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랭 머랭 - 우리시대 언어 이야기
최혜원 지음 / 의미와재미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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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문장을 읽었을 때 충격이 생각난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규정한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내게 꽃이 되듯, 사물과 타자가 의미를 가지는 건 호명을 통해 존재를 규정할 때다. 그래서 동시대인, 같은 세상을 살아도 각자의 세계는 차이가 크다. 생각하고 느끼는 범주의 크기가 세계의 크기다. 직업, 재산, 성별, 학벌, 종교, 인종, 나이와 무관하게 인간은 각자 다른 언어를 통해 저마다의 크기에 맞는 세계에 산다. 

그 세계가 타인의 세계와 다르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면 낭패다. 삶의 목적과 가치, 방법과 태도의 차이는 각자 구축한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각개전투가 아닐까. 언어학자 최혜원의 『휴랭 머랭』은 각자 구축한 세계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공유하는 세계를 점검한다. 공동체의 언어는 시대를 조망하고 욕망을 가늠하며 그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을 짐작할 수 있는 바로미터다. 

제목 ‘휴랭human language’은 인간의 언어 줄임말이다. ‘머랭machine language’은 기계의 언어를 줄였으나 우리말 ‘뭐라는 거야?’라는 의미의 ‘뭐래?(머랭?)’이라는 의미도 있고, 억지스럽지만 ‘머랭meringue’의 동음이철어로 읽을 수도 있다. 책 내용은 제목처럼 약간의 아재(?) 개그―아재의 정체성이 있는가. 언제부터, 몇 살부터, 남성만의 전유물로서 아재 집단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나 아재의 대척점에 있는 아지매 개그는 왜 불가능한가. 아니, 처녀총각, 애기어른 개그는 가능하지 않은가. 유감이 많지만 일단 논점일탈이니 접어두자―를 섞은 유머 코드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는 비속어, 은어, 유행어가 난무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책을 읽기 전에 저자 혹은 작가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은 내용의 전반을 지배하고 때때로 후광효과를 발휘한다. 유명 저자의 경우 특유의 아우라로 독자를 억압하고, 짓눌린 독자는 책의 내용이 아니라 독서 행위 자체에 감읍하기 일쑤다. 특정 직업, 학력, 성별, 인종, 종교, 나이도 같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으니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 

아무튼 이 책은 ‘언어학자’라는 표피를 벗겨내면 언어학 일반 이론에 대한 대중적 재미와 우리시대 언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라는 의미를 함유한다. ‘의미와재미’라는 출판사 이름은 그런 의미에서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언어는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트렌드를 포착한다. 언어는 말과 글을 포괄하지만 말과 글은 전혀 다른 층위다. 언어학자인 저자는 그 차이를 설명하느라 애쓴다. 아무리 텍스트의 종말을 알리는 종소리가 세상에 울려퍼지고 있으나 이 책을 읽는 독자만큼이라도 말과 글의 힘을, 언어가 인간에게 주는 재미와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봤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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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캥거루 문학과지성 시인선 563
임지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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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시집도 온라인으로 고른다. 이게 다 ‘코로나’ 탓이라는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다. 밀린 숙제를 하듯 혹은 배부른 허기를 채우듯 시집을 게걸스레 먹어치우고 싶을 때가 있다. 포만감은 느껴지지 않고 더 큰 공허와 무기력에 빠질 때도 있으나 가끔 발바닥을 간질이는 문장을 만나고 겨드랑이가 움츠러드는 표현 때문에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시는 종이로 된 시집을 읽어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인용과 crtl+v가 편리한 방법이라는 착각은 시가 주는 깊은 맛과 의미를 포기하는 일이다. 

문지와 창비 시집에도 옥석은 있다. 아니, 취향이 갈린다. 독자마다 다른 입맛 때문이기도 하고 나이, 상황, 감정, 건강, 계절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할머니는 욕을 밥 먹듯이 했다 하루에 한 끼만 드셔야 할 듯’이나 ‘애인에게 이럴 거면 헤어져,가 튀어나오려는 걸 이러지 말자고 고쳐 말했다’는 「언어 순화」가 내게도 필요했기 때문일까. 처음 만난 임지은의 『때때로 캥거루』가 하루를 채웠다. 언어의 깊이와 무게, 이미지를 포착하는 능력 따위는 분석하는 일은 모르겠으나 시인은 ‘유머’라는 강력한 무게를 장착했다. 사람들은 흔히 아재개그를 단순한 언어 유희로 폄훼하지만 명징한 언어의 이면을 들추는 일, 다양한 컨텍스트를 활용하는 방법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재능이 아니다. 아니, 어지간한 노력으로 챙길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다. 임지은이 아재 개그를 한다는 게 아니라 언어를 향한 탐닉의 정수에 유머가 놓여 있다는 말이다. 유머는 긴장을 늦추고 관계를 변형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관계는 문제가 없는데 사람이 문제인 걸까요 관계없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다가 아, 저 사람은 관계가 필요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이 있고 영영 못 보게 되는 사람이 있고 -「잘잘못」중에서

이렇게 관계양상을 정확히 비틀기도 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의 수가 

두 손을 합친 것보다 많다 

손가락이 열 개뿐인 건 죄가 아니다 

-「죄가 아니다」중에서

자신을 항변하기도 하며, 관계맺기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어쩌면 삶이 곧 관계이며, 그 관계에 대한 태도가 자신의 본질이기도 하다. 참고 견디는 일이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씨를 호출하고, ‘구태여’ 씨가 등장하기도 한다. 러시아 ‘형’식주의를 호출한 시인의 재치와 타인에 대한 애정 혹은 타인으로 인한 고통은 일반화하기 어렵다. 

