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읽는 정신분석 - 김서영의 치유하는 영화읽기 일상인문학 2
김서영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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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과 현상은 무관할까. 대한민국 감독 중 유일하게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수상한 김기덕의 영화는 감독의 삶과 분리될 수 있을까. 2007년 초판이 나왔고 2014년 개정판을 읽었다. 그리고 독서 모임 현장에서 책 두께를 비교하며 목차를 비교했고, 김기덕과 봉준호의 영화 등 무려 90쪽이 삭제된 또 다른 2021년 판본을 확인했다. 17년간 한 명은 나락으로 떨어져 코로나로 객사했으며 한 명은 흥행과 작품성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감독으로 성장했다. 김서영의 평가는 현실과 상반됐고, 개정판을 거쳐 사라진 텍스트 안에서만 숨 쉬고 있을 터. 물론 모임에서는 두 감독에 대한 평가나 영화 이야기보다 인간의 심리와 정신분석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은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감각이다. 주체적으로 보고 듣는 행위와 구별된다. 같은 영화를 보면서 보고 듣는 것이 다르다. 같은 코스를 여행해도 전혀 다른 걸 보고 듣고 맛보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제각각 흐르며 정서적 반응을 통해 이성을 뒤흔들기도 한다. 합리적 판단과 논리적 분석은 그래서 때때로 공허하다.

모임 전 《조커 2》를 함께 보았다. 고담시의 어둠과 음산한 분위기를 압도하는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어떤 표현으로도 담아내지 못할 듯싶다. 한 배우의 존재감이 서사를 지배한다. 뮤지컬 형식에서 호흡을 맞춘 레이디 가가조차 점으로 만들어 버리는 느낌이다. 지나친 재능은 독이 되고 타고난 외모와 분위기가 연기의 한계를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을 극대화하거나 뛰어넘는 영화를 만나기도 한다. 내용, 전개, 구성, 시각적 효과 등과 무관하게 조커의 몸짓과 표정에 집중했다. 부모의 양육 태도,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가 한 인간의 인생을 좌우한다는 운명론적 세계관에 동의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몇몇은 그 상처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수도 있으나 대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며 시간은 상상할 수 없이 많은 것들을 먹어 치운다. 프로이트의 리비도, 융의 집단 무의식으로 조커라는 캐릭터를 분석하는 일은 헛되고 헛될 수도 있다. 우리의 관심사는 언제나 ‘나’의 지금-여기다. 상징계에 머물며 상상계를 살지만 실재계를 추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영화는 여전히 현실도피의 공간이 아니라 충족하지 못한 욕망의 탈출구이거나 실현할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꿈꿀 자유를 확인하는 시간이다. 물론 조커를 보며 공감과 몰입을 하는 관객도, 안도와 샤덴프로이데를 느끼는 관객도 있었을 것이다. 같은 영화, 다른 생각들이 결국 라캉이 말한 주이상스를 확인하는 방법이 아닐까.

김서영은 정신분석을 공부했다. 영화는 분석의 대상이자 도구다. 프로이트와 융, 라캉과 지젝을 앞세워 정신분석과 분석심리, 히스테리와 강박을 설명하고 상징계와 상상계와 실재계의 구조를 파악하려 애쓰지만 그 개념조차 생소한 독자들에겐 낯설기만 하다. 영화를 보는 다양한 관점은 존중되어야 마땅하고 각각의 관점과 준거 틀이 충돌하는 지점을 들여다보는 일은 흥미롭지만, 영화를 ‘재미와 감동’ 이외의 수단으로 삼지 않는 대부분의 관객들에겐 시집 뒤에 붙은 해설, 소설 뒤에 붙은 비평만큼 헛되고 헛될 수도 있다.

지나간 영화를 떠올리며, 새로운 영화를 소개받으며 인간의 ‘심리’에 대해 들여다보는 기간의 텍스트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영화는 때때로 소설처럼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하니까. 어떤 자세로 영화를 보든, 실존 인물이 아닌 영화 속 캐릭터에 몰입하든 돌아보는 건 결국 ‘나’와 관계들 그리고 현실과 미래일 테니까.

