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What's Up 3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 / 새물결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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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케르 Ⅰ: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1995)

『아우슈비츠의 유산: 기록과 증언. 호모 사케르 Ⅲ』(1998)

『예외 상태. 호모 사케르 Ⅱ-1』(2003)

『왕국과 영광: 경제와 통치의 신학적 계보학을 위하여. 호모 사케르 Ⅱ-2』(2007)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3부작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은 거대한 서평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다. 배경 지식 없이 책 읽기가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아래 적어 놓은 책들의 계보는 ‘생명 정치학’이라 명명할 만한 사상의 축대를 쌓기 충분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미셸 푸코와 한나 아렌트와 칼 슈미트가 주축을 이룬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고찰은 그대로 호모 사케르 탄생에 바탕을 이룬다. 조르조 아감벤은 이 책에서 “호모 사케르란 사람들이 범죄자로 판정한 자를 말한다. 그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는 않는다.”(156쪽)라고 정의한다. 태어나는 순간 차별 없이 모두 시민이 되는 세상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았다. 피부색, 성별, 재산 유무, 출신 성분, 사회적 계급이 다른데 어떻게 똑같은 인간일 수 있는가. 평등이라는 개념은 인류 역사에서 희한하고 기발한 최근의 발명품이다. 말하자면 왕은 거지에게 갑질할 수 없으며 둘의 목숨값이 같다는 주장이 상식이 된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는 그 과정과 결과에 경의를 표하지도 않고 책임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배려와 혜택이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것처럼 자유와 평화도 자연스러운 환경으로 착각하기 쉽다. 고대 그리스의 호모 사케르도 정치 체제와 사회 제도에서 유래했다. 노예와 여성은 물론 외국인은 시민이 될 수 없던 시대에 시민은 특권층이었다. 신에게 바쳐질 희생 제의에 사용할 수는 있으나 죽여도 죄를 묻지 않는 자는 누구일까.

“사케르Sacer란 건드렸을 경우 자신이나 남을 오염시키는 그런 사람 혹은 사물을 가리킨다. 여기서 ‘신성한’ 또는 (대략 유사하게는) ‘저주받은’이라는 이중적 의미가 유래한다. 사람들이 지하 세계의 신들에게 바친 죄인은 성스럽”지만 저주받은 존재라는 뜻이다. 이 논의의 시작과 끝은 다시 수용소로 모인다. 깔때기처럼 아우슈비츠로 모여드는 현대 사상의 계보는 서구 유럽의 철학적 전통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선과 악, 인간과 자연, 삶과 죽음, 이성과 감정, 관념과 유물 등에 대한 성찰과 반성은 끝없는 혼돈과 파괴로 치닫는다. “나치 치하의 유대인은 새로운 생명정치적 주권의 특권적인 부정적 준거였으며, 따라서 죽여도 처벌받지 않지만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는 생명을 대표한다는 의미에서 호모 사케르의 명백한 사례였다.”는 단 하나의 문장을 다시 읽을 수밖에 없었다. 현대판 호모 사케르는 유대인으로 마감됐을까. 인간은 그리 지혜로운 동물이 아니다. 망각과 합리화의 능력을 갖춘 존재다. 주권이 가진 퓌시스와 노모스의 이중적 속성은 호모 사케르를 바라보는 양가성을 증명한다. 예외는 일종의 배제다. 생명 혹은 인간으로서 ‘예외’에 해당하는 존재가 가능한가. 인류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예외인가. 유색인종은 백인의 예외인가. 장애인은 정상의 예외인가. 성소수자는 이성애자의 예외인가. 비기독교인 기독교인의 예외인가. 시민은 권력자의 예외인가. 노동자는 자본가의 예외인가. 청소년은 어른의 예외인가. 노인은 젊음의 예외인가……

