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자히르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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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결혼에 대한 많은 선언과 이야기들은 이제 우리를 피곤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원히 그 주제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다만 작가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새로운 방식과 새로운 형태의 사랑을 보여주기도 하고 그것이라고 믿었던 고정관념들을 흔들어대기도 한다. 타성에 젖어버린 사랑에 대한 점검이고 삶의 방식에 대한 경고로 들리기도 하지만 작가는 말로 전할 수 없는 무엇을 전하고 싶어한다. 그것은 독자의 몫이다. 코엘료의 문장이 지닌 매력은 여기에 있다.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 그것도 떠나버린 아내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괴로하는 과정을 통해 참 사랑을 확인하고 자신을 돌아본다는 3류 드라마같은 소설의 기본 골격은 한심스럽다. 물론 그것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보여줄 것인가가 중요하다. “한 번 만지거나 보고 나면 결코 잊을 수 없고, 우리의 머릿속을 완전히 장악해 광기로 몰아가는 무엇, 자히르.(78페이지)”를 통해 독자에게 던져지는 메시지는 신기루처럼 명확하지 않다. 자히르의 존재를 아내 에스테르에게서 발견하게 된 주인공은 자신의 삶 전체를 뒤돌아보고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사랑의 전도사 미하일을 매개로 아내의 위치와 아내의 자히르를 발견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는 수많은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유는 책임의 부재가 아니라, 나에게 최선인 것을 선택하고 책임지는 능력이기 때문이다.(35페이지)”라고 말하는 작가는 독자에게 선명한 주제도 끓어넘치는 감동도 선사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어하는 대로 믿는 존재니까.(73페이지)” 나머지는 독자에게 찾으라는 말인가?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재미와 감동이라는 고전적 명제를 부인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내게 <오 자히르>는 후자쪽에서 경미한 진동만 남긴채 책장을 덮게했다. 이를 테면,

사랑은 길들여지지 않는 힘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통제하려 할 때, 그것은 우리를 파괴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가두려 할 때, 우리는 그것의 노예가 됩니다. 우리가 사랑을 이해하려 할 때, 사랑은 우리를 방황과 혼란에 빠지게 합니다.(129페이지)

선로는 마치 내 결혼에 대해, 그리고 모든 결혼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했다.(169페이지)

가난뱅이는 댁이오! 당신은 자신의 시간을 마음대로 쓰지도 못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도 없고, 자신이 만들지도 않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규칙들을 따라야만 하잖아.(284페이지)

아코모다도르. ‘살다보면 어느 순간인가 한계에 도달하기 마련이다’(317페이지)

그리하여 지혜로운 페르시아 현자의 말대로, 사랑은 아무도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 질병이다. 그 병에 걸린 사람은 나으려고 애쓰지 않으며, 사랑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치유되기를 바라지 않는다.(439페이지)

  이런 잠언류의 구절들은 평범에 바쳐지고 있다. 구체적 형상화와 주관적 변용은 케케묵은 문학의 이론이 아니라 소설가가 금과옥조로 지녀야할 기본적 소양이다. 그것이 의도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단순한 사건과 과정의 지루함으로 무려 45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소화할 수는 없다고 본다.

  사랑에 대한 정의와 방황을 보여주는 방식은 단속적이며 결혼과 아내의 사랑에 대해 보여주는 방식은 지루하다. 소설에서 감동은 무엇인가? 그것은 삶의 진정성으로부터 온다고 믿는다. 문화적 상대주의를 말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결혼과 상대방에 대한 소홀함, 매너리즘에 빠져드는 관계 - 이런 가장 보편적인 주제를 담아내는 데 코엘료는 일단 성공한듯 보인다. 그것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상황과 모순에서 비롯된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보편적 인류애인 ‘사랑’에 근거하고 있어 더욱 애매하다. 전쟁을 이야기하고 사람들 사이의 가식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가장 친밀해야할 부부관계에서조차 ‘자히르’가 사라지는 상황.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 부분에 대해 작가는 진지한 고민과 궁극적인 고통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그저 그런 통속 소설일 뿐이다.

  고전이 될만큼 좋은 책들만 골라 읽는 것이 반드시 좋은 독서법이라고 할 순 없지만 개인적 취향과 관심 분야까지 고려해서 선택의 문제를 해결할 좋은 방법은 없을까?


