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크리스마스 입니다.크리스마스하면 어릴적에는 산타 할아버지와 선물 그리고 루돌프가 생각나지만 좀 커서는 크리스마스면 TV에서 방영하던 나홀로 집에가 자동스레 생각납니다.


그런데 나홀로 집에도 워낙 오랜기간 방영해서인지 이제는 크리스마스 시즌에도 TV에서도 도통 방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그것이 섭섭했는지 나홀로 집에 주인공인 케빈이 30년만에 집에 홀로 있는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네요.


ㅎㅎ 영상을 보니 케빈 형님 세월의 흐름을 얼굴에 정통으로 맞으셨네요.그나저나 실제 나홀로 집에 30년후를 영화화 한다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가습니다ㅋㅋㅋㅋ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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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크리스마스 입니다.잠시 일이 있어서 강남역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암만 경기불황이고 연말 연시 느낌이 안난다고 하지만 서울 상권의 중심지인 강남역에 정말 캐롤하나 트리하나 없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네요.


지난주 광화문 일대는 사람이 바글바글해서 연말 분위기가 확 살아 낳는데 희안하게 강남역은 사람도 없고 분위가도 확 다운되어 있네요.광화문교보가 사람이 북적북적하면서 캐롤송을 들은 기억이 나는데 강남 교보는 사람도 별로 없고 캐롤송도 들리지 않아서 과연 오늘이 크리스마스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정말 경건하고 조용한 크리스마스는 참 오래만인 것 같습니다.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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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살고 있는 곳은 서울이지만 한적한 주거지역입니다.그러다보니 한 10시만 지나면 대로변이 어두워 질 정도이지요.그래서 불편한 점도 있지만 한편으론 살기에는 쾌적한 편이죠.


오늘 주민센터에 서류를 떼러 갔다가(자주 가는 길은 아님),갑작스레 새로 생긴 카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멈춰 서서 어 이 카페가 언제 생겼지 하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 페인트 가게 였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죠.예전에 뭐좀 고치느라 페인트를 산 곳인데 어느샌가 카페로 바뀌었습니다.

페인트 가게가 있던 자리에 생긴 카페는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open했을까 궁금해 지더군요.그곳은 작은 고등학교 하나만 있을 뿐 유동인구가 그닥  많지않은 전형적인 주태가 였기 떄문이죠.

그런데 그 카페에서 한 두 매장옆에 이미 작은 카페가 하나 있고 이면도로 길 건너에는 공차와 또다른 개인 카페가 있으며 한 2~3분 거리에 메가커피가 그리고 3~4분 거리에 무슨 상을 수상했다고 자랑하는 바라스타가 운영하는 카페가 있습니다.

즉 새로 생긴 카페 인근 도보 5분 거리 미만에 이미 5개의 카페가 운영되고 있는 중이죠(프레차이즈 2개/개인카페 3개)


자세히 안을 들여다보니 새로 생긴 카페라서 그런지 손님들이 꽤 많습니다.주민센터에서 볼 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나머지 카페들도 자세히 살펴 보았습니다.주변 개인 카페(페인트 가게 자리 카페보다는 소형임)은 손님이 전혀 없고 공차에는 몇 명정도 메가키피에도 손님이 몇 명 있을 정도입니다.나름 유명하다는 바리스타가 운영하는 카페는 비싼 가격에도 손님이 상당히 많아서 그 곳만 장사가 제일 잘되는 것 같더군요.

결국 새로 생긴 카페가 주변 카페의 손님을 뺴앗아 가는 제로섬 게임을 하고 있는데 이건 손님층이 한정적인 주택가임을 생각한다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 입니다.


경기가 불황이다보니 취업이 안되는 젊은 층도 늘어나고 또 명퇴하는 분들도 많다보니 창업시장중 그나마 쉽게 창업이 가능한 카페 창업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것 같습니다.

사실 한국이 카페 창업은 외국에서도 놀란 정도로 급속히 팽창했지요.

NYT는 3일(현지시간) ‘South Korea Has a Coffee Shop Problem(한국이 안고 있는 카페 문제)’이라는 기사에서 한국 카페 시장이 “세계 최고 속도로 팽창했지만 이제는 위험한 포화 상태에 들어섰다”고 분석했을 정도 입니다.