사랑 혹은 이별의 고통에 대하여,

한밤중에 전화를 끊는 사람은 

가끔 알약처럼

잘 삼켜지지 않으므로

머리맡에 물 한 컵이 필요하다

-「사람이 취미」중에서

이렇게 직설법으로 토로하기도 하고, 가끔은 알아도 모른 척해야 했던 기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궁금한 게 있었다

너는 모른다고 했다

몰라는 주머니가 있는 동물이 아니었지만

뭔가 담아야 할 것 같았다

고민을 눌러 담자 토끼가 튀어나와 귀를 접었다

몰라의 정체성은 모르는 것에 있었다

가끔은 알아도 모른 척해야 했다

-「때때로 캥거루」중에서

김보경은 “언어에 자유를 부여해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시인. 시의 자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해설 「어느 유머리스트의 슬픔과 자유」중에서, 159쪽)라는 말로 임지은 시집을 정리한다. 언어의 자유는 유머를 통해 가능하고 시인의 슬픔은 관계의 자유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니었을까. 공감은 향수처럼 진한 향기를 남긴다. 

인간은 악취 위에 뿌린 냄새 같아서

향수로도 잘 감춰지지 않고

틀어놓은 음악을 함께 듣고 있지만 

자기 자신만 듣느라

천사가 곁에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

-「대충 천사」중에서

자기 자신만 듣는 사람과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숱한 아이러니와 패러독스 사이에서 허탈질 때 우리는 인생의 밝은 면을 기대하지만 그건 오로지 ‘웃음’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함정으로 가득하지만

내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면은

밝은 면도, 어두운 면도 아닌

바로 웃긴 면입니다

-「인생의 밝은 면」중에서

삶의 고뇌와 슬픔의 미학으로 시에 접근하는 대신 유머와 해학으로 위로를 건넬 수는 없을까. 웃음은 소설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른 척 외면하고, 알면서도 눈감고, 없는 것처럼 말하고, 안 보이는 듯 지낼 때도 있는 법이 아닌가. 그래서 시인의 눈을 통해 가끔 가닿지 않는 곳, 이성의 치외법권에 대하여 들여다보는 게 아닌가. 

시인은 직업이 아니라 상태입니다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불법 주차를 한 상태, 뜨거운 문장을 들어 올려야 하는데 냄비 손잡이가 다 타버린 상태, 하자니 괴롭고 안 하자니 더 괴로워서 치과 진료를 미루는 사람처럼 영혼의 치아 하나가 덜렁거리는 상태, 헬스 트레이너는 볼펜 끝을 살짝 깨문다 운동이 꼭 필요한 상태,라고 적는다

-「건강과 직업」중에서

김지, 박쥐, 큰 지은, 안경 지은, 까만 지은(「모두 다른 지은」중에서)…… 그 많던 흔한 ‘지은’이 중 시인의 흔한 이름이 오래 기억되기를. 이런 비유가 좋다. 선명하고 확실한 이미지로 복잡한 상황이나 언어 이전의 세계 혹은 욕망을 표현하는 임지은의 시가 괜찮지은? 

신발 끈같이 엉키고 있을 때였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대화들의 대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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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은 생각한다 창비시선 471
문태준 지음 / 창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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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나를 바라보아서

그녀가 나를 바라보아서

백자(白磁)와도 같은 흰빛이 내 마음에 가득 고이네

시야는 미루나무처럼 푸르게, 멀리 열리고

내게도 애초에 리듬이 있었네

내 마음은 봄의 과수원

천둥이 요란한 하늘

달빛 내리는 설원

내 마음에 최초로 생겨난 이 공간이여

그녀가 나를 바라보아서

나는 낙엽처럼 눈을 감고 말았네

곧 ‘천둥이 요란한 하늘’이 시작된다. 하늘에 금이 가듯 번쩍, 하는 순간이 온다. 내가 먼저 그녀를 바라봤다는 사실조차 잊었으리라. 내 눈길이 머문 자리에 그녀의 미소와 몸짓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그러다 그녀가 나를 바라본 순간, 화들짝 놀란다. 시인의 시선은 내가 바라본 그녀가 아니라 나를 바라본 그녀의 시선을 포착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어주었을 때가 아니라 그녀가 나를 바라봤을 때 나는 비로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종종 잊고 산다. 

서너살 무렵 ‘누나의 작은 등에 업혀 빈 마당을’(「첫 기억」중에서) 돌고 돌면서 ‘버들잎 같은 입에서 흘러나오던 누나의 낮은 노래’를 잊은 지 오래다. 그렇게 누구에게나 각인된 첫 기억은 로렌츠의 오리처럼 애착으로 바뀐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아서 열렸던 마음이 어느새 같은 이유로 ‘낙엽처럼 눈을’ 감는 순간이 온다. 

