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서스 - 석기시대부터 AI까지, 정보 네트워크로 보는 인류 역사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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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정보가 신이 된 세상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호모 데우스』와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으로 현재와 미래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연결’, 즉 상호 접속된 네트워크를 의미하는 『넥서스nexus』는 컴퓨터와 AI가 만나는 네트워크 세상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진실이 사라진 시대, 기존 질서가 무너지는 현실을 날카롭게 분석한 역사학자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입니다.

아날로그 시대와 달리 지식과 정보는 특정 계층이나 지식인, 전문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접근이 가능한 공공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네트워크로 촘촘하게 연결된 세상에서 정보는 더 이상 지혜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같은 현실에 대한 경고와 우려를 담아 현실을 살피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역사, 즉 과거를 통해 현재의 문제점을 살피고 예측 가능한 미래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인터넷으로 연결된 네트워크와 AI로 인해 달라질 세상에 대한 고민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쉽게 답을 얻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좋은 책은 정답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물음표를 남깁니다. 호기심과 질문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비판적 사고력을 기르지 않는다면 글쓴이의 생각에 쉽게 동의하며 누군가 정해준 길을 걷게 됩니다. 유발 하라리는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대신 현상을 분석하고 그 원인을 꼼꼼하게 살핍니다. 대안과 해결은 책을 읽는 독자의 몫입니다. 미래는 개별 독자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 구성원들의 대화와 합의를 통해 함께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논쟁과 토론이 가능한 책은 지식의 축적 수단이 아니라 현실 개선의 도구로 기능합니다.

과학기술의 미래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벌어지는 변화와 위협을 극복하며 조금 더 나은 세상으로 한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은 정치인과 전문가에게만 맡길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평범한 시민들이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문제의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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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온 미래 - AI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
장강명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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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 2003년, 작가 윌리엄 깁슨이 한 말입니다. 과거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고, 현재를 통해 미래를 전망한다는 연속적 시간 개념에 익숙한 우리에게 미래가 이미 와 있다는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물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사람마다 미래에 도달하는 시간은 차이가 있겠죠. 누군가는 미래를 준비하고 만들어 가지만, 누군가는 현실에 적응하기도 버겁습니다. 점점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오늘 하루를 버티기도 힘겹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미래를 위해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2025년의 화두는 여전히 인공지능입니다. 10여 년 전부터 예측했던 미래가 이제 현실이 되었습니다. 생성형 AI에서 에이전트 AI로 넘어가는 단계라고 하니 곧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리적 형태를 갖춘 AI가 상용화될 겁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생활에 스며들어 조금씩 그 영역을 확대하는 인공지능의 미래는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필수가 된 인공지능, 그 활용 여부와 가치 판단에 관한 논쟁을 시작해야 합니다.

2016년 3월 9일은 특별한 날입니다. 알파고AlphaGO가 전 세계 바둑 일인자 이세돌 9단을 이긴 날이며, 동시에 불가능해 보이는 인간의 영역으로 인공지능이 진입한 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지 바둑 팬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당시 생중계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충격이 생생합니다. 체스와 달리 바둑은 경우의 수가 거의 무한대에 가까워 인공지능이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건 착각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소설가 장강명은 프로 바둑 기사 수십 명을 인터뷰하며 수천 년 동안 이어온 바둑의 전통과 역사를 살피며 과거와 현재를 돌아봅니다. 신문기자였던 저자는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 객관적 사실을 확인하고 기록합니다. 인공지능이 바꿔버린 현실, 아니 먼저 와 버린 미래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르포르타주가 훌륭합니다.

마치 디스토피아 SF의 도입부처럼 인간만이 펼칠 수 있는 예술이자 스포츠라 믿었던 바둑의 세계가 무너진 현실은 AI 이후 세계의 축소판 같아 보입니다. 바둑뿐만 아니라 문학, 음악, 회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와 같은 고민은 연쇄적으로 발생하며 논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인공지능의 역할과 인간적인 삶의 의미일 것입니다. AI와 함께 살아갈 인류는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직로와 직업을 고민하는 청소년부터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청년세대는 물론 불안한 노후를 맞아야 하는 중장년층까지 AI는 희망과 기대보다 아직도 불안한 미래의 상징처럼 여겨집니다.

