맬컴 X vs. 마틴 루터 킹 - 다르지만 같은 길 1
제임스 H. 콘 지음, 정철수 옮김 / 갑인공방(갑인미디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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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몇 십년전에 일어난 야만적인 미국의 일상사에 대한 고찰이다. 이 책은 두 인물을 통해 과연 미국의 전통과 가치가 무엇인가를 다시 돌아보게 하며 한 인간의 삶이 어떻게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인종과 종교, 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교묘한 형태로 여전히 존재하는 이 시대는 과연 그들이 살았던 시대보다 나아졌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맬컴 X와 마틴 루터 킹의 삶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다. 남부 중류층에서 태어나 박사 학위를 받고 흑인 교회 목사로 흑인 민권 운동에 투신한 마틴은 비폭력 통합 주의를 표방한다. 반면 빈민가의 상징으로 백인에게 강간당한 외조모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붉은 피부색을 지닌 맬컴은 철저한 폭력적 분리주의를 내세운다. 미국의 자유와 민주적 가치를 믿었던 마틴과 백인들의 차별에 폭력으로 저항할 것을 끊임없이 강조했던 맬컴의 가치를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흑인과 백인이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보는 ‘아메리칸 드림’으로 설명할 수 있는 마틴의 통합주의적 입장과는 반대로, “사회의 밑바닥에서 살고 있는 흑인 대중”들의 관점에서 미국을 바라본 맬컴 엑스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절대 다수를 위해서 악몽이라는 이미지에 호소하며 미국의 사회정치적 현실을 묘사했다. (본문 75페이지)

  같은 시기에 미국의 아프리카계 흑인들을 위해 민권 운동을 펼쳤으나 전혀 다른 방법과 이념을 가졌던 두 사람은 미국이라는 가치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표적 개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만을 위한 자유와 민주주의는 백인 우월주의로 나타났으며 이에 대한 극복은 두 사람에게 운명처럼 다가왔고 기독교와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바탕으로 상호 보완적 관계를 이룬다. 단 한번 만났던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두 사람 다 암살로 생을 마감한다.

  마틴의 ‘통합주의’ 철학의 핵심은 “사람들은 종종 서로 미워한다. 서로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로 두려워한다. 서로 잘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로 잘 모른다. 소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소통할 수 없다. 서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본문 72페이지)”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된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바탕으로 백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마틴은 196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며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에 비해 맬컴은 북부 빈민가 흑인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다.

  남북전쟁 후 1870년, 링컨의 수정 헌법 15조에 의해 흑인에게 투표법이 주어졌으나 ‘짐 크로(Jim crow)’법에 의해 ‘분리는 하되 평등은 하다’는 흑인 분리(차별) 주의가 흑인의 90%가 살고 있던 남부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정착된다. 20세기 초부터 벌어진 흑인 민권 운동은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한 법적 투쟁부터 시작해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등으로 촉발된 실생활의 차별적 행위들에 대한 폭넓은 범위의 투쟁이었다. 두 사람은 이 시기의 미국의 참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바로미터다. “마틴의 신학이 사랑과 용서 그리고 흑인과 백인이 사랑 넘치는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얘기했다면, 맬컴의 신학은 엄격한 정의와 단호한 처벌 그리고 신이 백인종 전체를 절멸시킬 것이며 그리하여 평화와 선의의 세상을 모든 백인 가운데에 세워주리라는 희망을 강조했다. (본문 266페이지)”

  일라이저 무하마드의 이슬람 종교에 의지해 대중앞에 나선 맬컴은 결국 그와의 결별 이후 마틴의 주장과 흑인들간의 통합과 연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무렵 암살 당한다. 맬컴 암살 이후 마틴은 미국의 베트남전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미국의 절대 가치로 믿었던 자유와 인권을 바탕으로 한 인류애의 가치에 회의를 갖는다. 미국은 “평화를 얘기하면서 전쟁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유색인종과 여성, 어린이들에게 무차별 폭격을 하는 모습은 베트남에서 여실히 목격되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는 데 방해가 됐던 인종주의 정책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인류 사회를 초토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문 388페이지)” 베트남전을 통해 마틴은 “베트남에서 적군 병사 한 명을 죽이는 데 50만 달러를 쓰면서 자국 내의 가난한 시민에게는 단돈 50달러만 쓰는 나라”를 인식하고 미국은 자신의 도덕적 모순에 의해 파멸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미국의 이러한 이율 배반적인 모습은 걸프전과 최근의 이라크 침공등을 통해 아직도 변하지 않는 일관된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교언영색하는 미국의 참모습이다.

