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사춘기에 접어들고, 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자마자 문예반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시인을 꿈꾸다. 대학 신입생, 시집끼고 방황하고 껄렁대던 시절 학교앞 언덕위에 카페 ‘그리스인 조르바’를 처음 만나다. 도서관에 가 반쯤 읽다 팽개치다. 고등학교때 읽은 헤르만 헤세의 ‘知와 사랑Nasziss und Goldmund'가 생각나다.

스무살 무렵 그렇게 카페 이름으로 처음 알게 된 이 책은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느 습작에도 등장했었다. 2005년 다시 읽는 ‘그리스인 조르바’는 재밌다. 그리스인들에게 크레타와 터키의 대립항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의 상태 저 너머에서 일어나는 변화 ‘메토이소노(거룩하게 되기)’다. 어린시절 터키 지배하에 기독교인 박해 사건과 독립 전쟁을 겪으며 ‘자유와 해방’을 얻기위해 3단계 투쟁을 계획한다. 호메로스에게 영향을 받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베르그송과 니체를 거쳐 실존 인물인 ‘조르바’를 만나게 된다.

소설의 서사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주인공인 ‘조르바’와 겪는 크레타에서 한 시절을 이야기 한다. 항구에서 만나 고향 크레타로 간 나는 갈탄광 사업을 ‘조르바’에게 맡겨 놓고 독서와 글쓰기, 특히 부처에 대한 글쓰기로 생을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수십년 간 독서와 사색으로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조르바’는 단 한순간에 수많은 경험과 몇마디 직설 화법과 행동으로 명쾌한 결론을 내린다. 과부인 부불리나(오르탕스 부인)를 만나 거침없는 사랑과 열정에 빠지는 노인 ‘조르바’와 대조적으로 나는 검은옷을 입은 젊고 아름다운 과부를 지켜내지(?) 못하고 동네 청년이 짝사랑하다 자살하자 동네사람들에게 칼려 찔려 죽는 상황을 맞게 된다. 결국 갈탄광 사업은 실패로 돌아가고 부불리나는 병들어 죽고 ‘조르바’와 헤어져 마지막으로 시베리아에서 온 편지를 받는다. ‘조르바’의 죽음을 전하는 편지를.

열린책들에서 2000년판으로 나온 이 책은 전통적인 사철방식으로 만들었다고 자랑할만하다. 양장본으로 만들어진 책의 질감과 느낌, 부피와 크기가 아주 만족스럽다.

이 작품에서 나는 전형적인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에 비해 ‘조르바’는 수많은 전쟁 경험과 노동을 통한 땀의 소중함을 알고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순간에도 초월적인 모습을 보인다. 수도승과 수도원장을 골탕먹이는 그의 행동들은 종교의 허위의식과 감각적이고 현실적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유사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가 ‘골드문트’에게 준 영향만큼 실존 인물 ‘조르바’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에게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카잔차키스가 생전에 마련해 놓았다는 그의 비문이다. ‘조르바’ 없이는 써지지 않았을 비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많은 작품들이 신성모독으로 작가를 파문하려 했고 교황청으로부터 금서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기존질서의 틀을 거부하며 종교와 도덕적 사회규범에서 벗어나 인간의 본질적 속성과 자유 의지를 보여준 작가로서 높이 평가 받을 만하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나에게도 실천에 옮기기 힘든 삶의 지향이 바로 본질적 ‘자유’가 아닌가.


200502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세미술 라루스 서양미술사 1
자닉 뒤랑 지음, 조성애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말타면 종부리고 싶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경계하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보면 그 욕망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을 읽다가 허황된 욕망에 빠진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스폰서가 내게 있다면, 아니 내게 무지하게 돈이 많다면 3년 정도만 세계 여행을 떠나고 싶다. 특히 각국의 미술관과 고대 건축물들만 돌아보는 코스로 3년. 책밖으로 눈을 돌리다 혼자 웃었다. 3년은 아니더라도 머지않아 유럽의 건축물들과 미술관을 순례하는 여행을 떠날 것이라고 계획을 잡는다. 이 책의 도록은 그만큼 선명하고 사실감이 넘친다.


