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불화 명작강의 - 우리가 꼭 한 번 봐야 할 국보급 베스트 10
강소연 지음 / 불광출판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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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에 가면 사람들이 으례히 드는 곳이 있다. 주로 그 사찰의 본존불이 모셔져 있는 대웅전, 대적광전, 무량수전 등이다. 부처님이 모셔져 있고 그래서 그 부처님의 광명 속에 자신의 소원을 빌고 마음을 바치고 또 위안받는다. 그렇지만 불상을 보고 절할 뿐 그 뒤에 걸린 불화나 탱화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 또 그것을 그린 사람의 의도나 의미를 제대로 알지못한다. 루브르에 가서는 모나리자나 유명작품을 귀에 설명테이프를 들어가면서 오랜 시간 잘 돌아다니지만 정작 회화사의 걸작인 우리나라 불화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그것이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한 의도이다.

 

  사찰문화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사찰예절이나 사찰문화재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더구나 불화 속의 부처님의 명호나 의미, 보살님들의 종류와 의미, 조사스님들이나 불화가 이야기하는 스토리에 대해 모른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알고보면 또 회화사적인 미감을 갖고 들여다보면 고려와 조선불화야 말로 우리민족의 문화유산을 넘어 세계 문화유산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 그 불화 속 부처님과 보살님을 경외와 믿음의 눈으로 쳐다보며 삶의 진실에 대해 접근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고구려벽화는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몇 점 되지 않고 또 대부분 외국에 흩어져 있다. 고구려벽화는 귀족불교적 성격을 띤 시대적 배경으로 대단히 섬세하고 웅장하다. 또한 불교의 이상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참배자로 하여금 속세의 그릇된 견해를 버리고 청정한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올 것을 가리킨다. 그에 비해 조선시대의 불교는 유교중시와 불교탄압이라는 배경하에 민중과 서민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 현세구원적 성격을 띄고 있다. 그림의 형식도 세밀함에서 벗어나 대담하고 역동적이게 부처님을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속세의 세계로 나와 민중들의 삶을 구제하고 어루만지고 위로하는 의미를 가진다.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연등불, 노사나불 등 등 많은 부처님의 명호와 형상 그리고 부처님의 수인들에 대해 설명하고 왜 그런 형상을 갖게 되었는지 일반인이 알기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불화와 더욱 친숙해지는 느낌이고 앞으로 사찰에서 대하는 불화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전자전이라고 했나. 강우방 선생님의 따님이시다. 한국미술사에 대한 강우방 선생님의 책을 최근에 몇 권 읽게 되었는데 이어서 또 좋은 책을 만나게 되니 더욱 반갑다.

 

  불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부처님의 참 가르침에 따라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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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중기 청자 연구 이화연구총서 3
장남원 지음 / 혜안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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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중기라 하면 주로 12세기 중반에서 13세기 중반까지를 일컫을 것이다. 이 시기 고려청자는 상감기술이 완성되고 조형기술이 극에 달하여 아름다운 비색이 완성되고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에 나타난 바와 같이 비색의 극찬이 나타나는 청자가 완성되는 시기이다. 이 논문은 장남원 님의 학위논문을 약간의 편집을 가하여 책으로 편찬한 것으로 고려 전성기 청자의 양식과 그 변화에 대해 많은 노력을 들여 추적하고 있다.

 

  다만 이 논문이 씌여진 시기가 2000년대 초반정도이고 그래서 최신의 발굴기물이나 소개기물이 부족한 편이며 또한 도편이나 인용된 기물의 수가 조금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 특히 사진자료가 좀 더 크고 대표적 양식이나 기물을 나타내는 도판을 더욱 상세히 실었다면 조금은 딱딱한 표현으로 고려청자를 따라가기보다는 쉬웠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 내가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우선 초기 순청자, 음각청자 중기 양각, 압출양각, 상감청자 후기 퇴화 및 상감기법의 퇴화 등으로 이해하던 도식적 인식의 오류를 깨닫게 되었다. 실제로 수많은 생활기물들은 장식이나 조형이 섬세하지 않고 따라서 대다수의 생활기물은 순청자와 무문청자가 전 시기에 생산되고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상감청자의 본격적 제작이 다소 늦은 데 서긍의 고려도경이 씌여진 시기가 1123~4년인데 여기서도 상감기법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이후에야 상감기법이 도입된다고 하는 점이다. 아니면 사신으로서 접대받는 서긍이 접하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새로운 기법이 보편화되었다면 그가 접할 수 있었던 것이 더 상식적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상감청자의 제작시기가 다소 늦춰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셋째는 백자의 제작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고려백자의 양이 적고 대체로 중국의 정요백자와의 교류로 고려의 자체제작한 백자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에서는 고려백자의 존재를 고려 중기 전 시기를 통해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로 사진 도판과 함께 더 자세한 설명이 아쉽다.