왜 시인과 소설가는 정년이 없을까. 예민한 촉수를 드리우고 타인과 세상과 사물의 감각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던 시인들의 시가 무뎌지고 관조적 태도로 변하는 순간을 목도하는 일은 슬프다. 거의 모든 시인이 걷는 길이다. 맨발로 가재미를 잡던 시인은 어디로 갔을까. 변화보다 안정을, 불안보다 여유가 익숙해지고 고뇌와 번민의 시간을 지나 평정심을 얻는 나이가 되기 때문일까. 제주로 간 문태준의 시에서 수평선에 눈이 베일 듯 날카로운 감각과 인상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넉넉함과 위로를 얻고 싶지는 않다. 

수평선 

내 가슴은 파도 아래에 잠겨 있고

내 눈은 파도 위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있고

당신과 마주 앉은 이 긴 테이블

이처럼 큼직하고 깊고 출렁이는 바다의 내부, 바다의 만리

우리는 서로를 건너편 끝에 앉혀놓고 테이블 위에 많은 것을 올려놓지

주름잡힌 푸른 치마와 흰 셔츠, 지구본, 항로와 갈매기, 물보라, 차가운 걱정과 부풀려진 돛, 외로운 저녁별을

그녀가 나를 보아서 각성했던 자아는 파도 위에서 결국 ‘당신’을 바라본다. 여기에서 거기까지, 나와 너와의 거리, 한참을 서성여도 서로 걷는 길의 언저리를 맴도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어느 날 문득 게시판에 올라온 누군가의 질문처럼, ‘우리는 사랑 없이 살 수 있을까?’ 

장마가 시작인가보다. 흐리고 구름 낀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나면 또 뜨거운 태양과 푸른 하늘은 다음을 준비하겠지. 종이로 된 시집 한 권을 천천히 읽는 일은 바다로 걸어간 시인의 뒷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일처럼 낯설고 헛되다. 늘 그렇듯,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매혹되는 순간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거기 또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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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 3 - 상 - 2015년 개역판, 정치경제학비판 자본론 3
카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 비봉출판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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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도록 방치한다. 잉여가치율과 이윤율은 다르다. 그 전환과정에서 총자본과 가변자본 그리고 잉여가치의 비율과 변화에 주목하며 마선생님은 자본론 3권을 시작한다. 이윤율이 불변일 때와 변동하는 경우에 따라 경우의 수를 짚어보는 목적이 무엇일까. 결국 가변자본인 노동력에 대한 관심이다. 노동일, 노동시간, 노동강도는 잉여가치과 이윤율로 직결된다. 여기에 연간 회전율은 생산성의 영향을 받고 이것은 자본가의 이윤과 노동자의 임금, 노동강도와 노동일, 노동시간에 영향을 준다. 어느쪽이 우선하든 이 복잡한 수식 속에 숨은 뜻을 찾아내는 일이 자본론 공부의 핵심이 아닐까. 그것은 다른 경제학자와 다른 마선생님만의 독특한 '관점'이다.

​어떤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수백개의 눈이 있다. 아니 수만, 수억 개의 카메라가 있다. 있는 그대로 비추지도 못하는 거울부터 뼈와 살을 꿰뚫어 X-ray처럼 객관적 사실을 투영하는 기계뿐만 아니라 그 원인과 결과를 찬찬히 헤아려보는 인식과 사유의 눈도 있다. 어떻게 볼 것인가, 무엇을 향해 어디로 갈 것인가. 중심축이 없는 회전은 어지럼증을 유발한다. 단단히 뿌리내리지 못한 생각들이 부유하며 세상을 어지럽힌다. 논리적인 근거와 이성적 판단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

하지만, 적어도 거짓과 선동을 걸러내고 현상과 본질을 구별하는 안목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 정도는 공유할 수 있지 않나? 합의는 어렵지만 기준과 잣대마저 제각각이라면 그야말로 세상은 난장판이 될 것이다. 과학적 태도가 필요한 건 오히려 정치와 사회 그리고 경제 분야가 아닌가. 때때로 흘러가는 구름에 태양이 가려져 흐린 날도 있고 비가 오는 날도 있다. 곧 장마가 시작되면 청명한 가을 하늘을 기다리는 성급한 사람들도 있다. winter is coming. 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도 체르니셰프스키도 했던 고민을 우리가 계속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 그리고 거기에서도.

​자동차는 구입하는 순간부터 감가상각이 시작된다. 10년 동안 한번도 타지 않고 중고차로 팔아도 제값을 받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농산품은 말할 것도 없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거래되는 거의 모든 상품이 그렇다.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불변자본 사용을 절약한큼 이윤이 높아진다. 더 많은 노동력을 투자해서 초과임금을 지불해도 기계가 노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노동자를 희생시키는 노동조건을 절약할 수도 있고, 생산폐기물을 이용할 수도 있으며, 발명에 의한 절약도 가능하다. 이윤을 높이는 또 하나의 요인은 가격변동이다. 원료가격의 변동은 이윤율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자본의 가치가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잉여가치와 이윤, 잉여가치율과 이윤율 사이에는 다양한 요소가 놓여있다. 이들의 변화, 통제, 조절에 의해 자본가의 이윤율이 달라진다. 단순히 노동자에 대한 착취 뿐만 아니라 불변자본의 변화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마선생님은 3권에서 구체적인 이윤 발생 과정의 변화요소를 점검한다. 1편에서 주로 다룬 내용은 잉여가치율과 이윤율의 함수관계다. 어떤 요소 때문에 잉여가치율과 이윤율이 달라지면 그 요소들이 노동자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행간에 숨어 있는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 퍼즐을 맞추듯, 레고블럭을 쌓듯 분석과 해석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형상이 만들어지는 걸까.

