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 조지 오웰 평론집
조지 오웰 지음, 조지 패커 엮음, 하윤숙 옮김 / 이론과실천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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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인터넷은 놀랍고 신기하다. 성인이 된 후에야 모뎀으로 겨우 접속하던 시절. 한석규와 전도연처럼 영화 같은 일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네트워크 세상은 사람들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우매한 군중은 직접 민주주의에 버금가는 여론을 형성한다. 각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개인은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던 시기에 벌어졌던 신은 죽었다의 재현이었다. 통제된 언론과 권력기관의 압력은 석기시대의 전설이 되었다. 대신, 실시간으로 퍼지는 뉴스와 sns을 통해 확산되는 사건은 수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홍수에 휩쓸리듯 전체 판을 읽지 못하는 분노, 혐오, 증오는 확대 재생산된다.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을 하는 사람도 생긴다. 피아 구분 없이 총질을 하는 사람도 있고 이념, 정당, 계층, 성별에 따라 논리와 이성을 상실한 사람도 많다. 홍성수의 말이 칼이 될 때를 법과 인권, 표현의 자유에 대한 쟁점으로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할까?

 

대중의 관행과 의견을 의식과 지성을 발휘해 조작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사회의 이 보이지 않는 메커니즘을 조작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국가의 권력을 진정으로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정부(invisible government)’를 이룬다는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프로파간다에서 지적한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문제점은 포퓰리즘과 민심 사이에서 길을 잃은 듯하다. 여론조작은 프로파간다로 가능하다. 언론은 여론을 이끄는 대신 목소리 큰 놈에게 끌려가기도 한다. 질문할 줄 모르는 기자, 받아쓰기와 베껴쓰기로 월급을 받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기자의 기사를 새겨듣는 독자가 사라진 시대는 얼마나 혼란스러운가.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검색해서 뉴스를 전하면서 기자인척 하거나, 팩트 확인 없이 추측과 사견을 섞어 해설을 하는 기자는 이제 여지없이 걸러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마치 뭘 연구하는지 모르는 연구원이 없는 연구소장이나 혼자 일하는 각종 모임과 단체의 대표처럼.

 

아날로그의 시대의 프로파간다는 디지털 시대에 비하면 땅 짚고 헤엄치기였을 것. 왜냐하면 어마어마한 정보격차 때문. 지식과 정보를 독점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낮에 수평선을 본 사람과 밤에 파도소리만 들은 사람만큼 크다. 조지오웰은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에서 천국과 지옥은 같은 곳에 있다. ‘마음의 변화가 없는 제도의 변화는 소용없다.”(41)는 말로 그 시절과 이 시대를 하나로 묶어버린다. 그렇다, 마음의 변화가 없는 제도의 변화는 소용없다. 시스템과 구조를 바꿔도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달라질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프로파간다는 어떻게 가능할까. 마음의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여성운동을 예로 들어보자. 평화와 비폭력을 내세운 마틴 루터 킹과 폭력과 투쟁으로 맞선 말콤 엑스를 비교할 수 없듯 페미니즘 운동에 메갈리아는 숱한 이슈와 논란을 가져왔다. 지금도 그 논쟁은 계속된다. 시간의 문제일 뿐 변화는 계속된다. 국가의 정체, 권력구조, 경제체제도 끊임없이 변했다. 사람들의 생각도 행동도 변한다. 그러나 자연스런 변화는 없다. 생각의 전환, 실천적 행동이 이어져 변화가 일어난다. 급진적, 일시적 변화를 혁명이라 하고 점진적, 단계적 변화를 개혁이라 하자. 보다 큰 개념인 인권을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쉽다. ‘사형제 폐지는 어떨까. 남성은 여성의 적인가. 물론 여성은 남성의 적이 아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보편성과 범용적 원리를 들이밀지 말라는 논리는 타당한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앞서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김남주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은 이렇게 시작한다. 프로파간다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다. 그 방법의 핵심은 제도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 구조를 바꾸고 시스템을 고치는 일은 늦었지만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마음을 바꾸지 못하면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진보는 환영이 아니며 실제로 이루어지지만, 느리게 진행되고 언제나 실망스럽다.”(42)는 말은 정운영의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는 선언처럼 아프게 들린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는 게 프로파간다다. 조지 오웰은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디킨스 본인도, 빅토리아 시대 대다수 소설가도 이를 부정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한편 모든 프로파간다가 예술은 아니다.”(78)는 말로 흔들리던 시대의 예술을 평가한다. 아날로그 시대의 소설은 그대로 가공할 무기였다. 글을 쓰는 사람들의 영향력은 지금과 다른 양상이었다. 인간에 대한 통찰력, 세상을 보는 안목이 남달랐다. 그들의 말이 항상 옳고 선경지명을 가졌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시선으로 사람들에게 변화를 요구했다는 의미다.

