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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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없는 소설은 거의 불가능하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랑이 배제된 소설은 향기 없는 꽃과 같다. 그 향기가 목적인가 아닌가가 문제일 뿐. 그래서 소설을 읽지 않거나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도대체 이 시대에 사랑이라니? 아직도 영원한 사랑을 믿는다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사랑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출발해서 사랑까지도 필요한 사랑을 하는 현실과 만나게 되는 일을 비참하기까지 하다. 21세기의 사랑법은 어떤 것일까?

백년 쯤 전에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으며 그 사람들에게 사랑은 어떤 것일까를 궁금해 하는 일은 당연하지만, 굳이 찾아 읽을 필요는 없다. 오다가다 우연한 만남처럼 선별과정을 넘어선 우연을 만나면 그때 읽으면 된다. 책을 선별하고 읽고 되새기는 과정이 기계처럼 정밀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우연에 기댈 때도 있는 법이다. 일본의 근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는 그렇게 만났다.

1909년에 신문 연재 소설로 쓰여진 이 소설은 20세기 초 일본의 부유층 자제인 다이스케는 안개처럼 몽롱한 인생을 살아간다. 친구 히라오카와 그의 부인이자 대학시절 친구의 누이였던 미치요와의 사랑이 이 소설의 골격이다. 식모와 서생을 데리고 서른이 넘도록 직업도 없이 아버지에게 생활비를 얻어쓰는 주인공은 형과 형수, 조카들과 아버지가 살고 있는 집에 가끔 들러 결혼 재촉을 받기도 한다. 결혼 후 먼 지방에 살던 절친한 친구 히라오카가 다시 그를 찾아오면서 미치요와 재회한다. 이 소설의 등장 인물의 사건은 이것이 거의 전부다.

장편이 가질만한 복잡한 갈등도 사건의 번잡함도 없다. 구성이 탄탄하지도 않고 물 흐르듯 주인공의 의식과 갈등을 지루할 만큼 길게 서술하고 있다. 한국문학사에서 보면 신소설이 등장했던 개화기에 해당된다. 사건의 우연성과 감정의 과잉토로 등 유치할 정도의 사건전개를 보여주던 것에 비교하면 일본 문학의 예민한 감수성과 집중력있는 문체가 돋보인다. 질풍노도와 같았던 한국 근대사를 떠올릴 필요는 없지만 참으로 한가해 보일만큼 정적이고 차분한 소설이다.

<산시로>와 <그 후> 그리고 <문>을 묶어 나쓰메 문학의 삼부작이라고 한다.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동경제대 영문학 교수라는 탄탄한 사회 경제적 지위를 지닌 그가 발표한 소설은 일본 근대문학의 출발로 평가 받고 있다. 한국문학사의 <무정>과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근대적 지성의 소설이라는 점에서 눈여겨 볼 만하다. 여러 가지 평가와 논의는 비평가들과 학자들의 몫이고 독자의 입장에서는 일본 근대 문학의 풍경을 살펴 볼 수 있는 작품 정도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다이스케와 미치요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대화와 짙은 백합 향기는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추억을 기억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며 감각적 이미지이다. 몸이 기억하는 과거는 잊을 수가 없는 법이다. 그 향기를 잊지 못하는 다이스케와 미치요의 사랑과 그것을 확인하는 방식들이 너무 더디다. 치밀하고 탄탄하지 못한 구성의 한계 때문이지만 그것이 1909년에 발표된 소설에 대한 평가의 잣대로는 적절치 않다. 후반부에, 급격하게 그리고 열정에 가까울 정도로 두 사람이 사랑만을 확인하고 제각각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들은 공감하기 어렵다. 두 사람의 사랑을 미치요의 남편과 다이스케의 가족들이 모두 알아 버린 후 형이 찾아와 경제적 지원은 물론 가족간의 절연을 선언한다. 아버지의 분노와 부모간의 의절을 전한 것은 물론이다. 직업을 구하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온 다이스케의 눈에 비친 온통 붉은색의 세상이 두 사람에게 어떤 의미로 인식될 것인지 ‘그 후’는 독자의 상상에 맡겨진다. 긴 여운과 다양한 결말을 의도한 제목이라기보다는 나쓰메 특유의 ‘대충’ 혹은 ‘무의미’한 제목 붙이기로 볼 수 있다.