  “어떤 입장에서 흑인 문제를 바라보든, 그러한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언제든 죽음의 위협과 마주합니다. 이는 ‘비폭력적인’ 킹 박사나 소위 ‘폭력적인’ 저나 마찬가지입니다” 맬컴의 죽음 이후 비로소 마틴은 자신의 아메리칸 드림에서 급진적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으며, 맬컴이 꾼 악몽의 공포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본문 351페이지)

  이러한 마틴의 변화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지도 모른다. 맬컴과 마틴처럼 혁명적인 예언가들은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대개 그들이 끊임없이 변화시키고자 노력했던 그 힘에 의해 살해당한다. 맬컴 액스는 그가 사랑했고 자기혐오에서 해방시키고자 노력했던 흑인 집단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마틴 킹은 그가 사랑했고 인종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만들려고 노력했던 백인 집단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미국은 그때와 많이 다른가? 한반도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나라가 되어버린 미국의 가치와 본질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두 민권 운동가의 삶은 시대를 넘어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불평등한 가치를 극복하기 위한 거울이 될 수 있겠다. 늘 그러하듯이 이념이 아닌 순수한 동기와 가치에서 비롯된 헌신적 노력과 행동들이 작은 변화를 만들며 이러한 작은 변화들이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꾼다는 믿음은 나만의 것이 아니길 바란다.



200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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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 파탈 - 치명적 유혹, 매혹당한 영혼들
이명옥 지음 / 다빈치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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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지향점은 늘 현실 밖에 존재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회적 윤리와 도덕 속에 결합된 미술과 음악 그리고 문학은 지루함을 견딜 수 없게 한다. 정신적 순결함과 고결함을 느끼게 하는 수많은 작품들을 폄하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예술의 본질은 현실에서의 일탈이 아닐까 싶다. 반영론적 관점에서 보이지 않는, 보려고 하지 않는 현실의 모습들을 들춰내는 것이 예술의 중요한 기능이라면 인간의 본질적 욕망과 내면의 감정들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작품들은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아왔다.

  프랑스어 ‘숙명의 여인, 운명적인 여성’쯤으로 어원을 해석해볼 수 있는 ‘팜므 파탈(femme fatale)’은 매우 흥미롭다. 지은이 이명옥은 주제 선정의 탁월함을 내용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심리학이나 사회학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는 주제를 그림속에 나타난 여성들을 중심으로 편안한 설명과 함께 그림을 읽어주고 있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그리고 흥미를 가지고 그림 감상 능력이라는 덤도 얻는다.

  ‘유혹은 사랑보다 숭고하며, 쾌락은 죽음보다 강렬하다.’는 선언으로 책은 시작된다. 인간의 본능에 해당하는 유혹과 쾌락에 대한 정의가 선정적이다. “치명적인 매력으로 남성을 유혹해 지옥으로 빠뜨리는 악녀, 남성을 섹스로 유인해 파멸시키는 탕녀가 바로 팜므 파탈이다.”는 작가의 정의는 사람들이 왜 ‘팜므 파탈’에 열광하는가를 “현실 속의 여자에게서 해소할 수 없는 끈끈한 욕망을 매력적인 팜므 파탈에 투영했다. 윤리 도덕을 뛰어넘고 싶은 은밀한 갈망을 팜므 파탈을 통해 충족시켰다.”고 분석한다. 타당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여성에 대한 혐오와 증오심, 공포와 욕망이 뒤범벅이 된 남성은 지옥 같은 고통을 겪는다. 사디즘과 마조히즘, 갈망과 거부, 쾌락과 죽음. 이 모순된 남성의 심리가 여성에게 반영되어 아름답고 사악한 팜므 파탈의 이미지가 형성된 것이다.