꿈의 조각을 항상 한 주머니에 넣고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을 보살피는 방법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생활의 어딘가에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이 놓여 있다면 우리는 이로부터 삶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3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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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학 / 시학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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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서는 이쯤 해두자.’

놀랍게도, 각 장마다 반복되는 ‘이쯤 해두자’는 마지막 문장 앞에서 한참을 서성인다. 아리스토텔레스조차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했고, 모두 설명하거나 일일이 밝힐 수 없는 것은 다음을 기약했다. 이것은 대충 마무리하자는 태도와 전혀 다르다. 최선을 다해 정교하게 분석하고 사례를 들어 증명한 후에도 이해되지 않는다는 독자 혹은 상대를 위한 마무리다. 안되면 될 때까지,라는 불굴의 정신은 무모함 혹은 집착일 수도 있다. 이쯤 해두자는 건 더 쉽게 설명하거나 구체적으로 알려줘도 넌 알 수가 없을 거라는 포기와 조롱이 아니다. 제 나름의 경계와 기준을 설정하지 않으면 길을 잃기 쉽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늪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경고처럼 들린다.

왜 아니겠는가. 당시에 수사학은 청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설득의 기술이자 출세의 수단이었으니 긍정과 부정, 두 개의 시선이 교차했다. 소피스트와 플라톤이 그랬다. 상대를 설득하는 대화법은 인간관계, 처세술, 비즈니스 등 세상을 살아가며 꼭 필요한 능력이다. 하지만 합리적 이성을 바탕으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면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으나 사람의 마음을 얻기 어렵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대개 감정으로 판단을 흐리고 합리적 선택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이 숱한 심리학 실험과 경제학 이론으로 확인됐다. 특히 대화와 토론에 개입되는 상대방에 대한 호감 정도, 감정적 판단, 정치와 종교적 신념 등은 수사학을 무용지물로 만들기 쉽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도 3권으로 나누어 기술하는 수사학 중에서 2권에 ‘감정’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테크닉을 가르치는 대신 수사학이 학문으로서 정착될 수 있는지 점검한 후 구성요소를 확인하고 필요성을 역설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심의용, 법정, 과시용 등 연설을 세 가지로 나눠 설명하고 정체에 따라 수사학의 역할과 의미를 설명하며 모든 연설의 공통 근거로 ‘예증’과 ‘생략삼단논법’을 제시한다. 싸움의 기술, 연애의 기술처럼 특별한 팁을 주거나 쉽게 배울 수 있는 비법을 전수하는 대신 인간의 이성과 감정을 살펴 합리적 이성의 지평을 넓힌 것이다. 심리적 편향과 숱한 오류로 허우적거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말싸움과 자기주장과 감정의 배설을 우리는 매일 경험하며 산다. 그렇다고 수사학이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논리 도구라는 의미는 아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가 아니라 어떤 선택이 합리적이며 공공선에 부합하는지 살펴야 한다. 시대정신에 걸맞은 목적과 가치에 합의하는 길은 멀고도 험하지만 포기할 수 없다. 수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토록 강조하고 싶었던 말은 ‘이쯤 해두자’가 아니라, 아직도 그쯤에 머물러 있는지에 대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읽는 ‘시학’은 새삼스럽다. 서사시와 극의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시학’은 그리스 고전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과 오딧세이, 일리아스를 읽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특히 필연성과 개연성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말하는 듯하다. 황당한 서사보다 견디기 어려운 건 ‘마침 바로 그때’ 같은 사건의 우연성과 개연성 없는 허구다. 여전히 통용되는 원칙들이니 고전을 반복해서 읽는 이유는 결국 보편성 때문이다. 통시적 관점에서 일관되게 적용되는 기본들. 시간을 견딜 수 있는 건 생각보다 많지 않다. 고전의 힘은 결국 깊은 사유와 장기적 안목 그리고 이성에서 발원한다.

