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선거이야기 - 1948 제헌선거에서 2007 대선까지
서중석 지음 / 역사비평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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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총선의 을씨년스러운 풍경

 

2007년 대선에 이어 2008년 총선도 최고로 재미없는 선거로 갈 것 같다. 표를 까보든 말든 이미 결론은 나왔다는 자조의 목소리가 들린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참여율이다. 14, 15, 16대 총선의 투표율은 각각 71.9, 63.9, 57.2%P로 뚜렷한 하강구도를 보이고 있다. MBC가 코리아리서치센터에 의뢰해 전국 19세 이상 성인 남녀 천명을 대상으로 4월 2일 하루 동안 조사한 전화설문(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 3,1%p, 응답률은 16.8%)에 의하면 이번 총선에서 "꼭 투표하겠다"는 응답이 60.5%로 저조했다. MBC는 지난 17대 총선 때는 선거 2주일 전 조사에서 꼭 투표하겠다는 답이 75.2%, 실제 투표율은 60.6%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번 투표율은 50%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4월3일 보도, MBC뉴스데스크) 정치인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이 투표율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역사적으로 장기집권에 대한 반감과 '뉴 페이스'에 대한 갈망을 표심으로 표현해 왔는데, 경제인 출신이라는 신선한 이력과 서울시장 취임이라는 금상첨화를 얻어 이명박 대통령은 가장 쉽게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앉아도 되고 누워도 된다'는 2002년 대선 당시의 이회창 측의 장담은 이명박에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무엇보다도 선거는 역사의 과정을 한땀한땀 채워가는 축제인데 마치 한판 대결로 세상이 다 끝날 것처럼 올인하는 정서는 입후보자나 유권자 모두에게 독이 되고 있다. 참고로 내가 투표할 선거구인 '강서갑'에 출마한 한나라당 구상찬 의원의 명함 앞면에는 큰 글씨로 이런 공약이 적혀 있다. "화곡 뉴타운 4년안에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조급증도 이러한 조급증이 없다. '정몽준 성희롱 의혹 사건'의 원인이 되기도 했던 정몽준 의원의 공약은 '사당 뉴타운 개발'이었다. 성희롱 피해를 본 기자의 질문은 "오세훈 시장은 사당 뉴타운을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었는데, 이 질문 직후에 정몽준 의원이 매우 엉뚱한 행동을 한 것은 그만큼 당혹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유권자들은 이번 선거에서도 정치인들이 파놓은 '말의 함정'에 빠져들지 않을지 걱정이다. 결국 남는 것은 '허언'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정치에 대한 불신은 더욱 높아지고 이것이 투표 참여율 하락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계속 만들어가고 있다.

얼마 전 정치학계의 스승인 최장집 선생은 노회찬 의원을 지지방문한 자리에서 "노 의원이 당선되는 일이 앞으로의 한국 정치 발전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서 절대로 필요한 사안이 됐어요. 한 사람의 의원이 당선되는 의미를 넘어서."라고 말했다. 매우 절박하고 매우 씁쓸하다. 이렇게까지 진보세력이 구석으로 몰렸는가.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역사 = 저자 서중석 선생의 인생
 

서중석 선생은 한국현대사 분야에서 매우 귀중한 인물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1948년에 태어난 점부터 의미심장한데, 신군부 시절인 1979년부터 1988년까지 10년간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다가 현재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로 교편생활을 하고 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을 하다가 현재는 고문으로 있는데, <대한민국 선거야이기>(역사비평사)는 2007년 봄부터 5회에서 걸쳐서 역사문제연구소 주최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5회에 걸쳐서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이화 선생은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웅진지식하우스)의 추천사에서 그를 '현대사를 바르게 쓴 역사학자'로 평가하면서 금기가 많은 현대사를 자기의 뚜렷한 주관에 따라 많은 연구 업적을 남겼다고 소개했다. 책 속에서도 그러한 분위기가 쉽게 읽히는데, 내가 볼 때 그는 '대중역사서의 표준문체'에 도달한 듯하다. 사관이 조선왕조실록 기록하듯 엄중한 것이 아니라 소설가가 자전적 이야기를 글감으로 삼듯, 그의 역사서는 '자전적 역사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저자의 사진(184쪽)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역사를 관통하는 과정 속에서 직접 경험했던 감상과 느낌을 스스럼없이 덧붙이면서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엄밀성 또한 놓치지 않으니 말이다. 이이화 선생은 앞의 추천사에서 "이승만,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의 역대 독재정권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도 감성으로 접근치 않고 객관적 공정성을 살리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하여 저자는 위리 정치사가 이렇게 추잡하고 막가면서 엮어졌다는 자학사관에 빠지지 않고, 우리 사회가 일정하게 발전해왔다는 긍정사관에 충실하였다"고 말했다.

