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크 - 21세기를 지배하는 네트워크 과학
알버트 라즐로 바라바시 지음, 강병남 외 옮김 / 동아시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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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론 그것을 구성하는 개별 실체(노드)들과 그 성질을 잘 알아야 한다. 하지만 이 개별적 실체들은 상호 연결(링크) 되어 있고, 이 연결들은 다시 하나의 연쇄 구조(네트워크)를 이루어 자체적으로 진화해 가며, 개별 실체들의 운명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내가 살고 있는 지구상에 대략 60억의 인구가 존재한다. 즉 60억개의 노드들이 존재한다. 지구상의 누군가와 나를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6단계만 거치면 된다. 그 단계는 고사하고 그 연결 고리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다. 정재승의 '과학콘서트'에서 케빈 베이컨 게임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내가 니콜 키드만이나 아프리카의 부시맨 추장을 알기 위해서는 6단계 정도만 거치면 아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믿기 어렵지만 그것은 여러가지 실험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반지름 6,400km의 거대한 지구위에 사는 우리는 그렇게 좁은 세상(small world)에 살고 있다.

네트위크란 용어에 이제는 우리 모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용어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 다만 21세기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네트워크를 물리학자인 바라바시처럼 학문적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현재나 미래 사회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통찰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 아닌가. 이 책은 모두 열 다섯개의 링크로 구성되어 있다. 무작위의 세계, 여섯 단계의 분리, 좁은 세상, 허브와 커넥터, 80/20 법칙, 부익부 빈익빈, 아인슈타인의 유산, 아킬레스건, 바이러스와 유행, 인터넷의 등장, 웹의 분화 현상, 생명의 지도, 네트워크 경제, 거미 없는 거미줄. 흔히 알고 있거나 익숙하게 들어왔던 문제들을 구체적이고 명쾌한 논리로 설명하고 있는 바라바시의 지적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또 그것들 전부를 네트워크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해석하고 분석할 수는 없겠지만 미시적 관점의 갇힌 시야가 아니라 넓고 큰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해 준다. 세상에 대한 밑그림의 구조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정말 세상은 넓고도 좁다. 그것은 주관적인 느낌이나 개인적인 활동영역에 따라 물론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점점 더 촘촘한 그물망처럼 우리를 조여오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것이 무엇이든 개인의 행복과 자유를 위해 기여할 수만 있다면 누가 마다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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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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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 老子 第25章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때때로 삶이 답답하고 그 해답을 찾고 싶을 때가 있다. 누구든 그럴 것이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무엇이 목표인지도 모른채 달리다가 어느날 문득 아득해지는 그 느낌에 대한 해결 방법은 없다. 먼저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얘기한다. 그것이 삶이라고. 아무도 누구도 그 해답을 줄 수 없기때문에 사람들은 그저 그게 삶이다라는 무책임한 말을 던져 놓고 떠나가는지도 모를 일이다.

수많은 동양 고전들이 인간에 대하여 그리고 그 인간이 관계맺고 살아가는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들을 전해 들을 수 있는 귀는 자신에게 있다. 켜켜이 먼지 앉은 수천년 전 성현의 말씀을 육화하는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방식과 자세에 따라 달라진다.

이십대 후반부터 40대 후반까지 20년 20일을 감옥에서 보내신 신영복선생님의 글은 어쩌면 그것이 올가미가 된다. 개인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읽게 된다. 그것은 옥살이 한 사람에 긍정도 부정도 아닌 그 시간들에 대한 숙연함이다. 시경, 서경, 초사, 주역, 논어, 맹자, 노자, 장자, 묵자, 순자, 한비자, 불교, 신유학, 대학, 중용, 양명학에 걸쳐 방대한 동양고전을 500페이지 책 한권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읽기 시작했다. 서론 부분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의 화두는 '關係論'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하여 사람과 사물, 자연,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가 이 책의 내용을 풀어가는 실마리가 된다.

周公曰 鳴呼 君子 所其無逸 군자는 무일(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서경에서 단 한 편을 고른것이 바로 이 周書의 '無逸'편이다. 깨어있는 자는 결코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는 얘기다. 알을 깨고 나오는 자의 수고로움이 있어야 날개를 얻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는 데미안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이와 같이 이 책에서는 각 고전 전체의 내용을 전부 읽고 해석을 달고 뜻을 풀이하는 주해서가 아니기 때문에 '관계론'이라는 화두를 통해 각 고전들이 전하고 있는 의미들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신영복선생님의 말대로 각 고전이 태어난 시대의 역사와 문화 사회적 배경과 사상사를 무시한채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불편함은 정신을 깨어 있게 한다는 의미로 읽히는 無逸을 내 생활의 반성으로 읽어도 좋겠지만.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평소 개인의 변화와 노력으로 이 사회가 조금씩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다. 저자의 이 말에 무릎을 치며 공감한 것도 바로 사회의 변화와 미래에 대한 관점의 탁월함때문이다. 무심코 던지는 이 질문에 대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있으며 지금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이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으면서도 고치지 못하고 과거의 잘못을 답습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부끄러운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내 안의 변화로부터 오다는 믿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의 변화를 인식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심은 좀처럼 풀기 어렵다. 알고 있더라도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論語에서 말하고 있는것처럼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知는 知人이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사람에 대해 안다는 것이고 그것은 인간과 인간에 대한 앎이다.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는 말은 바로 공자의 말은 인간 관계에 대한 변하지 않는 진리로 여겨진다. 평소 나도 즐겨사용하는 말이다. 己所不欲 勿施於人.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 얼마나 당연한 말인가. 정치를 하는 사람이나 기업을 하는 사람이나 평소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도 지켜지기만 한다면 나를 외롭지 않게 만들 수 있는 실천 방법이다. 하지만 쉬울수록 더 지키기 어려운 것이야 말해 무엇하랴마는.

