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우석훈 지음 / 녹색평론사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신혼여행 비행기 안에서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옆에 앉은 친구가 공부하러 왔느냐고 타박을 하였지만 요 재미있는 주제를 재미있게 요리하는 경제학자의 마지막 글귀를 미루고 싶지 않아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잠 대신 책을 청했다.

내가 FTA를 만나는 경로는 대충 이렇다. 우선 지하철에서 매일같이 보는 전광판의 표어로 만난다. FTA는 우리의 선택이며, 정부는 반드시 성공적인 협상을 하겠노라는 다짐과 자신감이 간결하게 표시돼 있는 것을 보고 출퇴근을 한다.

그리고 신문 스크랩에는 따로 'FTA'라는 카테고리를 두고, 1차에서 4차까지의 표면적인 이야기들을 챙긴다. 해봐야 웬디 커틀러 대표가 내 고향 제주의 중문 초등학교를 방문했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를 듣게 된다. 좀더 깊이 있게는 격월로 찾아오는 녹색평론에서 요즘 중심 의제로 다루고 있다. 멀리 나프타의 이야기나 다양한 구성원의 관점에서 심층적으로 전개되는 논리는 나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하다.

FTA를 이런저런 통로를 통해 듣다 보면 아쉬운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정부의 장밋빛 선전은 물론이거니와 FTA 반대자들의 의견 또한 한쪽의 의견을 옹호하거나 치우쳐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FTA를 하면 세상이 반쪽이라도 날 것 같은 주장, 설령 정말 반쪽이 난다고 하더라도 위기감을 증폭시켜 폭력 투쟁 같은 과열 양상만 유도하기보다는 최악과 차악, 최선과 차선의 시나리오를 설정해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의 가이드를 만들어주는 것을 무척이나 기대한다. 협상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항상 남겨두기 때문에 그에 대한 다각적인 대비가 필요한데, 지금은 덮어놓고 안 된다는 논리만 펼치고 있으니 한편으로는 답답함이 느껴진다.

반대자들의 반듯한 논리가 납득할 수 있다고 하여도 협상의 과정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내용처럼, 우리가 예측하기 힘든 변수가 얼마든지 있기 마련이다. 이런 의미로 볼 때 반대 논리 그 자체는 너무나 외롭고 순진한 형세를 취하고 있다. 그것이 외롭지 않기 위해서는 논리와 함께 '지침'이 포함되어야 한다.

FTA가 한창 떠들썩할 때 공명심에서 'FTA국민보고서'라는 책을 구입했는데, 두꺼운 양에 기겁해 아직까지 보지 못하고 있던 차에 반가운 책을 만났다.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이하 '폭주')'는 단순 명쾌한 사고로 무장한 경제학자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담박한 필체로 현실을 그대로, 그리고 분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분량이 적절하다. 적절한 분량에서는 긴 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 헌법의 역사로부터 외국의 사례, 정부 의사결정 구조, 철학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간결한 어조로 서술하고 있다. 특히 FTA에 관한 필자의 의견보다는 사실 전달과 파생 효과에 대한 예견에 신경을 쓰고 있어 읽는이를 배려한 흔적이 보인다. 게다가 각 직업군에 대한 행동 방침을 챙겨준 세심함에 감사를 드린다.

이 책은 헌법과 다양한 협의 방식, 의사결정 구조 등에 관한 상식을 설명하며, 현재 진행되는 FTA가 이러한 상식에 많이 벗어나 있음을 역으로 증명하고 있다. 일단 시작하겠다고 다짐한 시점부터 그 다짐의 동인이 생긴 배경, 다짐을 현실로 옮기는 과정, 그 뒷 이야기들의 각 단계들을 분석하며 '황당한 관찰기'를 계속 쓰고 있다.

마치 노름빚 100만원을 빌린 사람과 정식 협상을 하면서 그 과정에서 노름빚을 갚아나가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 노름빚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둘만 아는 관계이다. 이면계약이라 할 수도 있겠다. 뭔가 캥기는 게 있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너무나 동등하지 못한 협상이다.

열린우리당을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당이라고들 한다. 열린우리당의 이러한 정신이 담겨 있는 참여정부의 FTA는 역시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협상이 되지 않을까 필자는 슬슬 걱정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정치' 빼고는 까막눈이라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FTA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정부의 관료들이다. 관료들은 오랜 동안 정부의 녹을 받으며 닦아온 노하우를 통해 정부를 조종하고 있다. 이것을 옛날 당나라나 한나라의 '환관정치'로 비유하면 딱 맞다. 황제 옆에서 오랜 동안 지켜보며 정치의 생리를 파악한 환관들이 정사를 좌지우지하는 내용이다.