NYT는 “문제는 가게가 아니라 시장 구조 자체”라고 지적하면서 한국의 카페 폭증은 경직된 조직 문화, 불안정한 고용, SNS가 만든 ‘핫플 환상’, 인테리어 중심 소비 문화가 “소규모 창업 = 출구”라는 환상을 키운 한마디로 ‘현실 도피형 창업’으로 규정했는데 정곡을 찌른 지적이네요.


한국의 카페는 하루 13시간을 일해도 주인이 잘 해야 3~4백만원을 버는 구조라고 합니다.요즘 같은 불경기에 많이 버는 것 같지만 카페 창업비용을 생각한다면 결코 수익이 좋다고 할 수만을 없지요.통계만 보더라고 카페는 한해 수천 곳이 생기고 문을 닫을 정도라고 할 정도로 이미 레드오션이 된지 오랩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을 기준으로 한 도보 10분거리내에 스타벅스를 포함해 카페가 한 20개가 넘는 것 같습니다.그런데 아직까지 이데아나 빽다방 컴포즈 커피같은 프렌차이즈들은 입점하지 않고 있으니 언제 어디에 생길지 모르겠네요.


결국 또 많은 카페 창업자들이 문을 닫도 떠나가고 또 새로운 가게들이 open할 것입니다.

새로 생긴 카페를 보면서 느낀점은 과연 맛은 어떨까 하는 생각보다는 저 가게는 언제까지 버틸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올라서 쓸쓸한 감정을 숨길수가 없네요.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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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2-24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영업 비율 세계 최고인 상황과 무관하지 않겠죠. NYT의 분석은 현상을 너무 잘 파악했네요.

카스피 2025-12-25 23:14   좋아요 0 | URL
네 자영업자가 한국에는 너무 많아요ㅜ.ㅜ
 

미국에서 가자 농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농부 랭킹 1위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어랏 이분은??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


네 빌 게이츠는 26만 에이커의 농지를 자동화한 설비로 경영하며 미국 농지 소유 1등이라고 합니다.참고로 26만 에이커는 ,052 km² 이고, 서울 면적의 1.7 배를 넘고, 한국 면적의 1 % 를 살짝 넘는다고 하네요.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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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모 알라디너님이 신라 왕실이 흉노의 후손일까?하는 글을 올리신 적이 있어서 저도 그간 알았던 것을 정리 차원에서 올려봅니다.

(그리고 환단고기가 과연 진서냐 위서냐 하는 강단사학계와 재야 사학계와의 논란과도 다소 연결되는 부분도 있어서 생각난 김에 올려봅니다)


사실 일반인이 신라 왕실이 흉노의 후손이라고 처음 안것은 아마도 KBS에서 이천년대 초반에 방영한 역사다큐를 통해서가 아닐까 합니다.지금도 유튜브를 찾아보시면 해당 동영상을 시청하실 수 있는데 방송의 요지는 신라왕실이 흉노의 후손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애매한 내용이었죠.


이후 2020년에 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에서 이덕일은 신라 김일제도 투후 김일제의 후손이다라고 다시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문무왕의 비문 내용입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의하며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해릉을 설치하고 이를 대왕암이라고 했으며 인근에 감은사를 절을 지었다고 나옵니다.

능이 있으면 당연히 비석이 있어야 되는데 비석의 발견이 한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신문왕 때 세운 이 릉비는 약 1천여 년 후인 조선 정조 20년(1796년) 우연히 발견되었다. 정조 때 홍문관·예문관의 양관(兩館) 대제학을 지낸 홍양호(洪良浩:1724~1802)의 문집인 《이계집(耳溪集)》에는 〈신라 문무왕릉비에 제하다(題新羅文武王陵碑)〉라는 글이 있다. 현지 사람이 밭을 갈다가 홀연히 들판에서 발견한 고비(古碑)가 문무왕릉비라는 것이다. 그 후 이 비는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그 탁본 네 장이 청나라의 금석학자 유희해(劉喜海)에게 들어가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실렸다. 그는 네 장의 탁본을 각각 제1, 2, 3, 4석으로 호칭했는데, 이는 그가 4개의 비편(碑片)을 보았음을 의미한다.

이 기사 내용대로라며 조선시대에 이미 문무왕릉비가 발견되고 탁본이 청나라 학자까지 확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즉 조선시대에도 이미 신라왕실의 흉노의 후손이란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홀연히 사라졌던 문무왕릉비는 홀연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들어내지요. 1961년에는 경주시 동부동 주택에서 비편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비문 내용을 대조한 결과 정조 때인 1796년에 발견되었던 비신의 하부에 해당하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경주에서 발견된 문무대왕릉비석>


이 비석에는 신라왕실의 선조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들어있습니다.

