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얼굴들 - 빛을 조명하는 네 가지 인문적 시선
조수민 지음 / 을유문화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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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빛이다. 우리가 눈으로 구별하는 모든 사물은 빛으로 윤곽을 드러낸다. 반사된 색으로 컬러를 구분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고유의 빛깔로 오해한다. 태양과 조명처럼 발광체를 제외하면 모두 반사체에 불과하다. 스스로 색을 만드는 게 아니라 흡수할 수 없는 색을 되비칠 뿐이다. 우리는 사과를 볼 수 없다는 선언부터 생각을 뒤집고 관습적 사고에 경종을 울린다. 사물에 대한 감각적 인지 기능이 얼마나 오해의 산물인지 알게 되면 모든 것이 낯설다. 본다는 행위는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진실이라 믿지만 눈과 빛을 이해한 후에는 모든 게 의심스럽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들은 이야기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빛으로 세상을 읽는 조명디자이너 조수민의 『빛의 얼굴들』은 개인적인 취향을 저격한 책이다. 전복적 사고, 낯설고 신선한 관점, 새로운 지식과 정보, 대상에 대한 저자의 애정, 일정한 거리두기를 통해 객관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까지 읽고 싶은 책의 요소를 두루 갖췄다. 조수민은 빛과 조명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깊다. 오랜 ‘업력’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공부와 관찰은 객관적 설명만으로도 읽은 이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며 깊은 관심을 유도한다. 빛은 직진한다는 단순한 사실에서부터 달이 반사체라는 사실까지 빛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며 저자는 빛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특히, “이 시간 동안 이 각기 다른 두 가지 하늘빛은 하늘을 뒤덮으며 하루 중 그 어느 때보다 근사한 장면을 연출한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이 땅 위의 모든 존재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어 주는 이 아름다운 빛의 시간을 우리는 ‘골든아워Golden hour’라고 부른다.”는 설명에 공감하며 하루에 두 번 지구가 빚어내는 빛의 향연에 공감했다. 단순히 석양을 좋아한다는 시각적 현란함을 넘어 골든 아워가 주는 위로와 감동이 인간의 생체 리듬과 맞물려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골든 아워 : 태양이 뜨고 지기 약 30분 전후, 일광이 금색으로 빛나는 황혼의 시간을 일컫는 말. 사진, 영상, 분야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로, 매직 아워Magic hour라고 불리기도 한다. ‘라디오나 텔레비전 방송에서 청취율이나 시청률이 가장 높은 시간’ 또는 ‘심장마비나 호흡 정지, 대량 출혈 등의 응급 상황에서 인명을 구조할 수 있는 금쪽같은 시간’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한다.

직사광과 천공광에 대한 설명은 집안 곳곳에 천편일률적으로 배치된 형광등과 간접 조명 효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밝기에 따른 느낌과 분위기는 빛의 색감, 눈의 피로, 사물의 형태까지 영향을 준다. 맑은 하늘에 햇빛이 쨍한 날과 회색 구름으로 뒤덮여 흐린 날의 차이는 생각보다 단순하지만 그 의미와 활용은 인공 조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람들의 99퍼센트는 빛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100퍼센트는 빛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라는 조명 디자이너 제니퍼 딥턴이 새삼스럽다. 읽을수록 우리가 아는 빛과 내 삶에 영향을 주는 빛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했다. 빛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빛이 공간을 채우는 방법, 공동체 사회에 미치는 빛의 영향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높지도 크지도 않다. 감성에 호소하지도 않고 개인적인 취향을 직접 드러내는 부분도 많지 않다. 오랫동안 조명을 디자인하며 생각하고 느낀 빛에 대한 철학과 좋은 조명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고 있지만 주장과 설득이 아니라 설명과 조언에 가깝다.

