 나라는 존재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서로 투쟁하는 것을 느낀다. 감정은 지금까지도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과 미움을 느낀다는 것은 매우 새롭고 두려운 일이다.나는 가끔 좋아하는 사람들을 그러워하지만 다음 순간 그들이 떠나버렸으면 하고 바라는 자신에 대해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이와 같은 비일관성과 의존성-독립성의 싸움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나는 가끔 정상적으로 죽었던 과거상태로 남았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때의 나는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때 내가 완전히 살아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늘 한 남자가 나를 포옹하였는데 잠시동안 매우 포근하고 마음이 놓이는 걸 느꼈다. 나는 그런 느낌을 좋아하면서도 두려워한다. 그것은 나와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사람을 신뢰하고 싶지만 아직은 그렇게 하기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아마 어떤 관계에서든 항상 위험스런 요소가 수반되기 때문일 것이고 나는 것을 수용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고통과 좌절을 모두 이겨낼 수 있을지, 오늘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가끔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느끼고 어찌해야 할지 모를 때 만약 내가 상담을 받지 않았더라면 만약 지금같이 자아통찰을 할 수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상상해 보려고 노력한다. 또는 만약 내가 마술을 써서 불안을 덜 느꼈던 정서적인 성장의 초기단계로 되돌아 간다면 그래서 거기 머무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도 상상해 본다. 그때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아름다움도 못느끼고 성취감도 없었으며 마음의 평화도 몰랐으나 그때가 더 안전한 것 같았다고 느꼈다. 그때는 내가 지금 처해 있는 것 같은 곤경도 없었고 단순하고 도전이 별로 없었던 안전한 세월이었다. 그러나 만일 마술로써 되돌아 갈 능력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결코 되돌아 가지 않을 것이다. 요즘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금껏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기 때문에 결코 과거로 돌아가지는 않겠다. 되돌아 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그러나 아직도 때때로 이 모든 고통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의문을 느끼기도 한다.

 

2) 치료자의 기능과 역할
  실존치료자들은 원래 내담자가 새로운 이해와 선택을 하도록 돕기 위해 내담자의 주관적인 세계를 이해하려고 한다. 내담자의 현재 상황에 중점을 두며 과거를 회상시키는 데 중점을 두지 않는다(May & Yalom,1984). 전형적으로 실존치료자들은 다양한 기법을 사용한다. 그들은 한 내담자에게서 다른 내담자에게로 변화를 주기도 하고 때로는 한 내담자를 치료과정의 다른 국면에 처하도록 하게도 한다. 한편으로는 체계적 둔감법, 자유연상, 인지 재구조화의 기법을 쓰기도 하고 다른 학파의 치료자들에게서 통찰을 끌어내기도 한다.(Fischer & Fischer, 1983).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실존치료자들은 엄격하고 상식적이며 조작적이라고 생각하며 기법을 혐오한다. 치료과정에서 기법은 치료자로하여금 내담자를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도전하게 하는 치료관계를 형성하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

 

 실존치료자들은 특히 내담자가 책임을 회피하는 데 대해 관심을 갖는다. 그들은 내담자가 책임을 수용하도록 조언한다. 가령 내담자가 "나는 할 수 없어요."라고 하면 그들은 내담자의 말을 "나는 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대치하도록 권한다. 만약 내담자가 궁지에 빠져 다른 사람을 비난하면 치료자는 내담자가 어떻게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는지를 묻는다. 이런 관점에서 얄롬(1980)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치료자는 내담자가 자신이 처한 곤경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지 결정하게 한다. 그리고 내담자에게 이런 통찰을 이야기해 줄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내담자 스스로 곤란을 만들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변화의 계기는 있을 수 없다".


  실존치료자들은 소위 "제한된 실존"(restricted existence)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을 상대한다. 이런 상담자들은 자신에 대해 제한된 인식을 하며 때로는 문제의 본질도 잘 모른다. 만일 삶의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되면 그들은 함정에 빠진 느낌을 갖거나 무기력해 한다. 이런 경우 치료자의 주요 임무는 내담자로 하여금 제한된 실존의 현장에 직면하도록 하며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이 자신들이었다는 것을 자각하도록 돕는 것이다.말하자면 치료자는 내담자가 점차적으로 자기직면을 하도록 거울을 들고 있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내담자는 자신이 지금껏 어떻게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의 삶을 확장시킬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게 된다. 과거의 요인들과 현재의 숨막히는 생활유형을 인식함으로써 내담자는 자신이 지금껏 어떻게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의 삶을 확장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게 된다. 과거의 요인들과 현재의 숨막히는 생활유형을 인식함으로써 내담자는 자신의 미래를 바꾸는 책임을 수용하게 된다. 치료과정에서 실존치료자가 실제로 해야 하는 치료의 예로서 다시 나의 옛 내담자의 편지를 참고하기 바란다. 만약 내담자가 치료기간 중에 자기의 느낌을 표현한다면 치료자는 다음과 같이 해야 할 것이다. 

 

·내담자가 말하는 것과 관련해서 그의 반응을 공유한다.


·내담자의 경험에 유사한 적절하고 타당한 경험을 드러내도록 돕는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선택해야 하는 그녀의 고뇌를 표현하도록 한다.


·그녀가 결정을 회패해 온 방법들을 직면하게 하고 이런 회피에 대해 판단하도록 촉구한다.


·그녀에게 "만일 당신이 기억하는 치료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있는 신통한 길이 있다면 지금 되돌아 가기를 원하는가?"라고 질문하여 치료 전의 당시의 생활과정을 점검하도록 격려한다.

 

·그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존재의 특질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것임을 함께 공유한다. 즉 그는 혼자이며 스스로가 결정해야 하고 자신의 결정에 확신이 없는 것에 대해 불안해해야 하며 그리고 때로 무의미하게 보이는 세계에서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는 것을 지금 배우고 있다는 것을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3) 치료에서의 내담자의 경험
  실존치료에서의 내담자는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의 세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도록 격려받는다. 그들의 세계에서 어떻게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하였는지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효율적인 치료는 이런 인식을 머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치료자는 내담자가 치료과정을 통해 이런 통찰에 기초해서 행동하도록 격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담자는 자신의 세계속으로 들어가 어떻게 다르게 살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나아가 그들은 치료과정에서 적극적이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두려움, 죄의식, 불안을 어떻게 탐색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심리치료만 받으려는 경우도 앞의 기록에서와 같이 그 자체가 때로는 두려울 수 있다. 내담자가 안일함을 떠나 자신을 탐색하기 시작했을 때 경험하게 될 불안감을 잠작해 보자.

 

 나는 오늘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엇이 두려운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나는 무엇보다 제리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는 나를 변화시킬 힘을 같고 있다. 내가 그에게 그런 힘을 주었으며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나를 당황케 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결코 되돌아 갈 수 없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나는 아직 나 자신을 모르며 단지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것만 안다. 나는 이것이 슬프고 겁이 난다. 나는 나의 삶으로부터 안전한 영역을 폐기시켰으며 장차 어떻게 되어갈지 두렵다. 과거로 되돌아 갈 수 없는 것이 슬프다. 나는 자신에게 솔직해졌고 내 속에서 새로운 나와 싸우고 있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또한 사람들을 다른 각도에서 보고 다르게 관계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나는 모든 것에 불안을 느끼며 특히 나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요컨대 실존치료에서는 내담자는 자신을 개방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데 이런 경험은 때로 두렵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하며 즐겁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한 경험이며 또한 이 모든 느낌들의 혼합이기도 한다. 내담자가 잠긴 문을 힘겹게 열 때 그는 자신을 심리적으로 묶고 있던 결정론의 사슬을 풀기 시작하게 된다. 점차로 지금까지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를 자각하게 되며 이를 통해 보다 나은 장래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치료과정을 통해 그들의 비전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할 수 있게 된다. 


