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난마 한국경제 - 장하준.정승일의 격정대화
장하준 외 지음, 이종태 엮음 / 부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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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도―난마(快刀亂麻)[명사] ‘어지럽게 뒤얽힌 사물이나 말썽거리를 단번에 시원스럽게 처리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한국 경제를 쾌도난마할 수 있다는 오만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큰일 난다. 잘 드는 칼로 뒤엉킨 삼타래를 잘라버린다면 속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그 삼실은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더구나 한 나라의 경제문제는 이제 사회 각 분야중에서도 핵심으로 꼽히고 있기 때문에 한방에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면 더 큰 화를 부를 것이다. 꼬인 실타래를 한올 한올 뽑아내는 심정으로 문제의 원인을 밝히고 각론의 해법을 찾아내는 일은 실물 경제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래서 ‘장하준 ․ 정승일의 격정대화’ <쾌도난마 한국경제>는 오히려 역설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만큼 IMF 구제금융 이후 한국 경제의 어려움과 답답함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이전부터 내재해 있는 구조적 모순이나 문제점들이 해결되고 있지 않다는 반증이다.

  이 책은 말지의 편집장이었던 이종태 기자의 제안과 진행으로 두 경제학자의 대담형식을 통해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게 2부로 나누어 1부에서는 과거를 돌아본다. 개혁 강화는 종속 심화라는 아이러니, 박정희의 개별 독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재벌 문제, 과연 해답은 없는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시장 개혁인가를 통해 지난 한국 경제의 문제점들을 섬세하게 때로는 세계 경제와의 비교 속에서 짚어내고 있다. 2부에서는 미래를 전망한다. 주주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본질, 서로 자기 발등을 찍고, 있는 자본과 노동, 국가와 국가주의, 관치에 대한 오해와 편견, 우리 모두를 위한 사회적 대타협을 그리며……로 나누어 현재 우리 경제의 가장 큰 문제점과 대안을 모색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보수 수구 언론이나 개혁세력이나 지금까지 해 온 말들이나 우리 경제에 대한 진단을 보면 속이 뒤집어 질 때가 어디 한두 번이었나. 국민을 바보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판단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신념과 판단을 반성하거나 거시적인 안목으로 점검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인지 답답할 때가 많다. 가끔 하늘을 쳐다보며 핀란드나 스웨덴쯤으로 이민가야 하는거 아닌가 하는 푸념을 늘어놓기도 하고 실제로 현실상황의 교육문제와 맞물려 이민을 결행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만큼 상황은 어려워지고 있다. 구체적 상황은 주변을 돌아보면 알 수 있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없다.

  장하준이나 정승일의 의견에 상당부분 동의하고 속시원한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문제점을 모르고 있는 정치권에 대한 쓴소리 때문이 아니라 원인을 진단하는 과학적이고 차분한 태도와 거침없는 분석과 대안들 때문이다. 경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무엇이 문제인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은 미래를 준비하는 기본 틀을 제공한다. 막말로 장사 하루 이틀할 것도 아니고 지속 가능한 경영을 외치는 기업과 선진 조국 창조를 외치는 국가는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풀어가야 할 것 아닌가. 현실 사회에서 재벌은 정경유착이라는 불명예와 더불어 1인 총수의 지배구조, 편법 증여로 인한 탈법 등으로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물론 우리 나라 경제 상황에서 재벌의 순환 출자구조가 아니었다면 현대자동차나 삼성반도체 같은 세계적인 기업이 탄생할 수 있었겠느냐는 지적도 일리가 있지만 국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이유로 모든 면죄부를 재벌 손에 쥐어 줄 수는 없다.