「(5행)···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지(枝)가 영이함을 담아낼 수 있었다.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하였다.(6행)'15대조 성한왕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신라로 내려왔고'...


‘투후 제천지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투후의 후손”이란 뜻인데, 투후란 작위는 중국 역사서에서 오직 단 한명  휴도왕(휴저왕)의 태자로서 한나라에 끌려갔던 김일제가 죽기 직전 한나라에서 받은 제후의 이름이라고 합니다.위 비문으로 본다면 당시 신라 왕실은 투후를 왕실의 선조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중국에 있는 투후 김일제의 동상>


한나라 무제는 망하리의 난을 평정 후 이에 공이 있던 김일제에게는 그(무제)의 사후 투후로 봉하라는 유조를 내리고 김씨성도 하사하는데 이후 투후는 그의 후손들에게 이어지게 됩니다.하지만 김일제의 후손들은 이후 신나라 왕망과 외처관계로 연결되면서 후에 후한을 세운 광무제에게 척결되고 이후 김일제의 후손들은 중국 역사문헌 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투후를 신라 김씨의 선조라고 여기는 비석은 중국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1954년 중국 섬서성 서안  동쪽 교외 곽가탄에서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이 발견되었는데 김씨는 재당 신라인 김공량의 딸로 김씨의 유래와 김씨 부인의 선조, 부인의 품행과 생활상, 죽음과 후사 등이 기록되어 있이 새겨져 있습니다.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 적힌 비문>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世祖)시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서 온천하에 만연하니 이미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磾)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그를 발탁해 시중(侍中)과 상시(常侍)에 임명하고 투정후(秺亭侯)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처럼 문무왕릉비나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 따르면 당시 신라인들은 신라왕실이 투후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나 현재 한국의 강단 사학계는 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김일제'와 관련된 문자자료가 특수한 것은 사실이나 학계에서는 이 기록 자체를 숭조사업의 일환으로 본다는 견해인데 김알지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등에서 신라 김씨의 시조로 기록된 통상적인 역사상식과 전혀 달리, 김씨 흉노설은 1961년에 문무왕릉비의 비석 하단이 발견되고 잇따라 2009년에는 비석 상단마저 발견되면서부터 의혹의 중심이 되어왔던 것으로 비문의 내용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김씨왕족들이 자신들의 선조의 권위를 과장하기 위해 내세운 허구적 조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또 한편으로 삼국통일 과정에서 당나라의 협력을 얻어내기 위해 자신들의 선조를 중국 한나라 투후의 자손이라고 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강단 사학계의 입장은 당시 김일제는 이민족으로 중국에서 출세한 입지전적인 위인으로 중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이미 유명한 대상이었고, 원래 숭조사업을 벌일 땐 자신의 성씨와 행색과 비슷한 출신지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 섬기는 게 일반적이라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게다가 신라 김씨가 다른 흉노족도 아니고 이민족 출신으로서 중국 황제를 섬긴 김일제를 조상으로 내세운 것은 중국과 대비되는 북방민족으로서의 흉노족의 후손을 나타낸다고 볼 수 없고 오히려 해석하기에 따라 한나라 입장에서 김일제처럼 이민족인 신라가 중국 황제가 주도하는 국제질서에 따르겠다는 사대주의로 해석할 수도 있기에 민족주의적 입장에서는 더더욱 따르기 힘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KBS의 역사 다큐이후 재야 사학계와 많은 일반인들은 한국에서 출토된 북방계열의 유물들을 보면서 신라 왕실이 흉노족의 후예라는 설을 지지하고 있으나 강단 사학계는 재야 사학계가 주장하는 위 흉노족 신라왕족설에서 흉노의 유물이라고 열거한 유물에 내포된 객관적인 사실은 "북방계통의 영향을 받았다"까지라는 것이고 이런 주장을 뒷 바침할 아무런 문헌적 고증이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 신라 왕실의 흉노 기원설은 문무대왕릉비와 대당고김씨부인묘명외에는 어떠한 자료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재야 사학계가 이 둘을 가지고 신라 왕실 흉노 기원설을 주장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오히려 강단 사학계의 연구 결과(사료나 유물분석)로 볼시 신라 왕실의 숭조사업이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견해는 약간 다릅니다.과연 신라 왕실이 숭조사업을 위해서 흉노족에서 한나라로 귀순한 투후라는 인물을 과연 선조로 내세우는 것이 무엇이 그리 영광스러울까 하는 점이죠.강단 사학계에 주장하듯이 숭조사업이었고 중국측과의 관게 걔선을 위한 것이었다면 오히려 한족 출신의 왕족출신(춘추전국시대의 왕족들) 후예라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신라 선조중 한명인 박혁거세는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가 낳은 알에서 출생했고 석탈해는 《삼국사기》에 수록된 석탈해 설화에 따르면 본래는 다파나국(多婆那國)출신으로, 그 나라 왕이 여국(女國) 왕녀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임신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는 일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알을 버릴 것을 명했고, 왕비는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싸 궤 속에 넣어 바다에 떠내보냈다고 나와있고 김알지는 삼국사기에 금빛의 작은 함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다고 재상 호공이 보고하자, 왕이 직접 가서 함을 열어보니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와서 이때부터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하고, 아이는 금함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고 합니다.이외에도 고구려 고주몽의 탄생설화 역시 난생설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처럼 당시에는 왕조의 시조는 하늘의 자손이란 선민 사상이 강했기에 자신들의 선조를 천제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지 일개 흉노의 귀순 제후를 왕실의 선조라고 일부러 말하는 것이 과연 어떨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역사서를 쓴다는 것은 매우 엄중할 작업이기에 허투른 글을 절대 쓸 수 없습니다.이 것은 과거도 마찬가지여서 특히 중국 24서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사마천은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가치 판단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 사실 그대로를 담담하게 서술하려는 태도를 역사의 실제 모습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중국의 문화를 받아드린 삼국에서 역사관 역시 중국 사마천의 역사관을 받아 들였을 것인데 문무대왕의 능비에 과연 허무맹랑한 말을 적어 놓을 수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네요.

