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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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2016~2021년 사이에 미국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동안 민주주의가 퇴보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문장에서 몇 개만 바꾸면 “물론 2022~2024년 사이에 대한민국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동안 민주주의가 퇴보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는 완벽한 문장이 성립한다. 놀랍게도 트럼프 당선 후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썼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바이든 당선 후에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를 출간했고, 다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미국에서 살고 있다. 개인은 물론이고 한 국가, 인류의 역사도 아이러니하기는 마찬가지다. 합리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이해할 수도 없는 상황이 계속된다. 어쩌면 그런 지난한 과정의 반복, 후퇴보다 조금 더 전진하는 나선형 구조로 우리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닌가 싶다.


계엄을 향한 하인리히 법칙(1:29:300)에 주목했던 사람은 많지 않다. 아니 보여도 눈감았나, 알아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을까. 카이스트 입틀막 사건이 계엄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정권이 교체되면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지 않는 세상이 올까. 정도의 차이일 뿐일까. 직접 민주주의를 확대하고 참여형 정책 결정 과정을 도입하지 않으면 철 지난 대의 민주주의는 정치인 개인의 역량에 기댈 수밖에 없다.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대체로 사람의 문제라는 사실을 확인했음에도 왜 시스템을 손보지 않는가. 정치와 정치인은 국민들의 ‘내돈내산’이다. 지금, 오늘을 사는 우리 수준의 정부와 정치인을 고용하게 돼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트럼프 시대를 지났다고 생각했다가 다시 트럼프의 지배를 받는 미국처럼 탄핵의 강을 건넜다고 생각했다가 계엄을 맞는 수가 있다. 정신줄을 놓는 순간 더한 놈이 언제든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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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역사 - 중세부터 현재까지 혼자의 시간을 지키려는 노력들
데이비드 빈센트 지음, 안진이 옮김 / 더퀘스트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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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은둔의 역사』를 쓴 데이비드 빈센트의 『사생활의 역사』는 프라이버시의 역사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로저 샤르티예Roger Chartier는 “1500년에서 1800년 사이에 인간이 문자와 맺는 관계가 달라지면서 개인이 공동체로부터 물러나 혼자가 되어 새로운 사적 영역을 창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 바 있다. 그것은 개인의 내면에 대한 탐구가 증가하고 독립성이 커지는 과정이기도 했다.(67쪽) 16세기 인쇄술의 발명이 근대의 문을 열어젖혔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종교개혁과 민주화는 깨어있는 개인의 탄생이 촉발한 자연스런 결과였다. 사생활에 관한 기준과 한계는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달리 적용된다. 아니 각자 서로 다른 태도를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남이가’ 정서, 언니/오빠/형/누나 등의 일반적 호칭, 부부 일심동체라는 착각, 연인을 소유물로 생각하는 태도, 공적 마인드가 결여된 공무원과 정치인 등 한국적 정서와 문화적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은 헛소리다. 혼자 있을 권리가 시작된 중세, 군중 속에서 나를 지켜야 하는 이유, 전화와 편지에 대한 호기심, 국가의 사찰 등을 살피는 저자의 목소리는 높아지지 않는다. 다만 인터넷 시대, 2025년을 사는 한국인들의 프라이버시는 무엇을 위해 얼마나 지켜지고 있는지 살필 따름이다. 개인정보는 무엇이며 어디까지 노출이 허용할 수 있을까. 아니 친소 관계와 무관하게 사적인 질문은 어디까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남이 하면 프라이버시 침해이고 내가 하면 관심인가. 사생활의 역사는 앞으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쓰이겠으나 기본에 대한 합의는 아득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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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질 - 현대 과학이 외면한 인간 본성과 도덕의 기원
로저 스크루턴 지음, 노정태 옮김 / 21세기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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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인류의 역사는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뇌과학과 진화생물학이 첨병에 섰다. 독서 모임을 하기 전에 chatGPT로 정보를 검색하는 시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게 지식과 정보일까.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진 않을 터. 영국의 철학자 로저 스크루턴은 리처드 도킨스 ‘밈’ 이론 등 생물학적 인간론은 물론 공리주의와 도덕적 문제로 환원시킨 피터 싱어와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 존재를 규명한 존 롤스까지 치열한 논쟁을 거친 ‘인간의 본질’에 관한 논쟁은 계속될 것이다. 이 책은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고유한 인간성에 대해, 타인과의 관계, 현대 윤리학의 오해, 신성한 인간적 삶에 대해 고민한다. 물론 정답이 없어 가능한 질문들이다. 아니, 질문하지 않는 인간들을 향한 경고다. 대개 인간의 본질은 생각보다 높이 평가하기 힘들다. 그 평가의 기준과 관점에 따라 다르겠으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태도가 본질을 흐리게 하는 대부분의 원인이다. 단단한 합리화, 논리적 착각 속에서 비판과 비난 사이를 헤매는 사람들을 위해 2013년 프린스턴대 특별 강연 내용이 도움이 좀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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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안의 사람 법 밖의 사람 - 법으로 보는 사람이란 무엇인가 드레의 창
정필운 지음 / 드레북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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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상태에서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닌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사람 중 ‘법 없이 살 사람’은 없다. 우리는 모두 ‘법이 있어야 살 사람’이다.

