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톰프슨은 말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고통 속에 태어나고, 자신의 고통 속에 죽어간다.’ 에드워드 영은 말했다. ‘태어난 순간 죽음은 시작된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말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뇨? 그저 울부짖을 뿐 아예 태어나지 말 것을, 태어났으니 얼른 죽을 것을.’ 블라디미르 나보고프의 말하라, 기억이여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요람은 심연 위에서 흔들거린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건대, 우리는 단지 영원이라는 두 어둠 사이 잠시 갈라진 틈으로 새어나오는 빛과 같은 존재다.’ - 27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사람들은 쉼 없이 책을 읽고 공부하며 생각하고 토론하는 것은 아닐까. 생물학적인 삶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 영원히 살 것처럼 경쟁하고 욕망하는 사람들에게 이 문제들은 한담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삶의 절대 조건에 대해 조금 더 깊이 그리고 심각하게 고민할 때 삶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이야기를 건넬지도 모른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걷는 것은 넘어지지 않으려는 노력에 의해서, 우리 몸의 생명은 죽지 않으려는 노력에 의해서 유지된다. 삶은 연기된 죽음에 불과하다.”는 비관적 태도를 보였을까. 하루하루 견뎌내는 일이 힘겨울 때도 있고 가슴 벅찬 환희로 영원히 살고 싶을 때도 있는 것이 삶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수만 가지 사연 속에서 우리는 매일 죽음을 맞이하고 새로운 탄생을 준비한다. 하지만 당장 내일 나에게 죽음이 다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데이비드 실즈는 너무 당연해서 웃음이 나올 법한 제목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외면할 뿐.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방법은 각양각색이다. 죽은 사람도 살아있는 사람도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데이비드 실즈는 97세 되신 아버지와 오십이 넘은 자신의 삶을 통해 죽음에 이르는 길을 안내한다. 10대 딸을 둔 가장으로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둔 아들로 삶의 한 복판에서 선 저자의 목소리는 떨림이 없다. 담담하게 자신의 인생을 스토리텔링한다. 어렵지도 난해하지도 않지만 결코 감상에 치우친 에세이나 낭만적 자기고백은 아니다.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태도가 반드시 진지할 필요는 없다. 미국식(?) 글쓰기 특유의 유머와 편안한 입담이 즐겁지만 자신의 경험을 통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더듬는 동안 저자 자신은 아마도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얻지 않았을까 싶다. 독자들은 물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다른 방식의 자신의 삶을 성찰하리라.

 

하지만 내게는 그리 큰 감동이나 깨달음을 주지 못한 책이다. 편안한 서술, 가독성 있는 문장, 간간이 섞여 있는 금언들이 양념처럼 버무려져 있지만 선뜻 추천할 만하다고 하기엔 2% 부족하다. 그것은 평범한 저자의 삶에 대한 자기고백에 대한 부담감일 수도 있고 한 유년기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서술하는 과정에 대한 지루함일 수도 있지만 책을 읽고 나서 느껴야 하는 울림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전에 읽었던 죽음에 관한 많은 책들의 간섭현상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다시 한 권의 책을 더 펼쳤다.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다. 한 사회에서 배제되는 현상을 죽음의 사회학적 표현이라고 하면 지나칠까. 군대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느꼈을 법 한 그 느낌이다. 내가 없어도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이 세상 전부가 아무 일도 없이 잘 돌아가는구나 하는 그 느낌. 현대사회에서 죽음의 특수성은 수명, 체험, 구조적 경험적 특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인화로 요약한다. 저자가 바라보는 죽음은 한 마디로 고독이다.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삶은 또한 고독이 아닌가. 앤서니 스토는 고독의 위로에서 친밀한 인간관계를 건강과 행복의 기준으로 강조하는 것은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다. 예전 세대는 인간관계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날의 일과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필요한 것은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먹고사는 일에 너무 바빠서 인간관계라는 복잡한 문제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라는 말로 삶에서 고독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했다. 삶이 고독인데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라니. 아니 어쩌면 삶이 고독이었으니 죽음이라도 고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일까.

