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문학은 있다, 그래서?
순문학과 추리소설 자체를 일대일로 비교하는 건 상당히 거대한 프로젝트기 때문에, 여기서는 박세회 씨가 범한 오류 및 그가 오해하고 있거나 편견으로 써내려간 부분들에 대해서 짚어보기로 한다.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추리소설’이라는 협소한 범위와, <죽이는 책>에서(그리고 여타의 관련 이론가들이 주로 말하는) 범죄소설(혹은 미스터리 소설)이라는 큰 틀, 그리고 통칭 ‘장르문학’이라고 일컫는 범주 자체를 완전히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박세회 씨의 글이 대단히 미숙하게 읽히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범주들을 혼동하며 편의적으로 단어를 바꿔가며 사용하기 때문에, 이 범주들을 확실하게 인지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당황스러운 글일 수밖에 없다(‘대체 이 사람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세 가지 범주가 워낙 글에서 자주 혼용되었기 때문에, 초보자에게는 다 그게 그거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대략적으로 연구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큰 틀로 얘기하자면, 추리소설(혹은 탐정소설이라고도 한다)은 대개 19세기 범죄소설 초기 단계에 확립된 형식, 즉 탐정이 나오고 살인사건을 수사하여 범인을 밝혀내는 과정에 집중하는 소설을 뜻한다.
이후 탐정이 아닌 범죄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거나, 심지어 탐정이나 경찰, 형사가 악당 범죄자로 등장하는 소설들로 확장되면서 더 이상 범인 찾기 과정이 아닌 범죄 자체가 중심에 서고 범죄의 핵심에 다가서는 과정 혹은 그 범죄를 둘러싼 컨텍스트까지 다루는 작품들(여기서 바로 박세회 씨가 분개하는 페터 회의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이라든가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존 쿳시의 <추락>까지 포함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을 뜻한다.
장르문학으로 말할 것 같으면, 범죄소설과 SF, 판타지, 호러, 로맨스 등 특정한 형식과 공식을 갖추고 있는 세부 분야 문학들을 한꺼번에 아우르는 세계, 순문학과 대비되는 특성을 가진 세계를 편의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이 개념 역시 20세기 넘어와서 생긴 세부 항목들이며, 박세회 씨가 츠베탕 토도로프의 <담론의 장르>를 읽는다면, 19세기까지만 해도 시와 소설이 ‘장르’로 구분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장르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그것은 아주 간단히 말해서 다른 장르에서 유래한다. 새로운 장르는 언제나 하나 혹은 여러 개의 옛날의 장르가 반전, 이동, 조합함으로써 변모한 것이다. 오늘날의 <텍스트>는 <시>와 19세기의 <소설>에 힘입고 있다. 그것은 <최루극>이 18세기의 희극과 비극의 특징들을 합성한 것과 매우 유사하다. 장르가 없는 문학이 존재한 적은 없었으며, 그것은 항구적인 변화를 겪는 하나의 체계이다.” 내 말은, ‘장르문학’에 그토록 경멸감을 담아 발음하기 전에, 시와 소설 역시 극작품에 비교되는 ‘장르’로 불렸다는 걸 떠올린다면, 20세기의 장르문학 역시 어떤 특정 체계를 중요하게 받아들인 문학의 한 갈래라고 보는 시선에 좀 덜 불편함을 느끼지 않까 하는 것이다).
