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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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문학에서 소설의 흐름을 짚어 내는 일은 쉽지 않다. 적어도 한 세대가 흘러야 문학사가 정리되고 객관적 평가가 가능하다는 고정 관점에서 벗어나 최근의 경향에 대해서도 비평가들은 그 흐름을 나름의 잣대로 평가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인으로 분류되는 작가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일정 기간 유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혜성처럼 나타나는 스타는 어느 분야에나 있다. 박민규는 그런 소설가인지도 모른다. <지구 영웅 전설>로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하고 뒤이어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단한 박민규는 2년만에 첫 단편집 <카스테라>를 선보였다. 전업 작가로서 왕성한 창작욕과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등단한 점등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주문한 책을 받아보니 열흘만에 2쇄를 찍은 책이 도착했다. 작가로서는 가장 행복한 형태의 진행형이다.

  이런 외적 현상과 흐름은 당연히 내용의 신선함과 뚜렷한 차별성 때문이다. 우리가 현대소설에서 믿어왔던 서사구조의 틀을 뒤흔들고 있지는 않지만 전통적인 소설의 문법에서는 한걸음 빗겨 서 있다. 후기구조주의가 국내에서도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90년대 초반의 현상들과 유행들을 기억하는 독자들이라면 박민규의 소설 정도는 가볍게 소화할 수도 있겠다. 환상을 소설 속에서 처리하는 방식과 주제는 이미 독창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박민규는 그렇게 짧은 기간동안 자신의 영역을 확실하게 표시하고 있다. 신선함과 독특함만이 미덕일 수는 없으나 그의 소설은 독자들에게 혹은 비평가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냉장고가 영국의 유벤투스를 응원하던 유벤투스의 훌리건이었을 것이라는 상상으로 시작되는 이야기 ‘카스테라’를 비롯하여 ‘갑을고시원 체류기’까지 공통적인 흐름과 유사성을 읽어내는 것도 또하나의 재미이다. 우선 주인공이 모두 1인칭 남성으로 지칭되는 ‘나’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1인칭 주인공은 내밀한 자기 고백이며 인물의 심리 상태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어렵지 않게 맡길 수 있다. 전통적인 소설의 사건 중심에서 벗어나 있으며 갈등 구조의 팽팽한 긴장감을 원하는 독자들은 그래서 이내 실망하고 만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환상을 선택한다. ‘아, 하세요 펠리컨’에서 오리배 세계 시민 연합의 출현과 ‘코리언 스텐더즈’에서 우주선의 출현등이 그것이다. 어차피 소설이 현실을 뛰어넘는 자리의 어디쯤 있다고 믿는 독자들이라면 차라리 마음 편하게 그의 소설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개연성을 미덕으로 소설을 평가하는 전통 문법에서 벗어나 있는 그의 독특한 미학 구조는 그래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판단은 물론 독자들의 몫이다.

  일련의 소설들에서 그가 보여준 세상에 대한 태도는 사뭇 진지하거나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촌철살인의 극단을 보여주는 예가 없어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한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은 그의 문학세계와 앞으로의 행보를 짚어보는 중요한 바로미터가 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가벼움이라고 쉽게 평가할 수는 없지만 분명 무언가 결여된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그것이 우리가 접해왔던 소설의 익숙함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단편이 지녀야할 미덕과 인간에 대한 정밀한 관심과 진지한 접근이 부족한 이유이다. 이제 시작과 다름없는 그에게 특별히 기대하는 것은 없다. 독자들은 익숙하지 않은 소설가에게 무엇을 기대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저 지켜본다. 다음은 무엇일까? 호기심과 궁금증을 가지고 다음 작품들을 읽고 기다린다. 그 기다림을 갖게 하는 힘만으로도 박민규는 성공적이다. 나만 그런가?

  주목받는 만큼 행동이 부자유스러울 수 있겠지만 독자들의 반응에 값하는 소설들이 지속적으로 나와주길 빈다. 새로움과 낯설음을 문법으로 하는 독특한 박민규만의 소설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이라면 우리는 관심과 애정으로 그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일시적이거나 즉흥적인 발랄함과 참신함이라면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생각보다 독자들은 냉정하고 정확하다.

