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 대한 연민 -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임현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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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님 가운데 토막 같은 말씀,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도 한 생애가 필요하다. 자기 범죄를 부인하거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을 ‘용서’하는 일은 종교인도 어렵다. 타인을 향한 서운함에서 분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감정을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표현하고 처리할까. 인간의 본능에 가까우며 가성비 최고라는 ‘뒷담화’가 정답일까. 문제는 알고 외면하는 사람보다 무엇이 잘못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말과 행동을 합리화하거나 인지부조화로 극복하는 인간이 더 심각하다. 물론 이 유형에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모두 포함된다. 공자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도 견디기 어려운 세상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타인에 대한 연민’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두려움과 혐오에 맞서는 대중 행동은 보복과 증오가 아니라 희망, 화해,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포용적 연대를 지향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라 실천하기 어려운 덕목이 아닐까 싶은 회의가 든다. 넓게는 정권 교체마다 반복되는 과거 청산 혹은 정치 보복에서 좁게는 연인과 친구, 가족은 물론 직장동료, 지인에 이르는 ‘관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갈등에 이르기까지 인류 사회는 적절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문화와 관습에 따라 법률로 처벌하거나 공동체의 암묵적 질서로 배제하거나 개인적으로 보복하거나...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법’이라는 부제에 낚이지는 않는다. 그런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모두 개싸움을 하는 시대에 혼자 우아하게 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상대가 진흙을 던지는 데 우아하게 대처한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허나, 폭력을 폭력으로 이길 수는 없다. 개같은 상대를 개가 되어 물 수도 없다. 그래서 마사 누스바움은 ‘두려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시도한다. ‘두려움의 군주제’라는 원제 뒤에는 우리의 정치 위기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저자는 ‘우아하게 건너는 법’ 따위를 언급한 적조차 없다.

현대인들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불안해지고 계급과 계층 간의 갈등이 속출하며 기후 변화가 미래의 불안을 경고하는 시대를 지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침묵’을 지킨다. 그것은 두려움의 다른 표현이다. 희망의 반대말은 절망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해석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를 향한 철학자의 경고다. 현실을 외면하고 회피하며 그럴듯한 포장지로 자기를 감쌀 때, 타인을 향한 혐오에 내 일이 아니라며 침묵할 때, 상대를 공격하고 제거함으로써 두려움을 해소할 때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희망’을 떠올린다.

이 책은 주로 미국 사회를 분석하고 있으나, 준거 집단을 미국으로 삼는 대한민국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되는 이야기들이다. 정치적 분노, 차별과 혐오, 시기와 비난, 성차별과 여성 혐오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근본적인 원인을 살피고 분석하는 글이 부족한 현실에서 돈벌이에 혈안이 된 유튜버만 날뛴다. 분석과 해석이 아니라 감정의 배설과 증오 마케팅이 판을 친다. 이런 현실을 톺아볼 수 있는 차분한 시간, 넓은 안목과 사유의 도구를 제공하는 마사 누스바움의 태도는 시종 일관 차분하지만 날카롭다.

논리를 갖춘 객관적 태도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숭고함이다. 글을 읽는 사람의 눈에 어떻게 비치든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글쓴이의 관점과 태도가 냉정하고 합리적일 때 비로소 새로운 논의가 시작될 수 있다. 감정적 선동이나 정답을 제시하는 오만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떤 분야에서 어떤 직업을 갖고 일하든 마찬가지다. 겸손과 성찰은 기본이며 조심스런 태도로 좌고우면해야 실수를 줄이고 자기 성장을 지속할 수 있다. 오랜 시간 누적된 사유의 흔적들이 배어 있는 글은 어떤 형태로든 아름답다. 편안하게 읽히지만 뼈를 때리는 문장들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깊이 사고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두려워하고 비난하기란 쉬운 선택지다. -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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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읽는 법
류시현 지음 / 따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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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이 『인간다움의 순간들』에서 “개인은 자기를 기록함으로써 태어난다.”라고 썼다. 어떤 블로그의 인상적인 기록 혹은 일기 혹은 단상들을 읽다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적이 있다. 나탈리 제인 데이비스의 『마르탱 게르의 귀향』,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를 읽을 때처럼 미시사의 관점으로 한 개인을 통해 시대와 문화를 읽었다. 학창시절의 나이브한 귀여운 감성뿐만 아니라, 김연수의 말대로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버린 청춘의 고민, 자책, 방황, 불안에 이어 성장과 인정 욕구에 이르는 과정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나의 독서일기처럼, 오랜 시간 공들여 적은 누군가의 일상과 기록 그 많은 흔적들이 한 ‘개인’을 완성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역사다.

