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미시령 창비시선 260
고형렬 지음 / 창비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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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

오십육년간 하루 한끼 하다
절에 비 오는 낮은 궁금했을 것
눈 날리는 날은 더 적적해
친구 없어 몸이라도 굴리고 싶게

이 나라 청화
중이여, 우리에겐 그대가 있군
가장 깊은 곳에서 높은 그대
저 텅 빈 듯한 산중에
지금은 또 누가 삶을 견딜까

그의 창자는 아무리 날이 좋고
마음산 어두워도
하루 한끼만 받고 궁금했던
그대 작은 신발, 만지고 싶다

고형렬의 이번 시집들은 조용하고 잔잔하다. 때로 격렬하게, 혹은 역동적인 몸짓으로 이야기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나지막하다. 산사의 고요함처럼 맑은 정신을 길어 올리는 고즈넉함이 아니라 밋밋하고 특징없는 고요함이다. 울림은 적고 목소리는 낮다. ‘그대’가 누구인지 밝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느닷없는 대상과 목적없는 행위들은 다소 낯선 풍경들을 자아낸다. 앞으로 시집은 직접 보고 골라야겠다. 시인들의 허명 때문에 손해를 입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

네거티브, 검판
김정환 시인에게

이렇게 그리울 줄 알았다면

사진 찍어둘 것을
1980년대 초, 서울 살러 왔을 때
종로 3가에서 을지로 3가 사이
지하철공사장, 거대한 수로처럼 철기둥이 땅속으로
마구 들어가 박힌 대로(大路),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그 붉고 검은 흙들 진창들

흑백으로라도 웃는 둘을 잠시만 세워두었더라면

그 길로 곡예하듯
검판 보러 가던 여름과 겨울이 보고 싶진 않았을 것
기록만 있다면 벌레 먹어도 좋은 것
매미는 울어대고 오공(五共)시대 끝에서 타던 청계천
을지로는 3․1고가로 침침한
눈 펑펑 내리던 그 흑백의 길

내 횡경막 속에 묻힌 역사적인 그 길
지금 그 길, 대화와 수서로 영원한
휴가중, 도둑은 가버리고 늦은 화살만 날고 있는
한낮

그때 서른 무렵이었으니! 너무나 바쁜, 공화국의

개인적인 취향이겠으나 차라리 내게는 이런 류의 고요함과 아쉬움이 감각적으로 와 닿는다. 단순한 과거 회상의 시점이 아니라 현재와 대비되는 지나간 시간의 ‘진창들’이 손끝에 전해진다. ‘너무나 바쁜, 공화국의’ 허우적거림을 돌아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안타깝다. 그 정밀한 풍경 묘사만으로도 나는 한껏 시인의 서른 무렵을 돌아본 느낌이다. 한 편의 시가 전해주는 울림이 무엇일까? 공감할 수 있는 많은 부분들이 없어도 언어와 감각, 의미와 상상력을 통해 길어 올린 표상들이 공유되어야 하지 않을까?

여치의 눈

하느님이 처음 만들 때 눈빛과
손길이 보인다

잘 접혀진 파란 풀잎
울지 못하는 풀의 울음을 대신한다
나는,
가급적 날지 않으려는 너를 눈으로
들어올린다

하지만 나는
원래의 풀잎에 다시 놓아둔다
울어도 찍히지 않는 울음 때문에

여치,
풀잎 줄기 실뼈의 섬유질 속에
통곡이 파란, 가을을
나는 혼자
눈으로 접고 또 접고 있다

슴벅한 눈길에
스스로 놀라 푸르르 날아가리라

아니면 이렇게 관찰된 대상을 통한 주관적 개입이 바람직하다. 철저한 객관화 아니면 감정의 떨림을 전달받고 싶다. 그 많은 대상과 상황들 속에서 독자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거나 신선한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지만 안전 운전을 위해, 아름다움과 곱게 포장된 언어를 위해 시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


060524-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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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당신 문학동네 시집 71
김용택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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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당신