 

오늘날처럼 조용하게, 위생적으로, 고독감을 조장하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 죽게 되는 건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다. - 92

 

사회, 문화, 역사적 상황에 따라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죽음을 맞이하는 개인의 생각도 달라진다. 하물며 예술은 어떠하겠는가. 루이스 멈퍼드는 고도의 기술 발전의 시대에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한다. 예술과 기술은 그렇게 우리 시대를 간파한다. 우리는 재미난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 재미는 수많은 충격과 모순과 비극적 역설에 있다는 말로 포문을 연다. 그러나 우리가 궁금한 것은 예술과 기술의 상관관계가 아니다. 예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기술과 예술이 하나였던 시대를 넘어 이제 예술과 기술의 영역이 분리된 시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다.

 

생활의 달인이라는 TV프로그램이 있다. 한 분야에서 숙련된 기술을 보유한 사람을 보여주는 것은 생활과 기술이 곧 예술의 경지에 올랐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닌가. 예술 작품을 보고 미적 충격을 받거나 절로 감탄사가 나오는 일은 흔치 않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오히려 현란한 인간의 기술이다. 그것이 몸으로 체득된 것이든 기술로 구현된 것이든 말이다. 백남준처럼 기술적 토대가 없으면 예술 자체가 불가능해진 미디어 아트 시대에 멈퍼드의 예술에 관한 관점과 주장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과학과 기술 그리고 물적 토대가 신앙이 되어버린 시대에 유기체와 인격 전체를 향한 관심의 촉구로 읽힌다.

 

기계의 무력한 동반자나 수동적인 희생자가 되는 대신 상실한 개성을 찾고 창의성과 자율성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가 아닐까.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처럼 예술은 타락하고 상상력은 부정되며, 전쟁이 모든 나라를 지배하고 있습니다.”라고 외치지 말고 멈퍼드처럼 예술은 고양되고 상상력은 강화되며 평화는 모든 나라를 지배합니다.”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해 본다.

 

우리의 눈만큼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혹사당하는 귀에 대해 살펴보려면 에두아르트 한슬리크의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를 천천히 읽어보면 된다. 이 책은 음악 애호가를 위한 감상능력 배양 프로젝트가 아니다. 미학적 관점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우선 한슬리크는 음악이 절대 감정 미학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하는데 할애한다. 음악에 내용이 있느냐는 논쟁으로 마무리하고 있지만 시작부터 음악에서 감정을 걷어내는데 주력한다. 물론 여기서 음악은 클래식에 해당한다. 가사는 음악이 아니다. 대중가요가 주는 감동과 눈물에만 익숙하다면 한슬리크의 책은 집어던지게 된다.

 

하지만 음악적 아름다움은 형식미학에서 출발한다는 한슬리크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유는 음악에서 화성, 리듬 등에 대한 요소 때문만은 아니다. 막귀에 닥치는 대로 음악을 듣는 입장에서 한슬리크의 이야기는 이론에 불과하다.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틀어놓고 제주 해안도로를 달리던 감동을 잊지 못하는 것은 20대의 감수성 때문이지 렌트카의 음질이나 바흐의 음악적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살아가면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다. 눈멀과 귀멀어 사는 헛똑똑이들의 관심사는 몇 가지로 수렴되는 것이 아닐까. 심봉사 지팡이를 더듬듯 보이지 않는 곳을 두드리며 손 끝에 신경을 집중하고 더듬으며 살고 싶다. 얼마 남지 않지 않았을까, 우리는 언젠가 죽을 테니까.

 

 

141130-115~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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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 강의
류동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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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혁명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된다.

