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의 밤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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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작가의 명성은 하루 아침에 생기지도 무너지지도 않는다. 폴 오스터의 <신탁의 밤>은 그의 명성을 확인해 줄만한 수작이다. 우선 구성 측면에서 전통적인 방식인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는듯 보이지만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이야기의 넘나듦이 이 틀을 깨고 있다. 소설속 주인공 시드니 오어는 작가다. 그의 소설 속 이야기가 등장하고 그 소설속에 ‘신탁의 밤’이라는 소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사건과 내용의 주된 내용은 외화(外話)나 내화(內話)라고 말할 수 없다. 현실인 외화와 소설인 내화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3중구조의 소설로 구성된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문체와 전달방식에서도 성공적이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자. 오랜 병을 앓고 퇴원한 오어는 아내 그레이스와 함께 살고 있는 작가다. 브루클린의 한 문구점에서 포르투갈제 푸른 노트를 구입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소설속에는 닉 보언이라는 작가와 아내 에바 보언 그리고 로사 라이트먼이라는 편집자와 ‘역사보존관리소’를 만든 에드 빅토리가 등장한다. 또 소설속에 등장하는 실비아 맥스웰이 쓴 ‘신탁의 밤’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된다. 정리하면 소설속의 소설속의 소설이 바로 ‘신탁의 밤’이다.

  어떤 소설이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외면하는가? 없다. 이 소설도 그런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알 수 없는 인생에 대한 또다른 통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생의 구성요소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도 제각각이겠지만 정답은 없다. 폴 오스터는 이 소설에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필연과 우연 현실과 환상을 뒤섞어 놓는다. 다소 복잡하고 작위적인 구성으로 느껴질 법도 하지만 공상 과학 소설이나 기시감을 들먹이는 미스터리 소설은 아니다. 우리의 삶이 지닌 불가해한 측면을 깊이있게 고민하고 있는 소설로 읽혔다.

  작가가 기울인 그만큼의 깊이와 구성에 대한 고민이 느껴진다. 현실속의 존 트로즈라는 대가의 입을 통해 글은 현실과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는 말을 한다. 이것이 작가의 다른 목소리로 들린다. 말보다 더 미래에 대한 예언적 기능을 강화시키는 것이 글이라는 얘기다. 시드가 쓴 푸른 노트 속의 이야기를 아내 그레이스가 꿈을 꾸고 소설 속 이야기와 현실이 점점 충첩되면서 시드는 결국 푸른 노트를 찢어버리지만 소설속의 소설 ‘신탁의 밤’의 얘기처럼 아내 그레이스와 존 트로즈의 관계에 대한 상상과 현실을 뒤섞어 버린다. 소설의 말미에서는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같은 시간에 벌어졌던 각기 다른 장소의 이야기를 병치시킴으로서 시간과 공간의 의미도 되새기고 있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소설 한 편을 통해 하나의 주제나 도덕 교과서처럼 하나의 교훈을 제시하려는 무모한 짓을 하지는 않는다. 이 소설에서도 폴 오스터는 그저 흘러가는 혹은 살아지는 인생의 이야기를 덤덤하게 그리고 있다. 다만 영원한 숙제인 인생의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고민이 드러나 보인다. 미래는 예언될 수도 있으며 현실과 상상은 언제든 충첩될 수 있고 예기치 못한 우연이 전 인생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당연한 전언.

  순간 순간에 대한 상황 묘사와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뛰어나고 현실과 소설의 내용이 겹치거나 영향을 주는 장면들이 전혀 어색하거나 서툴지 않다는 것이 이 소설의 미덕이다. 그래서 읽을 만하다. 호흡이 짧고 간결하지 않다. 다소 길고 느린 문장으로 생각의 속도를 지루하게 끌고가는 면이 있으나 내용과 어울리고 있으므로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특별히 새롭고 환상적인 소설이 없다면 다양성 측면에서 이런 소설도 괜찮았다.