2005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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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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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있다. 죽거나 혹은 다치거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순간 존재는 소멸한다고 믿는다. 관계와 접속을 통해서만 인간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김경욱의 소설은 인간의 그 ‘존재 형식’을 탐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집요하거나 진지하지 않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건조한 문체가 매력적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섬, 정현종)”는 짧은 시가 아직도 사람들에게 자주 인용되는 이유는 관계에 대한 불가해함 때문이다. ‘타인의 취향’을 알 수 없거나 무관심하며, ‘장국영이 죽었다’는 소식에도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와 추억만으로 그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김경욱의 소설집 <장국영이 죽었다고?>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섬’의 존재 방식을 묻고 있다.

  동년배의 소설가가 쓴 책은 정서와 추억을 공유할 수 있다. ‘영웅본색’과 ‘첩혈쌍웅’으로 홍콩 느와르를 몰고 온 장국영과 주윤발 오천련과 장만옥, 장학우와 왕조현을 떠올려본다. 80년대와 지금 학생들이 달라진게 있다면 인터넷이다. 거미줄처럼 네트웍으로 연결되어 있어 이전보다 훨씬 더 친밀해보이지만 관계는 피상적이다. 표제작인 <장국영이 죽었다고?>는 이혼녀와의 채팅을 통해 같은 날 같은 극장에서 ‘아비정전’을 본 우연을 확인한다. 같은 날 결혼하고 제주도로 신혼 여행을 간 것도 일치한다. 독자들이 이혼한 주인공의 전처로 착각할만큼 우연은 일치한다. 하지만 가상 공간의 인연은 현실로 이어질 수 없으며 서로 다른 공간과 존재만을 확인한다. 장국영의 장례식에 검은 양복과 흰 마스크를 한 여러명의 사람들이 극장 앞에 모여 해프닝(?)을 벌이지만 그 행위 또한 철저하게 개인적이며 익명성을 담보로 한다. 그것이 접속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존재 방식이다.

  이 외에 여덟 편의 단편은 ‘당신의 수상한 근황, 피르난도 서커스단의 라라 양, 낭만적 서사와 그 적들, 나비를 위한 알리바이,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타인의 취향, 장미정원의 아름다운 원주민, 나가사키여 안녕’이다.

  ‘당신의 수상한 근황’에서 ‘삶이란 나약하고 낡아가는 일체의 것에 대해 잔혹하고 가차없는 그 무엇이라고 말한 사람은 독일사람 니체였다. 하지만 나약한 일체의 것에 잔혹하고 가차 없는 삶을 만드는 것은 인간이다.’는 인용방식을 취하고 있다. 결국 인간에 대한 인간의 탐구가 모든 소설의 주제라는 측면에서 김경욱의 소설들은 그 문법을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으며 지나친 진지함과 무거움으로 독자들을 주눅들게 하지도 않는다. 그의 소설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영화와 TV, 인터넷은 시대를 반영하는 매체다. 인간의 관계망에 포착된 의미들을 해석하는 데 동원되는 요소들은 피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소통 방식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낯설지 않으며 잔뜩 폼잡지 않고 있다.

  낭만적 서사와 그 적들에서 보여주는, 어디에선가 많이 본 듯한 이야기들, 일테면 “남자들은 섹스를 통해 사랑을 확인하려 하지만 여자들은 사랑을 느낄 때 비로소 섹스를 원한다. 남자들에게 섹스는 사랑의 본론이지만 여자들에게 섹스는 사랑의 부록이다.”는 대학 동아리 낙서장에서 봤음직한 표현들이 유치하지 않게 느껴진다. 낭만적 서사를 지배하는 표현들이 모두 공감대와 보편성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 죄 없이 사랑할 수 없는가”라고 말하는 주인공이 몰라서 묻고 있겠는가? 아니면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에서 “마누라와 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다. 로맨스와 진지한 대화.”라는 잠언같은 말들을 뱉어내는 상황들이 자조적이다. 경건함은 없지만 냉소도 없는 것이다.

  다만 아직은 깊이와 넓이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으며 바닥에서 건져올린 가벼움이 아니라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지나간 이야기들에 대한 작가의 아쉬움과 곤혹스러움보다는 앞으로의 이야기에 주목하며 또 다른 방식을 기대해 볼 수 있겠다. 세대를 규정하는 것이 언어와 문화적 환경일 수만은 없지만 젊은 작가의 참신함이라고만 명명할 수 없는 새로움을 기다리는 것도 독자들의 몫이다.


