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SBS에서 야심차게 추진했던 조선구마사가 역사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문제로 시청자들의 큰 반발을 사면서 2회만에 전격 폐지되었습니다.
뭐 드라마속에 조선새대임에도 중국풍의 물건이나 음식이 등장한것도 문제였지만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임금인 태종과 세종에 대한 역사 왜곡이 가장 큰 문제였죠.
많은 사람들이 문제삼은 것은 한글 창제등 대표적인 명군이라고 할수 있는 세종대왕에 대한 역사왜곡을 문제 삼았지만 개인적으론 세종보다는 태종에 대한 역사 왜곡이 더 문제가 되지않았나 생각됩니다.
드라마속에서 태종은 백성을 마구 살해하는 암군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사실 태종은 일반적으로 성군보다는 폭군에 이미지가 강한것이 사실입니다.에를 들면 조선건국을 하기 위해 정몽주를 대표로하는 고려시대 충신을 도륙한 일이라든가,왕위를 계승하기위해 형제들을 살해하는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태조를 내쫒았으며 왕권강화라는 미명하에 처남 4명과 세종의 처가를 도륙하고 개국공신도 죽이거나 쫒아냈기 때문이죠.왕조 초기라 왕권강화를 위해서 한 일리라고는 해도 현재의 시각으로 본다면 매우 잔인한 것이 틀림없죠.
하지만 역사학계에서는 태종의 이런 실정과 별개로 드라마속에서 보였듯이 백성을 마구 살해한 폭군이 아니라 반대로 백성들을 사랑한 애민군주라고 합니다.
그것은 철인왕후에서 조선왕조실록에서 박계옥작가가 찌라시네라고 비하한 조선왕조실록에 아주 잘 나옵니다.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 2월 30일 기묘 1번째기사 1413년 명 영락(永樂) 11년 /혜정교 근처의 아동들이 주상·효령군·충녕군의 이름을 빌어 타구 놀이를 하다
혜정교(惠正橋) 거리에 아동 곽금(郭金)·막금(莫金)·막승(莫升)·덕중(德中) 등이 있어 타구(打毬) 놀이를 하는데, 매 구(毬)의 칭호를 하나는 주상(主上)이라 하고, 하나는 효령군(孝寧君)이라 하고, 하나는 충녕군(忠寧君)이라 하고, 하나는 반인(伴人)이라 하였다. 서로 치다가 구(毬) 하나가 다리 밑의 물로 굴러 들어가자, 그 아이가 대답하기를,
"효령군이 물에 빠졌다."
하였다. 효령군의 유모(乳母)가 마침 듣고 쫓아가 잡아서 효령군의 장인[舅] 대사헌 정역(鄭易)에게 고하였다. 정역이 형조에 고하여 옥에 가두고 물으니, 말하기를,
"곽금(郭金)이 제창하여 장난한 지 이미 3일입니다."
하였다. 행행(行幸)하는 때이므로 아뢰지 못하고, 이때에 이르러 형조에서 요언률(妖言律)로써 갖추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아이들은 모두 10세에 불과하니, 요언(妖言)을 조작한 것으로 논함은 불가하며, 또 동요(童謠)라 이를 수도 없다. 예전의 이른 바 동요란 이런 일이 아니었다. 비록 이것이 동요라 하더라도 또한 무죄(無罪)이니, 동요의 율은 즉시 대언사(代言司)로 하여금 형조와 함께 불태우게 하라."
하고, 이어서 명하였다.
"다시는 이 일을 말하지 말라."
태종실록 17권, 태종 9년 4월 18일 경인 2번째기사 409년 명 영락(永樂) 7년 /시골 사람 손귀생이 창덕궁을 구경하고 광연루까지 들어와 구금되었으나 석방하다손귀생(孫貴生) 등 두 사람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손귀생 등은 시골 사람인데, 창덕궁(昌德宮)을 구경하고 들어와서 광연루(廣延樓)의 못 아래에 이르렀었다. 순금사(巡禁司)에서 장(杖) 80 대로 조율(照律)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이들은 무지한 시골 사람이니 방면(放免)하는 것이 옳다. 예전에 조서(趙敍)가 대언(代言)이 되었을 때, 시골 선비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와 숙직하고 이른 아침에 내 보냈었는데, 그 사람이 갈 길을 잃어서 곧바로 침전(寢殿)의 뜰안으로 들어왔었다. 궁인(宮人)들이 놀라서 꾸짖으니, 대답하기를, ‘나가려고 한 것뿐입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는 무지한 자이다. 좌우(左右)에서 들으면 반드시 법대로 처치하도록 청할 것이니, 빨리 놓아보내서 가게 하고, 이 말을 드러내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었는데, 바로 이와 똑같은 일이다."
사실 임금의 이름은 피휘라고 하여 당시 책등에서는 일부러 피하는 것이 당연시대던 시절인데 비록 아이라 하여도 궁궐앞에서 공차기를 하면서 그 공에 태종과 효령및 충녕대군의 이름을 붙여 공을 찼으니 사실 대역죄로 3대가 멸해도 무방한 일이었지만 태종은 아이들이 모르고 한 일이라고 용서해 준것이죠.
그리고 시골선비가 궁궐에 근문하는 친구를 보러 왔다가 길을 잃어 왕의 침전에 들어가고 왕의 개인공간이라고 할수 있는 광연루에 들어가게 되는데 태종처럼 왕위와 왕권강화를 위해 형제와 와척 측근들을 도륙한 경우라면 자신의 목숨을 중요시해 침전을 침입한 외부인이라면 즉시 주살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의외로 시골선비가 궁궐에 와 흥분해서 길을 잃은것이미 무죄방변하라고 했지요.
뭐 이 글만 봐서 뭐라고 하긴 뭐하지만 태종의 경우 왕권 강화를 위해 피의 도륙을 벌였지만 의외로 백성들에게는 당시 관점에서 매우 관대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태종이 폭력적인이 왕이었다는 사실이지만 어떻게보면 그런 일을 했기에 세종이란 걸출한 명군이 나왔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그렇기에 악귀에 쓰여 백성들을 도륙하는 태종의 모습은 말 그대로 역사 왜곡이란것이 틀림없다고 여겨집니다.
참고로 태종에 대해 좀더 알고 싶으시면 조선왕조실록 태종편을 읽어보시면 좋을듯 싶어요.
조선왕조실록 태종편을 읽으면 조선구마사가 얼마나 황당무계한지 잘 알듯 싶네요.
by cas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