  김대중 정권 이후 신자유주의 물결은 한국에서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언론에 보도된 소버린이나 론스타같은 국적 불명의 금융자본이 이미 메뚜기떼처럼 훑고 간 자리에서 정부는 되늦게 세금 타령을 하고 있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박정희식 개발 독재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주주 자본주의의와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국민들도 올바로 인식하고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 해마다 반복되는 노사간의 갈등과 관치에 대한 편견이 우리의 미래를 암울하게 할 수도 있다. 철학과 이념이 바로 선 나라가 먼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한다. 중도 우파쯤 되는 노무현 정권의 정체성도 혼란스럽다. 경제는 사회 각 분야와 긴밀한 관계한 맺고 있다. 특정 분야에 대한 과오를 따질 수도 없겠지만 복지와 재분배에 대한 확고한 이념과 실천을 행동으로 옮기고 있지도 못하며 경제 발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라면 국민들이 나서야 한다. 전문가와 국가 정책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차갑고 냉소적이다. 사회적 합의 이끌어 낼 수 있는 비전과 각론을 제시하는 정부를 만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스웨덴과 같은 방식으로 사회적 대타협이 이루어질 수도 있겠지만 한국적 토양에서 그런방식은 불가능하리라 본다. 지금 여기에 맞는 노력과 타협들이 필요하고 혁명이 일어나는 수준의 사회적 변혁을 꿈꾸어 보지만 국민 대다수의 동의가 어려울 것이다. 아니 대다수 국민들의 합의보다 일부 보수 기득권 세력의 목숨 건 저항이 얼마나 심각한가가 문제일지도 모른다. 8 ․ 31 부동산 대책과 이전의 대책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중동의 언론 플레이와 1%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해 피눈물나게 외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종부세와 보유세의 입법과정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21세기가 시작되었고 자본주의는 민주주의 이념을 넘어 신자유주의의 깃발아래 세계를 통합하고 있다. 한국 경제의 문제는 거대 담론이 아니라 바로 여기 우리들 생활의 문제와 직결된다. 누가 잘 먹고 잘 살고 싶지 않겠는가. 나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이기적 목적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을 찾아 보자는 이야기는 개짖는 소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함께 행복하지 못하면 나도 행복하지 못하다는 진실은 역사가 말해준다. 한국경제는 앞으로도 안녕할 것인가?


2005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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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 역사 모노드라마
하워드 진 지음, 윤길순 옮김 / 당대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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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에서 가정법을 사용하는 일이 가장 바보스러울지 모르지만, 그 상상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일상에서 부딪히는 많은 문제들을 돌아보며 아쉬움과 후회를 남긴다. 결정적 시기와 사건에 대해 후회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쉽게 떨치지 못한다. 인류 역사의 변혁 과정에서 그 가정법을 사용하는 일은 문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심각하지 않은 얼굴로 과거를 재생하고 현재화하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촘스키와 더불어 미국의 지성이라 일컬을 만한 지식인 하워드 진의 역사 모노드라마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marx in soho>는 즐거운 상상력이 빚어놓은 재미있는 희곡이다. 실제로 공연이 되었다고 하지만 레제드라마lese drama로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다. 어떤 배우의 연기로 각인되기 보다는 마르크스라는 인물이 빚어내는 독특한 분위기와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며 읽기 위한 희곡으로 더 어울린다.

  뉴욕은 현재 지구상의 존재하는 모든 자본의 총본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 ․ 11테러로 더 잘 알려진 세계무역센터가 있는 도시 뉴욕에 마르크스가 시대를 뛰어넘어 나타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며 우리에게 어떤 말들을 전해줄 것인가.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일이다.

  엥겔스와 더불어 세계를 뒤흔든 선언으로 기억되는 ‘공산당선언(1848년)’을 발표한 마르크스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엥겔스는 그보다 두 살 어린 스물여덟이었다. 이후 유럽 파리와 벨기에를 거쳐 영국에 망명한 마르크스는 불세출의 걸작 ‘자본(Das Capital)'을 출간한다. 아내 예니와 세 딸들은 극도의 빈곤과 가난 속에서 엥겔스의 도움으로 겨우 의식주를 해결하는 수준의 생활을 영위했다. 평생 마르크스를 괴롭힌 엉덩이의 종기만큼 가난은 그에게 버릴 수 없는 생의 동반자였다.

