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목 : '장자와 우리', 장자 읽기의 즐거움
  - 일시 : 2014년 4월 27일(화)
  - 장소 : 마포구청 대강당
  - 누구와 함께 : 사수와 함께~

 

2. 내용 요약

과거에는 한 사람을 만나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가능했다.
메모를 통해 약속을 잡았고, 기다렸고 연락이 닿지 않을 경우 그 주변을 맴돌고 등등 만남이 이루어지기 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고 그만큼 만남이 절절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관계에 있어 빈도는 증가했으나, 깊이는 없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어도 우리는 '카톡' 알림이 오면, 대화가 중단되고 만다.
결국 인간에게 진보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고전을 읽는 다는 것, 20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책을 읽고 감동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책을 읽는 다는 것에 대해... '책은 내가 어느만큼 성숙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학창시절 우리가 열심히 읽었던 하이틴 로맨스 소설들은 지금 읽어보면 그때 만큼 재미가 없다.
어떤면에서는 '내가 이런 유치한 걸 왜 읽었지?'하기도 한다.
이유는? 내가 연애를 경험해보면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간접 재미보다 훨씬 재미있는 경험이 가능하기 때문에 더이상 책을 찾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밑줄 그으면서 읽는 것은 엄밀히 말해 읽은 것이 아니라, 확인을 하는 것 일 뿐~
사람들은 내가 이해가 되는 내용만 줄을 긋는다. 

고전이라고 칭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버릴 수 없는 책을 의미한다. 시간이 아주 오래 오래 지나고, 인생을 살면서 많은 경험을 했음에도 읽고 있노라면 무언가 깨달음이 있고, 깊이가 느껴지는 그런 것.
인문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노인을 존경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사람은 '깊이'가 생긴다.
삶에 굴곡이 없는 작가의 책은 깊이가 없어 고전이 될 수 없다. 수많은 명작들은 전쟁을 겪은 작가들의 결과물이다.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춘추전국시대를 지낸 학자들은 400년간의 전쟁으로 깊이 있는 사상으로 발전한 것이다.
보편적으로 한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크게 공맹사상과 노장사상으로 분류하며, 노자가 장자의 스승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수십번 같은 책을 읽었어도 깨닫지 못했던 한 가지, 어느 날 눈에 들어온 하나의 발견
그것은 장자가 노자의 제자로서가 아닌 장자 그 자체로서 인정받아야 하는 이유의 발견이었다.

道行之而成  도행지이성
'도는 걸어야 이루어진다'
 
인문학은 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웠듯 순자 성악설, 맹자 성선설 이렇게 공식처럼 외워서는 절대 이해할 수가 없다. 행간을 읽어야 한다.
책을 볼 때 내가 이해하는 것은 확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3. 느낀점

간만에... 정말 간만에...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전부다 기억해 두고 싶은 연사였던 것 같다.
웬지 세련미가 넘치는 지식인 느낌이라기 보다는, 조금은 투박하지만 그게 더 매력있는 학자다움 이랄까...
흡사 세포 하나 하나에 고전 작품들이 박혀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고민하고, 얼마나 읽으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90분의 강의에 이루말할 수 없는 감명을 받았음은 물론 향후 내가 하는 일에 있어서도 도전이 되는 멋진 분이 었던 것 같다. 사수가 워낙 좋아하는 분이라 알라딘에서 이벤트 한다길래 아무 생각없이 신청했던 것인데, 안 갔음 후회할 뻔...5월경에 또 다른 책이 나온다고 하니 또 뵙는 걸로 하고, 저자 사인회는 다음을 기약했다.

4. 사진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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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에 이어 투명사회를 읽으며 작가님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은 설레임 그 자체였습니다. 사인회를 진행할지 안할지를 몰라 책은 [투명 사회] 한 권을 가져갔고, 현장에서 [권력이란 무엇인가]를 구입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행사가 끝난 직후 사인을 받으러 온 관객이 있었는데 한 사람만 사인을 해 주면 민주적이지 못하므로 사인은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덕분인지 때문인지 귀가 시간이 빨라지긴 했습니다.

 

혼자 간 행사다 보니 옆 자리에 낯선 이가 자리했는데 어린 학생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말을 건네다가 보니 어린 나이에 이런 행사를 신청해서 들으러 온다는 것이 여간 기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병철 작가의 책은 아직 읽기 전이라기에 적극 추천을 해 주었습니다.

