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읽는 손자병법 - 내 인생의 전환점
강상구 지음 / 흐름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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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읽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먼저 공시적 관점으로 당대의 정치, 사회, 문화를 한 눈에 조망해 볼 수 있고 다양한 관점으로 역사를 조망할 수 있다. 통시적 관점에서 현재적 유용성을 들 수 있다. 모든 책은 고전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과장된 말처럼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면 인류의 사유방식과 인간의 근본적인 삶의 문제는 이미 먼지 묻은 책 속에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삼갈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기존 지식에 대한 믿음이다. 보편타당한 이론이나 절대불변의 진리,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식이라고 믿었던 모든 일들이 일순간 무너지기도 하고 가치와 사유방식의 혼란이 오기도 하며 삶의 목표와 의지가 흔들리기도 한다. 고전은 우리에게 시간을 견뎌낸 힘을 보여준다. 그것이 고전이 된 이유이며 여전히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강상구의 『마흔에 읽는 손자병법』은 ‘손자병법’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해석을 보탠 책이다. 마흔이라는 나이는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저자가 경험한 세상에 나름의 해석일 수도 있다. 모은 사람이 책을 읽는다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옛 성현의 말씀처럼 책은 한 사람의 주관적 견해에 불과할 수도 있고 그저 세련되게 정리된 지식의 창고일 수도 있다. 저자의 생각과 나의 경험 책의 내용에 대한 해석과 소통이 이루어질 때 그 책은 비로소 하나의 의미가 된다.

‘손자병법’은 3,000년의 세월을 견딘 책이다. 군인이 아닌 일반인들에게 이 책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유의 틀을 제공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세상을 통치하기 위한 ‘군주’를 위한 책이라면 ‘손자병법’은 싸움의 비술을 전하는 책이다. 가장 치졸하고 비열한 방법부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지혜를 빌릴만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방법들이 소개되고 있다. 원전의 전체 내용이 전쟁을 위한 방법을 가르치는 군사학 교범과 다른 이유는 공시적 관점으로 풀어야 한다.

말 그대로 춘추전국시대를 떠올려 보자. 일대일로 맞짱 뜨고 다음 선수를 기다려 최후의 승자를 가리는 게임이 아니라 수많은 상대‘들’과 싸우며 살아야 하는 세상이다. 그것은 적과 싸워 이기면 되는 전쟁이 아니라 상대를 끌어안아야 하는 시대를 말한다. 죽여 없애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그런 후에는 또 다른 적과 싸워야 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의 연속이다. 당대의 역사적 상황은 이 책의 의미를 새롭게 한다.

공존과 상생. 이 책이 전하는 지혜를 현재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까. 병법서에서 공존과 상생을 읽어내는 것은 독자의 아둔함일 수도 있으나 싸움이 아니라 전쟁의 목적은 살인이 아니라 통치에 있기 때문이다.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전쟁이라면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이 최선이다.

1장 시계始計부터 13장 용간用間에 이르기까지 원전을 소개하고 저자가 해설하는 방식의 책이다. 해설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저자는 ‘손자병법’을 설명하기 위해 ‘삼국사기’를 예화로 활용한다.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삼국사기’ 못지않게 많이 인용된다. 전쟁다운(?) 전쟁을 해보지 않은 우리의 역사에서 병법의 예화로 쓸 만한 내용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다보니 삼국사기와 난중일기를 넘나들고 단편적인 전쟁 상황들이 나열되어 일목요연하거나 하나의 맥락을 잡으면서 읽기는 힘든 책이다. 앞에 언급했듯이 당대의 상황을 얼마나 이해하고, 현실의 접목 가능성이 어느 정도 될 것인가는 고스란히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거꾸로 생각하면 장별로 단편적으로 끊어 읽기 좋을 수도 있다. 책은 언제나 저자의 가르침이 아니라 독자와의 대화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 책을 읽는 방법 또한 다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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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할 권리 - 욕망과 좌절사이에서 비틀거리는 21세기적 삶
마이클 폴리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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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은 고통이 없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상태를 행복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말이다. 행복의 최소 기준을 제시한 것처럼 보이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모호한 말이다. 고통이 없는 상태라면 개인마다 느낌이 다르고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감정의 기준을 제시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인생의 목적을 ‘행복’에 두고 있다. 행복한 인생은 무엇이며 어떻게 가능할까. 수많은 철학자들이 인생의 목적과 삶의 지향점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과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언제나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복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거라는 뻔한 말이 아니라 목적과 지향점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가만히 서서 맞는 바람이 아니라 산을 오르고 땀이 배어날 무렵 등 뒤에서 부는 바람을 우리는 행복이라 부른다.

