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71 | 72 | 7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악어떼가 나왔다 - 제1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안보윤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경찰청장의 아들이 마트에서 사라졌다. 배꼽에 악어 모양의 문신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모든 아이들의 배를 까볼 수는 없다. 사라진 아이 때문에 전국에는 미아 찾기 열풍이 불고 아이의 부모들은 미아 방지를 위해 아이 몸에 문신을 새겨 준다. 안보윤의 <악어떼가 나왔다>는 이렇게 코믹한 시트콤처럼 시작된다. 악어 문신은 사실 배꼽 옆에 난 점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 아이를 기점으로 순환적 알레고리가 형성되는 중편소설 <악어떼가 나왔다>는 10회 문학동네 작가상 수상작이다. 스물 다섯의 여성인 작가 안보윤의 ‘가능성’을 보고 선정했다는 성민엽의 말을 듣고 보니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소설의 완성도보다 가능성을 보고 읽어 내는 것은 평론가의 몫이지 독자들이 감당할 몫은 아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소설은 일단 재미있고 감동적이거나 정수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쏟아 부어줄 정도는 되어야 한다. 안보윤의 소설은 미지근한 물에 발을 담근 느낌이다.

코믹잔혹극이라는 장르가 존재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럴듯한 표현이라서 인용한다면 적절하게 어울릴만한 소설이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은 전통적인 미의식의 반영이다. 그 전통을 고전문학에서 찾을 필요도 없지만 오래동안 우리에게 큰 즐거움은 웃음을 통한 카타르시스였다. 후련한 배설과 같은 감정의 정화 작용은 소설의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는 아이들에 대한 과잉 보호, 미아에 대한 사회적 관심, 외모 지상주의, 자살과 살인에 대한 추억 등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되면서 혼란스럽기도 하다. 중편 소설의 분량에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얽히다 보니 간결하고 깔끔한 맛은 없다.

하지만 잔혹한 살인 장면과 일상의 필연성을 뛰어넘는 도약적 상상력은 이 소설의 가장 큰 재미이다. 빠른 속도로 사건을 진행시키다가 인물의 심리를 간접적으로 서술하는 장면에서는 작가의 의도인지 미숙함인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이후의 작품들을 통해 그녀를 판단해 볼 일이다.

영화 <조용한 가족>이 주는 재미와 긴장을 비교한다면 적절할 것 같다. 비일상적이고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문제가 현실에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것을 소설과 비교해서 소설같은 현실이라고 말하거나 현실같은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소설은 이미 나름의 영역을 구축해야 한다. 특정한 분야나 역할을 한정시키는 일이 아니라 활자 책의 종언을 예고하는 시대에 더구나 소설이라는 장르가 가진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만한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영화와 소설의 장르를 동종교배한다고 해서 슈퍼맨이 탄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은 특집극 분량 정도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있어 영화가 아니어도 영상물로 읽힌다.

다소 긴장과 극적인 재미가 떨어진다. 옴니버스식의 몇 가지 이야기들이 꼬리를 무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악어떼’가 말하는 진한 감동이나 충격은 쉽게 전달되지 않는다. 한강에서 무더기로 떠오르는 익사체가 ‘악어떼’인 것 같지만 현실에서 ‘악어’가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이 실감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꿈과 환상의 세계로 안내하는 마술적 리얼리즘과도 거리가 멀다.

새롭고 낯선 것을 나와야지 신인은 아니다. ‘가능성’만 믿고 나올 수도 없다. 나이가 무기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박민규의 쓰잘데 없는 인터뷰도 작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아직은 그녀의 보다 많은 작품들을 통해 독자들이 그녀를 알아가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문학의 위기(?)라고 불리워졌던 수많은 시대에 등장했던 작가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즐거운(?) 소설들을 독자에게 선보일 수 있는 작가가 되길 바란다. 독자가 기다리는 작가가 될 것인가의 여부는 그녀의 다음 작품이 말해줄 것이다.


060921-1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냄비는 둥둥 창비시선 265
김승희 지음 / 창비 / 200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갑자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들렸다

폭설의 밭 속에서 살고 있는 것들!
백설을 뻗치고 올라가는 푸른 청보리들!
폭설의 밭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들!
시퍼런 마늘과 꿈틀대는 양파들!
다른 색은 말고 그런 색들!
다른 말은 말고 그런 소리들!

하루를 살더라도 그렇게
사흘이나 나흘을 살더라도 그렇게!