2005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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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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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문학에서 소설의 흐름을 짚어 내는 일은 쉽지 않다. 적어도 한 세대가 흘러야 문학사가 정리되고 객관적 평가가 가능하다는 고정 관점에서 벗어나 최근의 경향에 대해서도 비평가들은 그 흐름을 나름의 잣대로 평가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인으로 분류되는 작가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일정 기간 유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혜성처럼 나타나는 스타는 어느 분야에나 있다. 박민규는 그런 소설가인지도 모른다. <지구 영웅 전설>로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하고 뒤이어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단한 박민규는 2년만에 첫 단편집 <카스테라>를 선보였다. 전업 작가로서 왕성한 창작욕과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등단한 점등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주문한 책을 받아보니 열흘만에 2쇄를 찍은 책이 도착했다. 작가로서는 가장 행복한 형태의 진행형이다.

  이런 외적 현상과 흐름은 당연히 내용의 신선함과 뚜렷한 차별성 때문이다. 우리가 현대소설에서 믿어왔던 서사구조의 틀을 뒤흔들고 있지는 않지만 전통적인 소설의 문법에서는 한걸음 빗겨 서 있다. 후기구조주의가 국내에서도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90년대 초반의 현상들과 유행들을 기억하는 독자들이라면 박민규의 소설 정도는 가볍게 소화할 수도 있겠다. 환상을 소설 속에서 처리하는 방식과 주제는 이미 독창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박민규는 그렇게 짧은 기간동안 자신의 영역을 확실하게 표시하고 있다. 신선함과 독특함만이 미덕일 수는 없으나 그의 소설은 독자들에게 혹은 비평가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냉장고가 영국의 유벤투스를 응원하던 유벤투스의 훌리건이었을 것이라는 상상으로 시작되는 이야기 ‘카스테라’를 비롯하여 ‘갑을고시원 체류기’까지 공통적인 흐름과 유사성을 읽어내는 것도 또하나의 재미이다. 우선 주인공이 모두 1인칭 남성으로 지칭되는 ‘나’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1인칭 주인공은 내밀한 자기 고백이며 인물의 심리 상태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어렵지 않게 맡길 수 있다. 전통적인 소설의 사건 중심에서 벗어나 있으며 갈등 구조의 팽팽한 긴장감을 원하는 독자들은 그래서 이내 실망하고 만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환상을 선택한다. ‘아, 하세요 펠리컨’에서 오리배 세계 시민 연합의 출현과 ‘코리언 스텐더즈’에서 우주선의 출현등이 그것이다. 어차피 소설이 현실을 뛰어넘는 자리의 어디쯤 있다고 믿는 독자들이라면 차라리 마음 편하게 그의 소설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개연성을 미덕으로 소설을 평가하는 전통 문법에서 벗어나 있는 그의 독특한 미학 구조는 그래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판단은 물론 독자들의 몫이다.

  일련의 소설들에서 그가 보여준 세상에 대한 태도는 사뭇 진지하거나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촌철살인의 극단을 보여주는 예가 없어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한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은 그의 문학세계와 앞으로의 행보를 짚어보는 중요한 바로미터가 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가벼움이라고 쉽게 평가할 수는 없지만 분명 무언가 결여된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그것이 우리가 접해왔던 소설의 익숙함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단편이 지녀야할 미덕과 인간에 대한 정밀한 관심과 진지한 접근이 부족한 이유이다. 이제 시작과 다름없는 그에게 특별히 기대하는 것은 없다. 독자들은 익숙하지 않은 소설가에게 무엇을 기대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저 지켜본다. 다음은 무엇일까? 호기심과 궁금증을 가지고 다음 작품들을 읽고 기다린다. 그 기다림을 갖게 하는 힘만으로도 박민규는 성공적이다. 나만 그런가?

  주목받는 만큼 행동이 부자유스러울 수 있겠지만 독자들의 반응에 값하는 소설들이 지속적으로 나와주길 빈다. 새로움과 낯설음을 문법으로 하는 독특한 박민규만의 소설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이라면 우리는 관심과 애정으로 그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일시적이거나 즉흥적인 발랄함과 참신함이라면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생각보다 독자들은 냉정하고 정확하다.

  1인칭 남성 화자가 보여주는 고백의 서사에서 벗어나 이제 멀리, 그리고 넓은 곳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길 바라며 재미있는 소설집 박민규의 <카스테라>의 책장을 덮는다. 곧이어 다름 장을 열 수 있기를 기대하며. ‘자아’에서 ‘타자’로의 관심을 기대하며.



2005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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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301
오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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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처럼 시집에 서시라 미리 밝히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언제나 서시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시집 전체를 통찰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서시에서 이 시집의 낯설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시선의 변화와 이동이다. 바라본다는 것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시선의 이동과 관점은 변화는 그래서 중요하며 세상에 대한 인식의 틀을 제공한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그것들을 노래한다. 선명하고 분명한 이미지로.