 

라는 말로 시작되는 책의 시작은 말하지 않아서 모르는 것은 말해 줘도 모른다는 저자의 도발적인 프롤로그로 요약된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은 굳이 말로 확인할 필요가 없으며 말해도 모르는 것 때문에 설득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자발적인 변화와 인식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인간의 사유는 그가 살아온 테두리 안에서 결정되며 그 밖의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설령 관심을 갖는다 해도 공감이 아니라 관찰의 대상 정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말하자면 혁명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는 낭만적 혁명론은 부정되어야 한다. 이기적 인간의 본성에서 벗어나 이타적 사랑에 대한 갈급한 욕망은 오히려 혁명을 비현실적 꿈의 세계로 안내할 뿐이다. 고독한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본질을 들여다보고 그 의지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혁명은 시작될 수 있으며 사랑은 그 나머지 것들에 대한 작은 인정에서 비롯되는 것일 뿐이다.

 

어느 더운 여름 일요일 저녁 공원을 거닐 듯 가벼운 마음으로 치유 받고 싶을 때 권할 만한 책,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는 인문학적 산책의 동반자로 어울린다. 류동민은 마르크스 뿐만 아니라 책 말미에 덧붙이듯 열 명의 저자와 한 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가리타니 고진, 알랭 바디우, 김훈, 슬라보예 지젝, 홍상수의 <북촌방향>, 알랭 드 보통, 루이 알튀세르, 마오쩌뚱, 폴 스위지, 프리드리히 엥겔스, 장하준이 그들이다. 폴 스위지를 제외하고 모든 작가의 책들을 한 두 권씩 읽어보았고 <북촌방향>도 보았다고 해서 류동민의 이야기에 더 공감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마르크스를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나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느냐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만 남겨지는 이 책은 자본주의적 삶에 대한 마르크스식 힐링 캠프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단기적인 일상에 파묻히지 않고 개인의 행동이 사회 전체의 구조와 연결되는 지점과 방식을 이해하는 것, 즉 사회과학적 시야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6이라고 강조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인문학적 상상력으로부터 유리된 사회과학적 논리는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6)라고 선언한다. 고개를 들고 문득 인문학적 상상력사회과학적 논리사이의 간극에 대해 고민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가 좁혀질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은 어떤 소통과 믿음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사랑이나 배려라는 이름으로 위무되는 행위인지.

 

책을 쓰면서 책 읽기를 통해서보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이들과의 관계로부터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7)라는 말에 밑줄 그는 내 손을 바라보며 나는 점점 더 그 배움의 의미 반대편을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배운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모르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의미와 생각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깨닫게 된다는 의미가 그것이다. 서로 가 닿지 못할 것에 대해 노력하는 것은 자기파괴적 행위에 불과하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의 열 한 번째 테제를 자기 묘비명으로 삼았을까.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기만 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33)라고.

 

이 책의 구조는 --사회의 단순하지만 복잡한 관계 양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안에서 각각의 작동원리를 살펴보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적 삶의 태도를 기웃거린다. 관계의 비대칭성과 권력관계로 민주주의를 분석하거나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을 꿈꾸는 공산주의를 들여다보는 일은 언제나 그러하듯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에 불과하다. 인생은 뚜렷한 목표와 자명한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우연과 엇갈림의 클리나멘이 때문이다. 저자는 클리나멘은 사물의 변화와 그로 말미암은 결과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움직이는 직선 운동이 아니라 엇갈림의 운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78)라고 정리하지만 인과관계와 논리에서 벗어난 사건에 대해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권력은 또한 관계의 비대칭성으로부터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권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사람과 권력의 대상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권력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힘이 배분되는가의 문제이지, 대상에 대한 절대적 힘의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프루스트가 얘기한 것처럼 질투가 사랑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것과 마찬가지 논리입니다. - 203

 