그렇게, 역사는 대단한 위인과 영웅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지 않는다. 내가 아이였을 때 『플루타크 영웅전』은 읽은 적이 있다. 천병희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로저 에커치의 『밤의 문화사』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든 이유는 분명하다. 역사는 세종과 나폴레옹처럼 뛰어난 개인뿐 아니라 이완용이나 히틀러처럼 저열한 개인의 충격과 영향에도 불구하고 이름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상으로 채색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평생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친 류시현의 『역사를 읽는 법』은 감동 그 자체다. 역사는 동일한 사건에 대한 관점, 즉 사관史觀에 따라 전혀 달리 해석 가능하다. ‘사실은 없다. 오직, 해석만 있을 뿐.’이라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출토된 문화재, 텍스트로 남은 기록 등 숱한 사료를 재구성하고 연결지어 그들(he)의 이야기(story)를 만드는 작업이 역사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류시현은 그들의 이야기를 읽는 법, 역사를 보는 관점과 태도에 대하여 자신의 경험과 고민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결국 역사는 기록된 자료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관점으로 해석하는 즐거움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물론 사건의 인과관계를 살피고 시간 순서와 주고 받은 영향을 살펴 재해석하는 일이 독자 개인에게 버거울 수 있으나 주체적인 인식의 힘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모든 지식은 ‘동료 압박’이라는 착각과 검색 정보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대개 대중적 역사서로 출판되는 책들은 재미와 가독성, 이면의 진실, 엇갈린 해석에 관한 것들이라면 류시현은 역사란 무엇인지,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우리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과거의 기록으로서 텍스트가 아니라 오늘, 여기를 사는 우리의 문제를 살피라고 요구한다.

흔히, 역사를 ‘오래된 미래’라고 한다. 그래서 역사는 언제나 살아숨쉬며 오늘을 만들고 미래를 꿈꿔야 한다고 요구하는 듯하다. 기원과 시간성, 시대적 맥락과 시기 구분, 사료의 선택, 우연과 필연, 해석과 관점, 인물의 평가, 역사교육과 상상력 등 각 장은 에세이 형식으로 저자의 소회와 경험이 녹아 있어 감성 독자든, 인문 독자든 모두에게 감동과 통찰을 줄 수 있다. 독특한 형식과 서술이라서가 아니라 저자의 ‘진심’은 좋은 책을 만드는 기본 요소다. 강만길의 『해방 전후사의 인식』, 이영희의 『전환 시대의 논리』, 박세길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님 웨일즈의 『아리랑』, 이사벨라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등을 읽으며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에 만났던 이야기들을 떠올렸기 때문이 아니다. 같은 책을 읽은 사람 사이의 공감 때문도 아니다. 자기 삶에 열정을 다한 이의 겸손과 애정이 느껴졌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다.

“계속 여러 책을 읽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가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겠다. 게다가 역사가의 역할과 임무가 무엇인지에 관해 여전히 고민하게 된다.” 이제 환갑이 된 역사가의 고백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다. 겸손한 태도와 끊임없는 질문과 고민이 없는 책을 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시간은 없고 책은 많다. “역사학자가 되었지만, 인문학자가 되고 싶었다.”라며, “문제에 관한 갈증을 해소하고자 책을 준비했는데, 갈증이 심해져간다.”라는 고백이 가장 마음에 드는 개인적인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해와 공감은 관점과 태도에 기인한다.

