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소시오패스의 사정 앤드 앤솔러지
조예은 외 지음 / &(앤드)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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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가 촉발한 ‘무의식’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현대인의 말과 행동은 ‘이해’와 ‘오해’를 넘어 ‘분석’과 ‘해석’의 대상으로 탈바꿈한 지 오래다. 타인은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이 속담처럼 인용되지만 근대가 탄생시킨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영역, 자유의 한계, 평등의 기준은 여전히 논쟁적이다. 대접받고 싶은 대로 타인을 대접하라는 금칙은 ‘타인’의 재산, 권력, 성별, 직업, 나이 등에 따라 달리 적용된다. 타인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하며 타인은 오로지 오해의 대상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아도 우리는 항상 진상, 빌런, 벤(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과 함께 산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다면 바로 당신이 ‘그’라는 경고는 모골이 송연하다. 흔히 그를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라 부른다.

둘의 차이는 정신분석학이나 의학적 관심의 대상이니 현실 혹은 소설의 캐릭터를 구별할 필요는 없다. 반사회적 인격장애 정도로 해석되는 소시오패스는 선천적이고 충동적이며 공격적인 사이코패스보다 덜 위험하지만 후천적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25명 중 하나, 전체 인구의 4%가 가정과 사회적 환경에 따라 소시오패스가 될 수 있다는 건 흥미로운 진단이며 심각한 현대인의 질병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혹은 이웃과 동호인 중에 반드시 ‘그’가 있다. 우리는 소시오패스와 함께 산다.

앤솔로지 『이웃집 소시오패스의 사정』에는 다섯 명의 소시오패스가 등장한다. 인터넷 게시판을 만들어 익명의 소시오패스를 소개하는 코너를 만들면 소설보다 흥미로운 사례가 넘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직업별로 살펴보면 정치인이 소시오패스 비율이 가장 높지 않을까. 사회면 뉴스에 소개되는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범죄자와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 화제가 되는 소시오패스는 일일이 떠올리기도 어렵다. 오로지 제목에 이끌려 선택한 책 한 권을 읽는 동안 현실에서 만난, 간접적으로 경험한 실존 인물들이 떠올랐고, 그들에 비하면 소설 속 소시오패스들의 말과 행동은 애교 수준으로 느껴질 만큼 오히려 현실이 더 참담하다.

소설같은 현실을 외면할 수 없고, 개연성 없는 픽션은 취향과 거리가 멀어 SF나 장르 소설에 몰입하기 어려운 개인적 취향이 문제일까. 아니, 다이내믹한 대한민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다가올 미래가 소설보다 현기증을 유발하기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 본다. 요즘 유행하는 MBTI는 인간을 16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4가지로 규정하는 혈액형보다 세분화한 듯 보이지만, 사실 E/I, S/N, T/F, J/P처럼 양자 택일에 가깝다. 문제 해결problem solving이 중요한 T 성향은 대개 남성, 정서적 지지emotional support가 우선인 F 성향은 여성들의 속성에 가깝다. 상황과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지만 일반적 성향은 비율이 큰 쪽을 선택하는 흑백 논리를 강요한다. 자연스럽게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의 비율이 높은 MBTI가 궁금해서 검색했다. 확률과 통계 그리고 편견은 어떤 식으로 작동할까.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확인하시길.

앤솔로지는 출판사와 작가에게 각각 장, 단점이 있다.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들이다. 독자 입장은 조금 다르다. 옴니버스 영화처럼 뷔페를 즐기는 독특한 매력이 있으나, 작품마다 차이가 심할 때는 불편함도 크다. 책임 분산 효과라고 하면 지나치겠으나 소설가의 역량이 확연히 구별된다. 영화나 드라마의 옥의 티처럼 세심하지 못한 실수가 아니라 상식에 벗어난 설명과 구성은 독자를 황당하게 한다. 특정 장면을 소개하고 싶지는 않다. 습작은 습작으로 끝내야 한다. 자꾸 고친다고 완성도가 높아지진 않는다.

