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의 속살 - '모국어의 속살'에 도달한 시인 50인이 보여주는 풍경들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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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
- 이성복, ‘연애에 대하여’,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중에서

  지금까지도 가슴에 깊이 박혀 가슴을 울렁이게 한다는 고종석의 고백이 가슴을 덥혀준다. ‘내 나이에 좀 주착스럽’다고 말하는 그의 멋쩍은 표정을 상상하는 일은 잔잔한 미소를 만들어 낸다. 시는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비실용적인 장르 중의 하나이다. 어디에도 써먹을 데 없는,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시詩’를 읽어주는 남자 고종석의 마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는 서문에서 시는 사람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장신구라고 말한다. 이것이 시를 읽을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주장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의 동의를 얻어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을 펼쳐든 독자들의 기본적 관심을 전제로 한다면 그의 유혹(?)을 쉽게 떨치지 못할 것이다. 시는 실용적이진 않지만 인간이라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가장 화려하고 사치스런 예술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모국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축복을 우리는 충분히 즐기며 살아가지 못한다. 눈에 비춰지는 감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아름다움은 1차적이지만 영혼에 투영되는 사유의 즐거움은 언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다. 시는 그 한 복판에 우뚝 서서 홀로 외롭다. 그 성스러움과 상스러움의 가장 자리에서 우리는 주변과 경계만을 기웃거려도 나의 즐거움이 사라지진 않는다. 산책과 명상 그리고 독서로 가득한 삶을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한 권 읽어 보라. 우리말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의 진경을 보여주는 50권의 시집은 고종석의 주관적 판단으로 넘겨버리기엔 그 부피와 중량이 만만찮다.

  <모국어의 속살>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시집 한 권, 한 권의 서평에 가까운 가벼운 내용으로 가득하다. 길이 않은 글 속에 한 시인의 특징과 시세계를 적확하게 짚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래 벼려온 우리 말에 대한 애정과 감각들이 살아 숨쉬는 글을 만들어 내는 일이 어떻게 쉬울 수 있겠는가. 고종속의 <모국의 소살>은 현대시 100년을 돌아보는 기념비적인 대작도 아니고 대표작가의 대표작품을 섭렵하는 어설픈 교양주의와 가벼운 문학 특강도 아니다. 이 책이 성공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당연하게도 저자의 시에 대한 안목과 나름의 기준과 분석, 그리고 개성적인 문장에 있다. 고종석 스스로 우리말의 ‘속살’에 대한 활용 능력이 뛰어나다. 부드럽고 단정하면서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말투가 쉽지 않다는 것을 독자는 이내 눈치 챌 것이다.

  시인 공화국의 시민들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염두에 둘 것은 선발 과정이다. 김소월부터 얌전하고 지극히 당연하게 시작하는 것 같지만 김정환, 김영승, 노향림에서부터 오규원, 김지하, 김기택에 이르기까지 시인들의 살고 있는 연대와 마을을 짐작하기 어렵다. 그만큼 현대시의 막과 장을 나누지 않고 종횡무진 내키는 대로 또는 마음 가는대로 선별하고 그 시집들을 읽어주고 있다. 어느 한 쪽에 기울어 있거나 치우친 느낌이 없다. 다만 ‘시’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이 존재하는 것인가를 살펴야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지만 고종석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이 관문을 통과한 듯 보인다. 물론 순전히 개인적인 역량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에 후한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다.

  개나 소나 시와 관련된 에피소드와 내가 좋아하는 시를 뽑아 책을 내는 것은 출판계의 오랜 장사속이다. 고르는 기준과 안목을 가늠하는 것은 당연히 부당하다. 지극히 주관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들이 아니라 그 시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삶에 관심을 갖는 방법은 절대로 옳지 않은 시읽기 방법이다. 시는 그저 아름다운 우리말의 ‘속살’을 훔쳐보는 두근거림이 있어야 한다. 시가 말하는 방식이 항상 우아하거나 아름답지만은 않다. 욕설과 비속어가 난무하기도 하고 공허한 말장난으로 독자들을 우롱하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시인을 욕할 필요는 없다. 시가 전하는, 언어가 가진 독특한 아름다움의 언저리를 따라갈 뿐이다. 그러다 보면 시를 보는 눈도 달라지고 시인들이 말하기 전에 느껴지기도 한다. 그 언어는 머나먼 나라의 외국어가 아니라 일상에서 늘 사용되고 있는 우리말이다. 우리말의 표피와 껍질을 벗겨 낸 속살의 다양한 층위를 맛보고 감상하는 즐거움을 어디에 비할 수 있을까?

