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값 창비시선 322
정호승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의 시를 통해 우리는 당대의 시대정신을 읽는다. 사회와 문화, 정치와 역사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전달할 수 있는 문학작품은 위대하다. ‘문학의 종언’에 관한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가 읽히는 시대는 어떤가. 사춘기 시절, 문학에 눈을 뜨게 해 준 정신적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인 정호승의 열 번째 시집을 읽는 감회는 남다르다.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를 닳도록 읽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음을 그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어렴풋이 깨닫게 되는 게 인생일 지도 모른다. 무언가 조금 알 것 같을 때 떠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작년 겨울 정호승 시인을 학교에 특강 초청 강사로 모셨다. 나는 고등학생이었다가 고등학교 국어교사가 되었지만 시인은 여전히 그대로 시인이었다. 흰머리가 조금 늘었을 뿐 그 형형한 눈빛에는 변함이 없었다. 물론 개인적 감회에 불과하겠지만 시를 읽고 시인을 만나는 기회는 많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첫 시집부터 고스란히 그의 시집이 꽂혀 있는 책꽂이가 이제 세월을 말해주는 것 같다.

김지하, 김남주, 황지우, 조태일, 곽재구, 김정환, 이성부나 이성복, 오규원, 황동규, 최승자, 김승희와 다른 방식으로 시대를 노래했기 때문에 현실참여도 서정도 아닌 혹은 두 가지를 모두 담고 싶었던 시인에 대한 평가는 제각각이었다. 극단의 경계에 머물며 별을 노래했던 시인 정호승.

봄비

어느날
썩은 내 가슴을
조금 파보았다
흙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 흙에
꽃씨를 심었다

어느날
꽃씨를 심은 내 가슴이
너무 궁금해서
조금 파보려고 하다가
봄비가 와서
그만두었다

‘서정시’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시인이 된 정호승. 안도현이나 김용택과 더불어 시를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해 준 시인의 열 번째 시집은 ‘봄비’처럼 촉촉하게 가슴을 적시며 시작된다. 그 가슴 안에서 시의 씨앗이 자라고 꽃을 피우고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으리라고 믿고 싶어지는 그의 시를 읽는다.

추운 겨울 뜨겁게 한몸이 되는 역설적 순간을 위해 우리는 여전히 그 추위를 견딘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일생에 한 번은 그렇게 꽝꽝 얼어붙고 싶다.


결빙

결빙의 순간은 뜨겁다
꽝꽝 얼어붙은 겨울 강
도도히 흐르는 강물조차
일생에 한번은
모든 흐름을 멈추고
서로 한몸을 이루는
순간은 뜨겁다

매일매일 ‘고비’를 넘기는 사람들. 영원히 살 것처럼 희망에 부풀고, 내일 죽을 것처럼 절망하지만 그래도 그 모든 고비들을 마지막이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우리들의 인생이다. 시인은 이제 시대를 고민하지도 않고 아픔과 슬픔에 절망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 ‘고비’라는 모호한 말로 뭉뚱그린다.

가슴이 서늘해지도록 날선 시선도 조금은 둥그렇게 다듬어졌고, 세상을 따뜻하게 품는 방법도 알게 되었나보다. 가볍고 쉬운 발걸음이 경쾌해 보인다. 크게 문제될 것도 없고 아프지도 않아 보인다.

고비

고비 사막에 가지 않아도
늘 고비에 간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면서
오늘도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다
이번이 마지막 고비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이런 시에 눈길이 머문다. 심장이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고 했던 어느 경제학자의 말이 떠오르는 시가 한 편 눈에 띤다. 빨간색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본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파란 안경을 벗겨주고 싶었을까?

시인이 말한 ‘왼쪽’의 기준은 어디일까. 한 편의 시가 말하는 시대의 진실은 아득하기만 하다. 때론 너무 모호하고 난해하다. ‘왼쪽’에서 시인을 바라보면 그는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된다는 갑작스런 생각.

