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여행 - 놀멍 쉬멍 걸으멍
서명숙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소싯적에 책 사느라고 차비가 떨어지면 부모님으로부터 '책 타고 학교가라'는 면박을 한번쯤 당해본 독자들이 있다. 도서포털 리더스가이드(www.readersguide.co.kr) 리뷰어들은 책을 타고 학교에도 가고 별나라에도 가고 못 가는 곳 없지만, 유독 이 책에서만큼은 책을 놓고 떠나고 싶은 욕구를 감추지 못했다. 서명숙의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 걷기 여행>(북하우스)이다. 북하우스와 리더스가이드가 함께 준비한 '서명숙 작가와의 미니간담회'를 앞두고 참석을 신청한 리뷰어들의 리뷰를 분석하여 제주올레를 책으로 걷는 10가지 맛을 뽑아냈다. 책과 글로나마 '제주 올레'를 소개하지만, 그나마 맛보기로 삼았으면 한다. - 리뷰어 주

1. '걷기'와 '제대로 걷기'는 다르다

'걷기'는 두 발이 멀쩡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대로 걷기'를 할 만큼 축복받은 사람은 많지 않다. "돈 드는 일도 아닌데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파란흙) 용기를 내서 가까운 곳부터 걷기를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대개는 "아스팔트를 걸어야 했기에,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차들에 대한 두려움과 소음 그리고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는 걷기 여행의 기쁨을 반감"시켰다.(이환) 좀 더 아름답고 안전한 길에 목말라 하는 사람이라면 제주 올레 서명숙 대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도 좋겠다.

"(내가 생각한 길은) 실용적 목적을 지닌 길이 아니다. 그저 그곳에서 놀멍, 쉬멍, 걸으멍 하는 길이다. 지친 영혼에게 세상의 짐을 잠시 부려놓도록 위안과 안식을 주는 길이다. 푸른 하늘과 바다, 싱그러운 바람이 함께 하는 길이다."(제주 걷기 여행, 39쪽)


2. 역사가 서려 있는 푸르고 아픈 땅, 제주

제주 올레는 단지 '제주'다.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조금이나마 이해한다면 날빛에 반짝이는 제주 올레의 묵직한 풍광에 다가갈 수 있으리라. 옛날의 제주는 유배의 땅이었다. 뿐만 아니라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좌절과 아픔도 겪었다. 지금의 제주는 육지 사람들의 관광과 소유의 대상으로 비치는 것도 사실이다. (낙서가) 때문에 현지인의 심정으로 바라보면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이 '역설적'이기 그지 없다. 리뷰어 '낙서가'는 정호승의 시 한 구절을 제주 올레에 부쳤다.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내가 사랑하는 사람)


3. '관광'이 아니라 '여행'이다.

제주에 대해 한 가지 단어를 떠올리라면 '광광지'나 '관광'을 드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학창시절의 수학여행이거나(낙서가) 렌트카를 빌려 타고 말 그대로 '주마간산'으로 달리는 게(감은빛) 일반적이다. '여행(旅行)'이란 말은 매우 오래된 글자인데, 춘추전국 시절 세 치 혀 하나로 전국을 주유하며 왕을 설득해 자신의 이상을 펼치는 유세가를 떠올리면 여행이라는 의미가 쉽게 들어온다. 목적지로 가기도 전에 산적을 만나서 빈털터리가 되거나 목숨을 빼앗기기도 하고, 그렇게 고생해서 찾아가 보람도 없이 쫓겨나는 경우도 다반사다. 때문에 여행이란 몹시 번거롭고 고단한 일이다. 이 본래의 의미가 '제주 걷기 여행'에는 담겨 있다. 튼튼한 두 발로 힘들게 걷다가 지쳐서 돌출된 바위턱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을 때 바라본 풍광, 이것이 제주 올레를 가장 잘 표현한 순간일 것이다. 우리가 '산티아고 여행'을 '관광'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4. '간세다리 정신' 벌써 잊었어?

시사IN의 전 편집국장인 문정우 씨는 제주올레를 걷고 나서 아들과 함께 동네 걷기를 하다가 아들에게 혼이 났다고 한다. 평소처럼 과속을 하는 아버지를 보고 "아빠 '간세다리 정신' 벌써 잊은 거야?" 하는 통에 몹시도 민망했다는 후문이다. 리뷰어들도 문정우 씨처럼 '병'을 앓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나는 이미 '빨리, 빨리' 병에 걸려있었다. 무엇이든 빨리해야 하고, 남들보다 앞서 가야하며, 결과를 기다리지 못하고 안절부절하는 조급병에 걸린 것이다.(poison)

'간세다리'란 나무늘보 같은 게으름뱅이를 뜻하는 제주도 방언이라고 한다. 속도가 주는 오만함과 위협을 생각하면서 걷는 길은 '아스팔트'가 아니라 천연의 '흙길'이다. 흙에서 나고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이 걷기에는 안성맞춤인데, <제주 걷기 여행>을 읽을 때도 '간세다리 정신'을 잊지 말라는 리뷰어의 충고는 새겨들을 만하다.