고전으로 분류된 문학의 현재적 의미는 개개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 문학의 본령은 여전히 내 삶에 미치는 영향과 반성적 인식의 틀이다. 감동과 교훈이라고 하는 지극히 교과서적인 소설의 의미를 떠나 진부한 ‘사랑’과 ‘인생’에 대한 쉼표와 같은 것이 소설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그 후>는 교양으로서가 아니라 일본 근대 문학에 대한 호기심과 당대 한량의 사랑과 인생에 대한 관심으로 읽으면 된다. 그 밖의 것들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방식으로 전달될 것이다.


060709-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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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연습
조정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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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붉은 혁명이 성공하면서 사회주의는 현실이 되었다. 1991년 구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74년간 지속된 인류의 또 하나의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충격은 한 국가의 패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였다.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국가 건설이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은 실망을 넘어 사회주의 진영을 공황에 빠뜨렸다. 60년대는 물론 70년대와 80년대라는 질곡의 시대를 지나왔지만 90년대의 전망은 불투명하기만 했고 21세기에 들어서도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은 요원하기만 하다.

얼마 전에 읽었던 하종강의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의 서평 시작부분이다. 우연하게도 조정래의 <인간연습>은 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남북 분단 문제의 완결판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인류에게 풀리지 않는 숙제인 ‘이념’의 문제가 그 중심에 놓여 있다. <태백산맥>과 <아리랑> 그리고 <한강>으로 이어지는 현대사를 대하소설로 일단락 지은 조정래의 <인간 연습>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를 지닌다. 첫 번째는 외적 지향의 거대담론에서 내적 지향의 미시담론으로의 변화이다. 한국인에게 현대사의 질곡은 견뎌내기 힘든 집단적 트라우마였다. 그러나 개별적 인간에게 부여된 의미와 상처가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지 세부적인 부분을 확인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서 <인간 연습>은 작가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조정래 분단문학의 마침표로 읽어도 좋겠다. 두 번째는 사회적 관점의 이념과 역사가 아니라 개인적 관점으로의 이행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 연습>은 한 인간이 사회적 신념 속에서 겪어야했던 내면의 본질적 갈등이다. 본능과 이기적 욕망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이념과 신념에 대한 질문들로 가득하다. 길이가 중요한건 아니지만, 이 소설을 장편으로 보기엔 길이도 내용도 부족하다. 단편과 장편 중간쯤 된다.

장기수 문제를 다루었던 영화 <송환>에 출현했던 노인 한 분을 떠올리며 읽었다. 현실과 소설을 중첩시키는 바보같은 방법이 통할만큼 사실적인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전향 장기수 윤혁 노인의 내면적 갈등과 방황이다. ‘사상의 조국’이었던 소련의 붕괴는 물리적 폭력에 의해, 정신이상 상태에서 전향해버린 윤혁, 박동건 두 노인에게 정신적 공황상태를 일으킨다. 더구나 북한의 굶주림에 대한 사실 확인 취재 기자에게 전해들은 후 박동건 노인은 숨을 거두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김형사의 보호감찰과 같은 방에 살았던 운동권 강민규의 도움으로 번역을 하며 살아가는 윤혁 노인은 수기를 쓰게 되고 부모없는 두 아이의 후견인 노릇을 하며 살아간다.