  ‘신탁의 밤’은 사실 미리 예정된 운명 안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의 밤’에 대한 아이러니로 읽을 수도 있겠다. 어쩌겠는가 인간의 삶에 대한 한계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흥미진진한 영화의 장면들이 계속되는 것을 지켜볼 밖에. 그것이 모순된 생의 부조리라면 받아들일 수 밖에.


2005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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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입 창비시선 245
천양희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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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서정시가 유효한 것은 머리로는 모든 일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서정시는 건재할 것이다. 다만 감정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거나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된 시들만 피해갈 수 있다면 말이다. 사실 그런 시가 있기나 한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으나 시에서 절제되지 않은 감정들이 어떤 형태로든, 우스꽝스럽게 혹은 어설픈 몸짓으로 많은 책으로 엮여왔는지 독자들은 알고 있다. 각설하고 올 봄에 나온 시집, 천양희의 <너무 많은 입>에서 몇 편이 내게로 왔다.

뒤편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왜 ‘뒤편’인가? 그건 시인의 시선이므로 따라가면 될 일이다. 다가오는 사람의 앞모습보다 떠나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영원히 기억되는 법이다. 동전의 앞뒤처럼 생의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시인이라고 믿는다. 잘못된 믿음인가? 아니 그러면 그 뒷모습을 포착할 줄 알고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바꿔본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거라는 진단이 떨어진다. 동의할 수 밖에. 시인은 또 말한다. 그 지겨운 희망에 대해. 그래도 우리에게 ‘희망’을 놓아버리는 일은 여전히 금기된다. 그러면 남는게 없기 때문이다. 다만 어떤 형태의 희망이며 무엇을 희망하고 있으며 어떻게 희망하는가가 문제이다. 물론 그 실현방식에 대해서는 모호하다. 그래도 여전히 ‘희망’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다.

노선

형님은 자기 노선(路線)이 있소?
독립문 지나다 아우가 묻는다
그는 대답 대신 자신에게 반문한다
희망은 있는걸까
아직 그런 게 남아 있다면
거기가 나의 노선이 될 텐데

아우는 자기 노선이 있나?
광화문 지나다 형이 묻는다
그는 대답 대신 형에게 반문한다
희망은 있는 걸까요
아직 그런 게 남아 있다면
거기가 너의 노선이 될 텐데

가다보면 길이 되는 것
그것이 희망이라면
그 희망이 우리의 노선이리

  ‘가다보면 길이’ 된다고? ‘그것이 희망’이라고?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는가. 노신의 말이 떠오른다. ‘처음부터 길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한사람 두사람 가다보면 길이 생긴다’는.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는 선구자들의 이야기고, 등떠밀려 그 길의 첫 번째 보행자로 나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평범에 바쳐지는 ‘희망’은 없는가? 구체적인 ‘희망가’는 울려퍼지지 않는다. 당연한 일에 목숨걸지 말자. 시인은 신이 아니다. 냉소적인 시선으로 생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올곧은 시선으로 ‘희망’과 ‘노선’을 이야기하는 시인의 말이 때로는 위로가 되는 법이다. 그래서 ‘희망’은 ‘완창’이 된다.

희망이 완창이다

절망만한 희망이 어디 있으랴 

절망도 절창하면 희망이 된다 

희망이 완창이다

  ‘희망’에 대한 평가와 기대는 각자의 몫이다. 다만 필요성은 인정하자. 인간과 사회로 확대된 ‘희망’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한 꿈이 아닌가. 그것은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교감’에서 시작된다. 이 울림과 떨림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메마른 생을 산다. 겹침과 떨림을 느껴보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 욕망이 있기나 한 걸까?