하나의 프레임에 갇힌 사람의 아집과 독선이 주체적이고 신념에 찬 태도로 칭송받기도 한다. 아감벤이 주장하는 호모 사케르는 어디에나 있었지만 아무 곳에도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없는 게 아닌가. 아감벤은 근대 생명정치의 패러다임으로 인권과 새로운 노모스를 정리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이 존재할까. 얼마 전에 석방된 ‘조두순’은 어떤가.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존재가 아닐까. 어느 시대에도 호모 사케르는 존재하는 게 아닐까. 죄는 미워해도 인간은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사형제 존폐 논란은 언제 끝날까. 범죄자를 옹호하는 말로 아감벤을 오독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만일 오늘날에는 명백하게 규정된 하나의 호모 사케르의 형상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라는 말은 새겨 들을 필요가 있다. 언젠가, 누구든 우리는 모두 잠재적 호모 사케르가 될 수 있다는 경고 앞에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경계를 허무는 일, 아니 경계를 지우고 구별 짓기를 끝내는 날은 아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의 욕망과 비인간적 속성조차 인간의 본성으로 치환하고 그 적응 노력을 자기계발로 선망하는 시대다. 좋은 삶, 내 삶의 가치는 숨은그림찾기처럼 점점 더 어렵고 난해해진다. 비슷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윌리를 찾는 일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 돼 버렸다.

* 『호모 사케르』에서 아감벤이 인용, 소개한 책들

아리스토 텔레스 『형이상학』 『정치학』『니코마코스 윤리학』『영혼론』

미셸 푸코 『앎에의 의지』『성의 역사』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혁명론』『전체주의의 기원』

플라톤 『필레보스』『프로타고라스』『법률』『국가』

칼 슈미트 『정치 신학』『노모스』

알랭 바디우 『존재와 사건』

가타리, 들뢰즈 『천개의 고원』

발터 벤야민 『운명과 성격』『폭력 비판론』『서한집』

홉스 『리바이어던』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카프카 『법 앞에서』『소송』『노트』

칸트 『도덕 형이상학』『실천 이성 비판』『공동 판결에 관해』

하이데거 『철학에의 기여』

장 뤽 낭시 『무위의 공동체』

바타이유 『에로스의 눈물』

페르슈어 『인종 위생학』

칼 빈딩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의 제거에 대한 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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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아도 되는 책의 독서안내 - 지식의 최전선을 5일 만에 탐색한다
다치바나 아키라 지음, 이진아 옮김 / 인디페이퍼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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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전 경기 관람은 쉽지 않은 미션이다. 단단히 마음먹었으나 새벽 3시 경기는 놓칠 때가 있고, 관심이 없는 팀의 경기일 때도 있다. 예선부터 결승까지 40게임이다. 관심은 있으나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은 하이라이트를 돌려본다. 3~5분 정도로 요약한 동영상은 감동도 재미도 없다. 그저 발로 공을 차고 헤딩을 해서 골대에 넣는 순간을 포착할 뿐. 전후맥락 골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빛나는 패스, 작은 실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전체 경기의 흐름을 읽는 재미는 하이라이트로 즐길 수 없다.

 

책은 어떤가. 부분과 발췌만으로 한 권의 책에 대해 말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스무 살 청춘이 여든까지 한 주도 쉬지 않고 일주일에 한 권씩 책을 읽는 열혈 독서가로 산다고 해도 평생 52×60=3,120권 밖에 읽을 수 없다. 삼천 권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책이다. 대한민국에서만 잡지를 포함해서 일 년에 4~6만 종의 신간이 쏟아진다. 60년간 새 책만 삼백만권이 넘는다는 계산이다. 부지런히 읽어도 겨우 0.1%를 읽을 수 있다. 지금까지 나온 책을 어쩔텐가?

 

그래서 피에르 바야르는 읽지 않는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 대해 비밀을 털어놨고 다치바나 아키라는 읽지 않아도 되는 책의 독서 안내를 시도한다. 이 두 책은 묘하게 대비된다. 피에르 바야르가 실제 상황을 중심으로 책의 효용과 안 읽은 책에 대해 아는 척하는 꼼수를 전하고 있다면 다치바나 아키라는 세상의 모든 책을 읽을 수 없다면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반어법 버전이다. 물론 피에르 바야르도 진지한 독서의 중요성과 어차피 다 읽지 못하는 책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큰 틀에서는 목적이 같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치바나 아키라는 현생 인류에게 복잡계, 진화론, 게임이론, 뇌과학, 공리주의를 중심으로 지식의 계보학을 시도한다.

