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기완을 만났다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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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삶은 지루하고 피곤한 일상의 연속이다. 때때로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만들어내고 또 그 위에 희망을 덧칠한다. 하지만 그것이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어쩌면 모든 사람은 비루하고 누추한 세상을 견뎌내는 힘겨운 투쟁을 매일 견뎌내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단 한번뿐인 인생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는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수많은 자기계발서와 확고부동한 인생의 목표조차도 ‘왜’라는 질문 앞에서는 맥없이 무너지기 쉽다. 삶은 쓸쓸하고 외로운 법이다.

한 인간의 섬세한 삶의 결을 들여다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 관음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현실 세계의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소설 속의 주인공과 치환시키려는 노력은 모든 독자들의 음험함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관심은 드라마, 영화, 소설 등 수많은 서사를 통해 안도의 한숨을 이끌어낸다.

다른 사람들의 삶과 조금 특별한 인생에 대해, 개성적인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우리는 식지 않는 열광과 냉소를 분출한다. 조해진의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는 바로 그러한 욕망의 이름으로 읽힌다. 벨기에 브뤼쎌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탈출 청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서술자의 욕망과 내면 풍경은 우리들의 그것과 멀지 않다. 그것이 소설이든 일상이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로기완은 이 소설의 보이지 않는 주인공이다. 한 번도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 이상한 소설. 작가는 서술자의 눈과 귀와 생각을 통해서만 로기완을 형상화한다. 잡지에 난 기사를 보고 문득 로기완을 찾아 떠나는 방송작가가 이 소설의 서술자다. 그녀의 주변인물은 이 소설에서 벨기에로 떠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두기에 애매한 PD와 방송 취재중 알게 된 신경섬유종을 앓고 있는 윤주. 두 사람은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핑계일 뿐. 로기완이나 그녀의 소설쓰기와 무관해 보인다.

그래서 이 소설의 주인공은 159센티미터 47킬로그램의 스무살 탈북청년 로기완이다. 벨기에 브뤼쎌에 도착해서 떠날 때까지 그의 행적을 뒤쫓는 것이 이 소설의 목적일까. 누군가의 삶을 추적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다만 그것은 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독자들의 욕망이며 그 삶을 통해 나를 돌아보려는 반성적 고찰에 불과하다. 일상이 평화로운 자, 죄의식도 없이 고민하지 않는 자, 삶의 의미와 세상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궁금하지 않는 자는 이 소설이 지루하고 무의미할 것이다.

물론 특정한 사람에게 재미없고 따분한 소설이 무슨 대단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소설 읽기의 출발과 마지막이 결국 ‘지금-여기’를 돌아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이 소설은 유목민에 불과한 우리 모두의 발자취에 대해 고민해 보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서술자가 아니라 바로 로기완이 되어 이 소설을 읽어보자. 누군가의 시선으로 추측하고 읽어낸 것들과 로기완이 경험하고 생각했던 일들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일이 모든 인간관계의 전제가 아닌가. 우리는 모든 것을 아는 척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다. 타인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없는 지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의 삶과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는 단서들이란 어쩌면 생각보다 지나치게 허술하거나 혹은 실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 9쪽

작가의 말대로 허술한 것, 실재하지 않는 것들에 매달리는 일은 우리들의 일상에서도 매일 반복된다. 어쩌면 나와 너, 나와 세계의 관계는 영원히 허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견뎌내기 위한 마취제로 사용되는 사랑, 우정, 배려 등의 정서적 교감이나 정의는 세상을 지탱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지도 모른다.

로기완은 결국 세상에 이방인이 되었다. 부모도 국적도 갖지 못한 채 이국에서 남은 생을 살아야 하는 유목민.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그의 존재를 증거하는 작은 단서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쓸쓸한 뒷모습과 대면하는 순간 그는 로기완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이다. 로기완이 관심을 가졌던 노래 ‘노킹 온 헤븐스 도어’는 천국을 꿈꾸는 인간의 영원한 간절함이기 이전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을 꿈꾸는 비극을 말해준다.