 

예술은 글 쓰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20세기를 여는 영화예술은 텍스트와 다른 힘으로 대중을 쥐고 흔들었다. 그것은 이성과 논리에 호소하는 방식대신 마음을 움직이는 방식을 택했다. 찰리 채플린은 삼류 슬랩스틱 코미디의 달인이 아니다. 조지 오웰은 이 책에는 단 한편의 영화 이야기가 나온다. 위대한 독재자가 바로 그 영화다. 부분적으로만 봤던 영화 전체를 다시 봤다. 채플린은 영화 천재가 맞다. 영화 말미에 나오는 연설만 들어보자.


위대한 독재자》 마지막 연설

 

찰리는 모두가 예상하는 연설 내용과는 달리 민주주의와 관용, 상식적인 예의를 지지하는 투쟁 연설을 인상적으로 펼친다. 아주 대단한 연설로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헐리웃 영어로 바꿔놓은 형태라 할 수 있었는데, 나로서는 오래간만에 들어본 아주 강렬한 프로파간다였다.”(204)는 평가처럼 이 책의 제목을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예술은 찾기 힘들다. 선언적 의미의 민주주의, 자유, 평화, 인권, 평등에 대한 가치 기준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프로파간다는 20세기 예술의 전유물이 아니라 여전히, 앞으로도 지속되야 할 예술의 가치를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매일 쏟아지는 책과 텍스트는 개인적 기록으로 의미 있는 비평으로 예술 작품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 가치또한 프로파간다가 아니면 인정받을 수도 없고 그 판단 또한 모호하며 기준 또한 점점 희미해진다. 러디어드 키플링, T. S. 엘리엇, 살바도르 달리, 조나단 스위프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가들에 대한 조지 오웰의 평가는 나는 왜 쓰는가에서 말한 대로 정치적이다. 어떤 예술이 프로파간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마는.

 

소련은 고속 성장을 보이는 대국으로 과학 연구자들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높아졌기 때문에 그들을 후하게 대우한다. 심리학과 같은 위험한 학문을 가까이 하지 않는 한 과학자에게는 특권이 주어진다. 반면 작가는 극심한 박해를 당한다. 일리야 예렌부르크나 알렉세이 톨스토이 같은 문학 매춘부들은 막대한 돈을 받고 있지만 그와 같은 작가들에게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 즉 표현의 자유를 빼앗기고 있다. - 341

 

 