이러한 지적 토대와 확신이 어디서 생기는지 궁금했는데, 그의 열정적인 사회 활동이 바로 그 열쇠가 아닌가 한다. 그는 역사교육연대 상임대표이고 한중일 공동역사교과서 제작작업에 한국 대표로 활약했다. 한창 '새역모'의 '역사교과서 문제'가 시끌시끌할 때였다. 뿐만 아니라 '제주 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며 잊혀진 '제주 4ㆍ3'의 현대사적 의미를 고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 보리출판사에서 출간된 <동백꽃 지다>에서 그는  '제주 4ㆍ3항쟁의 역사적 의미'라는 논문을 통해 이 문제의 역사적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했다.

<대한민국 선거이야기>라는 책을 통해 저자는 한국의 선거에 대해 일반인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결코 상식이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반대로 선거는 한국 사회를 바꿔놓는 데 대단히 역동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증명했다. 한국현대사에 몹시도 취약하다고 느끼는 사람이나 현대사가 더럽고 치사해서 보기도 싫다는 사람이라면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와 이 책 <대한민국 선거이야기>를 권한다. 

 

김대중의 머리, 김영삼의 뚝심, 조봉암의 가슴이라면..
 

장 자크 루소는 선거제도의 모순에 실망했던지 선거를 가리켜 "4년이나 5년에 한번씩 투표할 때만 주인과 자유인이 되고 선거만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가는 제도"라고 폄하했을 정도다. 한국의 오늘날도 사정은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어떻게 선거가 역사를 그것도 건강한 방향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것일까?

선거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를 대표하는 표현 수단이며, 구성원들의 모든 심리가 고루 반영된 '권력 나누기 게임'이라 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정치사에서는 구성원들의 욕구가 골고루 반영되지 못했다. 이승만 12년, 박정희 18년, 신군부 약 10년 도합 약 40년의 시간 동안 권력을 좀처럼 놓지 않으려는 세력들의 전횡에 시달려온 민심은 지역이기주의와 경제지상주의까지 보태져 정치문화다운 모습을 좀처럼 보여주지 못했다. 서중석 선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말하는 근거는 유권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독재자들의 전횡을 40년으로 단축시켰다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마치 선발투수가 6이닝을 3실점으로 막아낸 것처럼, 실점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퀄러티 스타트'를 한 것과 같다. 집권에 대한 욕망이 있다면 유권자들은 견제심리가 있고, 반대 세력들 역시 절박한 심리가 있다. 이들의 심리와 각 시대가 놓인 상황이나 조건이 '틈'을 만들어내는데, 그 틈 속에서 역설적이기도 하고 매우 희망적이기도 한 '역사적 사건'들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1971년도 국회의원 선거에서 혼쭐이 나는데, 온갖 회유와 책략에도 불구하고 민심은 변화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전체 의석 204석 중 공화당(박정희)은 113석, 신민당은 89석으로 개헌 저지선을 20석이나 상회했어요. 이제는 쿠데타 빼놓고 다른 방법으로는 장기집권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어요. 신민당은 임시국회도 단독으로 소집할 수 있게 됐스니다. 장관을 출석시켜 따질 수도 있게 됐어요. 역사상 최초의 균형국회가 탄생한 겁니다."(166~167쪽)

 
이런 변수 외에도 역사과정 속에서 중요한 변수는 역시 '인물'이다. 인물이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민심을 대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평가하는 역사적인 정치인을 세 명만 거론하면 조봉암, 김대중, 김영삼을 들 수 있다. 조봉암은 이승만의 집권 야욕과 자유당의 횡보에 맞서 민의에 충실한 정치인이었다. 제헌국회에서 초대 농림부장관을 맡아 토지개혁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고, 이승만의 극단적 반공정책에 정면으로 맞서 대항할 만큼 배포가 대단한 인물이었다. 대선 과정을 통해서 국민보도연맹원 집단할살 같은 당시의 금기어를 건드리기도 하고, 이승만의 북진통일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평화통일을 주창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선거 국면이라는 공간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위협을 느낀 이승만은 '진보당 사건'을 조작해 간첩 혐의로 조봉암을 사형시켜 버리고 만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들의 정치적 전성기는 바로 '40대 기수론'을 들고 일어섰을 때의 시절이 아닐까 한다. 각각 박정희와 전두환 신군부의 서릿발에 맞서 선거판을 흔들고 대중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들이 활약했던 당시에는 유권자들이 투표할 맛이 났을 것 같다. 그들이 지나간 이후로 그만큼 뚜렷한 색채와 의기를 가진 정치인들이 등장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정치판의 흥행을 떨어뜨린 주요인이 되었다. 

