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라루스 서양미술사 7
장-루이 프라델 지음, 김소라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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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긴 호흡으로 시작된 책읽기였다. 지난 가을 '한국사 이야기' 22권보다 힘들었던 이유는 내가 미술에 문외한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라루스 출판사에서 발간된 서양미술사 일곱권을 생각의 나무에서 지난 연말에 번역 출판했다는 소식을 듣고 중세미술부터 읽기 시작했다. 한 번에 읽지 않고 한 권이나 두 권씩 읽는 방법을 취했다. 전체 분량은 7권 1,500페이지 정도의 분량이지만 시대별로 중세미술, 르네상스, 고전주의와 바로크, 낭만주의, 19세기 미술, 근대미술, 현대미술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특징은 그저 단순한 미술사를 개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의 문화와 사회사 그리고 사상사의 흐름까지 결합하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물론 그 깊이와 폭이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도 많이 있지만 나름대로의 커다란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

  나처럼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에게 미술사의 흐름을 사회, 문화사와 더불어 이해하고 풍부한 도판을 통해 개별 작품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시간을 제공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책 뒤에 사회, 문학, 예술 분야의 연표를 제공해서 대략의 흐름들을 정리해 놓은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적절하다.

  1946년부터 그러니까 제 2차 세계대전 종전이후의 미술을 현대 미술로 분류해서 20세기말까지를 정리하고 있는 마지막 현대미술은 익숙한 작가들보다도 현대 사상의 흐름 속에서 파악했기 때문에 흥미있게 오히려 고전적 의미의 예술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 작품들이 결코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피카소의 ‘궁녀들’, 마티스의 ‘왕의 슬픔’을 필두로 장 뒤뷔페의 조각, 프랜시스 베이컨의 ‘울부짖는 교황 또는 이노켄티우스 10세’가 주는 색다름도 미래의 예술을 예견하게 하는 시금석이 된다.

  소련의 스푸트니크호의 충격으로 미국은 교육 정책의 기저마저 뿌리채 재정비했고 드리핑 기법의 충격을 던지며 대중에게 다가선 잭슨 폴록의 그림만큼 도발적인 모습으로 뉴욕은 이제 세계 예술계의 무게 중심을 파리로부터 이동시켰다. 콜라주 기법으로 대중들을 또 다시 당혹시키는 앤디워홀의 ‘아홉 명의 재키’등 일련의 작품들은 미디어의 발달과 광고, 사진등 우리들 일상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대상들과의 결합으로 예술의 의미를 되묻고 있다.

  미니멀 아트, 키네틱 아트와 팝 아트 등 이름만큼 다양해진 20세기 아방가르드의 예술적 유희는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누보 리얼리즘이 부활하여 아르망의 ‘쇼팽의 워털루’같은 충격적인 아상블라주가 탄생하고 구상이 부활하는 것도 다양성 측면에서 당연해 보인다. 핸슨과 위클뢰의 극사실주의는 사진과 미술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혼란스럽다. 추상이 부활하고 대지 미술이라 명명될 수 있는 작품들도 등장한다.

  세기말의 불안으로 표현될 수 있는 설치 작품들과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현대 미술의 또다른 성과로 표현된다. 해프닝, 퍼포먼스 등 고전적 의미의 미술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을 것만 같고 관객은 혼란스럽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건축분야의 눈부신 발달은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기능적, 미학적 측면에서 공간의 건축을 예술과 결합시켜나가고 있다.

  20세기의 철학자들의 분석대로 미래 사회는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시대를 뭐라 명명할 수 없을 것이며 진행형의 예술을 규정짓는다는 것은 더욱 무모해 보이기도 하니까. 다만 현실을 넘나드는 다양한 표현 방식들과 예술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모든 흐름들을 즐길(?) 수 있는 안목과 태도를 갖추는 것만도 쉽지 않음을 말하고 싶다. 결국 미학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또다시 바보 같은 질문과 생의 의미를 다시 고민하게 되는 반복되는 어리석음(?)을 시작한다.