 

  우리가 지금 박물관에서 접하는 고려 청자는 그야말로 황실 사용을 목적으로 최상의 기술과 조형으로 구워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판에 사용되고 인용된 청자나 도편 역시 대부분이 조질이고 또 완성도가 뛰어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이는 청자연구가 학위와 관련한 청자 조형 방식과 기법의 변화에 관심을 두고 있고 또한 요지별 청자 생산과 그 분포에 관심을 두고 있어서 조금은 초점이 벗어난 탓도 있다. 하지만 앞으로 이런 연구가 더 활발해져 아직 밝혀지지 않은 중국내 발굴청자나 일본내 발굴청자를 통해 한중일간 도자 교류와 그 양식의 교류 또한 더욱 수면 위로 드러나야만 고려 청자에 대한 더 폭넓고 깊은 이해가 가능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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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막사발과 이도다완
정동주 지음 / 한길아트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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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막사발을 일본에서는 국보로 지정하여 매우 가치있게 대접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이 다완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시대적 도자적 특성상 고려청자에서 백자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에 분청사기의 한 지류로서 만들어졌던 그릇이라고 알려졌을 뿐이다. 저자 정동주님은 이러한 정호다완의 뿌리와 그 이야기를 찾아 20여년간 차를 마시고 다기를 공부한 이력으로 이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한 권의 책으로 나는 일본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조선시대 다완이 어떤 구조와 빛깔, 그리고 형태와 모양을 가졌는지 조금 알게 되었다.

 

  우선 도판 사진이 매우 훌륭하고 뚜렷해서 눈공부는 잘 된다. 일본에서도 알현하기 힘든 귀한 그릇을 하나 하나 찾아다니거나 좋은 도판사진을 구해서 실은 정성만 하더라도 대단하다. 그래서 이 책만 보고도 정호다완과 조선다완에 대한 느낌을 뚜렷하게 지닐 수 있게 된다. 왜 조선에서는 한 때의 그릇에 불과했던 것에 일본의 문화는 생명력을 불어넣고 스토리를 가미해서 세계 최고의 그릇으로 만들었는지에 대해 이 책을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와 함께 설명하고 있다.

 

  왜 '이도'라고 부르는 걸까? 저자는 1578년 10월 25일 [센노리큐 연보]에서 처음 이 명칭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깊은 우물'모양이어서 이도라고 한다는 설, 이도 와가사노가미라는 자가 임진왜란 때 출병했다가 막사발을 모아 일본으로 가져갔다는 설, 우리 나라 경상도 지명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 있지만 저자는 일본인이 이름을 지을 때는 출생지의 특성이나 츨생할 때의 환경을 지닌 상황에 따라 정한다는 이유를 들어 이도라는 일본말이 새미, 샘, 샘물, 우물, 소 등의 뜻을 가진다고 본다. 그래서 새미골설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한국 남부지방에도 이런 새미골이란 지명을 가진 곳이 많다는 곳이다. 그 중 도자기터로 사용되었던 곳을 추정해들어가며 저자는 자신의 논지를 편다. 다소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풍겨가면서도 나름대로 날카롭고 객관적인 듯한 설명은 사람들을 수긍시키기 쉽다. 이도다완의 제작이 가능한 세 가지 요건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민요여야 하고, 둘째, 진주 동남쪽이어야 하고, 셋째, 14~16세기에 제작된 것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저자가 지명한 곳은 사천시 사남면 구룡리 구룡요지이다.

 

  또한 저자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생활잡기설을 부정한다. 그 근거로 이 이도다완이 제작될 당시에는 서민들이 도자기를 생활식기로 사용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는 점을 든다. 그렇다고 제기로 볼 수도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제기는 엄격한 유교절차에 따라 백자만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완의 제작과정이 아무런 흙으로 수비과정을 거치지 않고 아무렇게나 만든 것이 아니라 '매화피'나 '비파'색이나 시원하게 깍은 '굽'이 기술적으로 상당히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서 숙련된 도공이 무위나 무심의 혼으로 구워낸 걸작품이기에 생활잡기로 사용되었을 리가 없다고 본다.