 
<대한민국 선거이야기>는 현대사와 겹치는 부분이 많지만 하나의 독자적인 분야로 구분해도 좋을 만큼 특징이 있다. 저자는 단지 선거의 결과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선거의 당사자들이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또는 집권야욕을 깨뜨리기 위해 땀흘리고 뛰었던 열정적인 흔적들을 살펴보라고 강조한다. 역사와 마찬가지로 정치사 역시 부침이 있고 때로는 도도하고 때로는 격정적인 흐름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기도 하는 만큼 정치에 대한 무조건적인 불신은 '정치적 자해'에 다름 아니다. 어차피 죽을 때까지 정치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 흐름 속에서 시대적 요구를 포착하고 실책을 빨리 찾아내 대처하는 것이 관건이다. 정치는 승부이기 때문에 후보든 유권자든 경쟁력이 없으면 패배할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선거의 진정한 주인공인 유권자에 대한 이야기보다 정치세력에 대한 이야기에 편중돼 있다는 점이다. 하다 못해 투표율 비교 등을 통해 명백한 당대의 민심을 확인시켜 주었으면 좋을 텐데, 민심에 관한 기록은 추상적이기 그지 없다. 이 책의 소비자들은 대체로 선거에 입후보하기보다는 선거판을 관조하고 선택을 하는 유권자이기 때문에 유권자로서 영감을 얻을 수 있도록 배려가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책을 붙잡고 하루만에 다 읽었는데,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단지 선거의 역사인데도 이렇게 흥미진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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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08-04-10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메일링리스트에 실려왔더군요. 여전히 다작하십니다. ㅎㅎ 축하드려요~

승주나무 2008-04-10 17:10   좋아요 0 | URL
ㅎㅎ 그 기질이 어디 가나요^^

Jade 2008-04-14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승주님, 이주의 마이리뷰 당선이예요 ㅎㅎ 축하!

승주나무 2008-04-14 12:24   좋아요 0 | URL
ㅋㅋㅋ
감사합니다.
이 글 하나로 완전 신세 폈네요^^ 고맙고맙~

넷게릴라 2008-04-15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텍스트만큼 뛰어난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정말 성의있게 읽으신 흔적이 가득합니다.

승주나무 2008-04-15 15:19   좋아요 0 | URL
넷게릴라 님~! 정말 과찬이십니다.
성의있게 쓰려고 노력은 했는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노아 2008-04-15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주의 마이 리뷰군요! 축하해요. 인터뷰 하기 전에 힘을 실어주는 것 같아요^^

승주나무 2008-04-15 15:1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서중석 선생이 선뜻 허락을 해주셔서 정말 기뻤습니다. 나중에 정리해서 올릴게요~~

순오기 2008-04-16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운 이름이라 얼른 읽어봤어요. 리뷰당선 축하하고요, 리뷰를 통해 무딘 머리를 깨우치니 감사합니다!

승주나무 2008-04-16 11:38   좋아요 0 | URL
반가운 이름이라 말해주시니 정말 기쁘네요^^ 감사합니다.
저도 리뷰를 쓰면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파란흙 2008-04-17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처럼 흥미진진했단 말이지요? 축하드립니다. 요즘 연이어~^^

승주나무 2008-04-18 00:12   좋아요 0 | URL
흥미진진하다 뿐입니까?
'흥미진진'하니까 생각나네요. 누가 津 자를 잘못 읽어서 '흥미율율'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한동안 유행이 되더라구요~
흥미율율합니다. 더욱 흥미율율한 인터뷰를 해서 올려드릴게요 ^^
 

서중석 선생은 내가 존경하는 몇 안 되는 현대사가이다. 나의 현대사에 관한 지식이 있다면 순전히 서중석 선생한테 배운 것이다. 특히 그의 애정어린 학자적 이성은 롤 모델로 삼고 싶을 정도다. 이번에 <대한민국 선거이야기>를 냈는데, 저자후기에 앞으로 있을 선거와 정치문화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들을 많이 하고 있어서 '함부로' 전문을 인용한다. 책 258~264쪽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선거로 본 한국현대사’를 강의할 때는 이러한 강의가 곧 있을 대통령 선거에 조금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길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기대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다 후보가 상당히 큰 표차로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한나라당 후보가 승리할 거이라고 확신한 것은 언론에서 줄기차게 주장했던 것처럼 노무현 정부의 진보정 정책의 실패나 잘못에 기인한다고, 다시 말해서 노무현 정권의 실정에 기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다른 정권하고 달라서 노무현 정권에 대한 평가는 시간을 두고 해야 하겠스니다만, 노무현 정권은 잘못한 점도 적지 않으나, 잘한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는 잘한 점만 얘기하지요. 돈을 안 쓰는 선거, 투명한 선거를 노무현 정권에 와서 처음으로 치렀다는 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러한 투명성은 경제, 사회, 여러 부문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정부 수립 이래 존재했던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위압적 지배가 약화되고 허물어진 것은 퍽 좋은 일입니다. 대통령을 정상적인 상태로 돌려놓은 것이지요. 검찰의 독립성을 처음부터 보장하려고 한 일도 잘한 일입니다. 검찰 문제는 계속 말썽이 있었고, 노무현 정권 말기까지 경제권력, 정치권력에 추수하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사법부도 과거의 모습에서 탈피했습니다. 과거사 청산을 위한 노력은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사법 개혁 등의 개혁도 나름대로 추진했지요.