사랑하는 사람, 종교의 절대자, 불같은 신념, 도달하고 싶은 권력, 갖고 싶은 물건 등 인간이 의지하고 노크하는 수많은 대상들은 나를 완성하는 도구가 아니라 쓸쓸한 인생을 위무하는 삐에로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작가는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독자가 아닌 로기완에게 바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말도 듣고 싶어하지 않을 것 같은 무표정한 로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로, 이것이 바로 내가 들려주고 싶은 나의 이야기이다. - 189쪽


110605-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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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홈
황시운 지음 / 창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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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 무엇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걸까
난 지금 어디로 쉬지않고 흘러가는가

난 내 삶의 끝을 본적이 있어
내 가슴속은 갑갑해졌어
내 삶을 막은 것은
나의 내일에 대한 두려움
반복됐던 기나긴 날 속에
버려진 내 자신을 본 후~
나는 없었어 그리도 또
내일 조차 없었어
내게 점점 더 크게 더해갔던
이 사회를 탓하던 분노가
마침내 증오가 됐어
진실들은 사라졌어 혀 끝에서~

YOU MUST COME BACK HOME
떠나간 마음보다 따뜻한
YOU MUST COME BACK HOME
거칠은 인생속에
YOU MUST COME BACK HOME
떠나간 마음보다 따뜻한
YOU MUST COME BACK HOME
나를 완성하겠어
다시 하나의 생명이 태어났고
또 다시 부모의 제압은 시작됐지
내겐 사랑이 전혀 없는 걸
내 힘겨운 눈물이 말라버렸지
무모한 거품은 날리고 흠~

주위를 둘러봐 널 기다리고 있어
그래 이제 그만 됐어 나는 하늘을 날고싶었어
아직 우린 젊기에 괜찮은 미래가 있기에
자 이제 그 차가운 눈물을 닦고 COME BACK HOME~
YOU MUST COME BACK HOME
떠나간 마음보다 따뜻한
YOU지금 어디로
쉬지않고 흘러가는가  

- 서태지와 아이들 '컴백홈'
 


상표를 떼지 않은 옷을 입고 쓰러질 듯 무대를 휘젓는 서태지, 양현석, 이주노의 모습은 등장부터 충격적이었다. 폭발적인 반응과 주목을 받으며 대한민국 가요계를 평정했던 ‘서태지와 아이들’은 세기말의 문화 코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노래와 몸짓과 이미지는 기존의 가요계의 문법을 뒤흔들었고 그야말로 ‘아이들’의 잠재된 충동과 욕망을 폭발시켰다. 질서와 규범의 파괴는 따분하고 지루한 일상에 충격을 주었다. 서태지는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했다. ‘교실 이데아’와 ‘컴백홈’의 가사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다. 더구나 그 때는 어떠했겠는가.

황시운의 장편소설 『컴백홈』은 멈칫거리지 않고 땀 흘린 후에 마시는 이온음료처럼 흡수해버렸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미덕중의 하나가 ‘재미’라는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은 일단 재미있다. 쉼 없이 막힘없이 책장이 넘어가게 만드는 능력은 작가의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이다. 서태지 키드라면 아련한 추억에 젖을지 모르지만 소설의 내용은 서태지와 무관하다.

슈퍼울트라 개량돼지라 불리는 박유미는 130kg에 달하는 거구의 왕따 여고생이다. 극단적인 외모를 가진 주인공 유미의 생각과 행동은 출구 없는 현실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초등학교 절친 지은은 고등학생이 되어 일진이 되고 직접 유미를 구타하고 돈을 갈취하면서 우정을 유지하는 기괴한 형태의 친구가 된다. 이들의 관계는 단순히 불량 청소년들의 일탈 행위를 보여주고 그 원인을 사회적 현실로 돌리는 식상한 청소년 소설의 문법에 기대지 않는다. 서태지를 축으로 그의 노래와 환상적 이미지는 유미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가 된다.