교감

한 마음의 움직임과
한 마음을 움직이게 한
한 마음의 움직임이
겹쳐 떨린다
물결 위에 햇살이 겹쳐 떨리듯

시집을 읽다가 발견한, 어딘가에서 본 듯한, 참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구절이 눈에 밟힌다. 내가 걷는 이 길이 가장 먼 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었습니다. - '뒷길' 중에서

 

2005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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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돌아왔다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이우일 그림 / 창비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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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는 과거로 가는 시간 여행이다. 사람들이 유독 비에 약한(?) 이유는 과거의 기억에 젖어들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지나온 시간들과 살아온 과정들을 반추하고 현재의 의미를 되새기며 쉼표같은 한숨을 내뱉는다. 세상에 대한 열정과 냉소를 멈추고 잠시 나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같은 존재가 ‘가을비’다.

  김영하의 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는 우리들 삶의 거울처럼 시대와 세태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단편의 힘은 촌철살인의 강렬함이다. 잠이 덜깬 아이의 얼굴에 부딪치는 찬물처럼 우리들 정신에 부어지는 냉각수다. 김영하의 소설들은 그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현대문학에서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로 처음 만난 이후 오랜만에 마주한 그의 소설들은 여전히 일상성에 바쳐지고 있다. 어둡고 컴컴한 역사의 뒤안길과 인류의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는 방대한 스케일의 소설과는 구별되는 김영하의 소설들은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8편의 단편으로 묶인 이 소설집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금 여기’를 보여주고 있다. 뒤틀리고 일그러진 삶의 가치와 우울하고 모멸스런 현실들을 뻔뻔스럽게 보여준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우리의 자화상 때문에 오히려 독자가 외면하고 싶게 만든다. 비루하고 답답한 현실이 우리 삶의 일부라면 피해갈 이유가 없다고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사소한 생활의 일부가 모여 우리 삶의 마디를 이루고 그 마디들이 모여 한 시대를 이룬다. 마치 홍상수 영화가 보여주는 미의식과 유사한 김영하의 소설들은 그래서 더 흥미롭다. 옴니버스식의 단편 영화로 만들면 재미있을 것같다.

  두 부부의 ‘이사’를 소재로 사소한 일상이 얼마나 끔찍하게 변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너를 사랑하고도’와 ‘크리스마스 캐럴’에서는 모멸스런 욕망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삶의 가치를 상실한 우리들의 우울한 자화상을 보여주는 ‘그림자를 판 사나이’, 열정에 대한 뒤틀린 모습으로서 ‘너의 의미’를 보여준다. ‘보물선’에서는 신기루같은 욕망의 끝을 보여주고, ‘마지막 손님’에서는 단순한 일상을 그려낸다. 표제작 ‘오빠가 돌아왔다’에서는 가족의 가치를 되묻고 있다.

  김영하의 소설을 한 마디로 정리하는 것은 무모하다. 8편의 단편이 보여주는 미덕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세계의 핵심은 삶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된다. 모든 인물들은 생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태도를 보여준다. 다만 그 욕망들을 구현해내는 방식들이 제각각이며 뒤틀리고 비틀어진 형태로 현실에 반영된다. 그것이 더욱 비극적인 것은 특별한 누군가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거울속에 비친 나와 우리들의 모습을 애써 외면하고 싶어하듯 소설의 내용들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게 한다.

  세태소설로서 현재 우리의 모습을 가장 적확하고 직설적으로 보여주려는 김영하의 소설은 단숨에 읽힌다. 어쩌면 소설은 그래야한다고도 생각해본다. 미처 손뻗어 만져보지 못한 곳을 더듬게 한다. 작가는 우리의 손을 이끌고 어둠속의 그 무엇인가를 애써 확인하게 만든다. 왜 여기, 이것에 대해서는 말이 없냐고. 소설이 TV 교양프로처럼 거만을 떨거나 사회 곳곳의 문제를 지적하고 털어내며 해결책을 제시할 필요는 없다. 다만 아프다고 여기를 보라고 소리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이 소설들은 고발자의 역할도 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열정은 냉소를 낳는다. 뒤틀리고 억압된 개인의 욕망이 현실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 그런 모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때로는 뜨겁게 때로는 차갑게 현실을 바라보자. 대안이나 특별한 처방은 없다. 인생에 무슨 정답이 있겠는가. 그저 살아볼 일이다. 주변을 기웃거리고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를 돌아보고 영화같은(?) 일상들을 즐기면 그 뿐 아닌가.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생의 가치’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하는가. 나는 없다고 본다. 다만 과정에 충실하고 현재를 즐기며,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해 보는 것 뿐이다. 김영하의 소설은 그렇게 사람들의 자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오래된 그 자세를 바꿔 보라고, 다리를 바꿔 꼬아 보라고.