 

 

 

 

 

 

 

 

 

드디어 시작. 강의 중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어서 찍지 못했습니다. 질의 응답 시간에만 허용이 되어 겨우 한 장을 찍었습니다. 말씀말씀이 귀하여 사실 사진 따윈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사인도, 인사도 다 소용없었습니다. 그의 글을 정성들여 읽었듯이 말씀 말씀을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강신주 작가의 책과 말을 들으며 사탕발림처럼 느껴지면서도 듣고 있다고 스스로도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그런 사탕발림은 인문학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말씀에 공감이 되었습니다.

 

[투명 사회]를 읽으며 [피로 사회]가 자연스레 떠올랐고, 그 둘 사이의 시간 동안 한결같은 생각을 지닌 저자에게 놀라기도 했는데 그 이후에 이어진 책들에서도 그 생각은 확장되고 연장되었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존경심이 생겼습니다. 앞으로 출간될 한병철 철학자님의 책을 다 챙겨 읽고 싶어졌고 빨리 번역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말과 글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익숙치 않은 언에에 달변일 수가 없었지만 빠져들었습니다. 그 시간들이 참 좋았습니다. 사람은 좋아하는 것이 먼저이고, 그 이유는 나중에 자연스레 밝혀집니다. [피로 사회]를 통해 철학자님이 좋아졌고 강연회 때 보니 그 이유 중 일부를 알게 되었습니다. 장자를 좋아하신답니다. 제게 종교가 있다면 장자일 것입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에 대한 호감도 같았습니다. 아마 비슷한 결을 가진 모양입니다. 그게 그렇게 행복했습니다. 좋아하면 괜시리 엮는다지만 저 역시 그렇게 그것을 운명처럼 엮었습니다.

 

평생 또 언제 강연을 들을 수 있을까요? 이런 마음 품은 이가 저 하나는 아닌 듯 질문들에도 애정이 묻어났습니다.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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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란 무엇인가 - 아름다움을 탐구한다>

(2014. 3.13 / 한길그레이트북스 인문학 특강 제6강)

 

 

 

 

 

 

 

 

 

 

 

 

 

 

 

 

 

 

 

댄 브라운의 소설 『다 빈치 코드』에서 박물관장 자크 소니에르는 피습당해 숨지기 직전 자신의 몸을 ‘비트루비우스의 비례도’처럼 눕힌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떠올리라는 암호다. 비트루비우스는 기원전 1세기의 건축가로 ‘자연이 빚은 인체비례’를 강조했다. 이를 재발견해 다빈치가 그린 그 비례도에는 가장 아름다운 체형은 ‘8등신’이라는 내용이 있다. 밀로의 비너스상은 대표적인 8등신 조각상이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들은 미(美)의 표상으로서 수천 년을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아름다움의 대상으로서 이러한 조각상에 대해 어떻게 수많은 사람이 문화와 언어 및 역사적 배경을 달리하면서도 유사한 공감대로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아름다움’을 가리켜 고대 그리스인들은 ‘칼로스(kalos)’라고 불렀다. 그들은 아름다운 것이 곧 선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즉 ‘선한 미’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이런 고대 그리스의 미적 이상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이 폴리클레이토스의 ‘카논’(canon)’이다. 조각가인 그는 황금 비율(1:1.618)을 인체 조각에 적용했다. 그리스 수학자 피타고라스는 인간이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비율을 '황금비'라고 이름붙이고, 이를 정오각형의 별을 통해 설명했다. 정오각형에서 짧은 변과 긴 변의 길이의 비는 5:8로 약 1:1.618의 비율인데, 이 비율이 가장 아름답고 안정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의 이러한 미의 이상 혹은 비례가 유일한 미의 가치 기준인가. 그것은 보편타당성을 지니고 있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 기준이 민족이나 지역,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말하기란 까다롭다(non so she, 말할 수 없는 것). 미학사를 보면 미의 정의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해왔다. 가령 중세 때 미는 현세보다 내세에 맞춰져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그러다가 르네상스부터 미는 대체로 예쁜 것이었고, 고대 그리스 예술을 동경하기도 했다.