 

  다완 한 점 한 점을 들여다본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참 자연스럽게 눈에 거슬리는 점이 없다. 또한 시원시원하고 굽에서는 당당함이 전해진다. 정말 잘 만든 그릇이다. 그냥 쉽게 제작하기는 어려웠을 듯 하다. 그래서 근대이후로 현대도예가들도 이를 완전히 복원하지 못한다. 특히 정말 제작기술이 많이 들고 힘들다는 이유로 무위 또는 무작위의 미를 비판하는 점들도 온당치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미를 보는 관점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우리가 만들어낸 그릇을 일본인들이 그 미감으로 세계 최고의 가치를 지닌 그릇으로 만들었고 그것이 가진 미감이 보편적인 것이라면 그 비밀과 뿌리를 밝히는 작업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과제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 미지의 밀림에 하나의 길을 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저서를 바탕으로 이도다완에 대해 좀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복원되어 나도 저런 다완 한 점을 소장하여 차를 따라 마시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를 제작했던 도공의 예술혼이 무엇이었는지 그들의 정신세계가 어떠했는지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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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의 나라 조선 (반양장) - 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헨더슨의 도자 이야기
김정기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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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와서 약탈 문화재의 한국반환 문제가 많이 조명받고 있다. 임진왜란과 한일병합, 그리고 미군정을 거치며 한국의 주권이 유린 당한 시절, 한국의 중요문화재가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반출된 것에 대한 정당한 환수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 시기 한국을 떠난 문화재가 모두 약탈 문화재인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수출자기로, 때로는 한국의 미를 사랑하여 한국에서 정당한 거래로 수집한 것들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의 주권상실의 역사 속에 이러한 부분은 간과되기 쉽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의 문화재와 미술품의 미에 눈을 떠서 외부인이고 타자이지만 진정한 한국의 정신 속에 살았던 인물들을 소개하고 그들에 대한 비판이 어떻게 잘못되었는가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비판에 대한 부분이 아니라 그들이 한국의 도자기와 미술품에서 본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으며 그들의 시각을 통해 우리는 한국의 미를 내부자로서 더욱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에서 재정립하고 반성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도자기에 눈을 뜬 첫 일본인들은 아사카와 형제였다. 형인 노리타가는 공예를 전공하였으나 한국도자기를 접하고부터 한국의 미에 빠져 살았으며 동생 다쿠미는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한 나머지 한국 땅에서 한국옷을 입고 한국적인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했다. 그들의 삶이 개인적 의미를 떠나 한국도자사에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세계 최초로 조선도자미술관을 건립하고 그동한 조명되지 못했던 조선의 민예품이 가진 아름다움을 재발견해낸 데에 있다. 그들을 통해 야나기 무네요시와 그레고리 헨더슨으로 이어지는 조선 도자기에 대한 사랑과 미의식은 고려와 조선의 뛰어난 공예품으로서의 도자기의 우수성을, 특히 조선민예품에 깃든 미를, 타인을 통해 검증받고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아사카와 형제의 조선 사랑과 민예품의 도자기 사랑에 공감했고 함께했고 삶의 열정을 바쳤던 일본인이다. 그는 1914년 노리타카로부터 한국도자기 한 점을 선물받은 것을 계기로 그의 삶이 달라졌다. 그는 이후 조선을 22차례 오가면서 조선의 민예도자기를 수집햇고 1918년 이후부터는 조선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전국 수백곳의 도예지를 답사하며 도편을 수집하고 정리하고 공부하였고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분청사기에서 조선도자기의 '무위의 미', 무계획의 미, 비균형성의 미, 소박미, 자연미 등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조선이 가진 미감을 발견했다. 그는 공예가 가진 미는 실용, 즉 '쓰임'의 미라고 공언했다. 장식성보다는 실용에서 그 중요성을 찾았고 장식이 부차적이 되면서 획일화되고 작위적인 것에서 벗어나 미의식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일본의 한국침략을 비판하고 나아가 무엇보다 조선의 문화재 파괴와 침탈을 비판하였다. 그는 일본이 이웃인 조선과 상호 존중과 평화 속에 서로의 미의식을 교유하기를 원했고 일본인들에게는 이와 같의 인식 변화를 위해 조선인에게는 그들이 원래가진 일본보다 더 우월한 미의식의 깨우침을 통해 이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레고리 헨더슨은 원래 일본에 관심이 있었으나 아사카와 형제와 야나기 무네요시와의 인연으로 한국도자기에 눈을 뜨게 되고 미군정기 자원하여 한국대사관에 머물고 여러 직책을 맡으며 한국도자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수집한 한국역사통이다. 야나기 무네요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무네요시는 조선의 민예품에서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분야를 그 곳에 한정하였다면 그는 고려청자와 조선백자의 아름다움까지 포기하지 않으면서 주된 관심분야를 민예품에 두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힘들게 번 월급으로 한 점 한 점 한국도자기를 수집하여 정당한 방법으로 소장하게 되었고 또 조선을 떠날 때에도 국립박물관에 보고하고 필요한 것을 자신이 산 가격에 팔 의사를 표현했다는 점이다. 헨더슨은 박정희 독재정권을 비판하고 미의회에서 참고인 자격으로 그 실상을 고발한 대가로 한국에서 추방당했던 인물로 평생을 아내와 함께 조선의 미을 발견하고 누리고 살았으며 그의 소장품은 1986년 로스엔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 기증되었다.