  “20세기 중반 이후의 미술은 다원적이고 모호하고 유동적이었다. 도처로 몰려든 이 시기의 미술은 미추의 구분 너머에 위치해 있었다. 또한 이 시기의 미술은 삶 자체와 대립 관계 속에서 삶을, 어쩌면 존속까지를 누렸다. 외견상 점점 더 특수화되는 사회적, 문화적, 제도적, 나아가 경제적 영역의 볼모가 된 미술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확산되고 미디어화되고 대중화되었다. 이 시기 동안, 미술은 그 긴 역사를 통틀어 접했던 대중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규모의 다양한 대중을 사로잡았다. 지적, 정치적, 경제적 공론의 대상이었던 미술의 다양성과 영향력은 장 둔감한 무관심을 극복하여 어떤 이들을 매혹하고 또 다른 이들을 선동했으며, 격렬한 논쟁의 촉매제가 되었다.” - <현대미술, 서문>중에서

  한마디로 정의될 수 없겠으나 이것으로 길지만 행복했던 미술사의 여행을 끝마친다. 기약할 수 없으나 하루 빨리 유럽으로 날아가 실제 그림과 건축들을 하나 하나 뜯어 먹으며 감상의 시간들을 갖고 싶다는 욕망을 잠시 뒤로 미룰 수 밖에……

2005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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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 유쾌한 미학자 진중권의 7가지 상상력 프로젝트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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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학과 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글쓰기를 통해 독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작가들이 많다. 헤겔에게서 사유와 방법론을 제공받고 자크 라캉의 분석틀과 개념 용어를 사용해서 마르크스로부터 실천적 영감을 제공받았다는 슬라보예 지젝은 철학자이면서 실천적 문화 비평가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진중권의 인문적, 미학적 사유는 비트겐슈타인의 인식틀과 벤야민에게 받은 영감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밝히고 있다. 2002년쯤 내가 읽었던 휴머니스트 출판사의 첫 책은 철학자 김용석의 <깊이와 넓이 4막 16장>이었다. 김용석 또한 정확한 개념 정립과 논리적인 글쓰기로 문화 현상들을 꼼꼼하게 다룬 적이 있다.

  90년대 기억에 남는 몇 권의 책을 고르라면 나는 주저없이 진중권의 ‘미학 오딧세이’를 꼽는다. 마그리트와 에셔를 통해서 그가 보여준 미학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돌하게 명민한 분석과 거침없는 목소리로 현실의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진보 논객 ‘진중권’이 아니라 책 속에서 만나는 그의 목소리는 다소 진중하다. 하지만 여전히 재치있고 감각적인 문장은 여전히 독자를 흡수하는 힘을 갖는다.

  “상상은 정신의 놀이다. 상상을 할 때 정신은 노동을 하지 않고 놀이를 한다. 미래에는 노동이 유희가 될 것이라는 카를 마르크스의 예언은 맞았다. 비록 인류의 미래는 공산주의의 것이 아니었지만, 상상력이 생산력으로 진화하면서 노동은 점차 유희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윤리학은 미학이 될 것이라는 그의 예언도 실현되고 있다. 상상력은 미학의 영역이며, 이 영역은 진위와 선악의 피안에 있으려 하기 때문이다” - ‘상상력 혁명’중에서

  스스로 밝힌 위와 같은 서문의 내용이 이 책의 의미를 대변하고 있다. 점점 빠르게 진행되는 미디어 시대에 활자 매체인 책의 의미는 무엇일까? 진중권은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일까? 하나의 문화 텍스트로는 성에 차지 않은 모양이다. 비선형, 순환성, 파편성, 중의성, 동감각, 상형문자, 단자론이라는 일곱 개의 키워드를 내세워 이것을 다시 일곱 개의 주제로 일별하고 있다.

  우연과 필연(red)-주사위/체스/광대, 빛과 그림자(orange)-카메라 옵스쿠라/라테르나 마기카/그림자놀이, 숨바꼭질(yellow)-아나몰포시스/인형풍경/물구나무, 수수께끼(green)-애너그램/아크로스틱/리버스, 사라짐의 미학(blue)-피크노렙시/마술, 순간에서 영원으로(navy blue)-불꽃놀이/만화경/미로, 다이달로스의 꿈(purple)-종이접기/오토마타/정리정돈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배열하고 묶는 방식으로 흥미진진한 텍스트를 만들어 냈다. 여기서 색인처럼 사용되는 색은 독특한 의미로 해석되지는 않는다. 다만 각 주제 아래 묶인 놀이들이 제각각 독립적이지 않고 유기적인 연관성을 지니게 된다.

