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의 유혹 - 가장 과학적으로 세상을 해석하려는 욕망
데이비드 슬론 윌슨 지음, 김영희 외 옮김 / 북스토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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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세상의 기원에 대해서 말하라고 한다면, 이제는 일반인들도 대강의 내용을 알고 있는 빅뱅이론에 입각한 설명을 하거나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대답을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말한다면 아마도 창조론자들과 진화론자들의 첨예한 대립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과학의 입장에서는 빅뱅과 진화론에 힘을 실어주겠지만, 분명 종교적인 입장에 선 사람들은 신에 의해 창조된 세상과 생명에 대한 신념을 포기할려고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창조의 틀안에서 진화론을 수용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겠고, 창조론과 진화론을 서로 다른 영역에 국한시켜 서로의 갈등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두 신념 모두를 편리하게 사용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아직까지 대세는 진화론과 창조론, 과학과 종교의 냉랭한 대립이지 않을까 합니다. 

 다윈 이후에 등장한 진화론은 분명 사람들에게 눈앞에 존재하는 세상을 이해하고 알 수 있는 훌륭한 도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현재 존재하는 인간을 비롯한 여러 생물들이 지금의 특징을 지니게 된 이유들, 여러 자연재해를 비롯한 어려움 속에서도 지금까지 살아남게 된 이유들에 대해서 보다 실제적인 대답을 해 주었고, 그런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고유한 특성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도 제공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는 장점에 취해, 어느 순간부터인가 진화론이라는 도식속에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 또는 자만이 나타나면서 기존의 진화론이 가지는 장점이 경직된 이론이 되고 부족한 부분을 메꾸지 못하면서 이런 저런 부족한 면들이 부각되기도 합니다.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는 기존의 생명탄생 과정에서 현재의 인간에 이르기까지 단선적으로 그 틀을 완성하여 진화의 과정을 설명하고자 하는 욕심이 결국은 수많은 연결부분이 아직까지 화석이나 다른 어떤 증거로 증명되지 못한, 빠진 고리에 대한 지적으로 이어지고, 한편으로는 현재까지 진화하지 못하고 살아남아 있는 원시생물들의 존재에 대한 힐난도 있습니다. 또한 지적설계론을 내세운 종교의 반격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화론은 이 세상을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주는 보편적인 원리라기 보다는 단순히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 하나의 뛰어난 이론적인 가설에 불가할 뿐인 것일까요...... 아마도 여기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세상의 실체를 이해하고 설명해 줄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 원리로서 진화론의 매력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어떤 존재의 의미나 특징을,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신에 의지해 모든 것을 설명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종교적인 입장도 아니고, 눈앞의 실체를 부분으로 분해하여 설명한 뒤 그 모든 것의 합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과학적인 관점도 아닌, 그 존재가 자신이 속한 환경에서 생존하고 번식할 수 있는 고유한 특징을 부여받아서 선택받고 살아남았다는 제3의 사고방식을 열어주었다는 것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고, 그러한 자연선택의 관점을 단순히 생물의 진화에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구조, 종교 등으로까지 확대하고 있습니다. 즉 기존의 진화론자들의 단순히 생명체에 국한된 진화론의 적용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고, 진화론이 생물학에만 적용되는 이론이 아니라 인문학적인 부분에 이르기까지 훨씬 더 보편적으로 적용하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부분이 저자가 말하는 진화론이 지닌 깊은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진화론이 단순히 생물학적인 이론일 뿐이거나, 과학자들만이 그들의 실험실 안에서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 머리를 싸매고 이해하려고 하는 과학이론일 뿐이거나, 종교와 신을 내몰고 유물론적인 사상을 세상에 뿌리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라고 폄하할 수 없는,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매력적인 사고 방식으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책의 두께만큼이나 