타인에 대해 함부로 지껄이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욕망과 질투는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화상이다. 권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지만 그 작동원리는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고정된 틀로부터 비롯된다. 그런 면에서 나의 자유를 위해, 내 생각과 행동의 합리화를 위해 만들어낸 논리를 객관적으로 검증받으려는 노력은 게으른 자의 또다른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 류동민은 이 책에서 남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모든 자유를 허락하라는 경구는 그래서 거꾸로 읽으면, 남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이미 자유라는 이름으로 용인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229)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원칙에 불과하다. 현실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1인치의 논리도, 합리적 판단도 없이 맹목적인 자기애로부터 출발한다. 자기 소외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사회적 관계로 나아가고 그 사회적 관계들이 자기 자신으로 환원된다. 그래서 이 책은 결국 자신을 찾으려는 여정에 불과하다고 본다. 저자 류동민과 함께 떠나는 마르크스식 자기 치유 산책 프로그램에 동참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추천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선택했던 여정, 즉 개인의 자기소외로부터 출발하여 사회관계로 올라갔다가, 다시 그 사회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개인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와 발전을 분석하는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냉철함과는 다른 여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270

 

 

120624-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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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죽고 싶은가? - 첨단 의학 시대에 우리가 알아야 할 죽음의 문화
미하엘 데 리더 지음, 이수영 옮김 / 학고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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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과 끝

 

모든 에는 시작이 있을까. 생명의 기원, 우주의 근원, 세상의 시작은 언제 어디에서부터일까.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연속적인 흐름을 분절시켜 놓은 인간의 시간 단위. 만남은 이별을 전제로 하듯 탄생은 죽음을 예비하고 시작은 끝을 맞이한다. 어느덧 시작과 끝이 아니라 끝과 시작이 맞닿는 시간이 되었다.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 인위적인 인간의 시간이든 편리에 의한 단위이든 한해는 저물고 새해는 밝는다.

 

무한 반복되는 시간과 달리 생명을 가진 것들은 탄생, 성장, 소멸을 반복한다. 개체는 계통발생을 반복하며 다음 세대에게 유전자를 남긴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그 흔적들이 시간을 견디고 또 변화하며 이전의 흔적들을 지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하루에도 수많은 세포들이 죽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손발톱이 자란다. 말하자면 한 우리의 존재 자체도 매일 매일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일을 반복하다가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인간이 만든 모든 사물과 제도도 마찬가지다. 만들어지고 사라지고. 그렇게 이룩한 문명은 세월을 견디고 인류의 문화가 되고 지식으로 축적되고 세상을 변화시킨다. 그 목적과 방향에 대한 무수한 철학적 고민과 무관하게 우리는 오늘을 살고 세계는 존재한다. 시작과 끝은 매 순간 반복되며 그 모든 의 시작은 알 수 없으나 그 은 예정되어 있는 것만 같다. 그러한 무지(無知)의 지()를 얻기 위해 인간은 종교와 철학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모든 세계와 무관하게 한 인간의 탄생은 죽음과 더불어 모든 것을 소멸케 한다. 주체적인 를 확인하고 세계는 인식하는 순간부터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세계는 내가 존재하는 순간에만 존재한다는 좁은 의미의 존재론이 가능하다. 이전의 시작과 끝은 무의미하며 내 죽음과 함께 모든 세계는 점등된다.

 

죽음, 존재의 소멸과 또 하나의 세계

 

인간의 죽음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태도와 인식방법, 장례절차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지 않은가. 동양문화에서는 죽음을 터부시하는 오랜 전통에 따라 여전히 삶이 끝나는 순간 죽음이 시작된다는 불연속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삶과 죽음이 하나이며 삶의 그림자가 곧 죽음이라는 연속적 세계관을 가진 문화와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죽음은 통곡의 대상이며 건너고 싶지 않은 두려움의 강이다.

 

김열규는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에서 한국인에게 죽음은 너무 먼 곳에 있다는 사실을 역사와 문화적 전통을 통해 확인시켜 준다. 또한 최준식의 죽음, 또 하나의 세계한국죽음학회창립 이후 근사체험을 통해 삶과 다른 영역으로서의 죽음에 대해 문화와 종교적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임사체험 (), ()은 세계 각국의 임사 체험자를 면담하여 동서양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통해 사후세계에 대해 실증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에 비해 독일인 의사 미하엘 데 리더의 우리는 어떻게 죽고 싶은가?는 매우 현실적으로 읽힌다. 앞서 언급한 책들이 시대와 문화 혹은 임사체험자들을 통해 죽음 자체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면 이 책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맞이해야할 죽음에 대해 다루고 있다.