허위는 허위를 유포하는 자가
살아있 한 죽는 법이 없다
진실은 진실을 유포하는 자가
죽어도 죽는 법이 없다
- 김남주, ‘공식’, <조국은 하나다>중에서



06042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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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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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삶에 대한 부족한 통찰력 때문이다. 살아보지 않은 인생에 대한대리 경험과 비록 유추의 방법이긴 하지만 타인의 인생을 경험해 보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소설을 읽는다. 물론 그 욕망은 단순한 소설 읽기를 통한 재미와 감동을 넘어선다.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궁극적인 고민과 애정이 바탕이 되어 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야트막한 산의 나무의 빛깔이 햇빛에 반짝이는 순간, 나는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러나 이내 ‘삶이란 무엇인가’하는 아주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에 부딪힌다. 대략 난감하다. 언제부터였는지, 혹은 언제까지일지도 모르는 이 부질없는 생각과 고민들은 어쩌면 모든 순간들을 견뎌내게 하는 힘이고 현재를 확인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확인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나는 소설을 선택한다.

다양한 소설가들과 만나는 일은 공허한 울림의 대화보다 농밀한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지나치게 관심과 조명을 받아온 작가 ‘김훈’은 부담스러웠을거라는 짐작을 해 본다. 환갑을 눈 앞에 두고 그의 첫 소설집이 나왔으니 그의 문학적 성과와 무관하게 평범하지는 않은 일이다. 국내의 권위있는 상들을 휩쓸며 문학적 성과를 검증(?) 받은 김훈의 소설집을 읽고 나서야 김훈이 제대로 보인다. 지금까지 김훈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그의 문체만을 즐겼다. 특히 <현의 노래>의 경우 내용과 상관없이 아무 데나 펼쳐들고 읽어도 눈부신 그의 문장과 만나게 된다. 그저 아름다운 문장 속에 빠져들다 보면 내용은 허공을 맴돈다. 정확하고 살아있는 수식과 표현들은 한국어의 또 다른 영역을 보여주는 소설들로 기억될 것이다. 소설가에게 문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김훈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소설집 <강산무진>은 여덟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소설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들은 선명하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에 대한 탐구 정신이다.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든 없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대기업 중역이든 택시기사이든, 복서든 등대 수로직 공무원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정확한 묘사가 압권이다. 직업의 속성과 성향을 단순한 관찰만으로 그려내는 방법은 옳지 않다. 그 직업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보여 줄 것인가가 사실 더 어려운 작업일 것이다. 김훈은 일단 철저한 취재와 관찰로 직업의 속성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상황과 직종이 가져올 사건들을 내용 속에 기막히게 녹여낸다. ‘머나먼 속세’처럼 링 위에서 권투를 하는 선수의 눈을 통해 1인칭 시점으로 상대방을 읽어내는 내면 서술은 1라운드가 끝나고 2라운드가 이어지듯 불연속적인 소설의 흐름을 보여준다. 복서의 상황이 아니라 그가 걸어온 시간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른 상황과 시간 속에서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새롭다.

주인공들은 대개가 중년 이후의 삶을 보여준다. 인생의 저물녘에 서 있는 사람들의 심리는 서늘하고 쓸쓸하기보다 공허하다. 젊은이의 열정이 보여주는 삶의 활력이 아니라 그로테스크한 삶의 비애가 주인공들을 통해 담담하게 그려진다. 그 적확한 묘사와 서술에 감정은 배제된 채 ‘개연성 있는 허구’인 소설을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그려내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모든 죽음과 이별에 ‘돈’이 개입된다. ‘언니의 폐경’, ‘강산무진’ 등에서 보여주는 죽음은 모두 ‘돈’으로 정리된다. 일상과 현실을 지나치게 세밀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그의 방법들이 오히려 불편하다. 환상과 욕망의 실현이 아니라 현실과 구체성의 철저한 보여주기에 충실하다. 김훈의 매력은 문체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미시적 관찰과 정확한 관찰에 있다.