필자가 이야기하는 가장 위험한 지점은 바로 '몰이해'이다. FTA를 진행하는 정부에서 협상국은 물론 우리의 실정에 대해서까지 매우 막연한 이해나 몰이해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에 협상은 백전백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기꾼들이 사기를 칠 때는 달콤할 정도로 좋은 말만 한다. 따라서 수익률이 기준을 심하게 넘어설 때는 일단 '사기'에 대한 의심을 가질 수 있다. 국가에게 좋은 말, 희망, 가능성만을 들은 나로서는 나의 조국을 '사기꾼'으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윌 듀런트라는 미국의 철학자는 현대의 철학이 단순히 '솔직'하기만 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체념했다. '진정성'이 매우 귀한 시대이다. 나는 누구보다 정부에게  FTA를 체결하면 나는 얼마를 손해보고 얼마를 더 지불해야 하는지 듣고 싶다. 그것이 정부가 나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이라 생각한다.

내가 얼마를 받고 어떤 기회를 얻는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을 뿐더러 미덥지도 않다. 이 책이 제안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균형'을 부여잡을 수 있다면 나는 정부의 어깨를 가볍게 하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균형'이란 쌍자협상의 일방적 관계보다 다자협상의 상호 견제적 관계를 선호하는 것이며, 쌍자 협상 내에서도 인적 교류나 무역 구제 등을 통해 양국이 일방적 폐해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를 두는 것이다. 정부가 총력을 펼치는 이번 협상에 국민들이 동의하지 않는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책임'이 없고 의지가 없고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책의 제목 글자인 '폭주'라는 말은 은유적으로 사용되었다.

비행기에서 책읽기를 마치고 졸고 있는 신부를 쳐다봤다. 내가 그에게 희망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는 나의 모든 행위 중 대단히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그에게 충분히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나의 존재 이유가 된다. 하지만 거기에는 매우 중요한 전제가 들어가 있다. '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나의 존재는 그와 나의 건강한 관계 안에서만 발현되는 것이므로 나는 나의 존재를 잃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여야 한다.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불확실한 미래형 수사는 내 신부의 현재의 행복을 위해 이쯤해서 책을 덮고 볼에 살짝 키스를 해주는 것에 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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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10-29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신혼여행 비행기안에서? 대단하셔요. 하지만 승주나무님 신부사랑 다 소문났네요. 부럽습니다. 알콩달콩 깨소금냄새가 풍겨요

비연 2006-10-29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혼여행 다녀오셨군요! 결혼 축하드려요^^

승주나무 2006-10-30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 님//언제 그런 소문이 다 났대요.. ㅋㅋ 뱅기에서 깎인 점수 벌충 좀 했지요~
비연 님//감사합니다. 이제 잘 살아봐야지요^^

최프랑치 2017-05-05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의 가치관을 철학적 사고가 있어야 통찰한다
미국식 인문학은 이성적 판단에 존재방식의 진행형이요 동양식은 관념적 통찰력에 판단이며 즉 디지털과 아날로그 또는 백터와 스카라 차이점이다.
다시 본건데 이성적 판단은 뇌의 의존도요 관념적 판단은 육보의 감각적 사고다.사람이 회의적으로 해탈적 사고로 사물을 관찰하며 움직인다,다시말해서 몸이 움직이는것은 지각하므로 유희한다는것이다.즉 사고가 먼저지 감각을 먼저라고 하지 않는다,우리는 사물을 만져보고 아 아름답다라고 하는것은 뇌가 먼전 판단했음을 알린다.만약 뇌가 행동이전에 행동이 앞선다면 정식적 착오로 정신병자가 된다.
지금우리는 미국과 강대국에 힘의논리에 우리의 뜻이 즉 의사결정 추론기관이 한국은 이미 죽은지 반세기가 되었다.아무리 강조해도 건축물처럼 보이도록 하는 감정적이 먼저요 이성적 판단이 결여되어 협상이 잘 되지 않는다.그래서 공공재인 선거로 참정권의 허울아래 국민을 속박하지만 이들 공공재를 무엇인지 알지못한사람들이 의사결정 대표자로 등극하며 매일 매체에 힘을얻어 조잘거린다.이북은 공공재 협상괴도인 무기 즉 핵을 보유하는 정당성을 들이대며 년간 수억을 벌어드린다,얼마나 회기 방식인가 우리보다 공공재 가치를 알 고 있는것이다.
공공재의 원천은 선거이다.미국은 모든사업의 원천은 비용원가방식이다.유럽은 조합이다.때문에 공공재의 가치는 후자인 가격기구가 아닌 생산의 품질과 노동의 지대가치에 둔다.이책을 보는 사람은 반드시 편익부문의 수요가없는것이므로 여러사람들의 의사결정이 수요이므로 협상기술이 기꺼이지불,수용방식이므로 유럽의 대안으로 가야한다
 

