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라루스 서양미술사 7
제라르 르그랑 지음, 정숙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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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르네상스는 예술의 한 흐름이나 일시적인 사상적 흐름으로 파악되기 보다는 한 시대를 특징짓는 역사적 시대 구분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싶다. 미술 분야의 르네상스는 문학에서처럼 고전에 대한 향수와 부활의 의미로, 혹은 중세에 대한 극복의 의미로 규정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혁신이나 ‘복귀’(라블레의 표현), 부흥이라는 용어까지도 당시에는 보편적이었을만큼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이 유일하게 존재했던 시기였다고 샤스텔은 이 시기를 평가하고 있다.

페트라르카로 인해 문학이 되살아났고, 조토와 함께 화가들의 솜씨는 다시 부흥하게 됐다. 우리는 이 두 개의 예술이 완벽에 이르는 것을 보았다고 얘기하는 피„에 이어 에라스무스도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은 얼마나 굉장한 세기(世紀)인가! 다시 젊어지고 싶구나!”라며 새로운 황금기를 찬양했다. 그 시대에 몸담고 있던 예술가들이 스스로 찬탄할 정도로 생기 넘치는 시기가 바로 르네상스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에 대한 이해는 곧 르네상스 미술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관점이 된다.

조토의 <새들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체스코>나 <유다의 입맞춤>에서 보여주는 종교적 대중화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나 로렌초 기베르티의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얀 반 아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 초상화> 등의 작푸미 훨씬 더 현대적 관점에서는 신비스럽고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 작품들이다. 원근법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회화의 사실성과 다양성이 풍부하게 표현되기 시작했다. <프리마베라 혹은 봄>으로 명명된 보티첼리의 대표작은 여신들의 부드러운 몸의 곡선, 신화적인 분위기가 배어 있어 그림에 문외한인 나의 눈길을 한참 붙들어 놓는다. 르네상의 절정기의 대표적 인물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수태고지>나 <모나리자>로 너무나 유명하고 <최후의 만찬>은 소설로 만들어져 소설적 재미와 상상력을 배가시키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다 빈치보다 스물살이상 어리다. 동시대 인물로 비교되고 있지만 건축이나 회화에서 보다 스스로 조각가라 여겼다. 그에 비해 라파엘로는 백과사전적인 다 빈치와 고뇌하는 반항자인 미켈란젤로 사이에서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사실 그는 다만 다른 사람들이 실현하고자 꿈꿔왔던 것을 실현했다’라는 괴테의 놀라운 말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고고학자이면서 데생과 건축가였으며 시도 쓰고 조각도 했다. 예술 자체가 분화되지 않아 당시 상황으로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 세명의 천재(?) 예술가들은 르네상스를 한층 더 풍요롭게 해준 대표적 인물들이다.

피렌체에서 로마, 베네치아를 거쳐 유럽으로 확산된 르네상스는 건축과 회화에서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알브레히트 뒤러로 대표되는 새로운 취향의 회화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히에로나무스 보스의 <쾌락의 동산>,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브뢰겔의 <이카로스의 추락>등의 작품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되묻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르네상스는 후에 매너리즘으로 변화한다. 자연으로부터 인위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정신, 장난스럽고 괴상하면서도 ‘이상한’ 인간의 발명품으로 예술을 대하는 것이 특징이다. 르네상스의 이상적인 아름다움보다 뛰어난 기교에 대한 열망이 예술가들의 관점을 바꾸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느 예술도 그러하듯이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라파엘로의 <아테나 학당>은 ‘철학의 성전’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으로 르네상스를 요약하고 있다. 부드러운 색감과 편안한 구도를 바탕으로 고대의 현자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한참동안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이유이다.

서양미술사 시리즈 두 번째인 이 책은 미술비평가이자 영화평론가인 제라르 르그랑의 설명으로 되어 있다. 제한된 분량으로 설명과 회화를 모두 담기에는 역부족인듯 싶은 아쉬움이 있지만 각 시대별로 일갈하기 위한 압축의 효과를 최대로 거둘 수 있을지 나머지 시대를 기대해본다.

