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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평점 :
'.... 불행. 이 세상에는 갖가지 불행한 사람이. 아니 불행한 사람만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그러나 그 사람들의 불행은 소위 세상이라는 것에 당당하게 항의할 수 있는 것이고, 또 세상도 그 사람의 항의를 쉽게 이해하고 동정해 줍니다. 그러나 제 불행은 모두 제 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항의할 수가 없었고, 또 우물쭈물 한마디라도 항의 비슷한 얘기를 하려 하면 넙치가 아니더라도 세상 사람들 전부가, 잘도 뻔뻔하게 그런 말을 하는군 하고 어이없어할 것이 뻔했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말하는 방자한 놈인 건지 아니면 반대로 너무 약한 놈인 건지 저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죄악 덩어리였던 듯, 끝도 없이 점점 더 불행해지기만 할 뿐 막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없었던 것입니다.' - p123-4
'인간 실격'이라는 제목과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에곤 실레의 '꽈리와 열매가 있는 자화상'이 풍기는, 정확하게 무엇인지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마음속 감정 한자락을 자극하는 퇴폐적이고 음울한 분위기로 인해 언젠가부터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 삶의 한구석에 억눌려 있을 나 자신과 사람들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를 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그래서 그러한 어두움이 내 자신의 삶에만 달라붙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그런 해방감을 조금이나마 느껴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 실격자'..... 살면서 스스로에게 이런 딱지를 붙이지는 않았을지라도 수십여년의 삶속에서 '스스로가 인간이 아니라는' 또는 '스스로가 정상적인 사람들의 삶속에 녹아들지 못한 실패자라는' 자괴감에 시달리는 절망의 시간이 있지는 않았는지..... 삶을 돌아보면 그런 나약함(?)에 허우적이던, 내면에 꼭꼭 숨겨진 상처의 흔적을 누구나 한두개 쯤 가지고 있지 않을는지.....
주인공 요조는 스스로를 '안팎 구별 없이, 그저 끊임없이 인간의 삶에서 도망쳐 다니는 바보 멍청이', '인간 자격이 없는 어린아이' 그리고 결국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인간 실격'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잣집 도련님으로 태어났지만, 마음이 너무 순수하여 '인간의 삶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는 어려서부터 익살을 통해서 세상과 스스로를 연결하는 방법을 배우지만, 또한 그것은 세상에서 자신을 꽁꽁 숨기는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치장하는 철저한 연기에 불과한 익살의 배후에 있는, 세상이 주는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너무도 쉽게 상처받는 나약한 내면에게는, 자신의 비밀이 언제 탄로날지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나약함과 불안과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그가 의지하기 시작한 것은 술과 담배, 창녀, 그런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의 나약한 심성에 그런 것들은 잠시 자신을 잊게 해 주었을지는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심한 자책과 좌절의 악순환에 빠뜨리고 마는 듯 합니다. 그의 삶은 술과 여자, 자살과 마약, 가족과 아는 이들에게서의 외면당함, 정신병동에의 입원 등 파멸로 향하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는 결국 자신에게 '인간 실격'이라는 딱지를 붙입니다. 인간이라고 태어났지만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존재', 인간의 자격이 없다는 자기 인식에 이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뒤에 남는 것은.... 아마도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가 그랬듯이 자살..... 또는 살아 있으되 아무 의미가 없는 삶..... 그런 것일 듯 합니다. 삶과 죽음이 아무런 차이가 없는.....
역자가 소개하는 작품에 대한 설명을 보면, 소설속의 요조와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의 삶은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요조가 말하는 수기속의 많은 사건들은 작가의 삶속에서 고스란히 옮겨온 듯, 삶에 배반당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가는 모습까지도 그대로 닮아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 다자이 오사무는 이 작품속에 자신의 생각과 삶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작품해설에서 역자는 '타산과 체면으로 영위되는 인간 세상과 사회 질서의 허위성, 잔혹성을 이 작품만큼 명확하게 드러낸 작품도 드물 것'이라고 말하며 '어떻게든 시회에 융화되고자 애쓰고, 순수한 것, 더렵혀지지 않은 것에 꿈을 의탁하고, 인간에 대한 구애를 시도하던 주인공이 결국 모든 것에 배반당하고 인간 실격자가 되어가는 패배의 기록인 이 작품은 그런 뜻에서 현대 사회에 대한 예리한 고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 요조를 통해서 분명 인간사의 허위와 잔혹함, 배신과 사악함의 그림자들을 대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저런 이 소설에 대한 긍정적인 소개에도 불구하고 '누가 이런 삶을 지지해 줄 것인가?'라는 의문이 남는 것은 어찌할 수 없을 듯 합니다. 아무도 감히 적나라하게 파헤쳐 표현하지 못하던 인간의 허울을 한겹 벗겨내 보였다는 것, 우리 내면에 숨겨진 나약함과 어두움에 대한 진솔한 대면을 통해 상처받은 영혼이 위로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긍정에도 불구하고, 요조의 파멸을 무조건 다른 사람들의 위선과 잔인함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테니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작가 다자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그를 부정하는 쪽에 서있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역자는 작품해설에서 '요조의 고뇌를 인정할지 하지 않을지가 다자이를 받아들일지 부정할지를 가름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p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