인간이 행복할 권리 따위는 없다는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행복할 권리’도 말할 수 없다. 없다. 마이클 폴리의 『행복할 권리』는 ‘행복’을 사기치지 않는다. 행복해지는 비법이나 행복해지기 위한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인생은 부조리하며 행복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비꼰다. 맞는 말이 아닌가. 헌법에 보호된 권리는 ‘행복할 권리’가 아니라 ‘행복을 추구할 권리’이다. 말장난인 듯 싶지만 그 의미는 깊이 새겨볼 만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행복은 직접 추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에 대한 집착을 끊고 다른 일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미하이칙센트 미하이는 『몰입의 즐거움』에서 하루 중 탈아(脫我)의 시간이 길수록, 몰입하는 만큼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마이클 폴리가 말한 것도 그 시간이 가져올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에서 얻어지는 부산물이 바로 행복이라고 말하고 있다.

행복한 상태란 어쩐 지점이 아니라 하나의 범위, 맨 밑바닥에는 만족감이 있고 맨 위에는 고양감이 있는 범위이다. 달리 말하면, 행복은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고, 계속 노력하는 것이다. - 13쪽

우리는 행복의 부조리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는 행복. 그러나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행복을 바라보아야하지 않을까 싶다. 혼란스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행복은 타인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자명한 논리부터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저자는 이 책에서 ‘당신이 찾는 행복은 없다’는 말로 시작한다. 14개의 챕터에서 다양한 인문학적 교양서와 저자의 깊은 성찰을 통해 행복에 대해 설명하고 궁구하고 고민한다. 마찬가지로 독자들도 저자의 뛰어난 통찰을 통해 행복이란 무엇인가 결론을 얻어낼 수 없다. 책을 읽는 과정에서 각자 행복에 이르는 길을 따라 걸어볼 뿐이다. 누군가 무엇인가 주어지는 행복은 순간의 찰나에 불과하다. 지속한 가능한 행복은 스스로 찾아가는 먼 여행과도 같은 것이다.

한 평생을 살면서 분노와 좌절은 자주 경험하지만 허무와 무기력을 경험하기는 쉽지 않다. 우울과 자살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죽을 힘으로 살아보라는 무책임한 말을 하는 사람들은 그만한 고통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는 답답함이나 견딜 수 없는 모멸감, 자신도 모르는 사실들이 목을 조여올 때 행복은커녕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매시간은 마지막 시간일 수 있다면 그것은 최초의 시간만큼 아름다울 것이다.' - 349쪽

이제 매시간 마지막 삶이라고 생각하며 여유를 가질 시간인가 보다. 행복은 치열한 삶과 열정 그리고 삶의 성취와 결과물이 주는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은 믿는 대로 보이고 인간은 경험한 만큼 성숙해진다. 우리는 매시간 성장하며 고통 받고 그 고통을 통해 실낱같은 생의 희망을 건져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때때로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닐 때도 있는 법이다. 마치 바로 곁에 놓여 있는 보이지 않는 공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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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십대의 탄생 - 소녀는 인문학을 읽는다 다른 탄생 시리즈 1
김해완 지음 / 그린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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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부가 다른 삶을 살게 한다는 말을, 앎이 곧 자유라는 말을 믿는다. 이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발 딛고 있는 소박한 삶에서 나온 믿음이다. - 12쪽

2010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학생의 89%, 학부모의 93%는 “4년제 대학 이상의 학력은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 목적은 당연히 ‘좋은 직장’ 때문이다. 사회, 문화적 상황을 무시한 채 단순 비교는 무의하지만 고교졸업자의 83%가 대학에 진학하는 나라 대한민국의 학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공부’라는 말을 지겹게 듣고 산다. 대한민국은 언제나 ‘공부중’이다. 그런데 무슨 공부를 하고 있을까?