왼쪽에 대한 편견

한쪽 날개가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채
겨울 하늘을 나는 청둥오리가 더 아름답다
한쪽 어깨가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채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더 아름답다
나는 젊은 마음의 육체를 지녔을 때부터 왼쪽 길로만 걸어가
지금 외로운 마음의 육체마저도 왼쪽으로 더 기울어졌다
직선의 대로이거나 어두운 골목이거나
내가 바라보던 모든 지평선도 수평선도 왼쪽으로 더 기울어졌다
기울어진다는 것은 아름다워진다는 것이다
기울어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멀리 사람을 바라볼 때
꼭 왼쪽에서 바라본다
왼쪽에서 바라본 사람의 옆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절대 불변의 진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잠시 지구에 여행 온 나그네들의 삶이 점점 팍팍해진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어떤 삶을 꿈꾸어야 하는가. 모든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술에 취할 일이 아니라, 사라지는 꿈을 위해 슬퍼할 일이다. 시인도 사라지고 별빛도 사라지고 삶의 방향도 사람들이 걸어야 할 길도 사라지는 시대의 슬픔으로 읽히는 것은 순전히 나의 오독(誤讀)이다.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나는 나의 가장 가난했던
미소 속으로 사라진다

어느 목마른 저녁 거리에서
내가 늘 마시던 물은
내 눈물까지 데리고 땅속으로 사라지고
날마다 내 가슴속으로 눈부시게 날아오르던 새는
부러진 내 날개를 데리고 하늘 속으로 사라지고

이제는 쓸쓸한 저녁 바닷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수평선과 함께
인간이 되고 싶었던 나의 모든 꿈조차
꿈속으로 사라져

캄캄한 서울
종로 피맛골 한 모퉁이
취객들의 밤의 발자국에 깊이 어린
별빛들만 사라지지 않고 홀연히
술에 취한다

여전히 ‘소년’이 되고 싶은, 아니 여전히 ‘소년’인 시인의 고백으로 이 시집은 문을 닫는다. ‘봄비’로 시작해서 ‘소년’으로 끝날 때까지 밤새도록 별을 바라보다가 눈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시인은 오늘도 여전히 시를 쓰겠다고 고백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읽는다. 말랑한 감수성과 쉬운 표현 몸에 닿는 이야기들을 통해 이제 수많은 독자를 얻는 시인이 더 이상 내게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 만나 고통스러워하는 시인으로 읽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아쉬울 뿐. 누군가의 말대로 이제 그가 ‘쓸’ 시를 기대해 본다. 그래야 언제나 ‘소년’으로 살고 있는 철없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달랠 수 있다. 오늘 밤은 별도 없이 캄캄하여 바라볼 수도 없다.

소년

몸에
함박눈을 뒤집어쓴
하얀 첨성대
첨성대 꼭대기에 홀로 서서
밤새도록 별을 바라보다가
눈사람이 된



101119-1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밥값 창비시선 322
정호승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의 시를 통해 우리는 당대의 시대정신을 읽는다. 사회와 문화, 정치와 역사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전달할 수 있는 문학작품은 위대하다. ‘문학의 종언’에 관한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가 읽히는 시대는 어떤가. 사춘기 시절, 문학에 눈을 뜨게 해 준 정신적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인 정호승의 열 번째 시집을 읽는 감회는 남다르다.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를 닳도록 읽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음을 그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어렴풋이 깨닫게 되는 게 인생일 지도 모른다. 무언가 조금 알 것 같을 때 떠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작년 겨울 정호승 시인을 학교에 특강 초청 강사로 모셨다. 나는 고등학생이었다가 고등학교 국어교사가 되었지만 시인은 여전히 그대로 시인이었다. 흰머리가 조금 늘었을 뿐 그 형형한 눈빛에는 변함이 없었다. 물론 개인적 감회에 불과하겠지만 시를 읽고 시인을 만나는 기회는 많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첫 시집부터 고스란히 그의 시집이 꽂혀 있는 책꽂이가 이제 세월을 말해주는 것 같다.

김지하, 김남주, 황지우, 조태일, 곽재구, 김정환, 이성부나 이성복, 오규원, 황동규, 최승자, 김승희와 다른 방식으로 시대를 노래했기 때문에 현실참여도 서정도 아닌 혹은 두 가지를 모두 담고 싶었던 시인에 대한 평가는 제각각이었다. 극단의 경계에 머물며 별을 노래했던 시인 정호승.

