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 학교의 참교육 이야기
고야스 미치코 지음, 임영희 옮김 / 밝은누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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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현행 교육제도가 아이들로 하여금 전인적인 성장을 하게끔 하는 균형잡힌 교육이라고 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참다운 교육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이런 고민에 대해 최소한 전부는 아닐지라도 우리의 현행교육제도를 정반대의 입장에서 들여다보는 신선한 책의 내용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슈타이너 사상을 이어받은 독일 발도르프 학교의 교육이라고 생각된다. 아이가 성인으로 성장해가는 데 있어서 거치는 단계적 성장이 있고, 그 단계적 성장에서 필요한 것을 배우지 못하면 균형잡힌 성인으로 자랄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감성교육이 필요한 8세에서 14세까지의 기간에 지적 교육에 치중하게 되면 오히려 아이의 성장에 해롭다는 결론을 제시한다.

물론 슈타이너 교육의 인간관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확히 1.7단계, 2.7단계, 3.7단계가 분리되고 그 각각의 단계에서 치중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공감되지 않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감성이 더욱 중요하게 발달되어야 하는 시기에 우리는 너무나도 지적인 교육에 치중되어 아이의 품성과 인격을 삐뚤어지게 하고 심지어는 학습의욕과 배움에 대한 의지조차 꺽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임을 뼈저리게 공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치 교육에 있어서 감성교육이 다인양 그 의미를 비약하는 것도 바른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슈타이너의 세계관과 그의 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없이 단지 슈타이너 학교가 어디에 몇 개가 더 생긴다고 하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성을 중시하는 교육이 슈타이너의 사상의 핵심은 아니기 때문이다. 감성을 통해서 더욱 나아가야 할 인간정신의 고결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슈타이너의 세계관과 사상에 대한 이해의 깊이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슈타이너 학교가 생겨왔고, 앞으로도 그러리라 생각한다.

머리로 들어온 내용은 손과 발을 통해 자신의 삶으로 체화시켜야 하고, 손과 발과 몸을 통해 체득한 경험은 자연스럽게 머리로 흘러들어 경험의 체계화와 그로부터의 교훈이 정리되도록 인간 전체의 균형적인 발전에 목표를 두는 것이 진정한 슈타이너 교육의 핵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중요한 성장기에 있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아동의 단계에서 치우친 교육이 가져올 수 있는 극단의 피해를 우리는 직접 경험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깊은 세계인식과 인간정신의 깊은 곳과 닿게 하는 인간적인 완성과 그 완성으로 가기 위한 육체와 영성의 조화로운 성장에서 교육의 목표는 발견되어야 할 것이며 그것은 제도교육으로 끝이 아니라 삶의 여정 전체를 통해 우리가 이루어내야 할 과정으로서의 교육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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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과외수업을 받지 않는다
김종철·이현주·장회익 지음, 류연복 그림 / 샨티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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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세 사람의 세상 만물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방식은 상이하다. 하지만 이 상이한 세 방식은 자연이라는 하나의 단어에서 귀결된다. 자신이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그 관 하나로 세상의 만물은 그 관 앞에서 줄을 선다. 그런 관을 가지게 됨이 또한 나의 원대한 희망이다.

우리에게 익숙하게 알려져 있는 세사람, 그들이 이 자본주의화 세계화 물결의 삶, 방향없는 속도의 삶에 대해 내놓은 해법은 자연을 닮은 삶이다. 자연에 무슨 작위나 의도가 없듯이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한 점의 사사로움과 탐욕이 지워질 때 비로소 세상은 자연을 닮은 세상으로 간다고 하였다. 그것은 인간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자연을 닮은 인간의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이라 하였다.

사실 요즘같은 세상에서 남들과 달리 자신의 소신대로 산다는 것조차 힘이 든다. 대형마트를 이용하지 않는 삶,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는 삶, 휴대폰을 소유하지 않는 삶, 육식을 즐기지 않는 삶에서부터 돈의 노예가 되어 살지 않는 삶, 자아의 환상에 파묻히지 않는 삶에 이르기까지..... 어느것 하나 남들과 다른자신의 소신을 필요로 하지 않은가? 더구나 자신의 세상을 보는 확신으로 자신의 삶전체를 일구어낸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쉽지 않지만 소신있는 삶과 행동이 물질주의와 자연파괴로 얼룩진 황폐화되어가는 지구의 생명을 살리고 생명이 사라져버린 기계화되어 가는 인간사회에 다시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삶의 균형을 되찾으려는 노력임을 알 수 있다. 지역통화운동과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는 삶, 자연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와 생명의 참다운 진보를 위해 터트리는 그들의 열정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잃어버린 한 쪽 날개를 찾아 다시금 비상하려는 인간의 원대한 꿈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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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치료다 - 치료가 필요한 어린이의 본질, 아이들의 치료사, 교사와 부모를 위한 영적 안내서
루돌프 슈타이너 지음, 김성숙 옮김 / 물병자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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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도르프 교육의 창시자로서 1861-1925에 걸쳐 살면서 교육학, 철학, 심리학, 예술에 있어서 깊이있는 통찰과 여러 영역의 학문을 관통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살았던 그는 우리들에게 그리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은 아니다. 예전에 초감각적 세계인식이라고 하는 그의 책을 읽었을 때에는 쉽지 않은 책의 내용과 낯설은 영적세계에 대한 그의 밑그림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가 말하는 교육이란 치료이다. 하지만 단순히 외형적이고 신체적인 장애자들을 정형화시키는 교육은 아니다. 또한 그것은 아이들의 교육에 있어 관심과 애정만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관심과 애정은 아주 중요한 교육의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그의 교육을 이런 정의적 영역의 설명으로만 담기엔 너무나도 부족함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교육이란 무엇인가? 우선 그는 인간 존재의 깊이있는 성찰이 필요하다고 본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영적인 접근이 결여된 채 외형적인 아이의 상태로만 교육하려고 하는 것은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말한 '교육은 치료다'에서 이 치료란 장애아동이 가진 영적인 문제의 해결을 통해 드러나는 현실의 문제를 치료하는 것을 말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인간 존재의 구조에 대해 육체와 생명의 형성력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력인 에테르체, 지각, 정동, 의식, 충동, 열망, 열정 등을 생기게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염의 작용인 아스트랄체, 자아와 영아로 구성된다고 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장애아동은 영아와 자아 아스트랄체가 에테르, 육체에 제대로 스며들지 못하거나 적응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문제상태라고 파악한다.

