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기사를 보면 정말 언론은 살아있고, 기자 정신이란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슴아픈 일이 너무 많습니다.
국가의 행복은 국가의 행복, 개인의 행복은 개인의 행복.. 누군가에게는 불행
농민들이 입원한 전경들을 찾아가 손을 어루만졌던 것이 얼마 전의 일............



경찰, 본지 기자 집단폭행
입력: 2006년 05월 04일 18:14:56 : 17 : 13
 


방패로 찍고 발로 짓밟고 평택미군기지 이전지역 내 대추분교에 대한 강제퇴거가 집행된 4일 진압경찰들이 본지 사진부 김대진 기자를 방패로 내려치고 발로 짓밟고 있다. 이 사진은 김기자가 경찰들에 둘러싸여 집단폭행을 당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평택 미군기지 이전 시위현장에서 경찰이 취재기자를 집단 구타해 물의를 빚고 있다.

4일 오전 8시쯤 경기 평택시 팽성읍 대추분교에서 취재 중이던 경향신문 사진부 김대진 기자(34)가 경찰들에게 곤봉으로 머리를 맞고 이들이 돌을 던져 목 부위를 다쳤다. 김기자가 “경향신문 기자다. 누가 그랬느냐”고 신분을 밝혔는데도 경찰 5명은 “죽고 싶냐”며 김기자를 이 학교 별관 공터로 끌고가 방패로 찍고 발로 짓밟는 등 집단 구타했다. 이 과정에서 카메라 장비도 파손됐다. 이날 김기자는 경기경찰청(청장 어청수)이 미군기지 이전을 반대하는 시민단체 등을 진압하는 과정을 취재하다 변을 당했다.

한겨레신문 한겨레21부 길모 기자(29)도 대추분교 본관 건물에서 경찰의 방패에 맞아 이마와 발등을 다쳤으며 안경이 깨졌다. 이밖에 외국 모 통신사 사진기자도 경찰에게 주먹으로 얼굴을 맞아 상처를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경찰청은 “진상 조사 후 사실로 확인되면 합당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평택|최인진기자 ijcho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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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6-05-05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건 정말 보도사진이네요.
추천하고 퍼갑니다. :-)

마늘빵 2006-05-05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아휴. 막 욕나올라고 하네요.

라주미힌 2006-05-05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뽀뽀님/ 싸가지 없으면 패도 되나보죠? 싸가지 없는 얘들을 패는 선생, 싸가지 없는 자식을 패는 부모, 싸가지 없는 국민을 패는 정부. 싸가지 없는 국가를 패는 미국.
설령 폭력의 정당성이 있다치더라도, 폭력의 정당성을 이야기 하시려면 폭력적인 정권의 부당함부터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광주에서도 군인은 죽었습니다. 누가 더 다치고 죽는가... 수치상의 비교보다는 그러한 상황을 연출하게끔 만든 자들의 책임의 경중을 따지는게 맞다고 봅니다.
전경은 개인이 아닙니다. 공권력입니다.

승주나무 2006-05-05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뽀뽀님, 라주미힌 님//저도 기자 몇 분을 알고 있는데, 굉장한 권력을 휘두르며 이권을 취하는 '싸가지 없는 기자'가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중대 상황은 그 성격을 떠나서 '그 직업을 가진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할 만한 행동을 하였느냐가 문제입니다. 싸가지 없는 기자가 위의 보도를 했다고 해도 그의 '싸가지없음'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위의 전경들은 공권력에 기대서 기자를 폭행하였고, 그들이 싸가지 있는지 없는지와는 무관하게 그들은 '불필요한 폭력과 폭언'을 했습니다. 마치 군부대와 경찰 부대 내에서의 가혹행위에 물든 행동 같습니다.
결론은 담뽀뽀님과 라주미힌 님이 이야기하는 지점이 조금 다르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싸가지 없는 기자를 알고 있는 저로서는 양쪽 의견에 모두 동의할 수 있습니다

2006-05-05 15: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5-05 16: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06-05-05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 님//ㅎㅎㅎ
 
 전출처 : 조선인 > 평택 국방부 강제대집행 항의하러 가기-오늘 정오 사이버시위 예정

오늘 정오에 사이버 시위가 있습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국방부 게시판 : http://www.mnd.go.kr/cms.jsp?p_id=00106030000000&dummy=1146569110843

국무총리 게시판 : http://www.opm.go.kr/warp/webapp/bbs/list?meta_id=freebbs

청와대 게시판 : http://www.president.go.kr/cwd/kr/bbs/bbs_list.php?meta_id=free_b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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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싱키 프로세스’, 한반도 적용에는 무리
   

긴 시간과 내부 反체제세력이 필요조건,
북한과 진정한 협의 기대 못해


북한의 인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 동구권의 자유화와 소련붕괴에 기여했던 ‘헬싱키 프로세스(Helsinki Process)’를 북한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 허드슨연구소의 마이클 호로위츠 선임연구원은 지난달 23일 워싱턴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미 국무부가 북한문제를 접근함에 있어 6자회담을 포기하고 헬싱키식 접근을 추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밝혀 주목을 끌었다.

