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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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건 그렇다치고,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만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 p229-230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학교 기숙사를 나와 이곳저곳을 방황하던 홀든 콜필드가 동생 피비를 만나기 위해 몰래 자신의 집에 들어와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동생 피비의 '앞으로 뭐가 되고 싶은건지 말해보라'는 질문에 대답한 내용입니다. 온종일 넓은 호밀밭의 절벽 옆에 서 있다가 조심성 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절벽으로 떨어지려는 아이들을 붙잡아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그전에 주인공은 '모든 것을 그리 다 싫어하지 않는다면 뭘 좋아하는지 한 가지만 말해보라'는 동생의 질문에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횡설수설합니다. 크리스마스 시즌, 방학 시작을 며칠 남겨두지 않고,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부모님이 있는 집에 바로 들어가지도, 그런다고 남은 시간을 기숙사에 조용히 남아있지도 못한 주인공이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해보기도 하고, 옛 학교의 동료를 만나기도 하고, 술집에서 정신이 나갈 정도로 취해보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닥친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고, 그리 절벽에서 추락하고 있는 자신을 붙잡아 주는 손길을 만나지도 못합니다. 세상과 자신의 삶을 가로막는 부조리함에 온몸으로 맞서는 듯이 보이지만, 그런 그의 모습을 조금 물러서서 보면 한편으로는 절제하고 인내하지 못하는 모습과 의미없이 반항하며 사소한 것에 얽매여 큰 것을 포용하지 못하는 협소함-한편으로는 순수함이라고 할수도- 등이 겹치며 세상을 아직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어린 영혼의 몸부림이 고스란히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 시간을 주인공과 같은 사춘기 청소년들이 자신을 찾기 위해 겪는 혼돈의 시간이고 삶의 어느 순간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할 과정이라고 해야겠지만, 그러한 모습은 주인공이 원하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절벽이 옆에 있음에도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마냥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 지 알고는 있지만, 아직 몸과 마음이 그러한 생각을 따라 갈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이라고도 해야 하지 않을는지..... 

 마지막에 집을 떠나 서부로 떠나겠다는 우스운(?) 주인공의 생각을 멋지게 막아서는 것은 주인공의 어머니나 아버지, 옛 선생님이나 친구, 여자 친구 샐리나 마음속으로 사모하는 제인과 같은 이들이 아닌 주인공이 항상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칭찬하는 동생 피비입니다. 떠나기 전에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만나고자 했던 동생 피비는 주인공 앞에 커다란 가방을 들고 숨을 몰아쉬며 함께 떠날거라고 나타납니다. 그런 동생 앞에서 쩔쩔매며 -아마도 어른들이 그리 했다면 주인공은 더 반항했겠지요- 결국은 동생을 달래기 위해 함께 동물원에 가고 동생에게 회전목마를 태우는 동안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주인공 앞에 그리 영리하게 막아선 피비의 모습에서는 주인공이 말한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지는 것을 잡아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주인공 자신도 그것이 절벽인지 몰랐겠지만, 아마 한걸음만 더 내디뎠다면 절벽으로 완전히 추락해 버릴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 주인공을 붙들어 준 것은 바로 동생 피비라고 할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겪은 후의 주인공은, 마지막 그의 독백으로 미루어 보건데, 호밀밭에서 뛰어노니는 아이들보다는 이제는 그들을 지켜보는 파수꾼의 모습을 더 생각하게 합니다. 그의 이야기 속에 이젠 몸과 마음을 다스릴만한 영혼의 성숙함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니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르러서 삶에서의 '호밀밭의 파수꾼'의 의미를 곰곰히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로 나를 황홀하게 만드는 책은, 그 책을 다 읽었을 때 작가와 친한 친구가 되어 언제라도 전화를 걸어, 자기가 받은 느낌을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p32 

 많은 사람들, 특히 이 병원에 있는 정신과 전문의가, 이번 9월부터 학교에 가게 되면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인지를 연신 물어대고 있다. 정말 이보다 더 어리석은 질문이 있을까? 실제로 해보기 전에 무엇을 어떻게 하게 될 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열심히 공부할 생각이지만, 실제로 어떻게 될지야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것이다. -p278 

 난 이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한 걸 후회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이 이야기에서 언급했던 사람들이 보고 싶다는 것뿐. 이를테면, 스트라드레이터나 애클리 같은 녀석들까지도. 모리스 자식도 그립다. 정말 웃긴 일이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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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의 미래 - 환율은 경제의 체온계이다!
