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루덴스 - 놀이하는 인간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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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시대보다 더 행복했던 시대에 인류는 자기 자신을 가르켜 감히 "Homo Sapiens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라고 불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인류는 합리주의와 순수 낙관론을 숭상했던 18세기 사람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그리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게 밝혀졌고,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인류를 "Homo Faber (물건을 만들어내는 인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비록 인류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faber(물건을 만들어내는)라는 말이 sapiens(생각하는)라는 말보다 한결 명확하지만, 많은 동물들도 물건을 만들어낸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말 역시 부적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인간과 동물에게 동시에 적용되면서 생각하기와 만들어내기처럼 중요한 제3의 기능이 있으니, 곧 놀이하기이다. 그리하여 나는 호모 파베를 바로 옆에,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와 같은 수준으로, "Homo Ludens(놀이하는 인간)"를 인류 지칭 용어의 리스트에 등재시키고자 한다. - <들어가는 말>에서 

 서문의 '우리 인류의 문명이 놀이 속에서(in play), 그리고 놀이로서(as play) 생겨나고 발전했다는 확신속에서 이 주제에 대한 탐구를 통해 놀이 개념을 문화의 개념과 통합시키려고 했다'는 저자의 언급에 이 책의 분명한 목적 또는 주제가 드러나 있는 듯 합니다. 호모 사피엔스나 호모 파베르를 통해서 인간이 스스로를 다른 동물들과는 따로이 구분되는 자신의 존재감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처럼, 저자는 놀이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행위 속에서 시작된 문화의 싹이 자라서 한 집단의 문화로, 그리고 크게는 한 지역이나 국가의 문화와 문명체계로 발전하여 가는 것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나 호모 파베르보다는 호모 루덴스가 더 인간을 인간답게 표현하고 나타내는 용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저자가 이 책을 쓰던 시기에 비해 호모 루덴스라는 말과 개념이 훨씬 알려지고 수긍을 얻는 용어가 되었지만, 적어도 저자가 이 책을 처음 써낸 1938년에는 어떤 연구들의 성과물이나 여러 사람들과의 토의를 통한 의견의 접근을 본 보편적인 개념이라기 보다는 오로지 저자인 하위징아 자신의 역사적인 접근방법을 바탕으로 한 탐구를 통해서 제시되고 세상에 알려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결국 저자의 주장에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가, 역사적으로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실례가 존재하는가에 의해서 호모 루덴스라는 새로운 용어의 타당성이 주어지겠지요.  

 저자는 자신의 호모 루덴스라는 개념을 일반적인 인간 문명 또는 문화의 특성으로 주장하기 위해서 놀이에 대한 의미를 정립하는데서 부터 글을 시작하는데, '놀이는 특정 시간과 공간 내에서 벌어지는 자발적인 행동 혹은 몰입행위로서, 자유롭게 받아들여진 규칙을 따르되 그 규칙의 적용은 아주 엄격하며, 놀이 그 자체에 목적이 있고 '일상생활'과는 다른 긴장, 즐거움, 의식을 수반한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에 입각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발견되는 놀이의 개념이나 놀이에 기원을 둔 모습들을 파악해 냅니다. 여러 언어속에서 발견되는 놀이개념, 놀이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경기, 법률과 소송에 담겨있는 놀이의 특성, 전쟁과 놀이의 유사성, 인식의 수단으로서의 놀이, 시와 신화와 철학과 예술에서 발견되는 놀이의 형태 등 우리 문화의 다양한 면들에 숨겨져 있는 놀이의 원형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서양 문명이나 현대 문명에서 발견되는 놀이의 요소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결국 현대에 가까울수록 문화속에 담긴 놀이의 요소가 제거되고 놀이 아님(진지함)의 영역으로 정착되었버린 측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진지함이 우리가 쉽게 저자가 말하는 놀이개념을 우리의 삶속에서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겠고, 한편으로는 놀이라는 개념을 은연중에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유치함으로 치부해버리는 경솔함이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호모 루덴스라는 개념을 통해서 문화의 한 요소로서의 놀이가 아닌, 문화나 문명 자체가 놀이의 특성을 기본으로 발전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저자는, 그러한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문화형태에서 그 기원으로서의 놀이의 요소들을 찾아내어 고찰하고, 여러 집단안에서 그리고 철학과 시, 예술 등의 영역에서도 그 안에 담긴 놀이의 성격을 구분해 내어 인간 문화의 기원으로서의 놀이의 의미를 여러 면에서 