이 곳을 드나든지 얼마나 되었더라?
걍 눈팅만 하다가는 나도 반성을 깊이 해야겠지만....
이 곳이 언제부턴가 신명회님들의 이야기 공간이 아니라
경조사를 알리기 위한 공간으로 남아버렸네요...
가을 탓인가...
요즘들어 유난히 경조사 알림 문구가 나의 눈을 피곤하게 합니다.
^^
선배님들 비롯 후배님들까지 잘 지내고 계시죠?

선배가 옛 동아리 카페에 남긴 글입니다.

너무 부끄럽고 부끄러워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아래 선배님의 글귀에 정신이 번쩍 합니다.

누군가 글을 남겨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고,

선배님이 말씀하신 그런 것도 있었고,

누군가에게 연락을 한다는 것과

누군가를 찾는다는 것과, 특히 예전에 많이 알았던 누군가를 찾는다는 것이

그 사람을 위한 새소식인지, 그 사람에 대한 배반인지

그 경계를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이를테면 '밀레니엄 데이'를 비유합니다.

밀레니엄 데이는 1999년 12월 31일에서 하루가 지났다는 말이고, 평범한 일상이 지났다는 이야기인데

의미를 붙이고 붙여서 밀레니엄만큼 뻥이 커졌던 사건을 말합니다.

저의 경조사도 일종의 밀레니엄 데이로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의 '문학적 나이'는 신세대 졸업을 기점으로 멈춰 있습니다.

그 동안 저의 시간을 지배한 것은 흔히 입시에서 '비문학'이라고 하는

비문학적 나이였습니다.

오늘 이곳을 찾고, 이곳에 글을 남긴 것은 좀 다른 의미가 시작되는 것으로 생각해주셨음 합니다.

신세대 사람들에게 드디어 나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던 그 첫 이야기로 말입니다.

경조사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나의 소중한 동기가 남긴 글로 대신합니다.

부끄럽고, 고맙고, 행복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기분을 '문학적'으로 그리는 방법을 잃어버렸거나, 혹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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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가 운이 좋은 사람일까, 아베가 운이 좋은 사람일까?

고이즈미는 북한 위기 때 입신양명하여 우익세력을 입고 무대뽀 정신으로 정계를 뒤흔든 사람이다.

아베는 명문가의 샌님에서 '북한 위기의 기회'를 재빨리 캐치해 총리가 된 사람이다.

하지만 고이즈미는 천수를 누렸다.

정세는 어떻게 변화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아베가 참으로 위태로운 형국에 있다고 생각한다.

뉴스를 보면 어디든 아베가 요즘 잘 나간다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아베 정권은 그야말로 '북핵 정권' 아닌가.

북핵 정권이 무엇인가. 북핵이 만들어다준 정권이다.

북핵이 장기간 유지된다면 아베 역시 천수를 누릴 것이나,

정국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북한이 핵실험을 할 때도, 이전에 미사일을 발사할 때도 가장 큰 수혜자는 아베라고 한다.

이번의 경우에도 '야스쿠니, 과거사' 문제는 현안에서 제외된 것을 최대의 수익으로 보고 있다.

과연 그럴까? 다른 관점으로 보면 아베는 '북핵 정권'이라는 오명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이번에도 놓친 것이다.

북핵 정권이 유지된다는 것은 아베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다.

그것은 위기상황을 일신의 출세로 더럽혔다는 명예를 안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베야! 언제 진검승부를 해볼래?

부시가 대통령이 되면서부터 이 모든 상황은 예측한 대로 돌아가고 있다.

부시가 북한과 대화를 할까.

부시는 선천적인 기독교도로 선과 악을 명확히 알고 있으며,

정의에 대해서 어떤 철학자나 학자보다 분명한 개념을 가지고 있으므로,

악의 축은 영원히 악의 축일 뿐이다. 부시는 언제나 틀리지 않을 것이다.

설사 죽을 날이 오더라도 부시는 영원히 옳은 선택을 했고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다만 '부시 자신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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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14 1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06-10-15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님//님의 소회를 들으니 또 흥분되기 시작하는군요. 우익이 빛을 보는 시대가 온 걸까요~ 그렇다면 대중이 우매하다는 이야기 아닌가요.
암튼 잘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가끔 보내주시는 음악파일은 잘 듣고 있습니다.
 