생각을 유연하게 하고 싶다. 생각이 유연한 것은 균형 감각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삶, 나의 판단, 나의 결정 등을 정답이라고 주장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 맺음말, 3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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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 노르웨이에서 만난 절규의 화가 클래식 클라우드 8
유성혜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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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시간과 공간의 좌표 위에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관점을 달리하고 안목을 넓히는 일은 쉽지 않다. 자기 삶의 목적과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데도 대개 직업과 연봉으로 비교 지옥에 스스로 몸을 던진다. 지금 당신은 어디에 서서 무얼하고 있는가. 지금-여기here and now에서 ‘나’를 지탱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라는 뭉크의 말은 왜 우리 삶에 통용되지 못할까.

1863년에 태어난 뭉크의 시간은 노르웨이 크리스티아니아(오슬로)에서 파리, 니스, 베를린을 지나 에켈리에서 1944년에 멈춘다. 그가 관통했던 시간과 공간들 - 세기말 데카당스, 벨 에포크, 제1차 세계대전, 나치 점령, 노르웨이 피오르, 니스의 햇빛, 몬테카를로의 카지노, 북유럽의 추위와 강렬한 햇빛 등. 알콜 중독과 도박, 불안과 고독으로 절규했던 뭉크는 행복이나 성공과 거리가 멀다. 어머니와 누이가 죽고 아버지의 학대에 가까운 종교적 규율로 죄책감이 가득했던 유년 시절의 흔적 때문인지 거의 모든 인간 관계에 실패한다. 오로지 그림에 대한 열정 하나로 80년을 버틴 삶이 경이롭다.

뭉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절규>보다 <아픈 아이>를 한참 들여다봐야 한다. 말년에 그린 <별이 빛나는 밤>, 다그니 율을 그린 <마돈나>, 강렬한 첫사랑의 추억으로 남은 유부녀 밀리와의 <키스>가 뭉크의 절규다. 붉은 석양이 인상적인 에케베르그 언덕의 <절규>는 자연의 비명이다. 유성혜는 『뭉크』에서 “절규. 누가 처음 한국어로 번역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노르웨이어 스크리크Skrik는 있는 힘을 다하여 부르짖는 ‘절규’보다는 너무 놀라 지르는 외마디 소리인 ‘비명’으로 해석하는 게 더 적절하다. 이 그림을 더 정확히 이해하는 데도 ‘비명’이라는 단어가 도움이 된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듯, ‘절규’라고 번역한 사람 역시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이 소리를 내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뭉크의 노트에 따르면, 소리를 내는 쪽은 인물이 아니라 자연이다.”라고 설명한다. 기나긴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더움을 견뎌야 하는 노르웨이라는 공간적 상상력을 배제한 채 뭉크를 이해할 수는 없다.

불안과 공포, 외로움과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뭉크는 공황 장애, 불면증, 정신 분열, 불안 장애, 환각, 피해망상 등 거의 모든 정신병적 증상들을 그림에 담아냈다. 낸 뭉크에 열광하는 사람은 위험하다. 뭉크의 그림을 통해 무엇을 읽어내든 그의 그림이 어떠하든 사람들은 각자의 관점으로 ‘본다.’ 에피파니epiphany는 ‘우연한 순간에 귀중한 것과의 만남이 주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호르몬이 우리 삶의 실질적 지배자라는 의학적 관점은 서글프지만 부정하기 어렵다. 의사 안철우는 호르몬과 미술의 만남을 에피파니가 아니겠냐는 듯 뭉크 씨에게 도파민 과잉이라는 처방을 내린다. 분노조절이 힘든 사람, 모든 게 남탓이고 자신의 말과 행동에 오류가 없는 줄 아는 사람, 언제나 주변 사람의 감정을 살피는 사람, 허무와 고독으로 무기력한 사람……. 이 모든 증상들은 어떤 호르몬이 부족한 걸까. 그림과 함께 적절한 음식과 처방을 달아놓은 『뭉크 씨, 도파님 과잉입니다』는 개인적 감상과 의학적 처방이 더해져 새롭지만 특별함은 없다.