탐구하고 있는데,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의 타당성을 인정하고 나면 , 삶의 여러 부분에서 놀이의 특성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가운데 인류의 문명이 긍정적으로 발전해올 수 있었음을 암시하는 저자의 주장들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짧은 시간 저자의 주장을 요약해서 이해하는 모양새는 차렸지만, 여러 세부 영역에 파고 들어가서 놀이의 특성이나 개념들을 추적하는 저자의 노력을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기 위해서는 좀더 시간을 내서 진지하게 읽고 안으로 삭이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몇시간의 독서로 모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다고 학문을 대한다는 경직된 진지함으로 접근하는 것은 저자가 말하는 '놀이 아님'에 해당될 터이니 일상과는 다른 즐거움과 긴장과  의식을 수반하는 진정한 놀이의 정신을 망각하지는 않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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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60분 부모 : 성장 발달 편
EBS 60분 부모 제작팀 지음. 김수연 책임감수 / 지식채널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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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아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됩니다. 처음이기에 어떻게 준비된 것도 아니었을 것이고, 준비를 했다손치더라도 초보 부모로서 제대로 준비되었을 수도 없었던 순간이지만, 많은 부모들이 그리했듯이, 두 손가락과 발가락이 모두 제 모양과 갯수를 가지고 세상에 나온 것만으로도, 온전한 모습으로 품에 안긴 것만으로도 반갑고 기쁘고 또한 감사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한편으로는 이리 어린 녀석을 어찌 키워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결국 지내고 나면, 부모가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태어난 아이 안에 무럭무럭 자랄만한 능력이 이미 조물주에 의해 가득 채워져있고, 부모는 다만 아이가 자라는 것을 곁에서 정성으로 도와주는 것일 뿐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모가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라는 아이를 곁에서 도와주는 것이라는 사실..... 이러한 평범한 사실을 아이가 자라면서, 그리고 주변의 아이들과 비교하면서, 많은 시간 망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이 책을 대하며 다시금 문득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아이를 키우는 것은 농부가 농사를 짓는 일과 비교할 수도 있을 듯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씨를 뿌린 농부가 싹이 트는 것을 정성껏 보살피며 기다릴 수는 있지만 억지로 싹을 틔우지는 못하는 법이고, 싹이 자라고 자라서 열매를 맺기까지 넘어지지 않고 병들지 않고 튼실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울수는 있지만 열매 의 모양이나 맛까지 만들어 낼 수는 또한 없는 것이 자연의 순리입니다. 때로 바람이 불고, 비가 세차게 내려 물이 넘치면 농부는 손발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피해를 줄이도록 이리저리 방편을 강구하겠지만 그러한 시련은 자라는 곡식이나 나무들이 온전히 겪어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때론 비료를 사용해서 빨리 튼튼하게 자라도록 돌보기도 하겠지만 너무 과하면 분명 낭패를 당할 것이고, 때를 맞추지 못하면 제대로된 추수를 하지 못하고 1년 농사를 그르치기 십상입니다. 그러한 농부의 1년 수고가 부모가 아이를 키운다는 것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다른 아이와 비교하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면 아이가 품에 안긴 것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었던 순박한 마음은 이내 세차게 흔들리고 맙니다. 순박하던 농부가 비닐하우스를 세우고 바람을 막고, 불을 지피며 순리를 거스르기 시작하여 이득에 집착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조급함과 남들보다 더 나은 성적을 위해 기꺼이 아이를 비닐하우스에 가두기를 마다하지 않고, 조금더 심해지면 나무로 분재를 만들어 내듯이 아이를 이리 저리 만져가며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 보려는 욕심을 마다하지 않는 듯 합니다. 결국 아이는 스스로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기도 전에 자신의 미래를 부모가 원하는 목표에 맞추어 달리고 있는 다른 아이들과 남모르게 경쟁하는 선수가 되어버립니다. 