반면 “설득보다 속이는 게 쉽고, 속이는 것보다 죽이는 게 더 편하다.”라는 클리셰 같은 문장을 훌륭하게 변주한 「없는 사람」처럼 구성과 내용이 모두 흥미로운 단편을 만난 즐거움을 놓칠 수는 없다. 다섯 편의 소설에는 소시오패스, 나르시시스트, 히키코모리, 경계선 인격장애, 리플리증후군, 사이코패스 등 다양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농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들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또 그들의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게 아닌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흥미로운 사건과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단편을 쓰는 건 어느 작가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장편보다 단편이 주는 재미를 찾는 독자도 많다. 앤솔로지 소설집이든 장편소설이든 유튜브와 짧은 영상이 범람하는 시대의 작가들에게는 만만치 않은 작업일 듯싶다.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작가들에게 응원과 박수를 보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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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가 바꾼 역동의 세계사 - 강대국을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폴 몰런드 지음, 서정아 옮김 / 미래의창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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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의 결과는 다양하고 지속적이며 심층적이지만 그 원인 역시 마찬가지다. - 19쪽

2023년 출생아 수는 23만 명으로 2022년에 비해 7.7% 감소했다. 인구 절벽이라는 표현에 걸맞은 현실이다. 1959년~1971년생은 동갑내기가 100만 명이 넘는다. 그들은 이제 은퇴 시기를 맞는다. 대한민국은 급격하게 늙는 중이다. 결혼, 육아, 주택, 사교육, 연금, 노후를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개인은 아무도 없다. 각자도생을 위한 몸부림조차 무의미해지는 시대를 맞았다. 정부의 대책, 사회적 책무, 개인의 선택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는 듯하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걷어차며 세습 자본주의를 공고히 하는 세상에서 결혼과 출생은 곧 특권이 될 수도 있다. 누가 감히 이 험한 세상에서 행복을 꿈꾸는가. 디스토피아를 예견했던 숱한 소설과 영화는 미래에 대한 경고로 그치지 않고 현실이 되고 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폴 몰런드의 ‘The Human Tide’(『인구가 바꾼 역동의 세계사』)는 제목으로 인해 오해받기 쉬운 책이다. 이 책은 역사책이 아니라 심각한 사회과학의 한 분야로 정치, 경제, 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다뤄야 할 인류학의 보고서다. 지나간 역사로 한정하거나 치부될 수 있는 ‘세계사’라는 협소한 제목이 안타깝다. 오랜만에 누구에게나 권하고 싶은 좋은 책을 만났다. 새로운 관점, 알지 못했던 정보, 현실 적용 가능성, 실천과 변화를 위한 고민이 모두 담겨 있어 직업, 나이, 성별, 세대와 무관하게 진지하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인구’는 역사적 사건과 문명사의 변화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변화를 이끌고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추동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인과관계를 뒤바꿔 생각했던 편견을 버리자. 거대한 인구 물결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출생과 사망, 결혼과 이주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 있는 한 인구는 역사의 경로를 결정할 것이라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인구는 밀물과 썰물처럼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해왔다. 인구 물결 혹은 인구 전환은 언제나 중요했고 앞으로도 중요할 예정이다. 물론 인구가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인구의 변화와 흐름이 인류 문명사의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는 동안 특별한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의 삶에 주목하게 된다. 그들은 바로 우리들이다.

폴 몰런드는 출산율 하락의 원인으로 ‘경제 발전, 여성 문해율 상승, 도시화’을 꼽는다. 아이를 낳지 않고 사는 사람도 많은 시대에 인구 문제는 못 배우고 가난했던 시절의 이야기로 치부될 수 있으나 자연스러운 인구 감소가 초래할 미래는 밝지 않다. 인위적으로 인구를 늘리자는 대안과 거리가 먼 이 책은 앵글로색슨인, 독일과 러시아, 1945년 이후 서구와 동구권, 일본, 중국, 동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까지 지구 곳곳의 인구 변화와 그 영향을 톺아본다.

부록으로 수록된 기대수명, 합계출산율 산출 방법을 알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의미를 간과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의 인구 소멸은 괜찮은지,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지, 장기적인 대책은 무엇인지 묻는 듯하다. 인구 문제는 정부에만 맡겨놓기에는 너무 중요하지 않은가. 아이는 온 마을이 키워야한다는 오래된 금언을 되새기며 출생, 육아, 교육, 취업, 주택, 연금, 노후 문제까지 폭넓게 전 생애의 과정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행복한 삶이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으로 읽힌다. 어쩌면 이 책은 미래의 꿈과 희망에 대해 묻고 있는건 아닐까.