  무엇보다도 두드러진 특징은 평면적 테스트를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이 책은 90도로 돌려 보고 뒤집어 보고 비스듬이 놓고 째려보고 별 짓을 다하며 읽어야하는 재밌는 놀잇감이다. 아무도 그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에셔나 김재홍의 그림 등 <미학 오딧세이>에 소개되었던 작품들이 많아 익숙함 속에서 그의 텍스트들 자체가 또 하나의 하이퍼 링크 기능을 갖게 되어 간다고 볼 수 있다. 또 같은 문단과 문장들이 반복되는 장치를 통해 순환성과 중의성 등 앞서 제시한 일곱 개의 개념들을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다.

  이 책의 재미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우선 어린 시절 익숙하게 보아왔던, 혹은 지금 여전히 즐기고 있는 놀이와 사물로부터 자연스럽게 상상력의 세계와 놀이의 즐거움에 빠져든다. 또 하나는 책의 구성과 치밀한 글쓰기 전략으로부터 오는 신선함과 흥미다. 대부분의 인문학 텍스트의 진지함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물론 내용과 소재 자체에 대한 즐거움은 기본이다.

  “창조적 인간이 되고 싶은가? 그럼 성숙의 지혜를 가지고 어린 시절의 천진함으로 돌아가라. 500년 전에 이미 기술적 상상력을 갖고 있었던 다빈치. 그는 호기심에 한계가 없고 상상력에 구속이 없는 ‘영원한 소년’이었다” - 영원한 소년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이다. ‘상상력 혁명’은 결국 ‘영원한 소년’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출발한다. 그 순환 고리를 에셔의 작품 ‘메타몰포시스’로 보여주면서 책을 끝내고 있다.

  맥루한의 미디어 시대에 대한 경고는 책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고 단언할 ?없겠다. 하지만 적어도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과 같은 신선하고 재밌고 즐거운 그러면서도 상상력 놀이를 즐길 수 있는 책들이 있는 한 활자 매체를 떠날 생각은 없다. 늘 새恝?수많은 없겠으나 진중권의 또 다른 책을 기다린다.

  하늘이 흐리다. 비가 올 것만 같다. 김광석의 ‘거리에서’가 가슴에 사무치는 날이다.


200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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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 장정일 단상
장정일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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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에 대한 명상>으로 장정일을 처음 만났다. 이후 <길안에서 택시잡기>까지가 장정일과의 인연이었다. 그의 소설을 읽지 않은건 산문에 대한 편견이 아니라 ‘아무 뜻 없’이 손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도 사실 이웃 블로거(시라노의 酒冊잡기)의 리뷰가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장정일은 40이 넘었다. 10여년을 훌쩍 넘긴 세월이었으니…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 필화 사건으로 언론에 보도될 때도 소설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다. 편견때문이 아니라 시를 통해 그의 성향과 사유의 방식들을 지나치게 드러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두 권의 시집이후 시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혐오로 점철된 그의 발언 들은 차라리 애처롭기까지 했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의 말을 전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다.

  이 책은 그야말로 雜文 모음이다. 그렇다고 절대 글이 잡스럽지는 않다. <생각生覺>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형식은 혼란스럽다. ‘아무 뜻도 없어요’는 지난 몇 년간 쓴 단상들을 펼쳐놓고 있으며, ‘신작시’ 7편, ‘전영잡감’이라는 영화평 10편, ‘삼국지 시사파일’이라고 쓴 칼럼과, ‘나의 삼국지 이야기’로 이루어진 책이다. 그래서 사실 단상으로 꽉 채워진 것보다 뒷부분의 글들은 부록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과 단상 속에서 촌철살인의 한마디 한마디를 풀어낼 수 있는 것이 작가의 능력이라면 장정일은 차고 넘친다. 왜냐하면 정말 오랜만에 책을 보며 혼자 낄낄거리고 키득거렸으니까 말이다. 주변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볼 정도였다. 나만 그랬을까? 개인적으로 통쾌하고 직설적이며 정곡을 찌르는 글들이 고플 때가 많다. 쓸데없이 돌려 말하거나 젠체하거나 점잖빼는 글들에 신물이 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사안에 대해 다르겠지만 장정일은 일정부분에 적합한 문체를 지니고 있다. 그 부분을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글 중에 ‘성조기’라는 표현을 비판한 부분이 나온다. 읽다가 책꽂이의 국어사전을 얼른 꺼내 찾아보았다. 나도 무심코 써왔던 표현이라 가슴이 뜨끔했기 때문이다. 한자로 ‘星條旗’로 별과 세로 줄이 그려진 깃발이라는 뜻으로 미국 국기의 외양을 표현한 것 이외에 다른 뜻을 찾을 수 없으나 장정일은 미국 국기를 ‘성조기’라고 표현하는 것은 친미(親美)를 넘어 숭미(崇美)에 해당한다고 흥분하고 있다. 나는 장정일보다 미국을 더 싫어한다. 그런데도 이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혹시 장정일은 ‘星條旗’를 ‘聖條旗’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었다.