"책을 천천히 그야말로 놀멍 쉬멍 읽었다. '간세다리'가 되어 읽어야지 이 책이 맛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누워 읽다가, 쭈그리고 앉아 읽다가, 엎드려 읽다가, 화장실 변기에 앉아 읽다가, 지하철에서도 읽었다. 이맛살 찌푸려가며 앞뒤 맞춰 읽어야 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 순서대로 꼭 읽을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 편안한 책이다." (파란흙)


5. 제주의 '산티아고'를 그리며

저자 서명숙은 나이 50줄에 800킬로미터 산티아고 도보순례에 도전한다. 물론 주위에서 다 뜯어말렸지만, 막무가내로 탈출에 성공한다. 그렇게 23년의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홀로 떠난 산티아고 길에서 자주 떠올렸고 돌아오면서 올레 길을 만들고자 마음을 먹었고 실천에 옮기어 현재는 여덞 코스 105킬로미터의 길을 만들었다고 한다.(red7370)
많은 사람들이 품고 있을 산티아고 로망, 하지만 직접 그 길을 걸어본 사람은 훨씬 적다. 하지만 산티아고 로망은 더 이상 가슴 속에서만 자맥질하지 않는다. 제주 올레 서명숙 대장의 노력 덕분에 그들은 "이제는 산티아고의 길보다는 제주올레를 먼저 찾게 될" 테니까.(롤러코스터)


▲ 구릿빛으로 검게 그을른 데다 소녀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왼쪽의 아줌마가 바로 서명숙.

6. '서명숙'을 모르고서 '제주 올레'를 논하지 말라.

제주 올레를 기획하고 한땀한땀 일군 올레 대장 서명숙을 알면 제주 올레를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인생부터가 드라마틱하다.
<시사저널> 창간멤버 서명숙은 1989년 6월부터 2003년 4월까지 15년 동안 정치부 기자·정치부장·취재1부장·편집장을 거쳐 2005년 오마이뉴스 편집국 국장을 역임하는 등 23년 동안이나 기자 생활을 하면서 광화문에서 '놀았다'. 섬의 정기를 머금고 태어났지만 아스팔트 길게 뻗은 도시에서, 그것도 세상사에 가장 민첩하게 반응하는 기자 생활을 20여 년이나 하다가 이를 단호히 버리고 다시 '느림'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까칠한 기자들을 호령하는 편집장 역할을 하며 '여성'보다는 '남성'의 삶에 익숙한 그가 '여성'으로 돌아왔다. 50줄에 그가 얻은 두 개의 키워드는 '느림'과 '여성'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수십 년 동안 지나온 '속도'와 '남성'의 여정이다.


7. '속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다

News는 ‘새로운 정보’를 ‘빠르게’ 대중에게 전달해야 한다. News 간에 경쟁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News의 생산자인 기자는 소비자 보다 항상 빠르게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당연히 기자는 다른 직업보다 빠름이 생명이다. 그리고 빠름은 바로 자본주의의 생명이 아니던가.
단위 시간당 생산성, 시속 몇 킬로미터 등 빠른 움직임은 이 시대의 복음처럼 우리의 삶의 가치를 지배하고 있다. 느리다는 것은 어쩌면 죄악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환)

걷기와 뛰기의 차이. 뛰면 걷는 것보다 '많은 곳'을 볼 수 있지만, 걸으면 뛰는 것보다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원초적 본능은 석기시대의 걷는 생활에 적응되어 있기에(이환) 빠른 삶은 왠지 낯설고 빠름에서 오는 편리함보다는 빠름을 위해 들이는 비용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독서와 여행의 공통점은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달려간다면 돌아오는 것을 기약할 수 없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고향을 엄마 뱃속을 외면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8. '제주어'를 만나는 재미

<제주 걷기 여행>에서는 제주어(사투리)와 표준어가 병기돼 있는데, 덕분에 리뷰어들은 제주어를 만나는 즐거움을 누렸다. 제주 출신 친구가 엄마나 친구와 통화하는 소리를 듣고 충격에 빠지는 이유는 제주어가 외국어처럼 매우 생소하기 때문이다. '간세다리'라는 말부터가 그렇다. 리뷰어 오로지 관객은 '무엇보다 제주어로 쓰여진 글과 해석, 제주단어의 풀이가 몹시 인상적'이었다고 썼다.
리뷰어 '롤러코스터'도 어렵게 한 단어를 익혀서 써먹는 데 성공했다.

"겅허민(그러면), 떠나기만 하면 되는 것?"

9. '제주 올레'를 위협하는 인스턴트 관광지

제주 올렛길을 연결하면서 가장 힘든 것은 명당자리마다 들어앉은 '관광지'다. 특히 제주 올레의 가장 중요한 길목 중의 하나인 '섭지코지'는 '보광'이라는 회사가 지은 대규모 관광단지가 동강내 버렸다.

제주를 갔을 때, 섭지코지의 불행을 목격했다. 대규모 관광단지를 짓는 듯 온통 공사 중이어서 차도 막히고 경관도 훼손되어 있었다. 거기에 무슨 드라마의 세트장인지가 경관을 훼손하면서 버젓이 관광객들에게 돈을 받고 영업을 하고 있어서 씁쓸했는데, 뭔가 더 어마어마한 게 지어지는 모양을 보니 다음부터 섭지코지는 절대 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감은빛)

이외에도 제주를 위협하는 대형 괴물들은 속속 태어나고 있다. 하지만 대형 괴물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어디 제주뿐이랴.