박세회 씨는 순문학을 옹호하는 근거 중 하나로, 작가들 본인이 자신의 작품이 추리소설로(정확하게는 범죄소설로, 라고 쓰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읽히는 걸 거부했다 점을 들고 있다. 너무나 명백하게도, 그들의 작품이 범죄를 둘러싼 해결(혹은 미해결에 이르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은 범죄소설이 맞다. 특히 <내 이름은 빨강>에서 그림 속 말의 찢어진 콧구멍으로 살인사건의 단서를 찾아내는 과정, 화가들이 살인범 동료를 찾아내는 과정은 그야말로 ‘수사’ 이외의 무슨 단어로 부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내 이름은 빨강>에 그런 수사-탐색-깨달음의 과정이 들어있다고 해서, 그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며, 추리소설 팬들이 그에 대해 딱히 크게 자부심을 가질 것도 없다. 그건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하는 서사의 한 갈래일 뿐이다. 파묵은 그 같은 서사 구조를 가져와서 풍성한 여담을 곁들이는 이야기를 만들었고, 범죄소설 작가들은 그 같은 서사 구조를 가장 핵심에 둔 채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내 이름은 빨강>이 <죽이는 책>에 포함된 작품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박세회 씨가 굳이 이 작품을 넣은 것은, 그가 생각하는 순문학이 추리소설로 오독된 중요한 예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마지막에 살인자의 정체가 밝혀지는 <내 이름은 빨강>이 추리의 서사구조를 택하지 않았다는 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박세회 씨는 “대부분의 추리소설은 독자들이 계속해서 던지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상상했던 일이 원치 않는 타이밍에 들이닥치며 생기는 그 쾌감을 버리고는 '좋은 추리 소설'이 성립될 수 없다”고 했는데, 이것 역시 그가 설정한 추리소설의 범주에서는 틀린 말이다. 아마도 범죄소설의 또 다른 갈래인 스릴러를 생각하며 쓴 것 같은데, 기본적으로 추리소설 자체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누가 그랬는가(후더닛)’에 대한 질문, 즉 과거를 탐색하는 이야기다. 볼테르의 짧은 글 <자디그>가 그런 예이며,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역시 스스로 탐정 노릇을 자처한 오이디푸스가 결국 자신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탐색의 ‘경이’에 단단히 기반한 작품이다. ‘좋은 추리소설’은 누가,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인물과 방식을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다시금 책을 뒤적거리게 하는 그런 작품이다. 박세회 씨가 말한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는 아마도 ‘누가 범인인가’를 빨리 알고 싶다는 뜻으로 썼을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이건 추리소설의 구조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로 대단히 주관적으로 쓴 문장이다. 적어도 순문학의 입장에서 추리소설을 꾸짖기 위해서라면, 그는 ‘순’문학의 ‘순’이 무엇인지, 추리소설의 역사와 구조가 무엇인지 정도는 파악하고 써야 하는 게 맞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장르라는 규칙 혹은 형식은, 기본적으로 ‘이야기’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틀거리가 다듬어지고 좀 더 많은 이들이 흥미를 갖고 읽을 수 있게끔 굳어진 세부 갈래들이다. 박세회 씨가 글에서 되풀이 사용한 방식을 흉내내보자면,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의 줄거리, ‘여자와 남자가 만난다-둘 사이에 오해가 쌓인다-여자는 또 다른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지만 결국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는다-여자는 애초에 오해했던 남자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고 그와 사랑을 맹세한다’에서,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로맨스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가? <오만과 편견>의 핵심 축은 로맨스이며, 제인 오스틴은 남녀간의 로맨스를 통해 자신만의 정교한 세계를 구축했다. 20세기에 장르문학의 한 갈래로 굳어진 로맨스소설의 모습과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 많이 달라보이겠지만, 로맨스 자체의 구조는 동일하게 취하고 있다. <롤리타>에서 험버트 험버트와 퀼티의 관계는 무엇인가? 절대적으로 소중한 연인 롤리타를 자신으로부터 앗아간 남자를 총으로 쏘아 죽인다. 사람살려, 살인이야! 그리고 그 범인은 일인칭 화법으로 길게,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내가-이것을 저질렀는가’(와이더닛)라는 범죄소설의 구조를 택하지 않았단 말인가?
박세회 씨가 화가 났다며 인용하는 <죽이는 책>의 서문에서, 엮은이 존 코널리와 디클런 버크는 “범죄를 제거하고 난 뒤에도 파괴되지 않는 소설은 범죄소설이 아니며, 범죄 요소를 없앨 경우 무너져버리는 소설이 범죄소설이라는 공식”을 언급했다(박세회 씨가 언급한 “장르소설과 순문학 사이의 경계는 몇몇 이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렇게 선명하지만은 않다”라는 문장 바로 앞에 이 문장이 있다는 건 잊은 것 같다.) <죽이는 책>은 범죄소설이 순문학만큼(혹은 순문학보다) 우월하다라고 주장하기 위해 쓴 책이 아니다. 범죄소설 독자이며 열렬한 애호가이며 작가이기도 한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신이 좋아하는 범죄소설을 한권씩 추천하는 글로 이뤄진 책이다. 여기서 순문학에 대한 모욕을 감지했다고 생각하는 박세회 씨는,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존 코널리와 디클런 버크는 위의 문장에 이어 이렇게 쓰기도 했다.
“미스터리 장르 자체를, 그리고 위대한 글을 쓰도록 허락하고 북돋고 그리하여 위대한 문학을 탄생시키는 미스터리 장르의 능력을 묵살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그 속물근성 때문이 아니라,-물론 그 때문에도 비난받아야 하지만-소설의 본성과 그 안에서 장르가 점한 위치에 대한 근본적 몰이해 때문에 유죄 선고를 받아 마땅하다. (…) 미스터리 소설은 형식이자 메커니즘이다. 그것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도구다. 나쁜 작가의 손에선 형편없는 소설이 나오겠지만, 위대한 작가들은 미스터리 장르를 통해 마법을 창조할 수 있다.”