다이어트, 안나수이, 프링글스, 다이어트 등 소설에 등장하는 감각적인 소재와 10대 소녀들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이 소설은 절망과 불안에 대한 보고서로 읽힌다. 서태지는 90년대 청소년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희망’은 그저 현실을 견뎌내는 마취제가 될 수 없다. 작가는 어줍잖은 희망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다만 유미가 꿈꾸는 달의 이면을 생각해 보게 한다. 도달할 수 없는, 단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달의 뒷모습은 어떨까. 우리는 어른이 되고 나면 하늘도 달도 별도 쳐다보지 않는다. 코앞에 놓인 현실만 생각한다. 팍팍한 생활 탓이라고 하기엔 슬프지 않은가. 아무리 삶의 무게가 우리의 어깨를 짓누른다 하더라도 말이다.

사람들은 툭하면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들 했다. 그런데 어떤 순간이 적당한 때인지를 가르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살다보면 누구나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걸 알게 되는 삶의 순간이 저마다 정해져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이에 걸맞는 행동과 삶의 패턴이 있다. 그러나 철들지 않겠다는 꿈을 꾸는 것이 유치한 생각일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때’를 알고 그 때에 맞춰 공부를 하고 직업을 선택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노후를 준비하면 행복은 저절로 보장되는 것일까. 과연 인생에서 우리가 찾아야 하는 값진 비밀은 무엇일까.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고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유미처럼 달에 가고 싶은 마음을 떨쳐 버릴 수는 없었다. 서태지와 함께 달에 가려는 유미의 꿈은 이루어질까.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이라는 장석남의 시가 생각난다. 무언가 그리운 것이 있다는 것은 삶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증거다. 유미는 늘 서태지를 그리워하고 지은이를 그리워한다. 가족과 친구로부터 멀어진 유미가 서태지를 그리워하고 달에 가고 싶어하는 것은 어쩌면 생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유일한 방편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유미와 미혼모가 될 지은이를 통해 삶의 비극과 희극이 어떻게 다른지 묻고 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양상은 거리에 있지 않고 내가 걷는 길과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

올해 마흔이 된 서태지는 최근 이지아와의 결혼과 이혼 문제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현실 속의 서태지도 유미만큼 괴롭고 힘겨운 시간들을 견뎌낸 것은 아닐까? 유미는 서태지와 함께 달에 가서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아니, 유미는 서태지를 진짜 좋아하긴 한 걸까.

우울한 일탈 청소년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은 건강한 웃음과 밝은 모습으로 현실을 그려내지 않는다. 청소년들에게 권하기도 불편하고 성인들이 읽기에도 그리 탐탁하지 않은 면에 대해서 무어라 말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이물스러움은 소설이 현실과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소설에서 보여줄 수 있는 상상력과 문장을 이끌어가는 힘이 문제가 아니라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세계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고루한 독자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세계의 문제다. 작가의 말대로 다음부터 점점 더 쉬워졌으면 좋겠다.

모든 일은 처음이 힘들 뿐, 그다음부터는 점점 더 쉬워지게 마련이다. - 222쪽


11052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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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 문학과지성 시인선 390
김광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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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 모든 사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특히 익숙한 것일수록, 오래된 것일수록 우리에게 많은 말을 건넨다. 그것은 사물에 투영된 우리들 의식의 반영일 뿐 아니라 생활 속에 배태된 사유의 본질을 의미한다. 언어는 사람됨을 규정하고 우리의 의식을 특정한다. 언어의 한계의 우리의 한계이며 생각의 범주이고 삶의 테두리가 된다. 그렇다면 언어를 확장하는 과정이 외부의 세계를 확장하는 일이 아닐까.