중년 이후의 삶에서 사람들은 인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생활을 보여주고 일상을 이야기한다. 죽음을 향해 치닫고 있는 우리의 삶을 김훈은 ‘허무’하게 바라본다. 그 시선에는 감상도 준엄함 심판도 없다. 인생은 이것이다라는 전언도 없다. 그저 담담하게 삶의 순간들과 지루한 일상과 비루한 죽음과 인간의 본질을 담아낸다. 그것을 담아내는 김훈의 방식은 낯설고 각박하다. 소설들의 결말은 죽음이나 허무에 대한 김훈의 태도를 보여준다. 극적 반전과 긴 여운에 대한 유혹을 이겨낸 냉정하고 단호한 결말이 오히려 긴 울림을 준다.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를 통해 시간과의 대화를 시도했던 김훈이 이제 <강산무진>을 통해 ‘지금’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분명히 매혹적이거나 아름답지 않다. 생의 단면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담아내는 것이 단편의 미덕이라면 김훈은 장편 뿐만 아니라 단편에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그의 단편이 더 읽고 싶다. 다작과는 거리가 먼 작가이기 때문에 기다림에 값하는 그의 다음 작품을 또 기다린다.

걸출한 대가의 탄생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선입견을 갖지 않고 김훈을 읽는다면 참 많은 것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다음 작품을 기다릴만한 작가를 갖게 되는 것은 독자에게도 큰 기쁨이다.


06042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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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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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축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감각적인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를 단숨에 읽어버렸다. 체감 재미도 100점을 줘도 아깝지 않다. 워낙 평소에 축구를 좋아하는 개인적인 성향도 한 몫 했겠지만,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충분히 ‘재미있게’ 빠져 볼 수 있는 소설을 간만에 만났다. 그 재미라는 것도 단순하거나 뻔한 스토리와 분위기를 몰아가는 통속(?)소설과는 거리를 분명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 소설의 재미는 독특한 형식과 참신한 내용에 바탕을 두고 있다.

소설의 의무는 재미다.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반론의 여지가 많다. 하지만 재미없는 소설은 의미만 있을 뿐 소설의 역할을 다시 한 번 고민해 봐야 한다. 재미라는 모호한 말 속에 많은 함의가 들어 있다. 감각적 쾌락과 지적 즐거움을 동시에 가져다 줄 수 있는 탁월한 작품을 우리는 주저없이 명작이라 부른다. 이 소설을 명작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는 물론 없다. 하지만 소설이 거둘 수 있는 극단적 재미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김영하와 성석제를 비벼놓은 듯한 감각적인 문장과 키치세대를 떠올리게 하는 스피디한 전개와 직설적인 화법은 그대로 TV 드라마나 영화 한 편을 본 느낌이다.

소설이 발표되자마자 10여개 영화사에서 판권을 사겠다고 덤볐다는 후일담에 고개를 끄덕일만하다. 연애와 결혼 부부와 가족이라는 작은 주제를 순서대로 나열하며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생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니 일단 모든 사람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충분하다. 거기다가 2002년 월드컵의 흥분이 가라앉기 전에 50여일 앞으로 다가온 2006년 독일 월드컵을 기다리는 국민들을 겨냥한(?) 시의성 또한 기막히다. 한 남자의 연애사와 축구 이야기라는 두 개의 축은 소설의 구성을 탄탄하게 받쳐주고 있다. 각각 따로 국밥이 아니라 하나로 어울어지는 교묘한 합체와 분리가 소설의 흥미를 배가 시킨다. 작가 박현욱이 작가의 말에서 이야기했든 문학이라는 넓은 바다에 이런 소설가가 발끝을 적신다고 해서 큰 누가 되지는 않을 것이며 쓰면 쓸수록 글은 계속 늘 것이라는 믿음이 지켜지길 바란다. 독자의 입장에서 다양한 소설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은 미식가가 느끼는 그 즐거움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축구 때문에 시작된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모든 만남은 필연을 가장한 우연이다. 물론 작고 사소한 계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만남은 우연이고 그 우연 속에서 서로에게 혹은 스스로에게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바로 연애의 시작이다. 연애와 결혼에 관한 사회사적 고찰과 전 지구적 자료를 뒤적이며 다양한 형태의 결혼 제도와 형태를 소설 속에 녹여내고 있지만 현실에서 용인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현실의 잣대로 소설을 비추어 보는 멍청이가 있다면 당연히 책을 덮어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만을 놓고 살펴보아도 일부일처제가 갖는 의미와 역사는 너무 짧다. 주인공 남자의 아내 인아의 말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말 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주인공은 오로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의 논리와 눈물에 설득 당하고 만다. 아내가 결혼하다니? 누구나 제목을 읽고 나면 전처의 이야기에 관한 소설일 거라고 짐작하기 쉽지만 작가는 허를 찌른다. 전처가 아니라 아내가 결혼 하겠다고 남편에게 청첩장을 보내오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우습고 혹은 비참한 제도 중의 하나를 끝까지 고수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렇게 지켜내면서 얻어야 하는 그래야만 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작가는 근본적으로 인간과 사회, 그 중에서도 결혼 제도의 모순을 한 사내를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풍자나 비판의 목소리가 아니라 솔직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아주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재치있는 문장과 유머는 내용의 황당함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축구에 관한 많은 자료와 역사는 인류에게 특별한 의미를 준다. 다른 스포츠와 달리 축구는 특별하다. 여기에 동의하지 못하는 독자들도 이번 기회에 축구와 친해지거나 호기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전통적인 서사구조에서 벗어나 있는 이 소설은 결말이 없다. 물론 궁금하지도 않다. 결말이 별 볼일 없다는 것은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순간순간 상황이 보여주는 선택과 갈등 미묘한 움직임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랑과 연애, 결혼과 부부 그리고 가족의 의미를 독자들에게 되묻고 있는 듯하다. 도대체 인생이 무얼까. 낯설게 바라보는 인간 생활과 귀찮아서 묻어둔 이야기들을 이렇게 재미있게 풀어낼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작가의 탁월한 능력이다. 단 세 명의 주인공을 등장시켜 장편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 낼 수 있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박현욱은 그걸 해냈다. 대단하다. 긴 말이 필요 없는 책이 가끔 있다. 이 책은 그냥 읽으면 된다. 재밌으니까.