『Edvard Munch』는 질 좋은 도록으로 충분하다. 김기태의 글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 이리스 뮐러 베스테르만의 글은 그림과 어울려 『뭉크, 추방된 영혼의 기록』을 읽을만한 책으로 갈무리하게 만든다. “나는 자신의 심장을 열고자 하는 열망에서 태어나지 않은 예술은 믿지 않는다. 모든 미술과 문학, 음악은 심장의 피로 만들어져야 한다. 예술은 한 인간의 심혈이다.”라는 말로 뭉크를 설명한다. 뭉크는 심장을 열고자 하는 열망으로, 심장의 피로 그림을 그렸다는 의미다. 좋은 글은 뭉크의 그림과 어울려 읽고 보는 즐거움을 배가 시킨다. 수많은 자화상을 통해 인간 뭉크와 그의 예술 세계를 들여다본 이리스 뮐러 베르테르만의 색다른 관점과 통찰력이 빛난다.

석판화가 아닌 유화 <절규>를 보고 싶었으나 경매가 1,200억이 넘는 그림이 예술의 전당에 걸렸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텍스트에 곁들여진 그림 혹은 그림에 설명으로 붙은 텍스트를 읽고 보며 뭉크의 <아픈 아이>, <키스>, <마돈나>, <뱀파이어>, <별이 빛나는 밤>만큼 자화상이 보고 싶어졌다. 이미경의 『뭉크의 별이 빛나는 밤』에서는 현지인으로 답사를 통해 뭉크의 흔적을 더듬으며 디테일하게 써내려 간 유성혜의 『뭉크』가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다. 객관적인 정보와 설명이 충분하고 뭉크 전시회에 맞춰 출간한 책이라서 어렵지 않게 살펴볼 만하다.

화가의 삶에도 ‘사랑’만큼 강렬한 경험은 없다. 김연수는 『청춘의 문장들』에서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라고 썼다. ‘청춘’을 ‘사랑’으로 바꿔 읽으면 뭉크의 그림에서 밀리, 다그니, 툴라의 그늘을 읽을 수 있다. 어머니와 누이 소피에, 아버지와 동생 안드레아스, 라우라 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대신했던 카렌 이모까지 먼저 떠나보낸 뭉크의 생은 막내 여동생 잉게르가 정리한다. 숱한 메모와 기록들, 그가 몸담았던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안 그룹, 검은 새끼 돼지 클럽 사람들이 뭉크에게 준 영향과 흔적들까지 꼼꼼하게 살펴보면 뭉크와 그의 그림은 물론 당대의 사회, 문화를 함께 읽을 수도 있다. 지식과 정보가 넘쳐 그림 주변만 살피다 정작 스탕달 신드롬을 느낄 수도 있는 뭉크의 그림 앞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다. 아무튼, 예술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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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때가 오면 - 존엄사에 대한 스물세 번의 대화
다이앤 렘 지음, 황성원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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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늙고 모두 죽는다.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선택의 영역이다. 주어진 조건과 환경이 다르다고 해도 삶의 목적과 가치, 방법과 태도는 오롯이 개인이 선택한다. ‘성공한 삶’, ‘만족스런 삶’의 기준도 다르지 않다. 그 선택과 기준에 따라 ‘좋은 삶’이 결정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전제를 부정할 수 없다. 좋은 죽음은 좋은 삶만큼, 아니 때로는 좋은 삶보다 더 중요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살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본능이다. 불로장생의 꿈은 유토피아처럼 영원히 이룰 수 없는 인간의 꿈이다. 그러나 노년과 죽음을 피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멈추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다이앤 렘은 80이 넘은 나이에 ‘나의 때가 오면’ 어떻게 할 것인지 여러 사람에게 묻는다. 남편이나 아내와 사별한 사람, 말기 암 환자와 주치의, 호스피스 종사자, 존엄사 지지자와 반대자 등 스물 세명의 인터뷰이에게 저자는 ‘죽음’을 묻는다. 아니 죽음에 대한 태도와 방법을 질문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보다 쉽지 않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노화방지 혹은 젊음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에 비해 자신의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언제 죽을지 아는 사람은 없다. 대개 나이로 생의 마지막을 짐작하지만, 죽음은 예고없이 찾아온다. 그렇다면 마이클 헵의 말대로 평소에 사랑하는 사람과 저녁 식탁에서 죽음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응급실, 중환자실, 각종의료기기, 요양병원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공식처럼 여겨지지만, 당사자, 가족, 주변인들의 생각과 감정은 제각각이다. 나, 너, 우리 죽음은 어디까지 왔을까. 가족과 친구, 연인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타인의 죽음을 앞에서 삶의 허무 대신 ‘나’의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게 아닐까.