<왼손을 위한 협주곡>으로 김승희를 처음 만났을 때 ‘언어의 테러리스트’라는 과격한 수식어에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오랜만에 다시 접한 그녀의 시는 많이 다르다. 시간의 무게도 세계관의 변화로도 설명할 수 없는 변화다. 시야가 넓어지고 생각이 깊어지는 것은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변화가 발전과 진화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변에서 너무 흔하게 발견한다. 표현과 상상력이 무뎌지지 않았다.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시인의 영혼과 만나는 일은 즐겁기만하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시인들에게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 중에 하나가 ‘사소함’의 발견이다.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 속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발견은 새로운 깨달음과 통찰이라기보다는 인식의 힘이다. 생명에 대한 관찰과 자연 속에서 발견되는 삶에 대한 단순한 성찰이 보편성을 획득한다. 누구나 나이 들어 그런 눈과 귀를 갖게 되는 것인지는 더 살아봐야겠다. 그것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이 감춰둔 사랑

심장은 하루종일 일을 한다고 한다
심장이 하루 뛰는 것이
10만 8천 6백 39번이라고 한다
내뿜는 피는 하루 몇천만 톤이나 되는지 모른다고 한다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가 1억 4천 9백 6십만km인데
하루 혈액이 뛰는 거리가
2억 7천 31만 2천km라고 한다
지구에서 태양까지 두 번 갔다올 거리만큼
당신의 혈액이 오늘 하루에 뛰고 있는 것이다
바로 너, 너, 너! 그대

그렇게 당신은 파도를 뿜는다
그렇게 당신은 꺼졌다 살아난다
그렇게 당신은 달빛 아래 둥근 꽃봉오리의 속삭임이다
은환의 질주다

그대가 하는 일에 나도 참가하게 해다오
이 사업은 하느님과의 동업이다
그 속에서 나는 사랑을 발견하겠다

김승희가 가져왔던 여성에 대한 관찰과 관심도 여전하다. 생활과 정치는 분리될 수 없다. 페미니즘이나 휴머니즘 같은 ism으로 거칠게 분류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시에는 뛰어난 상상력을 토대로 삶에 대한 지독한 사랑이 오롯이 솟아오른다.

한 가지 목에 걸리는 것은 신과 사랑의 문제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신과 사랑의 문제는 안일한 태도로 귀결되기 쉽다. 포근하고 따뜻한 신의 품에 안길 준비가 되어 있는 시인은 반쯤 눈을 가린 난독증 환자처럼 세상을 잘 못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법 아래서

가시오
서시오
대기하시오
일단 멈춤
우회
직진
비보호 좌회전
U턴
U턴 금지

口 속에서 사는 囚
口 속에서 쉬는 숨

계몽적 차원의 현실 비판은 독자들을 피곤하게 한다. 그러나 ‘口 속에서 사는 囚’는 언어의 형태와 의미를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한다. 부분으로 전체를 통찰하는 것은 어렵지만 참신한 상상력이 주는 힘은 무한하다. 현실에 대한 재해석은 새로운 상상력과 결합되어 시가 가지는 힘을 보여주는 듯하다. 고정희, 최승자, 김혜순 등 ‘여류’라는 편협한 시각과 한계를 지워버린 시인들의 시는 깊이와 넓이를 더해가리라 믿는다.


060922-1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문학과지성 시인선 321
남진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른여섯을 넘긴 다음부터
거을 앞에 서지 않는다 거울에 비친 내가
내게 무슨 말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내가 거울에 비친 내게 무슨 말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

서른여섯 거울 속의 나는 죽고
텅 빈 거울 속에 더 이상 나는 비치지 않고
거울 속 어두운 물 저편으로 흘러가
나는 흑사병이 도는 폐허의 도시에 도착한다
                                                              - ‘베니스에서 죽다’ 중에서

인간에게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재산이다. 소중한 이유는 선악, 오호의 감정을 넘어서 한 사람에게 인생은 단 한 번 밖에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직접 경험이든 간접 경험이든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의 마디 마디가 모여 우리의 전 생애를 이루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든 그것이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고 쌓여온 세월이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만든 것이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뒤로 한 채 하늘을 올려다 보아야 바뀌는 것은 크지 않다. 모든 경험은 자신의 세계에서 비롯되지만 ‘용기’만으로 인생이 뒤바뀌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윤동주의 ‘파란 녹이 낀 청동거울’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은 너무 많다. 눈을 뜨는 순간 만나는 모든 것들이 바로 거울이고 내 얼굴의 다른 모습들이다. 갇힌 공간과 좁은 현실에서 부딪히는 모든 것들이 부정할 수 없는 나의 자화상이다. 모든 사람들은 사물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꺼린다. 선택적 기억과 자신에 대한 안일한 태도, 미래에 대한 쓸데 없는 희망으로 치장한다. 계산된 위장과 가식이 아니라 눈감고 싶은 현실과 특별할 것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남진우의 시집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는 이런 현실에서 일탈한다. 쉽게 일탈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는 꿈꾼다. 영원히 우리의 일부이면서 ‘타자’로 인식하는 죽음까지도.