수천만 원짜리 루이스 폴센의 조명이 아니어도 좋다. 수입산 명품 조명이 아니면 어떤가. “좋은 조명은 비싸지만, 좋은 빛은 비싸지 않다.”라는 저자의 말은 비싼 조명을 산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빛 환경을 얻는 것도 아니며, 좋은 빛을 얻기 위해 무조건 고가의 조명을 사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조명의 재료와 가격이 아니라 공간에 어울리는 조명의 위치와 배열이 좋은 빛을 만드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무와 동식물의 기름, 석탄과 석유의 시대를 지나 전기로 빛을 만드는 시대가 되었다. 인류의 밤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밝아졌으며, 어둠을 밝히는 일은 이제 더 이상 부유층만의 특권이 아니다.” 오히려 빛 공해가 인류의 밤을 괴롭힌다. 눈부시게 밝고 환한 빛은 문명발달을 상징한다. 그러나 불면과 각종 질병을 유발하기도 하고, 자연의 순환에 맞춰진 인간의 생체 리듬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도 한다. 적절한 빛, 좋은 조명은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알면 사랑하게 된다. 빛과 조명에 대한 앎이 사물과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더 나은 삶에 영향을 준다. 조수민이 말한 빛의 얼굴들은 생각보다 다양하고 아름답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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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푼짜리 오페라.남자는 남자다 을유세계문학전집 54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김길웅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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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날 수밖에 없는 사람은 없다. 읽어야만 하는 책이 없는 것처럼. 사건의 우연성은 근대소설의 특징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송곳이다. 도서관 서가를 산책하다 우연히 집어 든 책 『서푼짜리 오페라』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대표작이다. ‘남자는 남자다’가 앞에 실렸으나 제목은 순서가 바뀌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에이비드 핸드의 말을 그대로 신뢰한다면 누군가를 만나고 어떤 책에 손이 가는 건 관심과 선택의 과정을 거치는 희박한 확률이지만 불가능하지 않은 사건이다. 우연을 부풀려 운명을 창조하고 필연을 강조하려는 태도만 버린다면 해석 없이 사태를 받아들일 수 있다. 시간은 흐르고 세계는 변하며 인간은 죽어간다. 극단적 허무와 염세주의가 아니라면 나름의 방식으로 세계를 수용하고 적응하며 사는 게 모든 생명의 본질이다.

우선 앞에 실린 「남자는 남자다」에 관한 이야기다. 정체성을 포기하고 집단 속에 편입하는 과정을 치밀하게 묘사한 이 작품은 갈리 가이의 내면 풍경 대신 외부적 효과와 상황적 아이러니를 적극 수용한다. 집단의 일원으로 개조된 갈리 가이는 자동화기 분대원 누구보다 가장 군인다운 군인, 즉 전쟁 기계로 변한다. 개인의 정체성이 소멸하는 극한 상황이 전쟁이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브레히트는 부품처럼 개인을 대체할 수 있는 군대조직의 비인간적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인간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전혀 다른 존재로 변신 가능하며 집단 속에서 역할과 의미가 개인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면에서 이 작품은 여전히 개인과 집단의 관계를 묻는다. 사적인 존재로서 갈리 가이가 아니라 집단 속에서 갈리가이는 강한 힘을 발휘한다. 나약한 개인이 사라지고 자기 역할과 임무에 충실한 조직의 일원으로서 ‘남자’는 진정한 ‘남자’가 되는 걸까.