봄비

어느날
썩은 내 가슴을
조금 파보았다
흙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 흙에
꽃씨를 심었다

어느날
꽃씨를 심은 내 가슴이
너무 궁금해서
조금 파보려고 하다가
봄비가 와서
그만두었다

‘서정시’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시인이 된 정호승. 안도현이나 김용택과 더불어 시를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해 준 시인의 열 번째 시집은 ‘봄비’처럼 촉촉하게 가슴을 적시며 시작된다. 그 가슴 안에서 시의 씨앗이 자라고 꽃을 피우고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으리라고 믿고 싶어지는 그의 시를 읽는다.

추운 겨울 뜨겁게 한몸이 되는 역설적 순간을 위해 우리는 여전히 그 추위를 견딘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일생에 한 번은 그렇게 꽝꽝 얼어붙고 싶다.


결빙

결빙의 순간은 뜨겁다
꽝꽝 얼어붙은 겨울 강
도도히 흐르는 강물조차
일생에 한번은
모든 흐름을 멈추고
서로 한몸을 이루는
순간은 뜨겁다

매일매일 ‘고비’를 넘기는 사람들. 영원히 살 것처럼 희망에 부풀고, 내일 죽을 것처럼 절망하지만 그래도 그 모든 고비들을 마지막이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우리들의 인생이다. 시인은 이제 시대를 고민하지도 않고 아픔과 슬픔에 절망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 ‘고비’라는 모호한 말로 뭉뚱그린다.

가슴이 서늘해지도록 날선 시선도 조금은 둥그렇게 다듬어졌고, 세상을 따뜻하게 품는 방법도 알게 되었나보다. 가볍고 쉬운 발걸음이 경쾌해 보인다. 크게 문제될 것도 없고 아프지도 않아 보인다.

고비

고비 사막에 가지 않아도
늘 고비에 간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면서
오늘도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다
이번이 마지막 고비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이런 시에 눈길이 머문다. 심장이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고 했던 어느 경제학자의 말이 떠오르는 시가 한 편 눈에 띤다. 빨간색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본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파란 안경을 벗겨주고 싶었을까?

시인이 말한 ‘왼쪽’의 기준은 어디일까. 한 편의 시가 말하는 시대의 진실은 아득하기만 하다. 때론 너무 모호하고 난해하다. ‘왼쪽’에서 시인을 바라보면 그는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된다는 갑작스런 생각.

왼쪽에 대한 편견

한쪽 날개가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채
겨울 하늘을 나는 청둥오리가 더 아름답다
한쪽 어깨가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채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더 아름답다
나는 젊은 마음의 육체를 지녔을 때부터 왼쪽 길로만 걸어가
지금 외로운 마음의 육체마저도 왼쪽으로 더 기울어졌다
직선의 대로이거나 어두운 골목이거나
내가 바라보던 모든 지평선도 수평선도 왼쪽으로 더 기울어졌다
기울어진다는 것은 아름다워진다는 것이다
기울어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멀리 사람을 바라볼 때
꼭 왼쪽에서 바라본다
왼쪽에서 바라본 사람의 옆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절대 불변의 진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잠시 지구에 여행 온 나그네들의 삶이 점점 팍팍해진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어떤 삶을 꿈꾸어야 하는가. 모든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술에 취할 일이 아니라, 사라지는 꿈을 위해 슬퍼할 일이다. 시인도 사라지고 별빛도 사라지고 삶의 방향도 사람들이 걸어야 할 길도 사라지는 시대의 슬픔으로 읽히는 것은 순전히 나의 오독(誤讀)이다.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나는 나의 가장 가난했던
미소 속으로 사라진다

어느 목마른 저녁 거리에서
내가 늘 마시던 물은
내 눈물까지 데리고 땅속으로 사라지고
날마다 내 가슴속으로 눈부시게 날아오르던 새는
부러진 내 날개를 데리고 하늘 속으로 사라지고

이제는 쓸쓸한 저녁 바닷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수평선과 함께
인간이 되고 싶었던 나의 모든 꿈조차
꿈속으로 사라져

캄캄한 서울
종로 피맛골 한 모퉁이
취객들의 밤의 발자국에 깊이 어린
별빛들만 사라지지 않고 홀연히
술에 취한다

여전히 ‘소년’이 되고 싶은, 아니 여전히 ‘소년’인 시인의 고백으로 이 시집은 문을 닫는다. ‘봄비’로 시작해서 ‘소년’으로 끝날 때까지 밤새도록 별을 바라보다가 눈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시인은 오늘도 여전히 시를 쓰겠다고 고백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읽는다. 말랑한 감수성과 쉬운 표현 몸에 닿는 이야기들을 통해 이제 수많은 독자를 얻는 시인이 더 이상 내게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 만나 고통스러워하는 시인으로 읽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아쉬울 뿐. 누군가의 말대로 이제 그가 ‘쓸’ 시를 기대해 본다. 그래야 언제나 ‘소년’으로 살고 있는 철없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달랠 수 있다. 오늘 밤은 별도 없이 캄캄하여 바라볼 수도 없다.