여러 단계, 혹은 여러 분야의 일반적 이윤율이 형성되는 과정은 상품의 가치가 생산가격으로 전환되는 과정과 다름없다. 마선생님은 여전히 우리가 어떤 상품을 구매할 때 숨어 있는 노동력, 즉 잉여가치의 의미를 되묻고 있는 듯하다. 이제 기업 간에, 상품 상호간에 경쟁이 시작되면 이윤율이 균등화되는 상황이다. 시장가격은 시장가치와 다르다. 초과이윤을 향한 수요, 공급의 자명한 논리도 작용한다. 여기에 임금의 변동이 생산가격에 영향을 미치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자본가들의 초과 이윤을 향한 열망은 이윤율 저하경향의 법칙 앞에서 좌절한다. 흥미롭다. 일반적인 이윤율이 점차 저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자본주의 시스템의 필연성이라니. 나의 관심사는 노동력과 임금 그리고 잉여가치와의 관계다. 불변자본의 증가로 인한 이윤율이 낮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까. 규모의 경제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를 극복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며 인간의 삶보다 자본의 욕망에 충실한 견고한 체제를 구축해왔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윤율 저하를 막기위한 몸부림은 다양한다. 노동력 착취가 증가하고, 임금을 인하하며, 불변자본을 낮추고, 상대적 과잉인구를 이용하며 대외무역을 활용한다. 그런 후에는 상품자본과 화폐자본이 상인자본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살핀다. 상품거래자본과 화폐거래자본을 합쳐 상인자본으로 부른다. 이것이 산업자본과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상업이윤의 특징을 들여다보게 한다. 상업자본의 회전과 가격이 노동자의 삶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유통은 전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여전히 그 중요성이 간과되기도 하고 폭리를 취해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각종 포털 사이트, 인터넷 서점, 홈쇼핑이 그렇다. 마선생님이 지금 이 꼴을 본다면 이들이 착취하는 대상이 노동력 뿐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대 상업자본이 상품거래와 화폐거래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는 현실이 떠올랐다. 결국 이윤율을 높이기 위한 경쟁과 소상공인, 산업자본의 피해는 각 분야의 노동자들에게 돌아간다. 대체로 산업 구조와 자본의 형태만 달라졌을 뿐, 오늘 우리가 겪는 현실도 이윤 창출의 도구와 그 수혜자는 극소에에 몰려 있다는 사실에는 다름 없다. 기업 상장 후 분할 매각으로 천문학적 거금을 손에 쥔 몇몇 자본가 외에 누가 첨단 산업의 꿀물을 빨고 있는가.

아주 오래된 옛날 이야기에 빠져 생산, 산업, 상업 자본의 구조를 들여다보는 과정이 메마르고 냉혹하다. 감정없는 서술, 마선생님의 분석에 주관적 해석이나 오해가 덧붙여질까 극도로 자기 검열을 하듯 냉정하게 서술하는 엥선생님의 서술 태도가 칼날처럼 예리하다. 1권과 같은 냉소와 문학적 비유도 없고, 행간의 숨은 탄식도 줄었다. 2, 3권의 차분한 분석을 1권과 비교할 순 없지만 자본주의 전체 구조를 살피기 위해서는 반드시 살펴야 하는 대목들이다.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생각보다 복잡하다. 그리고 철저하게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푸른 하늘도 잠시, 하늘은 금세 잿빛이다.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와 노동력이 문제가 아니라 이제 화폐거래자본에 대한 이야기는 상업거래자본처럼 자본 그 자체가 살아있는 유기체로 기능하듯 생산물과 노동력 사이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느낌이다. 상인자본의 역사적 고찰을 통해 아주 오랫동안 유통과정에서 발생하는 상업자본의 존재를 고찰한다. 근대적 중상주의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자를 낳는 자본으로 인해 이제 이윤은 모두 기업가의 이득으로 돌아가지 않게 되었다. 잉여가치의 양적인 분할에서 질적인 분할이 생기고 그것이 또 다른 방식으로 이자율과 가치 사이의 관계를 형성한다.

이자는 이자를 낳고 불황기에 이율이 더 높아지던 '지금 이대로!'를 외쳤던 IMF 시절이 떠올랐다. 결국 호황이든 불황이든 가진 자는 더 큰 혜택을 얻고, 피해는 최소화한다. 제도가 바뀌고 경제상황이 달라져도 마찬가지다. 현실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이해한 자와 이용하는 자 그리고 무지한 자와 용감한 자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 선한 얼굴로 '자유'의 가치와 '평등'의 미소를 짓지만 현실은 칼날처럼 냉혹하다.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며 그 분배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살피는 제5편의 이야기는 그 원리와 무관하게 여전히 바뀌지 않은 기본적인 체제와 시스템의 구조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우리는 과연 괜찮은 방향으로 걷고 있을까? 이대고 괜찮은 걸까?