 

생명을 아주 짧은 시간 연장할 수 있다 해도, 1퍼센트의 가능성만 있어도 치료를 하려 드는 것이 의료계의 일상적인 형태다. 그러나 때로는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는 미명 아래 엄청난 불행을 안겨준다. - 25

 

30년간 응급의료 전문가로 일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과 태도에 대해 깊이 고민한 저자의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문장이며 이 책의 화두가 되는 생각이다. 생명 연장의 꿈은 인간의 본능이다. 살고 싶다는 기본적인 욕망에서 출발하는 의학은 우리에게 좀 더 긴 삶의 시간을 선물한다. 그러나 끝까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생명을 연장하는 것만이 옳은 일인가.

 

우리에게는 인간답게 죽을 권리, 고귀한 삶의 연장선에서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할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첨단의학 시대에 살면서 인간의 생명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연장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떻게죽고 싶은가의 문제는 우리에게 깊은 고민을 남겨 놓았다. 넓은 의미에서는 안락사의 문제까지도 언급되고 있는 이 책은 소극적 안락사에 대한 고민과 일부를 공유한다.

 

정확한 기준을 마련할 수 없으나 소생 불가능한 뇌사, 고통만이 남아있는 치유 불가능한 질병 등 세상에는 오로지 죽음만을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의사들이 단 하나의 목적이 생명 연장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도 충분히 논의해야할 문제들을 제기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의학적으로 심장사와 뇌사의 의미를 살펴보고 우리가 죽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먼저 숙고해보자. 임종을 앞둔 환자에 대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환자에 대한 죽음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간병을 받으면서도 비참한 죽음을 맞는 사람들, 통증 치료와 죽음의 문제, 완화의학의 경계 등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애매한 경계와 논쟁들이 독일 사회를 배경으로 진지하게 설명되어 있는 이 책은 의료복지가 제대로 갖추어진 선진국 의사의 배부른 투정으로 볼 수는 없다. 기초의약품이 없어 하루에도 수백 명씩 죽음을 맞이하는 아프리카의 현실과 동떨어진 이 책은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인간답게 살다가 품위 있게 죽고 싶어 한다. 하지만 가족의 태도, 의사의 결정, 사회적 제도에 따라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선택권이 없을 수도 있다. 환자와 가족, 의사만 합의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이 책에서는 풍부한 사례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사람답게 죽는 방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 가꾸고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태도는 건강한 우리들의 삶을 위해서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다.

 

 

2011123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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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리라이팅 클래식 15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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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주체이며 생존의 수단이기도 한 몸. 원시사회에서 몸과 현대 사회의 몸은 전혀 다르게 인식된다. 몸에 대한 미적 기준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신체적 능력에 대한 중요성도 달라졌다. 근대 이후 질병에 대한 관점은 그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다. 병원이라는 분리 공간이 생기면서 감시와 관찰의 대상이 된 것이다. 미셀 푸코는 『광기의 역사』를 통해 정신 질환에 대한 서구 사회의 편견을 드러낸다. 이성 중심의 서구 사회가 포용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격리, 배척했던 역사를 통해 질병에 대한 음험한 시선을 유추할 수 있다.