나의 이야기는 언제나 그렇듯, 제목처럼 직접적이지는 않다.

제목을 자극적으로 쓰는 것은 어느 정도 의도된 일이기는 하지만,

자극적인 제목처럼 '유머'를 가장하기 제격인 것은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돈 버는 패턴이 두 가지가 있는데,

현대로 올수록 패턴이 전도되는 현상을 보게 된다.

하나는 돈을 앞에 두고 버는 형태이다. 말 그대로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는 패턴이다.

새마을 운동이나 지금은 사향산업이 되어 버린 경공업, 농업, 수산업 등 열심히 일해서 일한 만큼 양식을 얻는 방법이 돈을 앞에 두고 버는 형태이다. 이것은 매우 건전한 방식이고, 공무원들이 업무상 배임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은 돈을 '직분' 위에 둔 행위이므로 돈을 앞에 두고 버는 형태이다.

이와 반대로 돈을 뒤에 따르게 하면서 버는 방식이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돈을 너무 따르려 애쓰지는 않았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ㅣ

돈을 죽게 따라간다고 돈이 잡힐까? 그건 아니다.

10억 만들기, 3억 만들기 등의 책들은 마치 그것만 읽으면 3억이나 10억이 만들어질 것처럼 뻥을 치지만,

알고 보면 근면과 절약, 돈의 흐름 파악 등 재테크의 시시콜콜한 방법을 포장한 것에 다름아니다.

우리가 솔깃하는 것은 10억이나 3억이라는 단어이니 우리의 마인드는 이미 '돈을 따르는' 것이 아닐까.

돈을 뒤에 두고 버는 사람들은 '돈의 생리'를 아는 사람이다.

자존심이고 뭐고 접고 들어가면 상대가 재미없어 하듯,

돈을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돈을 잊어버리는 것도 아니다.

'돈'만 보다보면 '돈 버는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돈 버는 길'을 주시하고 있으면, 돈을 잃어버릴 리가 없다.

돈을 따르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은 '논어'를 들으면서 문득 생각해낸 구절이다.

"인자(仁者)는 즐겁게 인을 실천하고(樂仁), 지자(智者)는 인이 큰 이로움이라는 것을 안다(利仁)"
 - 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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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10-14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야. 결혼 준비는 잘 되가나? 책장은 어떻게 할건지 고민은 끝났나?^^

승주나무 2006-10-14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넹, 스텔라 누님.. 정신없이 보내고 있습니다. 책장은 좀 나중에 하려구요... 암튼 요즘 반성할 게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
누님에게도 섭섭하게 했던 것 있으면 용서하세요~
 
이현주 목사의 대학 중용 읽기
이현주 지음 / 삼인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내게 매우 매력적이다. 목사님이 경서를 읽는다는 것 자체도 그러하지만, 기독교리의 관점에서 문구를 해석하기보다는 '보편'에 다가가려는 노력이 매우 진정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주요 주석가들의 저술을 세심하게 인용한 점이 또한 특이하면서도 훌륭하다. 이것은 이현주 목사가 종교를 초월해 세상의 바른 도리를 얻고자 하는 간절한 열정이 읽히는 대목이다.

함석헌 선생은 인도의 경전인 바가바드기타의 주석서를 출간했다. 힌두어를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허름한 사전에 의지해 방대한 금언의 세계로 홀로 들어간 노고가 대단하다. 이러한 사상의 통합 정신은 선조에게 뿌리가 닿아 있다. 유불선(儒佛仙)을 '삼현(三玄)'이라 하여 몸소 익히지 않으면 정사를 제대로 펴지 못한다는 정신이 조선 시대의 선비들이 가지고 있던 지침이다.

이 사람들이 '정신에 대한 열정'으로 종파를 초월했다면, '실천에 대한 열정'으로 종파를 초월한 사람들도 있다. 바로 삼소회(三笑會)* 사람들이다. 삼소회는 불교의 비구니, 가톨릭·성공회의 수녀, 원불교의 정녀(교무) 등 각 종교의 여성 성직자들이 종교간 화해와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이다. 1988년 출범한 삼소회의 기도모임에서는 ‘자비로 충만하신 부처님’과 ‘사랑의 하느님’ ‘은혜의 본원이신 법신불 사은님’에게 각각 세번씩 모두 아홉번 절을 올린다. 비구니가 절에서 ‘아베마리아’ 노래를 연습하고 수녀가 수녀원에서 ‘찬불가’를 부르는 등 삼소회 회원들의 ‘퓨전 신앙’은 초기에는 적잖은 오해를 받기도 했으나 지금은 많은 일반신자들도 모임에 참석한다고 한다.