  내담자가 자신의 무기력을 호소해 올 때 또는 힘이 없음을 확신하려 할 때 메이(1981)는 자유를 향한 그들의 여행은 한 발을 그의 도착점에 이르는 다른 앞면에 놓고 시작할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선택의 폭이 점점 좁아질수록 그들은 기본적인 보폭을 취함으로써 자신이 가야 할 영역을 구축할 수 있게 된다.


  실존치료에서 내담자가 경험하는 또 다른 것은 당면한 문제에 대처하는 것보다는 궁극적인 관심사에 직면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메이는 "출생, 죽음, 사랑, 불안, 죄의식 등과 같은 주요 경험은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직면되고 인식되어야 할 패러독스(역설)이다. 그래서 치료에서 우리는 삶의 이런 역설이 나타내는 의미를 분명히 하는 방법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도록 조언해야 한다"(1981)라고 기술하였다. 치료기간 동안의 주요 주제는 불안, 자유, 책임, 고립, 소외, 죽음 등과 그것들이 삶에 주는 의미 그리고 의를 향한 끊임없는 추구 등이다.

 

4) 치료자와 내담자 간의 관계
  실존치료자들은 내담자와의 관계에 치료의 중심을 둔다. 관계는 그 자체로 중요한데 그것이 전이를 촉진하기 때문은 아니다. 치료상황에서의 이런 인간 대 인간의 질(quality)은 긍정적 변화의 자극제가 된다. 치료자는 내담자쪽으로 향해 있어야 하며 내담자를 솔직하고 통합적이며 용기있는 존재로 지각해야 한다. 치료관계는 함께 하는 여행이다. 부버(1970)의 "나/당신"관계의 개념은 여기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내담자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변화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공감의 과정을 통해 치료자는 치료관계를 깊게 하는 방법의 하나로서 내담자의 반응을 공유한다.


  피셔와 피셔(1983)에 의하면 치료관계의 핵심은 존중(respect)이다. 실존치료에서 존중이란 내담자가 그들의 문제를 자발적으로 처리할 능력을 갖고 있으며 선택 가능한 대안을 탐색할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치료자는 내담자가 어떻게 자신의 환경을 만들어 왔는지 어떻게 제한된 실존을 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치료자와의 관계를 통해 내담자는 그들이 가져야 할 자유를 직면하고 선택할 능력을 갖게 된다.


  치료상의 관계를 서술하면서 죠라드(Jourard, 1971)는 내담자가 진지하고 솔직하게 자기를 드러내는 행동을 통해 진실된 삶을 살도록 인도할 수 있는 치료자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는 또 치료자는 내담자에게 나와 너의 관계를 형서하도록 도와야 하며 그런 관계에서 치료자의 자발적인 자기노출은 내담자의 성장과 진실성을 키워 준다고 보았다. 그는 "조작은 역조작을 낳고 자기노출은 또 다른 자기노출을 생기게 한다."고 하였으며 치료관계는 내담자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치료자도 변화시킨다고 지적하였다.


"이것은 자신의 존재와 성장을 시도하지 않은 채 버려두는 사람은 치료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는 역설하였다.


  치료자는 내담자가 자발적인 행동을 조형하도록 돕는다. 관계가 적절하면 이것은 더욱 명료해질 수 있으며 치료자의 인간됨은 내담자가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자극이 된다. 그는 만약 치료자가 치료기간 중에 자신을 숨기거나 또는 내담자에게서 야기된 증상과 같은 비자발적인 행동에 참여하면 내담자는 자신을 방어하고 비자발적인 행동방식을 고집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치료자는 적절한 때에 자신을 적절히 개방시킴으로써 내담자가 이방인이 되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물론 이것은 내담자의 떠도는 모든 느낌이나 생각을 제어하지 않고 다 수용하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끊임없이 내담자의 반응을 공유하는 즐거움을 의미하며 특히 이런 공유가 촉진적인 효과를 가져올 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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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적용 : 치료기법과 절차

   앞에서 살펴본 봐와 같이 실존적 접근법은 다른 접근법과 달라서 잘 정련된 기법을 갖지 않고 있다. 이 접근법은 부겐탈(Bugental, 1978, 1981)이 지적한 것처럼 정신분석의 개념과 기법을 몸에 걸친 포괄적인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인지적이고 행동적인 접근법에서 사용하는 기법을 통합시킨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사용하는 기법들은 내담자가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이라는 개인적 장에 수반하는 책임을 수용하도록 돕는 도구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이 장의 앞부분에서 기술한 실존적 접근법의 여섯 가지 명제의 치료적 의미를 기술하고자 한다.

 

 1) 자기인식의 능력 : 상담에 주는 의미
  인식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개념화 될 수 있다. 양쪽에 많은 문이 있는 긴 복도를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당신이 그 문을 활짝 열거나 조금 열거나 또는 갇힌 채로 둘 수 있는 선택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만약 그 중 한 문을 열었을 때 당신이 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이 두렵고 추한 것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그러나 반대로 당신은 어쩌면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찬 방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당신은 방문을 닫은 채로 둘 것인지 아니면 방문을 열고 들여다 볼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물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우리의 인식을 제한하거나 또는 확대시키거나 하는 데 있어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거의 모든 상담상황에서 대립되는 욕구 사이의 투쟁을 보았다. 자기인식의 개념은 인간능력의 기본이므로 자기인식을 넓히려는 결심은 인간성장에서 기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은 개인이 개인상담이나 집단상담에서 경험하는 자기 인식의 시초가 되는 목록들이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사랑받으려고만 노력하므로 실제로는 사랑받고 있다는 감정을 경험할 기회를 잃는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할 때 느끼는 불안감을 의존성이 주는 안전감과 바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자신 속의 비일관성을 부인하려고 시도하며 수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수용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감이 다른 사람들이 평가하는 정의에 매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여러 면에서 자신이 과거의 경험과 결정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에게 내재해 있는 숱한 단면들을 발견하고 존재의 한 면을 억제 할 때 다른 면도 억제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만약 비참함을 억압한다면 기쁨도 닫혀 버린다. 만약 그들이 증오를 부정한다면 역시 사랑하는 능력도 부정된다. 만약 그들이 악귀를 쫓아낸다면 천사도 쫓겨난다.