평범한(?) 삶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창작 행위를 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 말은 옳으면서 그르다. 동일한 생활 패턴을 반복하다보면 생각의 범위와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작가들이 하나둘씩 교수 자리를 꿰차거나 샐러리맨의 평범한 일상을 즐기고(?) 있는 것이 독자의 입장에서는 불편하다. 뭐 특별한 감흥이나 다른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상상력과 발군의 글솜씨를 가졌다 하더라도 한정된 세계에서 특별함을 창조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신현림의 말대로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지지 못한다면 문학은 고급 살롱의 언어 유희에 그칠 위험이 있다. 세기말의 혼돈과 새천년의 희망을 지나 자본주의가 굳건하게 세계를 지배하고 경쟁질서가 공고한 사회에서 문학의 역할은 과연 어떠해야할까.

노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잠깐 상념에 잠긴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유명한 시인 김광규의 시를 오래 읽어왔다.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아니다 그렇지 않다』, 『좀팽이처럼』, 『아니리』,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처음 만나던 때』, 『시간의 부드러운 손』 등 편안하면서도 일상속에 숨겨진 작은 비밀들을 감각적으로 묘파할 줄 아는 시인 김광규의 시선은 나이와 함께 무디어진다. 여전히 일상에 매몰되어 있는 생의 감각들을 되살려내고 있지만 예전 같지는 않다.

저녁나절

썰물이 빠진 뒤
뭍으로 길게 닻을 던진 채
개펄 바닥에 주저앉아 나른한
오후를 보내고 있는 거룻배들
정물로 머무는 동안 소금의
하얀 발자국 조금씩 드러날 때
말나루 먼 바다에서 아련히
밀물 들어오는 소리
갈대숲 어느새 물에 잠기고
물새들 날카롭게 지저귀고
잠에서 깨어난 거룻배들
물 위로 떠오르고
황혼의 냄새 불그스레 번져갈 때
조약돌처럼 널리 땅 위의 기억들
적시며 밀려오는 파도
어두워가는 여생의 하루


그것은 세월과 나이의 힘이며 절정을 지나 생을 마감하는 시인의 조근조근한 말투처럼 여겨져 옷깃을 여미게 한다. 환한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밀려오기 전, 말로 표현하기 힘든 빛의 여운과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운 시간을 나는 ‘푸른 시간’이라고 부른다. 시인도 저녁나절 그 시간에 또 하루가 저물어 가는 아쉬움을 ‘어두워가는 여생의 하루’라고 했을 것이다.

김광규 시인의 시는 어깨에 힘을 빼고 툭툭 던지는 쨉처럼 상대를 긴장시키고 거리를 조절한다. 시는 언제나 독자들에게 편안한 긴장을 주는 언어의 견고한 구조물이다. 헐렁하고 편안해 보이지만 단단하게 잘 빚은 백자 같은 기품이 있어야 오래 여운이 남기 마련이다. 쉽게 읽히지만 단순하지 않고 오래 기억하고 싶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는 언어의 바다.

나뉨

소형 임대 아파트 주민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오고 가지 못하도록
주상복합 고층 아파트 입주자들이
통로를 막고
길에 철조망을 쳤다
그렇다
우리는 예부터 나누어진 겨레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다

분노와 절망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데도 슬픔이 배어나오는 시인의 목소리가 좋았다. 당연히 주목해야 하는 이웃의 모습, 상식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인간에 대한 예의가 무엇인지 말해주는 것 같은 김광규의 시는 통렬한 풍자보다 쉽고 간명하다. 계급과 계층이라는 말을 몰라도 눈에 보이는 일상에서 생각해 보자고 요구하는 낮은 목소리가 더 멀리 울려 퍼지기도 하는 법이다.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삶은 끊임없는 연속입니다
쉴 새 없이 뛰는 심장
숨 쉬는 허파
가슴속에 품은
사랑도 그렇지 않은가요
산책을 하다가 피곤하면
길가의 벤치에 앉아 잠시
쉬어가듯이
우리의 삶도 사랑도 그렇게
가끔 쉴 수 있다면
좋으련만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단 한 순간도 쉬지 않는 심장, 처럼 우리들의 삶도 멈추지 않는 걸까. 우리들의 사랑도 그러한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숭산 스님의 말씀처럼 오직 모를 뿐!