  1인칭 남성 화자가 보여주는 고백의 서사에서 벗어나 이제 멀리, 그리고 넓은 곳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길 바라며 재미있는 소설집 박민규의 <카스테라>의 책장을 덮는다. 곧이어 다름 장을 열 수 있기를 기대하며. ‘자아’에서 ‘타자’로의 관심을 기대하며.



2005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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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301
오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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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처럼 시집에 서시라 미리 밝히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언제나 서시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시집 전체를 통찰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서시에서 이 시집의 낯설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시선의 변화와 이동이다. 바라본다는 것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시선의 이동과 관점은 변화는 그래서 중요하며 세상에 대한 인식의 틀을 제공한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그것들을 노래한다. 선명하고 분명한 이미지로.

호수와 나무
- 서시

잔물결 일으키는 고기를 낚아채 어망에 넣고
호수가 다시 호수가 되도록 기다리는
한 사내가 물가에 앉아 있다
그 옆에서 높이로 서 있던 나무가
어느새 물속에 와서 깊이로 다시 서 있다.

  오규원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그것은 오래된 수첩과 대면하는 기분이다. 일기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개인적인 경험과 그의 시에 대한 기억들이 시인의 이미지를 만든다. 초기 시집 <분명한 사건>과 <순례>를 제외하고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 땅에 씌어지는 敍情詩>,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사랑의 감옥>,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한 잎의 여자>,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그리고 시선집 <사랑의 기교> 시론 <현대시작법>을 보면서 시간이 흘렀다. 연습장에 삶의 태도와 인식에 관한 짧은 명언들을 적던 무렵 오규원의 시는 ‘비가 와도 젖은 자는 젖지 않는다’는 식의 잠언들을 토해냈다. 초기에 그가 보여주었던 은유는 독특했고 관심의 내용 또한 특별했다. 새로움에 대한 관심으로 그의 시를 읽기 시작했다.

  해설에서 정과는 ‘은유와 환유라는 지칭의 모호성’, ‘오규원의 후기시에 대한 이해의 세부적 불투명’, ‘초기시와 후기시의 연속성에 대한 의문’이라는 세가지 측면에서 이번 시집을 분석하고 있다. 적당한 긴장과 세상에 대한 의문으로 대충(?) 시를 쓰는 시인들과 오규원은 차별화된다. 한국시의 한 기둥으로 큰 축을 담당하고 있다. 그의 자리매김이 끝나기 전에 그의 전집이 나왔지만 그의 전작이 수록되려면 아직 기다려야 한다. 그의 시는 초기에 은유에 기초하여 절대 관념에 대한 천착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그것은 김춘수와 닮아 있다. 다만 절대관념에서 출발한 시의 시방법론이 시점을 달리하여 관심의 폭과 영역을 넓혀 나가고 그것을 드러내는 방법을 달리 했을 뿐이다. 나는 그의 시에서 시선의 이동을 경험했다. 초기시에서 보여주었던 발상의 전환과 절대 관념에 대한 재해석, 그리고 사물과 사람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읽었다. 그의 시는 내 능력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매력과 깊이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낯설게 바라보는 색다른 시점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90년대 초반에 나온 <현대시 작법>에 밑줄 그어가며 읽었던 기억은 이제 추억(?)이 되어 버렸다. 책꽂이 한 켠에 꽂혀 지나간 삶에 대한 추억으로 기억될 것이다. 열정은 사라졌지만 추억은 남는다. 오규원의 시들은 초지 일관 변함없는 세계를 보여주는 시인들의 시와 구별된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에서 오규원은 ‘사물의 시선’을 차용한다. 인간의 시선과 생각을 외부 세계에 투영하는 대신 사물의 시선으로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며 세상을 해석하거나 분석하기 보다는 관념화된 이미지를 풀어 놓고 있다.