이런 시각이 조금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이 책을 보면서 나를 비롯한 아이를 위해 무엇인가를 열심으로 한다는 많은 부모들의 모습뒤에 숨겨진 이러한 극단의 모습을 느끼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아이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부모의 포근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이것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그리고 주장하는 내용이 각기 다른 여러 육아서마다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아이와 자신에게 열려있는 마음과 올바른 육아와 교육관이 그 다음 자리를 차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은 아이에게 더 많은 지식과 기회를 만들어 주기위해 자신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헌신적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아이만을 자라게 몰아세우는 그런 부모가 아니라, 더디게 보일 수는 있겠지만 아이의 눈높이에 서서 아이와 함께 자라는 그런 부모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내 앞에 있는 아이가 자란만큼은 아니더라도 아이 앞에서 내 마음과 지식과 영혼이 적절하게 성장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나는 아이에게 그다지 좋은 부모가 아니었다는 반성문을 써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많은 것들을 아이 품에 안겨주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국 부모의 욕심이나 분별없음에서 비롯되었다면 말입니다. 이 책에는 바로 아이를 키우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이해하고 도와 줄 것인가에 대한, 좋은 부모가 되기위해서 필요한 기본적이고 중요한 사실들이 담겨 있다는 생각입니다. 아이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에서 시작하여 각각의 성장발달 단계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과 문제들에 대한 실질적인 내용들과 아이의 교육과 건강을 챙기기 위한 지식에 이르기까지, 현실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고민하며 해결책을 찾아 헤맸던 부모들의 경험담과 전문가들의 해결책이 함께 어우러져 유용하고 깊이있는 육아정보를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물론 아이를 키우는 각각의 실제 생활에서 딱 맞아 떨어지지는 않겠지만, 육아에 대한 기본적이고 건전한 틀을, 아이를 키우고 있는 많은 부모들과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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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움직이는 100가지 법칙 - 하인리히에서 깨진 유리창까지
이영직 지음 / 스마트비즈니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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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담, 격언, 잠언..... 그리고 고사성어 등의 공통점의 하나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나 이치를 함축적으로 알려주는데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형식은 다르지만 시간이 켜켜이 쌓이고 그 시간들 틈에 또 많은 이들의 삶의 땀방울이 오롯이 배인 결과물이 바로 우리가 세상사를 논할때 즐겨 인용한는 속담이나 격언, 잠언이나 고사성어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안에는 때로는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판단이 담겨 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과 충돌하지 않고 유연하게 휘어질 줄 아는 지혜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문득 이 책을 보면서 속담이나 격언, 잠언이나 고사성어 등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이 책이 말하는 세상을 움직이는 법칙이라고 소개된 내용들도 결국은 세상사를 바라보고 해석하고 이해하는데 필요한 그러한 지혜나 이치를 담고 있다는 면에서의 유사점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학의 이름으로, 또는 사회학이나 경제학 등의 이름으로 훨씬 객관적인 배경을 가진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크게 생각한다면 이 책이 소개하는 법칙들이란 또 다른 관점에서 세상사의 이치를 되짚어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에서 소개된 내용들은 멘델의 유전법칙, 관성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 열역학 2법칙과 엔트로피의 법칙, 불확정성 원리, 적자 생존의 법칙 등 우리가 과학시간에 익히 배웠던 것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들었을 법한 나비효과, 역발상의 법칙, 위약효과, 하인리히 법칙, 머피의 법칙과 샐리의 법칙, 깨진 유리창의 법칙, 파레토의 법칙 (80:20의 법칙), 긴꼬리 법칙(롱테일) 등에 대한 부분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대적으로 위위구조나 토사구팽, 환골탈퇴 등의 고사성어에서 유래된 법칙들도 있고, 피그말리온 효과와 같이 고대 신화에서 유래된 내용들도 담겨있고, 시그모이드 곡선이나 노리스 노리턴의 법칙, 수확체증의 법칙이나 수확체감의 법칙과 같은 경제학과 관계된 내용들도 다수 설명되어 있습니다. 체계적인 정리라고 하기보다는 다양하고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고,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 내용들을 백과사전식으로 정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모두 알만한 것들인 것은 아니고, 멈 효과나  란체스터의 법칙 등과 같이 내게는 생소한 내용들도 여럿 볼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고사성어나 속담, 격언 등을 모두 다 외우고 살아갈 필요가 없듯이, 이 책에 소개된 내용들이 세상살이를 하는데 많은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모두를 머릿속에 담아가면서 우리의 삶에 적용해보려는 것은 어리석은 시도일 것입니다. 