·그들은 자신의 미래가 과거처럼 운명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들은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고 과거를 바르게 이해하기 때문에 미래를 재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죽음과 무에 대해 너무 몰두하기 때문에 삶의 가치를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함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을 가치있는 존재라고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치있는 존재이기 위해 완전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거에 몰두하거나 미래를 계획함에 있어 한번에 너무 많은 것을 시도함으로 인해 현재의 삶이 실패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참된 의미에서 다른 대안들에 대한 자각, 동기의 자각, 인격형성의 요인들에 대한 자각, 개인의 목표에 대한 자각을 포함하는 자기자각의 증진이 상담의 목표이다. 그러나 나는 치료자의 임무가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내고, 또 그들에게 자기자각을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일러주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런 사람들은 만족하여 의식의 앙양에는 추호의 관심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치료를 받으러 오거나 집단상담을 원한다면 이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나는 또한 상담자의 임무는 자각을 증진시키려면 어떤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것을 내담자에게 알려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자기자각이 늘수록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 더욱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상황에 대한 무지는 부분적인 죽음의 느낌과 더불어 만족을 가져다 줄 수도 있지만 사람이 자신의 문을 엶에 따라 그는 완성에 대한 가능성뿐만 아니라 더 많은 투쟁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2) 자유와 책임 : 상담에 주는 의미
  책임성을 작가정신(자신의 삶을 고안하는 사람)에 연결시키는 실존적 접근법이 상담에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실존치료자들은 늘 내담자는 자신의 상황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들은 내담자가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그의 문제를 유전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만약 내담자가 자신의 상황에 대한 책임성을 인식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그는 개인적인 변화를 할 수 있는 계기를 갖지 못하게 된다(May & Yalom,1984).


  실존치료자는 각 개인이 소유한 자유와 책임을 인지시키는 데에 상담과 심리치료의 근거를 둔다. 치료자는 내담자가 어떻게 자유를 회피하는가를 발견하여 그것을 사용하는 모험을 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담자는 무능력해지고 신경증적으로 치료자에게 매달리게 된다. 치료자는 내담자가 선택을 회피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스스로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수용하도록 가르칠 필요가 있다.


  상담자나 치료자에게 오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자신의 삶을 통제할 힘을 상실했다고 느끼기 때문에 도움을 청하러 온다. 그들은 치료자가 그들에게 지시하고, 마술적인 치료를 해주기를 기대한다. 치료자의 두 가지 임무는 내담자가 스스로 선택한 삶이 어떻게 실패했는며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선택을 의뢰했는지를 자각하게 하여 자립성을 향해 한 단계 발전하도록 돕는 것이다. 내담자가 현재의 제한된 실존방식보다 충일한 실존방식을 탐색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 피셔(1983)는 치료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즉 "다른 사람들이 당신이고 당신이 그들이라면 당신은 지금의 관계에서 현재 가진 개념들을 기꺼이 사용할 수 있는가? 당신은 다른 사람과 관계하거나 또는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경험하는 일에 당신의 자유를 기꺼이 사용할 것인가? " 

 

3) 정체감의 추구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 : 상담에 주는 의미
  치료를 원하는 사람 중에는 자주 자기상실감으로 고통을 받거나 그들 자신이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고통을 받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내부지향적인 감각을 상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대로 살거나 다른 사람이 고안한 삶을 살아 왔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승인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중에 그들은 가끔 자신이 인정도 못받고 자시수용감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무스타카스(Moustakas, 1975)는 자기로부터 소외의 조건을 기술하였다. 그는 소외를 "자신의 내적 경험에 기초되는 삶보다 다른 사람에 의해 윤곽이 그려지고 결정되는 삶이 발달하는 것"이라고 기술하였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에 따라 정체감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이방인이 되어간다. 이것은 때로는 "비자발적 실존"(inauhtentic existence)이라고도 불리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로 "팔아 버리는"(selling out)삶으로 구성된다. 비자발적 실존은 생의 업적에 대해 박수갈채를 받기 위한 지위추구 게임이다. 많은 내담자들을 이한 중요한 교훈은 그들이 이런 칭찬을 받기 위해 너무도 엄청난 대가를 치뤄왔다는 것이다. 즉 자신과의 접촉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긴밀하고 만족스런 관계를 발전시키는 의미있는 삶의 기초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궁극적인 고독을 인식하는 것 - 죽음이나 자유를 인식하는 것처럼 - 은 두려움이 될 수도 있다. 모험의 두려움 때문에 자유와 책임을 수용하는 데 망설이는 것처럼 우리들은 자신의 고독과 소외를 수용하는 것을 회피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인간경험(고독)의 반이 제거된다면 다른 반의 경험(친근감)도 제거될 것이다.


  치료적 여행의 일부는 내담자가 잃었던 정체감을 다시 시험해 보게 하는 것으로 특히 내담자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고안하도록 맡겨 두는 것이다. 내담자는 자신의 자유가 다른 사람들에게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거나 치료관계에서 그들의 자유를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게 될 때 두려워질 것이다. 쉬운 결정이나 대답을 거절함으로써 치료자는 내담자가 자신의 답을 혼자 찾아야 하다는 현실에서 직면하게 한다.

 

4) 의미의 추구 : 상담에 주는 의미
  실존치료자는 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환자나 정신장애자라기보다 제한된 실존이라는 용어로 생각하려고 한다. 제한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단지 제한된 자기자각만 갖는다. 그들은 자신의 잠재력의 대부분을 폐쇄하고, 인생은 지루하고 무의미하며 만약 이것이 삶의 전부라면 산다는 게 무얼까 하고 의심한다. 삶의 무의미성은 공허감과 텅빈 느낌, 또는 프랭클이 말한 실존적 공허로 이끈다. 때때로 자신의 삶이 공허의 늪에 빠져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목표를 갖고 삶을 창조하는 투쟁에서 물러난다. 이것이 상담에서 도전되어야 할 영역이다. 


  관련되는 개념으로 실존치료자들이 실존적 죄의식이라고 부는 것이다. 이것은 불완전하다는 느낌이나 자신이 마땅히 했어야 할 것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 생기는 조건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잠재적 능력을 무시한다면 그는 실존적 죄의식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죄의식은 "신경증적"인 것도 아니고 치료되어야 할 증상도 아니다. 그 대신에 치료자는 내담자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어떻게 학습해 가는가를 알기 위해 이것을 탐색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삶의 의미와 방향에 도전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

 

5) 삶의 조건으로서의 불안 : 상담에 주는 의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울증 때문에 전문적인 조력을 구한다. 많은 내담자들은 그들의 고통을 제거해 주거나 적어도 그들의 불안을 줄이는 어떤 처방이라도 내려주기를 기대하면서 상담소에 찾아온다. 그러나 실존적 상담자는 단지 증상을 제거하거나 불안 그 자체를 감소시키는 데 시간을 보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내담자로 하여금 불안이 단계적으로 증진되는 것을 경험하도록 작업을 한다. 이때 제기 될 수 있는 몇 가지 질문이 있다. 즉 내담자는 불안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불안이 성장의 기능인가? 아니면 신경증적 행동에 고착하려는 기능인가? 불안은 내담자의 안녕을 위협하는 것인가? 내담자는 미지의 것에 대한 불안을 경험하려는 용기를 보이는가? 등.


  불안은 개인이나 집단상담의 치료기간을 효과적으로 만드는 좋은 소재이다. 만약 내담자가 아무런 불안도 경험하지 않는다면 변화하려는 동기도 저하될 것이다. 불안은 새로운 행동을 실험해 보려는 위험을 참고 견디게 해 주는 에너지로 변형 될 수 있다. 이라하여 실존적 치료자는 삶의 모호성과 불확실성을 어떻게 수용하며, 도와 주는 사람이 없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를 배우는 것이 종속된 삶에서 자율적인 삶으로 되는 여정에 필요하다는 것을 내담자가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다. 치료자와 내담자가 무능한 행동양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양식을 건설하는 것은 당분간은 불안스럽겠지만 불안은 곧 사라질 것이다. 내담자가 자신가을 갖게 됨에 따라 파멸할지도 모른다는 예상으로 인한 불안은 차차 감소된다. 