때때로 과학기술의 진보는 조금 더 공평하고 평평한 세상을 만들어 줄 거라는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인간에 대한 믿음, 변하지 않는 가치들이 모두 사라지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AI로 인해 급변하는 현실은 목적도 없고 방향을 잃은 채 흔들리며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장강명은 이런 상황에서 AI를 향한 불안과 공포 대신 인간적인 삶의 방법과 태도를 묻고 있는 듯싶습니다. 특히 9장 ‘가치가 이끄는 기술’과 마지막 10장 ‘인공지능이 아직 하지 못하는 일’은 저자의 고민과 생각이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먼저 시선을 돌려 깊이 들여다보고 관찰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 후에야 비로소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태도를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올바른 선택을 위해 중요한 자세입니다. 그리하여 읽고 쓰는 삶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먼저 온 미래를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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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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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것, 항상 알았던 것,

피할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은

옷장만큼이나 명백하다.

한쪽은 사라져야 한다.

필립 라킨, 「새벽의 노래Aubade」

창밖에 가을이 당도했다. 계절의 한쪽인 여름이 사라졌다. 가을도 명백하게 스치고 지나간다. 유발 하라리의 지적대로, 인간은 상상의 질서를 받아들여 정교한 제도와 규범을 만들었고, 이야기에 ‘환장’하는 본능이 문명발달의 초석을 만들었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 혹은 쏟아지는 빗줄기와 잿빛 하늘이 만든 풍경은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지배한다. 어디 그뿐인가. 별이 바람에 스치우기도 하고, 길섶에 핀 꽃 한 송이에 눈길이 가기도 한다. 무엇을 먹고 어디를 바라보며 걷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은 제각각 완강한 희망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진다.

『이토록 사소한 것들』이 마음에 들어 클레어 키건의 책을 한 권 더 읽었다. 『너무 늦은 시간』은 3개의 단편을 묶은 소설집이다. 창작 연도와 무관하게,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클레어 키건은 ‘여성’ 문제를 수면 위로 떠올리고 때로는 표면 아래에 둔다. 표제작 「너무 늦은 시간」은 결혼을 앞둔 카헐과 사빈의 이야기다. 여성 혐오는 ‘차별’의 카테고리 안에 있다. 관점과 시선이 바뀌지 않으면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다. 어떤 대상과 개념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사람보다 그것이 자기 신념 혹은 진심인 사람은 당해내지 못한다. 대개 정치와 종교가 그런 분야다. 하지만 사회에서 벌어진 질서와 규범 문제는 이들이 지켜야 하는 마지노 선이다. 우리는 여전히, 아니 영국도 옛날부터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 건 아닐까. 신생국 미국도 다르지 않다.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은 하인리히 뵐 하우스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선정된 여성 작가의 이야기다. 한국 단편 중에서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의 경험을 다룬 작품이 여럿이다. 창작의 고통, 그곳의 에피소드, 작가의 사유와 창작 과정 등을 살필 수 있어 색다른 느낌을 주기도 한다. 클레어 키건은 특별히 교훈을 담거나 진지한 성찰로 독자들에게 반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무심한 장면과 객관적 시선으로 여운을 남긴다. 판단은 읽는 사람의 몫으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집을 떠날 때마다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남극」의 첫 문장이다. 일탈을 꿈꾸던 가정주부의 호기심이 비극을 만든다는 교훈은 물론 아니다. 사랑과 욕망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그것은 남녀의 권력관계로 해석하거나, 기울기가 다른 감정의 불균형으로 다루는 클리셰도 아니다. 물리적 힘의 차이, 사랑하는 방식과 태도의 개별성 문제에 기인한다. 그것을 남성 혹은 여성으로 일반화할 수 있을까. 그렇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깊은 논쟁과 토론이 가능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만 쉽게 결론에 도달하긴 힘들어 보인다.