제주는 '여성'의 섬이다. 모든 자연 경관과 사람들의 마음이 섬세하고 온화하다. 하지만 제주를 방문해서 '여성'의 이미지를 찾기는 매우 힘이 든데, 그것은 남성적인 힘에 지배를 많이 당해서 '보이는 부분'은 이미 남성화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탑동 부근에 이마트가 생겨난 이후로 제주 동문시장과 재래시장 등 상권이 거의 붕괴되었는데, 얼마 전 신제주에 이마트 2호점이 생겼고 롯데마트도 생겼다. 성산일출봉의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볼 수 있는 신양리 해수욕장에는 삼성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보광이라는 회사에서 대규모 호텔단지를 조성해서 순식간에 '인스턴트 관광지'가 되고 말았다. 이 외에도 제주는 '패키지'라는 치밀한 괴물에 산채로 잡혀 여성성은 아주 깊은 곳으로 숨어버렸다.(승주나무)

제주올레가 제주의 숨은 혈맥을 이어 피가 통하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10. '제주 올렛길'이 자꾸 자란다.

<제주 걷기 여행>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명숙의 본문과 무적전설의 별책부록이다. 별책부록에는 제주 올레를 여행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들이 세심하게 담겨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책 본문에서는 올레길 6코스까지 밖에 안 나오지만, 무적전설의 별책부록에는 7코스까지 나온다."(감은빛) 본문이 편집 작업에 들어가 있는 동안 7코스가 개발되었고, 편집 막바지에 작업했을 별책부록에는 그 내용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길이도 늘어나고 있다. 현재 7개 코스 101.1 킬로미터에 달하는데, 2008년10월30일자 신문에 보니 10코스까지 200 킬로미터로 길이가 추가되었다고 전한다. 거기다 내년 초 12코스까지 만들어질 것이고, 11박12일의 일정으로 전 세계 도보여행자들과 함께 '제주 걷기 축제'를 열 계획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제주 올렛길이 자꾸 자라나는 것이다.
책을 사면 올렛길이 늘어나고, 친구들과 함께 올렛길을 밟거나 올렛길을 여기저기 소문내고 다니면 역시 올렛길이 신이 나서 늘어난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제주 사람이지만, 올렛길이 더욱 쑥쑥 자라나서 대규모 관광단지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인간과 자연의 길'이 태어나기를 바라고, 산티아고보다 더 아름답고 편안한 제주올레 완결판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 걷기 여행>은 오랜 세월 감정의 앙금이 쌓인 동생과의 재회 과정과 서명숙의 유년을 살지게 했던 '길'이 주는 성찰적 힘,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림들에 대한 회상이 저널리스트의 대중적인 문체로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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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마지막 날 김정환 시인의 집을 찾아갔다. 독자 두 명과 당산동에 있는 시인의 자택을 찾았을 때 시인의 방에는 매우 익숙한 듯한 클래식 선율이 울리고 있었고 시인과 노모가 손님들을 맞았다. 김정환 시인은 편한 추리닝 차림으로 우리를 맞았는데, 작업 시간을 방해한 불청객이 돼 미안한 기분도 들었지만 편안한 차림으로 '무장해제'한 시인의 면모를 보는 맛도 좋았다. 거기다 시인이 직접 타다 준 '잔칫집 커피'를 마시며 최근 번역한 '셰익스피어 시리즈'와 세상만사에 대한 이야기를 두서없이 나눴다.


셰익스피어 전집 번역 작업을 하고 있는 김정환 시인의 당산동 자택을 찾았다. 아침이슬 출판사에서 나온 1차분을 설명하며, 표지의 재질부터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품격을 갖추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시인은 작업과정을 소개했다. 


'4대 비극'이니 '5대 비극'이니 하는 건 일본에서 건너온 편의주의

고등학교 때부터 셰익스피어를 원전으로 즐겨 읽었다던 김정환 시인이 '뒤늦게' 셰익스피어 전집을 번역하기로 마음을 먹은 이유는 뭘까? '뒤늦게'라는 표현을 쓴 것은 "대학(서울대 영문과) 시절의 김정환씨를 알았던 친구들은 그가 셰익스피어 전공 교수가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한겨레 인터뷰) 시인은 "환갑이 넘으면 슬슬 작업을 시작하려고 했는데, 그 때 되면 기력이 쇠진해 총기도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라며 번역작업을 서두르게 된 이유를 밝혔다. 시인에 의하면 셰익스피어를 제대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무대언어와 발성도 알아야 하고, 영어도 알고, 한글도 알고, 시도 좀 알아야" 하는데 시, 소설, 평론, 번역과 무대연출에 이른 수십 년 동안의 연륜을 통해 비로소 셰익스피어에 다가갈 수 있었다는 뜻으로 이해됐다. 좀 더 캐묻자 비로소 이유를 말한다. <셰익스피어 전집>을 낸 출판사는 <아침이슬> 출판사인데, 교육과 청소년 관련 책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출판사 사장과 이야기를 하던 중 청소년을 위한 책으로 어떤 게 좋겠느냐는 질문에 "셰익스피어만 한 게 있을까요?"라고 반문했고, 이 일을 계기로 셰익스피어 번역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말했다.
1차분은 이른바 '4대 비극'(햄릿, 오셀로, 맥베스, 리어왕)과 만년작 '폭풍우'인데, 시인은 '4대비극'이니 '5대비극'이니 하는 말은 일본에서 건너온 편의주의일 뿐이라고 일갈했다. 이런 분류법뿐만 아니라 일본에 해방되는 과정에서 셰익스피어가 번역되었는데, 이 때 일어 표현과 일어 문법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당대의 어른들이 읽기에는 별 무리가 없지만, 한글세대가 읽기에는 너무 어렵기 때문에 현대어에 맞는 번역이 필요했던 차에 청소년 전문 출판사와 함께 작업에 나섰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셰익스피어 완역본으로 거의 유일한 판본은 1964년 정음사판 세익스피어 전집(4권)인데(나머지는 대체로 5대 비극이나 4대 비극에 국한돼 있다), 희극, 비극, 사극, 시편이라는 체재로 이루어졌는데, 김정환의 아침이슬판에는 희곡(37편), 소네트(1), 장시(2)이 담길 예정이다.