세상 일이 돌아가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과정에 담긴 의미들을 이러한 법칙이라는 틀안에서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그것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합니다. 한가지 더한다면 이 중에서 한두가지를 자신의 삶에 취할 수 있다면 정말로 소중한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요즈음 1만시간의 법칙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는데, 하루 세시간 10년의 세월을 얘기하는 이 법칙을 보면서 세상에서의 성취에는 공짜가 없다는 것, 그리고 결국 한단계 더 높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인내와 꾸준함이 필수라는 사실을 되새겨 봅니다. 물론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빼고는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일상이 된 시대에도 사상누각보다는 공든 탑을 세우는 지혜가 더 필요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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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머니 - 땅, 먹을거리, 세상을 살리는 자본
우디 타쉬 지음, 이종훈 옮김 / 서해문집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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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내자본이 식품 부문에 투입되는 경우에 슬로머니가 되는데, '슬로머니'라는 명칭을 국제 NGO 슬로푸드에 대한 존경심을 넘어서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딴 것이다. 슬로푸드는 생물 다양성, 장인 정신이 깃든 음식 전통, 조상 전래의 품종, 소농과 소비자의 연결을 촉진시킨다. 슬로머니는 인내자본의 하위 자산 집단으로, 특유의 끈기를 발휘해 토양과 생태 지역의 건강에 초점을 맞춘다. 슬로머니는 스테로이드 같은 자본과 정반대의 성격을 띤 인내자본이다. -p80

 '슬로머니'라는 용어가 낯설고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이미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한 '슬로푸드'라는 용어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면, 이 용어가 뜻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현재 세계 여러 곳을 빠르게 휘젓고 다니며 자본의 성격이나 역할에는 관심이 없이 오로지 최대의 이익만을 최선의 가치로 생각하고 투자되고 있는 자본에 대한 상대개념으로 '슬로머니'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없는 성장과 이익만을 염두에 두고 운영되는 현재의 경제체제는 언젠가는 파국에 직면하게 되리라는 것과 지금까지는 경제적인 풍요로움에 일조한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가 이제는 더이상 사람들을 더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는 자각에서 출발하는 저자는 결국 이러한 폐해의 근원은 금융의 문제 그중에서도 돈의 속도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 그 전제 조건은 이렇다. 지금 문제시되는 토양 비옥도, 생물 다양성, 식품 품질, 지역경제 문제는 근본적으로 과학 기술 문제가 아니다. 이는 금융 문제다. 금융체제에서는 자본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한 곳에 몰아넣는다. 그러니 결국 싸구려 식품이 판치고, 유전자 조작 옥수수가 대량생산되며, 중심가는 몰락하고 식품 이동거리만 수십억 킬로미터에 이르게 된다. 아이들이 먹을거리가 슈퍼마켓에서 생긴다고 여기고, 한쪽에서는 만성적 기아에 허덕이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비만에 시달리는 현상들이 생기는 것도 알고 보면 놀랄 일이 아니다. .... 돈이 너무 빠르게 돈다. 너무 빠르게 도는 바람에 오히려 사람들, 본래의 장소, 활동에서 돈이 소외당했다, 심지어 전문가조차도 투자활동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다. 돈이 너무 빠르게 도니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신용시장이 경색되어도 세계시장이 그저 조정 과정을 겪는 것인지, 벼랑 끝으로 몰린 심각한 상황인지 판단할 수도 없다. .... 햄버거 한 개에 사용된 고기의 출처를 아무도 정확히 말할 수 없는 경우처럼 이러저러한 유가 증권의 거래 대금이 어디서 비롯되어 어디로 흘러가고, 그 이면에는 무엇이 숨어 있는지, 그것이 잠시 누군가의 수중에 뜨거운 감자처럼 머물 경우 실질적으로 얼마만큼 가치가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러한 금융체제 안에서의 돈은 '삶의 터전과 분리된 채 가속도를 내며 지구 곳곳에서 유통되'고 결국 '자본과 지역사회와 생태 지역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데, 저자는 이러한 악순환에서 벗어나 지속가능하고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눈앞의 이익보다는 땅과 먹을거리와 세상을 살리데 관심을 두는 자본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물이 지질 구조, 토양, 식생, 특정 지역의 생태학적 관계등에 작용을 받아 적당한 속도로 흐르듯이, 특정 장소에 뿌리박은 지역사회의 장기적 필요조건과 생태자본 보존의 필요성에 맞게 알맞은 속도로 돈이 유통'되도록 경제체제를 복원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즉 이익만을 위해서 자연환경과 사람들을 착취하는 자본이 아니라 자신의 땅과 몸과 가족과 지역사회와 나라의 건강성을 위해서 주변환경을 보살피는데 인색하지 않는 자본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결국은 이상과 현실의 격렬한 투쟁이 일어나는 듯 합니다. 