  아내 예니와 막내딸 엘레아노르는 가족의 울타리를 그를 감쌌고 또한 사상의 동반자였다. 이 책에서 프루동과 바쿠닌을 등장시켜 관객을 즐겁게 한다. 특히 바쿠닌과의 신랄한 비판과 언쟁은 극적 재미를 더해준다. 엥겔스와의 관계가 오히려 마르크스의 입을 통해서만 제시되어 소홀하게 다루어진 면이 있다. 어떤가, 어차피 마르크스라는 인물을 통해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모노드라마라는 사실만으로도 재미있는데.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는 항변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반증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예고했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철학자다. 우리 인류 역사에 그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은 많지 않다. 그만큼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면서 소홀하게 다루어지거나 일정한 거리감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하워드 진은 그런 인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었다.

  희곡이라는 형식을 통해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한 모노드라마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인물을 대하게 된다. 물론 실존 인물에 대한 고증과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담감이 없을 수 없겠지만, 상상력의 폭은 넓어지고 인물은 재창조된다. 살아있는 마르크스, 얼마나 흥미로운 주제인가.

  하워드 진은 그 인물을 영국의 소호가 아닌 뉴욕의 소호로 불러 냈으며 그에게 실컷 자신에 대해 항변하고 왜곡된 자신에 대해 사람들에게 속시원히 말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물론 한 인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접근법으로는 부족하다. 실제 공연에서 얼마나 성공을 거두었는지도 알 수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희곡은 공연을 관람하는 것보다 읽는 것으로 만족스러울 듯 싶다.

  뉴욕이라는 상징적 도시에 나타난 마르크스의 행보가 뚜렷한 인관관계를 형성하며 극을 이끌어 나가지 못하고 현재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관점 정도로 머물러 있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좀더 세밀하고 깊이있는 대사와 뉴욕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최대한 활용한 내용으로 극이 전개됐다면 하는 아쉬움도 떨칠 수가 없다.

  하지만 서울에 나타난 마르크스였다면 즐겁게 읽지 못하고 우울하게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남의 나라 불구경하듯 현실과 동떨어진 사실이 아님에도 한다리 건너편에 세워 놓고 상상하는 즐거움을 놓쳤을 테니까 말이다. 짧지만 즐거운 상상을 통해 마르크스와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200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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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외인간 - 전2권 세트
이외수 지음 / 해냄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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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더 이상 특별할 것도 신비로울 것도 없는 이외수의 소설은 하나의 틀로 굳어진 듯 싶다. 그 틀은 1992년 <벽오금학도>이후 굳어졌다. 이후 출판된 1997년 <황금비늘 1, 2>, 2002년 <괴물 1, 2>에 근작 <장외인간 1, 2>에 이르기까지 큰 흐름에서 변화가 없다. 1978년 <꿈꾸는 식물>, 1980년 <겨울나기>, 1981년 <장소하늘소>, <들개>, 1982년 <칼>을 이외수의 전정기로 본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그의 소설은 <칼>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1975년 등단이후 30년간 많은 양의 책들을 쏟아내며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아온 그의 글들은 이제 힘을 잃어가는 것인가.

  미스 강원과의 극적인 결혼, 지독한 가난 등 자신의 이야기를 감수성 짙은 문장으로 풀어낸 1985년 <내 잠속에 비 내리는데>를 알게 된 것은 어머니를 통해서다. 올림픽 열리는 해에만 머리를 감고, 스스로 감옥을 만들어 글을 완성할 때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는 등 그의 숱한 일화와 외모와 일상의 비현실성으로 인해 끊임없이 화제에 올랐던 소설가 이외수는 여전히 가장 대중적인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정통 문학에서 비껴 서 있는듯 수많은 에세이와 우화를 발표하기도 했으나 여전히 영혼의 세계를 주유하고 싶은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창 밖에 가을이 당도해 있었다’는 문장에서 ‘추적추적’과 어떤 특정 시간과 계절이 ‘당도’해 있다는 표현을 여전히 즐겨 쓰는 작가 이외수는 근작 <장편소설>에서도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문장들과 표현들 비현실적 결말로 주목을 끈다.