14세기와 15세기에 접어들면 이탈리아에서의 원근법 발견이나 새로운 회화술의 확산, 피렌체의 수사, 사보나롤라에 의해 조장된 신비주의적 분위기 등의 영향으로 미에 대한 개념이 크게 바뀌게 된다. 당시의 미는 완벽한 수준으로 확인된 규칙에 따라 모방하는 것을 최고의 미로 간주한다. 유럽 박물관에서 찾을 수 있는 르네상스기의 세밀화, 인물화는 이와 같은 미를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르네상스기는 후대의 미가 어떻게 전개돼 갈지를 알려주는 데 손색이 없다. 엄격한 비례와 균형, 그리고 세밀한 묘사에 바탕을 둔 르네상스기의 미와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중심에서 이탈해 불안정하고 충격적인 모습을 지닌 미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18세기에 접어들게 되면 미는 미학적 주관주의의 모습을 지니게 된다. 이에 대해 데이비드 흄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는 사물 그 자체의 성질이 아니다. 미는 오로지 사물을 응시하는 사람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며, 모든 정신은 미를 서로 다르게 지각한다. 어떤 사람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부분을 다른 사람은 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각 개인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통제하려고 애쓰지 않으며 자신의 감정에 만족해야 한다.” 이후 인상파 화가들은 하루 중 어떤 시간에 본 풍경, 해안선, 인물의 인상을 자신이 받아들이는 데로 그림으로써 자신의 그림 속에 영원한 무엇인가를 표현하기를 바라게 된다. 19세기로 오면 미적 범주에 ‘추’(醜)도 포함된다. 이런 경향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들어설수록 심해진다. 그만큼 미의식이 부정적으로 되는 것이다. 현대예술의 미는 너무 분화돼 심지어 미 없이도 이해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중요하다. 그것이 내 느낌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미의 상대성이 이를 말해준다. 가령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은 목이 길수록 미인으로 간주해서 심지어 30cm나 되는 긴 목을 가진 여성이 있다. 또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 앞에 서 있다고 하더라도 부인이 죽어 슬픈 사람의 눈에는 그 풍경이 아름답게 보일 리 만무하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도 느끼는 것, 즉 객관적으로 공감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나와 대상은 미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칸트는 이것을 ‘주관적 일반성’이라고 표현했다. 미는 내가 느끼는 것(주관적)이면서 다른 사람들도 느낀다고 생각하는(객관적) 것이다. 따라서 미는 감각과 사고, 개인과 사회를 잇는 일이 된다. 이 매개 속에서 미는 현실을 성찰한다.

 

이러한 예들은 미학적으로 말하면 미적 향수 혹은 미적 판단과 관련된다. 칸트는 인간이 미를 판정하는 능력, 즉 취미 판단을 다룬 바 있다. 그것은 어떤 대상이 아름답다고 했을 때, 그 판단이 보편타당한 근거를 어떻게 지니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그는 “취미 판단은 미적이다”라면서 취미 판단은 ‘쾌 혹은 불쾌의 감정’에 관련되며, 그것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구상력이라고 봤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칸트가 말한 무관심성의 개념이다. 즉 어떤 대상이 아름다운가 아닌가를 판정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감각적인 욕구에서 벗어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나오는 그림의 떡(畵中之餠)처럼, 그림을 보면서 그림 속에 들어 있는 떡을 보고 군침을 흘리면 제대로 된 감상은 어렵다. 이때 실제적인 욕구를 억누르고 대상에 대해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우리는 그 대상을 가리켜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

 

감각만의 미는 반쪽의 미다. 감각이 사유와 연결되지 못한다면, 그 미는 거짓이다. 참된 아름다움은 자신과 타자, 현실과 이념을 잇고, 모든 사람이 공유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미에는 이런 과정이 결여되어 있다. 감각은 사고되지 않고, 외양은 내면과 겉돌기 때문이다. 예쁘고 젊고 날씬하고 섹시한 것이 미의 전부라고 여기는 사회는 가련하다. 가는 허리와 쌍꺼풀진 눈만이 미의 표본이라 불린다면, 우리는 이 표본을 누가 만들어내는지 물어봐야 한다. 유행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이 현실을 자기 식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미는 어떻게 생각하고 인식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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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블로그에서 새소식이 날아왔습니다. 드디어 인문카페 창비에 <신경림>시인이 오신다는 소식이였습니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알라딘을 알게 되고 책이라는 것을 단지 읽는 것에서 벗어나 책과 연관된 세계에

관심이 많아진 저에게..시는 어쩌면 가벼운 맘으로 펼칠 수 있는 두께가 얇은 책일지도 모른다는 상념을 가질 정도로

저는 어쩜 시에는 문외한입니다. 그래서 인문카페에 소식을 보고 몇번인가 시인이 초대될때 창비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고자 한 것이 낙엽이 날리우는 가을부터 낙엽이 다 날리고 스산한 바람이 바닥을 쓸고 가는 겨울 언저리에

그리고 하얀 눈으로 세상이 뒤덮이는 겨울의 절정을 지나 무거운 걸음을 뗀 것이 이번 시 낭송회 였습니다.