김정환 시인은 '셰익스피어'가 '천재'라기보다는 무척 기민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시인이자, 극작가, 배우, 무대연출자 같은 다역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극단의 단장으로 경영까지 해온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궤적은 작품을 더욱 생기 있게 만들었고 '영어'를 한 단계 쇄신시켰다. 김정환 시인은 근대영어를 만든 두 사람을 꼽으라면 제임스판 성경을 주도한 제임스 왕과 바로 셰익스피어라고 말했다. 셰익스피어 작품은 영어라는 언어가 생겨나는 과정이 그대로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당대로부터 불과 30년 전에 통용되던 '고어'와 차별된 '현대 영어'의 보고라는 찬사다. 때문에 영어를 공용어로 쓰거나 잘 아는 사람들은 무리 없이 셰익스피어의 원전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시인에 의하면 고전이라는 것은 '언어'를 만드는 것이다. 동양의 사서삼경이나 산스크리트, 서양의 그리스 고전, 그리고 셰익스피어는 '언어'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 모음>과 독일어 사전을 편찬해 독일의 정체성을 오롯이 담아내려 했던 그림 형제와는 달리 셰익스피어는 엄청난 분량의 사회적 경험과 이를 통한 다양한 인사들과의 만남, 그리고 이것을 '작품'이라는 품격 높은 형식에 담으려 했던 노력을 통해 새로운 언어와 문화의 꽃을 활짝 피운 '현대인'이다. 때문에 빌 게이츠는 "셰익스피어는 21세기형 인간이다"는 찬사를 보냈고 엥겔스는, 다소 거칠게, "사회주의란 산업화에 셰익스피어의 문체를 합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환 시인의 작업실 전경. 클래식을 일상적으로 틀어놓고 볕이 잘 들어오는 큰 창문이 인상적이었다. 영어, 일어, 그리스어 등 대여섯 개의 사전을 펼쳐들고 번역작업을 하다보면 뒷골이 쑤실 때가 많다고 말했다


"술술 읽힌다"는 말 칭찬이 아니야

"번역은 너무 매끄러운 윤문을 피해, 그 과정의 맛을 살렸다. (중략) '너무 매끄러움'은 인간 사회의 온갖 신분, 온갖 직접 및 분야의 현상, 상승 및 타락, 그리고 해체 과정을 셰익스피어 '당대적'으로 생생하게 보여 주는 것을 놓치기 십상이고, 그렇게 되면 많은 것을 놓치는 것이다."

김정환의 셰익스피어 번역은 음식으로 따지자면 '거친 음식' 같다. 오래 보고 되새김질을 하면서 음미해야 하는 구절이 있고, 어떨 때는 강렬하게 한 문장만 기억에 남기도 한다. 자구나 기호 하나하나 고집스럽게 완역했고, 때로는 우리 어순을 뒤집은 표현이나 쉼표로 길게 연결된 복문이 적지 않다. 이에 대해 김정환 시인은 "되도록이면 행들을 그대로 맞췄다. 행들을 맞춰 읽는 것은 의미 전달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세익스피어의 경우는 단지 문학작품의 언어뿐만 아니라 '무대 언어'도 무척 중요하다. 쉬라고 하는 부분에서는 쉬어야 하며, 행을 끊어야 의미전달이 될 때도 있다고 한다. 유일하게 '세미콜론(;)'만은 넣지 않았는데, 2차분부터는 다시 담기로 했다고 시인은 말했다.

번역에 대한 말이 나온 김에 시인은 '윤문'에 대한 직격탄을 날렸다. '술술 읽힌다'는 평판은 결코 좋은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500년 넘게 이어 온 문화와 역사가 있는데 '윤문'이라는 당의정을 넣을 것이라면 아예 스토리만 읽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윤문이라고 하는 것은 대체로 '김소월 투'(하네, 옵소서, 오리까)인데, 원작의 의미를 전혀 살려주지 못한다. 함께 인터뷰에 동행했던 독자는 처음 김정환 셰익스피어를 접했을 때 비인칭주어와 직역이 거북스러웠지만, 큰 소리로 연극하듯이 읽으니 이해가 되더라고 말했다. 시인의 명구가 이어졌다.

"거친 속에서 문장 하나가 문득 훨씬 아름답다"


김정환 시인은 '윤문'이나 '술술 읽힌다'라는 말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거친 문장들 속에서 강렬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건져내는 맛을 즐겨보라고 권유했다.



셰익스피어를 제대로 감상하는 법

 

"글쟁이라는 게 글 내놓고 한 달 동안은 술퍼먹는다. 왜 그러는지 아는가? 쪽팔리기 때문이다."

 

책을 내고 나서는 여지 없이 부끄러움을 달래려고 술을 '퍼'마신다는 시인에게 셰익스피어 감상법을 물어봤다.

 

시인에 따르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클래식에 비유할 수 있다. 햄릿은 베토벤 9번 교향곡처럼 난삽하고, 분량 길고,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다. 햄릿의 인생과 같다. 새로운 사태가 벌어지면 대부분은 회피하거나 과감하게 껴안는 데 비해, 햄릿은 난세를 견디면서 스스로 망가지는 캐릭터라고 시인은 평가했다. 격변기의 시대상황을 가장 잘 설명한 작품이 <햄릿>이라는 것이다. 그에 비해 멕베스는 베토벤 교향곡 5번처럼 극적 구성이 탁월하다. 교향곡을 들으며 셰익스피어를 읽는 맛도 좋을 듯하다.