잎이 필 때 사랑했네

바람 불 때 사랑했네

물들 때 사랑했네

빈 가지, 언 손으로

사랑을 찾아

추운 허공을 헤맸네

내가 죽을 때까지

강가에 나무, 그래서 당신


‘그래서’는 앞뒤의 문장을 인과 관계로 연결할 때 사용하는 접속사다.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결과가 ‘당신’일 경우 독자는 당혹스럽다. 혹은 그 결과에 대한 원인으로 ‘당신’을 지목한 경우에는 결과에 주목하게 된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새 시집 <그래서 당신>의 표제작은 두 어휘의 사소한 부딪힘으로 상상의 힘을 발휘하게 한다. 위 시를 읽고나도 물론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다. 논리적 관계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불거진 의미들은 영원한 사랑에 대한, 혹은 사랑의 고통에 대한 시인의 통찰을 단순하게 상상하기 쉽다. 쉽지 않다는 얘기는 당신과 사랑 사이의 의미다. 지금까지 사랑을 찾아 헤맸지만 결국 죽을 때까지 강가에 서 있는 나무처럼 움직이지 않는 사랑을 곁에 두고 허공을 헤맸다는 이야기인가 하면 영원히 찾지 못하다가 결국 강가에 나무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삶이라고 말하는 것인지 사랑과 당신의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물론 독자의 몫이다.

또 하나, 이 시의 특징은 한 행이 한 연을 이루고 있는 긴 호흡이다. 한 연에서 다음 연으로 읽어나가는 동안 한 호흡을 가다듬고 한 행을 읽는다. 긴 세월의 흐름이나 오랜 기다림의 시간으로 느껴진다. 시의 형식은 단순히 짧은 문장 구조 뿐만 아니라 내적 깊이와 의미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차분하고 정갈한 마음으로 음미하면서 읽어도 좋고 한줄 한줄 새겨 읽어도 좋겠다.

이렇게 이 시집의 대부분의 시들은 짧은 문장과 절제된 언어로 대상과 감정을 묶어 놓는다. 그 대상이라는 것이 다양하지 않고 선명한 데서 우리는 맑은 물과 같은 감동을 전달 받을 수 있다. 시인의 삶이 곧 시가 된다고해서 시인의 삶을 경의롭게 바라보거나 강가의 초등학교 교사라는 외적 조건이 시의 의미를 규정짓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다만 삶을 대하는 태도와 방법이 투명하고 정갈한 것만은 분명하다. 거기에는 자연과의 호흡이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다. 나무와 바람과 강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흰 종이 위의 먹물이 번지듯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다.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 마음들을 읽어내는 능력의 탁월함이 김용택 시의 진경이다.


그리움

바람이 불면

내 가슴속에서는 소리가 납니다


문학 소년, 소녀 시절 한 번씩 연습장에 끄적여 보았을 ‘그리움’에 대한 그 무한한 상상력과 감수성들을 시인은 두 줄로 말한다. 바람이 불면 내 가슴속에서 소리를 내는 자연스러움과 긴 설명이 필요없는 공감대가 그것이다. ‘사랑’이라는 다음 시도 마찬가지다.


사랑

밤길을 달리는데
자동차 불빛 속으로 벌레들이 날아와 유리창에 부딪혀 죽는다

필사적이다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벌레들의 맹목적 죽음은 자동차의 속도에 기인한다. 그러나 발상의 전환은 사랑을 부른다. 必死 - 반드시 죽겠다는 말이다. 목적도 없이 왜인줄도 모르고 목숨을 거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외치는 벌레의 말없는 죽음들이 인간의 사랑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추상적 관념에 대한 명확한 제시는 의미를 한정시킬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보다 명확하게 시인의 목소리를 전달한다. 표현속에 도드라지는 생각이 낯설고 감각적이다. 하지만 그 감각이 선동적이거나 톤이 높지는 않다. 잔잔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우리들 삶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이 시집의 장점이다.


화무십일홍

앞산

산벚꽃

다 졌네

화무십일홍, 우리네 삶 또한 저러하지요

저런 줄 알면서 우리들은 이럽니다

다 사람 일이지요

때로는 오래된 산길을 홀로 가는 것 같은 날이 있답니다

보고 잡네요

문득

고개 들어

꽃,

다 졌네


꽃이 다 질 때까지 누군가 문득 보고 싶은 것이다. 삶이다. 권불십호년權不十年이고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은 생의 덧없음을 빗대는 흔한 표현이다. 그래서 더 큰 울림을 가져온다. 오래된 산길을 홀로 걷듯이, 누군가 보고 싶은 날들이 있는 있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생은 지고 만다. 그래서 시인은 마지막으로 ‘삶’이라는 제목의 시를 겁?없이 네 줄로 마감한다. 하지만 우리들 생이 도달하기 힘든 경지에 서 있다. 이런 모습으로,



