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_소설 해시태그 문학선
김지은.이광호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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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팔아야 하는 건 출판사의 숙명이다. 팔리지 않는 책을 만들 수도 없고, 안 팔리는 책을 좋은 책이라고 자위할 수도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책은 하나의 상품이며 기획과 제작 마케팅과 유통 과정에서 다양한 이미지로 각색되고 전혀 다른 목적으로 소비되기도 한다. 당연하게도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문학 출판사에서 재탕은 음식점의 반찬 재활용과 다른 차원이지만 주제와 형식과 표지 디자인을 갈아 신상으로 출시하는 경우가 많다. 해시태그 문학선도 이와 유사한 상품인데 하나의 주제로 단편소설을 여럿을 묶었다. 요즘 유행하는 주제어를 ‘우리 사회의 첨예한 문제의식들의 결정체’라는 말로 포장하고, ‘한국문학의 스펙트럼을 보다 깊게 이해하게 만든다’는 명목을 내세운다. 해설에 해당하는 ‘포스트잇’은 시대 상황과 작가의 특징을 소개한다는 면에서 이해할 수 있으나 ‘생각의 타래’는 이 책의 성격에 의문을 갖게 한다. 토론용 교재로 활용하라는 말인지, 독서 모임용 맞춤 도서인지, 수업용 부교재로 적절하다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내용 확인을 넘어 생각의 확장이 아니라 주인공의 심정과 의도를 유도하는 질문들에 반감이 생긴다. 감상과 수용은 독자의 몫이니 엮은이는 그냥 빠지세요, 라고 일부러 마음속으로 툴툴거렸다. 독자의 반응까지 원하는 대로 끌어내고 싶은가.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이 마련된 중고용 학습 교재가 아니라면 이런 발문은 득보다 실이 크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해시태그 문학선 『#젠더_소설』에는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다. 백신애의 「적빈」, 오정희의 「유년의 뜰」, 박완서의 「겨울 나들이」, 최윤의 「하나코는 없다」, 한강의 「내 여자의 열매」, 배수아의 「프린세스 안나」,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 모아놓은 단편들은 한국문학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소중한 작품들이다. 작가의 면면이나 작품의 무게가 남달라 모두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는 놀랍게도 백신애, 배수아의 작품을 빼고는 모두 읽은 작품이다. 단편의 특성상 읽고 잊는다. 장편과 달리 소설집은 망각의 속도가 더 빠르다. 읽는 재미와 속도가 다르지만 장편과 다른 식으로 소비되고 기억되는 모양이다. 기시감을 느끼며 다음 장면이 생각날 듯 말 듯 결론이 기억나기도 하고 군데군데 처음 읽는 느낌이고. 시와 달리 소설은 재독을 하지 않는 버릇 때문일 수도 있으나 시대별 흐름의 작품 배치의 의도가 보이지만 ‘젠더’의 관점이 어떤 식으로 이동했는지 구별하는 재미도 있다. 처음 읽는 「적빈」은 이 책의 첫 작품이면서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1920~30년대 한국 소설의 주제어는 일반적으로 ‘가난’과 ‘죽음’으로 요약된다. 근대소설의 태동기에 식민지 현실에 대한 자각, 농경문화에 바탕을 둔 묘사, KAPF를 중심으로 한 이념 논쟁 등 한국문학사는 불행하게도 자유분방한 문학적 상상력이나 다양한 형식적 실험보다 ‘현실’의 도구와 ‘순수’ 문학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물론 이 자리에 ‘여성’이 놓일 자리는 없다. 그래서 백신애의 단편이 도드라지게 빛난다.

피난지 유년 시절을 술회한 오정희 「유년의 뜰」은 애잔하고, 아내와 사별한 남편과 딸의 모습을 보고 여행을 떠난 박완서의 「겨울 나들이」는 가슴이 시리며,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태도와 시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최윤의 「하나코는 없다」는 본격적으로 현대 여성들의 고민과 ‘젠더’에 대한 고민이 드러나기 시작한 시대를 감지한다. 식물이 되어가는 아내를 묘사한 한강의 「내 여자의 열매」는 여성의 수동성, 식물성에 대한 탁월한 메타포가 돋보이며, 배수아의 「프린세스 안나」는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성의 모습을 건조하게 드러내며,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는 유명세에 값하는 발랄한 문체와 감각적 묘사로 두 여성을 통해 개인적이고 내밀한 심리를 통해 젠더 문제를 일반화한다.