현재 대부분의 자본과 이를 운영하는 사람, 또한 이를 위탁한 사람들 대부분은 자본이 어떤 형태로 투자되는지, 도덕적이고 건강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투자되는지 등에 대한 관심보다는 오로지 수익률에만 관심을 두는 상황이고, 또한 슬로머니의 정신에 그래도 가까워보이는 자선단체의 기금들마저 그 투자 방식에 있어서는 수익만 높게 올린다면 자신들 단체의 목적과 상반되는 방식으로 투자되는 것마저 개의치 않은 상황은 저자가 주창하는 슬로머니의 개념이 이상적으로 들리는 멋진 이야기인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공허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도 사실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경제적 증상은 '경제적 병폐가 아니라 문화적 병폐로 인한 것'이며,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경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에 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자가 주장하는 슬로머니라는 개념이 단지 무한경쟁과 이익에 매달리는 경제체제에 대한 대안적인 개념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그러한 경제체제에 익숙해진 우리의 삶과 사고방식에 대한 문제제기와 이의 해결을 위한 고민을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분명 더 많은 물질적인 풍요를 이루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은 더 행복하다기 보다는 무언가 잃어버린 상실감을 더 느끼며 사는 듯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리 된 이유에 대해서 나름의 멋진 답과 해결책을 고민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 많은 물질적인 풍요와 더 많은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달리는 효율성과 속도의 경제체제에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결국 사회와 관계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돈이 중심이 되어버린 사회'구조 속에서, 따뜻함이 담긴 '문화와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관계가 사라져' 버렸고, 이러한 사회에서 사람들이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자는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으로 땅과 문화와 우리의 생태계의 건강성을 중시하는 자본의 개념으로서의 슬로머니를 주창합니다. 현대 경제의 단절된 관계를 청산하고 땅과 사람, 생태계와 인간, 그리고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복원하기 위한 속도의 늦춤을 용인하는 자본, 더 많은 이득을 위해 땅과 생태계를 착취는 자본이 아니라 땅의 비옥도와 생태계의 건강성, 그리고 가족과 지역사회 등에 대한 기여까지도 고려하는 양육자의 마음을 지닌 주변을 보살피는 자본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성적인 호소를 담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거나 '느린 것이 아름답다'는 구호의 한계를 뛰어넘어 구체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실천과정을 담은 것도 이 책이 지닌 미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건강한 세상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신선한 저자의 생각들을 통해 미처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던 세상의 다른 한편에 대한 소중한 탐구의 시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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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아이단과 마지막 폭풍 기사 아이단 시리즈 3
웨인 토머스 뱃슨 지음, 정경옥 옮김 / 꽃삽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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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리블 왕국의 엘리엄 왕을 배신한 앨리블의 제1대 근위대장 파라고어가 세운 어둠의 나라 파라고리 왕국의 세력확장 앞에 앨리블 왕국과 그 동맹국들은 결정적인 위기를 만나게 되는 듯 합니다. 먼 곳의 동맹국들은 어둠의 왕국에 넘어가 버리고 주변의 연합국들은 침략당해 파괴되거나 침략의 위협을 당하면서 전전긍긍하고, 결국 앨리블 왕국이 직접적인 공격을 당하게 되는 찰나입니다. 파라고어는 이러한 전쟁을 위하여 신성한 두루마리를 손에 넣고 최초의 용 '웜 로드'와 늑대 괴물 '슬리퍼스'를 깨워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선, 대대적인 병력의 증강을 통해 앨리블 왕국에 대한 세력의 우세를 점하게 됩니다. 그에 비해 앨리블 왕국은 주변 동맹국과 함께 최선의 방어책을 강구하지만, 결국 전설에 전해져오는 세 영웅의 출현만이 난국을 헤쳐나가게 할 방책이 되는 듯 합니다. 그렇다면 세 영웅은 어떻게 막강한 힘을 가진 파라고어의 군대를 막아낼까요? 