060503-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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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학의 종언 바리에테 5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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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의 기점과 개념에 관한 논의는 어떤 면에서 길고도 지루하다. 그만큼 중요하고 인류사에서 전환기적 시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살고 있는 지금을 현대라고 한다. 현대는 ‘현재’라는 개념과는 물론 구별되어야 한다. 불과 200여년 사이에 인류의 삶과 사상은 그 이전의 어느 시대도 빠르게 변화해 왔다. 중세를 넘어 근대로의 이행기의 특징은 거칠게 표현하면 인간 중심 사회로의 전환이다. 신 중심 사회의 미망에서 벗어나 인간과 이성이 중시되는 사회로 변화한다. 민족과 국가를 앞세운 파시즘은 맑시즘에 대한 반발로 파악하기도 하지만 1,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인류 문명은 급격한 변동을 겪었다.

  종교와 과학의 대립은 근대의 분수령이 되었으며 예술은 그 언저리에서 언제나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의 역할을 했왔다. 특히 문학은 사회 변혁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문학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지루한 논쟁은, ‘요즘 애들 버릇없다’는 함무라비 법전의 문구처럼 ‘문학의 위기’ 또한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끊임없이 논의되는 지루한 반성문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문학은 어디에 자리매김 될 수 있을까하는 문제가 되기 된다. 이 문제는 언제나 있어왔다는 반성적 고찰로 끝날 수도 있으나 그대로 넘길 수도 없다.

  일본의 지성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 문학의 종언>은 이러한 문제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문학의 위기를 논하는 문학계의 엄살이 아니라 ‘근대 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가라타니의 논문은 한국문학계에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2003년 10월 긴키대학에서 발표된 논문이 <문학동네>를 통해 국내에 소개된 이후 비평계가 아니라 언론에서 더 관심을 보였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앞서 말한것처럼 문학의 위기 운운이 아니라 ‘근대 문학의 종언’에 대한 선언적 의미는 가히 충격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제 문학의 위기를 넘어 ‘종언’이라고 마침표를 찍어버리는 가라타니의 말은 여러 가지 논쟁을 가져왔다. 한국 사회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선언인가하는 문제부터 일반화될 수 없는 문학에 대한 종언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짚어 볼 사항은 복잡하고 다양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가라타니가 던진 화두이다. ‘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문학의 종언’이라니?