 

무대언어를 생각하며 작품을 읽는 것도 재미를 더해준다. 소리를 내고 연극처럼 읽는 것도 좋다. 우리는 대체로 셰익스피어 주요 작품의 스토리는 다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셰익스피어를 제대로 음미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셰익스피어의 고향 영국에서는 '줄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이 일반화돼 있다.

 

영국에서는 이보다 레퍼토리가 매우 중요하다. 예컨대 어떤 배우가 햄릿 역을 맡았기 때문에, 혹은 어떤 연출가가 이번에 연출을 맡았다던데 한 번 더 보자 하는 식이다. 셰익스피어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작품을 볼 기회가 생긴다면 함께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최근에는 '리어왕' 연극이 있었고, 지금은 '뮤지컬 햄릿'이 한창 공연중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광기가 가득 담긴 인물이나 바보 등이 등장하고, 이들의 말은 쉽게 알아들을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때는 그 앞이나 뒤에 무슨 말이 나오는지를 파악해 문맥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시인은 말했다.

 

김정환 시인은

1954년 서울 출생.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0년 《창작과 비평》에 시 '마포, 강변동네에서' 외 5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하나의 이인무와 세 개의 일인무》《황색예수전》《회복기》《좋은 꽃》《해방 서시》《우리 노동자》《기차에 대하여》《사랑, 파티》《희망의 나이》《노래는 푸른 나무 붉은 잎》《텅 빈 극장》《순금의 기억》《김정환 시집 1980~1999》《해가 뜨다》《하노이 서울 시편》《레닌의 노래》《드러남과 드러냄》등 20여 권의 시집과, 소설 《파경과 광경》《세상 속으로》《그 후》《사랑의 생애》, 산문집 《발언집》《고유명사들의 공동체》《김정환의 할 말 안 할 말》, 평론집 《삶의 시, 해방의 문학》, 음악 교양서 《클래식은 내 친구》《내 영혼의 음악》, 문학 창작 방법론 《작가 지망생을 위한 창작 강의 일곱 장》, 역사 교양서 《상상하는 한국사》《20세기를 만든 사람들》《한국사 오디세이》등이 있으며, 《더블린 사람들》《셰익스피어 평전》 등을 번역했다. 2007년 제9회 백석 문학상을 수상했다.

 

김정환 시인의 셰익스피어 번역 1차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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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11-03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너무 멀리 있어서 잘 안보이고 클래식 cd들이 가깝게 보이네요. 밑에는 테이프같기도 한데..^^

승주나무 2008-11-04 11:31   좋아요 0 | URL
셰익스피어 다시 읽으면서 베토벤 운명교향곡을 들었는데, 음악과 문장이 썩 잘 어울리던걸요.^^

2008-11-04 1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04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평생 셰익스피어를 탐독한 시인

요즘 원전을 볼 기회가 많습니다.
마르크스 자본론, 홉스의 리바이어던,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집

셰익스피어는 극본이기 때문에 다른 에세이에 비해서 오는 임팩트가 굉장히 강합니다.
좋은 기회가 생겨서 셰익스피어 번역자 김정환 시인을 인터뷰하러 가게 됐습니다.
김정환은 고등학교 때부터 셰익스피어를 원전을 읽고 평생 셰익스피어를 탐독했습니다.
최근 아침이슬 출판사를 통해 셰익스피어 전집의 번역작업을 하고 있는데,
김정환 시인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왜 이렇게 늦게 셰익스피어 번역을 했는지 의아해할 정도라고 합니다.
저도 김정환판 셰익스피어 1차분 5권을 모두 읽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바로 옆에 있는 느낌이라고 하면 과장일까요.
고집스러울 정도로 셰익스피어의 원래 목소리를 전하려고 노력했으며
그러면서도 문장의 맛을 유지하기 위해 가진 애를 쓰는 번역자의 모습이 돋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를 '셰익스피어 시인'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셰익스피어 시인의 인터뷰를 대신 해드립니다.

금요일이 인터뷰 일자인데,
만약 김정환 판 셰익스피어를 읽으신 분들이 있거나,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댓글로 질문을 해주세요.
제가 대신 답변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아래는 샘플 인터뷰 내용입니다.


셰익스피어를 이제야 번역하게 된 이유는? (승주나무)


지금 왜 셰익스피어를 읽어야 하는가? (승주나무)

기존의 셰익스피어 번역과 김정환의 셰익스피어는 무엇이 다른가? (승주나무)

지금 2008년의 주목할만한 시인이 있다면? (들풀처럼)

우리말과 영어는 다른데, 굳이 영어 원문의 행을 그대로 따라서 번역을 해야한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도치법을 자주 사용하는 의도가 있는지? (노부타)

영어어순과 우리말 어순은 동사의 위치가 다른데, 그게 뒤바뀌면 왠지 '강조'의 느낌이 나는데, 희곡대본이어서 그냥 그렇게 번역을 하신건지도 궁금하고 말이지요. (노부타)

직역을 한 듯한 느낌. 역자가 셰익스피어의 원본을 읽으며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세세한 결을 듣고 싶어요(파란흙)

김정환 셰익스피어에 보면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가 역할을 많이 해서 문장이 매우 긴 편입니다. 보통은 단문 위주로 하는데, 이와 같은 긴 문장을 애용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롤러코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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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중앙지방법원 전경. 10월 28일 벌어진 법정모독 사건은 법원의 자유, 평등, 정의와 민주주의 원칙이 후퇴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으로 보인다.