“비극의 즐거움은 ‘연민과 공포’에서 비롯되며 시인은 모방으로 이런 즐거움을 산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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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착각 - 인간 본능이 빚어낸 집단사고의 오류와 광기에 대하여
토드 로즈 지음, 노정태 옮김 / 21세기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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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큰 소수가 집단 전체를 잘못 대변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다. - 15쪽

『평균의 종말』에서 토드 로즈가 보여준 탁월한 통찰을 잊을 수가 없다. 최초의 발견이거나 새로운 발명이어서가 아니다. 이론을 뒷받침하는 사례와 그간의 연구 성과를 비교 분석하는 엄밀함, 인간의 삶과 현실에 적용하려는 태도 때문이다. 한 사람의 모든 책이 후질 수 있으나 훌륭한 책을 사람의 모든 책이 좋을 수도 없다. 그래서 믿을 만한 저자, 믿고 보는 작가가 내게는 없다. 책 선택의 어려움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독서는 시간과의 싸움이며, 밥벌이를 위한 노동처럼 자기 삶의 일부와 맞바꾸는 행위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는 행위는 무언가를 하기 위한 노력만큼 숭고한 일이다.

저자의 이력이 순탄하지 않은 건, 배우가 삶의 경험을 연기에 녹여내는 상황과 유사하다.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생각과 감정이 반영되고 지향점과 방향이 색다르기 때문이다. 평범한 저자들의 책이 모두 평범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연구자의 태도 또한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정교하고 엄정한 결과에 대한 해석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면에서 토드 로즈의 관점과 태도는 우리에게도 충분한 울림을 준다. 집단 착각에 빠진 현대인을 향한 저자의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강렬하다. 침묵하는 다수에 대한 경구, 휘둘리는 당신을 위한 세네카의 조언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관습적 사고에 젖은 사람, 밴드 왜건 효과에 익숙한 사람, 필터 버블로 에코 탬버에 갇힌 사람을 위한 도구다.

그러나 언제나 중요한 건 독자의 태도다. 스스로 자기 점검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책을 선택하기 어렵고, 선택한다 해도 자기 객관화 능력이 없다면 남의 얘기로 치부할 수 있다. 남들이 다 그렇게 말한다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경계와 선이 분명하며 나만의 기준이 확실하다는 판단과 선택의 오만함,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사회는 어떠해야 하는지 분명한 도덕적 기준, 자기 자신을 잘 안다는 착각에서 우리는 자유로운가. 자기 검열에 시달리며 지나치게 경계하고 끊임없이 살피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을까.

전체 3부 9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집단 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진영 논리와 정치적 이해관계를 점검할 수 있는 소중한 지침서다.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이 전가의 보도는 아니지만 객관성을 확보하며 공론장에서 합리적 토론을 가능케 하는 지침이 될 수는 있지 않을까. 논리적 사고 훈련이 미흡하면 나이, 직업 등과 무관하게 ‘감정’에 휩쓸려 진실을 묻어버리고 자기 이익에 충실한 아비규환의 세상이 되기 쉽다. 우리가 문명사회로 한발씩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공동체의 합의, 타인의 감정과 생각에 대한 존중, 다른 의견을 말할 권리 등이 보장된 사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기업, 학교, 국가 등 어떤 조직도 집단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지속 가능할 수 없다. 뒤처지거나 자연스럽게 도태되거나 자멸하는 지름길은 독단과 고집, 일방적 의사소통, 침묵과 순응 때문이다.

저자는 사회심리학적 질문을 아끼지 않는다. ‘다수의 무지Pluralistic Ignorance’, ‘집단 착각Colletive Illusions’, ‘동료 압박Peer Pressure’으로 인해 우리가, 아니 ‘나’가 얻는 것은 무엇이고 ‘우리’가 잃는 것은 무엇일까. ‘따라쟁이의 함정Copycat Trap’이 본능에 가까운 생존 전략이라면 집단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모방의 연쇄Copying Cascade’, ‘침묵의 나선Spiral Of Silence’ 등 이론과 개념을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렵다. 아니, 어쩌면 몰라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가, 현실에서, 수없이 부딪히는 문제들에 대한 명명법에 불과하니까. 문제는 언제나 해결책과 대안이다.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고치지 않으면 그대로다. 그래서 때때로 ‘읽는’ 행위 덧없음과 허무함이 밀려온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이대로 괜찮은가. 이 질문만 반복한다.