당과 조국을 위해 남파하던 순간의 아내의 얼굴. 그 얼굴은 윤혁 노인을 평생 따라 다닌다. 결정적인 순간에 당과 인민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는 인간적 고백이 더 아프다. 그렇다고 해서 이념과 사상에 의해 희생당한 한 인간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는 소설은 결코 아니다. 자신의 신념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된 것 같은 시대적 변화에 충격을 받는 두 노인의 모습이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아픔으로 보일 뿐이다. 30년이라는 시간의 공백은 사회와 인간에 대한 판단을 흐리게 한다. 어쩔 수 없이 이 사회에 적응해가야 하는 전향 장기수의 삶은 비전향 장기수의 삶보다 오히려 더 비참하다.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편견에 가득찬 시선들, 사회적 냉대가 어우러져 견디기 힘든 세월이 된다. 민주주의를 국가의 정체로 내세우고 있지만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현실과의 부조화가 아이러니하다.

조정래라는 이름만으로 의심없이 읽게 된 소설이다. 소설 자체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 주제가 주는 무게와 깊이가 만만치 않다. 쉽게 답을 얻거나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되기 위해 연습이 필요할까? 이 땅에서 ‘인간’으로 대접받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과연 윤혁에게는 없는 것일까? 끊임없는 회의와 질문들이 쏟아지게 하는 소설이지만 이 소설은 우리의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고민과 합의를 묻고 있다. 통일을 위한 우리의 마음가짐과 이념적 갈등에 대한 논의는 계속 되어야 한다. <태백산맥>과 <아리랑>을 밤새워 읽으며 작가 조정래 선생님께 느꼈던 마음이 이 책에서도 여전히 식지 않고 있음을 확인했다.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는 인간의 삶,
그것은 결국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연습’이다.


060710-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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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 이야기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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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세상과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토론과 논쟁에 자신이 없다면 상대방의 인신을 공격하라!”는 세네카의 일갈은 토론과 논쟁에 대한 반어이자 역설이다. 상대의 인격을 모욕하거나 인신 공격을 시작하는 순간 게임은 끝난다. 자신의 패배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보면 그런 일이 있다. 신념과 주관대로, 마음이 시키지 않는 일에 대해 굽히느니 차라리 부러지는 편이 낫다는 생각 자체가 자괴감을 가져 올 때가 있는 법이다. 산다는 일은 역시 녹록치 않으며 옳고 그름은 항상 법의 잣대 이전에 주관의 잣대로 모든 것이 재단된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느낌이 들 때 소설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회의한다. 조경란의 <국자 이야기>는 나와 세상과의 이야기다. 나와 또 다른 나의 이야기는 문학에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되어 왔기 때문에 새로울 것도 없고 참신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하늘아래, 아니 문학에 새로운 것이 남아 있기는 한 걸까? 없다고 한다면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조경란의 <국자 이야기>는 나와 ‘타자’의 이야기다. 여기서 타자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이며 가족이며 타인이다.

이 ‘타자’와의 불화가 소설의 모티브가 된 것은 하루 이틀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과 ‘타자’와 나와의 관계나 밀도가 문제일 뿐이다. 조경란은 <국자 이야기>에서 기본적으로 내 안의 나와의 만남을 이야기하기 위해 가족을 이야기한다. 아버지와 엄마와 동생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을 관찰하고 나와의 관계를 설명한다. ‘나는 봉천동에 산다’와 ‘난 정말 기린이라니까’, ‘잘 자요, 엄마’는 부모와의 관계를 풀어낸다기 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거주하는 인간에 대한 관찰을 보여준다. 그것은 봉천동이라고 하는 특정 장소에 얽힌 일화들이 뒷받침되어 사실감을 더해 준다. 현실 속에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물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 가족의 범위를 연장하면 ‘국자 이야기’의 외삼촌과 조카로까지 확대된다. 신체의 일부와 같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국자로 상징되는 외삼촌의 이야기는 타자와 구별되는 특징을 저마다 하나씩 가지고 있을 법한 현대인의 상징으로 비춰진다. ‘돌의 꽃’이나 ‘100마일 걷기’ 그리고 ‘입술’과 ‘좁은 문’을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는 없으나 사람과 사물들 사이의 관계들을 통해 ‘나’를 확인하는 과정과는 사뭇 다른 양상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소설의 말미에 해설을 부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없으나 안읽은 적도 없다. 손정수는 조경란의 이 소설집을 ‘나를 이야기하는 칼리그람으로서의 글쓰기’라고 명명했다. 칼리그람은 부분을 보면 전체를 볼 수 없고 전체를 보면 부분을 확인할 수 없는 점묘화와 같은 기법이다. 예를 들어 무수히 많은 龍자를 써서 용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멀리서 보면 용을 그린 그림이지만 수많은 ‘龍’이라는 글자는 확인할 수가 없다. 글자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 그림이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조경란이 ‘나’를 이야기하는 방식이 이와 유사한 방식이라는 평론가의 글에 공감할 수 없으나 전체적인 그림이 틀린 것도 아니다. 모더니즘 계열의 난해한 소설은 아니지만 사건 중심의 감상적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이전과 이후를 조금 더 살펴 볼만한 흥미로운 작가다. 소설을 읽는 재미가 타인의 생을 들여다보고 내 생을 돌아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색다른 방식을 경험할 수 있는 소설이다. 또한 차라리 철저하게 개인에게 매몰된 자세와 태도가 타인에게 훨씬 효과적인 화법이 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어설픈 감상과 불완전한 몰입이 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면에서 조경란의 소설은 주목할 만하다.

