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모 알라디너님이 신라 왕실이 흉노의 후손일까?하는 글을 올리신 적이 있어서 저도 그간 알았던 것을 정리 차원에서 올려봅니다.
(그리고 환단고기가 과연 진서냐 위서냐 하는 강단사학계와 재야 사학계와의 논란과도 다소 연결되는 부분도 있어서 생각난 김에 올려봅니다)
사실 일반인이 신라 왕실이 흉노의 후손이라고 처음 안것은 아마도 KBS에서 이천년대 초반에 방영한 역사다큐를 통해서가 아닐까 합니다.지금도 유튜브를 찾아보시면 해당 동영상을 시청하실 수 있는데 방송의 요지는 신라왕실이 흉노의 후손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애매한 내용이었죠.
이후 2020년에 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에서 이덕일은 신라 김일제도 투후 김일제의 후손이다라고 다시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문무왕의 비문 내용입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의하며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해릉을 설치하고 이를 대왕암이라고 했으며 인근에 감은사를 절을 지었다고 나옵니다.
능이 있으면 당연히 비석이 있어야 되는데 비석의 발견이 한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신문왕 때 세운 이 릉비는 약 1천여 년 후인 조선 정조 20년(1796년) 우연히 발견되었다. 정조 때 홍문관·예문관의 양관(兩館) 대제학을 지낸 홍양호(洪良浩:1724~1802)의 문집인 《이계집(耳溪集)》에는 〈신라 문무왕릉비에 제하다(題新羅文武王陵碑)〉라는 글이 있다. 현지 사람이 밭을 갈다가 홀연히 들판에서 발견한 고비(古碑)가 문무왕릉비라는 것이다. 그 후 이 비는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그 탁본 네 장이 청나라의 금석학자 유희해(劉喜海)에게 들어가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실렸다. 그는 네 장의 탁본을 각각 제1, 2, 3, 4석으로 호칭했는데, 이는 그가 4개의 비편(碑片)을 보았음을 의미한다.
이 기사 내용대로라며 조선시대에 이미 문무왕릉비가 발견되고 탁본이 청나라 학자까지 확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즉 조선시대에도 이미 신라왕실의 흉노의 후손이란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홀연히 사라졌던 문무왕릉비는 홀연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들어내지요. 1961년에는 경주시 동부동 주택에서 비편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비문 내용을 대조한 결과 정조 때인 1796년에 발견되었던 비신의 하부에 해당하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경주에서 발견된 문무대왕릉비석>
이 비석에는 신라왕실의 선조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들어있습니다.
「(5행)···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지(枝)가 영이함을 담아낼 수 있었다.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하였다.(6행)'15대조 성한왕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신라로 내려왔고'...」
‘투후 제천지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투후의 후손”이란 뜻인데, 투후란 작위는 중국 역사서에서 오직 단 한명 휴도왕(휴저왕)의 태자로서 한나라에 끌려갔던 김일제가 죽기 직전 한나라에서 받은 제후의 이름이라고 합니다.위 비문으로 본다면 당시 신라 왕실은 투후를 왕실의 선조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중국에 있는 투후 김일제의 동상>
한나라 무제는 망하리의 난을 평정 후 이에 공이 있던 김일제에게는 그(무제)의 사후 투후로 봉하라는 유조를 내리고 김씨성도 하사하는데 이후 투후는 그의 후손들에게 이어지게 됩니다.하지만 김일제의 후손들은 이후 신나라 왕망과 외처관계로 연결되면서 후에 후한을 세운 광무제에게 척결되고 이후 김일제의 후손들은 중국 역사문헌 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투후를 신라 김씨의 선조라고 여기는 비석은 중국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1954년 중국 섬서성 서안 동쪽 교외 곽가탄에서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이 발견되었는데 김씨는 재당 신라인 김공량의 딸로 김씨의 유래와 김씨 부인의 선조, 부인의 품행과 생활상, 죽음과 후사 등이 기록되어 있이 새겨져 있습니다.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 적힌 비문>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世祖)시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서 온천하에 만연하니 이미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磾)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그를 발탁해 시중(侍中)과 상시(常侍)에 임명하고 투정후(秺亭侯)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처럼 문무왕릉비나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 따르면 당시 신라인들은 신라왕실이 투후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나 현재 한국의 강단 사학계는 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김일제'와 관련된 문자자료가 특수한 것은 사실이나 학계에서는 이 기록 자체를 숭조사업의 일환으로 본다는 견해인데 김알지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등에서 