노무현 정권의 자주외교정책은 지금까지 부각이 안 되었습니다. 한국현대사에서 처음으로 6자회담 등과 관련해 있었던 대미 자주외교는 평가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미 의회에서 유례가 드물게 이명박 대통령 당선 축하 결의를 한 것도 자주외교에 대한 경계와 관련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경제정책은 차기 정권의 경제정책과 비교해서 평가를 받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한나라당 후보의 승리를 확신한 것은, 최근 수년간 여러 여론조사를 볼 때 경제발전을 절대시하는 주장이 민주주의나 인권 문제, 사회정의를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한나라등의 이명박 후보는 CEO경력자로서, 또 서울특별시장으로서 업적을 눈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에 잘 어울리는 인물이었습니다.

경제 발전을 절대시하는 태도는 박정희 정권 때 풍미했던 근대지상주의․ 성장제일주의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인권이나 민주주의, 사회정의에 대한 폄하 또는 무시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성장주의자들은 유신체제나 전두환․ 신군부체제가 어땠느냐, 배부르게 하면 되는 것이고, 노골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권위주의 통치는 한국인의 ‘적성’에 들어맞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바로 이러한 성장제일주의가 박정희 신드롬의 풍요로운 토양이었습니다.

성장제일주의, 권위주의 통치는 극우반공주의, 수구냉전논리에 익숙한 60대 이상의 세대한테 낯선 것이 아닙니다. 이들의 다수한테 김대중이나 노무현을 미워하고 햇볕정책을 비난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번 선거에서 현재와 장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져가고 있는 50대 이하한테, 특히 편히 자랐고 앞으로 편히 생활하려는 20대한테 이러한 주장이 먹혀들었고 설득력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가치관이 배제된 천민자본주의와 연결되어 있는 성장제일주의는 지역주의의 벽도 허물어 호남 사람들로부터도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부분적으로 지역주의의 벽이 허물어진 것은 노무현 정권의 특성에 기인하기도 합니다. 노무현 정권은 호남 사람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탄생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데, 부산․ 경남에서 노무현 정권에 핵심으로 참여한 반면, 호남 사람들은 점차 노무현 정권과 거리를 두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노무현 정권을 지지해줄 확고한 대중적 기반이 없어져버렸어요. 한편 민주주의나 인권 같은 것은 이만하면 됐다는 사고도, 남북관계나 핵 문제가 답보상태에 있는 것도, 겨엦 발전을 절대시하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성장제일주의는 기대의식 상승과도 결부되어 있습니다. 1950년대부터 급속히 도시가 팽창하면서 도시민의 기대는 커가는데, 정부의 시책은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도시민의 기대의식 상승은 1956년 선거부터 역대 정권을 궁지에 몰아넣거나 괴롭힌 장본인 중의 하나로, 장기간에 걸쳐 여촌야도 현상을 초래했습니다. IMF사태 이후 경제의 불안정성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구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이 드러났지만, 그렇다고 기대의식 상승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IMF 사태라는 눈앞의 현안을 처리해야 했던 김대중 정권 시기와도 달리, 기대의식 상승과 연관된 노무현 정권에 대한 불만은 계속 커졌습니다.

특히 이번 선거에서는 장기집권에 대한 염증이 대단히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이 1956년 선거에서, 박정희 정권이 1971년 선거에서, 유신정권이 1978년 선거에서 패배나 다름없는 타격을 받은 주요 요인의 하나가 장기집권에 대한 염증이었습니다. 김대중 정권 5년에 노무현 정권 5년은 불만세력한테 너무 길었습니다. 김영삼 정권 5년까지 합치면 15년이나 되지요. 특히 성장주의자들한테 노 정권은 질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워 죽겠는데, 해먹어도 너무 오래 해먹는다는 생각이 몇 년 전부터 전반적으로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번 선거에서 노무현 정권의 실정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노 정권의 실정이 적지 않았고, 최근 2~3년 동안 청와대에서 직언을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는 말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노 정권이 무엇을 잘못했냐고 물으면 답변을 잘 못합니다. 경제정책이 잘못이라면 다른 정권은 더 잘할 것 같으냐는 물음에도 답변이 시원치 않습니다.

노무현 정권의 실정은 이미지와 연관이 깊습니다. 노무현의 언행이나 행동거지, 승부사 기질, 설익어 보이는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불만이 대부분입니다. 대개는 노무현의 언행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이 실정으로 표출되고 있습니다. 특히 성장제일주의 사고나 장기집권에 대한 염증이 노무현의 언행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습니다.

‘노무현의 실정’은 조선․ 중앙․ 동아 같은 언론 매체에 의해 크게 포장되고 확대되었습니다. 한미FTA 협정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아니고 5년간을 시종여일하게 공격했고, 노무현은 노무현답게 이들 언론에 즉자적으로 대응했습니다.