삶에서 어떤 처지에 놓여 있든 상관없다. 사적인 자아와 공적인 자아를 정렬하는 일은 언제 시작해도 늦지 않다. 조화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 헌신할 때,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더 나은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내면과 외면이 일치하는 이들은 집단 착각을 만들고 키워나가는 데 기여하지 않는다. 집단 착각에 빠져 있는 다른 사람들이 탈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 3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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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판 사나이 열림원 세계문학 5
아델베르트 샤미소 지음, 최문규 옮김 / 열림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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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 인물이자 친구인 출판업자 에두아르트에게 보내는 샤미소의 편지도 모자라 푸케의 편지까지 덧붙인 ‘픽션’이라니. 이러한 장치들 – 액자 구성, 편지 형식 등은 소설의 한계, 어차피 서로 꾸며낸 이야기, 공상과 상상에 기댄 허구, 실제하지 않는 인물과 사건이라는 작가와 독자 사이의 암묵적 합의에 도전하는 장치다. 목적은 단 하나, 이 이야기가 진짜 거짓말인지, 거짓말 같은 진짜인지 헷갈릴수록 ‘재미’있기 때문이다. 신뢰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가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실제’로 착각하게 하거나 적어도 실제일 수도 있다는 기대 혹은 의심을 갖게 했다면 충분한 효과를 거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회색 옷을 입은 사내에게 그림자를 파는 순간, 편지는 무용지물이 되고 개연성 없는 허구, 어른을 위한 우화라는 사실이 금세 드러난다. 노력에 비해 효과는 거의 없는 셈이다. 어쨌든 페테 슐레밀이 샤미소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고백과 하소연은 읽는 내내 독자들에게 먼 옛날 혹은 아주 먼 곳에서 실제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의문으로 자신을 속이는 효과를 얻는다.

금화와 바꾼 그림자의 상징 혹은 알레고리를 두고 80쪽 가까이 해설해야만 했는지 찬반이 팽팽했다. 본문(130쪽)에 비해 해설과 보론의 분량이 너무한 거 아닌가. 정답을 찾기 위해 소설을 읽는 게 아닌데 그간의 해석과 논의들을 상세히 알아야 하는가. 개별 독자의 해석과 상상력 혹은 오독의 자유를 무참히 짓밟는 건 아닌가. 의도가 무엇이든,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대부분의 독자는 끝까지 읽었으리라. 그래서 ‘그림자’는 금화를 주고도 살 수 없는 혹은 팔 수 없는 것에 대한 교훈인가, 잃어버린 시간이나 양심일까, 공동체가 공유하는 암묵적 가치일까. 무엇 때문에 사는 동안 지켜야 하는 그림자보다 죽은 후에야 가져가겠다는 영혼을 지키려 하는가. 아니, 영혼은 무엇이며 사후세계는 존재하는가.