조금이라도 가치를 지니는 작가의 글은 언제나 온전한 자아가 만들어내는 산물이어야 하며, 이 자아는 한쪽에 비켜선 채 진행되는 일을 기록하고 그 일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일의 진정한 본질에 대해 결코 속지 않아야 한다. - 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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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 프랑스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드니 디드로 외 지음, 이규현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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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왜 파이프가 아니란 말인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라고 하자. 언중言衆들이 모두 라고 했으면 는 비가 아니라 가 된다. 지시하는 언어[형식]와 대상[내용]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만남이 숙명을 가장한 우연이듯이. 이를 언어의 자의성恣意性이라 한다. 이름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르다. 돌은 한국에서만 돌이다. 미국에서는 스톤이라 부른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이를 기표(記標, 형식, signifiant 시니피앙)와 기의(記意, 내용, signifié 시니피에)라고 명명했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그림은 이미지의 배반이다. 이것이 파이프가 아니면 무엇인가? 그림은 사물의 재현이다. 당연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다. 파이프의 재현일 뿐. 글과 그림을 분리해 보자. ‘이것은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가. 파이프를 그린 그림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과 평면의 종이만 남는다. 그림으로 보여주려는 파이프와 추상적 개념으로 기표와 기의 사이에 약속인 텍스트는 상호 연관성이 없다. 파이프 그림과 텍스트는 캔버스 안에 동시에 놓여 있으나 이질적이다. 미셸푸코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이 그림은 칼리그람(+그림)이다. 보여주는 것과 말하는 것을 은폐하기 위해 서로를 포개어 놓았다라고 지적한다. 글과 그림을 은폐한다는 말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숨김과 드러냄이라는 표면적 의미와 글과 그림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는 선언은 기존 질서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다. 관습적 사고에 대한 경고다. 플라톤의 동굴의 우상처럼 우리는 벽에 비친 그림자를 실재한다고 믿는다. 교육 제도, 정치적 이념은 말할 것도 없고 윤리와 종교적 교리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그렇다고 믿는, 대다수가 인정하는 이념과 가치는 언제나 위험하다. 당신의 자유의지가 또한 그러하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면 무엇인가

 

드니 디드로의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는 소설인가 아닌가. 소설이란 무엇인가. 300년의 간격을 두고 발생한 용어인 꽁뜨conte와 누벨nouvelle은 어떻게 다른가. 소설의 이론을 소설로 보여주는 것은 가능한가. 반성적 사고는 새로운 출발의 전제 조건이다. 디드로는 기존의 소설에 반기를 든다. 소설다운(?) 소설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면서 스스로 단편소설의 전형을 보여주려는 시도는 자기부정이다. 의심과 질문, 자기부정이 결여된 진보는 가능하지 않다.

 

프랑스의 단편들은 미국, 스페인라틴아메리카, 영국을 거쳐 오며 느꼈던 소설과 차이가 크다. 라틴아메리카의 환상적 리얼리즘과 또 다른 환상과 현실의 공존이다. 현대소설은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 즉 개연성 있는 허구를 전제로 한다. 소설의 형식과 내용을 한정짓는 어리석은 이론을 들추자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근대 이전의 서사문학과 다른 특징에 대한 이야기다. 꿈과 환상의 나라로 떠나는 여행은 여전히 계속되지만 프랑스의 단편들은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며 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고전소설의 전매특허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과 구별되는 혼란이다. 발자끄의 붉은 여인숙과 메리메의 푸른 방은 그 자체로 사건의 재미를 보여주지만 문신론자들의 저녁식사, 씰랑스, 코프퓌아 왕에 이르는 동안 내용은 고사하고 소설을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끌레지오의 륄라비와 블랑제의 낙서에 이르러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언어 자체가 환상이다. 소설은 세계를 재현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소설은 세계를 창조한다. 프랑스의 단편을 읽는 동안 지금-여기의 관점으로 세계문학을 읽으려는 어리석음이 그때-거기의 모습을 들여다보려는 욕망을 앞섰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봄 밤, ‘사랑이 상대방을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것이라면 누구도 그녀를 나보다 더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블랑제, 낙서, 458)라는 낙서만 남았다. 멀리 신호등에 걸린 자동차의 붉은 등이 흐릿하다. 일단 멈추지 않으면, 달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는다. 어둔 밤길 조심.

 