소년

몸에
함박눈을 뒤집어쓴
하얀 첨성대
첨성대 꼭대기에 홀로 서서
밤새도록 별을 바라보다가
눈사람이 된



101119-1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을 범하다 - 서늘하고 매혹적인 우리 고전 다시 읽기
이정원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적(的) 접사. (일부 명사 뒤어 붙어) ‘그 성격을 띠는’, ‘그에 관계된’, ‘그 상태로 된’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고유어에는 ‘-적(的)’이 붙지 않는다. 부사에 붙은 ‘-적으로’와 부사어에 붙은 ‘-적’은 군더더기이다. ‘-적’ 대신 조사나 접사를 붙이면 한국어에 한결 어울린다.

정영숙, 일본어 접사 “的”의 성립 및 한국어로의 유입문제 고찰,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4
문영은, 日本語と韓國語の漢語につく接辭「的」の硏究,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국회도서관이나 협정기관(도서관)에서만 볼 수 있는 논문자료라서 찾아볼 수 없다. 다음으로 미루어 두었다. 도대체 ‘-的’이란 무엇인가? 일본어의 영향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이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예를 보면 가끔씩 눈에 거슬릴 때가 많다. 책을 읽다가 특정 단어를 세어보기는 처음이다. 23페이지에 14번.

논문과 학술지에 사용하는 문장과 문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카데미즘에 충실한 글씨는 따분하고 고루한 반면 진중하고 깊은 맛이 난다. 이에 비해 저널리즘에 충실한 글씨는 유연하고 부드럽지만 가볍고 자극적일 수 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책은 당연히 두 가지 특성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정원의 『전傳을 범하다』를 읽기 시작하면서 가독성이 떨어지는 이유를 찾다가 떠오른 생각들이다. 초반에 힘이 너무 들어간 것 같다. 중반이후에는 생각의 흐름이나 문장이 쉽게 읽힌다. 어쨌든 작가 특유의 문체라고 볼 수 없는 버릇 때문에 몰입할 수 없어 난감할 때가 있다.

자극적인 제목만큼 표지도 삽화도 전체 디자인도 공을 많이 들인 책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고전소설을 재해석하려는 노력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책머리에 앞세운 아나톨 프랑스의 말처럼 고전은 누구나 그 가치를 인정하는 책이지만 누구도 읽지 않는 책이다. 특히 세계문학과 고전문학이 그러하다. 줄거리를 알고 있거나 다른 매체를 통해서 먼저 접했기 때문에 읽은 것 같은 느낌, 다 아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많다. 꼼꼼하게 읽어가며 시대와 대화를 나누고 작가와 소통하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독자들 입장에서 매우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 책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고전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의미이고, 뻔한 내용과 주제를 뒤집어 생각하는 다시읽기의 즐거움이 두 번째 의미이다. 황새결송이나 최낭전처럼 익숙하지 않은 고전에 대한 이야기는 새롭고, 토끼전이나 심청전 같은 익숙한 소설들은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신선하다. 殺(죽은자의 변), 慾(욕망의 늪), 權(지배자의 힘), 我(나의 재발견)의 구성방식을 취하고 있다. 놓칠 수 없는 대목을 소개하기도 하고 각 부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소개하기도 한다. 이렇게 소개한 고전소설은 모두 열일곱 편이다.