17세기는 진실의 상실에서 광기를 발견했다. 즉, 자연이 아니라 자유에 속하는 인간에게서 각성과 주의력의 역량만이 문제시되는 온통 부정적인 가능성을 발견했다. 18세기 말은 광기의 가능성을 환경의 구성과 동일시하기 시작한다. 즉, 광기는 잃어버린 자연이고 빗나간 감성, 욕망의 일탈, 척도를 박탈당한 시간이며 매개의 무한 속에서 상실된 직접성이다. - 미셀 푸코, 광기의 역사, 586

이성 중심의 서구 사회는 몸에 생긴 모든 질병을 분리와 치료의 대상으로 보았으며 서양의학은 세포단위로 환원하여 끝없이 세분화하여 처방한다. 해부학의 발달로 우리의 몸은 개인적인 특성과 분리되어 표준화 일반화된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되었고 매뉴얼에 따라 동일한 방식으로 처리된다. 다양한 의료기기의 발달과 의술의 발전은 새로운 질병을 끊임없이 발명해 내고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어떤 사람도 병원에 가서 정밀 진단을 받아보면 ‘정상’의 범위에서 벗어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넓은 범위의 ‘환자’로 살아간다. 임신되는 순간부터 산부인과의 도움은 시작되며 의사의 사망선고로 공식적인 생을 마감한다. 우리는 몸의 주인인가, 아닌가. 어떻게 하면 내 몸의 주체적 주인이 될 수 있으며 어떤 관점으로 몸과 병의 관계를 살펴야 할 것인가.

전통적 직업개념으로 규정할 수 없으나 가장 자유롭고 진정한 의미의 공부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고미숙이 이번에는 몸에 관심을 가지고 『동의보감』을 이야기한다. 그린비의 리라이팅 열 다섯 번째 시리즈로 나온 이 책은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라는 부제로 요약되어 있다. 의학에 대한 관심과 접근이 아니라 우리의 몸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5편(篇) 106문(門)으로 구성된 허준의 역작을 활용하는 방법과 관점은 다양할 것이다. ‘고전’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방식과 다양한 관점을 갖춘 고미숙의 해설은 동의보감이 주는 새로운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고전은 언제나 현재적 유용성을 가질 때만 의미가 있다. 우리가 잊고 있는 몸의 중요성에 대해 각성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책이 아니라 몸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갖게 하는 책이다. 우리의 몸은 개별적 존재로 살아온 환경, 먹었던 음식 그리고 체질과 생활조건이 다르다. 그렇다면 병의 원인과 치료 방법도 조금씩 달라야 하지 않을까. 콧물이 흐르고 두통이 있고 몸살 기운이 생겨 병원에 가면 한 번에 한 숟가락쯤 되는 약을 지어준다. 감기는 약을 먹으면 일주일 안 먹으면 7일 이라는 말이 있다. 균형과 리듬이 깨진 몸을 돌보라는 신호라는 뜻이다. 심한 경우 합병증이 생기고 심각해 질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환절기만 되면 병원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기계적인 방식으로 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지켜나갈 수는 없다.

의학은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처럼 그들만의 암호가 오고가고 언제부터인가 의사는 가장 선호하는 직업이 되었으며 의료산업에서 책정되는 가격은 아무도 적정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비싼 의료 장비와 수많은 검사와 검사료, 적절성을 상식적으로 판단하기 힘든 수많은 수술요법과 치료약들……. 예를 들어 고미숙은 자궁 적출 수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자궁 근종 등 여성 질환의 경우 질병의 근원 자체를 없애버리는 수술을 시행하는 데 이것은 원천 봉쇄의 오류가 아닌가. 임신여부와 무관하더라도 자궁은 필요 없는 기관인가를 묻고 있다. 저자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하다는 한마디이다. 과잉진료, 과다복용은 자연치유보다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우리의 몸은 오늘도 안녕한가.

전체 8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동의보감』과 허준에 대해 상세히 알아 본 후에 『동의보감』의 구성과 내용을 전체적으로 조망한 후 여성의 몸을 살피는 것으로 끝난다. 책 뒤에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을 저자가 직접 소개하고 있다. 본문 내용에서 자주 인용했고 『동의보감』과 허준에 대해 보다 상세한 내용이나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는 책을 더 참고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방식의 소개는 독자에게 큰 도움이 된다. ‘정精•기氣•신 神’으로 구성된 우리 몸의 비밀과 음양오행으로 풀어낸 오장육부의 신비 그리고 병과 약의 관계를 순서대로 재미있게 풀어내는 솜씨는 고미숙의 가장 큰 장점인 즐겁고 유쾌한 글쓰기 방식에서 비롯된다.