홍춘욱 지음 / 에이지21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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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새정부가 들어서면서 수출기업의 경쟁력을 개선시킨다는 명목(?)으로 고환율에 대해서 수수방관-아마도 내심 바라는 방향이었지도 모르지만....- 으로 일관하던 시기에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각종 물가 상승에 대한 공포를 경험한 것이 오래지 않은 일입니다. 물론 정부가 정책수단이 없었거나 경제 전반의 여건이 악화되고 금융위기가 겹칩으로 해서 기인한 면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경제관련 인사들의 과거 경제성장기의 경험과 경력에 초점을 맞춰서 무리한 성장위주 정책, 또한 지금의 우리나라의 경제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수출의 회복에 대한 기대를 담은 단편적인 처방으로 더 큰 어려움을 초래할 것이라는 경고를 보내기도 했던 기억입니다. 결국 결과는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이 책의 프롤로그에 적힌 '환율급등 -> 외국인의 주식 및 채권 등의 매도 -> 자산 가격 폭락 -> 경기침체'의  악순환이 초래되었고, 원/달러 환율의 상승에 의한 수출의 회복이라는 단편적인 식견에 문제가 있었음을 드러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사례는 환율이 간단히 표현하면 다른 화폐에 대한 우리 돈의 가치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경제관련 사안들이 서로 얽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과 또한 어떤 때는 시장의 합리적이지 못한 공포에 그대로 전염되어 순간 방향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사실 등을 다시 한번 시장 참여자들에게 깨우친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책은 바로 환율 -특히 원/달러 환율- 에 대한, 현장에서 일하는 전문가의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외환시장의 출발과 여러 제도적인 개선을 통해서 오늘날까지 이른 과정을 돌아보고 원화의 가치가 결정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하여, 2008년 외환시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던 원인으로서 경상수지 적자와 외국인의 주식 순매도, 1997년과 같은 외환 위기의 재발 가능성, 외환시장과 주식 및 채권 등의 각종 자산시장과의 관계, 그리고 현재의 토대위에서 10년후의 원화의 위상 및 선진국의 화폐와 같은 안정적인 가치를 지니기 위한 조건 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각 장의 부록편에는 저자가 말하는 각종 자료를 열람하고 데이터화 할 수 있는 장소와 방법, 그리고 해당 주제에 대한 좀더 세부적인 면에서의 설명이 담겨 있습니다. 