 

  그들의 수장품 중 가장 내 마음을 끈 것은 아사카와형제가 조선의 수백 군데의 도예지를 다니며 모은 도편컬렉션을 헨더슨이 우연한 기회로 얻게 되었고 그것이 한국도자사에 시대별 도요지별 특성을 망라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료적 가치를 가진다는 점이다. 내용이라도 잘 정리되어 한국이 그것을 쓸 수 있다면 한국도자사를 밝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그들을 향한 수많은 비판들이 있지만 나는 그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을 사랑했고 조선의 도공들을 이해했으며 그들이 만든 도자기의 진정한 아름다움에 선구적인 깨달음을 가졌던 그들....조선인조차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던 그 아름다움의 표현은 국내에서 무시당했던 조선 도공들의 영혼을 위로하며 한국도자사의 앞날을 비춰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무위의 미에서 발견한 깊은 선적인 미의식은 아름다움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그들 때문에 나의 도자기 소장도 조금은 시각이 달라졌고 그로 인해 몇 점의 민예품을 소장하게 되었고 또 앞으로의 수집방향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된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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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와 한국의 전통 차문화
김상현 외 지음, 노무라 미술관 엮음 / 아우라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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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의 노무라 미술관 관장 타니 아키라의 인사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의 차문화는 한반도로부터 전해졌다. 그래서 우리보다 훨씬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잡게 되었고 또 임진왜란 전후로 부흥한 일본의 차문화에서는 성이라고 할지라도 한 개의 조선 막사발과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다기와 다례에 대해 많은 기호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 보이차를 비롯해서 발효차에 있어서는 세계제일의 중국의 관젠핑 교수의 참여로 한, 중, 일의 다문화는 세계 차문화라고 불리어도 흠이 되지 않을 정도의 위상도 부여받게 되었다.

 