신문은 1950년대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위력이 컸습니다. 여촌야도 현상이나 기대의식 상승에도 신문의 역할이 컸습니다. 다만 2002년 선거에서는 인터넷의 위력이 조․ 중․ 동의 위력을 눌렀습니다. 그러나 장기전에서는 김대중․ 노무현을 공격해온 종이 매체의 위력이 세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때그때의 사안에 대해서는 즉흥적인 대응력이 있지만, 수공업적이고 일관성이 약한 진보적 매체에 비해 이들 매체는 오랜 기간 축적된 확고한 틀과 현실적 힘을 가지고 파고들었습니다. 한나라당을 포함해 한국의 보수세력 또는 수구냉전세력은 여론 정치에서 종이 신문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2007년 대통령 선거는 역대 선거 가운데 1967년의 대선과 함께 가장 재미없는 선거로 기록될 것입니다. 5년 전 서울역 유세장에는 이회창 후보의 연설을 듣기 위해 1만5천여 명이 몰렸으나, 2007년 이명박 후보의 첫 유세지이기도 했던 서울역은 5천여 명밖에 모이지 않아 썰렁했습니다. 또한 2007년 선거는 정책대결이 실종되고, TV 토론에 대해서도 유권자들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이버 세상도 시들해졌다는 점에서 과거보다 크게 후퇴한 선거였습니다. 대운하나 교육정채고가 같은 사안도 중요한 쟁점이 되지 못했습니다.

2007년 대통령 선거는 시민의식이나 도덕성이 실종된 퇴행적인 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유력한 후보에 대해 중대한 의혹이 보도되어도 지지율에 변화가 없었습니다. 일각에서는 답답해하고 분노하기도 했지만, 몰가치성이 전제된 성장제일주의는 쇠심줄처럼 질겼고 장벽처럼 두터웠습니다. 그런 점에서 2007년 대선은 1967년 6․ 8 선거처럼 병든 선거였습니다. TV토론에서 누가 잘했는가도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바꿔야 한다는 소리만이 1년 이상 울려 퍼졌습니다.

6월민주항쟁 이후 민주주의는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진전되고 있었고,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은 혼탁함과 타락상이 그다지 보이지 않았던 깨끗한 선거였습니다. 정책대결, TV 토론이나 유권자의 자발적 참가, 국민경선대회 등 신선한 선거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가 일정한 궤도에 오른 감을 주었는데, 불과 몇 년도 안 되어 여러 가지 면에서 후퇴했을 뿐만 아니라 퇴행적인 면도 노정되니 마음이 가볍지 않습니다. 역사가 일직선으로 진보하는 것도 아니고 나선형적 변화를 갖는다고 배웠지만, 너무나 빨리 온 후퇴요 퇴행이었습니다.

2007년 대선에서 진보세력한테 재앙이나 다름없었던 성장제일주의는 부메랑이 되어 이명박 정권한테 부담이 될 것입니다. 그 부담은 눈덩이처럼 커질 수 있습니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에 환멸이 빨리 올 수 있기 대문이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불안정성, 불안감이 작용해서인지 요즈음 들어 냄비 끓듯 하는 조급성이 더 심해졌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럴수록 이명박 정권은 대운하와 같은 무모한 경기 부양책을 쓸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제 어느 때보다 가치관이 배제된 성장제일주의의 주문에서 벗어나도록 진보와 보수 모두가 노력할 때가 아닐까요.

이명박 후보의 득표율이 48.7퍼센트로, 5년 전 노무현 후보의 득표율 48.9퍼센트보다 적다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보세력 후보들의 표가 보수세력 후보들의 표보다 훨씬 적다는 점입니다. 진보세력은 어째서 그와 같은 사태가 일어났는가에 대해 깊이 있는 인식과 냉정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겁니다.

한나라당이 경제정책이건 남북관계건 교육정책이건 진보적 정권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명박이 당선되는 것도 필요하다는 주장은 듣기가 민망스럽습니다. 지놉세력이나 보수세력이나 문제점이 많기 때문에 돌아가면서 정권을 잡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보수세력은 그동안 반성도 많이 했을 것이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을 것입니다. 마르고 닳도록 영원히 ‘한반도의 죄인’이 될 대운하만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지만.

1967년 선거로부터 4년 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는 신선한 바람이 부는 등 선거사에서 각별히 기억할 만한 활기와 유권자 의식을 보여주었습니다. 앞으로 있을 선거는 2007년 대통령 선거처럼 재미없는 무기력한 선거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이 책이 조금이라도 기여했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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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서평기사가 실린다고 하네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65366&PAGE_CD=

4.3 60주년을 맞아 보리출판사에서 출간한 <동백꽃 지다>를 밤새 읽고,
어릴 적 경험까지 덧붙여 쓴 서평기사였는데,
시의성이 맞아서 그런지
메인에도 올라가고 주말판에도 게재된다고 하네요.

요즘 주간 오마이뉴스는 지하철에서 무료로 배포한다고 하니,
혹 생각나시는 분들은 한 장 챙기시기를...

4.3에 관한 책이 많지는 않지만 
입체적이고 상세하고 객관적이고 아름다운 점이 특이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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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4-04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꼭 챙길게요!!!!