*삼소회 관련기사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02231759321&code=990201
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01101748191&code=960100

앗, 책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자꾸 뒷이야기로만 흘렀다. 어떤 종교가, 또는 종교들이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명쾌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으로 따진다면 모든 인간은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이 싸우는 것은 '보편'에 도달하기 위한 '각론'들이 달라서이다. 참여정부의 '취지'를 가리켜 비웃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그들의 '각론'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각 종교도 '궁극'으로 나아가기 위한 '각론'들이 있을진대, 사실 '각론'이 '본질'은 아닐까.

이현주 목사의 '보편'은 다른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보편'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이다. 종교를 '믿음'의 총화라고 한다면, 그 믿음의 시각을 다른 곳에도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종파 간에 문제가 되는 곳에서는 항상 '믿음'의 방향이 움직이지 않는다. 믿음의 방향이 움직이지 않을 때 종교는 물론 인간 세상 안에서도 꽤나 시끄러운 장면들이 많이 연출되는 것이다.

유학에서 꽤나 숭고하고도 심연이 보이지 않는다는 '인(仁)'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대목을 보자.

하늘은 사사로이 덮지 않고 땅은 사사로이 싣지 않으며 해와 달은 사사로이 비추지 않는다(天無私覆 地無私載 日月無私照)고 했다. (예기[禮記]) 이것이야말로 인의 본질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서 인은 그 자체로써 완전한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우스복음' 5:45, 48)(73)

대학이나 중용 등의 경서를 읽으면 여러 장의 소감이 나온다. 대학이나 중용 등을 해석한 책을 읽으면 또 여러 장의 소감이 나온다. 이 책과 같이 해석과 심사를 반반 섞어놓은 책을 읽으면 앞의 것들보다 더 많은 장수의 소감이 나와서 애초부터 이런 책은 리뷰의 관점을 잘 잡아야 하며, 읽는 분들도 관점을 잡고 읽어야 한다. 대학에 대한 내용은 어디든 주워들을 수 있으므로, 선현들께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이현주 목사의 이야기를 더 담아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글머리를 한참 돌린 후에 다시 무엇을 쓰겠다는 이야기인가. '수신(修身)'이라는 이야기 말이다.

대학에서는 수신이 배꼽이다. 인간사 모든 것이 거기서 나오고 그리로 돌아간다. (54)

대학에서 '수신'을 말한다면 단계의 시작도 끝도 아닌 중간의 지점이다. 수신의 속에는 나 외의 다른 사물을 동일시한다는 학문과 정신의 단계가 놓여 있고, 수신의 겉테두리에는 천하를 올바르게 재단하고 바로잡는 행위의 단계, 또는 입신양명 출세의 단계가 정해져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우주는 '수신'이라는 하나의 지점에서 모인다. 이를테면 서울의 시청앞 광장이나 광화문, 아니면 동작구 사당3동(우리 동네ㅋㅋ) 쯤 될 것이다.

이현주 목사에 따르면 '수신'은 지식이나 자기단속을 가지고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아니다. 선택적 순간의 대단한 용기와 직관적 사고가 필요하다. 지식으로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배웠다는 자들이 그 지식을 돈과 맞바꾸는 일에 이토록 태연할 수 있을까. 그들은 여러 날 배웠지만 '수신' 하나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들은 '돈'과 맞바꾸지 않는 법을 알지 못한다. 비위를 저지르고 평생 닦아온 길에서 낙마하는 사람들을 보고 "인생 참 아깝군." 하는 우리들보다 그 판사 양반들은 비위를 저지르는 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며,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대학 경문에서도 '수신'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지만, 수신에서 방점을 발견하고 그 관점으로 대학 경문을 파헤친 이현주 목사의 끈기도 쪽 바깥의 감동을 준다. 매우 간단한 '수신'이지만, 학자와 지식인들은 혼신의 지식으로, 일반인들은 '진정성'으로 도달하기에 배운 사람들에게 '수신'은 그만큼 먼 이야기이다. 일반인과 구분하려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지식을 가지고 그 위치에 있다면 그 지식에 맞는 '수신'의 값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이 살면서 무슨 일을 하든, 장사를 하든 정치를 하든 농사를 짓든 예술을 하든, 아무튼 그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일을 통해서 그가 이루어낼 마지막이 바로 '수신'이라는 얘기다. (171,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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