 앨리블 왕국 및 파라고리 왕국이 있는 렐름에는 우리 지구(미러 렐름)에 사는 사람들과 동일한 존재가 살고 있습니다. 지구의 아이단은 라벨르 왕의 아들 에일릭 경에 해당하고, 아이단의 친구 로버는 파라고어의 최고의 부관 컨에 해당하는 인물입니다. 같은 세상에 둘이 함께 존재할 수 없어 한 사람이 렐름에 나타나면 그에 해당하는 존재는 자취를 감춰버리게 됩니다. 이야기의 주된 축은 렐름에서 일어난 선과 악의 충돌로 인한 것이지만 지구에서도 모양새는 조금 다르지만 동일한 주제를 가진 선과 악의 각축이 일어나면서 이야기가 겹쳐지는 것이 이 소설의 재미중의 하나일 것 같습니다. 아이단과 로버의 아버지는 지구에서 서로 갈등관계에 있는데, 이유는 렐름의 파라고리 왕국의 부관 루시펠이 로버의 아버지에 해당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이단이나 로버의 아버지는 모두 렐름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으니까- 쉽게 이해가 됩니다. 앞에서 언급한 엘리블 왕국을 구할 세 영웅은 미러 렐름인 지구에서 렐름으로 들어온 세명의 기사들인데, 세명의 기사가 누구인가 보다는 그들이 앨리블 왕국을 구하는 방식에 대해서 좀 진지하게 생각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저자가 미러 렐름에서 온 세명의 영웅을 통해서 앨리블이 구원받는 방식은 웜 로드의 막강한 힘이나 슬리퍼스와 같은 괴력을 지닌 존재를 막아낼 힘이나 무기를 통해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모든 노력이 실패하고 / 반역자가 왕좌에 앉을 때 / 영웅들은 살아 돌아와 / 두 가지 운명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리라 / 그는 승리를 원하므로 / 그들은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리니 / 반역자는 그들의 결심을 바꾸거나 / 그들의 목숨을 빼앗아야 하리라....... 

 .... 영웅들이 결정을 내릴 때 / 이전의 일들이 없던 일이 될 수 있으리니 / 일곱 개의 검이 베일을 벗고 / 분열했던 세상이 하나가 되리라. 

 세 영웅은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 파라고어에게 잡히고 앨리블의 엘리엄 왕을 따르는 것을 고집하고 죽임을 당할 것인지 아니면 결심을 바꾸어 파라고어가 제안하는 부귀영화를 누릴 것인지를 선택할 것을 강요당합니다. 이야기의 전체를 통해 어려움 속에서도 앨리블의 엘리엄 왕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며 항상 혼자가 아닌 왕이 함께 하며 지혜를 주고 도움을 주고 있다는 믿음을 견지했던 아이단의 모습속에 바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구원의 길이 들어 있습니다. 세 영웅은 자기 희생이 따르는 그러한 길을 따름으로서 앨리블 왕국을 파라고어의 손아귀에서 구원해 냅니다. 세상을 구하는 힘은 창과 칼, 그리고 강력한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엘리엄 왕이 세우고자 했던 세상에 대한 소망과 믿음 그리고 사랑에 대한 실천에 담겨 있으며,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란 다름 아닌 자기 희생을 통해서 그러한 삶을 몸소 실천하며 인도하는 이들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 결국 이 소설을 신앙적으로 해석한다면 렘름은 아마도 신앙인들의 영적인 전쟁터로 여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선과 악의 전쟁에서의 승리는 결국 귀환할 왕과 왕국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둔 삶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또한 우리 삶의 결정적인 승리는 뛰어난 무기나 강력한 힘, 돈이나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절대자에 대한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 안에 있다는 것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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