목표의 올바름을 善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盡善盡美라 합니다. - 周易

觀於海者難爲水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이야기하기 어려워한다 - 孟子

한 권의 책을 읽으며 많은 부분들에 공감하고 감탄하며 부끄러워하다가 끄덕이다가 한숨 쉬다가를 반복하는 일은 드물다. 그것이 만화책이나 소설책이 아닐 경우는 더욱 그렇다. 신년벽두에 참 좋은 책을 만나 새해를 즐겁게 시작한다. 내가 서 있는 이 사회와 현실 속에서 무엇보다도 내가 관계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조금 다른 방법으로 인식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또 다른 많은 방법들과 만났다. 또 생에 대한 또다른 시선과 사유방식을 경험하며 이 책을 놓는다. 조금 더 깊이있는 독서와 사유를 통해 그 깊이와 넓이를 더해야 겠다. 노자의 좋은 구절 하나를 마지막으로 떠올린다.

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之 바다가 모든 강의 으뜸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더 낮추기 때문이다 - 老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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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을 넘어선 자본 리라이팅 클래식 2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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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단순히 돈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는 것은 무의미할 정도다. 누구도 사회구조와 경제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17세기 무렵 중상주의자들에 의해 부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절대군주의 국가에서 경제적 수단에 의한 연구가 경제학의 기초가 되어 애덤스미스에 이르러 정치경제학은 새로운 단계에 도달한다.

맑스는 이러한 청치경제학을 통해서 자본이 집적한 거대한 부의 본질이 바로 노동자들의 노동이라는 점을 보았으며, 바로 그러한 사실이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야기하는 요인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았다.

맑스의 자본(Das kapital)은 이러한 토대에서 생산된 최고의 저작으로 일컬어진다. '청치경제학 비판'에서 비롯되어 '자본'으로 완성된 그의 이론은 후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물론 맑스도 그가 처한 환경과 상황에서 헤겔의 이론을 수용하고 새로운 전망과 비판을 내놓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인간과 인간이 모여 살아가는 이 사회의 구조를 자본과 노동이라는 관점에서 경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미친 영향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자본'의 의미는 무엇인가? 현대 사회에서 결국 우리의 위치, 아니 나의 의미를 찾기 위한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거대한 자본의 힘을 절감하며 노동의 착취와 억압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갔고 다른 형태이기는 하나 맑스의 주장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체제 전복의 불온한 사상으로 매도되기 이전에 맑스의 '자본'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연구가 거의 불가능했던 우리 사회의 레드컴플렉스는 그 실체를 더욱 깊숙히 감추어 두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일반인들에게, 나처럼 무식한 노동자들에게 자본에 대한 거부감과 자본가에 대한 저항을 위한 이론적 무기의 역할만을 한다고 믿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처한 현실과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고 사회 현상들을 본질에 대해 고민할 재료들을 던져준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진경은 맑스의 자본을 넘어서 새로운 삶을 꿈꾸는 '현실적인 이행운동'이 자본주의 외부에서 무수히 창출되고 시도되기를 열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전은 '영원성'이 부여되어 현재적인 문제설정들에 일조하고 사유의 깊이를 제공하며 살아 숨쉬는 유기체의 역할을 해야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고전이 지닌 미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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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이덕환 옮김 / 까치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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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방학이 되면 충청도 시골 외가댁에 며칠씩 놀러가는 일이 큰 행사였다. 그저 평범한 시골이었지만 논과 밭이 있었고, 여름이면 물장난질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개울이 있었다. 뒷동산은 당연히 거기 있었다. 평범한 시골에서 큰 재미가 있는건 아니었지만 도시의 아이들이 느끼기에 충분히 새롭고 신선한 환경이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밤의 화장실이다. 집 뒤켠에서 멀리 떨어진, 그것도 언덕이랄것도 없지만 조금 낮은 지대로 내려가 있었던 화장실은 상상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헛간 한쪽에 엉성한 나무조각을 막아 놓은 재래식 화장실의 냄새와 공포 분위기는 상상 이상이다. 혼자 간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작은 볼일은 물론 마루의 요강을 이용했었다. 7, 80년대 시골 풍경이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건 시골의 밤하늘이다. 가로등 하나 없는 캄캄한 시골 마당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경외롭다. 쏟아질듯 반짝이는 그 별빛들은 15년쯤 후에 강원도 비무장지대 매복지에서 바라볼 때까지는 마지막이었으니까. 주변에 불빛이 없고 먼지가 없는 맑은 하늘은 별을 관찰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마루의 평상에 누워 했던 그때 생각들이다. 저 별빛은 어디에서 오는걸까? 하늘에는 얼마나 많은 별들이 있을까? 하늘밖에는 우주가 있다는데 우주의 끝은 있을까? 우주의 그 끝 밖에는 뭐가 있을까? 총명한 영재였다면 훌륭한 천체 물리학자가 되었겠지만 학교에서 암기식으로 주입되던 지구과학, 생물, 화학, 물리는 나를 완전히 환장하게 만들었었다.