그는 “미 국무부 내에서는 북한문제와 관련해 지난 1975년 서방이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에 자유와 인권문제를 압박, 공산체제를 무너뜨리는 근거로 사용했던 헬싱키선언과 그 접근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문제로 논란이 있었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반면 현재의 6자회담방식은 헬싱키 접근과는 달리 김정일을 자극하거나 소외시키지 않고도 북한의 인권문제를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실제 지난 2004년 제정한 ‘북한인권법’에서 헬싱키선언을 가능하게 했던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와 같은 국제협력체의 설립을 제안한 바 있다. 북한인권법을 발의한 샘 브라운백 상원의원이 미국 헬싱키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다는 사실도 이 같은 점을 반영한다.

헬싱키 접근이란 단순히 말하면 인권문제를 국가간 모든 현안에 결부시켜 해결한다는 것을 뜻한다. 인권문제가 개선되지 않을 경우 인권조항을 근거로 상대국가에 대한 압력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식은 실제 효력을 발휘하기까지 수 년에서 수십 년의 긴 시간이 걸리며 독재정권 내 반체제세력의 존재를 필요조건으로 하고 있어 북한의 상황에는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또한 헬싱키선언은 당시 국제관계의 현상유지를 원하는 미국과 소련의 공통된 이해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데 한반도에 적용될 경우 남북분단이 더욱 장기화될 위험성이 있다.

그렇다면 헬싱키선언의 역사적 배경과 과정은 무엇인가. 헬싱키협약은 미국과 소련을 포함한 유럽국가 35개국이 참여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가 1975년 8월 헬싱키에서 채택한 국제협약을 지칭한다. 헬싱키프로세스란 이 협약을 이행하면서 진행된 동유럽공산국가들의 해체과정과 1991년 완성된 소련 공산주의의 붕괴를 말한다.
◇미국 포드 대통령이 1975년 8월 역사적인 헬싱키협약에 서명하고 있다

미·소를 위시한 유럽 35개국이 1972년 CSCE를 창설하고 3년간의 논의를 거쳐 헬싱키협약에 합의할 수 있었던 것은 참여국가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소련은 1968년 체코를 무력으로 침공하며 친소정권을 수립함으로써 국제적 비난에 직면해 있었고, 1969년에는 중국과의 국경분쟁이 발발하면서 동쪽으로는 중국과의 대치상황에 처해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7차 5개년 계획(1959~ 1965년) 기간부터 경제성장률이 10% 이하로 떨어지고 계획경제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동유럽국가에 대한 영향력 유지에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한편 미국은 프랑스의 독자적 노선 추구에 따른 유럽에서의 영향력 감소, 월남전 실패에 따른 국내적 제약 등에 따라 유럽에서의 새로운 안보기구의 탄생을 바라고 있던 상황이었다. 특히 새로운 협력체를 통해 동서유럽의 접근기회가 증대될 경우 자유민주주의 가치가 공산주의에 대해 승리할 것을 믿고 있었다.

미국이 군사, 안보, 경제, 사회문제 분야를 망라한 헬싱키협약에 인권조약을 넣은 것은 소련이 1968년의 체코 및 1956년의 헝가리 봉기나 시위 같은 것을 앞으로는 탄압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에 하벨이나 바웬사 같은 지도자가 헬싱키협약에 들어 있는 인권조항을 이용하여 공산 전체주의를 반대하는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한편 소련이 인권조약에 찬성했던 것은 동반된 안보협약을 통해 2차대전이후 새로 책정된 폴란드 등 동구 공산국의 국경선을 서방으로부터 보장받으려 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서유럽은 국경선을 보장하는 대신 인권조항을 삽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소련은 물론 당시 인권조약이 자국의 반체제 세력과 동구권국가 내의 자유세력에게 막대한 힘을 실어 주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소련은 이후 CSCE국가들이 소련의 인권문제를 문제삼을 때 마다 ‘주권존중’과 ‘내정불간섭’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인권논의를 차단하려고 했으나 외부적 압력과 국가 내부의 시민단체들의 조직적 대항에 결국 무너져내리고 만 것이다.

이와 같이 헬싱키 접근을 북한에 적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상황과 배경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북한의 경우 동구권의 붕괴를 가져온 내부 반체제세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북한의 경우 진정한 협의를 기대할 수 없다. 긴 시간에 걸쳐 협약을 맺더라도 그것은 언제라도 당장 어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등 북한의 남북합의의 일방적 파기는 상식처럼 돼 왔다.