미친듯이 세차게 퍼붓는 휴일 저녁의 비도 언젠간 그친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해 보는 것뿐이다.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한 번!”이라고 외칠 정도의 애착은 없지만 인간에 대한 애정 이 전에 세상에 대한 애정부터 가져 볼 일이다. 책을 읽는 행위 자체에 대한 자괴감을 지울 수 없는 밤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자기 합리화를 넘어 그것이 내 한 부분을 지킬 수 있는 힘이라면!


060717-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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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후두둑 씨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61
이용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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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사는 게 사건의 연속이지만,
모든 포유류의 결말은 고독하다
죽어서 말이 없거나 말없이 죽었거나
아가리 닥쳐, 라는 한마디가
후두둑 씨의 지나간 인생을 후려친다                          - ‘맙소사, 후두둑 씨’ 중에서

시인의 생각은, 아니 모든 작가의 글들은 그의 생을 넘어 설 수 없다. 이것은 한계가 아니라 작가의 개성이며 분명한 자기 색깔이다. 자신이 살아온 삶과 사유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 그들의 글이다. 시나 소설이나 생에 대한 통찰과 연민, 애정과 비판이 감각적이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문학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 나름의 방식은 독자들에게 선명하게 각인될 것이며 공감을 이끌어 낼 것이다. 모호한 대상과 추상적 관념들을 선명한 이미지로 표현하거나 감정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의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일반적인 시선으로도 이용한의 <안녕, 후두둑 씨>는 읽을만한 시집이다. 삶의 진정성이 짙게 배어나오는 그의 시들은 독자의 정신을 ‘후려친다’

네가 말하는 추억이란,
그저 입술에 남은 바퀴 자국 같은 거
온몸이 불충분했고, 사랑했다는 증거는 없어
침대 밖에서까지 노력할 필요는 없지                          - ‘목요일은 아프다’ 중에서

아침에 나간 추억이 돌아오지 않는다
70년대 라디오 잡음처럼 비가 내리는 밤,
버려진 남자의 폐허 위로
몇 그루의 나무가 시간을 펄럭이며 서 있다
내가 키운 나무들은 아무래도 그리움이 지나쳤다
조금만 비가 와도 와락 눈물에 젖는다                          - ‘고장난 것들’ 중에서

나는 시를 읽으면서 시인의 나이를 확인하는 버릇이 있다. 68년생 이용한이 바라보는 세상과 인생은 어떤 것일까 궁금하기 때문이다. 추억이란 구두 밑창에 들러 붙어있는 완전히 떼어낼 수 없는 껌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증거도 없는 추억을 아직까지 지나친 그리움 속에 잠긴 시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고개를 끄덕이며 장석주의 표현대로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를 기억하게 된다. 공감은 동일시에서 출발하는 감정이다. 하나가 된 듯한 일종의 착각이다. 동일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동일한 존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결국 시는 보편적 정서의 재생산이거나 유일무이한 사건과 감정에 대한 기록이다. 물론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초월과 한계를 함께 지닌다.