<토끼전>은 ‘봉권 권력에 대한 민중의 승리’ 따위의 도식적인 주제로 정리될 수 없는, 인간 본성에 대한 처연한 진실을 보여준다. - P. 103

예를 들어, <토끼전>이 인간의 욕망과 권력관계에서 파생된 삶의 진실을 폭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해석은 단순하게 토끼의 임기응변과 용기, 자라의 충직함을 교훈적으로 받아들인 독자들에게 새로운 고전읽기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토끼의 간을 빼려는 시도는 생명에도 ‘경중’과 ‘상하’의 위계관계가 엄존한다는 사실이 전제된 행위이다. 봉건사회의 가치가 반영된 이 소설은 자라 부인과 토끼와의 관계 등을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본질을 드러낸다. 이렇게 고전 소설은 현재적 유용성을 가지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문학의 보편성이란 시공을 초월한 자리에 오롯이 놓일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토끼전>은 우리의 삶을 이렇게 재해석하는 데도 사용될 수 있다.

이 천박한 발전의 논리는 우리 사회에서 선진국의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일류 국가의 명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국가는 가난한 시민들의 간을 빼내어 신도시를 건설하려 하고, 하찮은 동식물을 죽여 세련된 자연 환경을 유지하려 한다. 자신이 수행하는 일에 대한 과분한 사명감은 때로 정말로 슬픈 결과를 낳기도 한다. - P. 106

무소불위의 용왕과 자라의 충직함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슬픈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 책은 우리에게 더 없이 소중한 고전읽기의 전례가 될 것이다. 고전은 언제나 살아 숨 쉬는 텍스트여야 하며 박제된 모습으로 먼지를 뒤집어쓰고 책꽂이 한켠을 장식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장화홍련전>에서 시작해서 <전우치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횡무진 고전소설의 숲을 산택하는 즐거움은 충분하다. 스토리만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꼼꼼한 텍스트 읽기의 필요성과 그것을 소화시키는 다양한 방법을 즐길 수 있다. 오래된 미래를 기억하는 상상의 공동체가 민족이다. 고전소설이 전하는 지혜는 현재 우리들의 모습을 성찰하는 거울이며 당대의 삶을 이해하는 기준이 된다. 조상들의 모습과 바로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 중첩되는 이유는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신산스런 삶은 어깨를 무겁게 하지만 시대정신과 삶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도 바로 우리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고전이다. 다시 읽고 되새기고 그 깊은 맛을 음미해 보기 전에 좋은 안내서가 될 만한 책이다.


101108-1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우리는 그렇게 모든 것을 놓고 간다. 소멸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인생의 목표와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 없다. 유행가 가사처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대충 살자는 말이 아니라 그러니까 잘 살아 보자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하지만 ‘잘 산다’의 기준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고 명예를 얻고자 하며 진정한 사랑을 원하기도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기준과 삶의 목표가 자신의 삶의 가치를 반영하는 것은 물론이다.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어느 철학자의 분석을 빌리지 않더라도 삶의 가치 기준을 타인의 그것과 늘 비교하며 불안해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맹목적으로 내면화된 기성세대의 경쟁적 질서일 뿐일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회적 가치도 영원할 수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진실도 절대적인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말이다. 흔희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에 따라 역사를 구분하기도 하고 사회제도나 문예사조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인간 사회를 혹은 개인의 삶을 간단하게 정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학이라는 창을 통해 타인과 사회와 역사를 관음한다. 소설은 늘 우리에게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타인의 삶과 과거의 삶을 돌아보고 내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소설이면 좋은 평가를 얻게 된다. 일본계 영국인 가즈오 이수로의 『남아 있는 나날』은 독특한 소재와 편안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에게 시대를 초월한 삶의 의미를 묻고 있다.

1956년 7월 달링턴 홀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근대화의 과정을 한 명문 귀족 집안의 집사를 통해 살펴보고 있다. 사회와 역사를 조망하는 소설은 아니지만 20세기 초 ‘달링턴 홀’의 집사로 살아야 했던 스티븐슨의 내면을 통해 품위와 명예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이 소설은 사회문화적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을 통해 삶의 가치를 고민하게 한다. 작가는 개인이 처한 상황에서 가장 고위하고 품위 있는 삶을 살아 온 한 귀족 가문의 집사를 통해 인간적 진실이란 과연 무엇인지 묻고 있는 듯하다.