승주나무 2008-04-04 01:44   좋아요 0 | URL
아니.. 안 주무셨쎄요~
낼 출근은 어케 할라구 ㅋㅋ

웽스북스 2008-04-04 11:25   좋아요 0 | URL
무사출근했지요! ^^
그런데 우리동네는 오마이뉴스 주간을 안주더라고요
예전에 막 처음 나왔을때는 줬는데 ㅜㅜ

승주나무 2008-04-05 03:28   좋아요 0 | URL
네~ 웬디양 님.. 그거 배포처가 정해져 있다고 하더라구요~
저도 못 구해서 전화로 달라고 했어요 ㅠㅠ

Jade 2008-04-04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솜하다'란 말. 참 적절한것 같아요. 발음자체도 왠지 '속솜'하고.
암튼 승주님 멋져요! ㅎㅎ

승주나무 2008-04-05 03:29   좋아요 0 | URL
이상하게 제주에서는 '침묵'과 관련된 관용표현이 많은데요..
속솜하다는 대표적인 말이고..
'하영 곳지 맙서'(말을 많이 하지 마라)는 말도 그런 셈이죠^^
제이드 님한테 칭찬받으니까 신난다~ㅎㅎ

마늘빵 2008-04-04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지하철에서 그런걸 못 봤죠. 종이신문도 있구나.

승주나무 2008-04-05 03:30   좋아요 0 | URL
무료신문으로 배포한지 꽤 된 것 같더라구요~
그런데 그게 어디 있는지는 검색해도 잘 안 나오더라구요~
 

재벌 국회의원 정몽준 씨가 MBC 여기자 성희롱 논란에 빠져들었다.
뉴타운 개발 공약에 관해 인터뷰를 요청한 여기자의 두 볼을 손으로 만진 것이 발단이 됐는데,
여기서 쟁점이 되는 것은 과연 정 후보가 볼을 '톡' 만졌는가, '톡톡' 만졌는가 하는 것..

<정 후보측> '톡' 쳤다.

"(MBC 기자의) 인터뷰를 사양하며 다음에 하자는 뜻으로 어깨를 가볍게 미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밀려 (볼을 치는) 실수를 한 것"(정후보 측 홍윤오 공보특보의 말)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70768&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1&NEW_GB=


<MBC 측> '톡톡' 쳤다.

"김 기자는 '정 후보가 왼쪽 손으로 오른쪽 뺨을 쓰다듬듯 짧게 두번 톡톡쳤다'고 한다"(MBC 김 기자가 소속된 보도제작국의 한 부장의 말)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70635&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1&NEW_GB=


결국 해당 동영상을 봐야 경위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MBC는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동영상 공개는 물론 보도 자체에 대해서 신중히 하고 있다.  "총선이 임박해 있기 때문에 영상 공개가 자칫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영상공개는 물론이고 사건 보도도 신중해야 한다"(보도제작국 한 간부)

이 사건을 최연희 씨의 여기자 성추행 사건과 비교했을 때 크게 차이나는 부분은 바로 '의도'가 있었는지 하는 부분이다. 홍 특보는  "표를 얻으러 나온 후보가 아내가 있는 자리에서 여기자의 볼을 의도적으로 만졌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반박하며 의도가 없었음을 강조하는데, 의도가 없었다면 여성의 얼굴에 무의식적으로 손이 가는 행위가 문제될 수 있다.
정상적인 과정을 통해 인터뷰를 걸어온 기자에게 정 후보가 한 행동은 정상적인 대응이라고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될 수 있다. 왜 손을 볼 가까이에 대는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손을 한번 젓거나 가볍게 펼쳐보이는 행동만으로 충분히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톡' 쳤거나 '톡톡' 쳤거나를 가리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공인으로서 마땅히 취해야 할 반응에서 다소 잘못이 있고 결례가 있었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 본인이 충분히 선을 그어야 하는데 정 후보는 이 문제가 커지지 않게 하기 위해 애써 침묵을 지키고 있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가래로 막는 셈이 아닌지 모르겠다.

"어제 저녁 MBC 여기자 사건(성희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자)
"…." (정몽준 후보)
"오늘 아침 낸 해명자료가 공식입장 전부입니까?"(기자)
"(손짓으로 공보특보 부르며 고개만 끄덕) …."(정몽준 후보)(위 기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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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4-03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의 아니게...대유행할 것 같습니다.
본의 아니게 납치했다. 본의 아니게 주물렀다. 본의 아니게 살인했다. 본의 아니게 운하팠다. 본의 아니게 의료보험민영화했다. 본의아니게 뇌물받았다.....재미있는 나라 재미있는 정치꾼들이에요..^^

승주나무 2008-04-04 01:25   좋아요 0 | URL
참.. 본의의 수난시대인 것 같아요~~
저는 점점 정치가 재미없어지려구 합니다 ㅡㅡ;

L.SHIN 2008-04-03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3시간 전에 들은 이야기가 이것이로군요. 쯧쯧..