  그의 글을 읽다가 온 몸이 경직되고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며 한참동안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삶의 자세를 다시 한번 가다듬게 하는 글을 만났다. 당연한 말이면서 실제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 통렬함이여. 직업병 때문인지 몰라도 밑줄을 쫙 그어놓은 부분은 다음과 같다.

  “짐승은 배울 수 있지만 아무래도 깨달을 수 없고, 인간은 어쩌다 깨달을 수는 있지만 결코 배우지는 못한다.” 하므로 교육에 관해서는 단 한가지 원칙만 유효하다. 선생은 절대 학생에게 ‘주입’하지 말고 ‘암기’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 배움은 다 쓸데없다. 어떻게 하면 “깨닫게 해 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교육이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25주년 기념일이다. 이 날을 기억하는지 하늘도 눈물을 흘리고 있다. 민주화 영령들의 평안을 진심으로 기원하며 오늘 나의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 브레히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2005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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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듣다 읽다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미학강의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고봉만.류재화 옮김 / 이매진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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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서양미술사 <고전주의와 바로크>를 다시 뒤적여 본다. 고전주의와 바로크 시대의 거장 푸생의 ‘아르카디아의 목자들’과 ‘엘리에제르와 레베카’라는 그림으로 시작되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미학 강의는 인류의 발자취를 더듬어 대표적인 예술작품을 통해 교훈을 얻어내고 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미학강의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보다 듣다 읽다>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푸생을 보고, 라모를 들으며, 디드로를 읽는 것이 주된 내용이고 ‘말과 음악’, ‘소리와 색깔’, ‘오브제들에 관한 시선’으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총 6부로 구성되어 있다. 한가지 곤혹스러운 것은 라모가 누구인지도 모르며, 들어본 적도 없는 나는 음악에 대한 이론들이 마치 낯선 외국어처럼 이해 불가능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1908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나 1930년에 최연소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브라질로 건너가 원주민과 함께 거주하면서 미개문명에 대한 탐구에 정열을 쏟았고, 2차 대전을 피해 뉴욕으로 건너가 언어학자 야콥슨을 만나 언어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후 프랑스로 귀국하여 ‘사회인류학’ 강좌를 창설한 20세기의 뛰어난 지성이다.

  이 책의 서두에서 푸생의 두 그림을 꼼꼼하게 해설하는 방식은 당시 예술가들의 이론을 소개하고 분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당시 라모의 음악에 열광했던 이유를 멜로디와 화성으로 나누어 고찰하고 있다. 디드로의 예술론이 보여주는 당시의 논의들을 통해 미의식에 대한 변화들을 분석해주고 있는 셈이다.

  시대를 뛰어넘는 예술의 아름다움에 대해 회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시대가 아닌가 싶다. 레비-스트로스가 푸생과 라모와 디드로를 선택한 것은 사회인류학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서 비롯되었겠지만 고전주의와 바로크, 신고전주의 대표자를 통해 인간의 미적 가치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대를 초월한 예술과 시대에 충실한 예술의 가치 평가를 내릴 때 어느 쪽이 우수하다고 평가할 수 없듯이 인류가 쌓아온 문화는 상대성과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특정 인물인 푸생, 라모, 디드로를 넘어 말-여기에는 언어학자 소쉬르의 ‘빠롤parole’ 개념이 ‘랑그/랑가주langue/langage'과 구분되어 쓰인다-과 음악, 소리와 색깔이라는 사유방식으로 확장되어 ’오브제objet'에 대한 시선으로까지 확대된다. 인간이 살아온 문화와 인류의 생활방식들 속에서, 특히 문명화되지 않은 '바구니'에 대한 사소함에서, 대상에 대한 그의 탁월한 분석과 날카로운 시선을 만나게 된다. 그것이 비록 온전히 내게 전달되어 육화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우리 고유의 예술 대상들, 즉 오브제에 관한 연구와 깊이있는 관심은 결국 한국인의 사유방식과 문화 코드를 읽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객관적(?)인 저력 때문이다. 이름난 유럽과 서양의 예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 것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곧 우리 민족 고유의 미의식을 현재화하고 세계화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우리 고유의 미학 강의가 나올 날이 멀지 않다고 믿는다.