이것이 단순히 그가 분류한 것은 아니다. 이후에 많은 지면을 통해 그는 이 개념들로써 많은 아동들을 성공적으로 치료한 사례들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언어적 개념 이면에 있는 그 존재에 대해 자신의 경험으로 증험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하지만 그가 인식하는 세계인식과 인간 본질에 대한 인식이 아주 깊이있는 통찰을 하고 있다는 점과 영적 관점에 의한 자연적 치유가 진정한 아동의 치료가 될 수 있다는 인식에는 깊이 공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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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의 아이들
정희재 지음 / 꿈꾸는돌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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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무릅쓰고 히말라야의 만년설을 넘는 티베트 아이들에게 있어 다람살라에 위치한 티베트 어린이 마을의 교육은 단지 중국에 주권과 생명을 유린당한 그들이 자신의 민족과 뿌리를 찾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이 중국을 위해 기도하고 모기약을 뿌리기 전 3일 동안을 모기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기도하는 모습에서 드러나듯이, 삶을 바라보고 자연과 생명을 대하는 그들만의 방식을 통해 삶의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들의 삶의 방식을 결정짓는 마음의 본성은 삶의 극한 고통과 비극속에서도 영혼을 타락시키지 않고 오히려 더욱 성숙하게 승화시켜내는 마음의 비밀이었다.

그에 반해 서구사회는 어떠한가? 물질적 삶의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황폐함으로 고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서구보다 더욱 더 서구적으로 살려고 하는 우리 사회에도 티베트의 어린이 마을의 교육과 그 교육으로 성장하는 아이들의 삶에 대한 태도는 '합리주의'와 '문명'이란 이름으로 가르쳐주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행복'이란 이름으로 배워야 할 대상이 아닌가?

진정한 비극이란 배워야 할 대상에게 그들의 삶의 방식을 해체시키고 잘못된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로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티베트 마을의 아이들이 자라서 살게 될 경쟁과 소외의 세상에서도 그들이 지닌 내면의 힘을 잃지 않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인류가 가진 마지막 희망일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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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
강수돌 지음 / 그린비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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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가 경제 주체의 한 구성원이 됨과 동시에 교육 주체의 구성원이 된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이란 것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경제 현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동시에 그 사회속에서 교육되어지며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라나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경제적 삶이란 자본주의의 이윤증식의 메커니즘에 휩쓸린 '질주하는 돈의 삶'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자동차문화와 패스트푸드를 위주로 한 '속도와 경쟁'의 삶이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하지만 이 속도와 경쟁의 삶에는 우리들의 삶의 가치를 둘러볼 여유가 없다. '좀 더 빨리, 좀 더 많이, 좀 더 높이'라고 하는 구호 속에 우리는 과연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근원적 물음을 놓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저자는 이러한 우리들의 삶에 대해 한번 늦추어보거나 멈추어 서서 성찰해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방법으로서 교육혁명을 제안한다. 나로부터 이루어지는 의식혁명을 통한 삶의 실천적 나아감이 이 사회의 거대한 오류의 질주하는 기차로부터 내가 내리는 방법이고 나아가서는 그 기차에 탄 사람들을 모두 내리게 하고 기차를 폐기시키는 방법임을 보여준다.

옆집 아줌마가 상징하는 바는 아마 우리 사회의 엄연하고도 냉정한 경제질서의 논리일 것이다. 이러한 옆집 아줌마의 힘의 논리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은 우리들의 깨인 의식이자 실천의 첫발을 내딛는 용기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늘 자신의 내면적 욕구나 자유에 의한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외부에서 주어진 기준에 맞추어 살아왔다. 그래서 사회가 요구하는 바, 국가와 민족이 요구하는 바, 그 요구 속에 도사린 자본의 논리와 음모를 알지 못하고 우린 우리의 진정한 내면적 욕구를 버려야만 했고, 그러한 삶은 결국 외면적이고 물질적인 풍요를 갖게 되더라도 늘 허무하고 빈 것같은 인생을 살아가게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늘 타인에 의해 강제된 삶이었지 자신의 삶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젠 우리가 진정한 자신의 요구의 부름에 대답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목적전치의 삶이 아니고, 돈의 노예된 삶이 아니고, 타자에 의해 강요된 삶이 아닌, 참된 삶의 자유를 누리는 삶을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한다. 이것이 잘못된 삶이기 때문에 내 아이에게 내가 생각하는 옳은 삶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아이 자신이 가진 선택권을 잘 행사할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해주고 그 선택을 존중해주는 것, 그것이 교육혁명의 출발점이다.

또한 교사로서 나는 이 책을 읽고 나름대로의 반성도 해본다. 과연 나는 지배이데올로기나 국가 이데올로기를 학교에서 학생에게 단순히 전달하는 자본의 외판원은 아니었는가? 내가 그런 교육내용을 만드는 지식창조자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잘못된 지배이데올로기를 볼 수 있는 눈과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기 위해 그것을 조작하고 다듬는 재단사나 디자이너 정도는 되지 않아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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