그 대상들이 사자와 악어 같은 짐승이다가 낯선 장소이다가 비가 내리는 기후이기도 하다. 낯선 세계를 꿈꾸는 자는 현실에 부유하는 의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길들여진 습관은 쉽게 벗어나기 힘들다. 지금-여기에 단단히 뿌리박지 못한 꿈은 유토피아를 꿈꾼다. 없는 곳을 꿈꾸는 자의 절망은 쉽게 드러나지 않고 현실과 환상 사이를 오간다. 남진우의 시는 그렇게 마술 같은 현실을 반영하는 만화경이다. 프리즘처럼 환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방 연속 무늬를 반복하는 만화경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보여준다. 내게는 그렇다.


얼마나 먼 길을 걸어 빗소리는
내 곁에 찾아온 것인지
깊은 밤 잠 깨어 내 머리맡 적시는 빗소리를 듣는다
비를 맞지 않아도 이미 빗소리만으로 나는 축축히 젖어
잠자리 위를 아득히 떠내려가고
연못가 흰옷 입은 여인들 버드나무 아래 울고 있다
그 울음 다 그치기 전 이 비는 또 누구를 깨우기 위해
먼 길 떠나는 것인지
가고 또 가버려도 빗소리는 남아서 내 머리맡을 적시고 있다
                                                                                   - ‘오래된 정원’ 중에서

누구에게나 비에 대한 기억은 있다. 오래된 정원에서 들리는 빗소리가 특별하진 않다. 세상 자체가 오래된 정원이다. 이 세상에 내리는 모든 비는 누군가를 찾아간다. 먼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는 주관적 판단과 인식이 독자와 공감할 때 시는 의미가 있다. 세상과 소통하는 모든 방식은 이기적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객관과 이성과 합리를 가장한 모든 주과적이고 개인적인 방식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혼란을 가져온다. 때때로 차갑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시인의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막 꿈에서 깨어난 듯한 나른함이 묻어난다.

여기가 어디인가, 새벽 세시에 목마른 사자 한 마리가 방 문 앞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 방문을 열자 사자의 꼬리만 슬쩍 비친다. 그가 기다린 것은 과연 사자일까. 동화적 상상력을 넘어선 자리에 대입할 수 있는 주관적 대상은 모두 독자의 몫으로 파악해야만 하는 막막함!

독서

독이 묻은 페이지를 넘긴다
나를 암살하기 위해 누군가 발라놓은 독을
침과 함께 나는 삼킨다
독 묻은 책을 읽는 것은 독에 잠겨 서서히 익사해가는 일
피 속에 움트는 날카로운 외침에 귀 기울이며
다시 페이지를 넘긴다
그 어느 시인도 독으로 일생을 살진 못했다
그가 남긴 독이 책에서 책으로 돌고 돌다
어느 한가로운 일요일 아침
책을 펼쳐든 나를 깨문다
서서히 독에 마비되어가는 몸을 젖히고
나는 책 속을 빠져나가는 독사 한 마리를 본다

무릇 모든 독서란
독사 한 마리씩 길들이는 일이니


이 시집의 마지막을 ‘독서’가 차置構?있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이후 특별할 것 없는 그의 시들은 여전히 낯선 감각 속에 살아 있다. 독서는 책을 읽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을 읽고 나를 읽는 것이다. 물론 ‘너’를 읽기 위한 모든 독서는 ‘너’를 길들이기 위한 행위이다. 독사와 독서의 유사성은 치명적인 ‘독’에 대한 해석이다. 읽는 행위가 독이 된다는 전제는 그 대상이 책이든 세상이든 사람이든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시인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반복되는 일상 속의 치명적 ‘독’은 아닐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중독성은 뿌리칠 수 없는 강렬한 유혹만큼 치명적이다.


061010-1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빛의 제국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을 보면 어둠 속에 빛이 아름답다. 저물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숲속의 외등에서 퍼져나가는 부드러운 빛은 손에 만져질 듯 따뜻한 온기를 전해준다. 그림은 이미지다. 하나의 이미지가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고 이성적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르네 마그리트의 다른 그림들처럼 비현실적이지도 충격적이지도 않지만 ‘빛의 제국’은 우리들 인식의 틀을 또 한번 두들기게 한다.