소설에서 인물과 사건은 거대한 알레고리로 기능한다. ‘젠더gender’를 표면에 내세우지 않아도 시대의 단면을 드러내고 구체적인 사건이 모여 거대 담론으로 나아간다는 면에서 생물학적 ‘성sex’ 문제는 우리 모두의 고민이다. 풀어야 할 숙제이며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다.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뚜렷한 지향점이 정해져 있지도 않다. 각각의 목표와 방향이 다르고 남성과 여성의 이해가 달라 단기간에 해결될 수도 없다. 그러니 무조건 속도 조절을 하자는 말이 아니라 영원히 ‘합의’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누군가의 용기와 누군가의 배려, 또 누군가의 결단이 모여 세상이 조금씩 바뀌었다. 그 중요한 변곡점에서 여성인 소설가들의 여성 주인공들이 모여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프고 저릿하다. 단순한 고통과 슬픔의 차원을 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소외’를 담고 있다. 그들은 우리들의 어머니이자 딸이며 아내이자 연인이다. 그래서 남성이든 여성이든 ‘젠더’는 바로 눈앞에 현실이며 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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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우의 한 줄 사회학 EBS CLASS ⓔ
노명우 지음 / EBS BOOKS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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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쓸 시간이 없어 길게 쓴다는 어느 작가의 한 마디가 빛나듯 속담은 공동체의 지혜를 함축한다. 오랫동안 구전되어 갈고 다듬어져 대구와 리듬이 생기고 기억하기 좋고 전달하기 쉽다. 민족과 국가마다 유사한 속담을 볼 때마다 인류의 삶은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때도 많다. 지역과 인종과 무관하게 인간의 속성은 문명발달의 속도에 맞춰 달라지지 않는다. 한 사회의 집단지성이라 할 만한 속담은 사회학자에게 매력적인 연구 대상이다. 노명우처럼 대중 속으로 걸어 들어가 함께 호흡하며 현장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사회학자에겐 더욱 그렇다. ‘한 줄 사회학’은 ‘속담 사회학’이다. 단 한 문장이면 충분하다. 뼈를 때리는 촌철살인. 한마디로 담아낼 수 없을 때 말과 글이 길어진다. 한 편의 시와 한 권의 시를 비교할 수 없으나 그 감동과 무게와 부피를 분량으로 가늠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노명우의 거의 모든 책을 읽고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동어반복과 일관된 관점의 혼돈이 없다. 지적 과잉으로 흐르지 않고 새로운 정보과 관점의 변화가 참신하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애정과 따스한 눈길이다. 무엇보다도 현학적이지 않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관찰하고 생각하고 다듬은 생각들에 대체로 ‘공감’하기 때문이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부모님을 통해 한 시대와 사회를 보고,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며 세상 물정을 엿볼 수 있는 노명우의 이야기는 편안하게 읽히지만 한참 고민하며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예를 들어, 존 던(John Donne)의 「사람은 섬이 아니다」에서 언급한 대도시적 무관심이 어빙 고프만의 예의 바른 무관심과 유사한 개념이지만 현대인에게 양면의 칼날처럼 활용될 수 있음을 환기시킨다. 자기방어 매커니즘은 타인의 개입을 거부하는 시스템이다. 허용적 태도와 무질서 사이에서 길을 잃고, 질서와 규정은 권리와 의무를 돌아보게 한다. 둘 이상 모이면 갈등이 생기는 법이다. 인간은 모두 다르다. 생각도 감정도 판단도 선택도 태도도 행동도 제각각이다. 그들이 모이면 최소한의 룰을 정하기 마련이고 그들 사이의 관계가 형성되며 문화와 관습이 만들어진다. 그것을 통해 세상이 돌아가는 한 줄 속담이 생기기 시작한다. 시간을 견뎌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는 속담은 너무 많다. 노명우는 그중 열두 개를 골랐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에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한다’까지 누구나 알고 실제 생활에서도 사용하는 속담들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지방선거가 다가오는 요즘 다시 생각해 볼 속담이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주인이 받는다’는 속담에서 플랫폼 노동과 그림자 노동을 읽어내고,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속담에서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속담 하나하나가 모두 지금-여기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와 닿아 있다. 현재적 유용성이 없다면 어떤 속담도 활용되거나 전해지지 않을 테니 당연한 일이겠으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도 인간 사회가 드러내는 욕망과 검은 속내가 그리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생각에 입맛이 쓰다.

