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눈
데이비드 호킨스 지음, 문진희 옮김 / 한문화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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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든 깨달음은 주관적이다. 호킨스 박사의 이 책은 특정한 종교적 형식을 떠나서 삶과 인간존재의 깨달음에 관한 영적인 책이다. 모든 인간사회의 종교가 가진 공통적인 메세지와 그 메세지가 가진 의식의 레벨에 대해 객관적인 수치로서 드러내었다. 이 책은 그의 전작인 '의식혁명'의 후속편이자 영성에 보다 관심있는 사람들을 위해 보다 상세하게 깨달음의 구조에 대해 서술한 책이다.

영성은 이 책에서 그가 강조하는 개념이다. 종교는 그 형식적 도그마로 인해 역사상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왔다. 그 선구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높은 의식레벨은 그것을 해석하는 후대사람들의 이기심과 에고에 의해 해석됨으로써 역사의 길목위에 많은 사람들의 피를 뿌렸다.

그뿐이 아니다. 경전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과 왜곡은 진정한 깨달음을 추구하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함으로써 그들의 일생에 걸친 노력을 헛되이 만들기도 했다. 참된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지표와 나침반을 갖지 못함으로 해서 갖게 된 수많은 오류들과 거짓된 스승이나 구루들을 알아보지 못함으로써 허비해야 했던 시간들을 그 생에서는 보상받지 못하였다.

만일 이 책에서 드러난 의식지수가 정확하지는 않다하더라도 그런 잘못된 길을 스스로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검정표의 역할이라도 제대로 해낸다면 이 책이 가진 가치는 그 값을 매길 수 없을 것이다. 비록 표현될 수 없고 드러낼 수 없는 깨달음의 영역을 수치로서 나타내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다하더라도 이렇게 정확하고 막힘없이 수치화하는 것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것이 세상에서 깨달음에 대한 잘못되고 오도된 길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구해낼 수 있다면 이 책은 충분히 칭찬받아야 할것이다.

인류의 전망에 대해서도 이 책이 주는 메세지는 희망적이다. 200을 넘어선 인류의 역사는 앞으로 보다 높은 곳으로 향해 달려갈 것이고, 그 속에서 우리들의 삶은 보다 영적으로 성숙해질 것이다. 지수가 더욱 올라갈수록 사람들은 영적으로 긍정적인 감화를 더욱 많이 받을 것이고, 언젠가는 지구가 더욱 성숙한 별로서 거듭 태어나게 될 날 이 오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무슨 특별한 개명천지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지구에서 우리들의 의식이 한 차원 성숙된 세상이 아닐까?

나의 삶 속에서 나의 모든 행동과 마음과 사건들을 지켜보는 내면의 눈, 그 눈이 늘 우리들의 생명을 지켜나갈 것이고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배우고자 하는 것을 지켜보는 참 존재일 것이고 그것을 우리들이 문득 아는 날에 세상은 나에게서 다시 펼쳐지는 날이 올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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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둔이 2005-01-13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이 책의 첫 서평을 '모든 깨달음은 주관적이다'라는 말로 시작했을까? 주관적이란 말에 더욱 함축성을 준 건가? 아니면 <나의 눈>이란 책 제목에서 비롯한 것일까? 제목에서의 '나'는 그냥 'I'가 아니라 'The I'란 것을 안다면 깨달음의 주관성을 쉽게 단정할 수있는 것은 아닐텐데...주관성에 대한 다른 설명이 없어 서평의 첫 말에 대한 의문을 가집니다. ^^!!

달팽이 2005-01-13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에서 딴 것은 아닙니다. 저자의 깨달음의 수준의 객관적 수치화에 대한 일종의 의문과 'The I' 관찰하는 주.객관 없는 그 마음을 내 안에서 온전히 찾고자 하는 마음이 그런 표현을 쓰게 한 듯합니다.
 
고요함의 지혜 - 삶을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마음의 힘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진우기 옮김 / 김영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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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의 저자 톨레가 경전과도 같은 책을 썼다. 이 책은 비록 짧은 양의 책이지만 그 에너지는 아주 강렬하다. 그 강렬한 에너지의 분출이 우리들의 마음을 더욱 깊은 곳으로 데려다준다. 이 작은 책의 내용 중에서도 단연 1장의 내용이 액기스다. 단 1장 3장 반의 내용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미 당신의 마음은 고요함을 찾아 어느 오솔길을 걷고 있게 된다.