  이 책은 전 7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이 중세미술이다. 5세기경 고대 문명 사회가 붕괴되는 시기부터  15세기 르네상스로 막을 내린다.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대표되는 중세시기는 미술보다 건축과 조각 양식이 훨씬 흥미롭다. 작가 자닉 뒤랑은 10년 넘게 루브로 박물관에서 중세 예술사를 주제로 강의했다. 텍스트 자체는 분량이 많지 않지만 구체적인 도판과 해설이 충실하기 때문에 중세의 미술사를 이해하는 데 적절하다. 특히 전공자가 아닌 나처럼 예술에 문외한에게 더더욱 적당하다. 단숨에 1권을 읽어버리고 2권을 주문하고 나서 다시 책을 뒤적이며 여운을 즐긴다.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보면 수도원에서의 미술품 생산화 조직화 과정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고 건축 장인조합과 길드의 역할을 참고할 수 있다. 중세의 건축물과 조각품 하나하나에 묻혀진 장인들의 손길과 그들의 예술혼을 어떤 고귀한 정신에 비유할 수 있을까. 예술품보다 먼저 그들의 삶에 숙연해진다.


  이 책은 단순히 시대별로 예술가들과 예술품들을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다. 문화사적 시각에서 사회경제적 흐름속에 놓이는 미술의 위치와 탄생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깊이 있는 책읽기가 가능하다.


  샤르트르 대성상, 랭스 대성당, 아미앵 대성당은 프랑스 고딕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로 고딕 건축의 파르테논 신전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직접 실물로 보고 싶은 욕망이 끓어오른다. 예술은 과거와의 대화다. 인류가 걸어온 시간을 더듬어 보는 떨림과 두근거림이 있고 인간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미에 대한 본질적 그리움을 달래준다.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그 안에 들어가 하루쯤 보내며 루앙의 대성당을 빛의 흐름과 시간에 따라 다르게 표현한 모네처럼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도 즐겁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으나 제대로 된 여행을 위해 책으로 만족하고 예술에 대한 안목이나마 높힐 수밖에 없다.


  ‘서양미술사’는 곰브리치가 워낙 막강하다. 하지만 프랑스 라루스의 서양미술사 시리즈는 또다른 방식으로 눈과 손을 즐겁게 한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분량과 한정된 도판 때문에 갈증을 배가 시킨고 객관적이고 잡다한 여러 지식을 나열하는 방식이 옳다고 볼 순 없지만 프랑스 중심의 서술이 간간이 거슬리기도한다.


  좋은 그림과의 만남을 준비하며 이렇게 기다리는 것도 내게는 의미 있는 일이다. 서양 중세를 산책한 오늘 하루는 여유로운 아쉬움을 남긴다.

 


200502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세미술 라루스 서양미술사 1
자닉 뒤랑 지음, 조성애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말타면 종부리고 싶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경계하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보면 그 욕망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을 읽다가 허황된 욕망에 빠진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스폰서가 내게 있다면, 아니 내게 무지하게 돈이 많다면 3년 정도만 세계 여행을 떠나고 싶다. 특히 각국의 미술관과 고대 건축물들만 돌아보는 코스로 3년. 책밖으로 눈을 돌리다 혼자 웃었다. 3년은 아니더라도 머지않아 유럽의 건축물들과 미술관을 순례하는 여행을 떠날 것이라고 계획을 잡는다. 이 책의 도록은 그만큼 선명하고 사실감이 넘친다.


  이 책은 전 7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이 중세미술이다. 5세기경 고대 문명 사회가 붕괴되는 시기부터  15세기 르네상스로 막을 내린다.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대표되는 중세시기는 미술보다 건축과 조각 양식이 훨씬 흥미롭다. 작가 자닉 뒤랑은 10년 넘게 루브로 박물관에서 중세 예술사를 주제로 강의했다. 텍스트 자체는 분량이 많지 않지만 구체적인 도판과 해설이 충실하기 때문에 중세의 미술사를 이해하는 데 적절하다. 특히 전공자가 아닌 나처럼 예술에 문외한에게 더더욱 적당하다. 단숨에 1권을 읽어버리고 2권을 주문하고 나서 다시 책을 뒤적이며 여운을 즐긴다.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보면 수도원에서의 미술품 생산화 조직화 과정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고 건축 장인조합과 길드의 역할을 참고할 수 있다. 중세의 건축물과 조각품 하나하나에 묻혀진 장인들의 손길과 그들의 예술혼을 어떤 고귀한 정신에 비유할 수 있을까. 예술품보다 먼저 그들의 삶에 숙연해진다.