브레히트가 이 비인간적 파편적 존재로서 개인을 긍정하는 이유는 세계 변혁의 가능성 때문이다. 집단 속의 개인을 중시하는 전체주의적 발상은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삭제된다. 이후에는 반파시즘, 반군국주의적 경향이 뚜렷해진다. 진정한 사회주의 집단의 힘은 개인의 부정에서 출발한다. 같은 맥락이지만 지향점과 방법에서 차이가 날 뿐이 아닌가. 여러 차례 개작되었다고 하나 작품 외적 영향과 브레히트의 사상적 변모를 모두 추적하며 읽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통해 사회 변혁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작품 곳곳에 낯선 시도로 반영되어 있다. 형식은 내용을 규정하고 내용은 형식을 창조한다. 인도 주둔 영국군 자동화기 분대의 활약상은 거절 못하는 사나이 갈리가이가 제라이아 집으로 변신하는 과정과 맞물려 시대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한다. “폴리 살아 있는 가장 비속한 것, 가장 연약한 것이 인간이야.”라는 직설 화법이 굳이 갈리 가이의 성격을 드러낸다고 읽히지는 않는다. 등장인물 누구도 ‘연약함’에서 자유롭지 않다. 산전수전 다 겪은 군인부터 생선파는 여인까지 그렇다. 각자의 연약함은 신념과 가치의 혼란이다.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 만큼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게 있을까. 정치적 이념, 종교적 신념, 삶의 가치관 모두 그렇다.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다는 자신감을 가진 사람과의 관계는 잔인한 형벌이다. 반면 갈리 가이처럼 적응형 인간의 민낯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어쩌면 그것이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우리의 내면에 가깝기 때문이겠지만. 어느 쪽이든 극단은 중도를 이기지 못한다. 중용의 도는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

1928년 베를린에서 초연된 『서푼짜리 오페라』는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성공을 거뒀고 브레히트를 세계적인 극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미 산업혁명이 진행된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이 작품은 병들고 타락한 시민사회의 질서에 대한 비판을 읽을 수 있다. 거지 두목과 갱스터의 단순한 갈등이 아니라 경찰과의 유착관계,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관점 등 일그러진 사회의 단면들이 폭로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정의와 불의는 같은 옷을 입고 서로의 얼굴을 가린다. 그럴듯한 외피를 걸친 사람들의 속내가 자본주의 욕망과 닿아 있고 그것은 다시 시민사회 질서를 깨는 부도덕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경찰이 도둑과 내통하고 사랑도 상품처럼 사고파는 대상이라는 사실이 시민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하다.

피첨과 매키스는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며 착취를 일삼는다. 그 대상은 물론 선량하고 힘없는 시민과 동료다. 거지, 창녀, 깡패로 표현된 그들은 사실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그들이 겪는 관계 양상과 자본으로부터의 소외현상은 고위공무원, 대기업 사원, 전문직 종사자의 관계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생존을 위한 경쟁,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외면하는 모습은 시대의 변화가 무색하게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민사회의 도덕적 기본 원리인 가족, 결혼, 신뢰도 결국 물질적 토대를 유지하는 수단이라는 설정은 뼈아프게 다가온다.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자본과 권력이 정의와 공정의 가치까지 독점하는 현대 사회에서 더욱 절실하다. 브레히트의 희곡이 여전이 무대에 올려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현실의 모순을 인식하고 문학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은 브레히트는 마르크스의 영향을 문학에 반영했다. 독자가 현실의 모순을 깨닫고 변화가 시작될 거라는 나이브한 생각은 낭만적 사랑만큼 허망해 보인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혁명에 대한 열정과 세계 변혁을 추동하는 힘은 브레히트의 꿈에서 출발했던 게 아닐까.

극 중에 삽입된 노래, 서사극과 비유극의 형식적 실험 등 전통에서 벗어난 도전이 브레히트를 또 다른 면에서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걸거나, 극중극, 화자의 등장 등 낯선 요소는 이질적이지 않고 새로움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가는 면이다. 물론 초연될 당시에 이런 요소는 파격에 가까웠을 테지만 낯설게 하는 효과는 시대를 막론하고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즐거움이다.