중요한 건, 그들이 법을 창조하고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이며 그것이 실현되는 현실이다. 조직적인 범죄 중에서 공동체에 가장 큰 해악을 끼치며 국가 체제를 전복하려는 시도가 내란이다. 한 개인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중대 범죄 행위가 벌어졌으나 그 졸개들은 모두 구속 수사를 받는 와중에 그 대가릴 풀어주는 사회는 이미 그 기능을 상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25년 4월 4일 현재 상황이다. 사형 혹은 무기징역의 죄로 기소되어 이미 구속된 자를 풀어주는 대한민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지지 정당이나 정치인 혹은 정치적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공동체, 법치주의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현실을 역사는 어떻게 기록할까. 헌법이나 법률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 언제나 이것을 다루는 ‘사람’이 문제다. 입법 기관에 속한 자들, 사법 기관에 복무하는 자들의 법 적용과 태도가 작금의 사태를 만들었다. 정교한 논리와 법 체계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 일반인의 상식과 도덕을 벗어난 행위를 용인하는 사회가 문제다. 위헌 결정이 내려져도 강제력이 없다는 이유로 버티는 자가 탄핵 결정을 수용하라고 종용한다. 사람마다 낯의 두께가 다르다. 내로남불과 인지부조화 극복을 위한 합리화는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그래서 법이 존재하지만, 그 법은 동일하게 적용된 적이 없고 공정한 사회를 이룬 적도 없다.

이상적이고 원론적인 정필운의 『법 안의 사람 법 밖의 사람』을 읽다가 책 내용과 무관하게 법 밖의 사람, 즉 범법자가 아니라 법을 창조, 활용, 판단하는 자들을 떠올렸다. 법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대의제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국회의원은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하지 않아 채택한 고육지책이다. 이제 직접 민주주의와 참여 민주주의를 강화할 때다. 더구나 경찰, 검찰, 법원의 구성원들이 가진 권한과 의무를 무겁게 따져야 한다. 법 밖의 사람은 범법자 뿐만 아니라 이들을 포함한 개념이 아닐까.

법을 만들고 적용하며 판단하는 자들의 ‘주관적 판단’은 배제할 수 없다. 정교한 논리와 합리적 이성으로 시대적 합의를 반영한 법이 만들어지니 시대와 상황에 따라 법은 언제든 변화, 조정 가능하다. 다만 언제든 기득권과 가진 자들을 위한 적용과 판단 앞에 대다수 국민들은 경악한다. 물론 그들과 동기화 되어 자신의 사회, 경제적 계급과 무관하게 이성을 잃는 정치 집단은 예외다. 준엄한 심판과 발본색원으로 내란을 저지른 범죄자와 그 잔당을 척결하지 않는다면 반민특위 해산과 같은 우를 범할 것이다. 잃어버린 역사의 교훈은 현실을 압박하고 과거가 현재의 목을 조른다. 미래는 알 수 없으나 바로 현재의 선택은 그 방향을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