호수와 나무
- 서시

잔물결 일으키는 고기를 낚아채 어망에 넣고
호수가 다시 호수가 되도록 기다리는
한 사내가 물가에 앉아 있다
그 옆에서 높이로 서 있던 나무가
어느새 물속에 와서 깊이로 다시 서 있다.

  오규원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그것은 오래된 수첩과 대면하는 기분이다. 일기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개인적인 경험과 그의 시에 대한 기억들이 시인의 이미지를 만든다. 초기 시집 <분명한 사건>과 <순례>를 제외하고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 땅에 씌어지는 敍情詩>,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사랑의 감옥>,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한 잎의 여자>,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그리고 시선집 <사랑의 기교> 시론 <현대시작법>을 보면서 시간이 흘렀다. 연습장에 삶의 태도와 인식에 관한 짧은 명언들을 적던 무렵 오규원의 시는 ‘비가 와도 젖은 자는 젖지 않는다’는 식의 잠언들을 토해냈다. 초기에 그가 보여주었던 은유는 독특했고 관심의 내용 또한 특별했다. 새로움에 대한 관심으로 그의 시를 읽기 시작했다.

  해설에서 정과는 ‘은유와 환유라는 지칭의 모호성’, ‘오규원의 후기시에 대한 이해의 세부적 불투명’, ‘초기시와 후기시의 연속성에 대한 의문’이라는 세가지 측면에서 이번 시집을 분석하고 있다. 적당한 긴장과 세상에 대한 의문으로 대충(?) 시를 쓰는 시인들과 오규원은 차별화된다. 한국시의 한 기둥으로 큰 축을 담당하고 있다. 그의 자리매김이 끝나기 전에 그의 전집이 나왔지만 그의 전작이 수록되려면 아직 기다려야 한다. 그의 시는 초기에 은유에 기초하여 절대 관념에 대한 천착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그것은 김춘수와 닮아 있다. 다만 절대관념에서 출발한 시의 시방법론이 시점을 달리하여 관심의 폭과 영역을 넓혀 나가고 그것을 드러내는 방법을 달리 했을 뿐이다. 나는 그의 시에서 시선의 이동을 경험했다. 초기시에서 보여주었던 발상의 전환과 절대 관념에 대한 재해석, 그리고 사물과 사람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읽었다. 그의 시는 내 능력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매력과 깊이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낯설게 바라보는 색다른 시점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90년대 초반에 나온 <현대시 작법>에 밑줄 그어가며 읽었던 기억은 이제 추억(?)이 되어 버렸다. 책꽂이 한 켠에 꽂혀 지나간 삶에 대한 추억으로 기억될 것이다. 열정은 사라졌지만 추억은 남는다. 오규원의 시들은 초지 일관 변함없는 세계를 보여주는 시인들의 시와 구별된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에서 오규원은 ‘사물의 시선’을 차용한다. 인간의 시선과 생각을 외부 세계에 투영하는 대신 사물의 시선으로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며 세상을 해석하거나 분석하기 보다는 관념화된 이미지를 풀어 놓고 있다.

하늘과 포도 덩굴

뒤뜰 포도나무
덩굴
혼자
하늘을 건너가고 있다
오늘은 반 뼘


서산과 해

고욤나무가 해를 내려놓자
이번엔 모과나무가 받아든다
아주 가볍게 들고 서서 해를
서쪽으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옮긴다
가지를 서산 위에까지 보내놓고 있는
산단풍나무가 옆에서
마지막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는 식이다. 그것은 외물에 대한 무심한 태도도 관조적 태도도 아니다. 감정이 배제된 철저한 관념의 세계가 자연에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그 객관의 자리에서 오히려 익숙한 언어들이 생생한 이미지를 풀어내고 있다. 이제 그의 시세계는 완성(?) 혹은 마무리 단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서러운 한 생애가 저물어 가면서 토해내는 붉은 언어들이 그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할 것이다. 한 편의 시와 한 권의 시집이 아니라 그의 전작들을 꼼꼼히 훑어보는 일은 나중으로 미루자. 다만 21세를 향한 그의 언어는 여전히 팽팽하게 긴장한 독자의 심장을 겨누고 있다. 그래서 두근거린다.