  잔혹, 신비, 음탕, 매혹이라는 네 가지 주제를 가지고 살로메부터 해밀턴 부인에 이르기까지 주인공들의 생애와 특징, 다양한 화가들의 그림들을 소개하며 ‘팜므 파탈’에 대한 19말의 들불처럼 번진 현상들을 설득력있게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19세기 말인가에 대한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19세기 이전의 요부들은 비록 아름답고 요염하지만 치명적인 매력을 지니지 않았다. 또한 사회 전반에 걸쳐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다. 한 유형이 고착되기 위해서는 판에 박힌 이미지가 끊임없이 되풀이 되어야한다. (본문 182페이지)

  이러한 현상들이 지금은 광고와 영화를 통해 하나의 이미지로 재생산되고 있다. “19세기에 선풍적인 인기를 끈 팜므 파탈의 이미지는 오늘날 광고와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을 상품화한 섹시한 여인상을 형성하는데 독특한 기여를 했다. 도발적이고 선정적인 자태로 남성을 유혹하는 팜므 파탈은 환상의 사랑이 실제 사랑보다 훨씬 강렬한 감정이요, 자극적인 것임을 증명한다.”

  개인의 삶이 파편화되고 속도감을 더해 가면서 유혹과 쾌락도 가속도를 더해간다. 더욱 강렬한 생의 자극이 필요한건 현대인들만의 속성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든 아니든 치명적인 유혹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사랑’과 결합될 수 있다면 상황이 달라질까?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여인들을 도덕적 잣대와 윤리적 속성으로 판단한다면 전부 손가락질을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신화나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길 정도의 유명세와 상관없이 현실 속에 숨어 있는 다양한 형태의 ‘유사 팜므 파탈’에 대해, ‘팜므’는 아니지만 치명적인 그 모든 ‘유혹’들에 대해 갈등하게 되는 것은 ‘파탈’일지도 모른다.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화려하고 매혹적인 책이 될 수 있음에도 색지를 넣은 듯한 지나친 디자인으로 오히려 혼란스럽고 품격을 떨어뜨린 단점을 지닌 책이기도 하다. 미와 교코의 <성의 미학>에서 다룬 폭넓은 주제와 달리 ‘여성’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집중함으로써 전달 방식은 분명하고 선명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러나 ‘팜므 파탈’이라는 주제가 19세기 낭만주의와 상징주의 문학과 미술에서 비롯된 요부형 여성을 일컫는 말일지라도 ‘동양’의 여성들이 제외된 아쉬움이 크다. 
 
2005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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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한 사랑 노래 문학과지성 시인선 300
박혜경.이광호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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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장 맨 왼쪽 위부터 항상 ‘문지시인선’을 꽂아 놓는 버릇이 있다. 이사할 때마다 시집들의 위치는 변함없이 가장 윗자리를 내주는 셈이다. 1권 황동규의 <나는 바뀌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부터 며칠 전에 도착한 301권 오규원의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까지 시집들을 훑어보며 시간의 무게와 변화를 가늠해 본다. 얼마쯤 될까 세어보니 111권이 꽂혀 있으니 세권 중 한권은 사서 읽은 셈이다. 그 뒤에 기대 서있는 창비와 민음사, 세계사의 시집들이 내 청춘의 많은 부분들을 채우고 있다. 내 영혼의 팔할은 시집이 키워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녀와 첫 데이트 약속 장소는 교보문고 시집 코너였다. “멀리 있어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이성복, 그 여름의 끝, 86권)” 그렇게 그녀를 만나기 시작하던 90년에 100권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가 출간되었다. 오규원의 <사랑의 감옥(102권)>을 그녀에게 선물했고, 몇 년후 그녀는 내게 채호기의 <지독한 사랑(119권)>을 선물했다. 그리고 97년 봄, 책장에는 여러권의 같은 시집들이 나란히 꽂히는 것과 동시에 기념이라도 하듯 200권 <詩야 너 아니냐>가 출간되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열매’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을 기념하여 300권 <쨍한 사랑 노래>가 나왔다.

  “모든 사건은 밤에, 안개의 살갗처럼 움직인다. 너는 나의 미로다. …… 지금에 와서, 나는 너를 희망이었다고 되새긴다. (첫밤, 채호기, 밤의 공중전화(201) 중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시리즈 300권을 기념하여 출간된 <쨍한 사랑 노래>는 황동규의 시를 표제로 해서 201권 채호기의 시집부터 299권 이성미의 시집까지 한 편씩을 고른 선집의 형태를 띠고 있다. 100권, 200권 기념도 마찬 가지였으나 이번에는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을 중심으로 그 의미가 깊다. 순수 참여 논쟁의 복판에서도 묵묵히 우리 현대시의 무게 중심을 흩뜨리지 않으며 시의 본령을 지켜온 것이 ‘문지 시인선’이다. 황동규, 오규원, 정현종, 황지우, 김광규, 기형도, 최승자, 김혜순, 장석남, 황인숙, 김준태, 김영태, 이성복, 나희덕, 김기택에 이르기까지 숱한 시인들을 만났고 그 시인들의 다음 시집을 기다리며 이제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삽십대 중반이 되었다.