승주나무 2008-04-04 01:25   좋아요 0 | URL
신문에 난리가 났지요~
이게 결과에 어케 작용할지는 아무도 모르죠..
근데 정동영 후보가 너무 밀리네요..
이사만 안 갔어도 참 재미있는 구경 했을 텐데 ㅎㅎ
 
입시 공화국의 종말 - 인재와 시험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대한민국이 산다
김덕영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교육부의 유아기적 사고방식

 

대한민국에서 '교육'은 항상 '문제'라는 단어의 수식을 받는다. 교육은 항상 문제이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화법으로 문제를 지적했고, 그만큼 많은 해법이 쏟아졌다. 해법이라는 것은 문제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고 할 때 제시가 가능하다. 문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해법을 제시하는 것은 죄다 '헛발질'일 뿐이다. 문제를 모를 때는 차라리 방치하는 게 낫다. 헛발질을 자꾸 하다 보면 실타래가 자꾸 엉켜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할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이 바로 무수히 엉킨 실타래와 같다. 최근 이 실타래에 한 줄이 더 엉키는 일이 발생했는데, 교육부가 천명한 이른바  ‘기초학력 미달 제로플랜’이다. 교육부는 진단평가를 정례화하고 뒤처지는 학생과 학교를 지원해 지역·학교·학생별 학력차를 줄이겠다고 했는데, 올해 10월 초6·중3·고1학년 전체를 대상으로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를, 초등 3학년을 대상으로 국가수준 기초학력 진단평가를 실시한다. 매년 3월에는 초4~중3학년을 대상으로 교과학습 진단평가가 시행되니 초6·중3학년은 1년에 두 번 시험을 치르는 꼴이 된다. 교육부의 관점에서 보면 '학력'은 '성적'과 동의어다. 일제고사를 실시해서 성적이 처지는 녀석들이나 그런 학교는 '학교 끝나고 남으라'는 식인데, 이보다는 대한민국의 모든 학교를 한줄로 세워서 관리하기 편하게 만들려는 속셈이 아닌지 의심이 된다.

대개 어떤 문제에 직면한 사람들은 두 가지 경우로 반응한다. '문제'를 중시하는 경우와 '해법'을 중시하는 경우이다. '해법'을 중시하는 경우는 한 가지 문제만을 연상하는 1:1관계가 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한 가지 문제에 대해서만 해법을 제시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초중고등학교의 객관식 풀이 능력을 잘 모르니까 이번 기회에 통제하기 쉽게 1등부터 100등까지 '해쳐모여'를 시키려는 교육부의 처사가 그것이다. 반면 '문제'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문제의 다발'이라는 것을 안다. 때문에 이들은 교육부의 '기초학력 미달 제로플랜'과 '일제고사'는 오히려 정부보다 보습학원이 절실히 원했던 자료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즉 또 다른 문제의 시작이다. <입시공화국의 종말>(인물과사상사)의 저자인 김덕영 씨는 객관식을 유아기 시절에 뗐어야 할 사고방식이라고 말했다. 이를테면 유아가 먹어도 되는 것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을 배우듯이, 정답과 오답이라는 흑백논리를 강요해 사고를 단순화시킨다는 것이다. (272쪽) 나이가 들면 서서히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면서 주관적인 세계관을 정립하는 단계, 즉 성숙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교육부 역시 유아기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력'이라는 것은 단지 '객관식'을 틀렸다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 테니 말이다.

 

 

'다른 눈으로(with other eye's)' 바라본다는 것

 

교육부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대한민국에서 교육문제와 관계 있는 사람들 역시 '해법'과 '문제'라는 두 가지 특징을 보인다. 정치인이나 정부는 당연히 '해법'을 제시하고 있지만, 교육 전문가나 학자들은 '문제'적 관점에서 교육을 바라본다.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교육 관련 서적들은 <대한민국에 교육은 없다>(철수와영희, 2008.3월)와 <서울대학교 학생선발 지침>(포럼, 2008.2월), 그리고 <입시공화국의 종말>(인물과사상사, 2007.6월)이다. 제목이 말해주듯이 이 책들은 대한민국 교육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이들의 관점으로 보면 아직은 대한민국에서 '교육 해법'은 너무나 먼 이야기인 듯하다.

<입시공화국의 종말>은 '다른 눈으로(with other eye's)' 교육의 문제점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 차별성이 있다. <순이삼촌>의 작가 현기영 씨는 어느 해인가 4ㆍ3 강연에서 "제주도 안에서는 제주를 쓸 수 없다. 그래서 도망쳤다"고 말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나는 그것이 '다른 눈으로(with other eye's)'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눈으로(with other eye's)'란 독일의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cal anthropology)과 사회학의 대가인 헬무트 플레스너가 사용한 개념이라고 하는데, 그는 바로 '다른 눈으로(with other eye's)' 독일을 보니까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것이 잘 보인다고 말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단지 밖에 가 있다고 해서 '다른 눈(other eye)'이 생기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치열하게 성찰하고 지치도록 고민하고 발만 동동 구르다가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끝내 '끊어진 고리'를 찾았을 때 쓰는 말로 해석된다. 단지 밖에서 배운 것에 불과하다면 미국의 경제학(주로 한물 간 시카고 학파)을 배우고 와서 신자유주의 이론만 앵무새처럼 읊어대는 수많은 학자들의 눈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실제로 저자약력을 살펴보면 김덕영은 독일에서 사회학·철학·역사·과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공부하였는데 독일의 학풍과 교육 시스템에 큰 충격을 받은 듯하다.