2005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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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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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이 주는 힘이 삶의 다양성에 대한 탐구라기보다 힘겨움일 때가 많다. 어렵고 힘든 사람이 많다.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행복하다고 외치며 사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아보라. 정말 드물다. 누구나 한가지쯤 정신적 상처를 가지고 살며 치유되지 않은 마음의 생채기를 핥으며 오늘을 넘기고 있다고 보면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상처의 깊이와 상태가 다를 뿐. 그 많은 아픔과 고통들을 단편소설은 헤집어 보여준다. 아프지? 라고 물으며. 혹은 이렇게 훨씬 더 슬프거나 지독한 고독을 가직한 사람도 있으니 엄살떨지 말라고 말한다. 그게 단편의 힘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어차피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스펙트럼을 펼쳐준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화려함보다 그 속에 담겨지는 진실이 가장 근접한 정답이 될 것이다. 삶의 진정성은 삶의 진실의 다른 표현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삶의 진실일까? 그걸 아는 사람이 소설을 쓰겠는가? 그걸 아는 사람이 소설을 읽겠는가?

  성석제도 그 많은 소설가 중의 한 사람이다. 물론 나름의 독특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낸 몇 안되는 이야기꾼임에 틀림없다. <홀림>,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서 보여주었던 웃음은 여전히 그의 특별한 무기가 된다. 고전문학의 전통에서 ‘골계미’라 이름 붙혀진 이 웃음은 새로운 방식은 아니지만 제대로 활용하며 작품과 어울리도록 요리한 작가가 많지 않다. 성석제는 분명 그 웃음의 계보를 잇는 작가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절대 희극이 아니다.

  희극과 비극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 성석제 소설의 재미다. 한번 웃음을 터뜨리면 참지 못하고 계속 킬킬거려야 한다. 나는 특히 그렇다. 단편 ‘만고강산’을 읽는 동안 눈물이 날 정도로 혼자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 남겨지는 기분은 유쾌하지 않다. 그것이 목적인지도 모르지만. 고전문학의 ‘풍자’나 ‘해학’을 버무려 적당히 재미있게 읽고 적당히 뼈가 있는 소설이라고 평가한다면 무엇인가 분명 아쉬운 점은 남는다.

  가상의 지방도시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 형식의 소설들 - ‘만고강산’, ‘저녁의 눈이신’, ‘내 고운 벗님’, ‘소풍’에서는 주로 상황을 보여준다. 우리가 굳게 믿었던 일상에 대한 아이러니와 반전 속에서 안타까움을 읽어낸다. 말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구수한 입말이다. 지방의 사투리가 친근함을 더해주고 마음의 긴장을 풀어준다.