다양한 진화론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책은 단순히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시작되어 지금의 과학 교과서나 잡지에 실린 생물학적인 내용만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진화론이 사람과 생명체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와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간단명료한 설명을 들려줄 수 있는, 또한 생물학뿐만 아니라 심리학과 정치학, 종교와 기타 인문학적인 사고들을 통합할 수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는, 우리 일상의 많은 것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안목과 통찰력을 제공해 주는 매력적인 사고방식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고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고 방식은 열심이 연구하고 책을 읽고 실험실에서 날을 새워야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조금만 주의하여 살피고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하고 알 수 있는 것들이라는 사실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세상을 이해하는 매력적인 사고방식으로서의 진화론..... 마음을 열고 저자의 주장에 귀기울여 볼만한 유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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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책들의 도시 - 전2권 세트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 들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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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찾다가 '너무 지루하다' 며 이 책에 별점 두개를 준 분의 글이 눈에 띄였습니다. '너무 지루하다.' 상당히 수긍이 가는 평가입니다. 단 한가지 단서를 먼저 달아준다면 말입니다. 추리소설이나 판타지 소설 보다는 좀더 실용적인 내용들을 더 좋아하는 성향인 연유로 마지막의 결말을 기대하며 차분히 읽어나가기 보다는 읽으면서 무언가 내용에 서로 연결되는 실마리가 있는 책들에 익숙해진 이유가 크기는 하겠지만..... 아무튼 1권을 마치고 2권 중간정도까지 읽으면서는, 도대체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건지 모르겠고, 주인공을 따라 암호를 푸는 듯이 또는 목적없이 좌충우돌하며 실타래가 꼬이듯이 혼란스럽게 진행되는 이야기들은 읽는 내내 그냥 덮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시시때때로 의식의 표면에 새기곤 하였습니다. 분명 앞에 언급한 분의 평가처럼 '지루해서였겠지요.....'  작가의 다양하고 기발한 상상력에서 나오는 여러 등장인물과 지명, 장치들에도 불구하고 분명 전체적인 윤곽이 그려지고 이해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하는 대목까지 이 책은 분명 상당히 따분하고 지루한 이야기들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장을 넘기고 내용을 다시금 음미할 수 있는 지금, 이 책을 '너무 지루했다'고만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다른 면모가 이 속에 숨겨져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주인공이 자신의 대부인 단첼로트 대부가 죽고나서, 자신과 단첼로트 대부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을 감동시킨 글을 가지고 책들의 도시 부흐하임으로 떠나는 과정과 부흐하임에서 그 글로 인해서 위험인물로 찍히고 결국은 지하묘지로까지 추방되는 과정과 지하에서 겪는 여러가지 모험과 위험과 고통 등은 결국 주인공이 그림자 제왕 (호문콜로스)를 만나 그 글의 작가에게 발생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고, 부흐하임의 권력분포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기까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와 같은 사건들과 이야기들의 연속일 뿐이지만, 그 이후로는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오름'을 느끼게 만드는 숨가쁘게 진행되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조금더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독자라면 처음부터 펼쳐지는 작가의 상상의 세계에 푹빠질 수도 있겠고, 좀더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추구하는 독자라면 내내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이 못마땅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 많은 사람들에게는 마지막 장까지 읽어낼 만한 여유와 인내만 가지고 있다면 작가가 선사하는 반전과 희열 속에서 '오름'의 한줄기 빛을 느낄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루해서 마지막까지 읽지 못한다면.....' 이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한가지 단서입니다.