만일 당시 문인들이 실제 역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글귀를 왕릉의 비석에 새겨놓았을 거라고 후세 사가들이 생각한다며 동일한 논리로 광개토태왕비 역시 당시 사람들의 허구라고 말해도 어떻게 반박할지 궁금해 집니다.


물론 오랜 기간 연구한 강단 사학계의 견해가 맞을 수도 있지만 이 것과 관련되서 더 많은 논의와 연구가 이루어 졌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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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5-12-24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에 언급하신 그 역사 다큐 프로그램을 봤었지요. 저도 성이 김씨라 흥미롭게 봤었습니다. 어렸을 때 제 주변에는 김해 김씨가 많았는데, 거기 시조는 금관가야의 김수로왕이라고 했죠. 저는 시조가 신라 김알지 라고 배웠습니다. 어렸을 때에도 그렇고 지금도 주위에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어요. 아, 같은 김알지를 시조로 모시는 경주 김씨는 제법 많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우리 성씨는 아마 경주 김씨에서 분파되어 나온 방계 중 하나였겠지요.

기록으로 남지 않은, 혹은 기록이 많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알기는 어렵죠. 기록이 제법 체계적으로 잘 남아있는 조선시대조차 논란이 많은 부분들이 있으니까요.

당시에 해당 다큐나 관련 글들을 찾아보고 나서 들었던 의문은 과연 저 문무왕 비문을 전부 제대로 해석한 것이 맞나 하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그때에는 한자로 쓰기는 했지만, 읽는 방식이 달랐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완전히 다른 어떤 내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광개토대왕 비에 나온 그 유명한 ‘임나일본부‘ 주장도 어쩌면 완전히 다른 어떤 뜻일텐데 제대로 해석을 못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물론 탁본을 뜰 당시에도 이미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이 있어서 더 원뜻을 추정하기 어렵다는 생각도 있구요.

카스피 2025-12-24 01:14   좋아요 0 | URL
문무대왕릉비의 탁본은 이미 조선시대에 나와서 추사 김정희의 책이나 청나라의 금석문 관련 서적에도 기술되어 있기에 위작의 확률이 적은데다가 60년대이후 한국에서 문무대왈능비의 일부가 발견되고 중국에서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 적힌 비문이 발견되었기에 적어도 당시 신라 왕실에선 신라 김씨 왕실의 선조가 흉노족 투후 김일제라고 널리 인식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현재 강단 사학계에서는 위에 적었듯 여러 이유러 흉노인 투후 김일제 신라왕실 선조설은 일종의 숭조사업으로 치부하고 있어 인정하고 있지 않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