  여기서 문학의 범위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가라타니는 근대 문학을 특히 소설로 한정 시키고 있다. 사회와 제도를 넘어서서 문학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는 끝이 없어 보였다. 소설로 표현되는 사상들은 어떤 장르와 매체로도 감당할 수 없는 위력과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것이 가라타니의 판단이다. 사르트르의 <구토>를 예로 들면서 사르트르의 사회적 역할과 위상은 소설가 이상이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의 역할과 기원은 18세기 러시아와 유럽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본 문학에서는 소세키의 ‘문학론’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회화의 역할과 의미가 재정립 되었듯이 영화의 출발과 더불어 소설은 존재 자체에 대한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이 비평가들의 부정적 전망이었다. 그러나 회화처럼 소설은 그 위치와 역할의 무한한 위협과 도전 속에서도 근근이 버텨내고 있다. 가라타니는 여기에 종지부를 찍는 선언을 한 것이다. 아메리카 문학은 50년대에 그리고 일본 문학은 80년대에 이러한 현상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국에도 여러번 방문한 적이 있는 가라타니는 한국에서 만큼은 아직도 문학의 역할에 대해서 낙관적 전망을 보았다고 한다. 물론 일본에 비교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근대문학의 종언’은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는 함의를 이끌어 낸다. 과연 그의 말은 진실인가?

  물론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종언’이라니. 작가들에게는 귀에 들리지도 않을 말이다. 가라타니가 특히 비판의 화살을 겨누고 있는 것은 문학 비평가들인지도 모른다. 그가 본격적으로 문학 비평가로서 비교문학을 연구한 것은 시기적으로 대략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내놓은 80년부터 대략 10여년이라는 짧은 기간이다. 이후 철학자로서의 행보를 보여준 가라타니의 견해는 아직 확신에 찬 선언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그 선언적 의미가 주는 화두에 대해서는 우리가 고민해 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가라타니는 학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영문학으로 석사를 받았다. 이 책에서 그는 ‘근대문학의 종언’을 심도 있게 다루거나 논리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쳐 나가고 있지 않다. 짧은 논문은 발표문 형식으로 그가 가지고 있는 고민의 일부를 던져주고 있을 뿐이다. 1부에서 번역가 시메이와 소세키의 문학론을 살펴보고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논문을 실었다. 나머지 2부 ‘국가와 역사’,3부 ‘텍스트의 미래로’에서는 가라타니 사상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60년 주기의 역사의 반복에 관한 특이한 견해와 교환과 폭력에 관한 국가관, 그리고 자신만의 어소시에이션이즘 이론을 펼치는 대담은 흥미롭다. 책 전체가 강연과 대담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에 가독성이 높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부터 <공산당 선언>을 통해 경제 체제와 국가의 역할에 대한 견해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생산단계에서 자본과 노동자의 충돌과 투쟁보다 소비 단계에서 ‘선택’의 문제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본도 최종 소비단계에서 한 번은 약자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산업 사회에서 물질을 토대로 한 자본의 경우에 한정되는 문제가 있지만 한 번도 주목한 적이 없는 부분에 대한 고민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질 만하다. 또 대담에 참여한 학자들의 자신감이 눈여결 볼만하다. 겉으로 드러난 자신감이 아니라 일본의 학문이 아메리카와 유럽에서 갖는 의미와 세계성에 대한 고민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독자성과 주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외국에서 학위를 받아 온 교수들에 의해 무분별하게 소개에 급급한 우리 학계의 현실을 잠깐동안 돌아보았다. 비판과 반성을 위한 계기로 삼을 만하다. 비난과 자조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지만 대담자들이 보여주는 논의의 범위와 이론들은 우리의 그것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다양한 문제들이 계통 없이 뒤섞여 있다는 느낌보다는 가리타니 고진에 대한 최근의 견해와 이론들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는 책이다. 보다 깊이 있는 관심과 고민은 물론 다른 책을 통해 확인해 보아야 할 문제다. 아쉬웠던 것은 일본 문학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기 때문에 그가 예를 들어 설명하는 일본 문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한 거지만 모든 분야에 통달한 전문 독자는 없다고 위로할 뿐이다. 이 책뿐만 아니라 다른 책에서도 자주 접하게 되는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과 <다중>이 숙제로 남겨졌다.



060506-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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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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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우연들이 관계를 만들어 간다. 독자가 한 작가를 만나는 것은 선택과 우연 이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 간접적인 만남은 직접적인 인간관계보다 의사소통의 장을 마련하고 깊이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일방적으로 혹은 맹목적으로 작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거나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작가에 대한 모독이다. 우연히 만난 일본의 젊은 작가와의 만남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세기말에 만난 히라노 기이치로의 소설 <일식>은 대가의 탄생을 예고했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아깝지 않은 작품으로 기억한다.