인스타그램에는 불행이 없다. 밴드왜건 효과를 거두는 인플루언서를 통해 견물생심, 박탈감이 계속되고 1초도 멈추지 않는 비교, 비교, 비교...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우리는 상대적 빈곤에 허덕이는 시대를 살고 있다. 노명우는 디지털 디톡스, SNS 디톡스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과연 가능할까. 그 도구와 방법은 무엇일까.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세상을 사는 것은 멋있어 보이지만, 사실 주류를 거슬러 사는 ‘인디적’ 삶은 결코 쉽지 않다. 웬만한 자신감이 없으면 자기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세우고, 자신만의 원칙을 따르며 선택하고 결정하고, 다른 사람이 세상을 사는 방식에 흔들리지 않고 “My Way”를 걸어갈 수 없다. 이어서 노명우는 “모방은 우리가 행동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을 갖게 해주고, 지금까지 이루어진 동일한 행위들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단단한 토대 덕분에 현재의 행위는 스스로 이루어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부터 해방된다.”(게오르크 지멜,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56쪽)라고 말한다. 모방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My Way”를 걸어갈 수 있을까. 각자의 판단과 각자의 노력이라고 말하기엔 무책임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인생은 어차피 자신의 몫이다. 우리가 사회학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거시적 안목에서 전체를 보고 나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 후 삶의 태도와 방향을 바로 잡기 위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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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편안한 죽음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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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존엄사가 사회적 의제로 부상할 때가 되지 않았나. 현대 의학은 두근거리는 삶이 아니라 심장박동 연장술로 생명을 유지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기술의 발달과 인간의 존엄 사이의 디커플링 현상은 핵가족 시대, 콩가루 집안에 닥친 필수적 사회문제가 되었다. 누구나 늙는다. 누구나 병들고 죽는다. 자연스러운 순환 과정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출생률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육아와 보육 문제에 집중하는 동안 죽음은 오롯이 개인의 문제로 치부된다. 과연 그런가. 당신의, 아니 나의 마지막을 상상해 본다. 병원 중환자실 or 요양병원 or 고급 실버타운인가. 아니면 남편과 아내, 며느리와 사위, 자식들에 기댈 예정인가. 그도 아니면 형제자매, 조카 등 친족에 의지해야 하는가.

안락사를 넘어 존엄사 문제는 한 인간의 생을 마무리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영화 《아무르Amour, 2012》는 노부부의 죽음을 다룬다. 영원한 사랑보다 먼저 찾아온 죽음 앞에서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한동안 사랑의 끝 혹은 삶의 종착역을 생각하게 한 영화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아주 편안한 죽음』은 자전적 소설이다. 사르트르와 여동생 푸페트가 실명으로 등장한다. 실제 1963년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한 보부아르는 자신의 경험을 담아 그 이듬해 이 책을 출간했다.

150여 쪽 분량의 짧은 작품이지만 내용은 깊고 어둡다. 욕실에서 넘어진 어머니가 두 시간을 기어 전화기까지 가는 장면을 묘사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우리들의 부모님,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진행형의 현실이다. 죽음은 시대를 가리지 않고 인간의 몸은 그리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이후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수술을 하고 동생과 교대로 어머니를 돌보는 과정을 묘사한다. 이미 세계적인 작가로 명성을 떨친 딸에게도 어머니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다. 모녀지간이 모두 그렇지 않으나 보부아르는 당시 어머니를 기독교적 가치인 동시에 부르주아적인 가치, 나아가 가부장적 질서의 대변자로 간주했다. 애증의 관계였으나 늙고 병들어 죽음을 눈앞에 둔 어머니를 바라보는 시선은 복잡 미묘하다.