내가 가는 길에
눈길 닿을 티끌 하나
겁먹은 삭정이 하나
두지 마라



060601-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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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8-14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 포털 사이트 블로그 안부게시판에 시인 추천 해 달라고 한 1인 들렸다 갑니다.ㅡ,.ㅡ
일단 안도현씨 하고 김용택씨 대표작 부터 쭈욱 한 번 훑어 볼라고욥. (원래는 추천해 주신 분들 시집 중 대표작들 다 사려고 보관까지 해 놨는데, 다른 책들의 유혹 또한 못이겨 그만..ㅡ_ㅡ;;)추천보단 땡쓰2가 더 좋겠죠?!..ㅋㅋ 그런데, 이런....본의 아니게 백수 수준에 걸맞는 보답만 해 드리고 가는 듯...-_-;; 그나저나 이 책 리뷰 중에 힘님 꺼 바로 아래 있는 분의 리뷰도 참 인상적이었다는. 그래서 그 차이에 더 땡겼다죠~~~~^3^ 사진 또한 시라죠.. 시집을 좀 읽고나면 한 때 전공했던 사진도 취미로나마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 해 보려고 한답니다. 그래서 시가 땡겼던 듯... 패션디자인과 사진... 둘 중 하나만이라도 잘하자 해서 사진과는 안녕했는데, 그 인연을 완전 끊어내지 못하고 있었나 봅니다. 아~ 문득 힘님은 구름 겹이 드리워진 저 푸른 하늘을 사진에 담으면서 어떤 시상을 탐하려 했을까 라는 생각 또한 감히 해 보고 갑니다. 그럼, 이만. ^_-

sceptic 2008-08-18 21:09   좋아요 0 | URL
반갑네요...^^

사진 전공하셨으면 한 수 배울 기회를...만들어봐야겠는데요...

때로는 사람보다 하늘이 좋아서요...
 
동굴
주제 사라마구 지음, 김승욱 옮김 / 해냄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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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를 보고 받았던 감성적 충격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Als das Kind Kind war아이가 아이였을 때……” 중저음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파리, 텍사스> 이후 개인적으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겨준 영화다. 흑백의 화면과 빨간 옷을 입은 어린 아이의 선명한 이미지의 대조는 십 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된다. 이 영화를 보고 얼마 후 후배가 볼만한 영화가 없느냐고 묻길래 적극 추천했다. 여자친구와 이 영화를 보러 갔다가 10만에 자고 왔다는 원망을 들었다.

영화든 책이든 개인적인 취향과 감동의 깊이는 천양지차다. 객관화시킬 수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만큼 객관화시키기 어렵다는 말이다. 재미라는 모호한 기준으로 보편성을 획득하고자하는 태도는 문학에서 가장 위험한 태도다. 굳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감동과 교훈을 고루 얻을 수 있는 소설을 만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현대 소설이라면 더욱 그렇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주제 사라마구의 <동굴>은 밀란 쿤테라의 <농담>을 읽었을 때의 극히 주관적 감동 상태와 유사하다. 늙은 소설가의 말년 작품은 극단적으로 위대하거나 초라하다. 나이와 연륜을 감당할 만한 작품들이 고루 탄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평범하고 지루해 보이는 이 소설이 내게는 깊은 심연의 ‘동굴’을 돌아보게 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세상에 대한 인식 방법을 회의하게 만든다. 이 소설의 제목이자 작가의 의도는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빛나는 작품이다.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를 바라보는 손과 목이 쇠사슬에 묶인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 우리들의 자화상은 아닐까 반문하는 듯하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볼 수조차 없는 동굴 속의 나의 모습을 객관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타인에게 투영된 나의 모습과 옆을 돌아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질주하는 현대인의 우울한 뒷모습을 확인한 것은 나만의 공상일까?