하늘과 포도 덩굴

뒤뜰 포도나무
덩굴
혼자
하늘을 건너가고 있다
오늘은 반 뼘


서산과 해

고욤나무가 해를 내려놓자
이번엔 모과나무가 받아든다
아주 가볍게 들고 서서 해를
서쪽으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옮긴다
가지를 서산 위에까지 보내놓고 있는
산단풍나무가 옆에서
마지막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는 식이다. 그것은 외물에 대한 무심한 태도도 관조적 태도도 아니다. 감정이 배제된 철저한 관념의 세계가 자연에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그 객관의 자리에서 오히려 익숙한 언어들이 생생한 이미지를 풀어내고 있다. 이제 그의 시세계는 완성(?) 혹은 마무리 단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서러운 한 생애가 저물어 가면서 토해내는 붉은 언어들이 그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할 것이다. 한 편의 시와 한 권의 시집이 아니라 그의 전작들을 꼼꼼히 훑어보는 일은 나중으로 미루자. 다만 21세를 향한 그의 언어는 여전히 팽팽하게 긴장한 독자의 심장을 겨누고 있다. 그래서 두근거린다.


2005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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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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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입학 무렵으로 기억한다. 어머니를 졸라 집에 개를 한 마리 키우기로 했다.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이 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지극했다. 아버지는 손수 판자를 잘라 개집을 지어 페인트칠까지 해서 멋진 개집도 만들어 주셨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개의 눈에 눈꼽이 끼고 밥도 잘 먹지도 않고 개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안타까움의 크기만 기억한다. 개가 죽고 나서 까만 비닐 봉투에 담아 시냇가에 가 땅을 파고 개를 묻던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어린 초등학생의 마음속에 지금까지 사진처럼 선명한 죽음에 대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후론 집에서 아무것도 키우지 않는다.

  개는 보통 인간과 가장 친근하면서 충직한 동물로 인식되어 있다. 주인을 살린 개 이야기를 초등학교 때 배운 기억도 난다. 지금은 사람들이 애완용으로 아파트에서도 개를 키운다. 오히려 도시에서 개를 키우는 사람들이 늘었다. 외로움과 그리움의 부피가 커진 탓이다.

  김훈의 장편소설 <개>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개발바닥 내발바닥’이다. 신산스런 삶의 과정을 밟아 나가는 인간의 발은 개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이 바로 우리들 삶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힘겹고 고통스런 순간들 너머에도 생은 존재하며 삶은 어떤 형태로든 지속된다. 이 소설은 그렇게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너도 개다!

  이 소설은 청소년을 위한 우화소설로 분류될 만하다. 어른을 위한 소설로도 손색없지만 이제 성인들은 쉽게 감동하지 않는다. 다만 어린 시절 개에 대한 추억이 한 두 가지쯤 있었을 법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소설은 유년의 기억으로 안내할 수도 있겠다.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철저히 개의 시선을 빌어 세상을 둘러본다. 배경은 개가 태어난 어느 평범한 농촌과 주인을 만난 어촌이다. 고려의 가전체를 흉내내 어설프게 세태를 비판하거나 인간의 일그러진 모습을 풍자하지는 않는다. 담담하고 편안한 문장으로 개의 발바닥을 따라간다. 특별한 사건과 인상적인 갈등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암캐인 흰순이와 동네를 지배하는 악돌이를 내세우기는 하지만 그 개들은 소설의 내용을 좌우하는 결정적 역할이 아닌 조연에 불과하다.

  이문열의 소설 <오딧세이아 서울>을 기억하는 독자들은 이런 종류의 소설이 갖는 미덕을 쉽게 평가하기 어렵다. 이문열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몽블랑 만년필이다. 사물에 의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도덕 교과서가 되기 쉽다. 가르치려 들거나 비판의 잣대를 들이밀기 십상이다. 다만 새로움에 대한 도전이며 식상함에서 벗어나 잠시 소설의 문법을 잊고 맑은 샘물을 한 모금 마시는 기분 정도면 되겠다.