네가 외출한 사이에,
방바닥에 엎어진 술병들
술병처럼 누운 나
사실 내 기다림은 습관이야
굳이 네가 아니었어도 난 기다렸을 거야
낙엽 지던 입술들
내 삶의 푸른 이파리를 흔들어 다오                              - ‘비 오는 춘화’ 중에서

시간은 나무처럼 잘도 자란다
창문 밖으로 청춘이 지나가는 소리
나는 마음속의 검을 숨기고 술잔을 기울인다
이미 강 건너간 사랑은 건너간 사랑이야                        - ‘무악재에서 공무도하가를’ 중에서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산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질지도 모른다. 이성과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파토스의 영역은 영원히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기다림이 습관인 사람이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바라본다고 해서 일상이 변하지는 않는다. 내밀한 감정을 과대 포장하거나 비극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습관이자 현실에서 분출하는 욕망의 대리 배설이다. 그러나 이용한이 말하는 사랑과 그리움은 현실에서 누더기가 된다.

안녕, 후두둑 씨

후두둑 씨에게 늦은 소포가 온다
나는 잘 있다고 포장된 외로운 책이다
갈피마다 부엌에서 침대까지 걸어간
발자국이 적혀 있다
후두둑 씨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외투를 걸치고 식탁에 앉는다
지난봄에 들여놓은 아들 녀석이 잠깐
불가사의한 안녕을 묻는다
낡은 커피라도 드릴까요?
후두둑 씨에게 인생은 앉아 있는 것이다
뒤꿈치가 닳아서 무표정한 의자가
매일같이 삐걱이는 후두둑 씨를 기다린다
사뿐히- 갈라진 여백을 중얼거리며
아들아 거의 다 왔다,
문이 닫힌 아내가
지붕 위에서 성큼성큼 쏟아져 내린다.

표제작인 위의 작품은 10년만에 시집을 묶어 낸 시인의 30대가 보인다. ‘뒤꿈치가 닳아서 무표정한 의자’는 시인의 얼굴을 연상시킨다. ‘후두둑’ 떨어지는 마른 하늘의 빗방울처럼 불현듯 생의 불가해함은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예정된 길을 걷는 사람들이 부러운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우리들의 삶은 그렇게 별안간 쏟아지는 소나기와 같다. 상상력이 시의 출발이라면 생활과 삶에 대한 통찰은 시인의 종착역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그것은 모두 사람과 사물, 인생과 세계에 대한 반성과 아이러니이다. 그래서 이용記?지나가는 시간을, 사라지는 생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체통

자고 나면 생이
슬퍼진다
쓸데없는 편지를 부치고
우체통처럼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세월은 우편배달부처럼 지나간다.


060816-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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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니, 선영아 작가정신 소설향 18
김연수 지음 / 작가정신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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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산다는 것은 그립다는 말 한마디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사춘기 시절이 떠오른다. 축제기간 시화전에 다녀갔던 여학생이 톱으로 두 동강을 내서 개칠을 해 놓은 시화 판넬 위에 노란 국화 한 다발을 걸어 놓고 돌아갔다. 열일곱의 가을이었고 세상은 온통 초록빛이었다. 남녀간의 사랑은 지금까지 태어났던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종류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마주치는 사랑은 그래서 진부하다. 아직까지 남녀간의 사랑을 읽기 위해 소설책을 뒤지는 부류는 두 종류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여중생이거나 지난 시간을 곱씹어 추억의 빈 자리를 메우고 싶어하는 중년. 더 있을까?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사랑에 관한한 전문가인척 하면서도 연애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다. 본능적으로. 대부분의 경우 가장 흔하면서도 그 많은 경우의 수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는 이상 심리를 발견하게 된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내 사랑의 부피와 크기에 대한 비교 심리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들의 사랑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쉽게 안심이 되지 않는 나만의 그것을 위해.