  한 인간에 대한 고찰들 - ‘잃어버린 인간’, ‘인지상정’, ‘너는 어디에 있느냐’, ‘본래면목’에서는 특별한 생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을 맛본다. 그러나 이 소설들의 인물들이 특별한 이유는 주변 인물들에 의해, 그리고 사회 역사적 상황에 의해 특별함이 생겨난다. 현실속에서 하나하나의 사람들을 들여다보면 특별한 인생을 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인간들은 모두 객관적인 상황이나 삶의 형태가 평범에서 벗어나 있다. 평범한 개인을 대표하지 않는 이런 인물 유형은 당연히 우리에게 친근함보다는 거리감과 경계심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특별한 이유에 따라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마련해 준다. 어디 완벽한 인간이 있을까마는 그래도 다시 더 한번 나를 돌아보고 우리를 생각하는 시간을 찾아봐야 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는 고전소설 ‘채봉감별곡’을 차용하고 있다. 씨줄과 날줄처럼 소설속 이야기와 ‘채봉감별곡’이 뒤섞여 장면과 내용을 이루고 있다. 소설속의 소설과 이 소설은 겉돌지 않고 묘한 조화를 이루며 한 편의 풍경화처럼 수려하고 아름다운 문장들을 다듬어내고 있다. 잃어버린 우리들 유년의 윗목을 더듬고 있는듯 하다.

  성석제 소설의 힘이 여기에 또다시 드러난다. 단순한 이야기꾼으로서 재밌는 스토리를 끝없이 쏟아내는 요설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소설가에게 다양성은 분명 큰 힘이 된다. 구수한 입말의 성찬 속에서도 인물에 대한 집요한 탐구가 드러나고 있으며 때로는 서정성 넘치는 문장으로 독자들을 달빛아래 고요함으로 이끌어 준다. 대화와 산책을 적당히 뒤섞어 상대를 매료시키는 소설가로 볼 수 있다.

  얼마전, 고민끝에 동국대 교수 자리를 포기한 현실적 용기?, 만용?이 신문 칼럼에 난 적이 있다. 한겨레 북섹션으로 기억되는데 소설에 전념할 수 없을것 같아 안정적이고 사회적 신분이 보장된 교수 자리를 최종 임용단계에서 포기했다는 기자의 말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에서 이야기하듯 어차피 단 한번 뿐인 인생길에서 걸어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은 남는 법이다. 성석제도 포기한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아니라 지금 걷고 있는 길에 대한 자신??행복으로 가득할 것이라 믿는다. 멀리서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낼 수 밖에 없으나 그의 소설은 또 기다려진다.


2005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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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불온한가 - B급 좌파 김규항, 진보의 거처를 묻다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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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의 건강은 다양한 스펙트럼처럼 펼쳐지는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수많은 가치와 이념들이 제각각 자기 목소리와 색깔을 낼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보다 나은 사회와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그 가치들이 공존한다고 해서 구색을 갖추듯 쇼윈도우의 상품처럼 다양하게 진열된다고 해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각기 다른 이념들이 받아들여지며 자신의 가치와 신념대로 살 수 있는 사회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규항이 들으면 무척 화를 낼 일이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B급 좌파’를 자처하는 김규항이 <나는 왜 불온한가>의 머리말에 인용한, 내가 좋아하는 노신 선생의 말이다. 그러나 그는 ‘걸어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이 아니라 길을 만들어가는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다. 그 길은 언젠가 넓고 탄탄한 길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걷고 싶은 길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아니 어쩌면 그 길을 걷고 싶으나 그저 대다수의 사람들이 걷는 길에 섞여 걷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애써 외면하고 있는 길을 김규항은 묵묵히 걸으며 소리 높혀 사람들에게 외친다. 이 길이 사람 사는 길이라고, 이 길이 더불어 사는 길이라고, 모두 이 길로 오라고. 사회주의자라는 이름표는 김규항과 지나치게 잘 어울린다. 스스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달리 부를만한 이름도 없는 셈이지만 그의 글을 읽다보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혼동하고 우리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때문에 잘못 규정된 이념적 지향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진다.

