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지나갔지만 지난 3월달에 국내 최고의 역사학자, 인류학자, 아랍어·아랍문화학자. 주 연구분야는 실크로드를 포함한 동서 문명 교류사로, 한국에 얼마 없는 중동 지역 역사, 문화학에 대한 세계적인 권위자ㅣㄴ 정수일님(일명 무함마드 깐수)가 향년 90세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체포당시 무함마드 깐수>
정수일 교수님은 필리핀-레바논 출신의 필리핀 국적자 무함마드 깐수로 84년 한국에 들어와 단국대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96년 안기부에서 간첩으로 체포되어 하계를 놀라게 한 분이죠.
단국대 교수당시 각종 TV방송에 출연했고 신문에 기고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고 대한민국의 문명 교류사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이다 보니 91년도에는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도 실린 정도였지요.(하지만 간첩으로 판명되자 교육부는 일선 교사들에게 긴급공문을 보내 이 글을 철학자 박종홍교수의 글로 바꿔 가르치게 했다고 합니다)
정수일 교수는 북한에서 파견된 간첩이었지만 실제 1934년 만주국에서 태어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후 조선족중에서 최초로 베이징 대학에 입학한 엘리트로서 중국과 아랍과의 공식통역을 맡을 정도로 엘레트였으나 민족의식이 생겨나 중공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부주석인 주은래에게 직접 청해서 북한으로 귀화했다고 합니다.그리고 60년대 당시 중공출시 연안파 숙청에도 주은래의 간청으로 숙청을 면했을 정도로 중국에서도 인정받은 인재였다고 합니다.
실제 정수일 교수는 북경대 졸업후 이집트에 유학을 하면서 모르코 알제리 레바논등 중동 여러나라를 돌면서 공부했던 천재로 북한에 가서도 김일성의 이란어 통역을 맡은 정도로 인정받고 평양외국어 대학 교수를 지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뛰어난 능력탓에 정수일은 간첩으로 남한에 파견되었으나 북한이 원하는 정보가 아닌 자신이 연구했던 자료를 넘겨쥐서 북한 당국도 황당해 했다고 하네요.
체포후 전향한 점과 그간의 연구 업적 그리고 미미한 간첩활동등으로 얼마안가 석방되고 이후 한국문명교류연구소의 소장을 맡으면서 왕성한 연구를 해오면서 여러 책을 저술하다 올해 3월에 사망하셨습니다.
북한사람인 정수일은 왜 필리핀-레바논계로 착각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데 실제로 정교수를 만나본 사람에 의하면 전형적인 한국인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과거 아랍계 혈통이 섞인 중국의 회족같은 느낌을 받은데다 동 나이(34년생)의 한국인에 비해서 키도 몸도 커서 당연히 아랍계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정교수는 대학교수 시절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치고 또 학점도 잘 주어서 항상 그의 수업을 학생들의 수강신청으로 만원사례를 이를 젇도로 인기많은 교수였다고 하네요.그는 사형선고 당시에도 담담했으나 자신때문에 자신을 믿도 따라온 대학원 제자들의 폐강에 따른 불이익에 매우 죄책감을 느끼며 울었다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였다고 합니다.
정수일 교수는 언어의 천재로 모국어인 한국어외에도 일본어(일제시대에 태어남),중국어(조선족 출신),러시아어,영어,아랍어,독일어,프랑스어,스페인어,이란어,마인어,따갈로그어(필리핀어)등 11개국어를 구사했다고 합니다.
사실 34년 일제치하에서 태어난 한국인중 저 정도의 언어를 구사하고 전세계 여러나라를 다닌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있을까 하는 점에서 정수일 교수는 어찌보면 시대의 풍운아란 생각이 듭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정교수가 간첩으로 체포된뒤 단국대에서는 그의 학위를 취소했고 그가 석방되고 복권 된 뒤에도 하귀 복권은 이루어지지 않아서 더 이상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 못하게 된것이죠.
아마 정교수가 대학에서 학생들은 더 가르쳤다면 아마도 한국의 이슬람 관련 동아시아사는 더욱 발전했을 거란 점입니다.
아무튼 고인의 명복을 비는 바입니다.
by cas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