열두 명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각자의 생각과 추측 혹은 기대가 뒤섞이거나 무너지는 동안 각자 새로운 생의 감각들을 찾는 시간은 아니었을까. 오직 모를 뿐이기에 여전히 질문을 던지고 답이 없는 삶에 의문부호만 보태는 건 아닌가. 결국, 그림자를 되찾지 못한 슐레밀은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나서거나 그 상처로 절망하는 대신 장화를 신고 세계를 누비는 호모 노마드의 삶을 택한다. 자연으로 회귀하는 인간의 숙명, 아니 물질적 순환 구조에 대한 순응, 그도 아니면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처럼 보이지 않는 무언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환상 혹은 희망 따위가 삶의 고통에서 구원해줄 환각제로 작용하는 건 아닐까.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영혼을 팔라고 유혹하는 회색옷 입은 사내는 악마가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보편적 현대인의 모습이 아니냐는 도발적 질문처럼, 자본주의 사회의 교환가치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악마를 닮았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낭만적 문제해결방법은 현실도피일까. 낭만주의 예술 동화이면서 19세기 본격적인 자본주의 태동기의 사회소설이라면 지나친 해석일까. 봉건 영주제가 물러나고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자리 잡는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는 반영론적 관점은 정호승의 『연인』, 안도현의 『연어』처럼 따뜻한 어른 동화로 읽으려는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걸까. 프랑스 혁명으로 고향을 떠난 작가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대신 독일사회에 동화되어 경계인, 전달자, 매개인의 역할에 충실한 듯하다. 수많은 구전 동화, 신화와 전설과 민담들에서 모티프를 차용했다고 하더라도, 이야기의 통일성이 부족하고 장화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작동했더라도 우리에겐 여전히 현실을 견딜 수 있는 이야기가, 내일을 꿈꿀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냥 그렇게 때로는 꿈을 꾸며, 상상을 즐기고, 일탈과 변주를 즐기고, 비록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짜릿하고 아쉬운 설렘을 느낄 수 있다면 충분하지 않은가. 소설은,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기대를 줄이고 한계를 명확히 하면 실망 대신 고마움과 감사한 마음이 든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바라보는 건 금화가 없어도 되지 않은가. 어느 시인의 말대로 세계는 유한하며 그 인식의 한계는 개인의 앎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데 공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설은 앎이 아니라 현실 원칙에서 벗어난 쾌락 원칙을 따른다.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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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국을 말하다
장강명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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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는 메시지다’(『미디어의 이해』)라는 마셜 매클루언의 말은 언제나 유효할 예정이다. 1964년에 출간되었으나 60년간 변화된 과학기술의 급격한 변동에도 구조와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발신자-매체-수신자’의 소통 구조에서 레거시 미디어는 정보를 독점했다. 그러나 1인 미디어 시대에 접어들면서 언론의 신뢰도, 정보의 유통 시스템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수신자가 발신자로 거듭났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모두 정보 유통의 허브 역할을 하는 수신자이면서 동시에 발신자이다.

픽션인 문학의 역할과 의미가 축소된 건 미디어의 발전 속도와 그 궤를 함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보다 흥미진진한 현실이 생중계되고, 뉴스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들이 실시간으로 전해진다. 소설은 갈 길을 잃고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그건 소설가의 탓이 아니라는 항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종이 신문은 소설 유통의 중요한 통로였으며 문단권력을 주도하던 영광의 기억도 간직하고 있다. 사람들이 소설을 읽지 않는 건, 아니 책보다 재밌는 미디어가 계속 출현하는 건 소설가나 출판사의 잘못이 아니다.

‘지금-여기’ 한국 사회를 픽션으로 보여주겠다는 한 신문사의 기획이 아니러니하다. 그러나 소설, 문학이 아니라면 피상적 현실을 톺아볼 수 있는 안목은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객관적 사실 뒤에 숨은 진실은 어떻게 말해질 수 있을까. 양극화된 정치와 이념 사회로 회귀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개탄한들 사람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소란스럽고 자극적인 미디어다. 텍스트를 통해 상상하며 생각에 잠기고 이면의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은 귀찮기만 하다. 하지만 ‘~카더라’ 통신도 하루 이틀이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진실은 드러나는 법이라지만 왜곡된 사실과 숨은 진실이 끝내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흔하다. 사람들은 지연된 정의는 관심이 없듯,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지금-여기가 중요하다.

결국,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이야기로 만들어졌을 때 명징해지는 은유와 상징이 아니라면 이 책은 읽을 필요가 없다. 장강명의 「프롤로그 소설 2034」부터 최진영의 「식단 삶은 계란」까지 21편의 짧은 이야기로 드러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은 독자 개인의 관점과 태도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문제가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개인과 대중이 문제다. 문제가 없는 게 아니라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태도가 문제다. 과연 그런가. 현실의 인식 방법은 소설이 아니라도 좋다. 다만, 무엇을 향해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해야 한다.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어느 시대든 소설은 시대의 거울 역할을 해왔다. 개연성 없는 허구에 몰입하는 독자층이 두터워지는 건 시절 탓일까. 웹소설과 환타지가 현실에 대한 외면은 아니겠으나 현실 극복 의지라고 볼 수도 없다. 본격, 순수 소설이 우월감을 갖던 시대도 끝났다. 소설은, 아니 문학은 이제 과거의 빛나는 왕관을 내려놓고 지금-여기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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