또한 다소 지엽적인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가 조르주 심농과 나보코프를 비교한 존 반빌의 글에 화를 낸 것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박세회 씨는 이 글을 기고한 <루엘>에선 “심지어 존 반빌이라는 작가는 호색한 조르주 심농을 나보코프에 견주며, 1955년 발표된 <롤리타>가 심농의 <판사에게 보내는 편지>와 매우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두 작품을 다 읽어본 나로서는 글을 쓰는 작가에게도 '문학'은 이렇게 오독되는가 싶어 가슴이 아플 뿐이다”라고 썼고, <허핑턴 포스트>에 기고한 글에는 이렇게 썼다. “호색한 조르주 심농을 나보코프에 견주며 1955년 발표된 <롤리타>가 심농의 <판사에게 보내는 편지>와 매우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롤리타>를 그저 십대 여자애를 쫓아다니는 홀아비의 얘기로 봤다니, 글을 쓰는 작가에게도 '문학'은 이렇게 오독되는가 싶어 가슴이 아플 뿐이다.”
일단 여기서 ‘호색한’이라는 작가 설명이 굳이 왜 들어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충실한 결혼생활을 누렸던 나보코프와 비교시키며 깎아내리기 위한 의도적인 단어 사용이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박세회 씨 본인이 <루엘>에 기고한 원문을 보면 두 작품 모두 읽었다고 썼는데, 영어판 혹은 불어판으로 접한 <판사에게 보내는 편지>(한국에는 번역되지 않았다)가 <롤리타>와 닮은 구석이 많다니 이런 오독이 없다고 흥분하기에 앞서, 본인이 분노했던 존 반빌의 에세이를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봤으면 좋겠다. 반빌이 에세이에서 지적한 점은, <롤리타>와 <판사에게 보내는 편지> 사이의 줄거리와 캐릭터의 설정, 그리고 끔찍한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어조의 유사성이 흥미롭다고 하는 구절인데, 아니 그렇다면 <롤리타>를 읽지 않은 사람에게 <롤리타>의 줄거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어린 시절 사랑했던 소녀가 죽은 뒤 그 소녀의 이미지에 고착된 중년 남자가, 그 소녀와 꼭 닮은 소녀 롤리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녀의 곁에 있기 위해 소녀의 엄마와 결혼하고, 결국 엄마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그 소녀를 자신의 연인으로 삼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다가 비극을 맞는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래도 박세회 씨는 영어판 혹은 불어판으로 접한 <판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얼마나 나쁜 작품인지에 대해 나보코프의 열렬한 애호가이기도 한 존 반빌에 대항할 만큼 반론을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박세회 씨가 존 반빌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아, 위키피디아의 존 반빌 항목 가장 앞 문단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는 점을 굳이 알려드린다. “Recognised for his precise, cold, forensic prose style, Nabokovian inventiveness, and for the dark humour of his generally arch narrators, Banville is considered to be “one of the most imaginative literary novelists writing in the English language today.” He has been described as “the heir to Proust, via Nabokov."”
제임스 M 케인의 소설보다 ‘15년이나 앞선’ 버지니아 울프를 읽으라고 하는 것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비교다. 케인의 소설에 대한 조셉 핀더의 에세이는, 케인이 특정한 목소리를 소설에 부여한 최초의 작가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 목소리가 어떤 목소리이며, 그것이 소설의 형식과 공명하며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키냐는 부분을 지적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서 왜 갑자기 “버지니아 울프라는 신경증적인 여자와 주정꾼이었던 윌리엄 포크너”의 ‘목소리 소설’을 읽으라고 주장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당연히 문학에서 ‘목소리’는 중요한 문제인데, <죽이는 책>에 언급된 케인의 소설엔 ‘완전히 무지랭이는 아니고 적당히 사리분별과 두뇌 회전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천박함을 숨기지 못하는 그런 남자, 여타 지역의 노동자 계층과는 조금 다른, 미 서부에서만 들을 수 있는 그런 남자’의 목소리를 선명하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이다. 거기에 왜 영국 지식인 계층의 대표적인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를 끌어들이는지, 참으로 뜻밖이다.