2005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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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반점 - 2005년 제2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한강 외 지음 / 문학사상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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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CD 모니터에 깜박이는 커서를 바라보는 일은 외롭다. 그것은 작가로 이름 붙혀진 사람들만의 몫은 아니다. ‘고시에 합격하기보다 더 어려운 인생살이’에 대한 막막함 같은 것이다.

이문열이 소설만 쓰던 시절, 그러니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이상 문학상을 받은 1987년부터 나는 <이상문학상>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과외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처음으로 책을 사기 시작했다. 그해 89년 김채원의 ‘겨울의 환’이 수상작이었다. 책꽂이에 나란히 17권이 꽂혀있다. 이청준의 ‘잔인한 도시’와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까지 19권이다. 나이테 같은 느낌으로 가끔 들여다 본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비슷한 나이의 작가들이 수상자로 선정된다. 벌써(?) 늙어버린듯한 착각과 더불어 책을 읽는 태도와 감정이 변해가고 있음을 느낀다.

매년 수상 작품집을 읽다보면 수상을 염두해 두고 쓴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들, 즉 이상문학상스러운 소설들에 눈이 간다. 올해의 수상작 ‘몽고반점’은 우수상 수상작들과 비교해서 단연 돋보인다. 수상 취지와도 부합하며 소설적 재미와 완성도 면에서도 훌륭하다. 유미주의나 탐미주의, 예술지상주의로 분류될만한 본격적인 예술가 소설로 읽혔다. 처제의 몸에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몽고반점은 비디오 예술가인 주인공의 상상력을 무한대로 증폭시키며 성적인 욕망으로까지 발전된다. 처제의 채식주의는 동물성에 대한 역겨움과 삶에 대한 환멸을 동일시한다. 꿈에 나타난 무의식의 세계를 형부의 제안으로 시작한 비디오 작업 속에서 다시 확인하며 인간 존재의 근원적 슬픔을 확인한다. 미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스친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동생과 남편의 비디오를 보고 정신병원으로 보내는 아내의 심정과 태도는 이 작품의 결말에서도 중요하지 않다. 몽고 반점으로 대표되는 몸에 대한 관심과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싶은 유년에 대한 그리움은 순수성에 대한 욕구의 다른 이름이다. 삶의 권태와 무기력에 대한 치기어린 행동으로 보기엔 너무 슬픈 몸짓이다.

소설가 한강의 문체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차가운 금속성의 소리를 낸다. 깔끔하고 단정한, 군더더기 없는 매끈한 문체의 수려함이 아니라 어딘지 어색한 냉정을 유지하고 있다. 철저하게 계산된 하드보일드라면 소설속 주인공이 주는 열정과 환상을 객관화시키는 중화제 역할을 한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한 편의 소설이 아니라 슬프고 처참한 현실속의 불감증 환자들에 대한 경고로 들린다. 삶에 대한 열정과 아픔이 없는 건조한 생활들을 돌아보는 한가한 시간의 향이 풍부한 커피 한잔 쯤으로 받아들여도 좋다. 소설이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지?라고 생각하며 문학이 갖는 해묵은 사회적 기능에 대한 논쟁을 꺼낼 필요는 없다. 그런 사람이라면 읽지 않을 테니까. 몽고반점은 재밌다. 그리고 외롭다.

장편 소설 ‘길위의 집’과 ‘사랑하라, 희망없이’가 우연히도 책꽂이에 나란히 꽂혀있다. 우수상 수상작 이혜경의 ‘도시의 불빛’과 윤영수의 ‘내 여자 친구의 귀여운 연애’는 재미없다. 고백적 형식의 ‘도시의 불빛’은 새로움과 흡입력이 부족하고 윤영수의 소설은 밋밋하다.

이만교의 ‘표정관리주식회사’는 풍자적 세상읽기가 돋보이는 소설로 형식의 새로움과 인물에 대한 표현이 풍부하지만 사실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경욱의 ‘나비를 위한 알리바이’는 TV로 대표되는 매스미디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소외된 개인에 대한 현대인의 자화상으로 읽었다. 나비로 상징되는 주인공의 태도가 낯설지만 평범하다. 소설의 내용 또한 진부하다. 문체와 형식으로만 독자에게 다가설 수는 없는 일이다.