 작가의 상상속에서 만들어진 책들이 도시인 지상의 부흐하임, 그리고 도시의 밑에 지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야기보다 더 깊고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는 지하묘지, 그 지하묘지를 휘젓고 다니는 책사냥꾼들, 그림자 제왕과 갖가지 괴물들과 생물체들, 한 작가의 책을 평생 읽고 외워내는 외눈박이 부흐링 족, 살아있는 책이나 거인족, 그리고 지하세계의 여러 기묘한 장소나 장치들은 책을 다읽고 나서, 다시금 음미하게 되는 지금에야 더 깊은 맛이 느껴지는 듯 합니다. 낯설고 기묘했던 것들과 존재들이 책장을 덮고 난 지금 이리 더 친숙하게 느껴지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책읽는 사람들에게 흥미롭고 관심이 가는 것은 '오름'에 대한 것일 듯 합니다. 저자가 이 책속에서 말하는 '오름'이란 것이 책을 쓰는 이들이나 그 책을 읽는 이들이나 책을 통해서 찾고자 또는 얻고자 하는 그 무엇이 될 테니 말입니다. '당신에게 '오름'을 선사한 책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이해하고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또한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도 '오름'을 선사해 주는 책을 찾아 나선 많은 책읽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책읽기 속에 담긴 선명한 판타지를 하나를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는 꿈꾸는 책들의 도시 부흐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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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로운 꿀벌의 세계 - 초개체 생태학
위르겐 타우츠 지음, 헬가 R. 하일만 사진, 최재천 감수, 유영미 옮김 / 이치사이언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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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번식을 한 개체군으로 개미들을 꼽는 텔리비젼 프로그램을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고는 하지만, 무서운 번식력으로 세상의 곳곳에 뿌리를 내린 개미들은 어떤 면에서는 사람들보다 세상의 더 많은 부분을 지배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고, 그러한 개미들의 성공을 집단을 이루어 사회생활을 하는 개미들의 특성에서 찾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개미들과 더불어 우리에게 집단생활의 경이로움을 보여주는 개체군으로 꿀벌들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개체로서의 존재는 보잘것 없어 보이지만 그들이 군락을 이루어 한 사회를 건설하고 유기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그 사회를 유지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이는 집단지능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초개체라는 개념으로 그러한 집단들의 특징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꿀벌이나 개미는 각각 별개의 생명을 지닌 개체이지만, 하나의 집단을 통틀어 보았을때는 언제나 그 집단 군락 전체가 하나의 개체처럼 행동한다는 개념입니다. 실제로 개미나 꿀벌의 사회생활을 살펴보면 전체 군락으로서의 집단이 각각의 개체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 훨씬 더 복잡하고 경이로운 성취를 이루어내고 있음을 알수 있고, 아마도 그러한 성공적인 초개체로서의 발전 -또는 진화-이 지금이 개미나 꿀벌 왕국을 이룰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이러한 꿀벌의 초개체로서의 특징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기술하고 있을 뿐 아니라, 더 획기적으로 꿀벌군락을 척추동물을 뛰어넘어 포유동물의 특성까지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생각한다면 포유동물과 꿀벌집단을 연결시킬 수 없지만, 저자는 세밀한 관찰과 연구 결과들을 통해 서로 비슷한 점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습니다. 먼저, 포유동물의 번식률이 극단적으로 낮듯이, 꿀벌집단의 번식률도 매우 낮다는 점, 포유동물의 암컷이 자손을 양육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젖을 분비하듯이, 암컷인 일벌도 로열젤리(왕유)를 분비한다는 점, 포유동물이 자궁이라는 기관을 통해서 자손에게 최적의 양육환경을 제공하듯이 꿀벌도 벌집이라는 사회적 자궁을 통해서 유충을 안전하게 양육한다는 점, 포유동물의 체온이 섭씨36도이듯이 꿀벌 유충의 체온은 섭씨35도로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점, 그리고 포유동물이 큰 두뇌로 척추동물 중 가장 뛰어난 학습능력과 인지능력을 지니게 된 것처럼 꿀벌의 학습능력과 인지능력이 단순한 척추동물을 뛰어 넘는 정도라는 점 등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표면적 유사점보다 더 중요한 점으로, 환경에 최적으로 적응하기 위해 '어떻게 기능 하는지' 에 대한 공통적인 특성을 들고 있는데, 능동적인 비축경제 활동과 안전한 생활 공간의 조성 및 환경을 능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서 변덕스러운 주변 환경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생활하고 자손을 번식하고 세대를 이어갈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저자가 주장하는 포유동물로 간주될 만한 꿀벌집단에 대한 경이로움이나 초개체로서의 특징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책이 보여주는 꿀벌들의 삶 자체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들은 읽는 이로 수많은 호기심을 자아내게 합니다. 