  닭갈비집 ‘금불알金佛揠’의 주인 이헌수는 시인이다. 동생 이찬수와 동생의 동거녀 제영이와 함께 춘천에서 닭갈비집을 운영하고 있다. 어느날 달빛처럼 스며든 여인 소요를 만난다. 닭갈비집 종업원으로 카운터를 지키던 소요가 사라진 어느날 하늘의 달이 사라져 버린다. 세상사람들은 달을 모르고 헌수는 미칠 것 같다. 월(月)요일이 인(人)요일로 바뀌어 있고 달과 관련된 모든 노래와 풍속들이 사라진 현실을 헌수는 받아 들일 수가 없다. 달을 아는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돈에 눈이 먼, 가슴이 메말라 가는 사람들 때문에 사라진 달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결국 헌수는 정신병원 개방병동에 입원한다. 차차 두통이 사라지고 마음의 안정이 온다. 병원에서 만난 한도사, 문보연, 오대단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많은 방식이 있음을 알게 된다. 환자처럼 보이는 그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정상으로 살아갈 수 없는 곳이다. 프랙탈 예술을 하는 친구 김필도는 누드 모델을 구하려다 모델을 친구와 동거를 시작하고 선배에게 그림을 팔려다가 자신의 여자와 바람난 선배를 폭행해서 감옥에 간다. 병원에서 퇴원한 헌수는 필도를 면회하고 닭갈비집을 정상화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던 어느날 명품 중독증에 빠진 동생의 동거녀이자 자신의 후배인 제영이가 인체자연발화 현상으로 사망한다. 정신을 수습할 무렵 모월동(慕月洞)에서 찾아온 소년을 따라 가끔 헌수를 찾아오던 노인을 만나게 되고 달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는 달이 뜬다. 소요의 정체는 달의 주변을 유유히 날고 있는 시조새였다.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과 허무 맹랑해 보이는 이외수의 소설들은 매번 사람들의 가슴들 적셔줄 무언가를 찾고 있다. 그 무언가는 감성과 낭만이다. 사랑이 사라져버린 시대, 돈과 물질이 눈을 가리고 참다운 인간의 본성을 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메마른 가슴 때문에 하늘에 달이 사라져 버렸다고 믿는다. 달은 가장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자연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이외수가 외치는 목소리는 어쩌면 단순하다.

  가슴속에서 사라진 것들은 가슴 밖에서도 사라진다. 물질로서의 달은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 있어도 정서로서의 달은 가슴속에서 사라져버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로서의 달도 정서로서의 달도 망실해 버렸다. 기억 속에도 존재하지 않고 가슴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장외인간 1, 163페이지

  누가 일부러 가슴에 물기를 걷어내고 스스로 타죽고 싶겠는가. 김영하의 소설에 나온 비과학적인 죽음. 사람의 신체가 스스로 발화하여 타버리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산다는 것이 결국 무덤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모습이라는 비극적 인식이 아니라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본 사람들은 삶의 자세가 달라질 것이다. 다만 여전히 밀린 숙제처럼 남아 있는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문제와 만나게 되면 답이 없다. 당연하다. 거기에 무슨 답이 있겠는가. 이외수도 다만 젖은 가슴으로 감성과 낭만을 잃지 말고 사랑이 가득한 ‘관계’를 꿈꾸는 것이다.

  어쩌면 이제 더 이상 그의 책을 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말더듬이의 겨울수’,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감성사전’등의 에세이와 시집 ‘풀꽃, 술잔, 나비’까지 거의 모든 책들을 읽어왔지만 이제 유년시절의 추억과 재미있는 문장만으로 장편 소설 2권의 분량을 채워나가기에는 힘겨워 보인다. 장면 장면 에세이와 재미있는 우화로 풀어낸다면 더 좋았을 것같은 내용들이 많이 눈에 띤다. 소설 본연(?)의 임무가 뭔지 잘 모르겠으나 이제 그만 소설을 놓아줄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혼탁한 세상에서 깨끗한 영혼을 지키자고 감성과 낭만을 그리고 사랑을 지켜 나가자고 외치는 기인이다. 춘천에 가면 격외선당(格外仙堂)에 살고 있는 찾아보고 싶을 것이다. 가을답지 않게 회색 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점령하고 있다.