나는 밤을 열렬히 사랑한다. 사람들이 조국과 애인을 사랑하듯 나는 본능적이고 물리칠 수 없는 깊은 애정으로 밤을 사랑한다. 내 모든 감각으로, 밤을 보는 내 눈으로, 밤을 호흡하는 내 후각으로, 밥의 정적을 듣는 내 귀로, 어둠이 어루만지는 내 살갗 전체로 밤을 사랑한다. - 모빠쌍, ,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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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6
잭 케루악 지음, 이만식 옮김 / 민음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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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을 즐기는 방법 - 구글 지도와 유투브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하이데거의 말을 문학에 적용해 보자. 공간은 사건에 선행한다. 작가는 가상공간에 인물과 사건을 배열하기도 하고, 사건을 중심으로 인물을 창조하고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공간은 이미 작가의 실존적 경험이나 상상적 경험을 초월할 수 없다. 한 번도 들어본 적도 가본 적도 없는 기막힌 공간을 창조한 작가는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성 라퓨타걸리버 여행기에 대한 오마주다. 조나단 스위프트는 릴리퍼트와 브롭딩낵을 거쳐 라퓨타를 완벽하게 창조했을까. 수많은 신화, 전설, 민담의 공간을 차용했다. 어떤 공간을 창조하느냐에 따라 문학 작품은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공간성을 공간의 구조내지 성격이라고 정의했다. 이를 문학적 공간에 적용해 보면 현실상상으로 나눌 수 있다. 실재 경험할 수 있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실감나게 몰입하는 재미가 있다. 반면에 옷장 문을 열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나니아 연대기식 상상력은 꿈과 환상을 선물한다. 어느 쪽이든 세밀한 구조를 만들고 공간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세계는 재창조된다.

 



로드 무비의 대명사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 1997)에서 나 델마와 루이스 (Thelma & Louise, 1991)OST를 다시 듣는다. 바다를 향해 달리는 마틴과 루디, 세상 끝까지 달릴 수밖에 없었던 델마와 루이스. 그들이 달린 길은 공간적 구조가 아니라 그들의 실존을 드러내는 공간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물론 그 길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길이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공간이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On the Road, 1957)는 공간을 따라가지 않으면 무의미한 소설이다. 1947~1949년의 미국의 길은 어땠을까. 주인공 샐 파라다이스는 히치하이킹으로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간다. 다시 타임스퀘어로 돌아오기까지 13,000킬로미터의 대장정. 덴버에서 딘을 만나지만 1부는 오로지 샐 파라다이스 자신의 여행이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미동부에서 서부로 끊어질 듯 이어진 길이 주인공이다. 소설에서 언급된 대도시와 중도시를 계속해서 찾았다. 구글 지도를 펼쳐 확대 축소를 반복하며 뉴욕 주부터 캘리포니아 주까지 샅샅이 훑었다. 책 앞쪽에 1~4부까지 이동 경로가 나오지만 항공지도와 구글 지도를 따라가며 읽었다.

 

2부는 샐과 딘, 메릴루, 에드 던컬이 함께 떠난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운전을 하며 이동한다. 3부는 샐과 딘, 샌프란시스코에서 롱 아일랜드까지 기록이다. 4부는 샐, , 스탠, 셰퍼드가 덴버까지 가서 남쪽으로 멕시코시티까지 간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두 번 왕복 후 국경을 넘는다.

 


강을 건너고 산맥을 넘고 눈보라와 싸우며 이어진 길들은 그대로 500쪽이 넘는 소설이 되었다. 두툼한 소설책 두 권을 홀린 듯 넘긴 이유는 순전히 구글 지도와 유투브 때문이었다. 가본 적도 없는 미국의 시골길을 샐과 딘과 동행한 이유는 자동차에서 들려오는 재즈 때문이다. ‘찰리 파커, 마일즈 데이비스, 빌리 홀리데이, 디지 길레스피, 루이 암스트롱, 로이 엘드리지, 핫 립스 페이지, 텔로니어스 멍크, 스탠 게츠, 찰리 버드, 페레즈 프라도, 듀크 앨링턴이름이 나올 때 마다 검색하고 추억의 재즈를 듣는다. 덜컹거리는 트럭 짐칸도 좋고, 메릴루와 키스하며 운전하는 딘의 차 뒷자석도 좋았다. 어차피 달려야하는 게 인생 아닌가.

 

완벽한 평면과 텍스트로 이루어진 세계문학에 공간성을 부여하는 건 순전히 독자들의 몫이다. 작가의 묘사와 서술에 따라 길을 만들고 건물을 짓고 인물을 창조한다. 그러나 지루하게 나열되는 미국의 지명을 따라가는 게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엉뚱한 방법 같지만 구글 항공지도를 확대 축소해가며 샐과 딘과 메릴루, 에드, 스탠, 셰퍼드의 위치를 추적하는 재미가 제법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유투브가 맡았다. 찰리 파커의 앨토 섹스폰 소리와 함께 뉴올리언스의 전성시대를 듣는다.