아이들의, 아니 일반인들의 그런 사소한 호기심들을 재밌게(?) 풀어줄 수 있는 책이 있다.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다. 과학에 문외한이라고 밝힌 저자는 지구의 역사 크기, 우주에 관한 이론들, 인류의 기원과 생명의 신비로 부터 현재와 미래의 인간의 모습에 대한 반성까지 아우르고 있다. 과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론에 치중하기보다는 과학자들의 에피소드와 과학적 이론의 탄생과정과 정확성에 대해 알기 쉽게 풀어주고 있다. 학교에서도 이런식으로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하고 풀어줄 수 있는 방식으로 과학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랬다면 나도 과학을 재밌게 공부할 수 있었을텐데라고 핑게를 대본다.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주와 지구의 역사에서 보면 점으로도 표시될 수 없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과 호기심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정확한 해답을 얻을 수 없겠지만 과학적 관점에서 현재 나의 모습을 고찰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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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 시인선 291
나희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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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66년생이니까 올해로 불혹의 나이가 되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건 94년 가을이었다. 둥글고 까만 뿔테 안경을 쓴 짧은 커트 머리를 한 채 얼굴에는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오는 불빛의 따뜻함을'(산속에서)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따뜻하고 순수하며 생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연민과 사랑을 품고 있었다. 젊고 생동감 넘치는 20대였기 때문일까? 진명여고 국어교사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그녀를 두번째로 만난것은 2001년 봄이었다. 7년이 흐르는 동안 나도 그녀처럼 국어교사 되어 있었다. 네번째 시집으로 만난 그녀는 이제 나이가 들었다. 시가 탄력을 잃었다는 말이 아니다. 관점에 깊이가 더해졌다. 물론 시대도 변했다. '어두워진다는 것'에서 유성호는 '내가 아는 희덕은 그만큼 감성적일 때보다는 논리적일 때, 그리고 자기 표현적일 때보다는 자기 반성적일 때 더 투명하고 깊은 사람이다'라고 서평에 적고 있다. 논리적이고 반성적인 감각이 그녀의 진정한 미덕일까?

그리고 그녀의 다섯번째 시집으로 그녀를 세번째 만나다. '나희덕 시 세계의 진정한 장점은 구체적인 감각적 이미지의 현실성에 기초한 간명하고도 절제된 언어적 형식에 있는 듯 싶다'(김진수)라고 시집 서평에 적고 있다. 그리고 창비에서 문지로 출판사가 바뀌었고 약력에 보니 조선대 문창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녀의 외형적 조건들이 인식의 틀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 사소한 조건들, 예컨데 시인의 나이와 직장, 가정 생활의 변화 등이 시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소설보다 훨씬 더 사적이고 감각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물론 객관화된 인식과 논리적 힘이 결여된 시를 읽을 사람도 없겠지만 관념 속에 허우적대거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는 이성의 영역으로 함몰될 위험을 배제할 수도 없다. 순수시의 죽음을 선포할만한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오랫만에 만난 그녀의 모습을 나는 씁쓸하게 바라본다.

시의 역할과 소명을 논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미지가 감각적일 지는 모르나 현실성에 기초했다고 보기엔 그 의미와 영역이 너무나 협소하다. 어쩌면 사적 경험의 객관화가 시의 본질이 아닐지도 모르겠으나 논리의 모순보다도 더 위험한 감동의 위축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땅 속의 꽃

땅 속에서만 꽃을 피우는 난초가 있다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기 때문에
본 사람이 드물다 한다
가을비에 흙이 갈라진 틈으로 향기를 맡고 찾아온
흰개미들만이 그 꽃에 들 수 있다
빛에 드러나는 순간 말라버리는 난초와
빛을 피해 흙을 파고드는 흰개미,
어두운 결사에도 불구하고 두 몸은 희디희다

현상되지 않은 필름처럼 끝내 지상으로 떠오르지 않는
온몸이 뿌리로만 이루어진 꽃조차 숨은 뿌리인


이 시집의 마지막 시를 보며 그래도 그녀와의 다음 만남을 기약한다. '사라진 손바닥'이 '꽃조차 숨은 뿌리'가 되었기 때문이며, 땅 속에 숨은 꽃조차 꽃은 아름답다는 당연한 명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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