 

6) 죽음과 무에 대한 인식 : 상담에 주는 의미
  나는 죽음과 삶은 대칭적인 위치에 있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성장하기 위해 우리는 과거의 어떤 것을 기꺼이 포기해야 한다. 만약 우리 존재에 새로운 어떤 영역이 나타나려면 우리의 어떤 부분은 죽어야 한다. 과거의 신경증적인 면에서 집착하면서 동시에 좀 더 창의적인 면이 발달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나는 어떤 그룹에 내가 유용하다고 생각한 집단기법을 사용했는데 그 기법은 그 집단 구성원들에게 10년 후의 자신을 상상하도록 한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자신이 결심한 것을 완수하지 못했으며, 변화하고자 원하는 방식대로 자신을 변화시킬 시회를 놓쳤다고 상상하여 말하게 하였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자신의 어떤 부분에 직면하지 않았고 미해결의 무제를 그대로 남겼으며, 계획을 실행하지 않았다고 상상하여 말하게 했다. 그리고 모험을 하기보다는 현재의 자기 그대로 남기를 선택했다고 상상하게 하였다. 그런 다음 나는 그들이 마치 죽어가고 있는 것을 아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고 자신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게 하였다. 이 훈련은 내담자가 자기의 시간을 진지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며, 보다 완전한 삶을 향해 마법의 힘으로 다시 살아난 실존을 수용하도록 자극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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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요약 및 평가

1) 요 약
  실존주의의 관점에 의하면 인간으로서 우리는 자기인식의 능력을 갖고 있다. 자기인식이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반성하고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탁월한 능력이다. 자유와 책임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또 다른 기본 특성인 실존적 불안을 야기시킨다.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지 않거나 또는 이런 자유에 대한 반성을 아무리 피해 보려고 하지만 우리는 자유롭다. 비록 그 결과가 불확실하더라도 선택을 하여야만 한다는 인식은 우리를 불안으로 이끈다. 이 불안은 우리가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에 직면할 때 가장 고조된다. 그러나 죽음은 피하지 못할 숙명이라는 사실에 직면함으로써 우리는 현재의 순간이 의미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과제를 수행할 시간을 결코 영원히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기 때문이다.우리의 과제는 의미있고 목적있는 삶을 창조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참신한 목표를 추구하고 삶에 의미를 주는 가치를 추구할 때 고유하다.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불확실성에 직면하여 선택을 해야만 하는 자유와 헌신을 통해 발달된다.


  실존치료는 인간관계에 중점을 둔다. 이것은 내담자의 성장은 순수한 관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보며 여러 가지 다른 치료법에서 빌려 온 기법이 아니라 숨겨져 있는 내담자와 치료자의 관계의  질(quality)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접근법은 기본적으로 치료의 목표, 인간존재의 기본 조건 그리고 내담자와 치료자가 함께 하는 여행으로서의 치료 등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치료자는 특수한 기법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접근법에서 기법을 빌려 올 수 있다. 

 

2) 실존적 접근법의 공헌
  실존적 접근법은 인간에 초점을 두며 최고의 수준에서 인간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형성해 가는 존재이며 끊임없이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성취시켜 가는 존재임을 보여 준다. 실존적 접근법은 인간실존, 즉 자기인식과 자유에 초점을 둔다. 실존주의 학자들은 죽음을 두려운 운명적 전망이 아닌 긍정적 전망으로 제시하였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에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들은 불안, 죄의식, 좌절, 고독, 그리고 소외를 이해하는 데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주었다.


  나의 판단으로는 실존적 접근법의 중요한 기여의 하나는 치료관계에서 인간관계의 질을 강조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접근법은 심리치료를 기계적 과정으로 만듦으로써 심리치료를 비인간화시키는 기회를 줄이게 했다. 또한 나는 실존요법에 내재한 철학이 매우 흥미로움믈 알게 되었다. 나는 특히 자각을 통해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는 개인의 자유와 책임과 능력을 강조한 점에 마음이 끌린다. 내 관점으로는 이런 전망은 심리치료의 실제에 개별적이고 독특한 유형을 만드는 심원한 철학적 기저를 제공해 준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 자체가 현대인의 핵심적 갈등을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존적 신념은 임상가들에게 그들의 이론적 성향에 관계없이 무언가를 준다. "실존적 접근법은 치료자에게 훈련되지 못한 쓸모없는 허가증을 주는" 이론이라는 생각을 불식시키기 위해 얄롬은 "'실존적 접근법은 다른 접근법만큼 합리적이고 일관적이며 체계적인 것으로 가치이고 효율적인 심리치료의 틀(paradigm)이다."라고 결론짓고 있다. 나아가 그는 실존적 접근법은 치료자에게 일련의 임상적 통계자료들을 설명하는 체계를 제공해 주고 체계과정의 체계적 전략을 구성하는 체계를 제공해 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 모형이 다음과 같은 이점을 갖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 이론은 알뜰하고(극히 기본적인 가정만 설정하고 있음)접근하기 쉽다(이 가정들은 개인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할 수 있는 자료에 기초하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적인 것을 바탕으로 하는 모형이다. 그러나 얄롬은 이것을 확고한 이론적 틀(the paradigm)로 보기보다 그냥 하나의 이론적 틀(a paradigm)로 간주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부 유용한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유용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치료자들이 성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의 치료자들이 성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이다. 나는 그의 관점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인간존재는 너무 복합적이어서 하나의 방법을 통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존적 접근법을 갖고 활동하는 학자이면서 임상가인 부겐탈(Bugental, 1978)은 이접근법이 효과가 좋은 유일한 접근법은 아니지만 유용한 접근법이라고 보고 있다.

 

  사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할 수 있는 어떤 유일한 접근법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 는다.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은 거짓이거나 순진하게 느껴진다. 많은 이론적 체계들은 유용하지만 인간존재는 너무 다양하고 복합적이고 알 수 없기 때문에 궁극적인 심리치료법이 제시될 수 없다. 아니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실존적 접근법에 가장 적합한 문제는 무엇인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이 치료에 가장 적합한가? 가장 좋은 경우는 인간의 성장을 향한 유용한 선택과 통로에 초점을 두는 경우이다. 아주 짧은 상담에서도 실존치료는 내담자가 개인적 책임을 가정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일을 하며, 현재의 상황에 대한 자각을 확대하도록 하는 일에 초점을 둔다. 발달적 위기와 싸우는 내담자에게 실존치료는 특히 유용하다(May & Yalom, 1984).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넘어가는 결정적 전환점의 예로 청소년의 자아정체감확립을 위한 투쟁이 있다. 중년기의 실의와 싸우는 몸부림이 있다. 집을 더나 적용하려는 아동의 투쟁도 있고 직업과 결혼에서의 실패에 대처하려는 성인 초기의 몸부림도 있다. 그리고 나이가 듦에 따라 나타나는 신체적 과점은 개인이나 집단상담에 적절히 적용할수 있으며 이 기본 개념은 다른 치료로부터 빌려온 기본의도는 이 기본 개념과 주제를 모든 학파의 치료기법과 통합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통합이 분명히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3)실존적 접근법의 한계와 평가
  이 접근법에 대한 중요한 평가는 이 접근법이 심리치료의 원리와 실제에서 체계적 전술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방법론에서 엄격함을 결여한 점과 신비적인 언어와 개념들을 사용한 점이 비판받고 있으며, 과학적 접근법에 대한 반동에 기초한 일시적 변덕이라는 비판도 있다. 실증적인 연구에 기초한 상담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치료의 개념들이 실증적이어야 하고 정의가 조작적이어야 하며 가설은 검증될 수 있어야 하고 치료의 실제는 치료의 과정이나 실제 모두에서 연구결과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메이(1958)는 정신의학과 심리학에서의 실존주의적 운동은 보다 경험적인 실행에서 나온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통적인 과학적 방법은 통계자료를 정당화하려는 것 뿐만 아니라 내담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드러내려고 하기보다는 감추려고 하였다. 실존적 접근법은 선입견으로 내담자를 보거나 또는 좋아하는 이미지로 만들려는 경향에 반대하는 운동이다. 이런 점에서 이 접근법은 넓은 의미에서 과학적 전통의 입장에 선다.