행사 신청을 응모하고선 신경림 시인의 <사진관집 이층> 시집을 알라딘에서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가벼운<?> 맘으로 시집의 첫장을 열었습니다. 저는 알았습니다. 시를 아주 쉽게 생각한 제가 한심스러웠고

책이라는 매체만을 사랑하는 제가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읽었습니다. 마냥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시집을

덮었습니다. 선생님을 뵈면 분명 이 시집은 저에게 아주 의미있는 책이 될꺼라는 걸 알기에 조급해하지 않았습니다.

 

 

시 낭송회 시간은 여유롭지만 아이 셋을 둔 엄마인 저는 늘 지각입니다.

수원에서 홍대까지는 제법의 시간이 소요되는데다 아이들의 저녁을 준비해두고 아이들을 단속해 두고 와야하는

저는 집을 일찍 나서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도 기왕 나선 길..늦더라도

선생님의 시 한구절밖에 못 들어도 좋다고 생각 하고 창비로 향했습니다.

 

 

 

신경림 시인을 뵈었습니다. 정말 연세를 가늠하기 힘든 젊음을 지니신 선생님은 처음 뵙는 저에게도

친근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지니고 계십니다. 저는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없거든요.

선생님은 정말 조용조용한 이야기꾼이셨습니다. 시낭송회라서 딱딱할까?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될까 궁금했는데 참으로 편안한 자리였고 다이나믹한 세상 속에서 접하기 힘든 정적과 침묵이 잘 어울리는

시를 읽는 시간, 시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였습니다.

 

처음 선생님께서 먼저 시를 하나 낭송해주셨습니다. 우크라이나 여행길에서 쓰셨다는 시였습니다.

선생님께서 여행을 시작한 것은 20여년 전이라 하셨습니다. 그 전에는 시대가 외국으로의 여행을 쉬이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권이 나왔다고 하는 연락을 받은 후로 선생님께서는 20여년동안 평생 할

여행을 다 하셨다고 합니다. 여행지에서의 이야기들이 참 재미났습니다. 선생님은 저 연세에도 여행다니시고

세상공부에 여념이 없으신대..젊은 저는 아직 한번도 해외로 나가는 비행기에 타 본적이 없습니다.

 

우크라이나 여행에서 놀라웠던 것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시인이 왔다고 하니 아주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을

뵈러 왔었다는 문학에 대한 사랑이 큰 나라임을 알았다는 말씀이 그리고 얼마전에 다녀온 일본 여행 이야기도

조근 조근 재미나게 풀어주셨습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선생님께선 혹부리 영감처럼 이야기 주머니를

안보이는 데 숨겨 놓으시고 계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신경림 선생님께서 첫번째 시를 낭독해 주시고 두번째 시는 초대되신 분중에서 한분이 읽어주셨습니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어머님이 서른해 동안 서울에 사시면서 오갔던 그 길에서 어머님은 만나는 사람이 이렇게 많고

듣고 보는 일이 이렇게 많은데 더 멀리 갈일이 무엇이냐는 것일 텐데..라는 말이..왠지 가슴에 닿았습니다.

이사를 앞두고 있어서인지..고향이 아닌 타향에 살고 있어서인지 선생님이 들려주신 어머님의 이야기가

나또한 나의 아이들에게 기억되는 모습이 이랬으면 하는 생각도 겹쳐 든 모양입니다.

 

선생님의 어머니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 남다른 분이셨구나 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훌륭한 시인을 키우셨을

꺼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선생님의 어머님은 시집을 오실 때 혼수로 많은 책을 가지고 오셨다고 책읽는 것을

좋아하시고 한겨레 신문의 애독자셨다는데요..저도 한겨레 신문을 애정하는 1인입니다. 공통점을 발견하며

사소한 것임에도 동질감이 느껴지는..그래서 낯선 공간인 이 곳에도 그리고 낯선 이들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마음 한자락이 생겨나는 것인가 하면서 생각의 꼬리를 물어봅니다.

 

그리고 위트 있으신 선생님의 마지막 한마디< 그런데 내 시는 안 읽으셨다>에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마 아들앞에서 읽지 않으셨지 분명 다 읽으셨을꺼라는..짐작도 해봅니다.

 

정릉동은 가보지 못했지만 선생님이 사셨던 동네이니 궁금합니다. 작가나 시인의 이름으로 거리 이름을 지음

참 좋겠다는 말씀에 동의해보면서 세번째 낭독 시를 들었습니다.