  이 책은 단순히 시대별로 예술가들과 예술품들을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다. 문화사적 시각에서 사회경제적 흐름속에 놓이는 미술의 위치와 탄생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깊이 있는 책읽기가 가능하다.


  샤르트르 대성상, 랭스 대성당, 아미앵 대성당은 프랑스 고딕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로 고딕 건축의 파르테논 신전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직접 실물로 보고 싶은 욕망이 끓어오른다. 예술은 과거와의 대화다. 인류가 걸어온 시간을 더듬어 보는 떨림과 두근거림이 있고 인간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미에 대한 본질적 그리움을 달래준다.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그 안에 들어가 하루쯤 보내며 루앙의 대성당을 빛의 흐름과 시간에 따라 다르게 표현한 모네처럼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도 즐겁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으나 제대로 된 여행을 위해 책으로 만족하고 예술에 대한 안목이나마 높힐 수밖에 없다.


  ‘서양미술사’는 곰브리치가 워낙 막강하다. 하지만 프랑스 라루스의 서양미술사 시리즈는 또다른 방식으로 눈과 손을 즐겁게 한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분량과 한정된 도판 때문에 갈증을 배가 시킨고 객관적이고 잡다한 여러 지식을 나열하는 방식이 옳다고 볼 순 없지만 프랑스 중심의 서술이 간간이 거슬리기도한다.


  좋은 그림과의 만남을 준비하며 이렇게 기다리는 것도 내게는 의미 있는 일이다. 서양 중세를 산책한 오늘 하루는 여유로운 아쉬움을 남긴다.

 


200502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체 게바라 평전 역사 인물 찾기 10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인간에 대한 정체성을 규정하는 일은 무조건 오류다. 인간은 그렇게 한마디로 이해될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에르네스트 체 게바라’를 한마디로 이름 붙힐 수는 없다. 다만 그가 살아온 길과 방법들에 대해 들여다볼 뿐이다. 단순한 구경꾼의 의미를 넘어 진행형의 역사에서 그를 자리매김하는 것은 물론 독자의 몫이고 실천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1928년에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의학박사 출신으로 쿠바 혁명에 가담하여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게릴라전을 성공시킨 인물인 체는 그 후, 아프리카 콩고를 거쳐 볼리비아 혁명을 실천하던 중 1967년에 사망한다. 그의 나이 서른 아홉이었다. 스무살을 전후하여 그의 친구와 함께 남미를 여행하며 그는 사상의 기초를 마련한다. 이 여행 과정을 그린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가 국내에서도 얼마전에 상영되었다. 혁명전사 체는 열렬한 독서광이었다. 쿠바의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아바나에 입성할때까지 숱한 전장에서도 체는 책을 놓지 않는다. 책과 사람을 통해 세상에 대한 생각이 변화하고 그것을 실천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체는 그렇게 했다.


  “진정한 혁명가는 사랑이라는 위대한 감성에 의해 인도 된다”고 말하는 체는 단순히 공산주의자나 마르크스주의자로 규정할 수 없다. 지구상에 모든 이데올로기가 그렇듯이. 수정주의, 교조주의, 네오맑시즘, 해방철학, 유로코뮤니즘등 공산주의 분파들은 엄청난 차이를 드러내며 현실속의 이데올로기로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구소련의 레닌과 트로츠키, 중국의 마오쩌둥과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등 현실속에서 그들이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과 방법들은 개별적 상황과 현상속에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공존해왔다. 체의 사상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은 그래서 더욱 어렵고 위험하다. 플라톤의 ‘이념속의 현실’에서 발원한 공산주의를 마르크스의 이론으로 실천한 사람도 국가도 없다. 그래서 지금, 체의 사상적 기저를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내가 주목한 것은 체의 실천성이다. 쿠바 혁명 과정과 그 이후에 그가 보여주는 삶의 모습은 두려움은 느끼게 한다. 누가 생각한대로 살 수 있단 말인가.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장 코르미에에 의해 10년간 수집된 자료가 기초가 되었다. 체의 딸(일디타)과 청소년기의 꿈과 이상을 공유했던 친구 로베르토 그라나도의 도움으로 쿠바를 답사하고 많은 주변인들과 인터뷰를 통해 저술된 책이기 때문에 이 책의 가치는 더욱 크다. 객관적이며 방대한 서술로 체의 삶을 연대기식으로 들여다 볼 수 있으며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고 체의 편지와 일기를 삽입해서 사실감을 높혔다. 평전이 가질 수 있는 영웅적 서술과 신비감을 드러내기 위한 주관적 서술에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사례와 여러사람의 시각으로 한 혁명가를 분석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이 가진 미덕이다.