영국인의 문화와 역사적 상황일 잘 녹아 있는 소설이지만 제2차 대전 당시의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1인칭 주인공으로 자신의 삶을 서술하는 스티븐슨은 총무로 일했던 켄턴 양에 대한 기억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달링턴 홀의 주인이 바뀌고 미국인 패러데이 어르신을 모시게 된 스티븐슨은 6일간의 여행을 떠난다. 달링턴 홀과 함께 한 묶음으로 집의 일부로 살아온 집사의 여행은 낯설기만 하다. 오래 전 결혼하기 위해 달링턴 홀을 떠난 켄턴 양의 편지를 받고 여행 중에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 달링턴 홀에 완벽한 그녀의 일솜씨가 필요할 뿐이라고 다짐하는 스티븐슨의 태도와 여행 중에 과거 회상 형식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은 제각각 다른 이야기들을 읽어낼 수 있다. 켄턴 양의 사랑, 달링턴 홀의 역사, 영국의 귀족 문화, 제2차 세계 대전의 시대적 상황 그리고 스티븐슨의 품위 등.

6일 간 영국의 곳곳을 여행하는 과정에서 늙은 영감이 되어버린 집사 스티븐슨의 생각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 온 삶을 정리하게 된다. 제목처럼 ‘남아 있는 나날’을 어떻게 보내게 될 것인지 짐작할 수 있는 소설이 아니라 독자의 입장에서 스티븐슨이라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고 있는 듯하다.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철저하게 주인을 모시는 삶을 살았던 집사는 빈틈없이 일처리를 하기 위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켄턴 양을 외면한다. 그것이 고통스런 선택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품위와 명예를 지키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지나가버린 시대의 중심에서 서 있던 스티븐슨이 이제 주인이 바뀐 달링턴 홀을 어떻게 지켜갈 것인지 궁금하지는 않다. 여행을 마치면서 새로 바뀐 주인을 잘 모시기 위해 농담의 기술을 익혀야겠다고 다짐하는 스티븐슨은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다는 것이 한 개인의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김남주는 해설에서 한나 아렌트의 『예수살렘의 아이히만』을 예로 들어 스티븐슨의 직무에 대한 놀라운 성실함을 ‘악의 평범성’에 비유한다. 개인의 입장에서 혹은 일과 직업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이히만은 얼마나 평범하고 충성스런 부하였는가. 주인공 스티븐슨의 일이 타인에게 끔찍한 불행을 가져 온 것은 아니지만 켄턴 양을 통해 작가는 타인의 관점에서 스티븐슨이라는 독특한 인물을 객관화시킨다.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의 삶에 대한 가장 깊은 고민과 통찰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면 이 소설을 통해 현재 우리들의 삶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나 장정일은 소설 읽기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진정한 독서가 소설을 넘어서야 시작된다는 말이라면 동의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문학을 통해 우리가 고민해야 할 자아와 세계에 대한 질문에 답을 구할 수 있다면 소설 읽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더구나 우리 시대의 고전이 될 수 있을 법한 좋은 소설들을 가려 읽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추천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여행을 마칠 무렵 만난 노인의 입을 통해 작가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말한다. 하루의 일을 끝내고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는 저녁이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라고…….

101024-0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무장지대를 담당하는 수색중대에서 군생활을 마감할 무렵 마지막 휴가를 나왔다가 삐삐를 구입해서 복귀했다. 주둔지 마지막 언덕을 돌아 GOP 라인 부근에 이르자 삐삐의 안테나가 사라졌다. 무용지물이 된 조그만 기계장치를 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토요일에 전역 신고를 마치고 월요일부터 출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KTF 016 번호를 예약해서 받은 전화 번호를 010으로 바꾸면서 작년에 번호가 바뀌었다. 휴대폰이 생기기 전에는 사람들이 생활이 지금보다 불행했을까?

신속하고 편리한 생활은 생각할 시간과 여유 있는 삶을 앗아갔다. 우연에 기대지 않아도 좋을 만큼 뭐든 정확하고 빈틈이 없어졌다. 숨가쁘게 살 수 밖에 없는 촘촘한 네트워크로 세상은 연결되기 시작했다. 인터넷과 휴대폰이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마트폰 시대를 맞아 이제는 문자와 메일, 소셜 네트워크로 모든 사람과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시대를 살아간다. 문득, 강원도에 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풀씨를 코팅해서 만든 책받침을 우체통에 꽂아 놓았던 친구를 떠올린다. 스무 살 무렵이었다. 그때는 전화벨이 울려도 나를 찾는 전화가 많지 않았다. 공중전화 박스를 지날 때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고, 그 마음의 문을 닫고 스스로 상처 받던 시절이었다.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보편적 정서를 담아낸 소설들의 종착역은 사랑이다. 작가는 어떤 종류의 사랑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할 뿐이다. 사랑을 다양하게 변주했던 신경숙의 장편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을 천천히 읽는 가을은 또 어떤가.