한 권의 책에서 깊이와 넓이를 모두 담보하려는 욕심만 버린다면 우리는 한 권의 책을 자신의 관점과 비교하며 즐겁게 읽을 수 있다. 단순히 새로운 정보를 얻고 앎의 세계를 넓히거나 다양한 관점을 얻는다는 추상적인 목적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지금 내 삶의 방법과 관점을 조율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책이다. 고미숙의 책은 ‘근대’에 대한 관심을 넘어 열하일기를 주유하고 공부와 사랑과 공부를 넘어 이제 몸속으로 뛰어들었다. 제한된 틀과 제도권에서 벗어난 고미숙의 삶과 공부에 언제나 부러움을 느낄 뿐이지만 그 결과물인 책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어 다행이다. 최근 감이당을 개설하고 ‘수유+너머’와 결별을 선언한 이후에 활동도 주목된다. 고미숙의 책은 언제나 즐거운 여행과 같다. 늘 새로움과 자유로운 세계를 안내 받고 싶은 욕심이다. 『동의보감』에서 시작된 몸에 대한 관심과 공부를 조금 더 깊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 책은 제 역할을 다 한 것이다.

편작에서 융까지, 치유본능에 충실한 의사들의 전언은 한결같다. “병을 만든 것도, 그 병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도, 그리고 그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도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의 의사가 되십시오!” 그리고 그것은 이 기나긴 여정을 이끌어 준 우리들의 멘토인 허준의 전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정기신의 발현이자 존재의 원초적 명령이기 때문이다. - 438쪽


2011112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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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금, 보험, 저축을 능가하는 노후대비'책'
    from 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2012-10-24 17:50 
    '두통에는 진통제', '우울증엔 항우울제', '불면증엔 수면제'라는 것이 공식처럼 각인되고 있다. 그러나 시댁과 갈등을 겪는 전업주부의 두통과 학습우울증에 걸린 청소년의 두통이 과연 같은 질병일까. 또 시댁과 갈등을 겪는 주부에게 어깨 결림, 두통, 불면증, 소화불량, 생리통이 동시에 나타났다면, 이는 각각 정형외과, 신경과, 정신과, 내과, 산부인과에서 따로 해결해야 할 병일까. ─강용혁, 『닥터K의 마음문제 상담소』, 12쪽 예전에 손발이 너무..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 미천한 것, 별 볼일 없는 것, 인간도 아닌 것들의 가치와 의미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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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성이란 어떤 뜻밖의 만남에서 느끼는 ‘저들’의 기분이다. 위대함과 탁월함의 찬양자들, 자신의 고상함과 고매함을 자랑삼는 자들,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며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는 자들, 바로 그런 자들이 어떤 당혹스런 만남 앞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 21쪽

언어는 사유의 도구이다. 그것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사유의 범위와 한계가 다르다는 의미이다. 언어의 한계가 사유의 한계라는 말은 자신의 존재는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로 규정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존재는 우리말 ‘있음’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영어의 ‘be’, 독일어의 ‘sein’과는 용법상 차이가 많다. 그래서 우리에게 ‘존재론’이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변명이 가능하다. be 동사가 없는 한국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으면서 ‘존재론’을 처음 만났지만 쉽게 그 개념이 잡히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은 원시시대부터 인간에게 유전되어온 오래된 기억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탐구와 사유의 대상이지만 좀처럼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아득함이기도 하다. 이진경의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은 ‘이진경’과 ‘존재론’의 결합이 아니라 ‘불온한 것들’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 책이다. ‘존재론’이라는 뜬구름에 도전하는 ‘이진경’은 철학자가 아니다. 다만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펴낸 책과 사유의 폭을 수용한다면 이 책은 무엇보다 ‘재미(?)’ 있을 수 있다. 어떤 재미를 찾을 것인지는 물론 각자의 몫이다.