  20대에 공산주의자(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바보이고, 서른 넘어서까지 공산주의자인 사람도 바보라는 어느 프랑스인의 말을 떠올려 본다. 과연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 나아가 이 지구상에 펼쳐지는 점점 더 복잡한 양상을 띠는 세상을 위한 이념과 체제는 존재하는 것일까? 그것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냉정한 인식은 얼마나 필요한 것이며 그것은 어떤 형태로 내 삶의 모습에 반영되어야 할까? 나는 이제 서른이 훌쩍 넘어버렸고 마흔이라는 나이와도 만나게 될 것이다. 진보와 개혁을 외치는 모든 사람이 나이가 든다고 해서 보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듯이 자기 정체성과 실천의 문제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생의 뜨거운 화두가 된다. 사춘기를 넘어서면서부터 시작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작은 고민.

 

  베스트셀러와 유행에 대한 개인적인 거부감이라는 핑계로 이제야 탐독하게 된 책이지만 두고두고 가슴속에 오래 남을 만한 좋은 만남이었다. 체를 통해 느낀 것은 어쩌면 단순하고 당연한 논리이다. ‘사상의 종점은 행동이다’라는 명제. 항상 그것이 문제다. 그가 남긴 숙제 같은 한마디가 오래오래 가슴에 남는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우리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200502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꾸로 읽는 세계사 - 거꾸로읽는책 3 거꾸로 읽는 책 3
유시민 지음 / 푸른나무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주말이 되면 가끔 TV 리모컨으로 장난을 한다. 그러다 우연히 ‘도전 골든벨’이라는 프로를 가끔 본다. 파주의 한 여고생인 지관순은 이름만큼이나 특별하게 어려운 환경속에서 생활하면서도 역사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자신감과 희망을 잃지 않는 소녀로 소개 되었다. 골든벨을 울리게 한 마지막 문제의 정답이 ‘드레퓌스 사건’이었다. 역사에 관심이 깊거나 유시민의 베스트 셀러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읽은 것이 틀림없다. 그녀는 이제 역사학을 전공하는 여대생이 되었다. 언론을 통해 가끔 그녀의 소식이 전해지기도 한다.

88년에 초판이 나온 이 책은 열혈 지식인 청년의 지적 반항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신선했다. 95년에 개정판이 나온것을 2004년에 다시 개정판을 내놓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소련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졌고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고 독일이 통일 되었다. 이 역사적 사건들을 나는 TV화면을 통해 지켜보았다. 인류 역사의 현장에 가보고 싶은 욕망만 가지고 있다. 10년 안에 가볼 수 있을까?

제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의 10월 혁명, 히틀러, 팔레스타인, 4․19, 베트남 전쟁, 말콤X, 독일 통일들 굵직한 세계사의 단면들을 소개한 교양 서적으로서 의미를 갖는다면 이 책은 별 볼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저 상식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로 그칠 수도 있을 테니까. 역사에 관한 담론과 시선은 그 시각이 가장 중요하다.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없을 수도 있다. 유시민은 나름대로 ‘낯설게 바라보기’ 혹은 ‘뒤집어 보기’ 방법을 통해 세계사를 거꾸로 읽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역사적 사건들의 수용자세를 탓하기 전에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는 방식이나 관점들을 소개하는 책들이 더 풍부해지기를 기대해본다.

100분 토론 사회자를 거쳐 금배지를 달고 노빠 부대의 선봉에 선 유시민을 본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사회민주주의라 밝힌 바 있는 그의 행동과 변화들을 지켜보는 것은 불량스런 시선으로 한 인간을 관찰하는 음험함이 아니라 애정과 신뢰를 담아 보내는 우리 사회의 작은 도전과 실패이기도 한다. 그 작은 점들이 모여 선을 이루고 면을 이룬다면 3차원의 공간이 마련될 것이고 조금씩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는 건강성을 담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서로 다른 이념과 의견들이 받아들여지고 공동의 선을 위해 한 발 물러설 줄 아는 정치 풍토와 발전을 위한 토론과 인식의 전환, 잘못된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똥통에 빠져 허우적대는 정치인들의 몫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과 나의 책임이 아닐까 싶다

 

200503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