평생 도자기 그릇을 구워온 노인과 그의 딸 그리고 사위, 한 동네에 사는 과부와 길을 잃고 노인에게 온 개 한 마리가 이 장편 소설의 등장 인물들이다. 단순한 구성과 밋밋한 갈등은 지루하고 나른한 소설로 팽개치기 십상이다. 더구나 인물들 간의 대화를 큰 따옴표로 묶지 않고 인용하듯 긴 문장들을 쉼표로 연결해 놓아 긴 호흡과 느린 템포를 유지한다. 노인의 시선과 서술자의 말투는 무더운 여름 오후의 거친 호흡처럼 답답하기까지 하다.

‘센터’는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노인의 모든 그릇이 이곳으로 납품되다가 일시에 거절당한 후 인형을 제작해 납품해보기로 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센터에서 경비로 일하는 사위는 상주 경비원으로 승진해서 센터에서 제공하는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게 된다. 센터 밖에 거주하는 노인은 딸 내외를 따라 가기로 결심한다. 센터로 이주 한 후 지하 발굴 현장에 몰래 잠입해서 동굴의 실체를 확인한 후 다시 산업지대와 그린벨트를 지나 과부의 사랑을 확인하러 돌아온다. 사위와 딸도 동굴과 센터를 떠나 네 사람은 석양 속으로 먼 길을 떠나는 것으로 이 소설을 끝을 맺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동굴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비극적 인식에서 이 소설이 출발한다면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소설화한 해설서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소설의 의미는 동굴에 있지 않고 동굴 밖에 있다. 동굴을 포함한 센터와 센터 밖의 세계와의 대비가 아니라 두 세계를 포함한 세계 밖으로 길을 떠나는 네 사람의 여행 후기가 더욱 궁금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이 떠나는 세계는 양파 껍질처럼 겹겹이 둘러싸인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이 소설에는 서술자의 입을 통해 촌철살인의 인생에 대한 통찰들이 녹아 있다. 네 사람이 나누는 대화 사이사이 서술자가 개입하고 그 개입과 인물들의 대화가 하나가 된다. 그것은 대부분 아주 오랫동안 삶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사유하지 않은 사람은 쉽게 내뱉을 수 없는 선언적 아포리즘들이다. 소설에 밑줄 그으면 읽는 일은 얼마나 우스운가. 그래도 다시 한 번 읽어보기 위해, 한 번 더 생각하며 여운을 즐긴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말할 가치가 없거나, 딱 한 번만 말하면 되는 말들로 가득 차 있다.(P. 48)”는 작가의 말은 길게 늘어 놓은 그의 소설 전체를 부정하는 말이 된다. 그렇게 많은 말들의 부질없음을 알고 있는 작가의 말에 귀기울여 볼만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독자들이 각자 찾아나서야 하는 모래밭에 바짝이는 작은 바늘 하일 수도 있다.


060629-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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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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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년 동안 출판된 소설 중에서 (아마도) 제일 아름다운 소설이랍니다.
둘이 읽다가 하나 죽어도 모를 소설을 가리켜서 page turner라고 하지요.
하지만 그건 잘못된 표현이지요. 정말 재미있는 소설은 자꾸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소설이 아니라,
책장 넘기기를 거부하게 만드는 소설이지요. 뒷부분이 다가올수록 안타까움이 짙어지는 소설이에요.
이번 가을에 어떤 소설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올해 단 한권의 추천소설은 바로 이 책이랍니다.

소설가 김연수의 블로그에 실린 ‘지금 당장 이 책을 사서 읽으세요’라는 글의 전문이다. 이 책은 바로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라는 소설이다. 이런 내용의 추천사를 읽고 이 소설을 사 읽지 않을 재주가 없어 그날로 주문해서 읽었다.

수많은 영화 가운데 기억나는 몇 편을 꼽으라면 그 중 하나로 <인생은 아름다워>를 꼽는다.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과 진실의 힘을 보여줬기 때문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 때문이다. 로베르토 베니니가 각본, 연출은 물론 주연까지 맡아 화제가 되었던 영화다. 주인공 귀도는 초등학교 교사인 도라를 본 순간 그녀를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은 진심을 담아 도라를 감동시키고 그녀와 결혼한다. 아들 조슈아를 얻은 그들은 나치즘의 절정에서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고 아들에게 1,000점 내기 게임이라고 속여 유태인 포로수용소 생활을 게임과 같은 환상으로 만들어 준다. 결국 귀도는 독일군에게 발각되어 사살당하지만 아들 조슈아는 나무 상자에서 마지막 숨바꼭질에 성공하고 꼬박 하루 동안 숨어 있다가 누가 1등을 했는지 궁금해서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배경으로 밖으로 나와 지나가는 탱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귀도와 조슈아가 전해주는 감동은 전쟁의 참혹과 비정성으로 인해 더욱 돋보였으며 마지막 장면이 주는 인상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다.