 

난생 처음 본 재판정 풍경

10월 28일 퇴근을 하고 저녁 8시에야 법정에 도착했다. 그날은 서울중앙지법 형사2단독(부장판사 이림) 제2차 공판 기일이었다.(사건명 '2008고단5024업무방해') 재판정 밖에는 아직도 남은 증인이 대기하고 있었고, 앞쪽에는 조중동에 의해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된 언소주 회원 24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고, 뒤쪽에는 방청객들이 재판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날 재판은 밤10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청원경찰은 무척 예민한 눈초리로 재판정의 미동을 감지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청원경찰은 바로 일어서며 소요가 없는지 관찰하고는 다시 앉았다. 방청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곧바로 제지해 재판정의 위엄을 지키려고 모진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재판정의 위엄을 훼손시킨 사람은 검찰이 증인으로 공식 채택한 조선일보의 증인과 검사 자신이었다.

마지막 증인으로 증언석에 앉은 조선일보 애드본부 마케팅팀장은 진실선서를 마치고 착석했다. 매우 꼼꼼히 정리해온 종이를 앞에 펼쳐 놓고 검찰의 질문에 차분히 대답해 나갔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변호인단은 증인의 증언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혹시 심문사항을 보면서 답변하는 거 아닌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심문사항'이란 검찰이 증인에게 재판정에서 질문을 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서류로 판사와 변호인이 함께 공유하게 되어 있다. 증인은 자신의 답변을 정리한 서류를 참조할 수는 있지만, 검찰의 심문사항을 '커닝'해서는 안 된다. 특히 검찰에서 채택한 증인이라면 검찰에 유리한 증언을 하기 때문에 검찰과 증인이 서로 입을 맞춰 '연극'을 하면 법정의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훼손된다는 점에서 작은 일이 아니다. 증인은 "심문사항 보면서 하는 게 아니다"며 변호인의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변호인은 증인의 의사를 존중하며 불법증언을 하지 말 것을 다시 한번 경고했다.
하지만 증인의 증언이 한참 진행되는 와중에 변호인은 증인에게 다가가 '종이'를 회수했고, 검찰에게 가 '심문사항'을 꺼내 든 뒤 판사에게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판사는 두 서류를 꼼꼼히 살펴보고 나서 검사의 '심문사항' 유출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증인의 설명을 요구했다. 변호인단에 따르면 사전에 증인신문사항을 교환하고 입을 맞춘 행위는 명백해 형사소송법 위반이다.
판사가 증인의 서류와 검사의 심문사항을 대조해본 결과 1~8의 가나다라가 모두 일치했으며, 증인의 서류에는 질문사항이 없고 답변내용만 있었다. 판사는 검찰이 심문사항을 증인에게 미리 유출했거나 증인이 예상문제와 답안지를 검찰에 제공했을 것으로 판단하고 증인의 답변을 요구했다.
증인은 "검사에게 심문사항을 미리 받은 적 없다"고 답변했고, 판사는 두세 차례 동일한 질문을 하고 나서도 증인이 똑같은 답변을 하자 "속기록에 적으세요. 받은 적 없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증인을 향해 "재판정에게 진실선서 하셨죠? 이게 거짓말이면 처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경고했다. 이에 앞서 증인이 판사의 질문에 당황하며 답변을 못하자 판사는 "증인 정신차리세요!"하고 다그치기도 했다.
검사가 이에 대해 답변하려 하자, 판사는 검사를 제지하고 증인의 답변을 요구했다. 증인은 "예상문제를 만든 적은 있지만..."라고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그것은 앞선 증인(조선일보 영업부 담당자)에게 전달해줬으며 검사에게 보내주었다는 말은 끝내 감췄다. 판사는 증인에게 더 들을 것이 없다고 판단해 검사의 설명을 요구했으며, 검사는 '재판의 효율성'을 위해 증인에게 예상문제를 받았지만, 자신이 그것을 '편집'해서 심문사항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결국 조선일보의 증인들이 검사에게 예상문제를 보내주었고, 검사는 그것을 그대로 '읊은' 셈이다. 앞서 증언을 했던 증인은 판사의 요구에 따라 증언석으로 다시 소환됐지만 모호한 답변으로 일관하다가 방청석으로 돌아가더니 곧바로 퇴실해 버렸다. 결국 증인이 검사에게 예상문제를 보냈는지는 '검사의 입'을 통해서 알려지게 되었다. 변호인은 마지막 증인(애드본부 마케팅팀장)을 배제하거나 심문사항을 보고 증언한 부분부터 속기록에서 삭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달라고 판사에게 정식 요청하였으나 판사는 "이미 증언한 내용을 없는 것으로 하는 절차는 없다"며 자신이 증언의 내용을 판단하겠다고 답변하며 상황을 수습했다. 하지만 판사의 표정은 불쾌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8시간 넘게 재판정을 지킨 방청객에게 큰 상처 안겨줘