 

어차피 세상의 모든 책을 읽을 수 없다면(물론 이 전제 자체가 아이러니다. 책에 관심이 없고 읽을 생각도 없는 사람이나 욕심이 없는 사람에겐 이 책도 무의미하다.) 읽지 않아도 되는 책은 어떤 책인가 알아두는 편이 좋다. 다치바나 아키라의 의도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 분야를 선정하는 데 있다.

 

 

인류가 걸어온 길 위에서 지금-여기here and now’가 아니라면 책은 전혀 다른 역할을 한다. 내 삶에 투영되지 않는, 나를 위한 책이 아니라면 어디에 쓸 것인가. 타인과의 관계를 고민하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하고 다가올 미래가 고민이라면 적어도 지식의 패러다임을 전환했던 순간을 기억해야 한다.

 

책을 빅뱅 이전빅뱅 이후로 나누고, 빅뱅 이전의 책은 독서 목록에서 (일단)제외한다 이것을 지식의 패러다임 전환이라 부른다면, 오래된 패러다임으로 쓴 책을 열심히 읽어도 가격 대비 효과는 떨어진다. 따라서 최신 지식의 겨냥도를 손에 넣고 나서, 고전을 포함하여 자신이 흥미가 있는 분야를 읽어나가면 된다. - 7

 

지식의 패러다임 전환을 이루지 못한, 생각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않는 책을 읽는 시간은 무의미하다는 저자의 생각은 지나치게 실용적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머리를 식히려고 손에 잡은 책은 올해 최고의 책 중 하나였다. 엉성해 보이는 표지와 일본인 특유의 실용적 태도를 담은 함량 미달의 재미를 원했던 오만함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책장을 넘기는 동안 왜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지 않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세상의 지식과 정보를 소화하고 편집하는 능력보다 현대인에게 중요한 능력이 있을까. 이 책 말미에 붙어 있는 북 가이드는 필독서에 해당하는 게 아니라 각각의 분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안내서들이다. 어려운 이론과 전공 지식이 필요한 분야도 있겠으나 최근에는 대부분 충분한 2차 저작물과 해설서가 넘치고 대중을 위한 지식의 체계와 설명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한두 이상 따라 읽어보면 자연스럽게 하이퍼링크 책읽기를 시도할 수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음 영역, 인접 분야의 책에 손이 간다. 다치바나 아키라의 목적은 바로 거기에 있으리라.

 

 

예를 들어 공리주의를 둘러싼 논쟁과 정의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다면 문재인 정부의 정책과 자유한국당의 주장을 이해하기 어렵다. 경제 민주화, 재벌 정책, 사법제도 개혁, 공정거래위원장의 신념, 52시간 노동 시간의 의미 등도 마찬가지다. 직접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의 생각, 행동, 태도가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그들의 자유의지는 과연 자율적 판단과 의지에 따라 이루어지는가. 가장 합리적인 성장과 분배 정책은 무엇인가. 인터넷 뉴스를 보며 울분을 토하고 근거 없는 비난과 비아냥으로 비평가 흉내를 내는 사람, 주관적 감정과 감성적 언어가 전하는 달콤함으로 현실도피를 시도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가장 적절한 치료제로 추천할 만하다. 폭넓은 지식의 향연과 분야를 넘나드는 안목을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겐 물론 지루한 잔소리와 현실과 무관한 학문의 영역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은 한번 쯤 지적 충격을 받을 때가 있다. 다치바나 아키라는 후기에서 자신의 경험을 토로한다. “권력은 네 안에 있다. 너 자신이 너를 얽매는 권력이다.”(327)는 말을 이해한 순간, 그는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었으리라. 미셸 푸코의 말 한마디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돈오頓悟의 순간을 그는 누가 뒤에서 찌르는 바람에 뒤를 돌아보았다고 술회한다. 물론 그곳엔 아무도 없었고 그 충격은 머릿속에서 온 것이라고 말한다. 40년 전 경험을 통해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모두 요약되어 있다. “나는 선이고, =권력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판단 기준과 근거를 다시 살펴야 한다. 점점 의심스럽고 두려울 뿐 머리가 텅 비어가는 느낌이다.