고요함은 생각과 감각을 벗어버린 경계이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공의 단계이다. 몸을 바탕으로 하는 모든 감각들이 사라지고 마지막 한 생각마저 사라질 때 우리는 고요함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고요함 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참된 지혜가 있다. 참된 사랑이 있다. 그 참된 지혜와 사랑이 바로 고요함 즉 순수의식을 통해 우리에게 온다.

원제는 'Stillness speaks'이다. '고요함이 말하다' 이다. 최근 일어난 해일 참사를 접하게 되면 우리 사는 세상엔 고통과 비극에서 나는 소음이 너무 많다. 사건을 매개로 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우리들이 가진 호오의 생각과 더불어 이미 생로병사의 소음이 끊일날이 없다. 따라서 고요함이란 바로 이러한 자아로부터의 초월을 의미한다. 세상의 모든 선현들과 지인들이 이야기하는 바가 바로 자기 초월이 아닌가? 자기 초월이야말로 진정한 고요함으로 이르는 길이다.

하지만 자기 초월을 어떻게 이루어내는가? 이 책은 그 방법적인 면에서 비판의 소지가 있다. 물론 각 장마다 톨레는 친절하게 고요함으로 들어가기 위한 방법을 설명하고 있으나, 깨달은 자가 보는 세상과 깨닫지 못한 자가 보는 세상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참된 지혜인 고요함으로 들어가기 위한 순간적이고도 직접적인 방법말고 독자가 이해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생활속의 방법들이 제시되지 못한 것이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일 수 있다.

고요함으로 들어가는 일은 개인 스스로가 해야 하는 일임에 분명하지만 그 길로 가기위한 가이드나 지도는 늘 우리의 영적 교사들로부터 제시되어 왔다. 하지만 방향만 제시되고 나머지는 모두가 독자들의 몫이 된다면 아직 지혜의 빛을 밝히지 못한 나같은 사람은 너무나도 많은 시행착오와 반복을 거쳐야 할 것이다. 자신이 알게된 진리의 빛이 세상속으로 스며들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세상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도 있어야 한다.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그가 일정기간의 고요함의 시간을 가진 후에 다시 출판된 이 책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늘 손에 가까이 하며 스스로를 초월하여 우리 삶과 인생을 바라보게 하는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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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둔이 2005-01-09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자기초월을 이루어 내느냐? 'Stillness speaks'입니다. 욕망과 잡착의 자기를 움지이지 않고 욕망과 집착의 'Stillness'에서 욕망과 집착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일체의 움직임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고요함이 우리들의 에고가 지닌 변화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고요함은 소리없음이지만 모든 소리와 함께 하고 움직임없음은 고정된 것이지만 모든 변화와 움직임과 함께 합니다. 초월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즉해서 바로 뛰어넘어야 합니다. 고요하게 하려는 노력은 개인적이지만 고요함은 이미 개인적인 상태에 머무러지 않습니다. 관음하면 곧바로 오온이 공인줄 압니다. 색즉시공입니다. 그 사이에 시간과 공간의 틈이 없습니다. 바치면 쉬어 고요하고 쉬면 밝아집니다. 밝아진 디라야 세상이 보입니다. 고요함이 말을 합니다. 공즉시색입니다. 한손뼉으로 내는 소리를 들을 수있습니까?

오아시스 2009-06-30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가지 돌아가는 방법이지만,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어떻게 해얄지 모르겠다는 분은,
생각을 안하는 연습을 꾸준히 하는게 좋습니다.
또, 자기 몸을 느끼는 연습도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체험적으로 책에서 말한 것들이 느껴질 것입니다.

 
영혼의 마법사 다스칼로스
키리아코스 C. 마르키데스 지음, 이균형 옮김 / 정신세계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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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쓰여진 것은 1980년대 초반정도이다. 이 때쯤에 세상은 물질적인 삶에 대한 반성과 정신적 생활에 대한 추구가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쏟아지기 시작하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당시의 목적을 충실하게 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존재의 깊은 고찰을 영적인 관점에서 잘 풀어내면서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게 이어지는 스토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키리아코스가 자신은 사회과학자로서 객관적으로 신비주의에 대해 기록한 책이라는 설명은 좀 잘못되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영혼으로 사람을 대한다는 것은, 더욱 영적으로 사람들의 문제를 치유한다는 것은 자신이 영적으로 준비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다스칼로스는 바로 그런 영혼에 대한 깊은 성찰과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영적으로 도우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 영적인 도움이 단순하게 외부적인 도움만은 아니다. 그것은 도움받는 사람의 영혼을 깨우게 하고 그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치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와의 영적인 접촉은 접촉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영적인 성장을 가져오게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동양적인 사고와 세계관에 대해 목말라하던 서구사회에 그들의 논리와 언어적 방법으로 그 내용을 잘 풀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우주의 비밀과 의식의 세계에서 물질화된 세계로 표현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전체지도를 그릴 수 있게 한다는 점이 이 책이 가진 장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텅 빈 자족성과, 현실적인 존재의 시련과 고난 중에서 어느 쪽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만일 내 곁에 그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쪽을 택하겠다"고 하는 말에서 "그것은 절대적 있음의 속성으로 우주가 창조되게 한 그것과 동이한 내적 충동일 것이다"고 했다. 표현되어야만 우리는 영적인 성장을 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이 참된 우주의식에 내재하는 본성이라는 것이다.