안온한 일상, 별일 없는 하루, 평화로운 인생을 꿈꾼다면 소설은 언제나 강 건너 불구경, 내가 겪지 않아서 좋은 슬픔, 나른한 재즈를 배경으로 차 한 잔의 여유에 필요한 가십거리 정도가 아닐까. 혹자는 네가 무얼 먹었는지 말해주면 네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네가 무엇을 읽었는지 말해주면 네가 어떤 사람인 말해주겠다고 한다. 아날로그 시대에나 통용되는 말일 것이다. 이제는 『모두 거짓말을 한다』에서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가 말한 대로 구글창을 뒤져보거나 유튜브 목록을 털어보면 한 사람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시대에도 여전히 소설책을 뒤적이는 부류의 사람들끼리 교환하는 음험한 눈빛 혹은 그들만의 소통 방식 또한 사라지지 않을 터. 안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 이영도와 유치환을 떠올리거나,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다시 듣거나, 곧 스쳐 지나갈 가을을 즐길 시간이 너무 늦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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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유튜브에서 아들을 구출해 왔다 교양 100그램 8
권정민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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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슬 블로어 (whistle blower). 진실을 밝힐 목적으로 자신이 속한 기업이나 조직의 불법 또는 비리를 폭로하는 사람은 동서양을 막론한다. 동명의 책이 국내에 소개된 바 있으나 우리에겐 ‘내부 고발자’ 등의 명명법으로 더 익숙하다. 좌파 혹은 진보라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익숙한 개념이지만 모든 이념과 정파를 넘어 모든 인간과 모든 조직은 잠재적 기득권자, 권력자, 앙시앙 레짐이 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고 서 있는 자리가 달라지면 풍경이 바뀌기 때문이다. 가까운 곳에서 수없이 목격한 그들은 대체로 도덕과 가치를 명분으로 그럴듯한 포장지로 자신과 조직을 감싸며 태도를 바꾼다. 결국 이익은 누구에게 돌아가며, 선택과 결정 뒤에서 웃는 자를 살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한참 후의 일이다. 고인 물은 썩고, 오래 머문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다.

변화와 개혁을 부르지는 자들이 이러한데 자기 이익에 골몰하며 우리가 남이냐는 생각으로 거대한 이익 카르텔을 형성한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혹자는 인적 네트워크, 관리된 인간관계, 뛰어난 사회생활 능력이라고 평가하지만 유형, 무형의 편의를 봐주고 이익을 공유하는 건 어떤가.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와 방식을 비난하는 자들도 결국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끼리끼리 문화를 만들고 그럴듯한 명분과 가치로 혹세무민하기 일쑤다. 대개 부패와 비리 사건이 보수 정권에서 빈번한 이유는 무엇일까.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 삶의 방식과 태도로 인한 자연스런 결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길게 설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길고도 해묵은 뿌리를 들여다보기 전에 눈 앞에 펼쳐진 대환장 파티 같은 현실 때문이다. 특수교육을 전공한 어머니가 극우 유튜브에 빠진 아들을 바라보는 심정이라고 해서 일반적 부모의 마음과 크게 다르진 않다. 다만 제목처럼 아들을 구출하기 위한 노력과 방법에는 조금 차이가 있을 거라는 짐작으로 책장을 여는 정도면 충분하다. 2025년 서울서부지방법원 폭동 사태 다음 날 SNS에 올린 ‘내 아들을 구출해 왔다’라는 글로 극단주의에 빠진 10대 아들 이야기를 공유한 저자의 목소리는 흥분과 분노와 거리가 멀다.

차분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논리와 이성에 근거한 사유가 문제를 해결에 도움이 된다는 건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인류는 변연계가 아니라 신피질이 두터워지는 방향으로 진화했으며 종교가 아니라 과학의 힘으로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AI가 신의 자리를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예측까지 나온 지 오래지만, 현재는 유튜브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듯하다. 에코 쳄버나 필터 버블에 관한 숱한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아니 그 말조차 이해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오늘도 알고리즘이 창조한 세계 안에 갇혀 이미 100여 년 전에 알을 깨고 나오라고 외쳤던 헤르만 헤세의 조언의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다. 나와 너는, 아니 우리는 지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

평범한 엄마 권정민은 혐오와 극단주의를 몰아낼 건강한 대화법 7계명을 제시한다.

1. 일단 들어보자.

2. 이해와 공감을 말로 표현하자.

3. 우리 주변의 이야기로 연결해보자.

4. 새로운 정보는 서서히 소개하자.

5. ‘나도 모른다’고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6. 상대의 관심사를 포착하자.

7. 생각을 되돌아볼 시간을 주자.