푸르고 맑은 하늘과 평화롭게 떠 있는 하얀 구름은 가장 일반적인 하늘에 대한 이미지이다. 그에 비해 어둠속에 웅크리고 있는 검은 그림자들의 배후에는 무엇이 숨어있는지 알 수 없다. 외롭게 서 있는 외등은 겨우 어둠을 몰아내고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보는 것같다. 어둠과 희미한 빛의 조화로움 때문에 눈이 부시지도 않고 특별히 주목을 받지도 못한 외등의 불빛은 푸른 하늘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과연 빛은 주변의 조건과 긴밀하게 관련된 개념일 뿐이다.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의미의 빛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네가 서 있는 그 곳이 어디냐고. 어떤 모습으로, 어떤 형태로, 왜 서 있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보호색에 불과한 빛의 이미지는 부드럽고 편안하지만 본질을 알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등장하는 이데아의 빛과는 다르다. 맹목적인 삶의 형태와 집단적 무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빛은 어떤 강렬함을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을까? 김영하의 장편소설 <빛의 제국>은 다른 소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준을 어디로 잡아야 하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실에 대한 반성과 성찰로 읽힌다.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느냐가 작가의 능력이라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빛의 제국>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

<빛의 제국>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에서 사용했던 시간을 사용한다. 표절했다는 말은 아니다. 하루동안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장편의 긴 호흡에 긴장을 불어넣지만 독자들을 긴장감있게 밀어붙이거나 다른 생각을 할 틈과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인공 김기영을 따라 다니며 그의 생각과 사고한 행동들을 통해 우리의 80년대를 반추하게 한다. 후일담 문학과는 거리가 멀지만 21세기 초반의 한국 사회를 분명하게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는 80년대와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진다. 남과 북의 분단상황에 대한 비극과 민족과 통일이라는 거대 담론에 대한 고찰은 이 소설과 무관해 보인다. 이 소설에 대한 오독일 수 있으나 남파 고정간첩인 김기영의 신분은 중요한 소재와 흥미로운 요소일 수 있으나 소설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한다. 그의 아내와 중학생 딸을 중심으로 파편화된 가족과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통찰이 엿보인다. 논의의 중심은 언제나 인간의 삶에 대한 통찰이다. 폴 발레리의 시구를 인용한 부분을 보자.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폴 발레리의 시구처럼, 그는 운명을 잊고 있었지만 운명은 그를 잊지 않고 있었다. - P. 200

아주 오래 전부터 기억하고 좌우명처럼 가끔씩 되내이는 말이다. 하지만 이 소설속에서 이 말은 역설적으로 읽힌다. 자신의 인생과 운명에 대한 오만을 지적하고 있다고 극단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운명과 생에 대한 선택권은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통찰은 신선하고 놀랍다. ‘생각한 대로’ 산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더구나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 자신의 삶에 끌려가는 수동적인 자세로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생각한 대로 사는 것만큼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의 생활 속에는 알면서 지키지 못하는 ‘운명’이나 ‘숙명’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회의 시스템 속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나 개인의 선택은 우습게 보이기도 한다.

알 수 없는 괴물같은 대상이 우리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악몽을 꾸는 것은 푸코가 말한 ‘판옵티콘’을 떠올리지 않아도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게 된다. 심지어 내 집으로 들어가는 아파트 엘리베이트에서 내리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지켜보는 그들의(?) 눈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한 편의 소설을 통해 무엇을 느끼고 배우고 확인하는 것은 모두 개인 독자들의 몫이지만 이 소설은 단편이나 중편으로도 충분할 수 있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김영하의 다른 소설과는 다른 종류의 다른 맥락의 시도는 신선하지만 개성을 벗어난 새로움이 늘 성공적일 수는 없지만, 현재 보다는 앞으로의 소설을 기대해 본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작가의 이런 말들이 오히려 소설 전체를 압도하는 생활의 재발견이 된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헤沮?돌아오는 길은 슬픈데,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어린 모습을 간직한 채로 늙어가기 때문이었다. 소년이 늙어 노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소년은 늙어 늙은 소년이 되고 소녀도 늙어 늙은 소녀가 된다. - P. 285


060918-1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손목에 수갑을 찬 숀 펜과 그 옆에서 발자국 소리만 공포스럽게 울려퍼지는 긴 복도를 함께 걷던 수잔 서랜든의 표정이 사진처럼 선명하다. 영화 <데드 맨 워킹dead man walking>에 대한 기억은 강렬했다. 개인적으로 1년에 50편 이상을 봐야 직성이 풀렸던 암중 모색기였고 영화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던 무렵이었다. 아마 숀 펜이라는 미국 배우의 연기를 주목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고, 그 영화를 만든 팀 로빈스는 <쇼생크 탈출>의 주연으로 강한 인상을 받았기때문에 더욱 호감을 가지고 봤었는지 모르겠다.