 
2005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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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수련 옮김 / 인간사랑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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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21세기를 한 세대, 아니 22세기의 후세들이 어떻게 정리하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고 흥미롭기도하다. 물론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게임과 같이 우리가 만들어 가야할 미래는 아득하고 막막하기만 하다. 전지구적 환경의 변화는 경제, 정치, 군사, 환경, 특히 문화적 징후들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을만큼 급박한 변화와 조정을 거치고 있는 상태다.

  수 백년 간 지속된 인류의 사상적 변모는 사회변동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사회정치적 배경과 인간의 사유방식은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을 인식하고 우리를 돌아보는 철학방식은 중심개념과 논의의 초점이 하나로 일치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근대 이후 ‘다양성’이라는 가장 두드러진 특성을 보여주는 일련의 현상들은 계급의 붕괴와 시민사회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각종 예술과 문화의 주체로서 당당하게 참여하게 된 ‘민중’들의 힘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여년 전의 일일 뿐이다. 그래도 그 변화의 속도를 정신을 차릴 수 없을만큼 급진적이며 변화양상 또한 파격적이다. 그 숱한 변화와 다양한 문화 현상 속에서 현대인의 사유 특징을 나름의 방식대로 읽어낸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슬라예보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라는 책은 1989년에 출판된 그의 초기작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지젝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고민과 사유 방식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의 사상적 배경과 문화 해석의 논리들이 어디서 출발하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지 선명하게 보여주는 그의 대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 1부 증상에서는 마르크스가 어떻게 증상을 고안해냈는지를 살펴보고, 그의 증상에서 증환으로 나아가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는 프로이트와 알튀세르, 카프카의 작품이 동원되며, 헤겔식 농담과 영화 ‘타이타닉’을 동원하여 이해를 돕는다. 물론 문화 현상들이 지젝의 이론을 대변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론과 언어 형식에 매몰될 수 있는 개념들을 이해하기 위한 방식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제 2부 타자 속의 결여에서는 ‘케 보이’와 ‘당신은 두 번 죽는다’는 제목으로 이데올로기의 정체성과 왜상, 동일시, 욕망의 그래프를 통해 본격적으로 지젝의 사상을 배경이 되는 라캉의 이론들을 꼼꼼히 분석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포스트 구조주의자’라는 총체적 분류방식을 거부한 지젝은 라캉의 누빔점과 타자의 개념의 오독을 지적하고 있다.

  마지막 제 3부 주체에서는 실재의 주체 개념을 확인하고 ‘메타언어는 없다’는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유명한 명제를 분석하며 지젝 나름의 주체와 실재 사이의 개념을 확립하고 있다. 그것은 라캉이 말한대로 상징계와 상상계의 모호한 구분과 구별되는 실재계에서 존재하는 주체의 역할과 개념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읽은 지젝은 뼈와 살에 달라붙지 않았다. 이물감을 느낄만큼 거부감이 들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 안에 소화되어 내재화 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것은 개념과 언어때문이었다. 철학의 대상자체가 ‘언어’로 귀착되기 시작하고 모든 사유 방식의 근원이 되는 ‘언어’에 대한 분석과 해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20세기 언어 분석철학부터 시작된 이 기나긴 여행은 언제쯤 또다른 변화와 도전을 겪게 될지 알 수 없다. 지난 세기 가장 명민한 철학자로 일컬어지는 비트겐슈타인의 관한 <비트겐슈타인은 왜?>라는 책을 보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지젝의 사상적 배경과 변모과정을 설명한 <누가 슬라예보 지젝을 미워하는가>를 통해 대강의 모습을 그리고 시작한 책읽기였지만 선명한 개념과 인식 방법을 체득하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르크스든, 헤겔이든, 라캉이든 그들의 개념을 재해석하고 있는 지젝이든 인류의 사상적 진보는 계속될 것이며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귀기울여 들어보고 21세기에 그려나갈 우리의 모습이나 지나온 20세기를 정리해서 현재를 살아가는 ‘누빔점’을 삼을 수 있다면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지만 내게는 좀 더 정밀한 책읽기와 사유가 필요한 듯 싶다.


2005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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