고희를 맞은 시인의 눈에 비친 세상은 한결 고즈넉해 보인다. 편안하게 일생을 살아온 명예교수의 뒷짐과는 또 다른 고요함의 세계 같은 것이 이 시집 곳곳에 배어 있다. 여행의 기록이 지루하게 펼쳐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일상에서 길어 올린 시편들이 가슴을 울린다. 잔잔하지만 넓은 파문을 일으키는 그의 몰년이 시집의 마지막이다. 하지만 아직, 그의 몰년을 말할 때는 아닌 것 같다. 조용히 스러지는 김광규의 시들은 푸른 시간에 읽기 좋다. 아니면 몰년 부근에.

몰년(沒年)

죽은 이는 그해까지 살았습니다.
예측 못한 미래를 끝내고
사후(死後)를 남긴 셈이지요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 …… 나머지는
괄호 안의 빈칸 속에서
갑갑한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산 자들의 몫입니다



110513-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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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양장) - 조선의 문장가 이옥과 김려 이야기
설흔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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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앞에서 모든 인간은 겸손해 진다. 그래서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는 사람은 내일 죽을 것처럼 현재를 즐긴다. 하지만 순간을 영원으로 빛내는 문자는 인간의 육신과 달리 오랜 시간을 견디고 또 견뎌낸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른다. 문학은 선택적으로 기록된 역사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구체적인 모습으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역사는 살아 숨 쉬게 된다. 몇 줄의 기록과 시대적 상황이 작가의 상상력과 만나면 우리는 과거를 볼 수 있다. 시공간을 넘나들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꿈꾸는 문학은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말을 건넨다.

기록과 보존에 부실하여 씨줄과 날줄처럼 한 인물의 삶과 그의 글들이 엮이지 않을 때는 그 빈 공간을 채우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우리는 언제나 행간을 읽어내며 시대를 통찰하고 현재를 조망한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 기록의 재현이 아니라 당대의 삶을 생생하게 되살려내고 싶은 욕망이며 우리가 걸어온 길에 대한 호기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나간 시간을 돌아볼 수 있는 고전은 언제나 우리에게 색다른 즐거움과 반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설흔의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는 소설의 형식으로 풀어낸 팩션(fact+fiction)이다. 절친한 두 사람의 삶과 글은 서로 얽히고설켜있다. 이옥(1760~1815)과 김려(1766~1821) 바로 그 문제적 인물들이다. 두 사람은 정조의 문체 반정에 연루되어 불행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태도와 그 후의 삶은 사뭇 대조된다.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했던 18세기에 경박한 소설식 문체인 소품체(小品體)로 글을 썼던 이옥은 천상천하 유아독존 왕의 눈밖에 난다. 그의 삶은 그걸로 끝난 것과 다름없다. 그에 비해 김려는 조금 나았을 뿐 평생 가슴에 멍에를 지고 살았다. 그러면 두 사람의 관계를 상상하게 된 작가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아무도 이옥의 아들이 김려를 찾아와 문집을 내달라는 데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평생 이옥이 쓴 글들을 읽으며 김려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경상도 삼가현으로 귀향 가는 길에 쓴 『남정십편』과 삼가현에서 쓴 『봉성문여』가 대표적인 이옥의 소품이다. 결국 이옥은 자신의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고 볼 수 있다. 이옥에 비하면 평범한 글에 안주해 버린 김려의 회한을 상상하며 작가는 두 사람을 모델로 소설을 썼을 것이다.