2005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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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나서면 딸의 인생이 바뀐다 - 사이가 멀어지지 않고 딸에게 좋은 아빠 되는 법
장경근. 정채기 지음 / 황금부엉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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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나서도 딸의 인생은 바뀐다. 90분만에 책장을 덮을 수 있는 책은 많지 않다. 분량이 적거나 내용이 부실하거나 참을 수 없을만큼 지루해져 다음 줄로 다음 장으로 자꾸 눈이 넘어가서 속도가 배가되고 되새김질 같은건 아예 생각도 하지 않은 책이면 가능하다. 200페이지 분량의 <아버지가 나서면 딸의 인생이 바뀐다>는 책에 대한 정보 없이 ‘리뷰 신청 도서’에 이름을 올린 탓이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런 아버지는 없다. 비교급이 불가능한 것이 부모이며 관계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무엇과 무엇을 비교한다는 것은 돈의 수치화 계량화 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어떤 딸이냐에 따라서, 아니 어떤 자식이냐에 따라서 훌륭한 아버지의 모습은 다르게 기억될 것이고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소통하고 살아간다.

  이 땅의 딸들은 분명 아들과 다른 모습으로 키워졌고 길들여져 왔으며 출발을 달리했고, 한정된 역할과 능력과 상관없이 규정되어왔던 과거를 지닌 채 현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딸과 아들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문제다. sex라는 생물학적 성의 차이가 아니라 gender라고하는 사회문화적 성역할의 차이를 간과하고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동양적 유교적, 아니 한국적 가부장적 문화가 빚어낸 왜곡된 차별부터 극복되는 것이 마땅하다. 물론 여성부가 설치되고 양성 평등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고 있는 지금 이 시대는 전시대에 비해 상당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딸에게 뿐만 아니라 아들에게 그리고 아내에게도 중요하다. 특히 딸에게 더 중요하지는 않다고 본다. 물론 아들과는 다를 것이다. 이성 부모의 역할모델에 따라 배우자의 선택에도 결정적 역할을 미칠 것이고 남성 전체에 대한 인식도 다르게 결정될 것이다. 기본적인 생각에 누가 동의하지 않겠는가.

  다만 무언가 읽을 거리의 형식을 취하게 되면 얘기가 좀 달라져야 한다고 믿는 것이 개인적인 판단이다. 유형별로 항목별로 번호를 붙혀 ‘좋은 아버지 10계명’이나 ‘딸과 아버지의 관계가 돈독해지는 법’을 실천하라고 마치 강령처럼 표지 뒤쪽에 조잡한 삽화를 곁들여 부록으로 만들어 놓는다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는다. 차라리 실천 사례 중심의 감동을 선물하는 방법이 좋지 않았을까 싶다. 넘쳐나는 방법론 속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인생을 성공하는 일곱가지 방법’, ‘생산적 책읽기 50가지 방법’, ‘논문 잘 쓰는 방법’에서부터 심지어 ‘합법적으로 세금을 안내는 110가지 방법’에 이르기까지 가히 방법의 천국 속을 헤매고 있다. 읽으면 정말 그렇게 되나 싶다. 나는 여전히 책속에 길이 있다고 믿는다. 그 길은 연금술의 비법을 몇 줄의 항목화된 방법으로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 스스로 깨우치고 찾아내야 하는 사색의 길과 방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실제 사례 중심의 감동을 전하거나 차라리 이론적 접근 방법을 제시해서 현실 생활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하도록 해보는 방식은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책의 내용이 부적절하거나 진실과 거리가 멀다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한 내용과 방법들과 가득하다. 하지만 그게 문제다. 당연한 이야기를 구체화 시킨 것일 뿐.