  하지만 그 이상은 없다. 그래서 아쉽다. 억지스런 감동은 없지만 주인의 죽음으로 알 수 없는 운명 앞에 놓인 주인공 개의 울부짖음으로 소설은 막을 내린다. 과정으로 읽기엔 힘이 부족하고 결말이 던지는 메시지는 모호하다. 내용상 김훈 특유의 문장이나 표현들을 감상하는 재미도 없다. 자칫 특징 없는 소설로 남겨질 수 있는 소설이 될 수도 있겠다.

  누구나 공감하는 기억의 조각을 찾아내는 퍼즐게임은 즐겁다. 소설가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정서를 쓰고 싶은 욕망이 있다. 내밀한 언어의 정제된 고백보다 편안하게 다가오는 수필처럼 부드러운 문장들이 필요한 때도 있는 법이다. <개>는 그렇게 쉽고 편안한 저녁의 대화처럼 일상적인 모습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풀어 놓지 않아 마음 불편하지 않은 것이 커다란 미덕이다.

  과작(寡作)인 그의 작품을 기다리는 많은 독자들에게 이 소설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갈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의 많지 않은 작품을 대할 때마다 독자들이 느끼는 신선함이나 감동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단 한 편이라도 영원히 각인될 수 있는 작품들을 만나고 싶다. 모든 작가와 독자들의 공통된 희망일까?

  소설 외적인 이야기지만 책은 손맛이다. 언제부턴가 ‘민음의 시’가 양장본으로 나오더니 이제 소설들도 걸핏하면 양장본으로 출판된다. 뭔가 있어 보이지도 않고 책장의 부피만 차지한다. 편안하게 접어가며 읽을 수 있고 둥글게 한 손에 말아쥐고 있는 편리함도 사라졌다. 분량과 책 가격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양장본의 유행이 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좀 더 소설다운(?) 표지와 제본이 나는 좋다.


2005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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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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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뿌윰한 안개로 아파트 숲의 하늘이 모호하다. 논리를 넘어선 낯선 곳에 웅크리고 앉아 어둠의 저편을 응시하는 눈을 의식한다. 길을 걷다 문득 뒤를 돌아보다가 그 시선과 마주치기도 하고 창밖을 내다보다 그 눈빛과 만나기도 한다. 삶의 곳곳에 숨어 나를 응시하는 눈에 대한 경험은 착각이라고 하기엔 때때로 너무 선명하다.

  오랜만에 하루키를 만났다. <상실의 시대>와 <댄스 댄스 댄스>를 읽고 지나쳤던 그와 다시 만나는 일은 새롭다. 신작 <어둠의 저편>은 신선하다. 번역자 임홍빈의 화려한 수사와 거창한 찬사가 오히려 부담스럽지만 딱히 부정할 만한 사실도 아니다.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할만한 성과를 쌓아왔고 폭넓은 매니아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값싼 감수성이나 자극적인 재미로 독자들을 현혹하는 베스트 셀러 작가는 아니다.

  ‘천변풍경’과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대표되는 소설가 박태원은 30년대 우리 사회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놓은 듯한 소설을 선보였다. 독특한 그의 ‘考現學’은 청계천변 이발사 소년의 눈이나 소설가 구보씨의 시선이 카메라가 되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루키의 소설 <어둠의 저편>의 형식은 이와 다르지 않다. 내용은 형식을 담보로 한다. 하루키는 독자들을 소설 속에 초대하여 동참하게 만든다. ‘우리’라는 말로 동질 의식을 끌어내 영화의 카메라 맨이 되도록 안내한다. 자연스럽게 독자들은 그가 이끄는대로 세상을 들여다본다. 때로는 클로즈업 된 에리의 얼굴을 밀착하여 들여다보고 때로는 항공 촬영하듯 하늘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곳을 내려다 본다. 이런 방식은 낯설고 신선하며 영상 매체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무리없이 소화된다. 소설은 한 편의 영화를 보듯 그렇게 교차 편집되어 장을 넘어간다. 18개의 장면으로 구성된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듯 읽는 것이 이 책의 올바른 독법이다. 소설의 배경은 밤 11시 56분부터 아침 6시 52분까지.