 

왜 이런 차별이 여전히 남아 있는가 하면, 그것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본인’, ‘중장년’, ‘남성’, ‘일류대학 출신’, ‘정규직(종신고용)’이라는 다섯 개의 속성을 지닌 완고한 아저씨와 할아버지를 말하는데 정치나 행정, 사법부터 학교와 회사, 언론에 이르기까지 일본사회는 그들의 기득권으로 얽매어 있다. - 330

 

젊은 여러분이라면 자신들이 차별하면서 차별을 없애라고 주장하는 위선자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지식의 패러다임 전환을 가볍게 받아들여, 효율적이고 공평하며 합리적인 더욱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이 책을 썼지만. - 331

 

월드컵 첫 예산 탈락인 모로코가 아쉽다. 이제 우루과이의 사우디 차례다. 한 시간이 금방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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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빅뱅 이전빅뱅 이후로 나누고, 빅뱅 이전의 책은 독서 목록에서 (일단)제외한다 이것을 지식의 패러다임 전환이라 부른다면, 오래된 패러다임으로 쓴 책을 열심히 읽어도 가격 대비 효과는 떨어진다. 따라서 최신 지식의 겨냥도를 손에 넣고 나서, 고전을 포함하여 자신이 흥미가 있는 분야를 읽어나가면 된다. - 7

 

지금까지 자기 유사성이나 복잡함을 연구한 과학자며 수학자는 존재했다. 그러나 망델브로만이 그것을 프랙털로 통합하여, 세계의 근본법칙임을 나타냈다. 이것이 거대한 지적 패러다임 전환이다. - 40

 

세계는 네트워크이고, 그것을 움직이는 것이 허브이다. - 47

 

세계는 프랙털이고, 사회도 프랙털이며, 우리 자신도 프랙털이다. - 47

 

망델브로야말로 지식의 노마드였다. 그것이 그의 인생이 매우 매력적인 이유이다.

D-G는 결국 리좀이 무엇인가 알지 못했다. 유랑하는 지성만이 리좀을 볼 수 있었다. - 57

 

자연은 인간의 지혜로는 따라갈 수 없는 신비로운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현대의 진화론은 유전의 과학과 융합하여, 생물의 생태를 수학적으로 기술할 수 있음을 드러냈다. 이렇게 진화론에 있어 지식의 빅뱅’, 사회생물학(진화생물학)이 탄생했다. - 77

 

인간의 몸이 진화로 만들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과 감정도 진화로 생겨났다. - 101

 

조직에 유전자는 업는데다 진화는 진보나 성장이 아니다. - 107

 

현대의 진화론이 자연과 사회, 마음의 비밀을 엄청난 기세로 해명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복잡하고 다양한 이 세계는 언제나 우리에게 놀라운 미지의 세상을 선사해준다. - 113

 

게임이론에서 신호보내기와 더불어 중요한 것이 맹약이다. - 125

 

신고전파 경제학의 효율적 시장에서는 모든 시장 참가자가 온갖 정보를 동시에 아는 완전 정보를 전제조건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현실의 시장에는 정보의 비대칭성이 가득하고, 이론대로 되지 않는 일이 얼마든지 일어난다. - 155

 

행동경제학에서는 이 착각을 휴리스틱(Heuristics)’라고 설명한다. 익숙하지 않은 말이지만 휴리스틱스는 복잡한 문제를 시간을 들여(슬로 사고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직감적으로(패스트 사고로) 순식간에 풀려는 단락(短絡) 경향을 말한다. - 162

 

리벳은 이 중대한 의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는 0.35초 사이에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뇌가 활동을 시작하고 행위를 실행할 때까지의 경과 시간(0.35) 동안, 인간은 그 행위를 중지할 자유가 있으니까.

이것은 자유의지개념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무언가를 할 (적극적)자유가 아니라,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무의식이 정한 것을 순간적으로 부정하는 (소극적)자유뿐인 것이다. - 235

 

지금 더욱 나은 미래더욱 나은 세상을 진지하게 말할 수 있는 곳은 실리콘밸리뿐이다. 그것 외에 갖가지 이상은 역사의 엄격한 허들을 넘지 못하고 사라졌다.

사이버 자유주의자가 그린 테크놀로지의 유토피아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설령 그것이 아무리 위태로운 미래라고 해도.