  모든 아버지는 시간이 없고 바쁘며 근엄해야 한다는 과거의 이미지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깨지고 있다. 주 5일제의 여파로 여유 시간은 넘쳐나고 가족은 삶의 목표이자 희망이며 그 관계는 세대를 뛰어넘어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단위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그것이 지나쳐 가족 이기주의로 비쳐질 정도가 되었다. 아이들은 부모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모의 소유물은 아니다. 그 관계에 있어서도 적당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며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줄 수 있는 부모 스스로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이 책에서 여러번 묻고 있다. ‘자녀가 당신같은 사람이 되기 바랍니까?’, ‘자녀가 당신같은 사람을 만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부모가 되도록 내가 먼저 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직업과 경제적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이 달라져도 아이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 순수한 본성이 변하는 것은 부모의 영향이며 사회의 가르침이다. 내 자녀가 아닌 우리 모두의 아이들을 위한 고민도 아울러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나서 딸의 인생을 바꾸기 전에 딸의 인생이 어떠했으면 좋겠는가를 먼저 고민하는 일이 더 어렵고 소중할 것이다. 그것이 결정되면 좋은 관계, 행복한 방법들이 다양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200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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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몸들 창비시선 246
조정권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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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살고 싶은 길

1

일년 중 한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혼자 단풍 드는 길
더디더디 들지만 찬비 떨어지면 붉은 빛 지워지는 길
아니 지워버리는 길
그런 길 하나 저녁나절 데리고 살고 싶다

늦가을 청평쯤에서 가평으로 차 몰고 가다 바람 세워 놓고
물어본 길
목적지 없이 들어가본 외길
땅에 흘러다니는 단풍잎들만 길 쓸고 있는 길

일년 내내 숨어 있다가 한 열흘쯤 사람들한테 들키는 길
그런 길 하나 늙그막에 데리고 갈이 살아주고 싶다

2


이 겨울 흰 붓을 쥐고 청평으로 가서 마을도 지우고 길들도 지우고
북한강의 나무들도 지우고
김나는 연통 서너 개만 남겨놓고
온종일
마을과
언 강과
낙엽 쌓인 숲을 지운다.
그러나 내가 지우지 못하는 길이 있다.
약간은 구형인 승용차 바큇자국과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이 늙어버린
남자와 여자가 걷다가 걷다가 더 가지 않고 온 길이다.


10년 만에 <떠도는 몸들>이라는 시집으로 돌아온 조정권의 시는 여전히 세상 밖에 시선을 두고 있다. 철저하게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와 우리 주변을 돌아보며 언어의 구석구석을 갈고 다듬지만 시선은 언제나 세상 밖을 주유하고 있는 듯하다.

<산정묘지> 이후 오랜만에 그의 시를 대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감지한다. 시간은 머물러 있는 듯 내면세계의 관심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대로인 채 세월의 깊이만 더해 간다. 현실과 동떨어진 맑고 깨끗한 눈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이 시인의 눈이라고 한다면 조정권은 거리가 멀다. 차라리 인간의 내면을 보지 못해 장자의 눈을 빌어 일상사의 모습들을 무심하게 흘려 보낸다. 그것은 죽음과도 닿아 있지만 결국 존재론적 관점에서 ‘無’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한 발자국만 떨어져 세상을 바라보라.

여행의 경험에서 비롯된 시들은 정갈하며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는 시들은 슬프다. 생의 본질이 슬픔이라면 조정권은 우울한 정서와 비관적 분위기를 눈물나지 않게 깔아준다. 발에 밟히는, 피부에 묻어나는 비애는 습관처럼 무덤덤해질 수 있는지 반문하고 있는 것같다. 때때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우러르지 말고 발밑에 썩어가는 낙엽의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 보는 낮은 시선이 필요하다. 조정권의 시는 그렇게 읽혔다.


200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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