문(文)으로 도(道)를 실천한다는 재도론(載道論)이 시대정신이었던 조선에 태어나 재기발랄한 글로 자신의 재능을 감출 수 없었던 이옥의 생애와 사상은 이 소설에서 김려의 관점 재조명된다. 소설적 감동은 이옥이 친구의 귀향지를 따라 방랑한 사실을 그의 아들을 통해 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역사적 사실을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담아냈지만 이 책은 소설로 읽기에는 로 아쉽거나 혹은 아까운 부분이 많다.

이 책을 보면서 2006년에 나온 『고전문학사의 라이벌』(한겨레출판)을 떠올린 건 자연스런 일이다. 정출헌의 ‘이옥 vs 김려’ 편을 다시 꺼내 뒤적인다. 보다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부분들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두 인물이 생동감 있게 살아 숨쉴 수 있도록 영혼을 불어넣은 공은 당연히 작가 설흔에게 돌아간다. 딱딱하고 재미없는 고전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다시 살려내는 일은 후세 사람들의 자연스런 욕망일까?

이옥은 그런 사람이었다. 아무리 빈궁하고 어려워도 자기의 마음이 거절하는 일은 도무지 하지 못하는 사람. - 147쪽

소설가 김훈은 “신념이 가득한자, 자신이 정의롭다고 확신하는 자들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의문이 가득한 자들을 신뢰한다.”고 말했지만 이옥은 신념이 강한 선비도 아니었고 정의를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도 아니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이옥과 김려의 우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문체 반정의 이면을 파헤치고 시대정신을 되돌아본 것 같다. 글은 틀 안에 가둘 때 생명을 잃고 마는 것이니 네모난 시대의 사각형 글에서 벗어난 글들이 견딜 수 있었겠는가. 빵빵한 집안의 박지원처럼 놀고먹으며 살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옥의 존재감이다. 김려의 환상 속에 잠시 등장하긴 하지만 주인공격인 이옥은 이야기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김려의 이옥의 아들이 주고 받는 대화, 김려의 기억과 현재 상황들이 맞물려 추리소설처럼 정교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청소년들 뿐만 아니라 누구든 재미있게 읽으면서 당대를 이해할 수 있는 책으로 추천할 만하다. 이덕무를 다룬 『책만 보는 바보』와 다른 스타일의 책이지만 조금 더 깊이가 있다.


110509-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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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 개정판 문지 푸른 문학
최시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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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오월이다. 햇살이 눈부신 오후 불곡산에 올랐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산란하는 태양은 등산로에 어른거리며 시원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아파트 숲을 거느린 산자락의 오후는 고즈넉했다. 도서의 허파 역할을 하는 중앙공원 도로 주변은 길 건너편까지 주차장이 되었고 사람들은 발 디딜 틈이 없었지만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를 조금만 벗어나면 어디나 푸른 숲에 갈 수 있는 대한민국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람들도 삶도 그러한가?

학교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전국의 학생들은 한줄서기를 끝냈다. 어린이날과 주말을 끼고 석가탄신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연휴가 계속된다. 돈이 없으면 부모, 자식 노릇하기도 어려운 현실에서 얼마나 많은 아이들과 노인들과 모두를 챙겨야 하는 어른들은 또 한숨을 내쉴지 모르겠다. 현실은 언제나 녹록치 않고 세상은 언제나 푸르게 빛나는 것만은 아니지 않는가.