1부 샐

; 뉴저지패터슨~뉴욕~시카고~대븐포트~아이오와시티~디모인~덴버~스튜어트~오마하~그랜드아일랜드~셸턴~고센버그~노스플랫~샤이엔~롱몬트~덴버~센트럴시티~솔트레이크시티~리노~샌프란시스코~LA~플래그스태프~달하트~세인트루이스~인디애나폴리스~콜럼버스~피츠버그~해리스버그~뉴욕타임스퀘어(13,000킬로미터)

 

2부 샐, , 메릴루, 에드 던컬

; 뉴욕~워싱턴~리치먼드~테스터먼트~노스캐롤라이나 던~메이컨~모빌~뉴올리언스~배턴루지~보몬트~휴스턴~앨패소~라스크루시스~벤슨~투손~베이커필즈~툴레어~오클랜드~샌프란시스코

 

3부 샐,

; 샌프란시스코~새크라멘토~솔트레이크시티~크레이그~덴버~오갈랄라~고센버그~커니~그랜드 아일랜드~콜럼버스~디모인~뉴턴~대븐포트~시카고~디트로이트~롱 아일랜드

 

4부 샐, , 스탠 셰퍼드

; 워싱턴~오하이오~신시내티~인디애나~세인트루이스~미주리~캔자스~애벌린~덴버~스프링스~달하트~프레더릭스버그~샌안토니오~러레이도~몬테레이~그레고리아~멕시코시티~뉴욕 

 


 
길을 떠나는 이유는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기 위해서다. 세월은 가고 사람은 늙는다. 그럼에도 공간은 더디게 변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여행은 낯설게 바라보기 위한 노력이다. 나와 세상을 낯설게 보지 못하면 살아있는 박제다. 잭 케루악은 마리화나 벤제드린 그리고 재즈로 이 소설을 썼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구두점도 문장부호도 없이 길고 긴 두루마리를 토해냈다고 한다. 타자기를 두드리며 그는 소설을 쓴 게 아니라 달뜬 여행의 피로감을 느꼈을까. 동부에서 서부로 다시 동부로 다시 남북을 가로지르는 잭 케루악의 여행기에는 두근거림이 없다. 희망이나 꿈을 찾아 떠나는 식상한 구성이 아니라서 단숨에 읽혔는지도 모른다. 길에서 만난 사람은 새로운 깨달음을 주거나 생의 전환점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피곤하고 지친 여행자일 뿐이다. 샐과 딘처럼. 이 소설의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독자에게 묻는다. “네가 인생에서 바라는 건 뭐야?”(1, 95)

여행에서 돌아오면 역시 일상이다. 일상보다 피곤한 여행을 하는 사람을 딘은 이해할 수 없다. 아니 무언가 돈과 시간을 들여 여행에서 기대하는 게 있다는 건 위험해 보인다. 샐과 딘에게 여행은 인생의 다른 이름이다. 머물지 못해 떠나는 게 아니라 그저 떠날 뿐이다. 길 그 자체가 인생이므로.

 

다시 돌아오면 일상은 그대로. 뉴욕은 뉴욕이다. “나는 러시아워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시간에, 길에 익숙해진 순진한 눈으로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끝없이 서로 으르렁대는 뉴욕의 절대적인 광기와 환상적인 혼잡함을, 그 미친 꿈을 보았다. 움켜쥐고 낚아채고 건네주고 한숨 쉬고 죽음을 맞아서 결국은 롱아일랜드시티 너머의 끔찍한 공동묘지 도시들 중 하나에 묻히는 것이다.”(1, 174)

 

소설 도입부에 딱 한 번 소설의 제목에 걸맞은 작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잠시 들어보자.