  송나라 시대에 남쪽에서 유행한 차는 해상교통의 발달로 고려로 들어오게 된다. 고려시대는 차문화의 전성기로 왕실의 다례와 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상으로서의 다구, 귀족들의 다문화, 승려와 일반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차의 음용과 생활은 아주 일상적인 것이었다. 송나라 때의 건요로 만들어진 토호잔이나 흑요잔 등 다양한 다완은 고려에 전해졌을 것이고 고려 또한 청자를 본격적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생산된 것이 다완와 다도구였을 것이다. 그러나 1000년의 세월동안 전세품으로 내려오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국보 115호로 지정된 청자상감보상당초문다완이나 은구처리된 국보 253호인 청자 양인각연당초 상감모란문 은구대접 두 점과 그 외 몇 점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국내에는 없지만 다양한 형태의 다완이 제작되고 남아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조선시대로 오면서 쇠퇴하기 시작한 차문화를 살린 것은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다. 평소 차를 즐겨하였으며 유배시절 강진 초당에서 주변의 차밭을 일구어 직접 차를 재배하면서 초의 스님에게 그 제다법과 다도를 전해준 것으로 유명하다. 1905년 백련사로 놀러갔다가 차밭을 발견하고 백련사 승려들에게 차만드는 법을 전수한다. 1818년 유배지를 떠날 때 썼던 '다신계절목'을 보면 제장들과 함께 차를 만들었던 내용이 서술된다. 다산이 차를 마신 것은 음용이 아니었고 자신의 체증을 내리는 약으로 썼던 것으로 보인다. 차에는 독성이 많기 때문에 제자에게는 많이 마시지 말라고 권한다. 이 독성을 감쇄시키기 위한 제다법으로 '구증구폭'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초의스님이 다산초당을 처음 방문한 것은 1809년이었고 그 해는 다산의 나이 48세, 초의 24세였다. 초의는 바른 스승을 찾아가며 열심히 구도했는데 사찰에 그리 훌륭한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다산을 만나 학문도 배우고 차도 배웠다. 이러한 초의 차가 세상에 나온 것은 20년도 더 뒤의 일이다. 우연히 벗을 통해 초의차를 맛본 박영보는 '남차병서'를 지어 만남을 청하고 그의 스승 신위가 다시 '남차시'를 지어 초의차는 유명해졌다. 중국의 연행길에 싼 차만 사다마시던 그 당시의 기호자들에게 초의차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1840년 전후 홍현주의 요청에 따라 [동다송]을 지으면서 조선의 차는 이론면에서도 깊어갔다. 이러한 초의차가 더욱 깊어진 것은 차에 대한 지식과 안목을 가진 추사를 만나면서부터이다. 이것이 바로 조선후기 차문화의 르네상스라 부를 만하다.

 

  추사와 신위는 청나라 문예의 종장인 옹방강과의 교유를 통해 차가 문인의 일상에 얼마나 중요한 물품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로부터 북학파와 경화사족들이 차의 새로운 가치를 인식한 것은 조선시대 차문화 부흥의 배경이 되어주었다. 추사는 자신의 글과 그림을 선물로 초의는 자신의 차를 선물로서 오래도록 사귀었다. 이러한 까다롭고 안목있는 경화사족으로 인해 초의차는 더욱 발전한다. 초의가 만든 보림백모란 차에 대한 평가는 이 사실을 알려준다.

  " 초이차는 맛이 너무 여리다. 그러므로 오래전부터 보관했던 학원차와 섞어여 한 항아리에 보관하였다. 곧 새 차와 서로 어우러지기를 기다렸다가 사용하였다. 또 시를 지어 초의에게 보이려 한다."

1838년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글을 봐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 차를 보내주시니 가슴이 시원해짐을 느낍니다만 매번 차를 덖는 법이 조금 지나쳐 차의 정기가 조금 침윤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차를 다시 만든다면 화후를 조심하는 것이 어떨지요?"

1840년 이후에야 추사는 "보내준 차는 과연 가품이다. 다삼매를 드러냈는가?" 하고 칭찬한다.

 

  이 책에서 알 수는 없지만 초의스님은 조주스님의 가풍을 이어받아 다삼매를 통해 진리에 이르려 했는지 알 수 없다. 앞으로 더욱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 책은 그 외에도 한, 중, 일의 다도와 차문화 비교와 차관련 학과가 개설된 대학, 그리고 차문화의 정의 및 범위에 대해 비교하고 있다. 아무래도 엄청난 수요와 차문화의 일상화를 통해 중국은 차 제조 및 생산, 그리고 그 잎의 개량과 제작법에 관한 농과계통의 학과와 연구가 많은 반면 한국은 다문화와 다도구와 다례와 의식, 정신적 삶에 대한 것이 일본은 차 생산과 다도예절에 관련된 부분이 중심이다. 개설된 학과나 체계적 공부는 중국이 최고이고 한국은 2000년대 들어와 본격적으로 생기고 분화되는 편이나 그 속도가 빠르지 않고 일본은 전문대학 및 연구소를 중심으로 오래전부터 생겼으나 지금은 주춤하는 실정이다. 이를 통해 한, 중, 일 간의 공동연구 및 보다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차문화가 단순히 예와형식의 영역이 아니라 현대인의 정신생활까지 포괄하는 다양한 연구가 필요하리라는 생각이다. 논문식 글을 그대로 실은 듯하여 쉽게 읽히지는 않으나 관심이 있다면 지나치지도 않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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