그래서 이 책의 시작은 ‘불온성’에 대한 저자의 정의로부터 시작된다. 뜻밖의 만남에서 느끼는 ‘저들’의 당혹스런 감정이라는 정의에는 많은 함의를 포함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저들’에게 불온한 것이 ‘우리’에게는 불온하지 않는가. 이것은 단순한 편가르기가 아니다. 저자의 대전제에 포함한 음험함을 간파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동참할 생각이 있거나 얼떨결에 그의 이야기에 말려들거나!

내가 어느 쪽에 있든, 아니 어느 쪽에 속하는지도 몰라도 깊은 가을 진지한 질문과 사색을 즐기기를 원한다면 일독을 권할 만한 책이다. ‘이진경’에 대한 믿음과 ‘불온한 것들’에 대한 호기심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구성은 단순하다. 불온성에 대한 개념과 정의로 시작한 후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힌 다음 장애자, 박테리아, 사이보그, 온코마우스, 페티시스트, 프레카리아트에 대해 분석한다. 총론과 각론의 결합인 기본적인 구성을 통해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존재론에서 벗어나 불온한 것으로 관심의 초점을 이동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불온한 것들에 대한 호기심에서 ‘나’의 존재론으로 이동이며 나와 관계 맺은 ‘너’와 ‘세상’에 대한 관심에서 인식론과 가치론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아니면 말고.

존재론은, 그 추상적인 말과는 반대로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정치적인 사유의 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존재와 같은 추상적 단어로 많은 것을 대체하며 가리는 경우조차 만약 그 사유나 주장이 제대로 전개된 것이라면,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존재론은 자신의 사유를 걸 존재자들, 자신이 맨 처음 시선을 던진 출발점이 무엇인가에 따라 아주 다른 방향, 아주 다른 형태의 궤적을 그린다. - 352쪽

‘출구 혹은 입구’라는 부제의 에필로그에서 저자의 ‘존재론’이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존재는 존재자에 의해 결정되며 자신의 사유를 걸 존재자에 따라 아주 다른 방향과 궤적을 그리게 된다. 즉, 존재론은 자신의 삶의 방향성과 궤적에 대한 성찰이며 인과론적 차원에서 맨 처음 시선을 던지게 되는 우연과 조우하게 되는 순간의 깨달음인 것이다.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것은 허망한 성찰보다 뚜렷한 존재론적 접근 방식이라고 굳게 믿는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마이너스 존재들: 장애자, 박테리아, 사이보그, 온코마스, 페티시스트, 프레카리아트에 대한 이해와 새로운 접근 방식은 각론의 재미이다. 도구를 사용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은 원시인이 최초의 사이보그라는 주장은 신선하지 않은가. 책표지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물구나무선 모습은 책을 읽는 동안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낯설음에 대한 요구이며 새로운 시각에 대한 지속적인 충고로 들린다.

한 권의 책에서 무엇을 읽어내든 독자의 몫이라는 무책임한 말이 아니다. 이해의 폭과 넓이를 어디까지로 설정할 것인가. 스키마의 정도와 주체적인 수용능력을 일일이 표시할 수도 없다. 때로는 부딪치고 깨지고 헤롱대며 수용할 뿐이다. 그렇게 책장을 덮으려던 순간에 저자가 친절하게도 한마디 던져줄 수도 있다. 아니 그의 내밀한 의도를 언뜻 엿보일 수도 있다. 불온한 것들과 친구가 되라고, 그것은 낯설고 불편한 것들과의 만남이며 새로운 인식의 출발이라는 것을.

불온한 것들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낯설고 불편했던 것들에 익숙해지고 편안해지는 것만은 아니다. 반대로 익숙해지는 것보다 빠르게 그것들과 다시 낯설어지고, 익숙했던 것들마저 다시 낯설고 불편하게 만나는 것이다. - 358쪽


111101-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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