  문학에 처음 눈뜨고 정호승, 이승훈, 김지하, 박노해, 정희성, 김용택, 신경림, 곽재구, 조태일, 양성우, 하종오, 임영조, 김남주, 함민복, 최승호, 김정환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인들의 좋은 작품들이 내 안의 문학적 감수성을 일깨우던 시절이었다. 나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삶의 진정성에 대한 숱한 불면의 밤들을 함께 한 시인들이었다. 문지와 창비는 그렇게 정신의 두 다리처럼 한발 한발 나와 함께 어깨 겯고 나아가는 동지와 같다. 그렇게 나를 키운 시와 시인들은 ‘사랑’을 만들어 주었고, 우리 둘은 모두 학생들에게 그 때 읽었던 시와 시인들을 가르치는 국어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시집들 속에서 아이들이 자란다. 손때 묻은 책들이 아이들을 키울 것이고 시간은 또 그렇게 흘러갈 듯 싶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 (뼈아픈 후회,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220) 중에서”가 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슬픔이 다하는 날 나는 길모퉁이에서 내 영혼의 마지막 연인을 떠나보내며 아름답게 죽어가리라 그런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고 담벼락 (내 영혼의 마지막 연인, 김태동, 청춘(224) 중에서)”에 낙서하는 심정으로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함께할 수 있는 세월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책으로 남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것은 상상력의 종말을 뜻했다 (청춘, 박용하, 영혼의 북쪽(236) 중에서)”고 선언한 시인의 말이 부정될 수 있는 학교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닻을 내린 정신, 그것은 한국이란 말처럼 욕되었다”는 지나칠 수 없는 현실들에 딴지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서로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으면서
서로를 알았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야
이 말에 소금인형은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 그녀에게서 몸을 빼다 (김윤배, 부론에서 길을 잃다(258)

  군더더기 없이 사랑에 대한 담백한 선언들과 감성의 떨림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영원히 지속될 인간에 대한 사랑과 세상에 대한 열정이 시와 문학의 힘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지 않다.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이성복, 아, 입이 없는 것들(275) 중에서)”라고 말하는 시인의 말에 동의할 수 있도록 훈훈함이 세상에 가득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때로 삶이 힘겹고 고통스럽겠지만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위로가 시의 힘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젖다 다시 홀로 스스로의 길로 걸어 돌아갈 때 언뜻 스쳐 지나가는 부드러우면서도 삐걱거리는 외로움을 마음에 새겨두라. (무인도, 박주택, 카프가와 만나는 잠의 노래(287) 중에서”는 말을 깊이 새겨 둔다.

  멀지 않은 곳에 죽음이 당도해 있다. 짧은 생에 대한 소망과 통찰은 모두 다른 형태로 실제 생활에 투영된다. 지금 이 순간 삶의 환희와 고통, 행복과 절망을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가끔 켜켜이 먼지 앉은 옛날 시집을 펼쳐보는 순간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겠다.


2005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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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 살림지식총서 76
홍성민 지음 / 살림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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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학년도 대입제도 변경에 따른 사회적 파장이 만만치 않다. 한 두번 겪는 일도 아니어서 이제는 냉소만 흘린다. 정치권과 교육부, 서울대를 비롯한 대학들의 태도는 국민 대다수의 희망과 정서는 고려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듯 보인다. 물론 정서의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되겠지만, 교육 문제를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일관성있게 추진하는 것이 그리 힘든가. 정치 논리와 대학들의 안이한 기득권 싸움은 혐오스럽다. 냉소와 비판이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없지만 사실 제도권 교육의 환경 변화를 공평한 경쟁의 장으로 바꾸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 지도 모른다. 부르디외의 이론과 실천은 이런 한국적 현실에도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살림 지식 총서 76권 홍성민의 <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는 이론과 현실의 비교정치학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그의 학문적 성과와 사상이 우리 사회에 어떤 모습으로 적용될 수 있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지 비교적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쉽게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프랑스 사람들조차의 그의 불어를 읽어내기 힘들다는 저자의 말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수많은 저작과 논문들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들만을 골라 소개한 책이다. 그것은 아비투스, 상징적 폭력, 장이론으로 요약되어 있다.