적어도 그것이 착각인지 아닌지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 323

 

권력은 네 안에 있다. 너 자신이 너를 얽매는 권력이다.” - 327

 

과학과 기술은 진보하지만, 인간은 진보하지 않았다. 전혀. - 327

 

왜 이런 차별이 여전히 남아 있는가 하면, 그것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본인’, ‘중장년’, ‘남성’, ‘일류대학 출신’, ‘정규직(종신고용)’이라는 다섯 개의 속성을 지닌 완고한 아저씨와 할아버지를 말하는데 정치나 행정, 사법부터 학교와 회사, 언론에 이르기까지 일본사회는 그들의 기득권으로 얽매어 있다. - 330

 

젊은 여러분이라면 자신들이 차별하면서 차별을 없애라고 주장하는 위선자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지식의 패러다임 전환을 가볍게 받아들여, 효율적이고 공평하며 합리적인 더욱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이 책을 썼지만. -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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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애주가의 고백 - 술 취하지 않는 행복에 대하여
다니엘 슈라이버 지음, 이덕임 옮김 / 스노우폭스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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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사랑의 시작, 나 역시 술과 헤어지기로 결심한 날보다 술과 사랑을 시작했던 날들이 훨씬 근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깊은 관계를 나눈 대상과의 이별은 오래 걸리게 마련이다. 오랜 시간 유지해 온 관계를 깨지 못해 붙잡고 있는 연인처럼. - 11

 

모든 중독은 치명적일수록 아름답다. 그 끝을 모르고 질주하는 맹목. 부딪쳐 깨질 때까지 달리는 속도감.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이성적 판단이 마비된 채 점점 헤어 나올 수 없는, 아니 헤어 나오기 싫은 아득함.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소주 한 병 이상의 술을 1년쯤 마시고 나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반주가 없으면 목이 메어 밥 한 술도 넘기기 힘들다. 다니엘 슈라이버는 어느 애주가의 고백에서 알콜중독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모든 중독이 그러하듯 알콜 중독은 가장 이성적인 인간의 가장 비이성적인 식습관 중 하나다. 세트메뉴로 엮인 담배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어느 쪽이 더 건강에 해롭고 무엇이 더 현명한 선택인지 조언하는 도덕 교사가 아니다.

 

지독한 사랑, 온라인 게임, 러너스 하이, 선거와 권력... 우리 삶에서 중독 아닌 것이 있을까. 중독의 기준은 무엇일까. 몰입과 중독은 어떻게 다른가. 하루에 커피를 몇 잔 마시면 중독인가. 모든 사람이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고 종교의 교리를 따르고 도덕과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금욕적 삶을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다니엘 슈라이버는 모든 중독자의 증상대로 자신이 알코올 중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거의 매일 술을 마시며 필름이 끊겨 기억이 사라지고 다음 날 아침 두통과 무거운 몸을 지탱해야 하는 날들이 이어진다면 중독이다. 이 책은 술에 쩔어 인생이 위태로웠던 한 남자의 갱생기가 아니다. 1935년 시카고에서 시작된 A.A(alcoholics anonymous) 홍보 책자도 아니다. 술이 우리 삶을 어떻게 뒤흔들 수 있는지 살펴보면 충분한 책이다. 자기 고백적 에세이는 항상 변곡점에 초점이 맞춰진다. 어떤 계기로, 왜 그런 결심을 했으며 그 과정은 어땠을지에 대한 호기심이 책장을 넘기게 한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자기 경험에 기반한 주관적(?) 관점과 맥락을 드러낼 뿐이다. 술을 끊기 이전과 이후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마치 신앙 간증처럼 간절하진 않지만 술 자체에 대한 깊은 고민은 없다. 모든 술은 위험한가. 술의 순기능은 없을까. 일반적으로 음주 문화의 역기능에 주목하면 세상은 거대한 수도원이 될지 모른다. 내가 마신다고 해서 마시지 않는 사람들을 불편해하거나 마시지 않는 사람이 마시는 사람을 비난하는 일은 올바른 태도일까. 사람마다 식성이 다르다. 좋아하는 음식도 다르다. 기호 식품도 각자 취향이 있다. 술은 타인과의 관계, 개인적인 기호 양면에서 따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느 애주가의 고백은 술 마시는 모든 사람에게 죄책감을 주고 하루라도 빨리 금주를 실천하라는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내게 이 책은 중독에 관한 보고서로 읽혔다. 술 대신 쇼핑, 게임, 미드, 운동, 재테크, 부동산투기, 권력지향, 명예욕, 그루밍족, 각종 덕질 등 한 가지에 매몰된 사람, 신념이 강한 사람, 고집을 꺾지 않는 사람도 중독의 한 증상이 아닐까. 당신은 무엇에 중독되어 있는가? 어디에 중독되고 싶은가?