  소설 장르의 의미는 독자 반응 중심 비평이 이루어지기 시작하기 이전부터 다양하게 논의되어 왔다. 그런 논의에 이제 난 별로 관심이 없다. 주관적일지 모르지만 모든 것은 내 안에서 결정되는 이기적 소화방식 때문인지 모르겠다. 편견과 독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책읽기나 문학에 대한 역할론을 한마디로 결론 내렸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소설은 그저 모든 사람들에게 작은 목소리로 영혼의 울림을 전해준다. 그 울림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 모두의 행동이 되고 현실이 되기도 한다.
 
  빅토르 위고와 알베르 까뮈의 소설로 촉발된 사형제 폐지 논의는 프랑스에서 1980년이 되어서야 미테랑 대통령에 의해 종지부를 찍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민감한 문제를 문학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용기는 아무나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공지영의 소설은 놀랍다. 그것은 그만큼의 위험부담과 실패 가능성을 전제로 출발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공지영의 소설은 내게 늘 불편했다. 아니, 모든 소설은 늘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녀의 소설은 ‘특히’라고 말해야 옳겠다. 이유는 그녀의 말하기 방식이다. ‘울림’이 있는 말하기 방식이다. 감성을 자극하거나 행간을 건너뛰는 긴장과 유려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신경숙이나 은희경, 전경린이 앞선다. 내용이 문체를 결정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덮어두고 싶거나 외면하거나 애써 눈돌리지 않는 거적들을 걷어 올리며 냄새를 풍기고 조용한 비명으로 시선을 끈다. 그래서 불편하다.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했다. 오랜만에 책을 읽다가 눈시울이 붉어졌다.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공지영의 소설에 따라붙는 쓸데 없는 수식들은 그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편견일 수 있다. 공통분모나 같은 분위기를 털어내지 못했으니 어쩌면 당연했던 평가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장편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으로 그 논의는 일단락 되었다.

  새로움은 변화를 의미하고 변화는 작가에게 필연이다. 자연법과 사회계약설로 논거를 삼아 사형제 존치와 폐지론은 우리 사회에서도 지속적인 화제가 되어왔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행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문학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공지영의 다음 소설을 기다리게 하는 힘도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소설속 주인공 정윤수와 문유정은 극단적 대립항으로 등장한다. 그들이 공유하거나 서로의 상처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녀의 소설처럼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다는 경험 -그것이 서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서로 다른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을 공유하고 있다. 만약 여기에 초점을 맞추었거나 무게 중심이 상당부분 이동되었다면 끔찍했을 것이다. 사촌오빠에게 강간당한 경험이 있는, 세 번이나 자살에 실패한 문유정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형수 정윤수의 모습은 객관적일 수 없고 그것이 이 소설의 진실이다.

  “행위는 사실일 뿐. 진실은 늘 그 행위 이전에 들어 있는 거라는 거, 그래서 우리가 혹여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거……” 나는 이 한마디로 이 소설을 읽었다. 개별적 상황과 사건들에 해당될 수 있는, 문학의 역할과 본령을 토해내듯 하는 문유정의 처절한 외침이다. 이것은 우리들 삶에 대한 참담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외면해버리고 싶은 삶의 진실들을 바로 보거나 “몰랐다”는 말 한마디로 면죄부를 받을 수 없는 우리들 삶의 진정성을 들여다보고 싶어서.

  소설의 형식 또한 조금 색다르다. ‘블루 노트’는 정윤수의 유서 형식으로 죽는 순간 그의 진실이 되는데 이 노트는 시간상 소설이 끝나면서 시작되지만 소설의 처음부터 문유정의 시각과 교차되어 소설이 끝나면서 마지막 장을 보여준다. 각 장마다 예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다. 짧지만 강한 여운이 남는 글들은 쉽게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한참 들여다 보게 한다.

  좋은 책과 나쁜 책,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을 구별하라면 모?사람들의 기준이 다를 수 있으리라. 다만 그 기준의 공통분모는 ‘삶의 진실, 대리경험을 통한 생의 진정성’이 아닐까 싶다. 누가 감히 소설을 가지고 인생의 의미를 가르쳐 줄 것이며, 인생이 무엇이라고 말해 줄 수 있을까마는 다만 다양한 방식으로 소리 높여, 때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가 아닌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200505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71 | 72 | 7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