타자로서 아들이 아버지를 바라보는 순간, 딸이 어머니를 대하는 순간 오히려 관계가 편안하다. 거리 두기는 코로나 시대가 만든 사회적 질서가 아니라 가장 친밀한 부모와 자식간에 지켜야할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부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식이나 죄책감과 미안함에 허덕이는 부모나 안쓰럽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이 반드시 경제적 대가, 물질적 보상이 아니라도 복잡한 심리적 관계가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도 있다. 보부아르는 아주 담담하게 “엄마는 천국이 있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어 쇠약해지고 병에 걸렸는데도 불구하고 엄마는 현세에 무척이나 집착했고, 죽음을 동물적으로 두려워했다.”라고 적는다. 객관적 거리가 불가능해 보이지만 관찰자의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본다. 딸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인지 그 내밀한 관계를 짚어보기 위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다만 아주 오래전부터 딸에게 어머니는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볼 여지를 준다. 집집마다 모녀마다 사연인 말할 수 없을 만큼 길다. 사적인 관계가 일반화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보부아르는 이 책을 통해 세상의 여성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죽음을 앞둔 어머니는 “죽음 그 자체가 무서운 건 아니야. 죽음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무서운 거지.”라고 고백한다. 병상에 누워서야 “너무 다른 사람들만을 위해서 살았구나. 이제부터는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이기적인 노인네가 될 테다.”라고 말한다. 누구나 겪는 때늦은 깨달음과 후회. 우리는 조금 더 일찍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없을까. 몸이 늙고 병들어서야 뒤돌아보는 대신 사는 동안 염두에 둘 순 없을까.

어느 누구도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기 삶의 마무리를 스스로 선택할 수는 있어야하지 않을까. 어떻게든 조금 더 오래 사는 게 능사는 아니다. 보부아르가 관찰한 대로 인간의 존엄과 죽음은 아주 거리가 멀어진다. 생의 마지막을, 딸들과 이별하는 순간을 생생하게 바라보는 내내 불편한 마음은 가시질 않는다. 너무 일반적이고 당연한 과정이라서 특별한 장면이나 기록으로 남길만한 요소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 보편적 정서와 마음의 물결이 지나치게 생생하다. 그래서 오히려 불편하다.

우리도 언젠가 죽는다. 그것은 불확실한 자기 삶에 가장 확실한 단 하나의 미래다. 숱한 이야기를 남긴 채, 미련과 아쉬움을 뒤로하고 모두 떠난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온전히 하루라도 더 오래 사는 사람들의 몫이다. 나는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이라는 보부아르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 또한 살아남은 자들에게나 적용될 수사에 불과한 게 아닐까.

30쪽에 달하는 강초롱의 <타인에 대한 애도를 통해 자기 자신과 화해하기>는 보부아르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한 독자에게 길잡이 역할을 한다. 어머니 죽음에 대한 애도가 결국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과정이라는 분석은 지극히 살아남은 자의 이기적 관점으로 읽히지만 논리의 비약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자기 위로와 자기 기만이 모든 인간의 합리화 기제라면 아들이 아버지를 극복하고 딸이 어머니를 이겨내는 것도 지난한 삶의 필요한 과정이 아닐까.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 -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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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어로 철학하기 - 철학의 개념과 번역어를 살피다 메멘토 문고·나의 독법 2
신우승.김은정.이승택 지음 / 메멘토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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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책은 없지, 누가 이걸 좀 써줬으면 좋겠는데, 이 분야를 좀 정리하는 사람은 없나... 책을 읽다 문득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를 때가 많다. 번역본을 느낄 때마다 느끼는 한계 때문에 원서에 대한 욕망이 커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발번역에 분노하고 비문에 고개를 젓는 대신 원문을 읽으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걸 알면서도 한숨 쉬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누군가 대신해주길 기다린 건 아닐까 싶다. 게으른 독자의 탐욕을 채워줄 출판사, 번역가, 전문가의 노력에 기대고 산지 오래다.