 

알코올과 술은 언제나 슬프거나 지루하거나 화난 사람들에게 출구가 되어 줬다. 가혹한 삶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더 잘 견딜 수 있게 하며, 불안한 미래와 마주할 수 있는 힘을 줬다. 망각 속으로의 탈출은 인간 본능의 특징이다. -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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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병 - 가장 가깝지만 가장 이해하기 힘든… 우리 시대의 가족을 다시 생각하다
시모주 아키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살림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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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데, 타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배우자 역시 타인이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타인이다. - 18

 

가족을 이루는 최초의 개인은 타인이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장 끈끈한 관계는 아이러니하게도 낯모르는 타인과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의식주를 해결하는 최소 단위, 사회 보험 기능을 담당하는 가족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부부,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 이 관계는 국가, 지역, 종교, 민족, 인종, 문화에 따라 그 관계 양상이 조금씩 다르다. 자식들은 부모에게 인간과 세상의 질서를 배우고 생존 방식을 터득한다. 세계관과 가치관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부모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부모의 생각, 관점, 식성, 문화적 소양을 직간접적으로 학습한다. 따라서 대화가 없는, 소통하지 않는 부부, 부모와 자녀, 형제관계는 남보다 못하다. 생물학적 혈연 관계를 끊을 수는 없으나 서류상의 관계일 뿐.

 

그러니 가족을 구성하는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가장 가까운 사이라서 가장 잘 안다는 생각은 착각이 아닐까. 부모가 자식을 안다는 말은 직립보행을 시작하면 하지 말아야 한다. 더구나 자식은 부모를 이해할 수 있을까.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은 환상에 불과하지 않을까. 행복한 가족은 누군가의 희생과 인내, 굴욕과 분노 위에 세워진 신기루 같은 게 아닐까.

 

이렇게 건조하고 냉소적인 그러나 내 생각과 일치하는 작가의 책을 읽는 일은 지나치게 반갑다. 시모주 아키코는 가족이라는 병에서 가족의 의미를 독자에게 되묻고 있다. 1936년생이라는 작가의 나이를 고려하면 가족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치부하기 어렵다. 가족은 그녀에게 함부로 안다고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구성원 각각의 내면을 들여다 보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는 가족은 상상의 공동체에 불과하다.

 

친소여부를 떠나 가족을 화제로 올리는 사람들은 불편하다. 시모주 아키코의 말대로 가족 이야기는 자랑 아니면 험담이기 때문이다. 또한 가족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남의 가족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가족 이기주의의 극단을 보여주는 사례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뉴스와 일상에서 매일 접한다. 이 책은 가족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와 생각을 점검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2차 세계대전 패망으로 일본 육사출신 아버지와 순종적인 어머니 그리고 오빠와의 관계에서 작가의 이야기는 출발한다.

 

성인이 되어 반려伴侶를 만나 한 평생을 살지만 자식을 낳지 않고 자기 삶을 꾸려온 시모주 아키코는 인간은 늘 혼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고독을 즐길 수 있어야 비로소 상대의 기분을 가늠하고 이해할 수 있다. 가족이나 사회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다. 가족은 사회의 축소판이 아닌가.”라고 말한다. 지나치게 기대는 관계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모래알처럼 각자 사는 가족 또한 가족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함께 밥을 먹지 않고, 대화를 나누지 않으며, 눈을 마주치지 않는 가족은 생활 공동체에 불과하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을 넘어 이제는 다양한 주거, 가족 형태가 등장했다. 반려견이 자식을 대신하고 비혼자들의 쉐어하우스, 1인 가구의 주거 공동체도 심심찮게 소개된다. 스트레스와 상처를 주는 가족보다 서로 존중하고 생활의 편의를 추구하는 공동 주거가 전통적인 가족 형태를 대체하고 있다. 가족이라는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가족 구성원 개인에 대한 이해가 우선이다. 전체가 아닌 부분을 들여다보고 각자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자식이니까 언제까지나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착각, 끝나지 나를 지켜줄 거라는 오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휘두르는 폭력은 대부분 가족 안에서 이루어진다.