저자는 법의 기본, 법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다.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개인과 사회, 사회계약론, 법의 목적과 적용 등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상식 수준의 법 이야기다. 교양 수준의 지식을 원하지 않는다면 큰 도움이 되지 않겠으나 제목이 함의하는 바가 크다. 법의 안과 밖은 앞서 말한 대로 선량한 시민과 범법자의 문제가 아니라 법을 만들고 적용하며 판단하는 자들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책에서 다루지 않는 분야다. 오래 전 김두식이 지적한 대로 『불멸의 신성 가족』들이 구축한 거대한 이익 카르텔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해악은 상상을 초월한다. 묵인과 방조, 외면과 무관심은 고스란히 대다수 국민들의 피해로 돌아간다. 모두가 한통속으로 뼛속까지 정치적인 개인들이 모여 이룬 대한민국의 어제와 오늘이 참담하나, 아주 조금씩 느리더라도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헌재의 정치질도 끝난 모양이다. 이제 곧 11시다.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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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사는 세계 - 책, 책이 잠든 공간들에 대하여 페트로스키 선집
헨리 페트로스키 지음, 정영목 옮김 / 서해문집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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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부터 본격적인 독서를 시작한다고 가정해 보자. 일주일에 한 권씩 1년에 50권, 70세까지 한 주도 거르지 않는다면 60년간 겨우 3,000권이다. 책이 그렇다. 공부도 그러하다. 뭔가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안 된다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패배 의식이 아니다. 그래서 겸손은 태도나 예의가 아니라 절망적 필연이다. 개인차가 있겠으나 3년에 1만 권을 읽었다는 무의미한 자의 자기 자랑을 제외하면 선구안의 중요성이 더더욱 절실해지기 마련이다.

어쩌다 책을 가까이 한 자들은 책에 관한 책을 놓지 못하고 남의 서가에 꽂힌 책등을 흘깃거리거나 읽은 책 목록을 기웃거리거나 책과 관련된 에피소드에 탐닉한다. 헨리 페트로스키는 책이 사는 세계, 즉 ‘책꽂이’ 이야기로 책 중독자들을 매료시킨다. 북엔드부터 도서관 서고에 이르기까지 책이 놓인 자리와 방법에 관한 역사적 고찰은 그대로 책의 역사이자 인류의 지적 탐험기에 가깝다. 두루마리 파피루스에서 지금 우리가 보는 형태의 책까지 발전 과정은 문명 발달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책등이 보이게 책을 세워 꽂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 전 이야기가 아니다. 놀랍다. 도서관의 설계와 책꽂이의 설계와 서고의 수서 방식에 관한 이야기들은 덕후들의 뒷담화에 가깝다. 전혀 ‘안물안궁’인 사람들에겐 폭력에 가까운 책일 수도 있겠다.

근대 이전까지 책을 읽고 쓰는 사람은 한정적이었며 일종의 계급적 특권에 가까웠다. 읽고 쓰는 일은 아무에게나 허락된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지식이 권력이었던 시대를 기억조차 못하는 세대다. 차고 넘치는 정보와 지식의 홍수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며 모두 읽고 누구나 쓰는 시대다. 그래서 책이 사는 세계는 오히려 향수에 가깝다. 물성을 가진 책은 얼마나 유지될까. 마치 종이돈을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사라진 것처럼, 종이책을 들고 읽는 사람은 특별한 취미를 가진 소수로 분류될 날도 멀지 않았을까 싶다.

책에 미쳐도 평생 겨우 몇천 권이 전부다. 코끼리 뒤꿈치를 더듬다 끝난다. 분야별로 줄기와 흐름을 파악하는 데도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덤벼들면 눈이 침침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짧다, 인생이. 알라딘의 ‘so many books, so little time’이 새겨진 굿즈로 스스로 위로하는 방법 외엔. 그래도 책장을 넘기는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씩 계속 나아갈 수 있지 않은가.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분들에게 일독을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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