인구 고령화와 인구 후퇴를 겪는 일본의 상황을 반면교사 삼지 않으면 우리 역시 같은 길을 걷게 된다. 아니 이미 그 길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는 오래된 미래다. 단순히 옛날엔 그랬었지 정도의 회고담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하고 직접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인구’의 안부를 물을 때다. 저자는 단순하고 일원론적이며 결정론적 역사관을 내세우지 않는다.

오지 않는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현재를 즐기며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는 토닥임에 현혹될 때가 아니다.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안목 없이 원빈처럼 오늘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니들은 내일만 보고 살지.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미래에 어떤 일이 기다리든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다. 과거에 그러했듯이 인구와 인류의 운명은 앞으로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을 것이다. 출생과 사망, 결혼과 이주가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 있는 한 인구는 역사의 경로를 결정할 것이다. - 4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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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9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종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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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는 두 민족(이스라엘-아일랜드)의 서사시인 동시에 인체의 순환이자 하루(생활)에 대한 작은 이야기입니다. - 제임스 조이스가 쓴 ‘편지’ 일부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죽는 순간 자기 삶의 모든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친다는데, 그중 몇 권의 책이 마지막 순간에 떠오를까. ‘가장’ 인상 깊었던, 재미있었던, 감동적이었던 책을 아직 잘 모르겠다. 모든 순간에 각각의 깊이와 속도로 몰입했던 책들 사이에서 언제나 길을 잃거나 오솔길을 발견한 듯하다.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는 각각의 나무 사이에는 틈이 있다. 그 틈 사이로 빛이 들거나 알 수 없는 검은 침묵이 놓여 있다. 질문에 답하지 않는 작가, 고통스런 외침을 외면하는 저자, 갈급하게 새 책을 뒤적이게 하는 문장, 멍한 눈길로 푸른 하늘만 쳐다보게 했던 시인을 떠올릴까.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새로운 것이 승리하는 것을 도와주는 가장 확실한 중개자는 옛것에 대한 지루함”이라고 선언했다. 사진기와 영화가 예술가와 작가들을 불안하게 했을까. 아우라가 사라지기 시작한 위기의 시대에 에피파니를 경험한 제임스 조이스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통해 소설의 위기를, 아니 예술의 종말을 예감했을까. 죽기 전에 읽지 않아 못내 아쉬웠던 책의 목록에 남겨질 뻔한 책들을 이제 하나씩 만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율리시스』다.

그러나 읽었다,라는 독서 경험 외에 무엇이 남았을까. 소설의 역할과 기능을 떠나 재미와 감동이라는 본질적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문학 작품들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기 어렵다. 단순히 어렵다거나 이해되지 않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개별 독자들을 설득할 명분에 관한 이야기다. 문학사에 남긴 뚜렷한 영향은 대개 이후에 등장하는 작가들에게서 그 흔적을 찾기 마련이다. 낯설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소설가와 시인에게 오스카 와일드의 말대로 “일관성은 상상력 없는 자들의 마지막 피난처”라고 하니 옛것에 대한 지루함을 견디고 상상력을 발휘한 작가들의 ‘고전’은 보편성을 확보하거나 충격적일 만큼 새로워야 한다. 이 책의 명성에 걸맞은 편견을 걷어내고 읽어보자. 누구나 곧 잠이 들 것이다.

『율리시스』 출간 102주년, 완독 후에 감상은 ‘이 소설을 읽은 독자보다 이 책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는 농담으로 대신하고 싶다. 연구자들을 위한 소설이란 다양한 문학적 실험들, 상징과 비유로 가득한 표현과 언어유희, 반영론적 관점에서 살펴야 하는 장치와 비교문학의 요소 등이 포함된 작품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한 권의 소설로 학위를 받을 사람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겠다. 제임스 조이스가 스스로 “끔찍한 괴물소설”이라 불렀던 이 소설은 평행이론으로 시작해야 한다.