이 작품은 존 게이의 『거지의 오페라』를 원작으로 했다. 극의 중심축을 이루는 칼잡이 매키와 조나단 제레미아 피첨의 갈등은 서민들의 아귀다툼 같은 비극이다. 가진 자들의 싸움이 아니라 없는 자들 간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 가깝다. 그들은 물론 자본을 이용해 권력과 결탈하지만 결국에는 파멸에 이른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편견은 삶을 불편하게 한다.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하지 못한 시스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그들만의 잔치와 패권 놀음이 때때로 우리를 슬프게 한다. 맹목적 지지와 몰입으로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의 감정과 분노는 희극에 가깝다. 서푼짜리 오페라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 혹은 교훈이 있다면 현재를 사는 각자의 태도와 방법에 따라 다를 것이다. 어차피 모든 해석과 평가는 작품을 거친 개인적 트림에 불과한 것.

무대 뒤에서

도대체 인간은 무얼 먹고 사나요?

도대체 인간은 무얼 먹고 사냐고? 시시각각

사람을 괴롭히고, 벗겨 먹고, 덮치고, 목 졸라 퍼먹지.

인간은, 자신이 인간임을

철저하게 망각함으로써만 살 수 있어.

- 2막 6장, 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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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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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주는 지속적인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의외의 각도에서 접근하여 우리의 걸음을 멈추게 하고 감탄을 자아내는 힘이다. - 347쪽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을 선언했다. 텍스트를 저자의 의도에서 해방시키고 독자에게 자율권을 준 것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화가의 죽음, 즉 예술가에게 사망 선고를 할 수는 없을까. 그림과 음악은 인간의 눈과 귀라는 원초적 감각 기관으로 수용한다. 표현론적 관점을 떠나 오로지 독자 혹은 관객에게 도달하는 순간 텍스트와 오브제는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의 대상일 뿐이다. 도슨트의 설명이나 평론가의 비평은 누구 말마따나 소 등짝에 앉은 파리처럼 들리지도 않고 효과도 없는 잔소리에 불과한 게 아닐까. 줄리언 반스도 “화가는 그림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들을 깊이 불신한다.”라는 헨리 제임스의 말과 “한 예술형식을 다른 수단으로 설명한다는 건 무도한 행위다. 세상 모든 미술관에 해설이 필요한 그림은 단 한 점도 없을 것이다. 미술관 안내서에 설명이 많은 그림은 그만큼 좋지 않은 그림이다.”라는 말로 그림 설명 따위는 필요 없음을 강조한다. 닥치고 보라는 말일 터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쉴 틈 없이 화가와 그림에 대한 ‘뒷담’을 멈추지 않는다. 400쪽 가까이 떠들고 난 후 “이만하면 말은 할 만큼 했다.”는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요설에 가까운 수다와 소설적 상상력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자 단점이다. ‘아주 사적인’이라는 수식어는 매우 주관적이다. 미술 비평의 무게와 책임에서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애정 어린 시선과 자유분방한 형식으로 다양한 형식의 접근을 시도한다. 산책에 값하는 줄리언 반스의 속도에 발을 맞추면 화가들의 일기와 기록과 평론을 종합한 거대한 구조물 안으로 걸어온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단단한 소설처럼 구체적이고 편안한 에세이처럼 다변적이며 비평처럼 날카롭고 진지하다.

비접촉, 비대면 시대라도 인터넷으로 그림을 감상하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지식과 정보는 습득할 수 있는 예술이 내포한 아우라에는 근접조차 할 수 없다. 원본이 갖는 색감과 분위기뿐만 아니라 감상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그림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상상력을 즐기기 위해 관객의 추측과 오해를 덧붙일 수는 없지 않은가.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로스의 죽음>,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은 책에 소개되어 있지 않아 아쉬운 대로 LCD 혹은 OLED를 거친 빛의 조각들이 망막에 투영된 그림자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책에 실린 화보 정도가 예술 감상의 최소한이라고 생각한다. 전쟁 기념관에서 본 클로드 모네의 <빛을 그리다>에 가서 느낀 허망함을 잊을 수가 없다. 시뮬라시옹(Simulation)으로 구축한 시뮬라크르(Simulacra)는 예술에 대한 조롱으로 느껴졌다. 개인적 취향이겠으나 눈의 간사함을 부추기고 간접경험을 권하는 사람들의 장난질로 여겨질 뿐이었다. 발터 벤야민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 아닌가.