너무 늦었지만 꼭 필요한 책을 만나 읽는 내내 반가웠고 논의의 출발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현대 한국어로 철학하기는 ‘철학’의 자리에 문학, 역사학, 사회학, 심리학 등도 놓여야 한다. 에드워드 윌슨의 ‘consilience’를 최재천이 ‘통섭統攝’으로 번역하면서 벌어진 논쟁부터 의학, 법학 용어에 이르기까지 일본식 한자어로 중역된 거의 모든 분야의 용어들이 때때로 낯설고 이해를 방해하며 오독의 여지를 남긴다. 언어는 사물과 개념을 확정하고 의미를 포착하는 도구다. 한국어에 대응하는 마땅한 단어가 없으면 지식 체계가 어그러진다. 어떤 개념에 상응하는 정확한 용어는 학제 간에 통합과 발전의 기본적 토대다. 필자와 독자 사이도 마찬가지다.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거나 모호한 지시 대상은 대상을 흐리게 하고 문해력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된다.

처음 번역되는 개념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합의 없이 번역가, 학자에 의해 최초로 도입된 용어는 그대로 정착되는 경우가 많다. 그 이후에 벌어지는 혼란과 갑론을박의 비용은 상상하기 어렵다. 특히 철학이 그렇다. 누구나 쉽게 원전을 읽고 자기만의 ‘철학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2차 저작물에 의한 해설과 설명이 없으면 접근 자체가 쉽지 않아 철학은 ‘난해한 것’, ‘어려운 것’이라는 선입견을 만들었다. 물론 지식은 일차적으로 체계적인 개념의 구조물이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우고 익히며 코끼리 다리를 더듬듯 한발 한발 나아가야 하지만, 일상에서 활용되는 의미와 다른 개념으로 사용된다면 철학은 아득히 멀고 흐릿한 성안에 갇히게 되지 않을까.

책 전체 분량은 많지 않다. 철학 용어 14개를 골라 신우승이 문제를 지적하고 새로운 용어를 제한하면 김은정과 이승택이 반론을 한 후 신우승이 다시 정리하는 방식으로 구성했다. ‘주장-반론-재반론’의 과정이 흥미롭고 각자의 생각이 보태져 논의가 확대된다. 그렇다고 해서 최종적으로 제안된 용어가 정답은 아니다. 이 책은 이런 논의의 촉매로서 충분하다. 이런 논쟁은 계속 이어져야 마땅하며 궁극적으로 한국어로 철학하기가 가능해져야 한다. 철학뿐 아니라 사회학, 심리학, 의학, 법학, 역사학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다. be동사가 없는 한국어에서 ‘존재’는 ‘이다’와 ‘있다’로 번역해도 충분할까. 객관적, 형이상학, 인식하다, 공리 등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용어를 꼼꼼히 들여다보는 일은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하는 기분이 든다.

철학이 생각을 정리하는 도구라면 그 도구인 언어부터 명확해야 한다. 논리적인 사고, 이성적 판단은 수많은 생각과 생각을 통해 한 인간의 삶을 결정한다. 사유의 도구인 언어는 발화된 순간 청자에게 이해와 오해를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행동으로 증명되고 결과로 나타나기 전까지 그 숱한 혼란은 모두 개념의 혼란과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짧지만 강렬한 책은 ‘필수’적이며, 독자에서 충분히 만족감을 준다. 책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된 책이다. 신우승, 김은정, 이승택은 공교롭게도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대학원과 박사과정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니 출발선에서 습관적으로 개념을 배우고 익힌 사람들이 아니다. 질문과 의심의 학문인 철학에서 당연히 이뤄져야 하는 논쟁이 이런 식으로라도 계속해서 이어졌으면 싶다. 함석헌 등 순우리말로 철학하기 운동을 벌인 선배들이 없지 않으나 오히려 낯선 순우리말이 철학에서 멀어지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서양 철학에 대한 한국인의 의식과 개념이 어떻게 갈무리되는지는 오로지 번역에 따라 달라진다. 완전히 일치하지 않더라도 조금 더 정확하고 분명한 한국어가 통용됐으면 좋겠다. 게으른 독자의 소망은 누군가에 의해 조금씩 이뤄질지도 모르겠다. 어디선가 이렇게 고민하고 땀 흘리는 분들의 수고에 경의를 보낸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읽고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기만입니다. -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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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 -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작지만 강력한 이야기
필립 볼 지음, 고은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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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발견은 각 개인의 동기와 능력, 가끔은 특이한 성격에 좌우된다. 원소의 발견에는 통찰력뿐 아니라 결단력, 상상력, 야심이 필요하다. 물론 행운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 8쪽