기능자본가에게 귀속되는 산업이윤 또는 상업이윤은 총이윤에서 이자를 제외한 부분이다. 자본이 인격화되어 자기 자본으로 사업을 할 때는 자본의 사용자는 자본의 단순한 소유자와 자본의 사용자로 나뉜다. 이자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대립이 아니라 두 자본가들 사이의 관계로 나타난다. 드디어 이자낳는 자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자본은 신용을 바탕으로 가공의 자본을 창출한다. 화폐자본은 끊임없이 축적되고 신용에 의한 자가 발전이 가능해진다. 신용제도는 생산력의 물질적 발전과 세계시장의 창조를 촉진한다. 이는 현대 금융자본주의의 시금석이 되었으리라.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서 출발한 화폐는 어떻게 자본으로 탈바꿈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이자를 낳고 산업자본, 상업자본으로 변화 발전하는지 살피는 동안 잉글랜드 은행과 금융시스템 전반을 돌아보게 된다.

이미 초기 산업화사회를 지나 돈이 돈을 버는 시스템으로 발전하고 그것이 전세계를 지배하는 과정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마선생님의 분석과 엥겔스의 정리는 냉정하게 현실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기존 정치경제학이 해명하지 못한 부분을 분명히 짚고 그 원인과 결과를 분석한다. 이 지난한 과정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예상되는 문제점, 말하자면 경제공황이나 노동력 착취, 산자본가와 금융자본가에게 집중된 부의 편중이 합법적으로 이 세상이 굴러가는 시스템으로 정착되었으나 문제는 끊이지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과거를 돌아보며 현실을 살피는 안목을 가져야 하는 건 정치인, 기업가가 아니라 바로 우리와 같은 노동자와 평범한 시민이다.

​은행자본은 화폐와 자본으로 구분되어 있다. 화폐가 질제로 가장 뛰어난 자본이라는 주지의 사실을 통해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달한 나라들에서 은행의 준비금이 얼마나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화폐적 자본과 현실적 자본의 차이는 분명하다. 신용을 바탕으로 한 현대 금융의 초기 버전도 지금과 다르지 않다. 산업활동과 상업활동에 '신용'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상상의 질서체계를 통해 인간의 이룩한 문명과 경제 체제는 감탄스럽다. 공황기와 불황기에 화폐자본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자율이 상승하면 증권의 가격이 하락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분석은 자본주의 구조의 근간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화폐가 대부자본으로 전환되고, 신용제도 아래 유통수단으로 활용되는 어음과 은행의 준비금은 어떤 식으로 경제를 움직이는가. 통화주의자들의 주장, 1884년 영국의 은행법 등은 당대 현실에 대한 세밀한 분석으로 지루하다. 자본주의의 발생지인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은행법 제정과 문제점이 오늘에도 시사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시적 관점으로 이 책을 살피고 싶은 개인적인 이유로 빠르게 넘어갔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 종교, 화폐, 제국, 자본주의 등 '상상의 질서'를 통해 인류 문명을 발전시켜왔다고 분석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걸 믿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그 힘이 왜곡되면 맹목적 신념, 성찰없는 편견을 맹신하게 된다. 당대 정치경제학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통해 걸어야 할 길과 방향을 점검했다는 점에서 마선생님의 자본 이야기는 여전히 숙고할 만한 게 아닌가 싶다. 누구나 각자 옳다. 팩트fact 조차 크로스체크가 안되는 일들이 허다하다. 들은 이야기, 본 이야기, 경험한 이야기, 학문적 이론, 과학적 실험도 그렇지 않은가. 눈을 크게 뜨고 생각을 열어 놓는 태도야말로 한 인간이 죽기 전에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닐까.

금본위 화폐제도에서 귀금속의 보유량은 수출과 수입에 의해 물가에 영향을 미치고 퇴장화폐을 좌우한다. 환율은 국가경쟁력과 GDP와 국제 신용등급의 영향을 받는데 그 기능과 역할은 18세기부터 조금씩 자리잡아온 질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자본주의 이전에 고리대는 '악'의 표상이었다. 교회가 그 거래를 금했하기도 했고 이자낳는 화폐유통을 용인하지 않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은 그 모든 금기를 무너뜨렸다.

이제 초과이윤이 지대로 전환되는 차액지대설을 살펴보며 마선생님은 농업생산이 자본가에 의해 추친되며 벌어지는 일들을 분석한다. 차액지대의 형태와 생산가격이 불변, 하락, 상승하는 경우에도 자본은 손해보는 일을 하지 않는다. 차지농업가farmer는 공장의 노동자와 어떻게 다를까. 자기 토지를 소유한 자작농과 다른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 이 복잡하고 지루한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이익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 따지는 건 아닐까.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며 자기 본능을 이기기 어렵다. 눈부신 성취를 이루거나 대다수에게 존경받는 이는 인간적 극기를 통해 범상치 않은 욕망을 가진 사람이다. 자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어디 한군데 '이윤'을 따지지 않아야 하는 곳이 없다. 타인과의 관계, 용기와 절제, 기쁨과 슬픔의 표현마자 그러하다. 누군가는 무엇을 향해 어떻게 살 것인지 묻고 있으나 그것이 팔릴 물건인지 대다수 사람들의 관심과 욕망에 닿아 있는지가 관건이다. 돈이 되지 않으면 만들진 않는 게 자본주의의 속성이다. 무엇을 할 것인지 물었던 수많은 사상가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각자 다르게 생각하지 않을까.