최근 다시 주목받을 때까지 그를 잊고 있었다. 이후 <달>과 최근에 <장송>이 출판되면서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는 3부작이 마무리 되었다. 두 소설을 천천히 읽어야겠다. 책 읽는데 순서가 있을 수 없지만 그의 소설집 <센티멘탈 in a sentimental mood>은 장송 이후에 쓴 단편들의 모음이다. 이 책에서도 젊은(?) 소설가의 특성은 유감없이 발휘되는 느낌이다. 소설에 대한 작가의 태도가 무엇이며 앞으로의 전망이 어떨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앞에서 언급한 3부작이 주로 중세와 근대에 대한 치밀한 탐구 정신의 산물이었다면 이 단편들은 드디어 현대와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과거의 시간들을 바탕으로 현재가 구성되어 있다는 직선적인 시간 개념에 입각해서 순차적인 소설쓰기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최연소 아쿠타가와상 수상자라는 천재성이 말해주는 외형적인 개성도 도쿄대 법학부 재학생으로 무심히 게재한 소설의 수상으로 그의 관심이 변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무명으로 끝나버리거나 문학의 길로 접어들지 않았다면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겠지만.

지금, 여기, 우리들의 이야기를 벗어난 소설을 생각할 수는 없다. 모든 작가들의 관심이 시공간을 넘나들더라도 결국 현재성을 확보하고 인간의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 정신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소설의 한계와 범위를 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인 소설의 본령을 생각해 보면 히라노의 게이치로의 소설은 이제 공시적 관점으로 전환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얼마나 깊고 예리한 혹은 폭넓고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가는 작가의 역량과 선택에 달려 있다. 작은 단편집에 실린 소설은 겨우 네 편이다. 그러나 네 편이 가지고 있는 무게가 만만치 않다. ‘청수淸水’는 그가 꾸준히 천착해온 철학적 주제들과 맥을 같이 한다. 무한한 시공간 속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기억과 연결시키는 솜씨가 일품이다. 단순한 사소설을 넘어서 일상을 한계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 보인다.

나머지 세 작품은 각각 특별한 맛과 취향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표제가 된 ‘다카세가와’는 도쿄 북쪽의 강이다. 이 강변에서 벌어지는 젊은 소설가 오노와 잡지사 여기자 유미코의 섹스 장면에 대한 묘사가 노골적이다. 사랑의 의미를 묻는 대신 남녀간의 관계에 대한 세밀화가 오히려 극적인 재미를 더해준다. 부분의 묘사는 전체를 조망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이 단편에 등장하는 존 콜트레인과 듀크 엘링턴의 노래 ‘in a sentimental mood’를 들으며 읽는다면 감각적 이미지들이 살아 움직일 것이다. 사랑과 섹스에 대한 진부한 질문 대신에 현실적인 풍경이 오히려 그로테스크하다. 해체주의 시를 대할 때의 생경함과 당혹감을 느끼게 하는 ‘추억’은 내용과 형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교묘한 퍼즐같은 작품이다. 작가의 의도와 고정된 틀에 대한 회의가 독자를 낯설게 한다. 마지막 작품인 ‘얼음 덩어리’는 새로운 형식과 내용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2단 편집으로 같은 페이지의 오른쪽과 왼쪽의 내용이 다르다. 동시에 벌어지는 다른 공간의 이야기가 교차 편집되어 있다.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기법이다. ‘롤라런’이나 ‘라 빠르망’을 기억하는 관객은 이 소설을 그렇게 읽을 수 있겠다. 중간중간 교차 혹은 중복되는 내용을 맞추기 위해 텍스트의 길이까지 세심하게 신경써야 하는 실험은 새로움으로 끝나지 않고 정교한 틀로 인식된다. 많지 않은 단편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새로움과 즐거움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책은 많지 않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센티멘탈>은 그의 장편들을 읽기 전에 가볍게 접근하는 에피타이저나 장편들을 읽은 후의 디저트로도 좋다. 다만 장편을 장식하는 부록으로 읽지만 않는다면.

소설가의 나이가 젊다는 것은 많은 가능성과 기대감을 갖게 한다. 국적과 문화를 넘어서 흥미로운 새로운 작품들을 읽어나가는 재미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달>과 <장송> 그리고 번역중인 작품들이 남겨졌다. 천천히 음미하는 즐거움을!


060519-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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