 증권사와 은행에서 주식이나 투자 관련 분야에서 종사해온 저자의 이력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이 책은 환율이라는 주제에 대해 경제학적인 이런 저런 따분한 이론들이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대하고 부딪혔던 환율이라는 실체에 대한 현장의 경험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환율에 변화에 대한 우리경제의 반응과 지금 현재의 반응방식의 차이와 이유에 대한 실제적인 분석을 담고 있으며, 실제 경제 활동이나 투자 활동에 시시각각 변화하는 환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실질적인 조언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정통적인 경제경영서의 범주를 벗어난 실용성을 주로 하는 재테크나 투자관련 서적으로 생각할 수 있겠고, 지금까지 여러 투자관련 서적들이 다루어주지 않았던 환율이라는 측면에서 우리 경제를 어떻게 해석하고, 투자를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에 대한 안목을 넓혀주는 유익함을 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달러/원 환율의 변화는 단순한 경제뿐만 아니라 자산 시장의 순환을 파악하는 핵심지표라 할 수 있다. 안정적으로 수익을 올리고 싶은 일반 투자자들은 달러/원 환율이 상승할 때 주식 등 위험자산의 비중을 줄이고, 달러/원 환율이 하락할 때 채권이나 달러화표시 자산 등 안전자산의 비중을 줄이는 방식으로 자산 배분에 신경을 써야 나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 / 또한 기업의 재무 담당자는 미국의 장단기 금리 차 같은 장기적인 지표와 한국의 재고순환지표 등의 단기지표를 함께 관찰하면서 달러/원 환율의 변화 방향을 예측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시장 참가자들이 어느 한 방향으로 환율의 변화를 예측하고 행동할 때일수록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달러/원 환율이 예전의 추세를 벗어나는 듯한 징후가 보일 때는 앞에서 말한 두가지 경제지표를 꼭 점검해야 한다. / 향후 10년의 외환시장의 흐름에 대해 전망하면서 두가지 장기변수의 중요성을 느꼈다. 하나는 인구의 변화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9년 주기의 경기순환이다. 두 변수 모두 중요한데, 앞으로 상당 기간동안 인구와 경기의 순환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20년이 다가오며 점점 부정적인 영향이 부각될 수 있으니, 2010년대의 후반에는 보다 조심성 있는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 p237-238, '에필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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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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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 카타리나 블룸은 가정 관리사로 성실하게 일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배려와 근검 절약을 통해서 자신의 아파트까지 소유하게 된 20대 후반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성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평범한 행복은 카니발 시즌, 한 파티에서 만난 남자로 인해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사랑에 빠진 남자는 괴텐이라는 경찰의 추적을 받는 범죄자였고, 카타리나 블룸은 괴텐이 아파트까지 쫒아온 경찰을 감쪽같이 따돌리고 도망칠 수 있게 돕습니다. 그녀의 행동은 불법으로 의심되었고, 괴텐을 잡지 못하고 허탕을 친 경찰은 카타리나 블룸과 괴텐과의 관계, 그리고 그녀의 불법성을 조사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한 신문 -차이퉁-은 그녀를 괴텐-범죄자-의 약혼자로 몰아붙이면서 그녀를 옥죄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대대적인 기사들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기자들은 주변인들을 취재하여 모은 자료들은 기사화하면서 '영리하고 이성적인 사람'이라는 표현을 '얼음처럼 차갑고 계산적이다'라든가, 주인공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들을 교묘하게 인용하며 범죄자의 약혼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느니, 무책임한 주변인들의 발언에 비중을 두어 그럴 듯하게 처리하는 등의 적극적인 해석과 왜곡을 통해 평범한 한 여성을 '살인범의 정부', '테러리스트의 공조자' 그리고 '음탕한 공산주의자' 등으로 매도해 갑니다. 그러한 기사는 또한 여과 없이 읽는 이들에게 카타리나 블룸의 부정적인 모습을 각인시키고, 결국에는 주인공이 집단적인 이지메의 대상으로까지 전락해가는 과정을 통해서 작가는 보이지 않는 언론의 폭력이 어떻게 발생하여 진화하고 어떻게 한 인간을 짓밟고 무너뜨려버리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첫 도입부는 '그러한 폭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며, 그러한 살인사건 이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묻고 있고,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좀더 직접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살인의 이유 또는 과정에 대한 주인공의 진술을 담고 있습니다. 한 신문과 명예욕에 사로잡힌 몇몇 기자에 의해 철저하게 자신의 명예를 짓밟힌 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일까? 