36년 동안 300만 명이 넘는 청취자가 <다이앤 렘 쇼>를 들었다. 탁월한 진행자였던 저자는 팟캐스트와 북클럽을 운영하며 지낸다. 존엄사 지지자와 반대자들의 생각을 모두 담은 이 책은 가십거리 예능이나 현란한 말장난으로 가득한 팟캐스트와 결이 다르다. 사려 깊은 태도로 ‘의료조력사망’의 관점, 정책, 문제, 대안을 고루 다룬다. 미국 오리건 주가 최초로 자발적, 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한 법률을 채택한 건 1998년이다. 이후 개인이 ‘의료조력사망medical aid in dying’을 이용해 자신의 고통을 언제 중단할지 선택하도록 허락한 곳은 현재까지 겨우 열 개 주와 워싱턴 DC뿐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아래 몇 개 신문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의료조력사망’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생각하는 안락사와 조금 다르다. 의사조력자살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구체적인 범위와 방법에 대해서는 문화, 종교, 나이, 직업 등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고통 받아야 하는 순간이 ‘나’에게 닥쳤을 때를 생각해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 책은 어떻게 죽을지에 관한 ‘방법’의 문제를 다룬다.

‘의료조력사(조력존엄사)’라고 하면 어감이 좀 다를까. 존엄사라는 말은 좀 나은가. 대한민국은 드디어, 올해 말 65세 이상 고령자가 전체 인구의 20%를 넘어서는 초고령 사회로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고령 인구는 지난해 말 993만 명에서 올해 말 1051만 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는 전체 인구의 19.2%에서 20.3%로 상승하는 것으로, 5명 중 1명이 고령자라는 의미이다. 연금, 정년, 주택, 의료, 복지 등 다양한 사회 문제와 연계된 ‘초고령 사회’ 진입은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대한민국이 늙고 있다.

이에 비해 2023년, 출생아 수는 23만 명이며 가임기 여성 1명이 가임기간(15~49세)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를 의미하는 합계출산율은 0.72명이다. 한 해 30만명 정도 사망하는 대한민국에서 20여만 명의 아이가 태어난다. 교육, 경제, 국방 등 우리 사회 곳곳에 곧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거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다. 대한민국의 인구는 줄고 있다.

사람이 태어나고 살고 죽는 과정은 반복된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어디쯤 걷고 있을까. 각자의 나이, 종교, 직업, 학력, 재산 등에 따라 죽음을 맞는 방법과 태도가 다르겠지만 아름다운 마무리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법적, 제도적 장치가 미흡하고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다면 서둘러야 한다. 인구 감소만큼 심각한 초고령 사회를 맞이하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는 바로 ‘죽음’이다.