 

정릉에서의 어머니 이야기 다음은 안양에서의 아버지와의 삶 이야기였습니다.

돌아가시기전에 몸이 불편하셨던 아버지.선생님과의 사이가 썩 좋지는 않았지만 선생님은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을 당시..

아마 그 당시는 어쩜 불편하기도 힘들기도 하셨을 텐데 지나고 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하십니다.

어쩜 그렇게 힘든 것도 슬픈 것도 아픈 것도 지나가면 잊어버리기에 세상은 이리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 시집에서 내가 가장 맘에 들어하는 시를 선생님께 낭독해주셨습니다.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시는 선생님이 홍은동에 사실 적을 회상하면 쓴 시인가 봅니다.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 시절에는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있어 참으로 행복했다고 사는 재미가 있었다고

하셨어요.

 

천상병 시인이야기도 해주셨고 예전 홍은동산일번지에 대한 이야기도 참 재미있었습니다.

홍은동에는 번지수가 없었는데 편지를 주고 받기 위해 이름 붙인 것이 산일번지 였다 합니다.

 

낙천적인 사고를 가지신 선생님은 내일 할 일을 절대 미리 하지 않고 꼭 내일 하셨다고 해요.

그 말이 좋았습니다. 저도 늘 닥쳐야 하는 탓에 늦을 때도 있고 미처 미완성일때도 있지만 저는 만족하고 마는데요.

사실 어떤 때는 좀 미리 해두어도 좋을텐데 타고난 것이지 몸에 베어버린 것인지..아쉬울 때도 나름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도 시를 거의 쓰지 않고 방황했던 시기가 있어노라고 세상을 잘 모르고 있다가 마주하게 된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선생님이 쓰고 싶었던 시의 방향성도 이야기해주셨고

서정성만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던 시절에 꼭 시에 이데올로기 사상이 들어가야 하고 민족을 이야기 하지 않는

시가 무슨 시냐는 평도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시는 생명..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시가 아닌가 하셨습니다.

강한 민족주의를 가진 우리나라에 맞추어 그런 시를 써보고자 했으나 그것은 재미없는 일들이였고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보편적인 인간에 더욱 관점을 두고 시를 쓰고 계시다고 합니다.

보편..어쩜 변화와 격동에 시기에 부흥하는 것이 문학, 예술이기에 어쩜 그런 시대정신을 담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편의 가치를 담는다면 누구나 그것을 편안하게 만나고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했습니다.

 

 

그렇게 낭송회는 마무리가 되어가고 독자들은 선생님께 시를 잘 쓰는 법과 가장 질투하는 시인에

대해서도 물었습니다. 시를 잘 쓰는 법에 대한 대답으로는 잘 써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고

선생님께서도 시가 잘 써지지 않으면 쓰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어려운 답이였습니다. 시를 잘 쓰려면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고 가장 질투한 시인에는 백석, 박목월, 서정주, 임학선생님들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렇게 조용하고 차분하고 따스함이 가득했던 시간이 끝나고 선생님께서 사인을 해주시네요.

전 선생님이 힘드실까봐..사인은 받지 않고 왔습니다. 다른 분들의 사인이 많이 궁금했지만

제가 또 언제 선생님을 뵐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여하튼 80세의 연세를 전혀 실감할 수 없는 선생님을

뵈면서 시인은 왠지 사색이 가득하고 어쩌면 조금은 시크할 꺼 같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게 해주신

정말 정감어린 선생님을 뵙고는 2시간 가량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행복했고 지하철에서 다시금

시집을 읽어보았습니다. 이렇게 시에 대해선 백지 상태인 저에게도 선생님은 위대하게 보였습니다.

 

 

 

 

인문카페 창비에서는 저녁시간에 있는 행사에 꼭 커피와 음료, 간단한 간식거리를 준비해주시는데요..

커피는 약간 엷어진 느낌이구요..저 머핀이 제가 먹어 본 머핀 중에서 가장 맛있었던 머핀이였습니다.

 

 

 

 

언제나 창비와 문향에 다녀오면..맘이 설레입니다. 그곳은 현실세계와는 달리 왠지 분리되어져 있는

그곳에서의 시간들이 행복하기만 해서 그럴까요??여하튼 저는 그날 이후로 시 좀 아는 아줌마로 바뀌였습니다.

그렇게 시를 읽는 여유, 시를 이해하는 마음, 시를 즐길 줄 아는 독자로 거듭나고 싶다는 다짐도 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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