이 날의 해프닝을 들여다보면 법정의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훼손됐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판사의 재량권으로 충분히 심문사항 유출의 전모를 밝힐 수 있었음에도 증인을 놓아준 점은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검사는 증인과 심문사항을 공유하고 예상문제까지 함께 만듦으로써 신성한 재판을 모독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특히 증인의 심문답변과 토시 하나 틀리지 않게 '심문사항'을 만들어 판사에게 제출한 검사의 불성실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증인에게 받은 예상문제는 심문사항의 참고사항은 될 수 있겠지만, 이번 재판에서 예상문제는 참고사항의 수준이 아니라 '대본'의 수준이었다. 검사는 예상문제를 거의 그대로 읽는 수준이었다는 사실이 판사에 의해서 밝혀졌다. 검사는 '그래도 편집은 했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재구성 수준이 아니라 맞춤법이나 세부적인 것을 교정한 수준에 불과했다. 민주법정에서 증인이 작성해준 예상문제를 그대로 낭독하는 검사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개탄스럽다.
판사 역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다행히 마지막 증인이 예상문제 해프닝을 벌이던 당시에는 앞선 증인이 방청석에 있었다. 판사는 해당 사안이 앞선 증인과도 관련이 있다고 판단해 증언대로 다시 호출명령을 하기도 하였으나, 끝내 앞선 증인에게서 필요한 답변을 듣는 데는 실패했다. 마땅히 증인에게 "이 사안은 (앞선) 증인과도 관련이 있으므로 재판이 끝나기 전까지 퇴실하지 말라"고 명령해야 옳다. 증인들과 검사 사이의 커넥션이 오간 상황에서 증인 한명을 풀어놓음으로써 명확히 정리할 수 있는 사안을 흐지부지하게 만든 일정 정도의 책임은 판사에게 있다. 그리고 판사는 두 증인에게 엄정하게 물었어야 한다.
증인과 검찰이 형사소송법 상의 절차위반으로 법정모독죄의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판사의 판단처럼 "증인이 검사에게 예상문제를 제공"했거나 "검사가 증인에게 심문사항을 유출"했거나 하는 부분을 명확히 물어 이에 대해서 검사와 증인에게 공개적으로 경고를 했어야 옳다. 방청석에서 재판과정을 오랫동안 지켜본 시민들은 이런 절차적 미숙함에 몹시 실망스러운 눈치였다. "위증이 분명한데 판사님은 뭐하시나요?"라는 항의가 들리기도 했다.

재판은 상당히 민주적인 절차다. 단 한번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한 사람의 인생이 파멸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세 번 판단할 수 있도록 삼심제를 두고 있으며, 증인 채택에 있어서도 유불리를 감안해 공평하게 선택권을 주고 있다. 재판정에서의 심문 역시 증인심문이 끝나면 반대심문의 기회를 주고 있다. 재판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실제로 재판과정에 세세하게 담겨있는 민주주의를 직접 확인했다. 하지만 재판정에서의 민주주의는 재판정의 모든 구성원이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의지가 있을 때 실현될 수 있다. 검사와 증인이 미리 입을 맞추고 재판정에 들어선 것 자체는 형법상의 위배사항을 떠나 명백히 재판 민주주의의 훼손이다. 판사는 이것을 제지해 민주주의를 수호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명확한 사실관계를 밝히거나 검사와 증인에게 공개적으로 경고를 하거나, 제재조치를 취하지 않고 "알아서 판단하겠다"는 식으로 유야무야한다면 누가 재판에 귀기울이겠는가. 10월 28일 311호 법정에서 훼손된 민주주의에 대해서 재판 구성원은 책임 있는 답변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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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은 시간에 보도자료를 확인하고 기사를 올렸습니다. 이번 기회에 불온도서 문제가 확실히 결론을 맺었으면 좋겠습니다. 독재시대의 종말을 앞당기는 일에 인사회 출판인 여러분이 힘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화이팅!!!



'불온한 출판사'들이 뒤늦게 소송 건 까닭
'국방부 불온도서' 헌법소원 이어 민사소송까지 가시화



 

   
지난 8월 6일 국방부 불온도서 지침에 대응하기 위해 해당 출판사 관계자들이 최초로 회의를 열었다. 장소는 후마니타스 출판사
ⓒ 오승주
불온도서

 

 

국방부 지침 불온도서 파문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있다. 국방부가 올 7월 19일 이상희 국방부 장관의 지시에 따라 각 군에 내린 '군내 불온서적 차단대책 강구(지시)'를 내려보낸지 18일 만인 8월 6일 해당 출판사들은 긴급 회의를 열고, 다음날 해당 출판사 공동 명의의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발 빠른 행보를 보였다.

 

국방부 불온도서 지침 이후 <나쁜 사마리아인> 등 해당 도서를 펴낸 출판사는 때 아닌 출판고를 올렸으나,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시작한 '불온도서 안티이벤트'와 독자들의 조롱 등 불온도서에 대한 담론이 '발랄'하게 흘러가는 부분에 대해서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출판사들은 국방부의 불온도서 지정이 단순히 조롱하고 넘어갈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했으며 수십 년 전에 이미 자취를 감췄다고 생각한 '판금'의 추억이 2008년에 다시 떠돌아다니는 현실에 우려를 표명했다. 아울러 국가의 부당한 지침에 맞서 출판사가 필자와 독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출판사 공동성명에서는 국방부의 지침이 전근대적일 뿐만 아니라 헌법에서 보장하는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며, 심각한 명예훼손에 해당함을 엄중히 경고하였고 아래의 요구사항을 적시했다.

 

하나, '불온서적 목록'이 작성된 자세한 경위와 그 선정 기준을 공개하고, 학문 사상의 자유 및 출판의 자유를 억압하는 '불온서적 목록' 작성을 즉각 중단·철회하라.