하여, 현대인에게 예술이란 자기 삶을 고양시키는 최소한의 방편이거나 교양과 품위를 완성하기 위한 도구로 기능한다. 물론 예술이 유한계급의 고급스런 취미라는 사실은 여전히 불변의 사실이지만 대중에게도 그 기회가 주어진 예술 민주주의가 방구석 애호가들을 즐겁게 한다. 줄리언 반스가 아니라면 쓸 수 없는 미술 감상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미술관에 가 그림을 감상하고, 도록을 뒤적이며 그림에 얽힌 매혹적인 이야기를 듣는 일은 오래된 추억 여행처럼 아련하다. 지난 역사의 단면을 살피고 당대를 살아낸 사람들을 관찰하고 시대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는 일은 그림을 보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린 화가들, 보이는 것을 자기만의 빛과 그림자로 표현한 그림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예술적 감동과 영감을 선물한다. 텍스트로 전해지는 역사, 과학적 사실로 증명된 사실 너머에 이성과 감성이 어우러진 화가의 내면과 마주하는 일은 때때로 즐겁기만 한 일은 아니다. 재현된 과거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수많은 말을 건네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일은 순전히 개인의 몫이다.

줄리언 반스는 그 과거를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를 거쳐 모더니즘에 이르는 시기로 한정한다. 이 시기는 1850~1920년 무렵으로 흔히 ‘벨 에포크belle époque’라고 명명한다. 좋은 시기,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의미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인류 역사상 가장 자유분방하게 다양한 사상과 예술적 상상력이 발휘되던 시기다. 1946년생인 저자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이해하기 위한 직전 시대에 해당하며 현생 인류에게 가장 추억하고 싶은 아름다운 시절이다. 소설가의 미술 이야기는 제리코에서 출발한다. 충만한 똘기로 가득한 화가의 성격은 물론 작품의 탄생 배경, 이면에 숨은 이야기는 소설가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문학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예술작품은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당대의 역사적 사건, 사람들의 관심사, 사상사의 흐름과 세상을 보는 관점이 그림에 녹아 있다. 선과 색의 대결로 요약한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자존심 대결은 흥미롭다. 르동에 의해 정신적인 색을 건드린 작가로 평가받은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로스의 죽음>은 화가 개인의 해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벨 에포크의 그리스인이라는 세잔에 대한 평가,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에 대한 해석 또한 익숙한 그림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화가는 발로통이다. 우울증과 신경쇠약으로 고생한 발로통의 <석양 풍경>(1919)이 매혹적이다. 그의 그림을 10년 단위로 구분해보면 일몰을 그리지 않은 시기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일몰을 그리면서도 일출은 전혀 그리지 않았다. 소개된 화가들의 그림을 일일이 찾아보며 읽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지만 책에 소개된 그림만으로는 이 책의 재미를 절반도 얻지 못한다.