천운영의 ‘세번째 유방’은 재밌다. 맛깔스럽고 입에 감기는 서술이 돋보이며 고백적 형식이 답답하기는 하지만 독특한 내용의 신선함과 흥미로운 주인공들에 대한 접근 방식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박민규의 ‘갑을고시원체류기’는 그 답다. ‘슈퍼스타 감사용’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 그의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보여준 여유와 재치있는 글쓰기가 가벼움으로만 읽히지는 않는다. 다만 고시원에서 만난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분량과 상관없이 인상적인 모습들로 스케치하거나 독자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부족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90년 초반에 대학 시절을 보낸 동시대 인물에 대한 연민이 개인적 경험으로 수용될 수 있어 특별하게 읽었다.

1년 후에 다시 만?작품집에 대한 기대보다는 이제 시간의 흐름과 나이에 대한 부담까지 떠오르는 무게를 지니게 되었다. 내년이면 일련번호 30번째 작품집이 나온다. 많은 작가들의 새로움을 확인하는 순간들을 기대해 본다.

200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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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의 문학 강의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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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웠던 90년 여름에 출간됐던 <그대에게 가는 먼길>이라는 이성복의 책은 신선했다. 산문이라고 이름붙이기에 애매한 단편들을 모아 ‘이성복 아포리즘’이라는 형식으로 묶어냈기 때문이다. 낯설고 새로운 형식이었으나 이외수 등의 산문집을 경험한 독자들에게 처음이라는 인상을 줄 수는 없었다. 어쨌든 아포리즘이라는 형식의 글들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은 내가 접한 첫 책이었다. 이제 움베르토 에코의 <문학 강의>를 통해 아포리즘과 역설에 대해 다시 그의 책을 뒤적여본다.

“문학은 현실로 들어가는 문(門)이다. 문학을 신주단지처럼 받드는 사람들이 문학으로부터 배신당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조금이라도 문학이 중요하다면, 그것은 삶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 그대에게 가는 먼 길, 이성복, 살림, 1990

문학에 관한 그 많은 책들을 읽는다고 해서 문학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렐레스의 ‘시학’으로 시작해서 김현, 김주현의 ‘문학이란 무엇인가’까지 고개만 돌려도 눈에 띄는 무수한 문학에 관한 담론들을 바라보면 지겹기까지하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수많은 질문과 대답들 속에서 그리고 문학에 대한 열정과 애정들 속에서 우리의 삶은 더없이 풍요로워지고 봄 햇살처럼 부드러운 느낌으로 생을 대하게 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유명한 작가들과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만의 몫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질문들이며 그 질문들에 대한 각각의 진지한 대답이고 길들이기 때문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문학 강의>는 여러 대학과 각종 행사에서 발표한 글들과 논문집과 잡지에 실렸던 글들을 모은 책이다. 문학의 기능에서부터 상징, 문체, 아이러니의 층위들까지 폭넓은 독서와 사유의 세계를 독자들에게 어렵지 않게 설명해주고 있다. 보르헤스의 영향을 고백하고 형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으며 ‘거짓의 힘’을 통해 보여주는 ‘장미 십자가단’에 관한 유럽의 환상과 신화적 상상력을 실증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학자로서 보다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의 작가인 소설가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에코의 문학론은 이탈리아의 작가들과 유럽 문화의 토양에서 성장한 에코의 문학적 편력들을 읽어낼 수 있다. 동양적 문화와 가치관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문학의 보편성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는 부분들에만 동의한다. 실제로 읽지 않은 보르헤스의 영향력을 이야기하는 소단원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알지 못하는, 흥미가 없는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역일 것이다.

에코의 이 책이 갖는 미덕은 문학에 대한 다양한 반응 방식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더 이상 나올것도 보태질 필요도 없을 듯한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름의 방식의 재구성하고 실제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에코 방식의 문학에 대한 자세를 듣게 되는 것이다. 역자인 김운찬 교수가 달아놓은 주가 가독성을 방해하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이탈리아와 유렵 문화에 까막눈인 나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나는 문학에 관한 모든 길을 다 안다. 그 어느 한 길도 제대로 갈 수 없다는 것까지…… 문학은 삶이다. 삶이 곧 문학은 아니라 하더라도.”라고 했던 이성복 시인이 이 책을 읽는다면 아포리즘과 역설에 대해 어떤 표정을 짓을지 궁금하다. 단 한마디로 인생을 정의할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작가를 기다리는 것보다 숱한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보다 많은 작가들과 책을 만나고 산책하며 사유할 시간을 가져볼 것이다.