 

"독일의 위대한 학자들의 저서를 원서로 읽으며 자신만만했던 김덕영은 그러나 입학하는 순간부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에서 공부했던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저자약력)

 

본문에서는 독일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일화가 소개되는데, 단지 세 줄에 지나지 않는 칸트의 사상에 대해서 한 학기 동안 리포트를 준비해서 교수와 직접 토론을 하라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독일은 담당 교수가 학생과 과제를 가지고 직접 토론을 하며 면밀히 검토한 끝에 세심히 코멘트를 달아주고 원고를 돌려주는 방식이다) 글쓴이에게 잊지 못할 가르침이 되었던 담당교수의 코멘트 전문을 싣는다.

 

"칸트 윤리학의 기본적인 의도와 논리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난 후에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면 된다. 대학의 기초적인 지적 훈련 과정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221쪽)

 

이런 이유로 독일의 대학에서는 학문의 엄밀성과 명증성을 유지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대학의 모습은 부끄럽기 그지없다. 교수는 공천장을 받아들고 끝내 강의를 제끼고 말았으며, 대학생들은 시시콜콜한 연예담을 예사로 늘어놓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칸트며 플라톤, 게오르그 짐멜을 거론하던 고등학생의 기억은 온데간데 없다.

역시 한 걸음 물러서서 보면 더욱 명쾌하게 보이나 보다. 서문부터 던지는 질문이 거침없다. "한국이 세계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높은 교육열 때문이라고 하는 주장을 십분 받아들인다면, 한국의 교육은 앞으로도 경제성장과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왜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사라진 마을은 출산율 저하로 또는 이농으로 걱정하면서, 아이들의 웃음이 사라진 놀이터는 걱정하지 않는가?", "왜 한국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당연시하는 대학의 서열화를 외국인들은, 그것도 이른바 선진국의 국민들이 모르고 있을까?" 서두에서 던진 질문들은 본문에서 세세히 다뤄진다. 그러나 이 질문들이 귀결되는 지점은 한 가지이다. 바로 '인간 존중 교육'이다.

 

'인간 존중 교육'을 위하여

 

글쓴이가 '인간 존중 교육'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교육의 밑바탕을 이루어야 하며, 서로 부딪힐 때는 당연히 인간 존중을 교육의 위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은 책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인간 존중 교육'이라는 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교육은 '반 인간 교육이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글쓴이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축구 선진국에선 정장기에 있는 유소년 선수들의 경우 훈련 시간이 많아야 하루 2~3시간인데 반해, 한국에선-2002년 일산백병원이 축구 선수 13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최대 7시간, 평균 4.57시간이나 된다. 한국의 축구는 한마디로 성적 지상주의를 추구하는 학원 축구인 셈이다."
(동아일보 2004.6.15일자 "'축구 꿈나무'의 눈물", 34쪽에서 재인용)

 

어디 학원축구뿐이랴. 개성적이며 아름다운 몸을 가꾸는 복장은 청소년들의 성장하는 정신과 함께 몸의 논리를 구현할진대 군대나 감옥, 수도원, 공장에서나 어울릴 법한 '유니폼'은 다름아닌 감시의 의미일 뿐이다. (30쪽) 지난 2002년에 "나도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다"며 자살한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은 "어른인 아빠는 (이틀 동안) 20시간 일하고 28시간 쉬는데, 어린이인 나는 27시간 30분 공부하고 20시간 30분을 쉰다. 왜 어른보다 어린이가 자유 시간이 적은지 이해할 수 없다."며 절규했다. 학원은 학생의 일상생활을 실질적으로 통제하는데 기숙학원이나 자물쇠반에서 이루어지는 행태들은 산업혁명 당시 중노동을 견디다 버려지는 유럽의 애띤 소년 노동자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만약 교육의 현장에서 '인간의 얼굴'이 조금씩 회복된다면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즉 한국 사회는 이제 '국가(사회)의 개인들'에서 '개인들의 국가(사회)'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십분 발휘할 수 있을 때 사회적 역량이 생기는 것이지, 지금처럼 한줄로 늘어놓고 훈시를 하듯 일방적으로 정책을 주입시키는 것은 '글로벌한 자살한위'나 다름없다.

 

대체로 신선한 관점이며 타당한 주장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다른 눈으로(with other eye's)' 바라본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현지의 입장'에 대해서 너무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로스쿨의 전면적인 지방대 배분이라든가 논술시험을 담당교사가 출제하는 방법, 객관식의 폐지, 모든 시험을 토론과 논술로 치르자는 결론적 주장은 장기적 과제는 될 수 있지만, 당장 밟을 수 있는 땅은 아니다. 예컨대 담당교사의 시험 출제라든지 모든 시험을 토론이나 논술로 출제하자는 주장은 출제 이전에 담당교사의 역량이나 교사 교육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대목에서 학자와 정치인의 커다란 차이를 발견하게 되는데, 나는 무척이나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이 지점에서부터 끊어진 고리는 분명히 적임자가 생겨날 것이라고 믿는다. 당연히 정치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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