기억이란 제 스스로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속성까지 있다. 기억들이 불러일으킨 이미지가 우리 삶 속에 섞여 있는 것이지, 누군가의 기억이나 나의 기억을 실제 있었던 일로 기필코 믿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고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면 나는 그 사람의 희망이 뒤섞여 있는 발언으로 받아들인다. - 22쪽 

연애소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구체적 시공간을 걷어내고 보편성을 담아내려는 노력과 흔적이 곳곳에 드러나는 이 소설은 ‘시대’와 ‘사랑’ 두 가지를 모두 아프게 읽어내야 한다. 그러한 시대가 있었고 그러한 사랑이 있었다는 말로 요약될 수 없는 행간의 깊이와 떨리는 문장과 긴 호흡이 압권이다. 그러나 지나친 감수성과 인물들이 가진 작위적 성격은 가독성을 떨어뜨리고 공감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은 곳곳에 흘러넘친다. 오랬동안 신경숙의 소설을 읽어온 독자로서 피로감이 들기 시작한 걸까. 『엄마를 부탁해』의 감동과 여운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까. 서로 다른 감정을 보여주고 있지만 사랑이 차고 넘쳐 부담스럽다.

신형철은 “왜 나는 지드와 헤세의 청춘소설에 감동받은 척했던 것일까. 그들의 책은 아름다웠지만 상처가 만져지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아픔을 느끼지도 못했었는데. 그러나 신경숙의 소설은 아파서, ‘세계는 떠나버렸다. 내가 널 짊어져야 한다’라는 첼란의 시구를 생각나게 했지. 자신의 삶을, 동료의 죽음을, 심지어 공동체의 운명을 짊어져야 했던 한 시대의 ‘크리스토프’들이 여기 있네.”라고 말했지만 나는 지드와 헤세의 청춘소설에 감동받았다. 그것은 작가의 힘이나 작품의 위대함 때문이 아니라 나이와 감수성과 상황 때문이었다. 오래전 기억을 더듬어 청춘의 한 구석의 먼지를 털어내야 하는 일은 기쁨이거나 고역이다. 신경숙의 소설은 너무 아파서, 한 시대의 ‘크리스토프’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듯해서 부담스럽다.

내가 그쪽으로 갈 수 있는 마음인지 그럴 수 있는 상황인지는 상대가 아닌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네 명의 청춘과 윤교수는 한 시대와 서로 다른 방식의 사랑과 아픔을 토해낸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도 모든 사람은 ‘크리스토프’일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강을 건너는 사람과 강을 건너게 해주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네. 여러분은 불어난 강물을 삿대로 짚고 강을 건네주는 크리스토프이기만 한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 전체이며 창조자들이기도 해. 때로는 크리스토프였다가 때로는 아이이기도 하며 서로가 서로를 강 이편에서 저편으로 실어나르는 존재들이네. 스스로를 귀하고 소중히 여기게. - P. 63쪽

오래된 기억 속의 조작된 추억들을 수채화로 채색하고 싶은 사람들이나 가장 비극적인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사람에게 권할 만한 소설이지만, 신경숙의 소설 중에서는 만지작거리다가 다른 소설들을 우선 추천하게 될 것 같은 작품이다.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말해질 수밖에 없는 청춘소설 한 권을 읽은 셈이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기억의 언저리를 기웃거렸을 뿐이다.

또다시 주어진 시간과 과거의 결과인 현재를 돌아본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려도 듣지 못하는 순간이 있고 간절하게 기다려도 전화벨이 울리지 않는 때도 있는 법이다. 우리는 때때로 그 모든 순간을 인생이라고 부른다. 다 지나가는 인생.

인생은 매순간 우리에게 힘든 결단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산다는 것은 무의 허공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와 질감을 지닌 실존하는 것들의 관계망을 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이 끝없이 변하는 한 우리의 희망도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 291쪽


100928-08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