예술가의 ‘도덕성’은 치욕에 가까운 말이지만 브라크가 보여준 엄결한 정신은 사적인 영역의 윤리의 문제와 차원이 다른 사회적 책무와 도덕적 태도를 의미한다. “브라크의 도덕적 권위는 공공연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의 침착성과 침묵, 예술을 통한 사회참여에는 무언가, 부지중에, 도덕적으로 열등한 사람들을 폭로해내는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권위는 결국 그림 자체에서 나온다. 그 형태감과 균형감, 조화로운 색감―사실성에 대한 진지함, 예술에 대한 충실성―은 다름 아닌 도덕성에 기초한 것들이다.” 평범한 일상인으로서 삶을 대하는 태도, 타인과의 관계, 세상을 향한 발언은 그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 법과 질서, 일상의 규범 안에서 상상력은 숨을 쉬지 못한다. 이 모순이야말로 모든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이해는 가장 근본적인 해석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데이비드 실베스터는 1992년 연구서 마지막 구절에서 마크리트의 작품을 “일식이 일어날 때의 경외감 같은 감정”을 유발한다고 평가했다. 수많은 평론가의 해설과 마찬가지로 줄리언 반스의 설명 또한 객관을 가장한 주관적 감상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론 뮤익의 《죽은 아빠》와 같이 예술은 문외한인 우리에게도 언어로 발화될 수 없는 깊은 울림을 주고 공감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며 이성적 사유를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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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이해관계
임현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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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한 이유를 알 수 없다. 아니,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은 지도 모른다. 특히 한국 현대소설과 심리적 거리감이 생긴 지 오래다. 취향은 변하고 입맛도 달라지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자연스러운 변화에 의도적 거리 두기가 보태졌다. 그래서 오랜만이란 말이다. 임현의 단편들은 끊긴 듯 이어져 있다. 대개 소설집은 한 작가의 시절 관심이다. 현실을 바라보는 태도가 반영되어 인간과 세계에 대한 관점이 드러난다. 표제작 「그들의 이해관계」가 2017년부터 2020년 사이에 소설가 임현이 주목한 화두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관계’ 양상에 천착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해주, 도경, 종구, 해원, 노아, 명조, 연재, 연희 등 등장 인물의 내적 갈등은 대개 관계로부터 출발한다. 소설이 아닌 현실도 마찬가지겠으나 원인을 알 수 없는 근원적 고독이나 존재론적 통증을 호소하는 인물은 드물다. 드물다는 말은 없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면 재미 없지 않은가. 현실의 반영론적 관점에서만 소설을 읽는다면 오히려 현실 도피 혹은 현실에 대한 외면이 아닌가.

1인칭 나레이터인 주인공이 겪는 일들은 누구나 경험할 만한 보편적 서사다.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거나 사별하고 은퇴한다. 아내나 남편이 죽고 아버지가 사망한다. 비현실적이지는 않으나 확률이 거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부조리한 현실과 마주한 개인은 거대한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고 방황한다. 오죽 답답했으면 혼자 떠드는 한 편의 소설을 써야만 했을까. 임현은 현실의 이면을 드러내는 일보다 하나의 사태가 빚어내는 다양한 층위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 관심을 둔다. 어차피 이야기로 진실을 드러낸다거나 변혁을 시도하는 게 아니라면 현실의 단면을 드러낸 일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나는 그렇습니다. 사람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어느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게 되면 결국엔 경로를 벗어나 버리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한쪽이 자꾸 좋아진다는 것은 누군가 나쁜 쪽을 떠안게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그들의 이해관계」, 27쪽) 모든 이해관계는 쿠이보노cuibono다. 고대 로마인들이 던졌던 질문이다. 원인을 모르는 일이 벌어졌다면 가장 먼저 그 사건이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지 질문하라는 것이다. 대개 관계가 절단나는 이유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해관계를 금전적 득실로 오해하기 쉽지만 모든 관계는 평등하지고 서로의 이익이 균등하지도 않다. 물론 여기서 이익은 행복, 기쁨, 만족을 포함한다. 연인도 친구도 만나서 생기는 두근거림과 즐거움이 없다면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임현이 말하는 ‘그들의 이해관계’는 거시적이긴 하지만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될 수도 있고, 나의 불행이 타인의 즐거움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소설의 본질은 이렇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인간의 본심을 드러내고 욕망의 바닥을 보여주며 설명할 수 없는 관계 양상이 정리되지 않으면 깐다.