신라 김씨의 시조로 기록된 통상적인 역사상식과 전혀 달리, 김씨 흉노설은 1961년에 문무왕릉비의 비석 하단이 발견되고 잇따라 2009년에는 비석 상단마저 발견되면서부터 의혹의 중심이 되어왔던 것으로 비문의 내용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김씨왕족들이 자신들의 선조의 권위를 과장하기 위해 내세운 허구적 조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또 한편으로 삼국통일 과정에서 당나라의 협력을 얻어내기 위해 자신들의 선조를 중국 한나라 투후의 자손이라고 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강단 사학계의 입장은 당시 김일제는 이민족으로 중국에서 출세한 입지전적인 위인으로 중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이미 유명한 대상이었고, 원래 숭조사업을 벌일 땐 자신의 성씨와 행색과 비슷한 출신지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 섬기는 게 일반적이라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게다가 신라 김씨가 다른 흉노족도 아니고 이민족 출신으로서 중국 황제를 섬긴 김일제를 조상으로 내세운 것은 중국과 대비되는 북방민족으로서의 흉노족의 후손을 나타낸다고 볼 수 없고 오히려 해석하기에 따라 한나라 입장에서 김일제처럼 이민족인 신라가 중국 황제가 주도하는 국제질서에 따르겠다는 사대주의로 해석할 수도 있기에 민족주의적 입장에서는 더더욱 따르기 힘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KBS의 역사 다큐이후 재야 사학계와 많은 일반인들은 한국에서 출토된 북방계열의 유물들을 보면서 신라 왕실이 흉노족의 후예라는 설을 지지하고 있으나 강단 사학계는 재야 사학계가 주장하는 위 흉노족 신라왕족설에서 흉노의 유물이라고 열거한 유물에 내포된 객관적인 사실은 "북방계통의 영향을 받았다"까지라는 것이고 이런 주장을 뒷 바침할 아무런 문헌적 고증이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 신라 왕실의 흉노 기원설은 문무대왕릉비와 대당고김씨부인묘명외에는 어떠한 자료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재야 사학계가 이 둘을 가지고 신라 왕실 흉노 기원설을 주장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오히려 강단 사학계의 연구 결과(사료나 유물분석)로 볼시 신라 왕실의 숭조사업이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견해는 약간 다릅니다.과연 신라 왕실이 숭조사업을 위해서 흉노족에서 한나라로 귀순한 투후라는 인물을 과연 선조로 내세우는 것이 무엇이 그리 영광스러울까 하는 점이죠.강단 사학계에 주장하듯이 숭조사업이었고 중국측과의 관게 걔선을 위한 것이었다면 오히려 한족 출신의 왕족출신(춘추전국시대의 왕족들) 후예라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신라 선조중 한명인 박혁거세는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가 낳은 알에서 출생했고 석탈해는 《삼국사기》에 수록된 석탈해 설화에 따르면 본래는 다파나국(多婆那國)출신으로, 그 나라 왕이 여국(女國) 왕녀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임신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는 일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알을 버릴 것을 명했고, 왕비는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싸 궤 속에 넣어 바다에 떠내보냈다고 나와있고 김알지는 삼국사기에 금빛의 작은 함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다고 재상 호공이 보고하자, 왕이 직접 가서 함을 열어보니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와서 이때부터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하고, 아이는 금함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고 합니다.이외에도 고구려 고주몽의 탄생설화 역시 난생설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처럼 당시에는 왕조의 시조는 하늘의 자손이란 선민 사상이 강했기에 자신들의 선조를 천제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지 일개 흉노의 귀순 제후를 왕실의 선조라고 일부러 말하는 것이 과연 어떨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역사서를 쓴다는 것은 매우 엄중할 작업이기에 허투른 글을 절대 쓸 수 없습니다.이 것은 과거도 마찬가지여서 특히 중국 24서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사마천은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가치 판단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 사실 그대로를 담담하게 서술하려는 태도를 역사의 실제 모습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중국의 문화를 받아드린 삼국에서 역사관 역시 중국 사마천의 역사관을 받아 들였을 것인데 문무대왕의 능비에 과연 허무맹랑한 말을 적어 놓을 수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네요.
만일 당시 문인들이 실제 역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글귀를 왕릉의 비석에 새겨놓았을 거라고 후세 사가들이 생각한다며 동일한 논리로 광개토태왕비 역시 당시 사람들의 허구라고 말해도 어떻게 반박할지 궁금해 집니다.
물론 오랜 기간 연구한 강단 사학계의 견해가 맞을 수도 있지만 이 것과 관련되서 더 많은 논의와 연구가 이루어 졌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by cas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