국가도 사회도 그리고 그녀의 이웃도 그러한 폭력에 대해서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했을 때, 주인공이 한 기자를 총으로 살해하고 스스로 자수하면서 아무 후회의 감정이 없었노라고, 그리고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 -괴텐-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진술했다면 이 사건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사건과 함께 일어난 동일 신문의 기자 살해사건을 해당 신문뿐 아니라 여타 다른 신문들은 일방적으로 '자기 직업의 희생자'라고 호들갑스럽게 떠들며 미화할 뿐 그러한 사건의 배경에 대해서 어떤 반성이나 부끄러움을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죽임당한 기자가 속한 신문집단에 의해 카타리나 블룸의 평범한 삶이 무참히 짓밟혔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고, 그에 덧붙여 살해당한 기자의 마지막 순간의 부적절한 행동-불룸의 아파트에 가서 노골적으로 치근대었던 행동-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물론 언론집단이 말하는 자신들의 직업의 고귀함에 봉사한 결과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 또는 사건의 전말을 찾아헤매다 사소(?)하게 실수한 부분-언론의 입장에서 오보에 대해 언론이 변명하는 식으로 말한다면-에 대한 복수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닐수도 있다는 사실, 그 기자는 자신이 속한 집단이 매장시켰던 피해자의 아파트에 가서 아주 상스럽게 치근덕거리다가 결정적으로 죽임당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은연 중에 말하고 있습니다. 살해당한 기자는 기사를 통해서만 주인공의 명예를 짓밟은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마저 주인공의 인간성을 무시하고 짓밟으려고 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언론권력의 뒤에 숨어 사는 자들의 허위와 가식까지도 이야기하고 싶어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우리 사회도 그러한 폭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에 대한 매우 비극적인 대답들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깝게는 서민들과 친근했던 한 대통령의 죽음과 연관해서 언론의 보이지 않는 폭력성을 우리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른 대통령을 끊임없이 빨갱이로 몰아가던 언론의 행태도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큰 사건이 터질때면 매번 피의자의 인권과 국민의 알 권리사이의 충돌이 일어나고, 어느 새 우리는 우리가 편한 쪽의 논리에 너무도 쉽게 넘어가버리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이 말하는 카타리나 블룸의 이야기는 크게 또는 아주 작게 우리 주변에서 매일 발생하는 비극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내가 언론이라는 권력에 속해 있지는 않더라도, 아무런 의식없이 언론이 던져주는 기사에 대한 단순한 동조자가 되는 순간, 언론과 똑같은 뻔뻔한 가해자가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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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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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행. 이 세상에는 갖가지 불행한 사람이. 아니 불행한 사람만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그러나 그 사람들의 불행은 소위 세상이라는 것에 당당하게 항의할 수 있는 것이고, 또 세상도 그 사람의 항의를 쉽게 이해하고 동정해 줍니다. 그러나 제 불행은 모두 제 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항의할 수가 없었고, 또 우물쭈물 한마디라도 항의 비슷한 얘기를 하려 하면 넙치가 아니더라도 세상 사람들 전부가, 잘도 뻔뻔하게 그런 말을 하는군 하고 어이없어할 것이 뻔했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말하는 방자한 놈인 건지 아니면 반대로 너무 약한 놈인 건지 저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죄악 덩어리였던 듯, 끝도 없이 점점 더 불행해지기만 할 뿐 막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없었던 것입니다.' - p123-4  

 '인간 실격'이라는 제목과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에곤 실레의 '꽈리와 열매가 있는 자화상'이 풍기는, 정확하게 무엇인지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마음속 감정 한자락을 자극하는 퇴폐적이고 음울한 분위기로 인해 언젠가부터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 삶의 한구석에 억눌려 있을 나 자신과 사람들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를 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그래서 그러한 어두움이 내 자신의 삶에만 달라붙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그런 해방감을 조금이나마 느껴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 실격자'..... 살면서 스스로에게 이런 딱지를 붙이지는 않았을지라도 수십여년의 삶속에서 '스스로가 인간이 아니라는' 또는 '스스로가 정상적인 사람들의 삶속에 녹아들지 못한 실패자라는' 자괴감에 시달리는 절망의 시간이 있지는 않았는지..... 삶을 돌아보면 그런 나약함(?)에 허우적이던, 내면에 꼭꼭 숨겨진 상처의 흔적을 누구나 한두개 쯤 가지고 있지 않을는지.....