개개 꿀벌의 진화를 통한 여왕벌을 중심으로 한 초개체로서 탄생과정, 꽃과 꿀벌간의 공존을 위한 생존전략과 상호작용, 꿀벌 상호간의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춤)와 꽃을 찾아나서는 꿀벌의 시각과 후각의 역할 및 학습능력, 짝짓기와 새로운 개체-일벌, 수벌, 여왕벌-의 탄생과 분봉과정, 벌집의 구조가 담고 있는 다양한 기능적인 의미, 분업화된 다양한 꿀벌들의 직업과 나이에 따른 직업의 변화 및 유연성, 유충의 부화를 위해 정밀하게 유충방이 난방되고 온도에 따른 양육환경의 차이에 의해 나타나는 꿀벌들의 수명이나 학습능력의 차이, 꿀벌이 서로 협동하는 이유에 대한 유전학적인 고찰, 그리고 질병이나 온도변화, 저장꿀의 많고 적음 등 여러 변화에 꿀벌집단이 대응하는 방식 등에 대한 이야기들은 개개의 꿀벌을 넘어서 훨씬 복잡하고 유기적으로 유지되는 꿀벌집단의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가지게 합니다.  

 초개체로서의 꿀벌집단에 대한 이해는 개인적으로는 무척이나 흥미로왔고, 또한 주변을 살피는 시야를 많이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개개의 꿀벌이 모여서 이룬 집단이 하나의 생명체처럼 유기적으로 작용하며 살아가는 모습에서 우리 개개인이 한 생명체로서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생물학적인 과정을 거치는 모습을 새로운 시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그 너머의 우리 주변의 환경들도 결국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나름대로의 균형과 조화을 통해 하나의 지구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개념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새로운 이해도 생겼으니 말입니다..... 꿀벌세계에 대한 여행만으로도 즐거웠던 시간이었고, 그에 덤으로 세상을 좀더 넓게 보고 생각할 만한 지혜 한조각도 얻을 수 있었던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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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철학자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김모세.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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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대심문관)은 죄수(예수)가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쓰리고 무서운 말이라도 상관없었다. 갑자기 죄수는 침묵 속에서 노인에게 다가와서는 그의 핏기 없는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것이 그의 대답이었던 것이다. 노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입술도 떨리고 있었다. 노인은 문으로 다가가 그것을 열어젖히고는 말했다. "가버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마... 다시는 말이야!" 그리고 그는 죄수가 도시의 어둠 속으로 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대심문관 편에 나오는 이 장면은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당한 이후 현재까지 여전히 그 분을 십자가상에 다시 못박히게 만드는 종교인들의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2000여년전 그의 가르침에 열광했던 군중들은 종교지도자들의 선동(?)에 휩쓸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고, 메시야를 그리도 갈망했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냉정하게 그를 십자가상으로 보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하지만 더 아이러니 한 것은 그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고백하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신자들마저도 2000여년 동안 당시의 유대인인이나 종교지도자들이 행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대심문관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지 않을는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카톨릭이나 기독교의 모든 모습이 그러하다고 할수는 없겠지만, 결국 종교화 되고 의식화 되어버린 종교는 또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잘못을 반복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듯 합니다.