  부르디외의 학문과 사상은 프랑스 사회의 제도적 모순과 권력지배에 대한 저항정신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프랑스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보편성을 가치를 지닌다. 모든 이론과 사상은 학문과 이성의 발달이라는 목적에서 벗어나 현실의 적용 문제가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부르디외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소부르주아 출신의 부르디외가 프랑스 사회에서 느꼈던 모순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도 유효하며 마르크스의 계급과 베버의 계층의 변증법적 지향점들을 정확히 제안하고 있는 탁월함을 찾아볼 수 있다.

  “학문의 임무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 불평등과 모순을 들추어내고,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투쟁의 무기와 같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 점이다. (본문 11페이지)”는 말이 지식인의 참모습을 대변한다. 인간의 행동은 엄격한 합리성과 계산을 근거로 행해지기보다는 일정한 기억과 습관 그리고 사회적 전통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지금 현재 우리들 삶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겠다. 우리가 지닌 사상과 계급의식이 현실 정치와 사회에 어떤 모습으로 반영되는지 아픈 성찰의 잣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르디외는 개인의 상징 자본의 차이가 취향의 편차를 낳는다고 말한다. 즉 경제자본 뿐만 아니라 문화 자본의 중요성을 일깨워 무의식적 선택과 개인적 취향을 아비투스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를 상징적 자본의 합법적 독점체로 볼 수 있는 근거를 부르디외는 학교 제도를 통해 설명한다. 교사들의 성향과 교육 방법은 그들의 선발과정들을 통해 학생들을 지도하고 평가하는 또하나의 상징적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하는 대목에서는 모골이 송연해진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층적 위계를 규정하는 신분적 질서는 학력이나 가정의 배경으로부터 유래하며, 이것은 나아가 경제적 잉여의 왜곡된 배분으로 이어진다. (본문 42페이지)”

  대입 제도의 논술 문제에 대한 적확한 답이 여기 있다. 서울대의 사회 경제적 헤게모니는 미래에도 유효할 것이며 그것은 불공정한 평가 방식으로 문제가 확대된다. 서울대를 비롯한 각 대학의 논술 문제를 보면 무슨 말인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제도권의 정상적인 학교 교과 교육과정을 통해 해결하기 힘든 방식의 평가는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겠다는 대학들의 단순무식한 논리와는 달리 문화 경제 자본의 불평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일종의 상징적 폭력인 것이다. 기여입학제의 문제는 수그러들지 않고 입시철마다 반복되는 이유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홍성민의 부르디외의 논의를 받아 우리의 현실을 정확하게 짚는다.

  부르디외가 진단한 프랑스 사회 문제가 학교제도를 통한 신분적 위계질서의 재생산이었다면, 필자가 진단하는 한국사회의 교육 문제는 이러한 계급적 질서의 재생산 이외에 서구의 문화적 강압효과가 우리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이른바 오리엔탈리즘 또는 후기 식민지성 논리의 중첩이다. (본문 55페이지) …… 부르디외의 문화 분석이나 교육분석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 첫째, 교육의 변화가 제도의 개선에만 머물러서는 충분하지 못하며, 학교체제를 둘러싼 기타의 사회적 장이 함께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 제도의 개선은 언제나 개인적인 심성의 변화와 분리되어 사고될 수 없다는 것이다. (본문 57페이지)

  논의의 초점이 흐려지면서 교 문제가 단순히 입시제도의 변화 문제로 비춰지는 경우가 많다. 홍성민의 말처럼 학교를 둘러싼 사회적 장과 함께 개인적 심성의 변화를 위해서는 전체 구성원들의 고민과 합의를 이끌어내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사회에서도 여전히 큰 울림을 가지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이론과 사상은 ‘실천’의 문제와 결합되어 있다. 탁월한 사상과 관점이라도 발전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면 지적 유희나 학문의 영역으로만 남겨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는 점에서 그와의 만남은 소중하다. 국가와 교육제도 만큼은 개인들의 평등하고 공정한 게임을 노력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이리라. 그 의무를 위해 신자유주의 반대 목소리를 높였던 말년의 부르디외는 실천하는 지식인었다.