“내 가족, 주치의, 병원에 전합니다. 제가 정신적 또는 육체적 장애에서 회복할 수 있다는 합리적인 기대를 할 수 없는 상황일 경우 인위적인 방법과 거추장스러운 수단들을 동원해 제 목숨을 연장하지 말고 죽음을 허락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최후의 시련을 다스릴 수 있는 약물을 자비롭게 투여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제 임종 순간을 앞당기더라도 말입니다. 저를 아끼는 여러분들이 이 절박한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일이라고 느끼면 좋겠습니다.” - 320쪽

81세의 저자는 앤 모로 린드버그의 말을 인용하며 공감과 지지를 보낸다. 그러면서 마지막 인터뷰이로 다트머스 대학 의대생인 18세 손자 벤을 선택한다. “나는 의료조력사망이 필요하다고 믿고 나한테는 내가 죽을 시간과 장소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난 그렇게 죽고 싶단다.”라며 이 책을 마무리 한다. 지식이 실천이 되고, 앎이 삶이 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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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 - 감정의 연대기 1929~1939
플로리안 일리스 지음, 한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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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홉스봄은 19세기 3부작 마지막인 『제국의 시대』에서 20세기의 출발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규정한다. 그러니까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이 유럽을 팽창시켜 세계를 연결했으며, 산업자본주의가 유럽을 본격적인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탐욕스런 제국주의의 확산은 자연스럽게 ‘벨에포크Belle Époque’ 시대의 종말을 예고했다.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19세기를 마감한 인류는 이제 근대의 문을 닫고 현대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때 그 시절, ‘리즈 유나이티드 FC’의 전성기,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시대를 그리워한다.

우디 앨런은 《미드나잇 인 블루》(2012)으로 이 시대를 추억했고, 넷플릭스는 《트랜스아틀란틱》에서 발터 벤야민의 자살 등으로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슬픔을 담담하게 묘사했다. 플로리안 일리스의 『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은 10년 만에 내놓은 『1913년 세기의 여름』의 속편 혹은 후일담처럼 읽힌다. ‘감정의 연대기 1929~1939’라는 부제처럼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니, 이 암흑의 시대, 증오의 시대를 건너는 법으로 그들은 ‘광기의 사랑’을 선택했을까.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한나 아렌트와 하이데거 뿐만 아니라 숱한 작가, 화가, 배우들이 등장하는 이 거대한 사랑의 연대기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핵인싸’들의 사랑을 꼴라주한다.

전작 『1913년 세기의 여름』는 신선함을 넘어 충격이라고 할 만큼 독특한 책이다. 현재형으로 장면을 포착하고 묘사하는 카메라 앵글처럼 저자는 한 편의 영화를 텍스트로 보여주는 듯하다. 장면 전환은 자연스럽고 수많은 등장인물이 각 쇼트에서 최선을 다해 연기하는 느낌이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실제 인물들의 일기, 편지, 잡지, 신문, 사진 등 수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시대를 재현했으니 마치 리얼리티 예능 혹은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수밖에 없다. 플로리안 일리스가 선택한 구성과 문체의 힘은 강렬하다. 예술가, 철학자, 영화인, 정치인, 과학자 등 유명 인사들의 사랑은 특별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정열적이지만 치졸하고 무책임하며, 때로는 순수하고 낭만적인 사랑은 누구에게나 다를 바 없는 감정이다.