 신의 이름으로 종교재판이 행해지고 박해가 이루어지는 곳에 나타난 예수님을 감옥에 가둔 노회한 대심문관은 눈앞의 예수님을 영접하고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일을 방해하는 훼방꾼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예수님이 깨우치고자 하는 사람들이란 예수님이 가르친 자유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보다는 기적과 권위와 신비로 포장된 교회가 제공하는 평안에 몸을 맡기고 기꺼이 자유를 저당잡히고자 하는 존재들일 뿐이며, 그들을 위해 자신들이 만들어낸 교회라는 제도 속에서 제공되는 안전이, 사람들에게 자유로움에 대한 꿈과 함께 두려움이라는 짐마저 함께 지도록 만드는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훨씬 정당하고 적절하게 어울린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쳤던 그러한 자유보다는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기적과 신비, 권위라는 근간위에 세워진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양도하고 그 안에서 오히려 평안함을 느끼는 군중들과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인도하지만, 결국은 껍데기만 남은 종교가 진짜 예수님을 거부하는 모습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힐난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현재의 종교인들에게도 유효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책의 마지막에 저자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우물가에서의 만남을 소개합니다. 프롤로그의 대심문관이 말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그리고 사람들을 그리도 당혹스럽게 했던 예수님이 가르치고자했던 자유가 무엇인지를 좀더 명확하게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저자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준 첫번째 가르침은 사랑에 관한 것이고, 두번째 가르침은 영적인 삶의 내재화와 인식의 자유에 관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인의 결혼생활에 대한 언급과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님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냈다는 것으로 연결되며. 결국 예수님이 '인간의 마음속 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자의 사랑을 주러 온 자' 즉 그리스도라는 점진적인 드러냄을 통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이 세상에 베풀어주시는 사랑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리심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올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서는 종교적인 편견위에 자리잡은 신성한 장소, 과거에 얽매인 종교적인 시간, 성스러운 것과 불순한 것의 종교적인 구분, 그리고 하나님을 자신의 민족만을 위하는 신으로 이해하는 시각에 대한 전복을 통해서, 기존의 종교가 가지고 있던 형식적이고 외적인 것들에 대한 기득권을 해체하고 영적인 삶과 내적인 자유에 대한 깨우침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하는 자유란 '...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유, 너무나 쉽게 충동에 휩쓸리게 하는 자유, 타인들을 지배할 수 있는 그런 헛된 자유가 아니라.... 우리를 타인들에 대해 실제적으로 자율적이며 책임을 갖도록 만드는 내적인 자유이고.... 이러한 자유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충만하게 실현되며.... 이 관계가 인간을 예속하는 것이 아닌....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고, '바로 진리가 즉,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나아가 그리스도가 자유롭게 한다' 것과 연관지어 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프롤로그의 대심문관 이야기와 에필로그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속에 담긴 예수님의 가르침 사이의 간극에 대한 이야기가 책의 그 사이를 채우고 있습니다. 역사속에 기록된 예수, 평등과 개인의 자유, 여성의 해방, 사회정의, 비폭력과 용서 등을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윤리와 예수님의 영성에 대한 고찰, 예수의 가르침이 하나의 종교로서 확립되어가는 과정, 박해받던 교회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중세의 막강한 권력에 취해가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껍데기만 남기고 배반했던 사실들, 그리고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시작된 휴머니즘을 통한 그리스도의 정신의 부활, 탈종교화를 걷는 휴머니즘과 근대화의 과정 속에 형식은 지워졌지만 여러가지 형태의 내용으로 남아 있는 그리스도의 흔적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자가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대심문관 이야기와 명백히 대조되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속에 담겨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명확한 자각일 듯 합니다. 단지 종교화된 형식과 마음으로 후딱 읽어 치우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행간에 담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깨우침, 즉 그리스도의 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가르침에 대한 각성과 그러한 처음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린 마음에 대한 이야기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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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인간의 경제학 - 경제 행위 뒤에 숨겨진 인간의 심리 탐구
이준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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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극히 합리적이기에 또한 지극히 이기적이기도 한 '호모 이코노미쿠스 (경제적 인간)'는 기존의 경제학이 설정한 이상적인 인간상입니다. 그것이 이상적인 모습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통 경제학은 그런 인간상을 설정하여 모든 경제현상을 설명하고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지극히 소시민적인 눈으로 보더라도 우리 자신의 모습은 그러한 이상적인 인간상과는 거리가 멀고, 지극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경제학자들의 여러가지 가설과 설명들은 현실을 빗나가기 일쑤입니다. 이상적인 호모 이코노미쿠스와 현실의 인간 호모 사피엔스와의 간극에서 비롯된 차이가 그 이유의 하나이겠지만, 여전히 정통 경제학은 인간 행동에 담긴 비합리성을 설명해 내지는 못하거나 또는 그러한 비합리성을 고려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듯 합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현실의 인간과 이상적인 호모 이코노미쿠스 사이의 간극을 설명해 주는 이야기들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행동 경제학'이라는 제목으로 또는 그러한 내용을 담았다는 설명을 통해 시선을 끈 책들인데, 이 책에서는 '행태 경제학'이라는 용어로 소개되었고, 영어로는 모두 Behavioral economics이니 서로 다를 바 없는 동일한 개념입니다.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고 시간이 지나면 용어가 정리되겠지만, 서로 혼용되고 있는 이런 부분을 생각하면 다소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면도 있습니다. 