2005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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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책들의 도시 2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 들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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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책에 관한 소설을 기대한다면 이 소설은 한 발 비껴 서있다. 책이 주는 의미와 역할들, 상상속의 공간에서 고스란히 작가의 숨결과 육성을 느끼고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측면에서 책들이 꿈꾸는 도시를 상상했다면 실망하게 된다. 다만 상상속의 동물과 부흐하임의 지하묘지 부흐링에서 펼쳐지는 환상과 모험의 어드벤처가 있을 뿐이다. 물론 그 상상력의 힘과 살아 숨쉬는 책들이 주는 의미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가족 동굴에 들어간 주인공 미텐메츠는 ‘오름’에 취하게 되고 부흐링 족에게 인정 받는다. 부흐링족은 한마디로 인생 자체가 책이다. 책을 읽으면 배가 불러지는 이 종족은 누가 뭐래도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꿈의 모델이 될 수도 있을 듯싶다. 결국 책 사냥꾼들과 롱콩코마의 침략으로 미텐메츠는 우여곡절 끝에 그림자의 성에 들어가 그림자 제왕인 ‘호문콜로스’를 만나게 된다. 예정된 만남으로 그림자 제왕의 비밀을 알게 되고 그의 이야기를 통해 미텐메츠가 모험을 시작하게 된 원고의 작가가 바로 그림자 제왕임을 알게 된다. 미텐메츠는 스마이크의 계략에 하르펜슈톡가 협조했고 부흐하임 전체가 스마이크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 사정을 듣게 된다.

  지하묘지에서 스마이크 삼촌의 유언장을 발견하고 모든 진실을 파악하게 된 그림자 제왕과 미텐메츠는 키비처와 슈렉스의 도움으로 미로를 빠져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었고 묘지의 모든 책 사냥꾼들과 대결하게 된 순간 부흐링족의 도움으로 롱콩코마까지 죽이고 드디어 스마이크의 고서점까지 올라와 하르펜슈톡과 스마이크에게 복수한다. 주인공 공룡 디노사우루스는 부흐하임에서 오름을 경험하면서 그동안 겪은 모험을 책으로 출판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꿈꾸는 책들의 도시>이다.

  책에 관한 많은 책들이 있다. 하지만 이 책처럼 책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고 살아 숨쉬는 책들이 등장하는 책은 없었다. 책에 눈이 달려 독자를 쳐다보고 여섯 개의 다리가 달려 있어 움직이기도 하며, 한숨을 쉬기도 한다. 모든 상상이 실현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숨쉬는 현실의 벗어날 수 있는 상상의 빈 자리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 상상의 공간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지는 독자의 몫이다. 작가에 대한 애정과 관심 그리고 책에 대한 환상을 모험의 공간으로 만들어 낸 작가의 상상력에 경의를 표한다.

  유아기 물활론(物活論)적 사고 방식은 우리에게 신선함과 순수한 동심을 전해준다. 처마 끝에서 땅바닥에 일렬로 불규칙으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빗방울이 뛰어간다”고 외치는 꼬마들이 대표적인 예가 된다. 모든 것을 살아 있는 생명체로 파악하는 것은 상상력의 출발이 된다. 방안 가득 책꽂이의 책들이 나를 지켜보며 자기들끼리 대화를 하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상상은 누구나 한번쯤 해보지 않을까 싶다. 그 생각은 작가를 움직였고 소설이 되었다. ‘발터 뫼르스가 독자에게 붙이는 말’은 사족으로 느껴져 아쉽다. 다음 소설에 대한 독자의 견해를 묻는 내용과 이메일 주소가 책장을 덮기 직전, 모든 것이 현실속의 상상이었음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림자 제왕과 공룡의 모험담으로 그치지 않고 책들이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흥미진진한 사건과 속도감 넘치는 전개는 한 편의 재밌는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잠시 동안의 휴식과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배낭 속에 꽂혀 가기에 적당한 책이다. 별이 쏟아지는 밤 책장을 넘기다 잠들고 싶다면, 잠시 현실을 잊고 싶다면 <꿈꾸는 책들의 도시>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2005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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