그의 손을 거친 모든 사람들이 기적처럼 낫게 되고 영적인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는 점, 지구에 떨어지는 스카이랩 우주선을 견인하기 위해 우주인의 힘이 작용하게 되는 이야기들이 사실 언어적 표현을 통하여 와닿는 느낌이 너무 낯설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우리가 영적인 면에 관해 환기를 시키는 면에서는 의미가 크지만 마음이 직접 어떤 곳을 지향하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영성서로서 가지고 있는 한계점이 있다는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내용들이 나의 체험으로 만들어내기엔 거리가 너무 멀다는 말이다. 마음에 어떤 지향점들이 직접 생기는 책들이 지금 시대에는 좀 더 맞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내가 그만큼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점이 많아서임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염체를 만들어 현실세계를 바꾸어내는 힘으로 사용한다는 점, 에테르체, 이지체 등 나아가 5,6,7차 등의 고차원적 차원에 대한 인식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영적 소설 또는 무협지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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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4-12-02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을 읽고 가장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은 "생각의 몸"이라는 말이었을 겁니다.

우리가 하는 생각도 나름대로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형체를 이룬다는 말이 충격적이더군요. 불교에서 말하는 의업도 짓지말라던 말과 같은 의미라고 봅니다. 그뒤부터는 생각도 조심하게 되더군요. 나쁜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을 멈추는 법을 공부하게 된 것도 이 책이 계기가 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달팽이 2004-12-02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멈추어진 그 한 생각 속에 이 우주가 담겨진다면 세상은 뒤집어지겠지요...그것이 무엇일까요? 오직 모를 뿐입니다...
 
내가 사랑한 책들
오쇼 라즈니쉬 지음, 류시화 옮김 / 동광출판사 / 199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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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조금씩 읽어나가면서 어느때부터인가 나는 책의 내용보다는 책의 내용이 내 마음에 일으키는 떨림을 찾게 된 것 같다. 내가 책을 통해 삶의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는 데에는 물론 좋은 스승같은 사람이 있었다. 그를 만난 것은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이 책 역시 그를 통해서 나에게로 왔다. 책 커버를 넘기면 보이는 그의 강렬하면서도 세상 어딘가를 투시하는 듯한 눈빛...... 다음 페이지엔 너무나도 평화로운 모습으로 인도의 악기를 연주하는 그의 모습..... 그 다음 페이지엔 그가 친필로 쓴 침묵이라는 두글자...그렇다. 이 책은 침묵에 관한 책이었다.

침묵은 마음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말로는 도저히 표현될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그 침묵을 통해 우리 마음 속에 전해오는 그 무엇을 찾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목적이다. 그러고보면 나의 책읽기가 적어도 방향만은 바르게 맞추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매이고는 있지만...그래서 간간히 비추는 한줄기 빛만으로도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지 모르지만....

그는 책도사이다. 아니 삶의 도사이며, 삶의 의미에 대한 뭇사람들의 스승으로 인정받기에 모자람이 없다.  때로는 그가 말하는 방식이 어느 정도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그것이 지나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만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책을 읽어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일년에 100여권의 책을 정독으로 읽어내려면 책에 대한 많은 열정과 노력이 필요함을 알 것이다. 하지만 라즈니쉬는 100,000권의 책을 읽고 나서부터는 자신이 읽은 책을 헤아리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하루에 한 권씩의 책을 읽어서, 문자를 10살때부터 깨우쳐 글을 읽는다고 쳐서  80세까지 살도록 죽을때까지 책을 읽는다 해도 그 사람이 읽어낼 수 있는 책은 고작 25550권이 된다. 그런데 오쇼의 독서력을 따라갈려면 적어도 하루에 7-8권의 책을 읽어내어야 한다.