 행태 경제학의 특징이라면 무엇보다도 기존의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지향하는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상을 포기하고, 인간의 행동속에 담긴 비합리성, 또는 심리적인 요인들에 대한 고려를 담고 있다는 사실일 듯 합니다. 즉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반드시 이득을 좇아 합리적이고 이기적으로 판단할 지 모르지만 현실의 인간은 때로는 감정적으로 때로는 직관을 따라 그리고 때로는 공정성이나 대의명분을 따라 판단을 달리하기도 하고 지극히 비합리적으로 행동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러한 행위의 본질을 찾아 나선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심리학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하는 여러 실험결과들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하기에 행태 경제학이 말하는 여러 사실들 속에서 훨씬 우리의 모습과 닮은 친근한 인간상을 접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 책의 제목이 말하는 '36.5℃ 인간의 경제학'이라는 표현이 뜻하는 바일 것입니다. 

 나의 기억으로는 기존의 행태(동) 경제학에 대한 소개서들은 거의 모두가 외국사람에 의해 씌여진 책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자기 나름의 연구결과를 행태 경제학과 연관시켜 풀어낸 것도 있었지만,  대개가 기존의 행태 경제학의 연구 결과물들을 이 책처럼 나름대로 정리하여 소개하는 책들이었던 듯 합니다. 그래서 서로 겹치는 내용들도 상당하였고, 읽다보면 '어디서 본 듯한 내용인데'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들도 있었는데, 아마도 이 분야의 역사가 길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책 역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경제학자인 저자가 집필하기는 한 것이지만, 자신의 연구내용이 아닌 기존의 생태 경제학에 대한 소개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의 말처럼 자신도 이 분야에 정통하지 못하고 아직도 배워가고 있는 단계라는 의미에서 함께 읽고 관심을 가지자는 초대장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경제학자가 많은 사람들에게 인간의 모습을 지닌 경제학을 직접 소개하고 또한 그 안에서 더 나은 답을 찾아가고자 하는 첫 발걸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행태 경제학이 말하는 휴리스틱, 닻내림효과, 부존효과. 틀짜기효과, 심적회계, 공정성에 대한 인간의 태도 등을 읽다보면 정말로 우리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게 되곤 합니다. 그래서 처음 행태경제학에 대한 내용들을 접하면서는 합리성을 고집하는 정통 경제학의 도도함에 대한 시원스런 물세례를 넘어선 도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행태 경제학에 의해 더 많은 인간의 비합리적인 경제성향이 지적될수록 아마도 정통경제학은 그리 알려진 비합리성을 인정하고 통합하기보다는, 그러한 비합리성을 합리적으로 제거한 더 합리적인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창조할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그러한 모습이 과학 또는 학문이 추구하는 바가 아닐는지.....  하지만 지금은 시작이니, 아직은 사람의 체온을 느끼게 만드는 따끈하게 데워진 인간의 경제학을 즐길때입니다. 미래의 언젠가는 이러한 따뜻함마저 과학과 경제학과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제거되어버릴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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