 

노을이 붉게 물들 무렵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 순간은 평생 단 한번밖에 없었던, 아주 독특하고도 묘한 순간이었다. 나 자신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집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고 여독에 지쳐 뭔가에 홀린 듯한 상태였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싸구려 호텔 방 안에서, 밖에서 들려오는 증기기관의 씩씩거리는 소리, 호텔의 오래된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 위층의 발소리, 그리고 온갖 종류의 슬픈 소시들을 들으며 금이 간 높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상하게도 한 십오초 동안 내가 누군지 정말로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겁이 나진 않았다. 나는 그저 다른 누군가, 어떤 낯선 사람이 되었고, 나의 삶 전체는 뭔가에 홀리 ㄴ유령의 삶이 되었다. 내가 미국을 반쯤 가로질러 와서 과거의 공간인 동부와 미래의 공간인 서부 사이의 경계선 위에 있었다는 사실, 아마도 그 때문에 바로 그 자리에서 이상한 붉은 오후의 그 순간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리라. - 1, 33

 

길 위에서 낯설게 자신을 바라보는 대목이다. 이후의 여행은 길을 따라 일상을 사는 것처럼 때로는 지치고 피곤하며 때로는 충동적이다. 매일매일 낯설지 않다면 여행도 일상이다. 샐은 딘을 만나면서 길을 떠난다. 딘은 샐이 아니었다면 길을 나서지 않았을지 모른다. 만남이 여행이다. 여행은 곧 새로운 관계 맺음이다. 우리가 사는 모든 순간이 여행이다.

 

1920년대 대공황 시대에 태어나 2차 대전을 직접 경험한 비트 세대beat generation’는 제1차 세계대전 후에 환멸을 느낀 미국의 지식계급 및 예술파 청년들을 가리키는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와 구별된다. 비트 세대는 다시 혁명가 기질을 가진 힙스터hipsters’와 방랑자 기질을 가진 비트닉beatniks’으로 분류한다. 샐과 딘은 기성 사회를 떠나 글을 쓰고, 재즈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 그리고 다시 길을 떠난다. 떠나기 위해 떠나고 떠나기 위해 정착한다.

 

그리고 한 권의 책이 또 다른 책으로 연결된 구절을 찾았다. 번역은 좀 다르지만 길은 곧 삶이라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깨달음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는 데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다. 아니 먼 길을 떠날 날이 멀지 않았을 수도.

 

우리의 찌그러진 여행 가방이 다시 인도 위에 쌓였다.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문제되지 않았다.

길은 삶이니까.

- 2,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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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난 사람
우치다테 마키코 지음, 박승애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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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길고 지루한 소설을 읽었다마치 미드 브레이킹 배드를 1, 2회를 볼 때의 느낌이다느리고 더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 모른다끝난 사람(?)이라니 은 졸업일수도마무리일수도완성일수도 있다긍정과 부정의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으나 끝난 사람을 긍정적으로 읽는 사람은 없을 터소설의 주인공 다시로 소스케의 정년 퇴임식 날 소설이 시작된다우치다테 마키코는 이렇게 길고 지루한 소설을 통해 그리 특별하지 않게멀고도 험한 길을 끝까지 견딘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을까
  
한 번도 성공승진에 관심이 없었던 내게 주인공 다시로는 낯설다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세속적 욕망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의외로 많다다시로가 대통령이나 재벌이 되려고 한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출세의 길을 걷는다고향을 떠나 자기 실력과 노력으로 일본 최고 은행 임원 직전까지 실패를 모르고 승진을 거듭했던 다시로가 자회사로 좌천됐을 때 이미 그는 끝난 사람이었다인생의 목표와 방향이 잘못 된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와 방법을 고민한 적이 없었던 노동 기계그것은 박정희 시대 새마을 운동과 한강의 기적으로 미화되는 베이붐 세대(1955~1964년 사이에 태어난 900만명)의 삶이며일본 단카이 세대(1946~)의 활력과 희망을 상징한다가족을 위한 희생국가와 민족을 앞세운 사명감으로 무장했지만 개인의 삶은 무시되고 조직이 우선했던 세대다다시로의 속내는 그대로 우리 사회에도 적용된다퇴직의 시기와 방법이 다를 뿐 모든 직장인에게 닥칠 일이다
  