  열아홉 마리와 언니의 동창생 다카하시는 레스토랑 ‘데니스’에서 우연히 만난다. 밤 11시 56분. 두 인물과 주변 인물의 모습을 다음날 아침까지 대략 7시간 동안 카메라에 담는다. 언니 에리가 잠든 방을 세세하고 면밀하게 관찰하는 ‘우리’는 마리가 부딪히는 낯선 밤의 세계와도 만난다. 고다르의 영화 제목인 ‘알파빌’이라는 호텔방은 에리가 잠든 방과 다름없이 어둡다. 중국인 소녀를 호텔방에서 폭행하고 돌아가 일을 계속하는 회사원의 사무실 또한 엷은 도시의 불빛이 새들어 올듯한 밝기로 느껴진다. 각각의 방에서 벌어지는 단절된 사람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모두가 잠들 시간에 깨어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피곤하고 느리며 무겁다. 물론 이런 느낌에서 서술자는 한발 물러서 있다. 모든 판단과 느낌은 동참하고 있는 ‘우리’들 독자의 몫이다. 철저한 ‘보여주기(showing)’기법에 의존하여 소설은 진행되는 것이다.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로 생각하는 언니와 동생의 관계, 자본의 힘으로 맺어지는 중국인 소녀와 그 배후와 회사원의 관계, 호텔 ‘알파빌’에서 일하는 카오루와 고무기와 고오로기의 관계 그리고 다카하시와 마리의 관계는 모두 메마르고 딱딱한 전형적인 도시의 건조한 인관관계를 보여준다. 대화는 겉돌고 귀가에 맴도는 이명현상처럼 어둠의 저편에서 들려오는 환청으로 치환된다. 의사소통의 부재는 대화의 단절과는 다른 문제다. 대부분의 경우 메마른 대화와 2차적인 관계가 빚어내는 도시의 삶은 어둠속에서 빛을 발한다.

  소설의 긍정형 인물로 제시된 다카하시와 마리는 그래서 독자들의 초점이 된다. 작가나 서술자의 의도적으로 설정한 주인공이 아니라 세상과 삶의 욕망에 대해 주체적으로 반응하는 유일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눈과 욕망의 대상이 되어버린 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두 사람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어설픈 몸짓으로 이해된다. 비록 평범하고 힘없는 노력과 몸짓이지만 독자들은 ‘관계의 회복’이라는 희망을 그들에게 투영하게 된다. 그것이 이 소설의 의미로 읽힌다.

  밤과 낮, 빛과 어둠은 단순한 시간의 2분법적 분절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삶의 양상을 드러낸다. 사실 2차적이고 간접적인 인간관계의 시간으로 볼 수 있는 낮의 밝음은 직접적이고 솔직한 관계의 형성이 가능한 밤의 어둠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어둠은 나와 우리를 들여다보는 내면의 거울이 되고 또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비쳐진다.

  이러한 시간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넘어 카메라 맨은 에리의 방을 들여다보던 오전 4시 25분에 이렇게 말한다.

세계는 끊임없이 연속적으로 진행되어 간다. 논리와 작용은 빈틈없이연동하고 있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본문 214페이지)

  그렇다. ‘세계는 끊임없이 연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논리와 작용은 빈틈없이’ 우리를 가두고 있다. ‘적어도 지금’이 아니라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다만 그때, 아니 지금 이 순간 우리들 삶의 모습을, 카메라에 비친 나의 모습을 들여다 볼 뿐이다. 그것이 비록 현실속의 내가 아니라 본질적인 나의 모습이라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어둠의 저편에, 밝음과 희망 있으라!



2005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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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주의자의 꿈 - 어느 헌책수집가의 세상 건너는 법
조희봉 지음 / 함께읽는책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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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 꾸는 꿈이 있고 나름의 방식대로 책을 읽고 사거나 빌리며 보관하거나 선물한다. 책을 읽는 목적만큼이나 다양한 것이 책을 선택하는 방식이고 책을 구하는 방식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실용적 목적의 책읽기를 가장 혐오한다. 나름의 이유와 방법이 있겠지만, 또한 목적없는 책읽기가 어디 있을까마는 가끔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전작주자의 꿈>의 저자 조희봉은 그런면에서 가장 순수하게 책에 접근하고 있는 아마추어 정신을 갖고 있어 아름답다. 오히려 책읽기가 밥벌이 수단과 연결되거나 현학적, 과시적 기타 다양한 불순한(?) 독서와 구별되는 저자의 책에 대한 애정과 독특한 방식들이 눈길을 끈다.