나에게는 노벨문학상 수상작품(그가 예로 들었던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과 존 쿳시의 <추락>도 여기 포함된다)을 읽을 때 느끼는 즐거움과 추리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즐거움이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그것은 잘 쓰인 이야기,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어떤 테마가 나에게도 선명하게 와 닿는 이야기, 되풀이 읽으면서 새로운 지점을 발견하는 즐거움인 것이다. 나는 애거서 크리스티와 존 르 카레와 제임스 엘로이와 레이먼드 챈들러와 G. K. 체스터턴와 엘모어 레너드를 읽을 때 느끼는 즐거움과, 제인 오스틴과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스콧 피츠제럴드와 오르한 파묵과 표트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을 때의 즐거움이 다르지 않다. 모든 잘 쓰인 이야기에는, 배울 수 있는 지점이 있고 즐길 수 있는 지점이 있다. 그걸 모르는 이들이 안타깝긴 하지만, 잘 모르기 때문에 용감하게 ‘순문학을 신처럼 경배한다’라고 하면서 ‘추리소설’을 깎아내리는 글을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성찰적 독서의 레이어’를 포기할 수 없다면, 범죄소설 중에서 그 같은 복잡하고 섬세한 레이어를 갖추고 있는 작품들을 찾아 읽어보면 된다(SF작가 테드 창과 배명훈을 여기 끌어들인 건…그냥 실수라고 믿고 싶다). 추천해달라고? 이미 <죽이는 책>에 많은 작품들이 추천작으로 들어있다. 혹은, 범죄소설 중에서 그 같은 레이어가 존재하지 않다고 믿는다면……..그렇다면 박세회 씨는 사실상, ‘미스터리 소설과 외도를 벌였다’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민망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호색한 조르주 심농을 비난하면서 왜 본인은 외도를 즐기는가? 순문학과 충실한 사랑을 나누면 된다) 그건 마치, 셜록 홈즈 시리즈로 처음 미스터리에 입문하고 그것만 읽은 상태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왜 범죄문학이라 부를 수 있는지 설명하겠다고 덤비는 경우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박세회 씨는 “1999년에 `나는 떠난다'로 공쿠르 상을 수상한 장 에슈노도 누가 봐도 추리소설인 작품으로 상을 타 놓고는 자신은 추리소설 작가가 아니라고 발뺌한 바 있다. 추리소설 또는 장르소설 작가들로서는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이게 현실이다”라고 썼는데, (일단 장 에슈노가 아니라, 장 에슈노즈다) 추리소설을 주로 쓰지 않았던 작가가 <나는 떠난다> 한편으로 추리소설 작가로 불린다면, 그거야말로 추리소설 작가들과 독자들에게 기분 안 좋은 일일 것 같다.
“순문학을 신처럼 경배하지만, 한편으론 가끔씩 소고기 스테이크를 탐하는 이슬람 신자처럼 미스터리 소설과 외도를 벌이기도 하는 나의 신념에 엮은이가 돌을 던진 격이다”라고 쓴 박세회 씨는, (이것은 <루엘>에서의 표현이며, <허핑턴 포스트>에선 ‘가끔 햄버거를 탐하는 '비건'으로 바뀌었다) 돼지고기가 금기로 되어 있지만 소고기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이슬람 신자의 마음으로 미스터리 소설을 즐겨 읽으신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내가 박세회 씨를 오해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정말 잘 모르겠다. 범죄소설 애호가들이 쓰고 범죄소설 애호가들이 읽는 <죽이는 책>을 읽고 발끈하면서 순문학을 신처럼 숭배한다며 순문학은 있다고 외친다는 건, 그만큼 순문학의 입지가 위태롭다고 생각하는 반증은 아닐지.
순문학은 있다, 라고 주장하기 위해선 순문학의 근본적인 토대가 무엇인지를 논하는 게 맞을 것이다. 추리소설과 비교하면서 계속 추리소설의 반대항 개념으로 순문학의 존재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강한 불안과 의혹을 지워내지 못하는 흔적 기관처럼 남게 된다.
다시 한 번 미안하지만, 박세회 씨의 마지막 문장을 조금 바꿔 말하자면,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를 공고히 하는 것은 순문학 추종자들이 아닐까 싶어진다. 나는 장르문학은 “순문학이 거둬들인 문학적 성취를 너무 늦게 흡수”하는 “장르문학을 걱정”한다는 박세회 씨에게,(추리소설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왜 장르문학으로 바뀌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아마 뒤에 배명훈과 테드 창 등의 SF작가들을 끌어오기 위해서 갑자기 넓은 범주가 필요해졌다고 생각한다) 그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가 걱정하는 것처럼 장르문학은 ‘인정’해달라고 떼를 쓰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에게 세대를 거듭할수록 새로운 즐거움과 영감을 주면서 그 세를 넓혀가고 있기 때문이다. 박세회 씨의 걱정은, 그저 그 자신의 불안이 아닐까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내 이름은 악마>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스타일’이 있는 것은 악마다.” 그리고 나는 그 스타일을 기꺼이, 열렬하게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