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미국의 지성' 수전 손택 별세
20세기 말 미국의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소설가 겸 수필가로 문학운동과 인권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던 수전 손택(여) 전(前) 국제펜클럽 미국지부 회장이 타계했다. 백혈병을 앓아온 손택 전회장은 28일 입원중이던 뉴욕의 슬론-케터링 기념 암센터에서 향년 71세로 숨졌다고 병원측이 밝혔다.
손택 전 회장은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에서 발레와 사진, 정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심사를 해박한 지식과 새로운 철학의 관점에서 풀이한 사회 및 예술평론으로 미국은 물론 전세계 지성계의 관심을 끌었고 베스트 셀러 소설도 남겼다. 뿐만 아니라 정치에 무관심한 미국 문단의 일반적인 경향과는 반대로 대(對)테러전에서 인권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 사회 현안에 관해 거침없는 의견을 표현해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1933년 뉴욕 모피 거래상 집안에서 태어난 손택 전 회장은 5세 때 아버지가 사망한 후 재혼한 어머니와 계부 밑에서 자랐다. 스스로 '장기 징역형'이라고 묘사한 어린 시절을 겪으면서도 학업 성적은 아주 우수해 월반을 거듭한 끝에 3년 일찍 고교를 졸업했고 시카고 대학에 재학중이던 17세 때 28세의 사회심리학 및 역사학 강사였던 필립 리프와 결혼했다.
1960년대 중반 이혼한 손택 전 회장은 뉴욕 문단에 데뷔한 뒤 소설과 수필, 평론 등을 아우르는 폭넓은 활동을 통해 문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대표작으로 베스트 셀러이며 한국어로도 번역된 '화산의 연인(The Volcano Lover)'과 2000년 전국도서상을 수상한 '미국에서(In America)' 등 소설과 '해석에 반대한다(Against Interpretation)', '은유로서의 질병(Illness as Metaphor)', '사진에 관하여(On Photography)' 등 평론, 에세이집을 남겼다.
손택 전 회장은 프랑스의 사상가 롤랑 바르트나 독일에서 태어났고 영국에서 주로 생활한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엘리아스 카네티 등과도 교유했고 미국의 작가로서는 드물게 정치적 활동에도 적극 관여했다. 1987-89년 국제펜클럽 미국 지부 회장을 지낸 그는 이란 작가 살만 루시디가 '악마의 시'로 이란 종교당국의 사형선고를 받은 뒤 미국 문학계의 항의운동을 주도했고 1990년대에는 옛유고 지역의 내전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다.
1960년대에는 미국의 베트남전 반대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미국 펜클럽 회장을 맡을 당시인 1988년에는 서울을 방문해 한국 정부에 김남주 시인 등 구속문인의 석방을 촉구한 바 있다. 가장 최근에는 9.11 이후 미국이 펼쳐진 대(對)테러전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높였다.
그는 문예 주간지 뉴요커에 기고한 글을 통해 9.11 테러가 '문명에 대한 비겁한 공격'이라는 지적을 '허튼 소리'라고 일축하면서 "이것은 특정한 미국의 동맹관계와 행동에 의해 초래된 행위에 불과하다"고 주장해 국내외에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파리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 소르본 대학에서도 철학과 문학, 신학 등 다양한 인문학 분야를 공부했던 손택 전 회장은 새로운 문화의 스타일과 감수성의 도래를 알리는데 주력해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 라는 숱한 별명과 명성을 얻었다. 그의 소설과 평론은 한국어를 비롯해 32개 언어로 번역 출간됐다.
스스로를 '진지함의 광신자'로 불렀던 손택 전 회장의 타계에 미국과 캐나다, 영국 등의 언론은 "지난 반세기 영어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지성인을 잃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뉴욕=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