2005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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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창비시선 239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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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안도현의 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고 있다. ‘너에게 묻는다’는 다소 도발적 제목으로 이기적인 삶에 대한 반성과 각성을 요구한다. 이타적 사랑과 소외된 것들에 대한 관심은 어쩌면 작가가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정서인지도 모른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으로 그를 처음 만났는데 벌써 여덟 번째 시집이라니 세월이 빠르다.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까지 보았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그의 시집은 많이 달라졌다. 시인들은 보통 나이가 들면서 인식의 고삐가 늦추어지고 사물에 대한 시선의 각이 무디어 진다. 이것을 생에 대한 부드러움과 포용, 사고의 확장과 인식의 변화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뭔가 거대한 사상과 모든 것들에 대한 관조로만 이해될 수는 없다. 뭔가 부족하고 아쉽다. 권혁웅의 상찬식 해설은 시를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간격>을 보자.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되는,
    기어이 떨어져 서 있어야 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창창(鬱鬱蒼蒼) 숲을 이룬다는 것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 들어가보고서야 알았다

  사람들 사이의 거리두기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뛰어나다. 나무와 숲의 조화를 ‘거리’로 파악한 눈은 놀랍기만 하다.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묻지만 않는다면 인간관계는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거라는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지나친 관심과 이해와 사랑만이 미덕은 아닐텐데. 살아가면서 더욱 어려워지는 이 관계 맺기에 대한 통찰이 놀랍기만 하다.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같이 울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괭이는 아직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돌의 울음)라고 말하는 안도현의 말이 아프게 새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생 동안 나무가 나무인 것은 무엇보다도 그늘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하늘의 햇빛과 땅의 어둠을 반반씩, 많지도 적지도 않게 섞어서
    자기가 살아온 꼭 그만큼만 그늘을 만드는 저 나무가 나무인 것은
    그늘이라는 것을 그저 아래로 드리우기만 할 뿐
    그 그늘 속에 누군가 사랑하며 떨며 울며 해찰하며 놀다가도록 내버려둘 뿐
    스스로 그늘 속에서 키스를 하거나 헛기침을 하거나 눈물을 닦거나 성화를 내지 않는다는 점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말과 침묵 사이, 혹은
    소란과 고요 사이
    나무는 저렇게
    그냥 서 있다
                          -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중에서

  이렇게 노래하는 시인이 ‘이끼’에서는 “사랑에 빠지면 눈이 멀거나 눈이 환하게 밝아진다고 했거니와 이끼가 알고 있는 건 그늘이 허공의 전부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얼마나 낯설고 다른 시선으로 나무와 숲과 돌과 이끼를 바라보아야 새로움이 보이는 걸까 싶다. 말하기 전에 느껴져야하는 것이 시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안도현이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이유라 할 수 있다. 어렵지 않은 언어로 스치기 쉬운 생의 구석구석을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통찰을 전해준다. 마지막으로 시집의 표제작 ‘강’을 살펴보자.

     너에게 가려고
    나는 강을 만들었다

    강은 물소리를 들려주었고
    물소리는 흰 새떼를 날려보냈고
    흰 새떼는 눈발을 몰고 왔고
    눈발은 울음을 터뜨렸고


    울음은강을 만들었다
    너에게 가려고

  나는 또다시 기막힌 시 한편을 만난 느낌을 지울 수 없어 한참동안 반복해서 음미했다. 스무살,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서 처음 돈을 벌었다. 책방으로 달려가 시집 두권을 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시작해서 이제 겨우 400여권의 시집이 책꽂이 하나를 채우고 있다. 어렵고 힘들때, 기쁘고 행복할 때마다 시집에 기댄다. 손때 묻도록 꺼내보고 인용했던 많은 시들과 가슴에 담아두고 사람들에게 전했던 시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빛나길 바란다. 천권의 아름다운 시집을 전해줄 아이들에게도 기쁨이 될 수 있으면 더욱 기쁘겠다.