 주인공 요조는 스스로를 '안팎 구별 없이, 그저 끊임없이 인간의 삶에서 도망쳐 다니는 바보 멍청이', '인간 자격이 없는 어린아이' 그리고 결국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인간 실격'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잣집 도련님으로 태어났지만, 마음이 너무 순수하여 '인간의 삶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는 어려서부터 익살을 통해서 세상과 스스로를 연결하는 방법을 배우지만, 또한 그것은 세상에서 자신을 꽁꽁 숨기는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치장하는 철저한 연기에 불과한 익살의 배후에 있는, 세상이 주는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너무도 쉽게 상처받는 나약한 내면에게는, 자신의 비밀이 언제 탄로날지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나약함과 불안과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그가 의지하기 시작한 것은 술과 담배, 창녀, 그런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의 나약한 심성에 그런 것들은 잠시 자신을 잊게 해 주었을지는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심한 자책과 좌절의 악순환에 빠뜨리고 마는 듯 합니다. 그의 삶은 술과 여자, 자살과 마약, 가족과 아는 이들에게서의 외면당함, 정신병동에의 입원 등 파멸로 향하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는 결국 자신에게 '인간 실격'이라는 딱지를 붙입니다. 인간이라고 태어났지만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존재', 인간의 자격이 없다는 자기 인식에 이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뒤에 남는 것은.... 아마도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가 그랬듯이 자살..... 또는 살아 있으되 아무 의미가 없는 삶..... 그런 것일 듯 합니다. 삶과 죽음이 아무런 차이가 없는..... 

 역자가 소개하는 작품에 대한 설명을 보면, 소설속의 요조와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의 삶은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요조가 말하는 수기속의 많은 사건들은 작가의 삶속에서 고스란히 옮겨온 듯, 삶에 배반당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가는 모습까지도 그대로 닮아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 다자이 오사무는 이 작품속에 자신의 생각과 삶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작품해설에서 역자는 '타산과 체면으로 영위되는 인간 세상과 사회 질서의 허위성, 잔혹성을 이 작품만큼 명확하게 드러낸 작품도 드물 것'이라고 말하며 '어떻게든 시회에 융화되고자 애쓰고, 순수한 것, 더렵혀지지 않은 것에 꿈을 의탁하고, 인간에 대한 구애를 시도하던 주인공이 결국 모든 것에 배반당하고 인간 실격자가 되어가는 패배의 기록인 이 작품은 그런 뜻에서 현대 사회에 대한 예리한 고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 요조를 통해서 분명 인간사의 허위와 잔혹함, 배신과 사악함의 그림자들을 대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저런 이 소설에 대한 긍정적인 소개에도 불구하고 '누가 이런 삶을 지지해 줄 것인가?'라는 의문이 남는 것은 어찌할 수 없을 듯 합니다. 아무도  감히 적나라하게 파헤쳐 표현하지 못하던 인간의 허울을 한겹 벗겨내 보였다는 것, 우리 내면에 숨겨진 나약함과 어두움에 대한 진솔한 대면을 통해 상처받은 영혼이 위로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긍정에도 불구하고, 요조의 파멸을 무조건 다른 사람들의 위선과 잔인함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테니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작가 다자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그를 부정하는 쪽에 서있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역자는 작품해설에서 '요조의 고뇌를 인정할지 하지 않을지가 다자이를 받아들일지 부정할지를 가름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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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삶 - 믿음이 이긴다
조엘 오스틴 지음, 정성묵 옮김 / 긍정의힘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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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His Time, In His Time, He Makes All Things Beautiful, In His Time....'  우리말 가사로는 '주님의 시간에, 주의 뜻 이뤄지리, 기다려.....'라고 불렸던 복음성가의 한 구절입니다. 물론 이 성가가 말하는 궁극적인 주님의 시간이란 예수님의 재림의 때, 모든 것이 회복하는 때를 말하는 것이겠지만, 내 작은 믿음으로 살아가다 보니, 앞길에 버티고 서있던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거나 바라던 소망이 이뤄지지 않을 때에도 문득 문득 생각하게 되고 마음을 가다듬고 겸손히 한번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위로를 받고는 하였던 노래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은거야, 언젠가 그 때가 되면 내가 바라던 것들만큼이 아니라 더 나은 것들을 받을 수 있을거야....' 내 자신의 작은 일에 이리 적용하며 위로를 얻고 소망을 간직할 수 있게 한 이 성가가 아마 다른 많은 이들에게도 그런식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소망을 간직하며 자신의 현실을 기쁘게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때가 되면..... 언젠가 주님의 시간이 도래하면.....  