거시적 관점으로 밤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상상력은 무한하다. 코스모스의 세계에 대한 확장적 사고력은 인간을 우주로 보냈다. 반면 미시적 관점은 세상의 근본에 관심을 기울인다.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한 인류의 생각은 철학적 고민에서 출발해서 이제 첨단과학의 영역이 되었다. 나와 세계를 미분하면 무엇이 남을까.

고교 졸업 후 처음 보는 주기율표는 흑백사진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원자 번호 30번 이후의 원소들은 외계어다. 비주얼 히스토리를 표방한 『원소』는 세상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식을 제시한다. 원소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가장 작고 원초적인 물질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의 역사는 단순한 흥미를 넘어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인간의 역사는 질문의 역사다. ‘왜’ 그런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만물은 유전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이었을까. 수많은 과학자들은 무엇을 바라 한평생을 그 작고 단단한 세계에 몰입했을까.

만물의 근원을 찾아 떠난 여행은 그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연금술로 이어졌고 전기로 분해한 원소에서 선 스펙트럼, 인간이 원소를 만드는 단계로 발전해왔다. 기초과학은 문명의 토대를 이루며 수많은 분야에 응용되어 인간의 삶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건축, 의학뿐 아니라 핵전쟁에 이르기까지 화학의 역할과 기능은 일일이 나열할 필요도 없다. 필립 볼은 원소의 사회적 의미와 철학적 접근을 배제한다. 철저하게 원소의 ‘역사’에 집중한다. 고대 철학자부터 최근의 사례까지 꼼꼼하게 점검하면서 객관적 사실들을 설명한다. 문명발달을 이끈 구리, 금, 은, 철에서 시작해서 주기율표의 마지막 줄 테네신, 오가네손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원소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책은 과학 이론도 실험 도구도 필요 없다. 주기율표를 암기해도 소용없고 실생활에 응용할만한 정도와도 무관하다. 원소 하나하나를 앞세워 그것이 발견된 경위와 인류에 미친 영향을 살핀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궁극의 미시세계를 통해 우리는 세상을 또 다른 눈으로 살펴볼 수 있다. 작지만 아름답고 볼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원소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이 아테네에 아카데미아를 세운 건 기원전 380년이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우리는 앎의 세계를 향해 거친 파도를 헤치며 항해를 계속했다. 눈부신 속도로 발전하는 현대 과학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는 현실의 어제를 살피면 겸손해진다. 한없이 낮은 자세로 세상을 살필 수 있다면 외부 세계를 조금 다른 눈으로 볼 수 있다. 각 장에 소개된 과학과 문명사 연표도 눈에 띈다.

초고속 인터넷 시대의 시초가 됐을 해저 케이블을 깔아 최초의 대서양 횡단 전신을 주고받은 건 1858년의 일이다. 자전거가 유럽과 북아메리카 전역에서 유행하며 급증한 시기는 1890년경이다. 먼 과거에서 최근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의 역사는 생각보다 짧고 또 생각보다 아득하다. 아주 잠깐 세상을 사는 우리가 알고 경험할 수 있는 지식과 정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언제나 그렇듯 정확하고 분명한 세계가 주는 안도감은 불확실한 미래를 사는 우리에게 다른 방식의 위로를 건넨다. 이치에 맞는 생각은 합의하기 힘든 수많은 인간에게 과학적 사고의 중요성을 깨우친다. 아주 작고 아름다운 원소의 역사를 통해 지금의 나를 돌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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