 

지나친 기대와 믿음도 위험하지만 침묵과 증오도 가족을 해체하는 결정적인 요소다. 이 책은 가족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담고 있다. 한 평생을 살면서 작가가 경험한 가족 이야기를 바탕으로 주변 사람들이 가족을 대하는 태도를 비판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가족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까. 정답은 없지만 나는 시모주 아키코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서로 기대고 힘이 되어주는 가족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러나 그 웃음과 기쁨이 유지되기 위한 희생과 노력은 누가 얼마만큼의 비율로 나눠가져야 하는 걸까. 보이지 않는 무수한 폭력과 상처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가족은 왜 필요한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오빠까지 떠나보낸 작가는 4부에서 그들에게 비로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그들의 인생을 보여주고 자신과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가족을 객관화한다. 한 인간에게 가족은 삶의 행복이며 존재 이유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벗어나고 싶은 굴레와 영혼의 감옥일 수도 있다. 사회적 지위, 부와 명예는 복권처럼 손에 거머쥔 가족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가족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설명하기 어렵다.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 다루는 인간의 관계양상은 사랑 혹은 가족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이 사회적 관계로 어떻게 전환되는지에 따라 우리 삶은 천국 혹은 지옥이 된다. 당신은 어떤 가족과 함께 살아왔는가, 아니 어떤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가?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 어둡고 먼 길을 홀로 걸어왔던 것처럼 마지막에는 결국 혼자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되뇌면서 말이야. -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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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란하고 화목한 가족이라는 환상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의 인격을 되찾는 것, 그것이 진정 가족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름길이 아닐까 한다. - 13

 

자신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데, 타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배우자 역시 타인이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타인이다. - 18

 

거짓은 화목하지 않은 가정보다 화목한 가정에 있다. 솔직한 심정으로 마주하면, 부모와 자식은 대립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나는 겉으로 화목해 보이는 가족보다는 사이가 나빠 뿔뿔이 흩어진 가족을 선택할 것이다. 42

 

가족 사이에는 산들산들 미풍이 불게 하는 것이 좋다. 상대가 보이지 않을 만큼 지나치게 밀착하거나 사이가 너무 벌어져 소원해지면 가족만큼 까다로운 것도 없다. - 66

 

우리는 평생을 살면서 무수한 일을 화제로 삼는데, 그중에 삼 분의 일이 남 얘기다. 삼 분의 일은 남자와 여자에 관한 얘기, 그리고 나머지 삼 분의 일이 필요한 애기라고 한다. 즉 삼분의 이는 하나 마나 아무 상관 없는 애기라는 뜻이다. 가족 얘기는 어디에 속할까. 남 얘기다. 삼 분의 일이나 그런 화제에 할애하다니 놀랍다.

가족 얘기는 왜 하나 마나 한 시시한 얘기일까. 그래봐야 자랑이거나 불평이며, 발전성이 없어서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끼리 가족 얘기를 하면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든지,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패턴이 반복된다. 어느 쪽이든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76

 

나이를 먹으면 화제가 빈곤해진다. 관심의 범위가 좁아지는 탓이 클 것이다. 병이나 건강에 관한 얘기,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보나 마나 가족 얘기다. - 77

 

가족 얘기를 늘어놓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기 가족 외에는 전혀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다른 일에는 관심이 없다. 자기 가족만 좋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가족 이기주의다. - 78

 

가족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다. 반대로 가족이 없어서 불행하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을 것이다. - 114

 

인간은 늘 혼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고독을 즐길 수 있어야 비로소 상대의 기분을 가늠하고 이해할 수 있다. 가족이나 사회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다. 가족은 사회의 축소판이 아닌가. - 129

 

무슨 일이 생기면 상대를 배려하고 돕는 것이 가족이다. 진정한 가족은 핏줄로 이어진 가족을 뛰어넘는 곳에 존재한다. - 174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 어둡고 먼 길을 홀로 걸어왔던 것처럼 마지막에는 결국 혼자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되뇌면서 말이야. -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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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 삶의 군더더기를 버리는 시간 배철현 인문에세이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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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할 것인가?