안톤 체호프는 “외로움이 두려우면 결혼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사랑하는 연인, 결혼한 부부에게 외로움은 필수다. 무언가 극복하기 위해, 결핍을 채우기 위해 형성된 의존적 관계는 지속되기 어렵다. 아홉 개의 단편 중 「거의 하나였던 두 세계」에 오래 머물렀다. 경구 강박을 고백한 소설가 김연수는 시를 쓰면서 문학에 입문했음을 증명하듯 힘을 준 문장들이 독자를 사로잡는다. 단순한 미문이 아니라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확보한 문장들이 보석처럼 빛날 때 단편은 이야기의 재미를 넘어 영혼에 새겨진다. 윤대녕식 안개주의보와 달리 문체와 분위기가 독자를 무너뜨리거나 단단한 생각의 깊이와 아포리즘 같은 문장들이 오래 눈길을 끌기도 하는 경우가 그렇다. “관점에 따라 같은 것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말에는 만약 아무런 태도나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면 무엇도 볼 수 없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다. 요컨대 우리는 의미 있는 무언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는 무언가에 의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같은 문장이다. “나는 진실의 반대말이 주로 거짓이나 가짜라고 배워왔는데, 살면서 오히려 무지에 더 가까운 개념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많았다. 무엇보다 나는 종종 진실을 알고 있다고 오해할 때가 많았고, 그것이 잘못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은 대체로 무언가를 더 알게 되었을 때였으니까.”라는 문장도 마찬가지다. 외롭지 않으면 소설을 읽지 않는다. 동화 같은 현실, 행복한 하루하루를 사는 연인은 소설을 읽을 틈이 없지 않은가.

누군가는 오늘도 소설을 쓰고 어디선가 그 소설을 읽는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사람들은 읽는 동안 그리고 읽은 후에도 더 깊은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는 사람에 대해, 누군가는 세상에 대해, 또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짓는다. 그리고 우리는 읽는다. 읽는 행위 자체의 숭고함이 그 많은 이야기 너머의 세계를 가늠하게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소설을 읽는 시간은 현실 밖으로 여행을 떠나는 시간이며 오롯이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소설가와 독자의 ‘이해관계’가 그렇게 잘 맞아떨어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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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를 권하다 -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내 인생에 지혜를 더하는 시간, 인생명강 시리즈 5
이진우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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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말처럼 21세기의 메가트렌드는 의심할 여지 없이 개인화individualization가 되었다. 개인주의는 근대의 발명품인 ‘낭만적 사랑과 연애’의 전제 조건이다. 21세기에 다시 유행하는 건 더이상 몰개성적 집단주의와 전체주의가 설 자리를 잃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특히 코로나 감염병이 가져온 비대면, 비접촉 시대의 생존 방식으로 개인주의가 확고하게 자리 잡을 거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다. 그간 숱하게 쏟아져 나온 개인주의 예찬과 독려에 이진우가 힘을 보탠다. 제목처럼 개인주의는 권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생존을 위한 옵션이 아니라 자기 삶의 기본값으로 설정해야 한다. 니체와 한나 아렌트를 소개하며 방송을 탄 저자의 말솜씨는 글솜씨 못지않다. 기막힌 문장을 쓰는 작가의 어눌한 말투에 놀란 적도 있고 달변가의 쓰디쓴 문장을 읽어본 적도 있다. 말과 글을 두루 갖추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강의라도 한 문장씩 자신의 속도와 호흡에 맞춰 ‘읽는’ 행위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말을 ‘듣는’ 행위와 분명하게 차별화된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오디오북이라는 말이 생경하다.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분석해보면 내면의 욕망과 지향점은 물론 자존감과 콤플렉스까지 고스란히 들여다보게 된다. 오래 사귀고 깊이 아는 관계는 그만큼 불편하기도 하고 감내해야 할 것들이 적지 않다. 적당한 거리 두기는 코로나 시대 이전부터 사람과 사람 사이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예의다. 자기감정을 쏟아내는 친구, 배려와 헌신을 요구하는 연인, 사랑과 봉사를 원하는 가족, 우리가 남이냐고 묻는 선후배, 가족처럼 지내자는 직장 동료 등 선을 넘는 오지라퍼들은 타인의 불편함보다 자신의 만족감이 우선인 것처럼 행동할 때가 많다. 참견과 조언은 백지 한 장 차이다. 관심과 스토킹은 받는 자가 판단한다. 사적인 질문과 호기심을 친근감으로 포장하지 말아야 한다. 상대방의 불편함을 고려하지 않는 모든 말과 행동은 폭력이다. 침묵은 금이 아니라 때때로 무시와 분노의 표현이다. 이 모든 말과 행동이 ‘개인주의’라는 이름으로 허용된다는 착각이 개인주의에 대한 오해다.