해설에서 이종일은 이를 ‘호모 평행’이라고 명명한다. 그리스 고전 《오디세이아》와의 유사성은 제목, 구성, 인물 등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을 읽으려는 독자는 ‘호모 평행’으로 풀어 놓은 각 장에 대한 해설과 등장인물부터 읽는 것이 좋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단 하루에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다.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통해 순간을 포착한 작가의 눈에 매료되거나 그 미친 디테일과 치밀한 묘사에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침을 흘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블룸과 그의 아내 몰리, 친구 스티븐을 중심으로 집을 떠나 방황하다 귀가하는 원점 회귀형 혹은 여로형 구조를 간파하기도 어렵다. 정확한 시간과 동선은 해설을 통해서야 겨우 파악했기 때문이다. 열여덟 개의 장은 각각의 에피소드로 기능하면서도 부분으로서 전체의 일부를 이룬다. 1장 텔레마코스부터 18장 페넬로페까지 각 장의 제목은 오디세우스의 경로를 따라간다. 블룸과 몰리 그리고 스티븐이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 그리고 텔레마코스에 대응하는 듯하지만 무작정 ‘호모 평행’을 따라가면 이 소설을 고전 패러디에 불과한 작품으로 읽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어쨌든 소설의 흐름은 ‘시간’의 축 위에서 벌어지는 개별적 사건으로 유기적 결합 없이 파편화된 종말에 이른다. 그 결말은 어떤 의미도 추측도 가능하지 않은 ‘무의미의 축제’처럼 여겨진다.

어쩌면 한국의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문학 시간에 배웠던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떠올릴지 모르겠다. 《천변풍경》등 당대 현실을 그대로 담아 고현학考現學이라 할만큼 마치 사진처럼 풍경을 담아냈던 박태원이 이 소설을 완독했는지 확인할 수 없으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어차피 소설은, 아니 작가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분석과 해석에 천착할 뿐이다. 현실을 추동하는 힘을 가진 리얼리즘 문학이 없지 않으나 대개 독자는 변화와 실천이 아니라 불가해한 삶의 이면, 그 진실을 파악할 수 없는 인간 삶의 부조리를 위로받기 위해 책장을 넘기는 게 아닌가.

그런 면에서 읽는다면 제임스 조이스가 시도한 거의 모든 형식적 실험과 잡학다식한 내용으로 독자의 의식을 무아의 경지로 풀어놓고 무의식의 세계를 따라가는 ‘재미’를 느끼는 변태같은 독자가 없지 않겠다. 각 장마다 주요 인물의 내면 독백은 의식의 흐름을 따라 전개된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은 없다. 사건의 유기적인 결합은 기대하지 마시라. 작가의 불친절한 서술로 인해 독자들의 혼란은 가중되고 등장인물의 복잡한 내면세계는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낯설게 보고 새롭게 만들기 위한 조이스의 노력은 헛되지 않기에 독자들은 1400쪽 모두 읽기 전에 책을 던져버리거나 숙면의 밤을 맞을 것이다. 그렇게 읽다만 『율리시스』를 책장에 꽂아두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만한 기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는 대의에 충실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항상 실패한 대의에 충실했어. 교수가 말했다. 우리에게 성공이란 지성과 상상력의 죽음이야. - 1권, 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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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못하는 사람들 - 우리의 인간다움을 완성하는읽기와 뇌과학의 세계, 2024 세종도서
매슈 루버리 지음, 장혜인 옮김 / 더퀘스트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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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언 울프의 『다시, 책으로』(Reader, Come Home, 2018년)보다 『책 읽는 뇌』(Proust and the Squid: The Story and Science of the Reading Brain, 2007)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10여 년 만에 원제 그대로 『프루스트와 오징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인간의 뇌는 책 읽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책을 읽고 싶지 않은 건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독서는 본능에 반하는 훈련과 노력의 결과물이다. 뛰어난 창조성을 발휘해서 탁월한 성과를 거둔 토마스 에디슨, 레오나르도 다 빈치, 앨버트 아인슈타인, 로댕, 앤디 워홀, 피카소, 안토니오 가우디 같은 천재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들은 모두 ‘난독증’ 환자였다. 매슈 루버리는 『읽지 못하는 사람들』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읽기와 뇌과학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역설적으로 포스트 텍스트 시대를 위한 준비에 해당한다.