책갈피처럼 꽂혀 있는 종이 카드를 살피다 씁쓸해졌다. 극우 유튜브에 빠진 아들을 구출하기 위한 노하우가 아니라 너무나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대화의 예의가 아닌가. 그만큼 상식이고 일반적일 거라고 짐작하는 일들이 일상에서 무너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닌가. 대화와 토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유형을 몇 가지로 나눠보면, 첫째 내 생은 이런데 네 생각은 어떠냐고 묻고 상대방의 말을 들는 사람이 있다. 둘째 이 문제는, 이런 상황, 이 사건은 이런데 너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하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느냐고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다. 셋째 상대방이 어떤 말을 하거나 물어보지도 않고 상대방의 생각과 감정에 대한 추측을 전제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 모든 사람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는 없다. 지구에 사는 80억 명, 아니 대한민국 5천만 명을 70:20:10 정도의 비율로 나눌 수도 없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수록, 가진 게 많아 지키고 싶을수록 인생에는 정해진 길이 있고, 세상은 어떤지 규정하며, 삶의 방법을 가르치려 한다. 단순히 ‘꼰대’라는 속어로 범주화할 수 없는 어른들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계급을 배신하는 투표, 정치 유튜브에 쩐 뇌, 드라마와 영화조차 요약과 쇼츠로 소비하는 일상이 모이면 극우든 극좌든 동일한 반응을 보인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도 특별한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은 놀랍지도 않다. 태도가 본질이라는 말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비판적 사고력이 부족하고 폭넓은 인문학적 소양과 사유의 시간을 갖지 못한 10대 아들이 단시간에 유사 알고리즘에 빠지는 현상은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그들을 구출해 낼 수 있는 특별한 노하우가 아니라 점점 좁아지는 우리들의 시야,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대화와 토론은 수업 시간에만 배우는 교육과정이 아니다. 특별한 스킬과 노하우를 습득할 필요도 없다. 타인을 향한 기본적인 예의이며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다. 다른 사람의 ‘진심’ 운운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감정을 추측하는 이 감별사들의 주관적 판단이 주는 해악은 이성적 토론을 무력화하는데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미디어는 언제든 다시 등장하고 새로 만들어진다. 사실과 의견(해석과 주장)은 다르다. 자기 생각을 말할 때, 주관적 감정이 섞어 사실 운운하는 사람을 멀리해야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 수많은 유튜버들이 사용하는 프로파간다가 바로 그런 식이다. 기본적인 팩트체크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숨 쉬는 일만큼 일상이 된 지 오래다. 극우 유튜브에서 아들을 구출하는 일만큼 극좌 유튜브에서 엄마를 구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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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학자 유성호의 유언 노트 - 후회 없는 삶을 위한 지침서
유성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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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개 죽음이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자동차 거울의 경고문구처럼 생각보다 가까이 놓여 있다. 법의학자 유성호는 구체적으로 '엔딩 노트'를 준비하라고 충고한다. 사람은 두 번 죽는다. 첫 번째는 생물학적으로 숨이 멎었을 때, 그리고 두 번째는 그의 죽음을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이 죽었을 때다. 이 노트는 첫 번째 죽음을 맞이하는 일인칭 시점의 죽음에 관한 준비 과정이다.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죽음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죽음이란 무엇인가.

장기 기증, DNR(연명치료중단) 동의 여부, 유서 작성, 장례 방법 등 죽음에 관한 준비를 미리 하지 않으면 '나'의 죽음이 살아남은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가중한다. 이인칭, 삼인칭 관점에서 바라본 '죽음'은 일인칭 시점인 '나'의 죽음과 조금 다르지 않은가.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들여다본 법의학자가 자신에게도 머지않아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과 태도는 옷깃을 여미게 한다. 가족, 친구들과의 이별 등 자기 삶의 마무리는 한 인간의 삶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규정하게 한다. 죽음 이후에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머물기 때문이다.

저자는 노년, 상실, 애도, 존엄사 등 죽음과 관련된 실제적인 이야기를 통해 역설적으로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감에 대하여, 이별과 죽음에 대하여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자기 삶의 마무리, 즉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은 나이와 상관없이 '좋은 삶'을 위한 다짐이 된다. 연명 치료와 장례식에 관한 이야기가 나이 드신 부모님이나 노인들에게만 필요한 준비가 아니다. 죽음을 위한 일상적이고 실질적인 고민과 준비가 오히려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의 바탕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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