  실존적 태도를 견지하는 일부 치료자들은 그들의 치료유형을 자기실현(self-actualization), 대화적 만남(dialogic encounter), 자발성(authenicity), 그리고 세계 내의 존재(being in the world)라는 모호하고 일반적인 용어로 기술한다. 이런 식의 명확성의 결여로 때로는 혼동이 생기고 실조치료의 과정이나 결과에 대한 연구를 하기가 어렵게 된다.


  또 다른 기본적인 한계는 이 접근법의 용어의 대부분이 너무 추상적이어서 실제 치료에 적용시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 사르트르 등의 실존주의 이론가들은 상담자나 치료자를 위해 그들의 이론을 만든 것이 아니다. 철학적인 성향이 없는 초심자나 발전도상에 있는 치료자들은 실존적 개념들의 대부분이 공허하고 교묘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런 철학에 익숙한 상담자들도 때로는 이것을 치료에 적용할 때 당황해 한다. 이미 살펴온 바와 같이 이 접근법은 내담자를 먼저 이해하고 거기에 따라 기법을 적용해야 함을 강조한다. 실존적 접근법 본래의 기법이 없다는 사실은 치료자가 자신의 창조적인 치료절차를 발달시키거나 다른 학파의 기법을 빌어다 쓰도록 만들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접근법은 인간을 사회적, 심리적으로 높은 수준에서 기능하는 사람에게는 효과가 있지만, 낮은 수준에 있는 사람이나 위기에 있는 사람 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비판되고 있다. 자유와 책임에 대해 실존주의자들의 강조는 무감각하거나 미숙할 수 있다. 또한 철학적 통찰도 어떤 내담자들에게는 그들의 능력을 넘어선 것이다. 따라서 실존적 접근법은 장애가 심한 사람에게는 부적절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라잉(Laing, 195)은 실존적 관점이 정신병환자에게 성공적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지적하였다. 라잉의 긍정적 결과는 실존적 성향을 지닌 치료자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과 잘지낼 수 있다는 것과, 내담자의 고유한 성격에 맞는 능동적이고 지시적인 중재방법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6. 반성과 논의를 위한 질문들

(1) 개인적인 자유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재의 당신은 선택의 결과라고 믿는가 아니면 환경의 산물이라고 믿는가?


(2) 당신의 삶에서 결정적 전환점들을 생각해 볼 때 무엇이 현재의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나타나는가?


(3) 자유를 인정하고 스스로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가? 자유와 책임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하는가?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해 안일하게 지내기 위해 지율성을 포기하려고 하는가?


(4)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각기 혼자라는 데 동의하는가?  그런 사실이 상담에 어떤 의미를 주는 가? 어떤 방법으로 혼자라는 경험을 회피하였는가?


(5) 불안의 경험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 불안은 자신이 선택해야만 한다는 생각, 혼자라는 인식,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사실의 자각, 그리고 삶에서 자신의 의미와 목적을 창조해야 한다는 자각의 결과에서 온 것은 아닌가? 자신의 삶에서 불안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6) 만일 죽음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삶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7) 삶에서 가장 가치있게 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들이 없으면 삶은 어떻게 되겠는가? 삶에 의미와 목적을 주는 것을 무엇인가?


(8) "실존적 공허"(existnetial vacuum)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 때로 삶이 실체, 깊이 그리고 의미가 없음을 경험하는가? 이러 허무감을 경험하는 것은 무엇과 같으며 어떻게 거기에 대처하는가?


(9) 내담자와 치료자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실존적 관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느 정도까지 내담자와 미지의 영역으로 치료여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느 정도까지 자신의 삶에 도전하고 삶을 변화시키려고 하는가?

 

7. 읽을 만한 보충교재들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저술들은 대부분 너무 기교적이고 모호해서 상당한 철학적 배경이 없으면 읽기 어렵다. 그러나 이 깊이 있는 사상가들의 글은 이 방면에 흥미를 갖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아주 훌륭한 명문들이다. 이런 명문 중 두 가지는 "도스토에프스키에서 사르트르까지의 실존주의"(Kaufmann, 1975)와 "실존주의"(Solomon, 1974)이다.


  내가 실존적 심리치료의 근원으로 추천하고 싶은 글은 "실존적 심리치료"(Yalom, 1980)이다. 이 책은 실존적 정신의학에 대한 최초의 포괄적인 교과서이다. 작가는 자신의 임상경험과 문헌에서 인간존재의 네 가지 관심사에 초점을 둔 역동적 치료법을 만들었다. 네 가지 관심사인 죽음, 자유, 고립 그리고 무의미성이 많은 임상사례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실존적 관점을 미국사회에 도입한 주요 인물의 하나는 메이(May)이다. 그의 최근의 저서 <<자유와 운명>>(1981)에서 그는 선택, 운명, 자유와 불안, 죽음과 삶의 의미, 삶의 소생, 절망과 기쁨등과 같은 인간사로부터 심리치료의 실행을 위한 의미를 발전시키고 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책이며 우리의 삶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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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ral Themes in Barth’s Theology
Many scholars debate the presence of methodological phases in Barth’s work. There are, however, prominent themes from the first edition of Romans to the end of his career. Chief among these consistencies is his dialectical approach (in the sense of “yes” and “no”). Where Hunsinger distills Barth to motifs based on content, this theme is mainly a formal observation but, an informative one nonetheless. (Hunsinger 1991 identifies six motifs in Barth, actualism, particularism, objectivism, personalism, realism, and rationalism and develops these at length. For a brief review of Hunsinger’s argument, see Molnar.) Owing to his disillusion with the liberal theology of his youth, Barth sought to balance the two sides of God and the human. This “balancing act” is seen most clearly by contrasting his early emphasis on God, that is, God’s wholly-otherness and distance from humanity as well as the created world with his later emphasis on the humanity of God. It is important to notice, however, that this apparent change over time is one of emphasis only.

Beginning with his Romans Barth placed strong emphasis on the otherness of God. In contrast to the liberal theology he was taught by Harnack and Hermann, Barth saw that, “the Gospel proclaims a God utterly distinct from men. Salvation comes to them from him [God], and because they are, as men, incapable of knowing him, they have no right to claim anything from him” (Barth 1968, 28; Cf. Church Dogmatics I/1). This dualism between God and the world had several prominent consequences for Barth’s understanding of doctrine including, in particular, revelation and interpretation of scripture (See McGrath 1997, 306-8 on Barth’s move to start his Church Dogmatics with the Trinity, reversing the order of Schleiermacher’s Glaubenslehre). It is important to note that, as Torrance points out, the dualism at work in Barth does not imply the absence of an “active relation between God and the world” (Torrance 1995, 85). Rather, “Barth’s position rests upon an immense stress on the concrete activity of God in space and time, in creation as in redemption, and upon his refusal to accept that God’s power is limited by the weakness of human capacity or that the so-called natural reason can set any limits to God’s self-revelation to mankind” (Torrance 1995, 86).