모든 학문적 성과가 그러하듯, 이전 시대의 누적된 연구 결과가 출발선이다. 인류문명이 단기간에 눈부신 발전은 거듭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축적된 뇌과학의 연구 성과 인간의 읽기 과정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상세하게 다룬다. 잘 읽는 비법을 찾아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판에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까. 저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보면 그 이유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 난독증, 과독증, 실독증은 일종의 병리 현상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고 그 원인을 제거하면 다시 읽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공감각, 환각, 치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경질환 때문에 활자를 접할 때 문제를 겪는 독자들의 증언이 생생하다. 이들은 읽지 않는 게 아니라 읽지 못하는 것이다. ‘의지’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는 자기계발에 관심을 둔 사람이나 학습력 증진이 필요한 학생과 학부모에겐 논외다.

그러나 이해comprehension는 해독decoding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분석과 활용은 개인적인 소화 단계로 고급 독자들에게 주어지는 자연스런 선물이다. 흥미를 끄는 하나의 증상은 일반인들로 가당치도 않은 능력을 보여주는 서버트증후군이다. 사진을 찍듯 책을 암기하는 사람, 메모리칩처럼 책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 등 책 읽는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능력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책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 과유불급. 중용은 기준과 서 있는 자리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적당히’, ‘쉽고 재미있게 잘’하는 방법이다.

문해력에 관심이 모인다. 한자어가 우리말의 일상어 중 33%, 전문어는 60%가 한자어다. 물론 고유어도 고역이다. ‘심심한 사과’, ‘명일 회의 시간’, ‘사흘 후까지 보고서 제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일상생활이 어렵지는 않다. 단톡방에서 오가는 말을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살피는 동안 오히려 읽을 수 있는 사람들, 읽지 않는 사람들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플레시는 읽기를 ‘특정 글자를 조합해 의미를 얻는 것’이라 정의했고, 메리언 울프는 “글로 쓰인 언어를 해독하고 이해하는 행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지각적 ․ 인지적 ․ 언어적 ․ 정서적 ․ 생리적 과정”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일기를 ‘활자에서 유도된 사고의 형태’라고 확장한다.

‘독서’가 아니라 왜 ‘읽기’인지에 대한 고민과 『읽기의 미래』를 조금 일찍 고민한 사람들도 있다. 미디어리터러시의 바탕은 무엇일까. 비판적 읽기가 가능하려면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왜 읽지 못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게 아닐까. 다소 학술적인 용어와 사례 중심의 책으로 ‘노잼’ 등급으로 판정할 수 있으나 대개 잠시 출간되었다 사라지는, 많이 팔리지 않은 책들 중에 보석같은 책들이 너무 많다. 옥석을 가리는 안목은 독자의 능력이겠으나 각자 읽는 목적과 이유가 다르니 아무 책이나 ‘추천’ 딱지를 붙이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이 책의 마무리 ‘나의 방식으로 읽고, 살고, 나아갈 것’이라는 말은 ‘읽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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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격차 - 평등한 사회에서는 가난해도 병들지 않는다
마이클 마멋 지음, 김승진 옮김 / 동녘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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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말하면 ‘권력, 돈, 자원의 불평등이 피할 수 있는 건강 격차의 근본 원인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 229쪽

신문(언론)의 리드는 기사의 첫 문장이다. 눈에 띄는 제목(핵심을 전달하는 단어와 사건의 요약이 아닌 자극적 황색 저널리즘의 낚시용 제목과 다른)과 부제에 이어지는 기사의 첫 문장은 삼각형으로 수박을 따보던 시절의 추억처럼, 탑-다운top down 방식으로 사건을 들여다보는 구조다. 역삼각형으로 디테일에 접근하는 방식이니 어디에서 멈춰도 기사의 핵심을 파악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책은 어떤가. 단 마이클 마멋은 건강 격차의 근본 원인이 권력, 돈, 자원의 불평등 때문이라는 한 마디를 던져 놓고 이 책을 시작하지는 않는다. 아니 어떤 책의 저자도 첫 문장에 목숨 거는 경우는 많지 않다. 소설이나 시의 경우는 조금 다르기도 하다. 우리가 기억하는 숱한 고전의 첫 문장을 사골처럼 우려먹으며 곱씹는 경우도 많지만 대개 한 권의 좋은 책은 유기체와 같이 부분의 합이 전체 볼륨을 넘어선다. 물론, 좋은 책과 나쁜 책의 기준도 각자 다르겠으나 일반적인 경우에 그렇다는 의미다.