공부는 당연히 ‘국영수’ 중심이고 수능이 그 절정을 이룬다. 스무 살이 넘으면 각종 고시와 입사시험이 또 한 번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대한민국의 저력은 ‘고급 인적자원’에서 나온다. 그러나 진짜 공부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은 채 오로지 한줄 서기 경쟁과 객관식 찍기 시험에 목을 맨다. 최근 들어 수시와 입학사정관제로 입시가 다양화 추세를 보이고 서술형 평가의 도입으로 과거의 문제점들을 조금씩 해결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삶의 목적과 방법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방향성이 없는 교육으로는 먼 미래를 내다보기 어렵다.

다양한 대안 교육이 실험되고 교육에 대한 난상 토론이 이어지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교육은 당연히 사회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의 지향점, 권력과 자본의 획득 과정과 사회의 구조적 모순들이 함께 논의되지 않으면 ‘좋은 직장’을 위해 오로지 ‘국영수’만 공부하는 교육과정도, 학교교육도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중졸 백수 김해완의 『다른 십대의 탄생 : 소녀는 인문학을 읽는다』를 읽다가 여러 번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단순한 감동이나 깨달음과 다른 무엇이다. 대안 학교를 거쳐 백수로 살아가는 93년생 해완이가 느끼는 교육과 사회, 사람과 세상은 그대로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또한 또래 아이들과 비교할 수 없는 책읽기와 글쓰기를 통해 탄탄한 내공을 쌓아가는 모습이 너무 부럽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슴 한 구석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느낌을 주는 이 책을 나는 누구에게 함부로 권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대부분 대한민국의 공교육은 대학입시를 위해 존재한다. 그것이 공공연한 목적이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진짜 대학을 가려고 16년을 공부해야 하는 것일까? 대학에 가면 또 어떤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살인적인 등록금과 보이지 않은 스펙 경쟁, 높고도 험한 정규직을 향한 싸움 그리고 결혼과 내집 마련, 육아와 교육 문제의 순환 고리 속에 우리들의 삶은 철저하게 끼워 맞춰진다. 경쟁에 뒤질세라 남들보다 뒤처질세라 1분 1초를 아껴 오늘도 우리 아이들은 국영수 공부에 목을 매는 현실을 보자.

이런 현실에서 김해완의 책은 피아를 식별할 수 없는 전쟁터에서 0.5초간 온 세상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는 진공 효과를 가져온다. 도대체 이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연구공간 수유 너머’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김해완의 생활과 그곳에서 길어 올린 인문학적 깨달음이 곧 이 책을 만들었다. 책읽기와 글쓰기를 바탕으로 2011년 대한민국의 십대와 ‘다른 십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녀가 인문학을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이 이대로 지속가능할 것인지를 묻고 있는 듯하다. 어느 교실 뒤편에 학생들의 희망 학과를 적어 놓은 것을 보니 절반 이상이 경영학과였다. 다양한 삶을 꾸려가면서도 즐겁고 행복하고 살만한 세상을 만들 수는 없는 걸까. 현실과 이상의 충돌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조금씩 다른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함께 나누며 걸어갈 수 있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다만 우리가 그 상상력을 제한하고 현실의 발판을 마련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점수로 한 줄 세우는 학교,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사회는 레밍쥐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스승의 역할은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무지한 자의 배움에 대한 의지를 지속시키고, 그가 자기 힘으로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 111쪽

선생과 학생은 가르치고 학습하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 길을 걷는 동지다. - 155쪽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교사가 전지전능한 인간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학교에 가고 선생을 만나야 무언가 배우고 가르치는 학습이 이루어진다고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선생과 학생은 함께 길을 걷는 동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관계양상이 달라진다. 스승의 역할은 지식이 전달이 아니라 학생이 스스로 깨우치고 배움의 의지를 유지하는 것이다. 기막힌 정답 찍기 기술을 가르치고 쉽고 빠른 지식의 습득은 진짜 공부가 아닐 수도 있다.