 이리 삶에서의 소망과 소원들에 대해서 '언젠가...'라는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을 더 성숙한 것으로 착각(?)하고, 그러한 방식의 생활에 더 익숙해져 있었던지라, 이 책을 통해 조엘 오스틴 목사님이 선포하는 '지금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와 회복의 때'이고 '지금이 하나님의 온전한 복 가운데로 들어갈 때'라는 말들은 '언젠가'라는 단어로 꽉찬 내 영혼의 막힌 한쪽 벽을 말끔하게 뚫어 주는 듯한 시원함을 내 영혼에 선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의 재림의 때에 완성되기는 하겠지만, 지금 내가 사는 가정과 이웃, 교회와 직장에서도 확장되어가고 있다고 말하는 설교 말씀을 수도 없이 들어왔고, 그리 이야기하는 책들을 여럿 읽기도 하고  성경 구절들을 묵상하기도 하면서, 왜 '언젠가'가 오늘이나 내일 또는 다음달에나 올해일 수도 있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막연히 미래의 '언젠가'라고만 생각하고 말았을까.....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도적과 같이 불시에 임할 수 있으니 항상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내 신앙의 모습은 은연중에 내일이나 모레, 또는 올해나 내년은 결코 아닐 것이라는 방심과 나태함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아마도 나같이 '언젠가'라는 시간에 머물고 있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이들의 모습을 알고 있기라도 하였다는 듯이 조엘 오스틴 목사님은 '지금이 당신의 때입니다', '지금'이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이고, '지금'이 그 분의 복을 누릴 때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나중'이 아니라 '지금'이 하나님께로부터 최고의 복을 받고, 최고의 사랑을 받을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저서 <긍정의 힘>이나 <잘되는 나>에서와 같이 이 책에서도 조엘 오스틴 목사님은 멀리서 조용히 세상을 바라보며, 그의 자녀들을 살피기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닌 쓰러진 자녀를 손내밀어 일으키시고, 상처받은 자녀를 따스한 손길로 위로하시고, 울고 있는 영혼의 눈물을 손수 닦아 주시고 계시는 하나님, 지금도 살아계시고 능력있게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굳건한 믿음과 또 자신의 삶속에서의 생생한 체험이 바로 이 책에서 선포하고 있는 바로 '지금'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이고 하나님께 복받을 때라는 믿음, 한쪽 문이 닫히면 반드시 다른 쪽 문을 열어 주시리라는 소망, 원하는 것들보다 더 좋은 것들을 구하는 대로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기대, 시련과 고통도 더 큰 일과 축복을 위한 준비과정이라는 희망의 증거가 되겠지요. 이러한 격려에도 불구하고 분명 냉정하게 현실로 돌아오면 우리에게는 여전이 하루하루 해야 할 일들이 있고 그것들은 삶의 즐겁게 하기보다는 고단하게 만들고는 합니다. 하지만 조엘 오스틴 목사님은 그러한 고단함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최고의 삶을 준비하고, 최고의 축복을 내리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구하기를 멈추지 않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시련이 오면 피하지 않고 맞서 이겨내고 성장의 시간으로 삼고, 열정을 가지고 꿈을 꾼다면 말입니다. 바로 그러한 삶의 근저에는 하나님께서 바로 나의 아버지 되시고, 나와 함께 지금도 동행하고 계신다는 아주 단순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만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를 이미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삶이 어렵고 힘들다는 우리들에게 이 책을 통해서 이리 말씀하고 계십니다. '목적지가 생각보다 더 가까이에 있다. 지금이 너의 때다!'라고..... 나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하나님안에서 믿음으로 자신의 때를 열어가는 한해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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