양다리와 불륜은 기본이고 약물 복용, 스와핑, 근친상간에 이르기까지 지고지순한 사랑에서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가학적 섹스에 이르기까지 100년 전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오늘보다 치열하고도 과격하다. 그야말로 ‘광기’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사랑들, 시대를 핑계 삼은 일화들의 병렬적 배열과 교차 편집은 다시 한번 독자들을 매혹한다. 한 가지 함정은 등장인물들의 면면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전혀 없거나 그들의 글과 그림과 영화와 사상에 무관심하다면 이 책은 따분하고 지루한 역사극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올가 코사키에비치, 비앙카 비넨펠트, 마샤 칼레코, 헤미요 비나베르, 마를레네 디트리히, 메르세데스 드 아코스타, 그레타 가르보, 클라우스 만, 루트비히 마르쿠제, 토마스 퀸 커티스, 안네마리 슈바르첸바흐, 클로드 클라라크, 토마스 만, 파블로 피카소, 도라 마르, 마리테레즈 발테르, 고트프리트 벤, 헤르타 폰 베데마이어, 엘리노어 뷜러, 프리드리히 빌헬름 욀체, 케테 폰 포라다, 틸리 베데킨트, 테오도어 아도르노, 그레텔 카르플루스, 막스 호르크하이머, 디트리히 본회퍼, 에버하르트 베트게, 베르톨트 브레히트, 헬레네 바이겔, 마르가레테 슈테핀, 엘리자베트 하우프트만, 루트 베를라우, 발터 벤야민, 안나 마리아 블라우포트 텐 카테, 올가 파렘,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하인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빌리 와일더, 쿠르트 투홀스키, 엘제 바일, 리자 마티아스, 헤트비히 뮐러, 마리 게롤트투홀스키, 에리히 뮈잠, 첸츨,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이리나 과나디니, 조세핀 베이커, 주세페 페피토, 아나이스 닌, 곤살로 모레, 위고 귀에, 헨리 밀러, 준 밀러, 루트 란츠호프, 알마 말러, 후고 폰 호프만스탈, 타마라 드 렘피카, 라울 쿠프너, 에리카 만, 마틴 굼퍼트, 구스타프 그륀트겐스, 막스 리버만, 알프레트 케어, 프란체스코 폰 멘델스존, 에리히 캐스트너, 헤르타 키르히너, 마르고트 슌랑크, 리 밀러, 맨 레이, 키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아우구스트 잔더, 프란츠 헤셀, 폴 엘뤼아르, 마리아 벤츠, 갈라,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루이스 부뉴엘, 군타 슈퇼츨, F. 스콧 피츠제럴드, 젤다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콘라트 아데나워, 니나 폰 레르헨펠트, 한나 아렌트, 하인리히 블뤼허, 귄터 슈테른, 마르틴 하이데거, 리자 폰 도베네크, 트루데 헤스터베르크, 하인리히 만, 넬리 크뢰거, 루디 카리우스, 알프레드 되블린, 욜라 니클라스, 볼프강 쾨펜, 쥐빌레 슐로스, 테아 슈테른하임, 몹사, 카를 슈테른하임, 파멜라 베데킨트, 르코르뷔지에, 에른스트 윙거, 루디 슐리흐터, 카를 슈미트, 프리드리히 홀랜더, 헤디 숍, 고트프리트 폰 크람, 바버라 허튼, 발터 그로피우스, 이제 그로피우스, 헤르베르트 바이어, 레니 리펜슈탈, 아네타 에버스베르크, 빌헬름 2세 황제, 헤르미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마르고트 폰 오펠, 유타 잠보나, 루트 알부, 프란츠 마르크, 오토 딕스, 케테 쾨니히,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 마르가레테 카르플루스, 테오도어 비젠그룬트 아도르노, 자크앙리 라르티그, 르네 페를, 빅토르 클렘퍼러,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프랜시스 스키너, 마르그리트 레스핑거, 탈레 셰그렌, 헤르만 헤세, 니논 돌빈, 프로이트,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로테 레냐, 폴 그린, 틸리 로쉬, 오토 폰 파세티, 쿠르트 바일, 에리카 네어, 샤를로테 볼프, 카테리네, 알마 말러베르펠, 구스타프 말러, 오스카 코코슈카, 발터 그로피우스, 프란츠 베르펠, 요하네스 홀른슈타이너, 하리 그라프 케슬러, 아르놀트 브로넨, 힐데가르트 폰 로소, 요제프 괴벨스, 마그다 크반트, 올가 푀르스터, 엘리자베트 폰 헤닝스, 쿠르트 폰 슐라이허, 쿠르초 말라파르테, 마그누스 히르쉬펠트, 리 시우 탕, 카를 기제, 쿠르트 볼프, 헬렌 볼프, 헬레네 모젤, 마농 네벨 두몽, 찰리 채플린, 폴레트 고다드, 라이너 마리아 릴케, 니메트 엘루이 베이, 리처드 오즈번, 리온 포이흐트방거, 에바 헤르만, 롤라 제르나우, 마르타, 이오시프 스탈린, 나데즈, 몰로토프, 갈리아 예고로바, 셀린(루이페르디낭 데투슈), 실리 팜, 셀린, 로베르트 무질, 마르타, 아돌프 히틀러,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마르가레테 그룬, 게오르게 그로스, 에바, 요제프 로트, 안드레아, 알프레트 케어, 유디트, 엘제 라스커슐러, 카를 폰 오시에츠키, 구스티 헤히트, 비키 바움, 파울 클레, 막스 베크만, 릴리 폰 슈니츨러, 케테 폰 포라다, 헬데가르트 멜름스, 콰피, 라울 하우스만, 헤트비히 만키에비츠, 베라 브로이도, 빌리 브란트, 게르트루데 마이어, 아르놀트 쇤베르크, 마르크 샤갈, 맥스 베어, 막스 슈멜링, 아니 온드라, 올더스 헉슬리, 쥐빌레 베드포드, 빅토르 알로조로프, 지마, 메레트 오펜하임, 알베르토 자코메티, 쿨라우스 솅크 폰 슈타우펜베르크, 낸시 큐너드, 헨리 크라우더, 슈테판 게오르게, 아비 바르부르크, 브루노 발츠, 젤마 페트, 바실리 칸딘스키, 구르트 폰 슐라이허, 리베르타스, 귄터 바이젠보른, 리하르트 폰 라파이, 하로 슐체보이젠, 프리츠 란츠호프, 브리기테 헬름, 후고 에두아르트 쿤하임, 알렉산터 클루게, 오스발트 슈펭글러, 아나톨 도브리안스키, 빌리 칠케, 요제프 로트, 이름가르트 코인, 슈테판 츠바이크, 헤르만 괴링,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에르나 실링, 에른스트 톨러, 크리스티아네 그라우토프, 미클로시 젠쿠트헤, 두르스 그륀바인, 조피 숄, 프리츠 하르트나겔, 엘리자베트,