하나, 현재 '불온서적 목록'에 선정된 책의 저자와 출판사에 공식 사과하라.

하나, '불온서적 목록'을 작성함으로써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국민들에게 공식 사과하라.

 

   
이상희 국방부 장관이 23일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를 듣고 있다.
ⓒ 남소연
이상희

 

출판사의 공동 성명에 대해서 국방부는 콧방귀도 뀌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불온도서 파문은 스캔들로 묻히는가 싶었다. 그러나 한아무개 소령(사법시험 45회)·박아무개 대위(사시 47회) 등 군 법무관 7명은 군인들이 불온서적을 소지하지 못하게 한 군인사법과 군인복무규율, 군내 불온서적 차단대책 강구 지시 등이 군인의 행복추구권, 학문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침해해 위헌이라며 10월 22일 헌법소원을 제기했고, 이 문제는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국방부는 현역 군 법무관들이 국방부 '불온서적' 지정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한 것은 군 사상 초유의 '항명'으로 받아들여 징계절차를 밟겠다는 태도다.  

 

한편 이상희 국방장관은 지난 8일 국정감사 답변을 통해 "장병 정신 전력에 이롭지 않다면 계속할 것"이라며 불온서적 지정 방침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23일 국방부 국정감사에서도 이상희 장관은 "장관으로서는 군 기강 확립을 위해 주도적으로 임무를 수행해야 할 군 법무관들이 집단적 행동을 한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혀 사상의 자유라는 기본권보다는 집단적 '항명'이라는 점을 강조해 '징계'에 나설 것임을 분명히 했다.

 

 

출판사들은 왜 그때 '소송 절차'를 진행하지 않았나?

 

불온도서 파문이 한창일 때 해당 출판사의 대책회의에 동석해 진행상황을 지켜온 바로는 출판사들이 이미 소송 절차를 논의하고 있었다. 8월 7일 성명서 작성 때에도 '소송'을 명시하는 문제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8월 7일 성명서에도, 그 후의 대책회의에서도 법적 소송 부분은 당장 시행하지 않기로 협의했다.

 

대표적인 이유로는 국방부의 명백한 견해가 전해지지 않았으며, 불온도서 지정 문제는 엄연히 문화적인 담론이며 그것이 법률적 담론으로 넘어가면 문제 자체가 왜곡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했다. 예컨대 판사와 변호사, 검사가 법리논쟁을 벌일 때는 출판사가 애초에 담았던 기본권 문제라든지 사상의 자유보다는 그야말로 '형이하학'적인 쟁점이 부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발랄한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었다.

 

출판사는 문화적 사유의 보고이며 상상력의 저장소이기 때문에 법률적 논의를 서두르면 상상력의 행동 반경을 좁힐 수 있다는 우려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출판사대책회의에서 법률적인 논의를 뒤로 미룬 것이다.

 

하지만 이상희 국방장관의 국정감사 발언을 통해 국방부의 태도를 간접적이나마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고, 헌법소원에 대처하는 국방부의 모습은 8월 7일 출판사가 제기했던 문제에 대해서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고 말았다.

 

이것이 출판사가 8월 7일과 그 이후가 아니라 10월 27일이 되어서야 소송 절차에 착수하게 된 이유다.

 

'실천문학', '후마니타스', '철수와 영희', '돌베개' 등 11개 출판사와 한홍구·곽동기·정태인·홍세화씨 등 저자 11명은 이날 "국방부가 불온서적 목록을 작성해 3군에 금서조치를 한 것은 헌법상 언론·출판의 자유 등 기본권을 침해했고 저자와 출판사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서울중앙지법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출판사와 필자들이 고소장에 적시한 손해배상 책임 근거는 아래와 같다.

 

▲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언론ㆍ출판의 자유와 집회ㆍ결사의 자유를 가진다.'(헌법 제21조 1항)

▲'언론ㆍ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ㆍ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헌법 제21조 2항)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헌법 제19조)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헌법 제22조 제1항)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보장.(헌법 제17조)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위법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민법 제750조)

▲'타인의 신체, 자유 또는 명예를 해하거나 기타 정신상 고통을 가한 자는 재산 이외의 손해에 대하여도 배상할 책임이 있다.'(민법 제751)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자에 대하여는 법원은 피해자의 청구에 의하여 손해배상에 갈음하거나 손해배상과 함께 명예회복에 적당한 처분을 명할 수 있다.'(민법 제764조)

▲기타 형법 제309조에 규정된 '출판물 등에 의한 명예훼손' 또는 형법 제307조에 규정된 '명예훼손'

 

위의 근거는 법무관들이 10월 22일 헌법소원을 제기한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철수와영희 출판사 박정훈 대표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위법성을 가려내기 위해 최근 헌법소원을 낸 군 법무관들과도 연대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해 이번 소송이 위헌소송과 긴밀한 관련이 있으며 앞으로도 긴밀한 공조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위 출판사와 저자들은 국방부의 불온서적 지정이 ▲ 헌법상 보장하는 언론, 출판의 자유 등 기본권을 침해하고 ▲ 위 도서 등을 저술하고 출판한 저자와 출판사의 명예를 훼손했으므로, 이를 시정하기 위해 국방부의 상급 기관인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 중앙일간지 1면에 사과 광고를 실을 것과 ▲ 출판사와 저자들에게 각 500만원에서 1천만원씩 손해 배상할 것을 요구키로 했다.

 

   
고소장에 명시된 출판사와 필자, 해당도서에 대한 목록표
ⓒ 철수와영희
국방부 불온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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