나는 평화롭고 즐거운 여생을 즐길 수 없는 타입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여생이라는 말이 마음에 안 든다산 사람에게 어찌 남은 인생이 있을 수 있나.
여든이건 아흔이건 혹 병이 들었건 살아 있는 한 그냥 인생이지 남은 인생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 228
  
평균 수명이 80세에 이른다노인의 기준과 개념도 달라졌다퇴직은 은퇴와 다른 개념이다스스로 은퇴시기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퇴직을 해야 하는 사람에게 여생도 다른 개념이다물론 주인공 다시로 소스케는 그 여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작은 회사에 고문으로 일하다가 사장을 맡고 회사가 도산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에는 반전도 임팩트도 없다로맨스그레이가 잠시 등장하지만 이 책은 지나치게 점잖고 노년의 사적 욕망과 세속적 욕심을 정밀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체면을 중시하는 동양 문화권에서 우리 아버지 세대가 걸어온 길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지금 청춘이 느끼는 것과 다르듯이여생은 없다그냥 인생일 뿐누구나 소중한 인생지만 타의에 의해 여생이 될 수 있음에 주의하라는 경고일까.
  
작가는 철저하게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퇴직한 남자의 속내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더 일하고 싶은오로지 일밖에 몰랐던 평범한 직장인의 욕망일 테지만 그것은 치열한 생존 경쟁 시대를 견딘 남자의 수고로움과 거리가 멀다여전히 현역으로 일하고 싶은 욕망이 앞선다인정 욕구가 하늘을 찌르고 체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개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우치다테 마키코는 끝난 사람에서 정년퇴직을 생전 장례식이라고 명명한다욜로와 워라밸이 트렌드가 된 시대에 강아지 풀 뜯어 먹는 소리겠지만일찍부터 게으를 수 있는 권리(폴 라파르그)를 주장했던 사람에겐 불쌍한 일중독자로 보이겠지만 주인공 다시로에게는 일이 곧 인생이었다성취감을 맛보고 삶의 보람을 일에서 찾았던 남자에게 퇴직 후의 여유는 고통이다연금과 저축으로 생계에 지장이 없는 주인공은 노년의 빈곤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치에 불과한 이야기다먹고 살 걱정이 없으니 별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구박받을 이야기다하지만 과연 그런가하루 세끼 밥만 먹고 잠잘 곳이 있으면 다 같은 인생인가
  
예순 셋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에 정년을 맞은 주인공의 문제는 끝낸 사람이 아니라 끝난 사람이라는 데 있다주체적으로 자기 일을 그만두고 정리했다면 갈등이 없다그러나 다시로 소스케는 끝내진 사람이다자기 자신이 끝내지 못한 사람에게 찾아오는 쓸쓸함과 공허함을 함부로 짐작할 수는 없다고통이든 고독이든 결국 추론에 의한 것일 뿐 공감은 불가능하다다시로 소스케와 유사한 경험이 있는 사람도 그와 동일한 감정을 느낄 수는 없다각자 가진 스스로에 대한 연민일과 휴식에 대한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모든 사람은 남은 시간을 알 수 없다나에게 혹은 바로 당신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평균 수명을 계산하지 말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다 어떻게 하고 싶은지 자문해야하지 않을까그래서 다시로에게 여든아홉의 어머니가 한창때라고 하지 않는가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간다누구나 겪게 될 혹은 곧 현실이 될 노년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
  
소스케너 올해 몇이나 됐냐?”
예순여섯.”
어머니는 감탄하듯이 말했다.
예순여섯아이고 한창때로구나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는 나이로세.” - 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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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한 인생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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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주도한 계획을 세우는 동안 일어나는 뜻밖의 일들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이며, 운명이란 주어진 운명에서 도망치려 할 때 바로 그 도망침을 통해 실현된다. 때로 계획을 세우고 그리고 도망치려 했던 사람으로서, 이 소설이 끝을 맺어 기쁘다.

 

라는 작가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독자들을 상상해 본다. ‘(,욕망)’(, 규범)’로 자신을 드러낸 김두식이나 우연과 필연 사이의 알 수 없는 인생의 간극을 드러내려는 은희경이나 그들이 말하려는 것은 인생이 아닌가.