10년간 벌어진 당대의 문화사를 오로지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내며 등장시킨 주요 인물들이다.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연애사가 계속 다른 인물들과 연결되어 중복을 피해 적다 보니 리스트가 이렇게 길어졌다. 아나이스 닌이 일기에 적은 것처럼 이들은 “죄가 아니다. 동정도 없다. 죄책감도 없다. 오직 사랑뿐.”(439쪽)라고 생각했을까. 희망 없는 시대를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 사랑이었을까. 저자는 “1929년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과거를 떠올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모두들 그토록 정신없이 현재에 몰두하고 있다.”라고 분석한다. 빛과 어둠, 선과 악, 과거와 미래를 생각할 겨를 없이 오로지 현재에 매몰된 채 사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는 듯하다.


플로리안 일리스는 『1913년 세기의 여름』에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 출간에 부쳐 “인생은 너무 짧고 프루스트는 너무 길다.”라는 아나톨 프랑스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번에도 “기억은 현재의 인식이나 유토피아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 프루스트가 남긴 위대한 유언이자 위로의 약속이다.”(502쪽)라며 기억의 심연을 파고드는 프루스트를 언급한다. 인간은 대개 자기 경험과 기억 속에 갇혀 산다. 그것이 사실과 달라도 상관없다는 듯, 자기 말과 행동의 변명으로 삼으려는 듯. 우리가 나무로 책을 만들어 도서관을 거대한 인공 숲으로 만드는 건, 인류의 생각과 감정을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하기 위함이 아닐까. 그 안에서 유영하는 독자들은 무슨 희망과 기대가 있어서라기보다 그것조차 사라진 시대를 견디기 위함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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