전쟁이 어린 영혼에게 주는 충격과 상처는 상상을 초월한다. 고전이 되어 버린 <안네의 일기>는 어른의 시선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읽힌다.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의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현실들이기 때문이다. 왜 싸우는지 왜 죽이는지 알지 못한다. 비참한 현실만이 또다른 폭력으로 아이들에게 각인된다. 전쟁이라는 폭력은 어린 영혼에게 가해지는 가장 심각하고 무거운 정신적인 좌절과 혼란이 된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세계 무역 센터에 두 대의 비행기가 충돌한다. 침대에 누워 편안한 자세로 반복되는 화면을 보면서 너무나 비현실적인 장면이 너무나 먼 거리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아주 오래전 일인 것 같은데 아침밥을 먹으로 걸프전의 폭격장면을 시청했던 1991년만큼이나 황당했다. 세상밖의 현실처럼 여겨지는 이런 일들이 21세기에도 여전히 현실이 된다. 오늘도 이라크에 한국군이 주둔하고 있다. 전쟁은 계속된다. 인류가 지구를 떠나지 않는 한.

12살 소년 오스카 셀은 아버지 토마스 셀을 뉴욕의 세계 무역 센터에서 잃는다. 이후 소년의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에 소설의 초점은 맞춰져 있다. 그렇다고 심리소설이나 성장소설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얽혀있다. 소년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 이야기가 그것이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는 물론 소년 자신의 이야기도 그렇다. 아버지가 남긴 열쇠 하나를 찾기 위해 뉴욕 시내를 헤매며 만나는 수많은 ‘블랙’씨들도 그렇다. 이 소설의 특별함은 작위적이지 않은 소년의 순수성을 표현할 줄 아는 작가의 힘에 있다.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을 어른이 대신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작가는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작가 스스로가 꿈꾸고 상상하며 온몸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들’은 소설을 읽으며 독자가 찾아야 할 것이다.

<사랑의 역사>를 쓴 니콜 크라우스의 남편으로, 뛰어난 부부 작가로 주목받는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은 2006년 가을에 찾아온 특별한 소설임에 틀림없다. 김연수의 추천사를 믿어도 좋다.

자칫 혼란스럽고 몰입을 방해하는 형식이 될 수 있는 다양한 인물들의 시점은 입체적인 소설로 일으켜 세운다. 일관된 시점과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의 문제를 깊이 있게 천착하는 작품에 비해 다소 가볍고 경쾌한 흐름으로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으며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곳에 언제나 놓여 있는 ‘사랑’을 확인하기 위한 머나먼 여행으로 읽히기도 한다. 제목의 의미는 물론 독자가 찾아야 할 숨은 그림이다. 나도 모르겠다. 그것이 폭력에 대한 경고인지 사랑에 대?찬사인지.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소설은 재미있다는 점이다.


061028-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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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운 세상 인연의 배를 띄워 - 최척전 국어시간에 고전읽기 (나라말) 7
황혜진 지음, 박명숙 그림 / 나라말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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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바다를 헤매는 일은 인류의 축적된 삶의 양식에 대한 최고의 인식 방법이다. 특히 우리 고전 문학은 선조들의 삶의 모습에 대한 적나라한 표현이며 삶의 재현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우리가 살아온 과정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낄낄거리며 때로는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조선 후기에 급속히 발달하는 소설 문학의 양상은 한국 문학의 전통을 풍요롭고 다채롭게 해 주었다. 자생적인 문학의 전통이 일천했던 것이 아니라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지로 근대 문학으로 개화하기 전에 많은 풍랑을 겪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눈에 띄는 성과는 오롯이 한국 소설 문학의 전통이 된다.