해완이는 색다른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맥도날드에서 알바를 하는 ‘44만원’ 세대다. 독립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실천하지만 현실의 벽은 만만치가 않다. 공동체 생활이 언제까지나 유지되기도 어려울 테고 어떤 방향과 목적으로 나아갈지 알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해완이의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언제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이미 속깊은 어른이 되가고 있기 때문이다. 고미숙의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를 통해 잠깐 김해완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면 그녀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스승들 중 하나인 고미숙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읽은 책과 그가 공부하는 공간과 그가 꿈꾸는 삶과 그가 걸어가야할 우리 사회가 중첩되면서 환하게 펼쳐치는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우리는 해완이의 다음 발걸음을 기대할 필요가 있다. 세속적인 성공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의 주인으로 거듭나는 해완이의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행복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희망은 학교 안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대학 간판으로 살 수도 없으며 좋은 직장만이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다양한 꿈과 희망과 행복과 사랑이 충만하기를 기다린다. 또 다른 십대의 탄생을 기대하며.

우리는 함께 사랑하기 위해서, 더 온몸으로 만나기 위해서 서로 독립을 한다. 사랑과 독립은 이렇게 절묘한 이중주를 노래한다. 나와 세상, 나와 너는 이 노래를 부르며 만난다. - 199쪽

110426-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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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중독자의 고백
톰 라비 지음, 김영선 옮김, 현태준 그림 / 돌베개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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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中毒).
; 독으로 지칭되는 유해 물질에 의한 신체 증상인 중독(intoxication, 약물 중독)과 알코올, 마약과 같은 약물 남용에 의한 정신적인 중독이 주로 문제되는 중독(addiction, 의존증)을 동시에 일컫는 말.

‘미친다’는 말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부정적인 뉘앙스로 정상에서 벗어난 말과 행동을 의미하기도 하고 때로는 열정과 몰입의 경지를 일컫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미쳐야[狂] 미친다[及]는 말이 있듯 나는 어디에 미친 사람들이 좋다. 나도 늘 어디엔가 미쳐 살고 싶다. 대부분 사람들은 중용을 지키고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침묵이라는 비겁한 방법과 양시론[兩是論]이라는 적절한 처세술로 살고 싶지 않다. 그러니 때때로 오호(惡好)가 분명하여 입는 손해가 훨씬 많다. 까칠하고 모난 성격으로 오해받기 쉽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미친 듯 몰입하고 열정을 갖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데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마음과 몸이 편한 대로 사는 일이 결코 지속가능한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래서 나는 여전히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블로끄의 말처럼 ‘오, 나는 미친 듯 살고 싶다’.

책에 미친 사람이 어디 한 둘이랴. 톰 라비의 『어느 책중독자의 고백』은 수많은 책중독자들의 공감을 얻었으리라. 이 책 구석구석에 숨겨진 책에 대한 애정과 증오와 환상과 현실적 고통들이 오롯이 전해진다. 군데군데 밑줄을 치며 공감하고 킬킬대고 한숨 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내게 책이란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하며.

이 책의 저자 톰 라비는 사전적 의미에서 책에 ‘중독(addiction, 의존증)’된 사람이다. 책중독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나 저자의 경우는 물질적 대상인 책 자체를 탐하는 사람이다. 읽지 않으면서도 책을 사고 산 책을 또 사고 그러면서도 헌책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고 쌓여가는 책 사이에서 일상의 균형을 잃어가면서도 행복하기만 하니 분명 중독이다.

물론 의학적인 측면에서 어떤 병명으로 불리거나 치료를 해야 하는 수준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흔희 ‘mania’라고 불리기도 하는 사람들인데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될 가능성이 높지만 적절한(?) 균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저자 톰 라비는 책을 읽고 즐기는 것은 물론이겠지만 책을 수집하고 소유하는데 집착을 보이는 책중독자이다. e-book 시대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이해할 수 없는 지나간 시절의 추억거리로 생각할 수 있겠으나 내가 아는 한 책을 읽는 사람은 e-book을 읽지 않는다. 작은 메모리에 수천권의 책을 저장하고 주머니 속에 휴대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저자의 행동과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디 책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책은 삶의 도구이며 즐거움의 대상일 수 있지만 저자는 그것과 거리가 멀어보인다. 삶의 이유이며 의미이고 전부이다. 하지만 단순히 책에 대한 소유욕만 가진 사람은 아니다. 저자는 장서광과 애서가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분리한다. 저자는 물론 애서가라고 주장하는 것이겠지만.