In keeping with his distaste for natural theology Barth held theology to be, in contrast to the liberal theologians of his day (and today), a “science of the Church” (Barth 1995, 21-22; Church Dogmatics I/1, 1). Theology’s object of study is therefore the Word of God revealed in Jesus Christ, scripture, and the proclamation of the Church. Jesus Christ, as the inspiration for scripture and the Church, is the ground of the witness to God’s Word. Scripture and the Church’s proclamation are however human creations and activities and as such become the Word of God only by grace and through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There is nothing special therefore about the language used in the Bible (per se) nor the skill of the preacher, for the Word of God comes to humanity from God alone by grace (Church Dogmatics I/1, 191-4).

Despite the recognition of scripture as a human book, it is through the grace of God and by the Holy Spirit also the revealed Word of God and therefore exegesis and interpretation of scripture are critical for Barth’s dogmatics. He discusses these at length in his Church Dogmatics (I/1; I/2). As a “science of the Church” dogmatics presupposes not the “objective” exegesis of the Romans but rather a completely interested “theological exegesis,” that is informed by the history of the Church’s hearing of God’s Word in scripture and hopes, through faith, to hear God’s Word themselves for their own time. This “interested exegesis” is further developed in Church Dogmatics I/2 under the title of “Freedom under the Word of God” (695-740). Principally, Barth calls for the recognition of humanity’s relative standing with respect to God’s Word. Human beings, while not forbidden to bring to bear their tools of philosophy and critical exegesis, are always required to subordinate the text and the meanings found there to God’s self, who is always “other than” the words we humans use to express God’s will (Livingston 2000, 105-6). Barth’s formulation of exegesis and hermeneutics has lead to broad criticism but is perhaps as far as one can go while maintaining the wholly-other character of God and the reality of revelation from such a God.

As early as the second edition of Romans the reader can find traces of the profound connection between God and humanity fully elaborated only later (37-8, for example, speaks of God’s “no” being the ground of the “yes” of salvation). By 1956 Barth explicitly recognized that his early emphasis on God’s distinctiveness as wholly other had been (and remained) necessary to counter the immanence of nineteenth-century liberal theology but that it was incomplete. In his lecture, entitled “The Humanity of God” Barth acknowledged a correction that had developed in his Church Dogmatics to the radical otherness of Romans (Barth 1960, 37-65). This shift in thought is often called Barth’s “Christological concentration” and involves the notion that God cannot be understood without Christ and, of course, Christ cannot be understood without humanity and vice versa. After 1935, all of Barth’s theology is focused on Christ. His doctrines of God, creation, election, anthropology, and reconciliation are all Christological (Livingston 2000, 107; Church Dogmatics passim). True to his dialectical pattern, Barth saw all of theology as concerned with the work of God in Jesus Christ. As the ground, or source, and the goal of all creation, Christ is the model for humanity. Not only is Christ the revelation of God but he is also the source of human nature. Through Christ we learn our relationship to God and we receive the grace which God planned for us from the beginning (Barth 1960, 46-65; Church Dogmatics, I/2, 347; II/1, 319f; II/2, 4f, 94f; III/2, 160f; III/3, 186; IV/1, 3, 17f, 161-3). Moreover, since “Christ is the ground and goal of humanity,” evil and sin are not the final necessary fate of humanity (Livingston 2000, 107). Rather, although a human being may withdraw from relationship with God and therefore sin (idolatry), one is powerless to undo what Christ has done. As the author of creation and salvation, Christ restores covenant with God, so all of creation lies in essentially positive relation to God. “That is the first and the last word of God” (Livingston 2000, 107). Barth therefore calls sin and evil an ontological impossibility (Church Dogmatics II/1, 503f; II/2, 165f; III/3, 353f). Evil and sin, though real, exist only relatively and transitorily for nothing can prevent God from receiving humanity with the divine “yes!” (Livingston 2000, 108).

Barth reconceived the Protestant doctrine of election. For him, God elected God’s self for suffering and death in Christ and elected humanity for eternal life, simultaneously condemning Christ and raising up humanity. Barth stops short, however, of proclaiming universal salvation. Rather, God has extended unlimited love to all and it is up to human beings to accept this through faith. Those who believe are saved and those who do not are damned. The saved have only one appropriate response to the charis of God and this is eucharista or thanksgiving (Barth 1993; Livingston 2000, 109; Church Dogmatics IV/2, 733-51; IV/3, 99-103).

As has been seen in this brief overview of important aspects of Barth’s dogmatics, his dialectical, yes/no, approach informs every aspect of his thought. It is therefore, perhaps, unfair to cast Barth as a theologian of judgment without also recognizing the important place given to grace and election. For Barth humanity is both radically not God and (even more) radically called to covenant with God.

Criticism and Influence
Barth’s theology has been widely criticized by many theologians. Beside the liberal Protestant reaction, his neo-orthodoxy has been criticized for not being open enough to non-Christians, ignoring culture, employing Biblicism, for the density of his writing, and the sheer size of his Church Dogmatics. It should be noted in regards to the first criticism that Barth is, on at least one occasion, just as critical of Christian religion (as opposed to faith) as he is of other religions (Church Dogmatics I/1, 280-300). Overall, however, the fundamental criticism of Barth’s theology boils down to a questioning of his (albeit somewhat qualified) dualism.

In terms of revelation, he is accused of denying any significant role for humanity in the reception of God’s Word (Bultmann, Brunner, Pannenberg). Criticism is this area would seem to ignore statements such as, “In Him the fact is once for all established that God does not exist without man” (Barth 1960, 50). Regarding history, he is said to have no place for the historical and supra-historical event of Jesus Christ to happen. In other words, salvation history happens for Barth neither entirely with God nor entirely (or perhaps at all in some respects) with humanity. Concern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world and God, many have been critical of Barth because his dualism ignores the actions of humans and that he does not adequately account for the connection linking God and the world between revelatory events. Although these criticisms are not without merit, there is a strong tendency to take isolated statements of Barth’s and to extend them logically to a level of abstraction that he himself avoided while ignoring (due, perhaps, to the immensity of his work) the “balancing” statements he makes.

Barth’s positive influence can be felt in the current work of the so-called postliberal theologians. Among these are Hans Frei, George Lindbeck, Stanley Hauerwas, Ronald Theiman, William Placher, Kathryn Tanner, and Charles Ward. Barth’s continues to provide a negative influence for the work of theologians of correlation such as Paul Tillich, David Tracy, Hans Küng, Rosemary Ruether, and Schubert Ogden.

Barth’s theology reacted to the profound challenges of the twentieth-century. In light of the mass destruction of the World Wars, the Holocaust(s), and countless other tragedies, Barth’s call to know our collective place under heaven while not denying that we do in fact have a significant relationship to engage in with God seems to have been a crucial one. Moreover, as Robert McAfee Brown says in his foreword to Credo, “The reader has the privilege of disagreeing with Barth. He no longer has the privilege of ignoring him” (Barth 1962, xi).

Bibliography
Primary
Barth, Karl. 1936-1975. Church Dogmatics. [ET Kirchliche Dogmatik] Translated by T.H.L. Parker, W.B. Johnston, Harold Knight, and J.L.M. Haire. Edited by G.W. Bromiley and G.T. Thomson. Edinburgh: T & T Clark.