내가 나 자신을 위한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면, 나는 누구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힐렐, 선조들의 어록, 114

 

이제는 이십대 후반이 된 녀석들과 추억을 더듬었다. 생각나지도 않는 내가 했던 말과 행동을 듣고 있자니 민망하면서도 아련했다. 그 무렵 내게 간절했던 건 통찰력이었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 20, 30대를 거치면서 저절로 흐르는 시간에 맡긴다고 해서 사람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을 뿐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먹고살기 위한 몸부림, 고통을 견뎌야 했던 경험, 혼자라는 사실을 깨다는 과정이 나이를 먹는 과정이지만 저절로 혜안이 생기지는 않는다. 특정 정당, 종교, 이념, 가치, 윤리에 빠진 사람들을 자주 본다. 흔들리지 않는 그들의 신념은 아무도 깨트릴 수 없는 도그마로 굳어진다. 경험과 나이를 내세우는 천박함, 지위와 권력을 드러내는 허접함, 돈과 물질을 앞세우는 비루함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로 세상은 가득하다.

 

배철현의 수련은 출판사의 기획력은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깊은 성찰과 고민의 시간을 갖고 싶었던 독자에게는 아쉬움이 많다. 전체 428개의 키워드는 그 자체로 충분히 깊고 넓은 함의를 가진다. 하지만 300페이지가 넘는 책에서 본문은 200페이지도 안 된다. 이 작은 판형의 하드커버로 담아놓은 책의 분량을 문제 삼는 것은 화려한 학벌과 방송으로 알려진 이름값으로 기획한 냄새가 심하기 때문이다. 심연에 이어 수련이 나왔으니 곧 정적과 승화도 나올테다.

 

저자에겐 문제가 없어 보인다. 고전 문헌학자의 진정성은 간략한 원고에도 충분히 묻어나기 때문이다. 위대한 개인을 발견하고 완성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네 가지 단계인 심연-수련-정적-승화중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하는 수련에는 방법론이 제시되어 있다. 감추고 싶은 나를 마주하는 시간인 직시, 삼의 군더더기를 버리는 연습인 유기, 본질을 찾아가는 훈련인 추상, 나를 지탱해주는 삶의 문법인 패기가 그것이다. 정교한 그물처럼 각각 7개의 실천 방법을 소개한다. 저자의 고민과 수고로움이 배어 나오는 대신 숙성과 깊이가 드러나지 못해 아쉽다. 조금 천천히 쓰더라도, 독자들의 호흡이 짧아지더라도, 여전히 길고 느린 호흡으로 숨을 쉬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 필요하다.

 

교황이 즉위식에서 건네받는 지팡이의 이름인 ‘sic transit gloria mundi! 세상의 영광은 어찌 이리 빨리 사라지는가!’는 최고의 종교 지도자로서 삼가야 하는 태도가 아니라 우리처럼 평범한 범인들에게 더욱 필요한 삶의 지침이 아닌가. 아주 잠시 머물다 간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수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그 찰나의 순간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의 고민이 담겨 있다.

 

내일은 오늘과 다를 바 없다. 어제가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았듯이. 수련은 오늘의 나를 변화시키는 훈련이다. 그 변화는 물론, 내 안에서 시작된다. 군더더기를 버리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욕망을 덜어내야 한다. 하지만 이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덕목이다. 덜고 비우는 연습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욕망조차 알기 어렵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가. 왜 그러한가.

 

지적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간과해버린 삶의 태도를 점검할 수는 있다. 부디 자기 안에 쌓인 이기심을 포장하지 말고 수련을 통해 거듭날 수 있기를. 타인의 말과 행동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거울 앞에 설 용기를. 절대 진리와 영원한 가치가 없다는 정도는 파악하기를. 무엇보다 먼저 헛되고 헛됨을 확인하는 수련의 시간이 필요하기를.

 

저는 인간이 고통을 당하거나 창피를 당할 때마다, 그런 고통과 창피를 당하는 장소에서 항상 침묵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편을 들어야 합니다.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압제자를 돕는 것이지 피해자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침묵은 폭력의 주동자를 독려합니다. - 102, 엘리 위젤Elie Wie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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