리카도는 토지의 지대가 생산물의 가격과 생산비를 초과하는 이윤이 발생할 때 지급된다는 생각이었으나 마선생님은 토지 소유 자체만으로도 지대가 발생한다는 절대지래를 주장했다. 최열등지에서 차액지대가 발생한다는 것은 자연이 가치를 결정하는 건 토지의 위치와 비옥도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생산가격을 넘는 가치의 초과분에서 절대지대가 발생한다는 생각은 토지소유자가 초과이윤을 지대로 환수한다는 분석이다. 차액지대와 절대지대는 토지의 위치와 비옥도 혹은 노동력이라는 초점의 극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생각의 차이는 관점을 차이를 만들고 보는 눈이 다르면 세상의 빛깔과 향기도 다르게 느껴진다. 하나의 고정된 프레임을 깨고 다른 프레임으로 한번쯤 세상을 바라볼 수는 없을까. 이제 이념을 내려놓고 설익은 도덕과 윤리를 벗고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질 때도 되지 않았나. 언제까지 '불안 마케팅'에 시달리며 위기를 넘어 또 다른 위기가 온다는 협박으로 자기 삶을, 타인과 국민의 삶을 어둡게 할 텐가. 진짜 위기와 절망 때문이 아니라 더 큰 욕망을 채우고 함께 살아가려는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건 아닐까.

​개개인의 사적 소유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사적 소유와 마찬가지로 불합리한 것이라는 마선생님의 지적이 뼈아프다. 숱한 반론이 있을 수 있으나 가족, 근대국가의 탄생 기반이 된 사적 소유는 인간의 본성도, 필수불가결한 문명의 성립 조건도 아닐 수 없을까. 무한대로 증식되는 인간의 욕망과 실제 현실로 나타나는 빈부격차의 심화가 낳을 결과는 뻔하다. 자본주의는 인류가 발명해 낸 최고의 경제체제가 아니다. 미국과 스웨덴의 자본주의가 다르다. 자본주의적 지대의 기원에서 노동지대, 생산물 지대, 화폐지대로 나누어 분익소작과 소농민적 분할지 소유는 결국 자본, 토지의 소유 여부로 판가름난다. 마지막 7편 수입들과 그들의 원천으로 자본론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48장 삼위일체의 공식에서 '자본-이윤(기업가이득+이자), 토지-지대, 노동-임금; 이것은 사회적 생산과정의 모든 비밀을 지니고 있는 삼위일체의 공식이다.'라는 지적은 고전 경제학과 속류경제학에 대한 지난한 연구 결과에 대한 잠정적 결론이다. 애덤 스미스도 이윤, 지대, 임금을 분석하지만 그 잉여가치의 발생원인과 과정에 대한 해석은 마선생님과 다르다. 자본 나리와 토지 마님이 지배하는 세상은 영원할까.

자본론이 출간된지 15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산업구조와 문명의 발달은 눈부시지만 자본과 토지 그리고 인간의 노동력이 창출하는 이윤, 지대, 임금의 트라이앵글은 변함없다.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하는 제도와 체제는 불가능할까. 현실 부정이 아니라, 목적지와 방향을 다르게 설정하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모두 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 실현 가능한 다수의 행복, 경쟁보다 나눔과 배려가 먼저인 세상은 불가능하지 않다. 결국 고전은 현실을 들여다보는 현미경 혹은 망원경이다. 지금-여기에서 우리 삶의 모습을 돌아보고 내일을 전망하며 마선생님의 고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고 있다.

3권 마지막 부분은 생산과정을 다시 분석한 후, "상품의 가치는 상품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량에 의해 결정되며, 임금의 가치는 필요생활 수단의 가격에 의해 결정되고, 임금을 넘는 가치초과분이 이윤과 지대를 형성한다는 것"이라는 말로 경쟁이 더 큰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생각은 접으라고 충고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다른 생산양식과 구별하는 두 가지 특징은 첫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생남을 상품으로 생산한다는 점이며, 둘째는 잉여가치의 생산이 생산의 직접적 목적이고 결정적 동기라는 점이다. 물물교환과 잉여 생산물의 교환에서 시작한 기나긴 인류역사의 경제 체제가 자본주의라는 견고한 시스템으로 완성된 후 우리는 얼마나 행복해졌을까.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고 과학기술의 발달로 노동조건이 개선되었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하지만 숨어있는 1인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확인한 마선생님의 노고가 여전히 자본주의 미래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치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먹고사니즘의 문제로 귀결되는 현실이다. 우리의 모든 관심사는, 가장 인간다운 삶이어야 하는 부분까지도 블랙홀처럼 경제가 빨아들인다. 비인간적인 시스템인 자본주의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놓여 있다.