이진우는 일상에서 맺는 모든 관계의 출발을 ‘자기 사랑’이라고 본다. 심리적 생존을 위해 ‘미니멀 자아minimal self’를 제안한다. 그러나 한국은 개인이 없는 사회다.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근대사회에 비해 개인화되었음에도 진정한 개인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개인’이란 권리의 주체로서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가진 사람이다. 사회학자 송호근은 우리가 아직 성숙한 시민사회를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시민사회의 시대에 한국에는 ‘비시민’이 넘쳐난다”고 진한단다. 시민 정신이 없는 시민은 사적 영역에 웅크린 이기적 인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에는 ‘개인’이 보편화되어야 사회가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할 수 있다.(90쪽)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이기주의의 포장지로 사용하는 ‘개인주의’는 권리의 주체로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가진 사람과 거리가 멀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어떤 사람은 자신을 찾으려고 이웃에게로 가고,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을 잃고 싶어서 이웃에게로 간다. 그대들 자신에 대한 그대들의 그릇된 사랑은 고독을 감옥으로 만든다.”라고 말했다. 고독을 감옥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코로나 이후, 즉 비대면, 비접촉 시대의 개인주의는 이웃과의 교류에 자기만의 방식과 타인에 대한 배려, 역지사지의 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인스타에는 불행이 없다. SNS는 언제나 정의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을 타고 흐르는 지식과 정보는 오히려 개인의 눈과 귀를 가린다. 이진우는 생각하는 나를 ‘이성적 사고의 산물로 계획하고 구상하는 콘셉션concetion’으로, 느끼는 나를 ‘자기 자신과 만나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인 지각인 퍼셉션perception’이라고 표현했다. 대체로 인간관계는 퍼셉션으로 결정되며 중요한 선택과 판단의 순간에도 콘셉션이 오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노멀크러시normal crush’를 꿈꾸는 사람은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평범한 것에 반발하다’는 의미지만, 숨은 뜻은 ‘사회가 정한 기준을 따르기보다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을 즐기는 것’이다. 과시적 소비 욕망이나 보여주기 위한 컨셉이 아니라면 개인주의자는 특별함과 평범함의 가치를 전복하는 사람이다. 이진우는 ‘모난 돌이 먼저 정 맞는다’는 속담을 “정상성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특출나고 다르면 한국 사회에서는 그 태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둥글둥글하고 모나지 않은 조약돌 같은 사람만이 집단에 수용된다. 개성을 추구하다가는 당장 타인의 시선에 걸려 배제되고 매도되며 경멸당한다.”라고 해석한다. 튀지 마라, 왜 너만 그러느냐,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왜 남 생각은 안 하느냐, 너가 그러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일상에서 개인을 죽이는 말로 활용되는 수많은 조언과 충고를 견뎌낼 자신이 없는 사람에게 과연 이진우가 권하는 ‘개인주의’는 얼마나 효용 가치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앞섰다. 밤하늘을 보며 잠시 생각해 보자. 누구나 알고 있지만 쉽게 바뀌지 않고, 누군가 고쳐줬으면 내가 나서기는 싫은 일들에 대해.

압축 성장이 만든 기형적 한국 사회에서는 시민사회가 이중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대한민국은 겉으로는 오랜 시간 민주화 운동을 거치며 시민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이룩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시민이 없는 국민국가 형태다. 시민이란 행위에 책임을 지며 공공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구성원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구성원 대부분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할 뿐 공공의 가치나 이익에는 별 관심이 없다. - 개인주의를 권하다, 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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