하지만 양적인 독서량보다도 이 책에 내가 놀라는 이유는 그만이 알 수 있는 150여권의 책과 그 책을 지은 사람에 대한 그만의 자신있는 평가이다. 그리고 그의 평가는 그가 깨달은 사람이기에 나에게 감동을 준다. 그 감동은 책과 지은이가 가진 깨달음의 깊이에 의한 마음의 파장을 가늠해보면서 내가 책을 읽어야 할 방향을 잡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아! 내가 이 책을 방학하기 전에 보게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그러면 내가 구할 수 있는 책들을 쌓아놓고 그와 같은 자세를 하고서 독서삼매경에 빠져들 수 있었을텐데....

이 책은 우리가 예전에 전혀 알지 못했던, 그리고 나의 눈으로는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좋은 책들에 대한 정보를 준다. 휘트먼의 '풀잎'이라든지, 구제프에 대한 이야기와 수피즘과 신비주의, 그리고 수많은 작가들중에서 우리가 한 번쯤 보고 넘어가야 할 사람들과 작품에 대해 그의 소개는 내 책읽기의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 책을 지금에서야 보게 된 것이 나는 그지없이 즐겁다. 이젠 이 책이 주는 가치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책읽기를 한 번 뒤돌아보며 다시 방향설정을 하는데 시기적절한 계기가 됨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이 읽은 1000여권의 책 중의 하나를 고르는 작업의 한밤중에 자신의 창가에 다가와 자신에게 말을 걸고 따졌던 수많은 영혼들, 인류역사에 있어서의 모든 현자들을 자신앞에 줄세운 그의 포부와 대장부다운 기질에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모든 현자들이 누렸던 그 깨달음의 경지에서 같이 놀았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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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색깔 공기
김동건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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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으며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란 책이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면서 온전히 그 죽어가는 과정을 겪어내며 그 속에 존재하는 영적인 교훈을 통해 영적 성장을 이루어내는 점에서 이 두 책은 특별한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다만 모리 교수는 죽음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삶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고 자신의 죽음을 뭔가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어내고 자신의 죽음에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다고 한다면 김치영 목사는 자신의 일생에 걸친 삶과 신앙을 죽음에 직면하여 마지막으로 검증받고 신앙의 힘을 통해 자신의 병을 극복해가며 빛 속으로 당당히 걸어들어갔다는 점에서 다른 점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죽음을 통해서 비추어본 삶의 의미는 우리의 현실적인 삶의 가치를 다시 물어온다. 과연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내가 이 무한한 우주에서 한 인간의 존재로서 살아가는 의미는 뭘까? 죽음 앞에서서 김치영 목사가 자신이 그토록 아껴 온 책을 처분하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삶 속에서 우리에게 중요하고 가치있던 것이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된다. 죽음 앞에서 진실로 가치로운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참된 가치는 아닐런지....

    죽음앞에서 참된 가치를 삶 속에서 찾아내고 구현하는 데에는 특별한 눈이 있어야 한다. 터너의 그림에서 보여지듯이 우리가 일상에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공기를 특별하게 보는 눈,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그것에 내재한 빛을 보는 눈이야말로 삶을 후회없이 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리교수와 같이 선한 삶을 살면서 그 선업으로 삶의 마지막 교훈인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영적인 관점을 가지게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죽음의 문제는 바로 우리들의 삶의 문제가 된다. 지금 우리의 삶에서 진실로 중요하고 절박한 문제들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않는 한, 죽음 앞에서 우리가 그것을 보게 되리라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죽음의 과정에서 우선 뛰어넘어야 하는 자신의 죽음의 수용의 문제와, 죽음의 과정에서 갖게되는 온갖 고통을 바라보고 그것의 의미를 찾아서 그 고통을 극복해가는 문제, 남겨져 있을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하고 자신의 삶을 정리해나갈 것인가의 문제, 남겨져 있는 자신의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얻어야 하는 영적 성장의 문제들이 삶 속에서 아무것도 준비되어지지 못할 때 과연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혼미함 속에서 그런 힘든 과제들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죽음은 다시 삶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바로 지금 우리들의 삶 속에서 죽음을 준비한 공부가 시작되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육체가 가진 한계를 뛰어넘는 마음공부가 되지 않은 이가 육체를 벗을 시간을 어찌 오롯한 마음으로 경험할 수 있겠는가?  자 이제 죽음의 순간 빛 속으로 걸어간 김치영 목사님이 과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우리 마음 속에서 찾아보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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