기나긴 여정을 마쳤다. 꼬박 석달동안(12주) 3,000쪽 분량의 자본론을 조금씩 공부하면서 지난 시간을 정리하고 남은 시간을 살폈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데이비드 실즈)라는 명제 앞에서 익숙하게 죽음의 그림자와 마주앉아 저녁을 먹고 술 한잔을 거넨다. 2022년,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예술, 노동, 환경, 과학 등 거의 모든 분야가 위기와 기회를 맞고 있다. 비단 특정 정치세력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이라는 자각이 없는 천박한 철학 앞에서 자주 절망한다. 정치와 연예인, 인플루언서에 대한 팬덤도 좋고, 불행이 없는 인스타그램의 마취적 행복 코스프레도 좋다. 현실을 바라보는 내정한 시선과 미래를 고민하는 대안 모색이 없는 세상은 절망에 취약하다. 때때로, 마선생님이 인용한 셰익스피어, 냉소적 위트, 당대 경제학자들과 속류 경제학에 대한 비판정신, 엥겔스의 노고와 든든한 지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애정, 미래 사회에 대한 희망까지도 다시 돌아볼 생각이다. 이론의 발뒤꿈치라도 만져봤으니 그 이론을 통해 도달하고 싶었던 세상, 꿈같은 시대를 상상해 본다.

오지 않아도 좋다, 꿈꾸고 상상하며,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오늘을 살게 하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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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 2 - 2015년 개역판, 정치경제학비판 자본론 2
카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 비봉출판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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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틴은 힘이 세다. 운동선수들의 루틴routine은 반복적, 습관적 동작과 절차를 통한 능력향상이 목표다. 그러나 자본의 루틴은 조금씩 변태(탈바꿈)를 통해 순환구조를 만든다. 마치 영원반복의 뫼비우스의 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에셔의 개미처럼 노동자는 자본의 순환구조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제 화폐자본의 순환으로 시작된 자본의 무한 반복과 잉여가치의 증식과정은 충분히 예상되는 과정이다. 각 단계가 반복되며 점차 눈덩이를 굴리듯 불어나는 자본은 제 몸집을 가누지 못하고 그 속도를 감당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까지 왔다.

하루 해가 금세 저물듯 인류의 역사는 돌아보면 순간인듯 보인다. 숱한 희노애락과 기쁨과 슬픔이 흔적도 없이 지나온 자리마다 꽃이 피었을까. 아니면 먼지처럼 사라진 시간의 두께만 켜켜이 쌓였을까. 살아있는 모든 것은 제 목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목적도 방향도 없이 맹목적으로 달려간다. 타인과 세상의 거리만큼 자본과 노동자의 삶의 거리도 좁힐 수 없을만큼 점점 멀어져 간다.

화폐자본이 순환하면 생산자본과 상품자본도 순환한다. 유통과정을 통해 세가지 순환은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자본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화폐, 상품, 생산도구로 탈바꿈한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유통 시간과 비용이 발생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하나의 상품을 소비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정교하고 치밀한 과정을 거치며 착취한 노동력으로 잉여가치를 만들어 순환 구조를 만든다.

돌고 도는 세상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환 - 자연의 반복과 변조가 아니라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자본을 통해 확대재생산하려는 욕망을 빗댄 표현이 아닐까. 생로병사의 수레바퀴를 아래서 우리는 태어나 살다 죽는다. 희노애락은 그 과정에서 겪는 짧은 기억이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흔적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이 굴러간 자리에는 분명한 흔적을 남기며 스노우볼처럼 자기 증식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삶의 태도를 빨아들인다. 자유는 허울좋은 이념에 불과한 게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와 평등이라니. 지나친 니힐리즘은 건강에 해롭지만 마선생님의 문장 사이 사이에 번뜩이는 통찰은 자본주의의 필연적 순환 논리가 아니라 인류의 삶에 대한 비극적 전망으로 들린다.

어디를 둘러봐도 희망은 잘도 숨는다. 그래도 우리는 내일 향해 쏜다. 별빛을 찾아 하늘을 보고, 푸른 하늘을 향해 웃음 짓는다. 하루하루 우리를 견디게 하는 힘은 아마도 무지에 대한 열망과 미지에 대한 안도감이 아닐까. 때때로 바람이 분다.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카페에 머물기 적당한 시간은 어느 정도일까. 자본의 회전은 식당 회전과 닮았다.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은 가변자본과 불변자본과 다르다. 생산자본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상품자본과 화폐자본이 노동력을 규정한다. 중농주의자들과 애덤 스미스 그리고 리카도는 어쩌자고 노동력을 유동자본으로 확정해서 마선생님을 화나게 했을까. 노동시간과 생산시간은 상품과 업종마다 천차만별이다. 농업, 임업 등 공업과 다른 분야는 노동에 투자하하는 시간과 방법이 다르고 생산 과정과 방법에 따라 순환되는 시간이 천차만별이다.

실제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이론과 개념으로 묶어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엥겔스가 정리했다는 2권은 3권과 달리 마선생님 특유의 문장을 읽는 맛을 잃었다. 건조한 설명과 성실한 고민만 드러날 뿐, 문학적 비유도 사이사이 드러내던 아재개그 코드도 없다. 지루하지만 1권에서 보여준 정치경제학의 기본 이론을 충실하게 보충하고 설명을 보태 시야를 넓히고 있다. 당대 주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이론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인간의 노동이 얼마나 중요하며 그것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밝혀내기 위해 지난한 과정을 거치고 있는 느낌이다. 화폐와 자본, 상품과 생산 너머에 언제나 '사람'이 있다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자본주의 생산과정과 유통 시간은 뗄 수 없는 관계다. 회전 시간이 투하자본에 미치는 영향 또한 절대적이다. 가변자본의 회전은 잉여가치율에 영향을 주며 고정자본과 달리 유동자본(가변적 유동본, 불변적 유동자본)에 영향을 받는다. 마선생님은 실제 사례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려 다양한 수식을 동원하다가 실수를 범한다. 엥겔스가 이를 바로잡아 정리한 내용이 표기되어 있다. 실제 현실은 이론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 이론이 현실을 관통하는 일관성 있는 관점을 유지할 뿐이다. 단순히 생산양식을 넘어 노동력과 화폐자본, 상품자본, 유통기간은 물론 자본의 회전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세상이 굴러가는지 살펴본다. 오늘의 경제는 훨씬 더 복잡해졌으나 기본적인 틀에는 변함이 없다. 사람도 변했지만 욕망이 그대로이듯.