순수한 마음과 영혼을 가진 이들은 책에 담긴 내용 때문에 책을 사랑한다. 장서광들이 무게와 크기와 외형적인 질로 책의 중요성을 결정하고 책을 대량으로 수집해 점점 더 높이 쌓아 올리는 반면, 애서가들은 살 책을 조심스럽게 선택한 다음 거기에 담긴 내적 아름다움과 지혜를 얻기 위해 책을 음미하면서 열심히 읽는다. - P. 89

‘사람들은 인생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책읽기가 더 좋다.(로건 스미스)’라는 대목을 읽으며 고개를 주억이고 있는 나 자신에게 깜짝 놀라다. 평생 조용한 구석방에 처박혀 책만 읽고 어줍잖은 글이나 끄적이며 살고 싶은 욕망은 그 어떤 다른 욕망보다도 음험한 것은 아닐까. 누구나 자신이 꿈꾸는 삶이 있다. 그것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어떠한가에 따라 인생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과정과 결과도 사뭇 다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자.

책중독을 해부하고 중독 여부를 테스트하고 책의 역사를 말하는 앞부분은 애피타이저에 불과하다. 장서광과 애서가, 수집광과 돌연변이들, 책 도취증, 책 읽기, 정리와 보관, 빌려주기 등 각 장의 이야기들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흠뻑 빠져들게 한다. 20여 년 전에 나온 책이기 때문에 상황이 조금 달라졌지만 기본적인 책중독자들의 성향은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혹시 책중독 경계에 서 있는 듯싶다면 한 번 읽어보시라. 물론 마지막 장 ‘치유하기’는 의미가 없겠지만.

재치있는 글솜씨와 실제 사례, 재밌는 일화들을 들려주고 있어 지루하지 않은 책이다. 다만 중간 중간 가벼움을 넘어 역겨움을 담아낸 삽화는 옥의 티다. 내용 자체가 충분히 따분함을 덜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과장된 그림들이 오히려 책 내용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불쾌함을 준다. 개인적인 느낌일 수 있지만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책중독자들에게 무슨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겠는가. 결국 그들은 빵이 아니라 책을 사고 읽는 과정을 즐기는 사람들일 뿐. 그러니 오늘도 나는 열심히 사고 읽고 쓰고…….

책중독자들에게 먹는 것은 그저 씹어 삼키는 일일 뿐이다. 너무 많은 시간이 기본적인 감각을 충족시키는 데 쓰이고 있다. 우리는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우리는 또한 읽어야 한다. 이는 집에서 하는 식사에 해당하지만 상당 부분 외식에도 해당한다. - P. 202


110407-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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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인문학 - 머니 게임의 시대, 부富의 근원을 되묻는다
김찬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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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나는 얼마쯤의 현금을 ‘만지게’ 될까? 텅빈 지갑을 며칠씩 들고 다닐 때도 흔치 않다. 은행 갈 시간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가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지갑도 두꺼워 플라스틱 카드 한 장만 주머니에 넣고 외출한 적도 많다. 통장에 숫자가 찍혔다가 카드 명세에 나눠지고 그 숫자들은 곧 사라진다. 한 달을 단위로 정확하게 회전하는 숫자의 흐름은 재미있는 게임같이 느껴진다. 돈의 흐름은 마치 눈앞에 나타났다 금방 사라지는 비온 뒤의 무지개보다 허무하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숫자들의 향연이기 때문이다.

나처럼 수의 개념이 부족하고 숫자들과 친하지 않은 사람은 더욱 그렇다. 도대체 한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내가 어떤 일을 하고 그 일이 얼마만한 경제적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계산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있다. 거의 모든 물건을 인터넷으로 구매하고 현금을 사용할 일이 점점 줄어들자 가끔 나는 바보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급여를 지급하는 주체도 모호하고 내가 사용한 내역에 따라 그것을 분배하는 과정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런데도 기막힌 타이밍과 시간을 맞춰 돈은 돌고 돈다. 그리고 나는 불편 없이 살아간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돈과 그리 관련이 없는 일만 하면서 살아가는 내 직업의 탓도 있겠지만 하나의 상징과 기호가 되어버린 현대사회의 화폐와 신용카드의 시스템 때문이기도 하다. 어린시절 아버지의 누런 월급봉투가 기억난다. 손으로 쓴 명세서가 봉투 겉면에 씌어있었고 그걸 안주머니에서 꺼내시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 시절이 낭만적이었을까?