 

모든 우연과 우연이 겹치고 스며 우리의 인생이 진행되기 때문에 그 불안과 혼란을 즐기지 못하기 때문에 인생에 대해 환멸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은희경의 장편소설 태연한 인생의 가제본을 단숨에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상상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김두식의 욕망해도 괜찮아때문인지 몰라도 소설가 요셉이 몸담고 있는 속물세계와 비루한 일상성 그리고 대책 없는 감상은 장삼이사들의 하루하루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오래전 어느 봄날 공중전화부스 안에서 통화중인 한 여자를 바라보는 한 남자의 시선은 운명에 회오리를 몰고 온다. 그것이 바로 아이러니한 인생의 우연이고 그 우연은 의 서사를 만든다. 소설 전체의 액자에 해당하는 이 사건은 내부 이야기가 이루어지는 모든 사건들의 시작과 끝이 아니다. 그저 와 연결되는 한 변곡점을 암시할 뿐이고 그 변곡점은 절대적인 서사의 흐름을 뒤바꾸는 역할이 아니라 계획될 수 없는 생의 이면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읽힌다. 아무려면 어떤가. 어차피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삶을 영원으로 가정한 채 달려가는 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닌가.

 

소설의 내부 이야기는 소설가를 통해 문단권력이나 상업주의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어떤 분야와 조직이든 유사한 문제는 있다. 다만 그것에 대한 풍자와 반어 그리고 냉소적인 문체는 이 소설이 지닌 통속성을 갈음하는 것 같아 깔끔하게 읽힌다. ‘요셉두 사람 중 누가 태연한 인생을 살고 있는지 궁금해 할 필요는 없다. 마치 호수 표면에 우아한 백조의 발놀림처럼 누구나 그렇게 태연을 가장한 채 혼란과 불안을 위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소설에 등장하는 장면과 분위기가 영화 <북촌방향>이 떠오르게 했지만 전혀 다른 곳의 시선들이 하나로 모이기도 하고 하나로 모였던 시선들은 제각각 인물들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조언과 충고를 구하는 사람도 질색이었다. 의욕적인 계획을 늘어놓고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은 오직 동의를 원할 뿐이다. 충고를 구하는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희망을 기대했다. 비관이 신중함이고 냉정해야만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요셉의 충고는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 결국 시간만 아까웠다. - 19

 

이 소설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밑줄 긋기였다. 소설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다. 자꾸 빨간펜을 찾게 되는 것은 공감의 다른 표현이다. 유사한 상황이었던 순간이 떠오르거나 작가의 시선이 두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매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소설의 군데군데 밑줄 그은 대목만을 들여다보며 작가의 말을 대신 떠올리는 즐거움을 누리기도 한다.

 

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가는 세상의 끝은 S시가 아니었다. 열정이 끝나는 지점이었다. 매혹은 지속되지 않으며 열정에는 일정한 분량이 있다. 그 한시성이 그들을 더욱 열렬하게 만든 것이었다. - 241

 

흔해 빠진 이야기의 통속성도 문장으로 확인하고 나면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은희경의 소설이 서사 위주의 재미와 첨예한 갈등으로 인한 긴장감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한 분위기의 술자리처럼 느슨하게 읽히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것은 이런 문장들 때문일 것이다.

 

고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적요로운 평화를 주었다. 애써 고독하지 않으려고 할 때의 고립감이 힘들 뿐이었다. 타인이란 영원히 오해하게 돼 있는 존재이지만 서로의 오해를 존중하는 순간 연민 안에서 연대할 수 있었다. 고독끼리의 친근과 오해의 연대 속에 류의 삶은 흘러갔다. 류는 어둠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었다. - 243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과 슬픔은 무엇일까. 독자들은 자발적인 소설의 소비를 통해 무엇을 얻고 싶은 것일까. 그 나름의 이유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소설을 만나는 것은 어렵다. 은희경의 소설을 읽으면서 최소한 다른 즐거움을 포기한 기회비용이 생각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니, 그 다른 즐거움들에 대한 냉소를 키웠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120610-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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