Barth, Karl. 1949 [1947]. Dogmatics in Outline. Translated by G.T. Thomson. New York: Philosophical Library.

Barth, Karl. 1960 [1956]. “The Humanity of God,” in The Humanity of God, 37-65. Trans. John Newman Thomas. Atlanta: John Knox Press.

Barth, Karl. 1962 [1935]. Credo. With a foreword by Robert McAfee Brown.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Barth, Karl. 1968 [1933]. The Epistle to the Romans. Translated from the 6th German edition [Römerbrief] by Edwyn C. Hoskyns. London; Oxfor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Barth, Karl. 1993. The Holy Spirit and the Christian Life: The Theological Basis of Ethics. Translated by R. Birch Hoyle with a foreword by Robin W. Lovin. [1st English edition London: F. Muller, 1938]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Barth, Karl. 1995. “Theology” from God in Action [1936]. In The Christian Theology Reader, ed. Alister McGrath, 21-22. Oxford; Cambridge, MA: Black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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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가 읽은 주의 기도, 사도 신조   

다산글방, 2000.칼 바르트 저, 최영 옮김

류장현 Dr.the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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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바르트(1886-1968)는 개신교와 카톨릭 교회가 다같이 인정하는 종교개혁 이후 가장 탁월한 복음주의 신학자이며 "말씀의 목회자"이다. 그는 자펜빌 시절에 블룸하르트(Chr. Blumhardt), 쿠터(H. Kutter), 라가츠(L. Ragaz)를 통하여 복음의 현실성을 깊이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종교 사회주의자로서 인간의 삶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후 바르트의 신학적 사상은 위기의 신학과 변증법적 신학의 발전 과정을 거쳐서 말씀의 신학으로 집대성된다. 그의 신학적 공헌은 정통주의와 자유주의 신학, 또는 '종교적 개인주의'와 '역사적 상대주의'를 통하여 상실된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성서에서 재발견하여 복음의 토대를 다시 세웠다는데 있다. 따라서 바르트의 신학은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신학이 아니라 맘몬과 죽임의 문화의 급류 속에서 표류하는 현대 기독교에게 아직도 풍성한 신학적 영감을 준다.

   바르트의 신학은 5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하였지만 그의 신학이 제대로 소개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최근에 바르트 좌파의 이론이 소개되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기는 했지만 그의 방대한 신학 체제를 한 눈에 이해할 수 있는 저서는 아직도 없는 형편이다. 또한 평범한 사람들이 바르트의 신학에 접근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의 신학이 방대하고 깊기 때문이다. 그의 신학을 집대성한 "교회 교의학"만 해도 너무 크고 심오하여 전문가가 아니고는 접근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바르트의 신학을 연구했고, 그의 저작들을 번역해 온 최영 박사에 의해서『칼 바르트가 읽은 주의 기도, 사도 신조』가 번역되어 출간된 것은 바르트의 신학을 연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큰 기쁨이다.

   이 책은 바르트의 두 편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작품은 '주의 기도'에 대한 해설이고, 두 번째 작품은 '사도 신조'에 대한 해설이다. 두 작품 모두 칼빈의 신앙 문답서에 따르는 주의 기도와 사도 신조에 대한 해설로서 스위스 뉘샤텔에서 목회자를 대상으로 열었던 세미나의 강의 내용을 정리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르트는 이 책에서 옮긴이의 말처럼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적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주의 기도와 사도 신조 그리고 사도 신조에 따른 신앙 문답에 대한 개혁자들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신학적 성찰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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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기도'는 종교개혁의 신앙 문답서에 따르는 바르트의 기도에 대한 해설이다. 바르트는 여기서 기도에 대한 정의, 기도의 방법,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종교 개혁자들의 기도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받아들이면서도(P.13-15) 그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그들은 "개인적인 기도"와 "공적인 기도," "명백한 기도"와 "암시적인 기도"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았으며, 기도의 방법을 말하지 않았다(P.15.17). 따라서 바르트는 "일반적인 기도의 문제," "하나님의 은사로서의 기도," "인간의 행위로서의 기도"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기도에 관하여 새롭게 고찰한다.

   기도는 우리의 내적인 생명의 문제와 이 세상 안에 있는 우리의 외적인 생명의 문제, 즉 "삶의 절박한 요구들"(P.23)과 관련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요청이다. 기도는 "그 분께 우리에게 부족한 것-힘, 능력, 용기, 평안, 신중함-을 주시라고 요청하고, 우리가 율법을 복종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라고 요청하는 것을 의미한다"(P.21). 기도는 또한 이 요청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서 하나님의 "은총"이고, 하나님의 "선물"이다(P.23). 기도는 우리가 요청한 것을 얻는다는 이 확신에 근거한다(P.24). 그것의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가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P.30).

   바르트는 인간의 행위로서의 기도는 그 안에 감정이 개입되는 어떤 행위라고 정의한다. 기도는 의미 없는 잡담이나 의례적인 빈말, 입술로만 하는 중언부언이 아니다(P.31). 기도는 신앙과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게 한다(P.33).

   기도의 방법과 관련해서 바르트는 '주의 기도'를 기도의 모범으로 제시한다. 예수께서 기도하는 올바른 법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주의 기도에서 우리에게 기도의 모범을 보여 주셨다(P.28). 주의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도이다. 바르트는 주의 기도 앞에 세 가지 기원과 뒤에 세 가지 기원을 구별한다(P.39). 앞에 세 가지 기원은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되어 있으며, 주의 기도의 출발점으로서(P.39) 나머지 세 가지 기원의 "자유, 기쁨, 활발, 그리고 확실성"의 확고한 근거이다(P.40). 마지막 세 가지 기원은 직접적으로 '우리'와 관계가 있다. 그 기원은 "우리에게 주시고"라는 청원과 함께 시작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일용할 양식, 곧 "하나님의 영원한 은총에 대한 지상적인 표상"인 영적인 양식과 일상 생활에 필요한 모든 육적인 양식을 요청하며(P.66), 채무의 탕감과 악, 곧 "종말론적 유혹"으로부터의 구원을 간구한다(P.80-81).

    마지막으로 바르트는 기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우리는 "기도할 이유가 있다!"(P.79. 86).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에게 우리의 일에 관여해 달라고 루터가 말한 것처럼 대담하게, 뻔뻔스럽게, 성가시게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기 때문이다(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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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신앙고백'은 칼빈의 신앙요리문답서에 따르는 바르트의 사도 신조에 대한 해설이다. 바르트는 사도 신조를 크게 세 조항, 곧 아버지이신 하나님, 아들이신 그리스도, 성령과 교회로 나눈다. 그러나 그것은 삼위일체론적 구분은 아니다(P.110). 바르트는 사도 신조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관련시킨다.

   첫 번째 조항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 하나님의 전능과 세상의 창조,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의 개념 그리고 악이 지배하는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주권과 그것의 관계를 설명하며, 두 번째 조항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칭호의 신학적 의미, 하나님의 독생자와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 화육, 비하, 고양(성육신, 십자가, 부활과 승천)의 교리를 설명하며, 세 번째 조항은 성령과 교회, 죄의 용서, 몸의 부활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설명한다. 간단히 말해서, 첫 번째 조항이 하나님 자신과 그의 창조적 활동에 대하여 말한다면, 세 번째 조항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인간과 함께, 인간 안에서, 인간과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P.122). 두 번째 조항은 우리에게 "하나님 그 자신이 인간이다"를 말하며 첫 번째와 세 번째 조항에서 명시된 이 하나님-인간 관계의 중심점을 형성한다. 그것은 사도 신조 전체의 내용이다. 그것으로부터 첫 번째와 세 번째 조항이 해석되어야 한다. "첫 번째 조항은 단지 이 두 번째 조항의 전제일 뿐이고 세 번째 조항은 그것의 결과이다"(P.122). 이러한 해석은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론적 신학을 반영하고 있다.