2005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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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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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입학 무렵으로 기억한다. 어머니를 졸라 집에 개를 한 마리 키우기로 했다.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이 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지극했다. 아버지는 손수 판자를 잘라 개집을 지어 페인트칠까지 해서 멋진 개집도 만들어 주셨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개의 눈에 눈꼽이 끼고 밥도 잘 먹지도 않고 개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안타까움의 크기만 기억한다. 개가 죽고 나서 까만 비닐 봉투에 담아 시냇가에 가 땅을 파고 개를 묻던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어린 초등학생의 마음속에 지금까지 사진처럼 선명한 죽음에 대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후론 집에서 아무것도 키우지 않는다.

  개는 보통 인간과 가장 친근하면서 충직한 동물로 인식되어 있다. 주인을 살린 개 이야기를 초등학교 때 배운 기억도 난다. 지금은 사람들이 애완용으로 아파트에서도 개를 키운다. 오히려 도시에서 개를 키우는 사람들이 늘었다. 외로움과 그리움의 부피가 커진 탓이다.

  김훈의 장편소설 <개>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개발바닥 내발바닥’이다. 신산스런 삶의 과정을 밟아 나가는 인간의 발은 개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이 바로 우리들 삶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힘겹고 고통스런 순간들 너머에도 생은 존재하며 삶은 어떤 형태로든 지속된다. 이 소설은 그렇게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너도 개다!

  이 소설은 청소년을 위한 우화소설로 분류될 만하다. 어른을 위한 소설로도 손색없지만 이제 성인들은 쉽게 감동하지 않는다. 다만 어린 시절 개에 대한 추억이 한 두 가지쯤 있었을 법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소설은 유년의 기억으로 안내할 수도 있겠다.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철저히 개의 시선을 빌어 세상을 둘러본다. 배경은 개가 태어난 어느 평범한 농촌과 주인을 만난 어촌이다. 고려의 가전체를 흉내내 어설프게 세태를 비판하거나 인간의 일그러진 모습을 풍자하지는 않는다. 담담하고 편안한 문장으로 개의 발바닥을 따라간다. 특별한 사건과 인상적인 갈등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암캐인 흰순이와 동네를 지배하는 악돌이를 내세우기는 하지만 그 개들은 소설의 내용을 좌우하는 결정적 역할이 아닌 조연에 불과하다.

  이문열의 소설 <오딧세이아 서울>을 기억하는 독자들은 이런 종류의 소설이 갖는 미덕을 쉽게 평가하기 어렵다. 이문열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몽블랑 만년필이다. 사물에 의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도덕 교과서가 되기 쉽다. 가르치려 들거나 비판의 잣대를 들이밀기 십상이다. 다만 새로움에 대한 도전이며 식상함에서 벗어나 잠시 소설의 문법을 잊고 맑은 샘물을 한 모금 마시는 기분 정도면 되겠다.

  하지만 그 이상은 없다. 그래서 아쉽다. 억지스런 감동은 없지만 주인의 죽음으로 알 수 없는 운명 앞에 놓인 주인공 개의 울부짖음으로 소설은 막을 내린다. 과정으로 읽기엔 힘이 부족하고 결말이 던지는 메시지는 모호하다. 내용상 김훈 특유의 문장이나 표현들을 감상하는 재미도 없다. 자칫 특징 없는 소설로 남겨질 수 있는 소설이 될 수도 있겠다.

  누구나 공감하는 기억의 조각을 찾아내는 퍼즐게임은 즐겁다. 소설가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정서를 쓰고 싶은 욕망이 있다. 내밀한 언어의 정제된 고백보다 편안하게 다가오는 수필처럼 부드러운 문장들이 필요한 때도 있는 법이다. <개>는 그렇게 쉽고 편안한 저녁의 대화처럼 일상적인 모습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풀어 놓지 않아 마음 불편하지 않은 것이 커다란 미덕이다.

  과작(寡作)인 그의 작품을 기다리는 많은 독자들에게 이 소설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갈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의 많지 않은 작품을 대할 때마다 독자들이 느끼는 신선함이나 감동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단 한 편이라도 영원히 각인될 수 있는 작품들을 만나고 싶다. 모든 작가와 독자들의 공통된 희망일까?

  소설 외적인 이야기지만 책은 손맛이다. 언제부턴가 ‘민음의 시’가 양장본으로 나오더니 이제 소설들도 걸핏하면 양장본으로 출판된다. 뭔가 있어 보이지도 않고 책장의 부피만 차지한다. 편안하게 접어가며 읽을 수 있고 둥글게 한 손에 말아쥐고 있는 편리함도 사라졌다. 분량과 책 가격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양장본의 유행이 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좀 더 소설다운(?) 표지와 제본이 나는 좋다.


2005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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