  비록 날카로움과 날선 비판의 시선은 거두었으나 사십대 중반을 넘어서는 시인의 안주가 아니라 세상을 읽어내는 또다른 방식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좀더 새롭고 낯선, 독자의 기다림에 부응하리라 믿는다. 꼬리에 꼬를 물고 연쇄적인 순환의 반복 구조를 보여주며 “너에게 가려고”하는 모든 사람들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2005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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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한국 여성의 역사
박수정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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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라는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방향성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다. 특히 ‘한국여성’이라고 범위를 한정시키고 보면 참 할 말이 많아 보인다. ‘일하는 여성’으로 범위를 한정시키고 보면 어느정도 가닥이 잡힌다. <숨겨진 한국여성의 역사>는 일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더 구체적으로 70년대 초창기 민주노조의 기틀을 마련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다. 산업화 사회의 숨은 일꾼으로 자리매김하고 그 역할과 위상을 인정받아 마땅한 이 땅의 ‘공순이’들의 이야기다.

  가난은 한 개인의 잘못도 아니고, 복권처럼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사회적 계급도 아니다. 해방이후 우리의 정치 현실을 들여다보면 울분을 참을 수 없다. 잘못된 과거의 청산과 반성이 없이 진행형의 과거를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 과정에서 소외된 민중과 그들의 딸들은 어떻게 살아왔나? 멀지 않은 내 어머니 세대의 일이고 보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눈물이 흘렀다.

  ‘구로노동자문학회’ 상근자로 일하기 시작한 박수정의 글들이 다소 감성에 호소하는 측면이 있으나, 박순희, 이철순, 이총각, 정향자, 최순영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과거의 추억담이나 지나간 옛노래가 아닌 현재진행형의 역사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때보다 나아졌다는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래도 희망은 있다. 그들이 노둣돌과 디딤돌이 되어 이만큼 진보했고 발전했으며 앞으로도 조금씩 나아질거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똥물 투척 사건으로 전국을 뒤흔든 동일방직 노동조합 위원장 이총각. 신민당사 점거농성으로 민주화의 불씨를 당겨 반유신 정치투쟁과 부마행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끝내 10․26으로 정권의 종말을 보았던 YH무역 노조 지부장 최순영. 원풍모방 사태의 주역 노동조합 부지부장 박순희. 한국여성 노동자회 협의회위원장 이철순. 전남제사 노동조합 위원장 정향자.

  섬유노조와 관련된 한계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7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 노동운동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산 증인들이다. 이들은 여전히 민노당의 원내 진출로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최순영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 곳곳에서 아직도 여성 노동자들의 권익과 사회적 약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일로 평생을 보내고 있다. 서슬퍼런 유신 독재의 칼날아래 개인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 싸웠던 이들의 모습들이 더욱 감동적이다. 그후 80년대 학생 운동과 섞이며 겪었을 갈등과 본질적 문제의 대립은 차치하고서라도 온몸으로 싸워온 삶의 모습들이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못 배우고 가난한 설움이 개인의 무능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 모순과 자본의 논리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언제나 혼자가 아니고 우리가 되어 살아가는 모습들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JOC(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역할이 곳곳에서 보인다. 힘없고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더불어 함께 걸어 갈 수 있는 길에 등불을 밝혀 주는 일이 진정한 종교의 몫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내 어머니와 누이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쉽지 않은 문제가 된다. 21세기를 여성, 환경, 문화의 시대라고 단언하는 사람도 있다. 미래를 준비하는 화두로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우리들의 문제로서 여성의 문제는 곧 나의 문제 우리의 문제가 되어 있다. 여성의 가정내 역할과 사회적 역할에 대해 지루한 이론과 공방들로 시간 보내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현실속에서 구체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방법들이 제시되고 각 사업장에서 권익과 인권측면의 여성 문제를 모두가 고민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믿고 있다. 여성 문제라는 용어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많은 관심과 노력이 생활속에서 실천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한사람이 가고 두람이 가고 여러 사람이 가다보면 길이 생기는 것이다. 노신의 글을 보며 인상 깊게 가슴에 새겼던 말이다. 맨처음 그 가시밭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 그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물론 혼자만의 용기도 아니다. 어깨 겯고 함께 걸어갈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 모두가 꿈을 꾸면 그건 꿈이 아니라 곧 현실이 되듯이 말이다. 아직 살아 계신 분들에 대한 삶에 경의를 표하며 이땅에서 생이 다하는 날까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시길 빈다.