책 첫머리에 붙은 의사의 추천사를 잠시 들여다보자. “건강의 문제가 단순히 의료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결정 요인의 문제라는 점을 일깨우는 책이기에 나이들수록 좁아져 가는 의과대학생들의 시각을 넓히는 광각렌즈 역할도 할 것”이라는 강영호의 추천의 말은 얼마나 나이브한가. 추천사에 시비 걸 생각은 아니지만 ‘나이들수록’이라니...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학생과 학부모의 목적과 기대 혹은 현재 벌어지는 이기적 행태를 온 국민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그들이 가진 직업 윤리, 사회적 관점은 어렵지 않게 짐작 가능하지 않은가. 그래서 “건강은 의사들에게만 맡겨 두기에는 너무나 중요하다.”(43쪽)라는 저자의 일갈에 오랫동안 눈길이 머문다.

몸이 계급이다. 각자의 건강과 몸 상태가 직업, 소득, 교육 정도, 생활 환경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계급과 불평등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굳이 통계를 통해 확인할 필요도 없다.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부자들이 건강하고 선진국이 오래 산다. 예를 들어, 2012년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전 세계 평균 기대수명 70세에 도달했다. 그러나 시에라리온(46세)과 일본(84세) 사이의 격차는 38년이다. 평균의 함정. 대한민국에서도 지역별, 소득별 격차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건강 불평등은 결국 권력, 돈, 자원의 불평등을 증명한다.

인구, 교육, 취업, 주택, 연금, 노년 문제와 같은 맥락에서 개인의 선택과 노력 ‘탓’으로 돌리면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모든 게 구조적 모순이나 사회적 안전망과 복지로 해결 수도 없다는 걸 몰라서 이 책을 뒤적이는 독자도 없으리라. 그래서 저자는 근거 기반 낙관주의를 내세운다. 스스로 ‘낙관증, 선별적 청각장애증, 안구수분과다증’ 환자라고 주장하는 저자의 아재 개그는 심각한 내용을 중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상은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차이다. 소득 불평등과 건강 불평등의 원인을 해소하는 대신 격차를 공고히 하려는 정책과 이념들이 사회적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이 아닐까. 2008년 금융위기에 대처하는 아이슬란드와 아일랜드의 상반된 IMF 대처법에 관한 이야기가 이를 증명한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며 어디를 향해 걷고 있을까.

차례를 살펴보면 사회학 교과서와 다름없다. 공정, 평등, 교육, 노동, 노년, 지역공동체, 희망 같은 말들을 건강과 결합시켰을 뿐이다. 광범위한 주제와 근거 자료들로 인해 거대한 사회학적 보고서처럼 읽히지만 결국 공정한 사회(9장), 공정한 세계(10장), 희망을 조직하는 사회(11장)를 향한 기나긴 여정이다. 모임에 참석한 12명의 사회인의 관점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사회계층적 경사면에 대한 원인, 상대적 박탈감, 여성 건강, 빈곤 지표에 대한 생각들이 조금씩 차이가 났다. 해법을 찾기 위해서는 문제를 인식하는 단계가 먼저다. 문제가 없으면 해결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원인의 원인은 무엇인지에서 시작해서 의료 보험, 노인 빈곤, 의사 파업 등 우리가 사는 세상 이야기와 현실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3개월간 이어진 몸/건강에 관해 함께 걸으면서 나눈 이야기들은 또 어떻게 우리 몸에 그 흔적을 남겼을까. 그 과정에서 각자의 생각과 고민은 조금 풀리거나 증폭되거나 혼란스워질 것이다. 한 권의 책은 또 다른 책을 읽게 할 것이며 그 변화와 성장이 어제와 나와 조금 다른 나로 성장시키는 동력이 될 뿐이다.

저자는 지속가능한 발전에는 경제 ․ 사회 ․ 환경, 세 가지 균형이 필요하다는 말로 책을 마무리한다. 우리는 지속 가능한 건강과 지속 가능한 행복과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해 잘 살고 있을까. 잘 산다는 말의 의미가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그 다양한 차이가 또 다른 책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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