책에는 있는 것 보다 없는 게 더 많으니까(하지만 그런 조용함이나 편안함 따위는 시험에 안 나온다). - 45쪽

아주 오래전에 발표된 청소년 성장 소설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반성이기 전에 현실에 대한 성찰로 읽힌다. 모든 인간이 태어나서 겪게 되는 사춘기는 그야말로 생각의 봄이다. 누가 사춘기를 겪지 않고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불행은 그 사춘기를 철저하게 망각하는 데서 시작된다. 아니 어쩌면 지나간 사춘기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고 후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을 중심에 놓고 있다. 1500여명의 대량 해고 사태를 맞으며 출범한 전교조는 1999년 7월에 합법적인 조직이 되었다. 20년의 세월이 흘러 세상도 변하고 학교도 변했지만 교사와 학생의 관계, 학교를 통해 학생이 배워야 할 가치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은 더욱 경쟁 위주의 대입 제도와 현실적 가치만을 요구한다. 입시 위주의 교육은 대다수 학생들을 사교육 시장으로 내몰았다. 교사가 노동자냐 아니냐의 문제를 넘어 참 삶의 주인이 되는 참교육의 깃발을 들었던 교사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소설에 등장하는 ‘왜냐’ 선생은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국어교사다.

주인공 선재의 성장 과정을 따라가며 사춘기의 방황과 내면적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소설이지만 그 갈등은 현실의 견고한 벽에 기인한다. ‘왜’라는 질문이 끝없이 생기기 시작할 무렵 아이들은 질문을 원천 봉쇄당한다. 그럴듯한 논리와 너를 위한 충고라고 던지는 말들은 모두 어른들의 시선일 뿐이다. 부모없이 세상을 견뎌야 했던 선재의 누나 입장에서 보면 제 앞가림을 해야 할 선재의 생각과 행동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청소년기에 당연히 거쳐야 하는 고뇌가 아닌가. 인간은 그 과정을 거쳐 성숙해지고 인간과 사회에 대해 깊은 고민과 성찰을 하지 않는가. 부모가 되면 왜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그 시간을 거쳐 어른이 되지 않았는가.

이 소설의 주인공 선재는 전형적인 사춘기 문학 소년에 불과하다. 현실의 모순을 관찰하는 관찰자에 불과하다. 왜냐 선생이 쫓겨난 후 온몸으로 저항하는 말더듬이 친구, 입시에 번번이 낙방하는 친구, 돈 많은 친구 등 그의 주변에는 우리 주변에서 여전히 흔한 아이들이 등장하지만 선재는 일기체 형식으로 고2에서 고3 여름까지의 시간들을 일기체 형식으로 적어나간다. 기존 질서에 저항할 수도 없고 세상을 버릴 수도 없는 미성숙한 존재로서 살아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이 소설은 현재진행형이다.

여전히 스테디셀러로 사랑받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공감을 얻고 이유는 단순하다. 선재의 고민이 여전히 해결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나 『수레바퀴 아래서』 같은 성장소설이 고전이 된 것은 시대와 상황이 변했지만 인간이 겪는 성장통에 대한 공감 때문이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선재가 겪는 방황과 내면적 고통, 현실적 모순에 대한 분노, 미성숙한 존재로서의 한계 등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는 문제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을 통해 국어교육뿐만 아니라 교육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가르치고 아이들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여전히 객관식 시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내 생각보다 모두가 그렇다고 인정할 만한 생각이 더 중요한 현실에서 한발도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닌가. 논술시험과 입학사정관제로 변화를 모색하고 있지만 성적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공정한 경쟁과 개선된 입시 제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다양한 방식의 교육과 자기만의 삶을 고민할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교사와 학생과 부모가 이 소설을 읽는 방식이 다르듯이 대한민국의 현실과 학교와 교육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도 제각각이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을 한 줄로 세워 모든 것을 규격화하고 다양성을 포기하는 교육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데는 동의할 것이다.

소설의 힘은 세다. 선재와 그 친구들이 이제는 어른이 될 만큼 한참 시간이 흘렀다. 세상은 조금 변했을까. 우리들의 교육은 어떻게 변했고 아이들은 또 얼마나 행복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이 아니라 모두 행복한 아이들로 가득한 세상은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세상에는 설명할 수 있는 일보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 108쪽


110505-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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