그 대표적인 작품 중에 하나가 바로 조위한의 <최척전>이다. 이 소설은 조선후기의 전쟁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임진왜란(1592년) 이후 정묘재란(1597년)이 일어날 무렵부터 시작해서 난이 평정된 1600년경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500여년에 이르는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혹독했고 참혹한 시련을 겪었던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최척전>은 민중들의 삶이 모습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주인공 최척과 옥영을 내세워 두 사람의 사랑과 기구한 운명을 사건의 중심축으로 삼고 있지만 두 남녀간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로만 볼 수 있는 소설이 아니다. 전쟁 중에 헤어져 안남(베트남)에서 해후하는 장면이나 이역만리 중국땅에서 살다가 고향인 남원에서 재차 상봉하는 장면은 질긴 운명과 인연을 내세운 한 편의 휴먼 드라마로 읽힌다. 그러나 이런 기막힌 우연과 운명 뒤에 배경처럼 깔린 어두운 전쟁의 그림자와 민중들의 애끊는 사연들은 한숨을 자아내게 한다.

역사 속에서 전쟁은 언제나 승리자의 입장에서 지배자의 입장에서만 서술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객관적 사실조차 왜곡되는 역사에서 평범한 백성들의 눈물과 한숨을 전달하는 것은 문학의 몫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참혹하게 왜적에게 도륙당하고 불태워지는 장면은 그 어떤 역사보다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 후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우리 민족의 정서를 부정적인 한의 역사라고 일컫는 이유를 이 소설을 통해서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나라말 출판사의 ‘국어시간에 고전읽기’ 시리즈 중 하나로 출판된 이 책은 ‘지러운 세상 인연의 배를 띄워’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다른 어떤 판보다 내용이 충실하고 문장이 바르다. 황혜진의 글은 현대적인 감각을 살려 고전문학의 분위기를 전하면서도 현대소설같은 긴장감이 느껴진다. 박명숙의 그림 또한 적절하게 삽입되어 다소 지루하고 딱딱하게 전개될 수 있는 부분의 분위기를 살려준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정보 쌈지 부분이다. 책 중간에 ‘정유재란과 남원함락, 전쟁 포로 이야기, 강홍립은 역적이다와 충신이다. 최척전의 우연성, 지로로 보는 최척전, 작가 인터뷰’ 등 여섯 개의 도움글이 들어 있다. 각각 두 페이지를 넘지 않는 분량이지만 고전을 읽는 재미를 배가시키며 소설의 이해를 돕는 충실한 도우미 역할을 한다. 고전은 어렵고 딱딱하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학생들이나 일반들이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특별한 장치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나라말의 ‘고전읽기’ 시리즈는 가장 뛰어난 고전소설 시리즈라고 평가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추천한다면 자신있게 추천해도 될 만하다.

책의 말미에 ‘최척전 깊이 읽기’는 감동적인 인간 드라마를 현대적 의미에서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차분한 설명이 더해진다. 읽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우리가 고전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쯤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우리 땅 남원에서 시작해서 일본과 중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 전반을 무대로 한 최척과 옥영의 고된 여정은 우리 민족의 신산스런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이 소설이 다른 소설과 구별되는 가장 뚜렷한 특징은 방대한 스케일과 기막힌 우연성에 있지 않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믿음과 신뢰로부터 출발한다. 최척이 만났던 명나라 장수 여유문과 주우, 옥영을 도왔던 일본사람 돈우 등 국적과 인종을 불문하고 관계를 맺어간다. 일본과의 전쟁 문학이라면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거나 비현실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는 한풀이 소설이 될법하지만 <최척전>은 그렇지 않다. 인간적 연대감이 형성되고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관계망이 이렇게 기막힌 감동 드라마를 만들어 낸 것이다. 소설보다 기막힌 작가 조위한의 기막힌 삶과 주인공 최척의 유사한 상황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덤으로 얻게 된다.

시대가 달라지고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가치는 무엇일까? 21세기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유랑민과 평등, 인권 측면에서 살펴봐야하는 전쟁의 의미는 이 책을 통해 비추어 보아야 할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침략적 제국주의와 폭력을 앞세운 헤게모니 전쟁은 끊이질 않는다. 인간의 역사는 오늘도 되풀이 되지만 영원한 평화와 공존의 시대는 요원하기만 한 슬픈 시대를 살고 있다.


06102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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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0-25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많은 생각할 점을 남겨주죠. 리뷰 잘 읽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좋은 일만생기시기를........

sceptic 2006-10-29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도 즐겁고 행복한 책읽기 계속 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