20050331
여성이라는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방향성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다. 특히 ‘한국여성’이라고 범위를 한정시키고 보면 참 할 말이 많아 보인다. ‘일하는 여성’으로 범위를 한정시키고 보면 어느정도 가닥이 잡힌다. <숨겨진 한국여성의 역사>는 일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더 구체적으로 70년대 초창기 민주노조의 기틀을 마련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다. 산업화 사회의 숨은 일꾼으로 자리매김하고 그 역할과 위상을 인정받아 마땅한 이 땅의 ‘공순이’들의 이야기다.

  가난은 한 개인의 잘못도 아니고, 복권처럼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사회적 계급도 아니다. 해방이후 우리의 정치 현실을 들여다보면 울분을 참을 수 없다. 잘못된 과거의 청산과 반성이 없이 진행형의 과거를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 과정에서 소외된 민중과 그들의 딸들은 어떻게 살아왔나? 멀지 않은 내 어머니 세대의 일이고 보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눈물이 흘렀다.

  ‘구로노동자문학회’ 상근자로 일하기 시작한 박수정의 글들이 다소 감성에 호소하는 측면이 있으나, 박순희, 이철순, 이총각, 정향자, 최순영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과거의 추억담이나 지나간 옛노래가 아닌 현재진행형의 역사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때보다 나아졌다는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래도 희망은 있다. 그들이 노둣돌과 디딤돌이 되어 이만큼 진보했고 발전했으며 앞으로도 조금씩 나아질거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똥물 투척 사건으로 전국을 뒤흔든 동일방직 노동조합 위원장 이총각. 신민당사 점거농성으로 민주화의 불씨를 당겨 반유신 정치투쟁과 부마행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끝내 10․26으로 정권의 종말을 보았던 YH무역 노조 지부장 최순영. 원풍모방 사태의 주역 노동조합 부지부장 박순희. 한국여성 노동자회 협의회위원장 이철순. 전남제사 노동조합 위원장 정향자.

  섬유노조와 관련된 한계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7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 노동운동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산 증인들이다. 이들은 여전히 민노당의 원내 진출로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최순영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 곳곳에서 아직도 여성 노동자들의 권익과 사회적 약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일로 평생을 보내고 있다. 서슬퍼런 유신 독재의 칼날아래 개인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 싸웠던 이들의 모습들이 더욱 감동적이다. 그후 80년대 학생 운동과 섞이며 겪었을 갈등과 본질적 문제의 대립은 차치하고서라도 온몸으로 싸워온 삶의 모습들이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못 배우고 가난한 설움이 개인의 무능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 모순과 자본의 논리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언제나 혼자가 아니고 우리가 되어 살아가는 모습들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JOC(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역할이 곳곳에서 보인다. 힘없고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더불어 함께 걸어 갈 수 있는 길에 등불을 밝혀 주는 일이 진정한 종교의 몫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내 어머니와 누이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쉽지 않은 문제가 된다. 21세기를 여성, 환경, 문화의 시대라고 단언하는 사람도 있다. 미래를 준비하는 화두로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우리들의 문제로서 여성의 문제는 곧 나의 문제 우리의 문제가 되어 있다. 여성의 가정내 역할과 사회적 역할에 대해 지루한 이론과 공방들로 시간 보내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현실속에서 구체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방법들이 제시되고 각 사업장에서 권익과 인권측면의 여성 문제를 모두가 고민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믿고 있다. 여성 문제라는 용어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많은 관심과 노력이 생활속에서 실천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한사람이 가고 두람이 가고 여러 사람이 가다보면 길이 생기는 것이다. 노신의 글을 보며 인상 깊게 가슴에 새겼던 말이다. 맨처음 그 가시밭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 그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물론 혼자만의 용기도 아니다. 어깨 겯고 함께 걸어갈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 모두가 꿈을 꾸면 그건 꿈이 아니라 곧 현실이 되듯이 말이다. 아직 살아 계신 분들에 대한 삶에 경의를 표하며 이땅에서 생이 다하는 날까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시길 빈다.


2005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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