  그의 생각은 사상이나 이념이라는 거창한 말이 어울리는 않는다. 그의 삶은 혁명가의 그것처럼 화려하거나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삶은 아름답다. 너무나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들을 통해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생활의 발견’이다. 소소한 생활속에서 그의 생각을 드러내고 이웃과 나누고 그것을 실천해나가는 모습은 아주 쉽고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평범한 우리는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것인가. 김규항은 말한다. 자본주의 물들어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온몸을 맡기고 치열한 경쟁과 사람냄새 나지 않는 일들과 싸우고 있기 때문이라고. 내가 그의 글을 잘못읽지 않았다면 내가 읽은 이 책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스스로 선택한 가난에 대해 당당하며 삶의 태도가 당당하며 그것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에 익숙한 그의 모습은 물론 군자나 종교인의 모습은 아니다. 흔히 우리 이웃에서 볼 수 있는 아저씨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들과 그가 가진 생각을 조금만 들여다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이 책은 글쓰는 것조차 지식인의 것이라서 대단히 힘들다는 김규항이 진보의 거처를 묻고 있다.

  세상은 ‘학생 시절에나 하는 운동’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일생에 걸쳐 간직되는 신념으로 바뀐다. 그 긴 신념은 운동을 세상의 모든 지점(운동을 청산한 사람들이나 선택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지점들을 포함한)으로 넓히는 일이기도 하다. (본문 49페이지)

  개혁과 진보의 차이를 정확하게 말해주는 김규항의 이 책은 2001년부터 2004년까지 한겨레와 씨네21, 노동자의 힘, 보그 등 잡지와 신문에 연재한 그의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책을 쓰기 위해 쓴 책이 아니다. 마지막에 2004년과 2005년 일기를 덧붙이고 있어 그의 인간적인 면모과 생활과 생각의 접점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아주 인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논평자들과 밤의 주둥아리들(네티즌)을 혐오하며 활동가를 가장 아름다운 직업이라 말하는 그의 말에 진진하게 경청하게 되는 이유는 그의 생활이 곧 그의 말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한 남자가 ‘딸에게서 존경받는 인간’이 되려고 애쓴다면 그의 삶은 좀더 근사해질 것이다.”는 한 마디의 말은 다른 어떤 거창한 웅변이나 화려한 수사보다도 더 큰 울림을 전해준다. 그의 이념과 가치의 단면을 보여주는 말을 들어보자.

  체 게바라나 김산을 흠모한다면 그렇게 살지는 못해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 현실 속의 체 게바라나 김산을 존경할 줄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체 게바라나 김산을 흠모하는 우리는 현실 속의 체 게바라나 김산엔 관심이 없나 그들을 비웃곤 하지요. “어리석고 비현실적이며 관념적인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본문 213페이지)

  그의 말대로 시간이 흘러 책 속에서 만난 체 게바라나 ‘아리랑’에서 만난 김산을 나는 흠모한다. 이름없는 우리 생활 속의 체 게바라나 김산을 ‘비현실적이며 관념적인 사람’이라고 비웃은 적은 없지만 나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적은 많지 않다. 작은 실천과 노력이 사회를 변화 발전시킨다는 평소의 생각만으로는 부족한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우리 전체를 돌아보게 하는 말이다. 그들과 우리의 삶이 별개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지금, 여기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래서 김규항은 아이들에게 희망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만든 잡지 <고래가 그랬어>를 정기구독할 예정이다.

  우리는 인류가 생긴 이래 최악의 어른들이다. 우리 전엔, 제 아무리 탐욕스런 장사치들도 제 아이에게 동무를 경쟁자라 가르치거나 돈이 최고의 가치라고 가르치진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오로지 그렇게 가르친다. (본문 281페이지)

  누구나 말한다. 아이들이 미래의 희망이라고.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고민과 실천은 영원한 숙제가 되겠지만 내겐 전혀 불온하지 않고 지극히 상식적인 김규항의 글들이 아프게 다가왔고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재생지로 만들어 두툼하지만 가벼운 그의 책이 또다른 방식으로 한마디를 던진다.

좋은 글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며
좋은 음악은 가슴이 아프다. (본문 251)


2005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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