우선 ‘전작주의’는 깊이와 정도가 다를 뿐 누구나 한번쯤 시도해 보는 방법이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들면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는 것이다. 거창하거나 특별한 방식은 아니다. 다만 저자처럼 이윤기나 안정효 등 몇 백권에 달하는 번역서와 저작들을 가진 작가일 경우는 얘기가 달라진다. 절판되거나 구하기 헌책방에도 없는 책들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한 작가에 천착하는 일은 책읽기의 깊이와 넓이를 확충시키는 좋은 방법이다. 그것은 하나의 취미이고 열정으로 개인적 만족감에 머무른다. 하나의 방법론으로 나쁘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그것은 또 하나의 집착과 소유욕이 되어 책읽기와는 다른 수집에 대한 욕망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몇몇 작가들의 경우 장르와 내용, 종류와 상관없이 구입하는 작가들이 내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정호승의 경우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었다. 시에 주력하던 정호승은 1993년 그의 시집과 동명 소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 1~3>을 내놓는다. 주저없이 초판을 사 읽었다가 작가에 대한 실망감으로 낭패를 보았다. 범작이었으나 개인적으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전작주의는 위험하고 소모적인 책읽기가 될 수도 있다.

<전작주의자의 꿈>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물론 저자의 결혼 주례 스토리다. 이윤기 선생을 주례로 모시고 ‘1호 제자’로 인정받는 모습은 누구에게나 부러운 모습이다. 책과 무관한 일을 하며 그만큼 책에 대해 열정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사진으로 자랑하는 그의 책꽂이가 부럽다. 예전부터 상상만으로 꾸몄던 방식을 실행에 옮긴 모습이 장관이다. 널빤지와 벽돌만으로 낭비되는 공간없이 8단으로 쌓아올린 그의 책꽂이는 저자의 책 사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명 사진이다. 가구점에서 구입한 90cm 책장 5개가 넘쳐 정기구독하던 <현대문학> 7년치는 책장 위로 올라가 벽돌처럼 쌓여 있다. 누구나 넓고 깨끗한 책장과 여유 있는 공간을 원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저자와 같은 방식은 하나의 모범 사례처럼 보인다. 곧 시도해야겠다.

“나는 시간을 무익하지 않게 쓸 수 있을 방법이 있을 때는 절대로 책을 읽지 않습니다.”는 버트런드 러셀의 말은 내게 금과옥조로 여겨진다. 더 즐겁고 행복한 일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먼저 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이 책을 읽어 온 역사는 정말 짧다. 달리 생각하면 책을 읽지 않았다고 해서 무식하거나 인생이 불행하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다만 자기만의 독서법과 책에 대한 사랑법을 터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삶에서 책이 주는 역할과 의미를 되새기고 책을 선택하고 읽고 활용하는 방법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반면교사가 된 책이다.

어떤 식으로든 삶은 살아지고 우리는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여전히 두렵기만 한 백지같은 인생을 채워나갈 무엇인가를 바보처럼 아직도 책에서 찾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먼 후일 내 삶의 자세를 뒤돌아 볼 뿐일 것이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책읽기 과정과 방법론을 점검하고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나름의 방식들을 점검하는 데 요긴한 책이다. <생산적 책읽기 50>처럼 건방지게 책읽기를 가르치거나 항목별로 실용적 책읽기를 강의하는 식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저자가 들려주는 수줍은 책에 대한 짝사랑 이야기로 들린다. 사진으로 보이는 넉넉함만큼 여유를 잃지 않는 열정이 되길 소망해 본다. 그래도 나는 책으로 손이 간다. 손을 잡고 생각하고 대화를 나누는 방법 밖에 또 어쩔 것인가.


2005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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