오래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광고가 있었다. ‘선영아, 사랑해’라는 티저 광고는 이목을 집중시켰다. 골목길 여기 저기 나붙은 ‘선영아, 사랑해’는 이 땅의 모든 선영이들과 선영이 아닌 여성들까지도 흥분시켰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감성적 광고 기법의 하나였지만 가장 단순하면서도 선명한 ‘사랑해’라는 말은 ‘선영이’라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이름과 결합되어 커다란 시너지 효과를 거두었다. 김연수의 소설 <사랑이라니 선영아>는 제목을 보는 순간 그 광고가 떠올랐다.

90년대 초 사회적 이념 공방이 가라앉고 방황하던 무렵 유하가 들고 나온 <바람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라는 시집이 주목받았다. 물론 내용 자체가 가볍고 덜떨어진 신인류의 삶을 표방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압구정동’이라고 하는 코드 자체가 이슈가 되었다. 동명의 영화로 감독 데뷔를 한 유하의 영화를 보러 간 기억이 새롭다. 엄정화와 홍학표 주연의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향후 10년간 한국영화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유하는 실제로 10년만에 <결혼은 미친짓이다>로 재기에 성공한다. 아무튼 ‘키취세대’로 불리웠던 세대들의 사랑 이야기를 감각적으로 그리고 있는 김연수의 연애소설은 흥미롭다.

89학번과 86번 사이의 갭을 설명하는 책 뒤의 해설은 쓰레기다. 사회적 공방과 이념 대결의 골을 넘어 단순한 시간 개념으로서 3년의 차이가 아니라 사회를 보는 관점이나 운동권을 바라보는 등장인물들의 발언 등을 앞세운 해설은 한 작가의 연애소설에 대한 지나친 오역이다. 운동에 대한 개념과 시선을 작가의 그것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형적 개인들의 발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잡다한 컴퓨터 오락과 상업 광고, 만화와 싸구려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잡지들을 접하며 성장했던 70년대 신인류의 연애와 사랑 그리고 결혼 이야기를 김연수는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레비스트로스와 울리히 벡을 인용하는 분석적 태도가 현학적이기 보다는 빠른 호흡을 조절하고 개별적 사건을 일반화시키는 사고 과정을 이끌어 낸다.

드물게 주목할 만한 작가 김연수의 힘은 끝임없는 새로움에 대한 도전이다. 새로운 어휘에 대한 적절한 배치와 차용, 즉 ‘쫀쫀함’과 ‘얼멍함’의 대척점에 서 있는 두 남자 광수와 진우는 선영이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삼각관계가 아니다. 사랑싸움이나 삼각관계가 이 소설의 중심 축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서술자의 창조적 상징에 의한 비유들, 인간과 인간의 관계들 사이에 놓여 있는 외로움을 포착하는 데에 나는 개인적인 관심을 두었다. 깔끔하고 담백한 말맛을 통한 유쾌함과 사려깊고 예리한 감정에 대한 분석적, 선언적 태도가 오히려 몰입에 대한 즐거움을 반감시킬 수 있지만 이 소설의 재미를 덜어 낼 수는 없다.

사랑과 결혼 그리고 추억이 뒤얽힌, 누구나 유사 체험이 있을 듯한 평범한 이야기지만 같은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는 작가의 능력은 탁월하다. 결국 동일한 이야기의 끊임없는 변종들을 우리는 새로움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라면 이 소설은 김연수의 다른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충분한 매력이 있다. 영원한 사랑은 없지만 영원은 기억은 가능하다. “기억이, 아름다울까, 사랑이 아름다울까? 물론 기억이다. 기억이 더 오래가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필요하지만, 기억은 혼자라도 상관없다.”라고 말하는 작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사랑보다 기억이 소중한 나를 발견하는 일은 서글픈 것일까?


060831-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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