   바르트는 특히 두 번째 조항에서 그리스도의 존재(또는 인격)와 사역의 동일성을 강조한다. "사도 신경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그의 행위를 통하여 드러난다...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삶, 죽음, 부활에 관하여 말해지는 모든 것은 단순히 그는 왕, 제사장, 성령의 예언자이심을 반복하고 설명할 뿐이다"(P.139). 예수의 존재는 그의 사역을 통해서 해석되어야 하며, 그것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어떤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인가? 어떻게 그는 그리스도인가? 라는 기독론의 핵심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 즉 하나님의 아들의 화육, 비하와 고양, 다시 말해서 그의 성육신,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통하여 설명한다. 그리고 그와 관련해서 바르트는 예수 탄생의 기적, 십자가, 부활, 승천, 다시 오심과 심판에 대하여 자세히 말한다(P.148이하). 이러한 바르트의 이해는 칼빈의 견해를 충실히 수용한 것이다(P.125-126). 우리는 바르트의 "밑으로부터의" 기독론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우리는 세 번째 조항인 성령과 교회에서 바르트의 교회주의와 성직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의 소리를 듣는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승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지만 아직 영광스럽게 표명되지 않은 중간 시대에 그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P.211-212). 그러므로 교회는 장차 올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현재적인 통치에 의해서 상대화된다(P.214). 바르트는 또한 목사는 "타오르는 검을 지닌 하나님의 천사라고 생각하지 말라!" 목사는 단지 복된 소식을 전파하도록 허락 받은 단순한 목사일 뿐이다. 목사 이외에 "다른 천사들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라!"(P.215)고 경고한다. 교회의 주도권은 사도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도로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따라서 교회의 정체는 "인간의 주도권"과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주님께 순종하는 행위"와 "성서에 복종"하는데 있다(P.217-218). 그러나 바르트는 교회의 과업을 "복음의 통치"에 제한시킨다. "인간 사회를 개량하고 이런 목적을 위해 계획하거나 시도하는 것은 교회의 방침이 아니다." 교회의 과업은 "사람들을 부르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현재하심과 통치를 상기시켜 주고, 사람은 그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다"(P.218). 그것이 바로 바르트와 라가츠의 교회에 대한 이해의 차이이다. 우리는 여기서 쿠터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

   끝으로 바르트는 죄의 용서, 몸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 등 개인적(또는 인격적) 종말론의 중요한 주제들을 철저하게 기독론적으로 해석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관계하고 있는 인간의 삶의 모습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죄의 용서, 몸의 부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죄의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빛에 비추어 고찰한 인간의 생명"을, 몸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에 비추어 고찰한 인간의 생명"을, 그리고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의 고양, 하나님 우편에서의 그의 통치의 빛에서 고찰한 인간의 생명"을 의미한다(P.222). 그것은 서로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동일한 사건의 서로 다른 표현일 뿐이다. "죄의 용서에 의해 의롭게 되고, 몸의 부활에 의해 거룩하게 된, 인간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에 의해서 영화롭게 된다"(P.243). 몰트만은 이러한 바르트의 견해를 성령론적 관점에서 더욱 발전시킨다(생명의 영, P.169-243).

   4.

   위에서 언급된 바르트의 주의 기도와 사도 신조에 대한 해설은 니케아 회의(325년)에서 칼케돈 회의(451년)를 지나서 종교 개혁자들에게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신학에 깊이 뿌리 박고 있으며, 또한 그 한계를 넘어선 그 자신의 독자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바르트가 이 해설서에서 적극적으로 설명하지 못한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바르트는 주의 기도의 핵심이 두 번째 기원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았으며, 또한 사도 신조에 예수의 선포와 행위의 중심 내용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앙 고백이 빠져 있는 이유를 지적하지 않았다. 그것은 주의 기도와 사도 신조에 대한 바르트의 '기독론적 해석'의 필연적 귀결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목적과 목표, 최후의 심판과 죽은 사람의 부활은 이미 성취되었다(P.51). "그것은 단지 기다려야만 하는 사건이 아니라 이미 우리 뒤에 있는 사건이다"(P.52). 또한 인간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약속을 믿고 기도하는 일이다. 그 나라의 도래는 우리에게 기도의 대상이다"(P.50). 이러한 바르트의 신학적 입장은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Erf llung)되었지만 아직 '완성'(Vollendung)된 것이 아니라는 종말론적 성격이 문제시 된다. 그러나 성서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그 나라는 이제 새로운 약속으로 완성을 향하여 하나님의 방식에 따라서 발전하고 성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상속자'와 '동역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일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과 공동체에게 주신 명령과 위임이다(마10:5-15. 16:18-19. 벧후3:8-13). 하나님은 그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인간'을 필요로 하신다.

   바르트는 또한 성령의 은사(방언, 치유 등등)의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성령의 소유를 인정하는 조건이 아님을 지적한다. 그리고 복음의 실체는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복음의 실체와 성령의 은사 사이에 상호 관계를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가 결국 십자가와 부활에 종속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십자가와 부활은 "빵"이고, 성령의 은사는 단지 후식으로만 먹는 "과자"일 뿐이다(P.204-205). 또한 성령의 통치는 부활과 다시 오심 사이에 있는 그리스도의 통치로 대치되며(P.203), 죄의 용서, 몸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또는 칭의, 중생)은 철저하게 십자가와 부활의 관점에서만 해석된다. 그러나 성서에 의하면 성령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에 깊이 개입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우리를 위한"(f r uns) 그리고 "우리와 함께"(mit uns)하는 구속의 사건이 되게 한다. 성령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현실화하고, 그리스도의 사역(선포와 행위)을 가능하게 하는 '대리자와 인도자'(Paraklet)이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는 십자가와 부활이 역사 속에서 빵이 되게 하는 '누룩'과 같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부활의 주체"와 "승리자"로 나타냈다. 그리고 그의 승리가 "우리 신앙의 토대"이다(P.177).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시고, 승리자로 만드신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고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승리자로 만드신 바로 이 살아계신 하나님에 근거하는 것(요5:24. 8:54, 행2:32-33. 36, 롬4:24, 고후13:4, 엡1:20-21, 골2:12, 딤전4:10)이라는 증언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문제는 E. 융엘이 말한 것처럼 서구 신학이 극복해야 할 과제이며, 또한 바르트의 신학이 넘어야 할 큰 장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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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트가 이 해설서에서 적극적으로 설명하지 못한 이 문제들은 그의 다른 저작들을 통하여 해명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의 주의 기도와 사도 신조에 대한 해설은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올바른 신앙 고백이란 무엇인가? 라는 목회 현장과 신앙 생활에서 생기는 근본 문제에 명쾌하게 대답한다. 독자들은 또 이 책에서 방대한 바르트의 신학의 핵심들을 매우 쉽고, 평이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책을 깔끔하게 번역하여 소개한 최영 박사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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