인도에서 면화를 싣고 희망봉을 돌아 영국에 오는 유통 기간의 이야기는 아득하기만 하다. 수에즈 운하 개통 전 이야기를 예로 들며 자본의 회전 시간을 분석하는 일이 쓸데없어 보이지만 우리가 사는 시대는 또 다른 회전 주기로 기업과 노동자는 갈등을 빚는다. 소비 촉진을 위한 트렌드를 만들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이 늘고 있는데 소비자인 우리는 철저한 자본주의의 메커니즘 안에서 움직이는 걸까. 아니면 인간의 욕망을 마음껏 누리고 사는 행복의 나라에 사는 걸까.

잉여가치가 유통되기 시작하면 이제 본격적으로 돈이 돈을 버는 자본주의의 자가 발전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노동력의 착취로 시작된 자본의 몸집 불리기는 마치 그것이 온전히, 당연하게도, 자본가의 것인냥 위세를 떨친다. 퇴장화폐로 일시적 보관이든, 새 정부에 호응하며 재벌기업들이 토해내는 축적된 자본이든 그것은 오롯이 잉여가치의 확대재생산 결과라는 사실이 놀랍지도 않다. 조 단위의 돈은 어떻게 그들이 거머쥐게 되었을까. 어찌보면 단순하고 명쾌하지만 들여다보면 복잡한 다단계를 거쳐 자본주의는 순기능과 역기능을 하며 인류의 삶을 조금씩 나은 곳으로 인도했다. 아니, 그것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인류 문명의 혜택이 자본에 집중된 결과이기도 하다. 무엇이 먼저이든 부의 편중과 비정상적인 분배 체계-오너와 신입사원의 급여차이에서 한 국가의 빈부 격차에 이르기까지-로 인한 문제는 수준만 달라졌을 뿐 현재 진행형이다.

자본의 변태와 자본의 회전에 이어 3편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과 유통으로 2권은 마무리 될 예정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기본 토대 위에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있는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과 유통을 살펴보기 전에 연구 대상과 관련된 중농학파의 주장과 애덤 스미스, 리카토, 슈토르히, 시스몽디, 존 스튜어트 밀가 간과한 점들을 살핀다. 개별 자본이 아니라 사회적 총자본이 운용되는 시스템도 결국 c+v+s의 결합이 바탕이 되지 않을까. 고정자본과 유동자본 혹은 임금의 관계 설정을 잘못했다고 해서 시스템 자체가 달라지는 않는다. 변하는 건 잉여가치에 대한 관점과 해석이다.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는가. 아니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야 하는가.

노동과 임금을 바라보는 차이는 그대로 타인과 세상을 관찰하는 시선에 드러난다. 비판이 아닌 비난으로 자기 삶의 비루함을 포장하지 못하듯, 21세기도 여전히 가치 창출의 방법과 대가에 대한 생각들은 고정된듯 보인다. 살아온 대로 생각하고 경험한 대로 판단하며 주어진 대로 만족하는 삶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정말 괜찮은 걸까.

마선생님이 Ⅱ권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한 부분은 제20장 단순재생산이다. 이것이 어떻게 축적되어 확대재생산 되지는지를 설명하는 제21장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Ⅰ부문과 Ⅱ부문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고 생필품과 사치품이 소비되는 과정 그리고 두 부문에서 불변자본, 가변자본, 잉여가치가 어떻게 연동되어 있는지 밝히는 과정은 다소 복잡하지만 그 원리는 단순하다. 고정자본을 보충하기 위해 마멸가치분을 화폐형태로 보충하고 고정자본을 현물로 보충하는 과정이 왜 스미스, 슈토르히, 람지에게는 보이지 않았을까.

우리가 사는 세상, 오늘의 경제상황을 바라보는 관점도 이와 같은 게 아닐까. 보편복지와 선별복지가 이념논쟁으로 번지지 않고, 노동자를 노동자라고 부르는 세상은 불가능할까. 맹목적 신뢰, 감정적 증오가 과연 정치인들의 탓일까. 현실은 자신의 역량만큼 세상을 보여주고 고민한 대로 관계 맺으며 보이는 만큼 즐기며 산다. 지식의 양과 통장 잔고가 무엇을 말해 줄 수 있을지 점점 알 수 없어진다. 그밖에 남은 건 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의 시선은 도대체 어디에 가 머무는 것일까. 3권을 다 본다고 해서 끊없이 이어지는 질문과 의문에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알수 없는 노릇이지만 내처 걸어볼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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