물론 향후 북한과의 협상에서 협상의제로 인권조항을 넣는 노력은 필요하며 그러한 일차적 의미에서의 헬싱키 접근은 바람직하다. 다만 문제는 남북분단을 고착시킬 수 있는 현상유지를 위한 협약, 긴 시간의 협상과 이행의 점검과정, 인권조약을 통한 북한내부세력의 봉기 등은 현재의 한반도에서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출처 : 미래한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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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라 왕은 결국 인상여와 함께 무서운 진나라로 가기로 했다. 염파 장군은 국경까지 따라와 배웅하고 왕과 헤어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왕께서 가시는 거리를 헤아려 보면, 서로 만나 회담하는 예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는 30일 이상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30일이 지나도 돌아오시지 못하면 태자를 왕으로 삼아 진나라가 조나라를 차지하려는 망상을 끊도록 해주십시오."

왕은 이 의견을 받아들이고는 드디어 진나라 왕과 면지에서 만났다. 진나라 왕은 술자리가 흥겨워지자 이렇게 말했다.
"과인은 조나라 왕께서 음악에 뛰어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거문고 연주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조나라 왕이 거문고를 뜯었다. 진나라 사관이 나와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 진나라 왕이 조나라 왕을 만나 술을 마시고 조나라 왕에게 거문고를 연주하도록 했다."
그러자 인상여가 앞으로 나와서 이렇게 말했다.
"조나라 왕께서는 진나라 왕께서 진나라 음악을 잘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분부(옹기로 만든 악기)를 진나라 왕께 올려 서로 즐길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진나라 왕이 화를 내며 받아들이지 않자, 인상여는 앞으로 나아가 분부를 바치며 무릎을 꿇고 진나라 왕에게 청했다. 진나라 왕이 여전히 분부를 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상여는 이렇게 말했다.
"저 상여와 왕의 사이는 다섯 걸음도 못됩니다. 저 상여는 목의 피를 왕께 뿌려서라도 요청할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진나라 왕의 주위에 있던 신하들이 상여를 칼로 찌르려고 했으나 상여가 눈을 부릅뜨며 꾸짖자 모두 뒤로 물러섰다. 진나라 왕은 하는 수 없이 조나라 왕을 위해서 분부를 한 번 두드렸다. 상여는 뒤를 돌아보고 조나라 기록관을 불러 다음과 같이 적도록 했다.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 진나라 왕이 조나라 왕을 위하여 분부를 쳤다."
진나라 신하들이 말했다.
"조나라의 성 열여섯 개를 바쳐 진나라 왕의 장수를 축복해 주십시오."
인상여가 또 말했다.
"진나라 수도 함양을 바쳐 조나라 왕의 장수를 축복해 주십시오."
진나라 왕은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조나라를 이길 수 없었다. 조나라 역시 많은 군대를 배치시키고 진나라에 대비하였으므로 진나라가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 『사기열전』, 「임파ㆍ인상여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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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孔子)가 타고 다니던 말이 어느날 한 농부의 밭으로 들어가 농작물을 망쳐 버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농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말을 끌고 가 버렸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누가 가서 말을 찾아오겠느냐?” “제가 가서 찾아오겠습니다.” 말재주가 좋다고 소문난 제자 자공(子貢)이 선뜻 나섰다.

그러자 마부도 함께 나서서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말을 잘 지키지 못해서 생긴 일이니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그래도 자공이 가는 것이 좋겠다.” 공자의 말에 자공이 휘파람을 불며 농부에게 갔다. 하지만 자공이 손이 닳도록 빌고 설득해도 농부는 말을 돌려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농부의 손에 잡혀 있는 말고삐를 강제로 빼앗아 올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자공은 맥이 빠져 빈 손으로 되돌아왔다.

공자가 이번에는 마부를 내보냈다. 마부가 웃으며 다가가 농부에게 말했다. “당신이나 나나 다 같은 농부가 아니오. 내가 깜빡 조는 사이에 아무 것도 모르는 짐승이 밭에 들어가 저지른 일이니 한번만 용서하시구려. 따지고 보면 이 밭 곡식이 당신네 것인지 우리 것인지 말이 어떻게 분별하겠소.” 마부의 말을 듣고 나서 밭주인은 허허 웃으며 말을 되돌려 주었다.

이 일화는 ‘설득 심리학’ 교과서에 나올 법한 실례다. 선비인 자공보다 배우지 못한 마부가 더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유유상종의 심리가 작용한 셈이다. 자공이 마부와 똑같은 말을 해도 농부는 설득되지 않았을 개연성이 크다.

- 경향신문 김학순 칼럼

출처 : http://blog.khan.co.kr/97dajak/5093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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