누구나 그렇겠지만 ‘돈’과 무관한 사람은 없다. 아니 돈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가치를 폄훼할 생각도 없다. 다만 요즘 들어 유난히 돈과 관련된 책이 눈에 들어오고 자꾸 손이 가는 이유는 우리들의 ‘삶’이 궁금해서이다. 아이들은 돈 잘 버는 직업을 선호하고, 돈을 많이 버는 게 꿈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기도 한다. 돈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버린 대한민국 사회의 자화상을 인문학적으로 들여다보는 김찬호의 『돈의 인문학』은 고미숙의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와 짝을 이룰 만하다.

전작 『사회를 보는 논리』와 『문화의 발견』 등으로 청소년들이 읽을 만한 책들을 써온 사회학자의 책은 눈여겨 볼만했다. 읽으면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주고 호기심을 갖게 하며 또 스스로를 성찰하게 하는 책이 좋은 책이라는 생각에 동의한다면 이 책을 권한다. 삶의 방향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이야기가 인문학이라면 ‘돈’에 관한 인문학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돈의 가장 본질적인 기능에서 출발해야 한다. 화폐의 기원과 역사를 살펴보고 현대 사회에서 돈이 가지는 의미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독자들은 내 삶에서 ‘돈’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성찰하게 된다.

인문학은 언어를 생산하는 학문이다. 언어는 생각을 빚어내고 삶을 가다듬는다. 언어와 생각과 삶이 어떻게 맞물리는가에 따라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 - P. 9

인문학적 상상력이 세상을 구원하지는 못하더라도 세계를 해석하고 변화시키는 실마리는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우리가 인문학을 삶의 토대로 삶아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저자는 ‘돈’을 이야기하면서 행간에 ‘삶’을 숨겨 놓았다. 독자들이 읽어야 할 것은 돈에 관한 지식과 가치 너머에 있는 것은 아닐까. 같은 말일 수도 있겠으나 세태를 비판하고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것은 돈을 ‘소유’가 아닌 ‘관계’로 바라보는 일이고 돈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는 방법이다.

혹자는 말할지도 모른다. 돈과 인문학, 돈과 책이라니! 하지만 둘 다 종이가 아닌가! 이 어이없는 비교는 물론 웃자고 한 말이다. 하지만 돈, 일, 삶이 모두 한 글자 안에 수많은 함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곧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 책에서 예로 들고 있는 통계자료와 실제 사례들은 우울한 대한민국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신자유주의 물결과 무한 경쟁시대의 치열함을 넘어 비극에 가깝다. 삶의 태도와 방법을 조금 바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사람들이 인생을 제로섬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상황은 달라진다. 특히 돈에 관한 한!

돈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 되는 세상은 가깝게는 내 생각의 변화에서부터, 멀게는 자라는 아이들에 대한 교육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달라져야 한다. 그것은 생각의 변화와 태도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구조와 인식의 전환을 의미한다. 현실적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해 온 사람에게 해결할 수 없는 높은 대학 등록금, 부족한 사회보장제도, 고용 없는 성장, 인색한 사회 환원, 성장위주의 경제정책, 부족한 복지제도……. 넘어야 할 현실의 벽은 높고 ‘돈’은 돌고 돌지 않고 한 곳에 쌓인다.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고 계층 이동이 점점 어려워지는 사회는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가난한 사람은 책의 힘으로 부유해질 수 있고, 부자는 책의 힘으로 귀해질 수 있다.”(김찬호) - P. 271

돈과 책이라니! 저자의 마지막 말이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린다면, 냉소적인 미소를 띠었다면 일단 이 책을 읽으면서 당신의 돈과 일과 삶을 돌아보라. 그리고 거울을 들여다보자. 나는 누구이며 돈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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