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전만 되면 긴장하는 '부부'

와이프의 언니, 처형은 일본인과 결혼해 현재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처형과 결혼한 일본인은 나이는 저보다 어리지만 항렬로 위이기 때문에
손윗동서가 되고 항상 형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들을 낳아 잘 살고 있는데,
금슬이 좋던 부부 간에도 "한일전"의 묘한 긴장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한일전만 열리면 무척 예민해집니다.
사실 저는 한일전보다 한일전에 대처하는 일본인 형님네 가족이 더 재밌습니다.

한국이 일본에게 콜드게임으로 지던 3월 7일 가족은 모처럼 외식을 했습니다.
일본도 한국 못지 않게 한일전에 대한 열기가 뜨거워서 그 식당에는 대형 TV에 모니터를 설치해
야구를 중계하고 있었습니다.
그 식당은 형님네 가족과 안면이 있어서 친했는데
그때만 해도 2:2로 동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점수차가 벌어지면서 한국팀이 민망해지기 시작하자
처형은 심기가 불편해졌습니다.
분노게이지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더니
급기야 "우리 집에서 밥 먹자. 무슨 외식이냐"며 그냥 집으로 가 버리는 겁니다.
그 날 형님네 가족은 집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오늘도 한일전이 열렸습니다.
형님네 가족은 또 '그날'처럼 될까봐
오늘은 아예 집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우리는 그쪽의 분위기가 무척 궁금해서 어떠냐고 자꾸 물어봤었죠.
1점 차이 짠물투구로 회가 이어지자 서로 말을 아끼더니
급기야 우리쪽에 승기가 점쳐지는 순간 문자가 하나 도착했습니다.

두부김치를 먹으면서 즐기고 있다는 말에 'ㅎ'자가 더 붙었습니다.
ㅎ자는 1:0으로 승리하고 있기 때문에 붙은 표시겠죠.



▲ 한일전 승리가 점점 우리쪽으로 기울고 있을 때 처형으로부터 재밌는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한중일 네티즌들, 함께 경기 보면서 갈등을 식힐 수 있다면


한중일은 정서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급한 것도 비슷하고 사고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일전, 한중전, 중일전에 한중일 세 나라 사람들이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은 한중일이 비슷하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이 세 나라의 경기가 끝나면
그 나라의 게시판은 난리가 납니다.
플레이를 잘 하면 잘 하는 대로 악플이 달리고,
못 하면 못 하는 대로 악플이나 조롱하는 댓글이 달립니다.

블로그에서는 좀처럼 상대 국가의 승리와 실력을 인정해주지 않는 풍토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한중일 세 친구가 한 곳에서 경기를 지켜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로 함께 얼굴을 마주보고 경기를 보면 어떤 효과를 낼 수 있는지는 일본인 형님네 부부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 번 콜드게임에서 한국이 대패했을 때 일본인 형님은 표정관리하느라 몹시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처형의 마음을 생각해서입니다.
물론 부부이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부부가 아니라 함께 밥도 먹고 얼굴도 마주보는 친구라면
경기에서 크게 패해서 기분이 상한 친구를 위해서 최소한 자극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끔 블로거뉴스를 통해서 경기 후의 일본 네티즌과 중국 네티즌들의 반응을 보지만
한일전이 끝날 때마다 한국과 일본 사람들의 사이는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스포츠'를 떠나서 어떤 특이한 감정이 자리잡고 있고, 그것은 '국가'라는 묘한 상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어를 조금씩 공부하고 있는데,
일본에 여행갈 일이 있다면 일본에서 사귄 친구와 함께 한일전을 함께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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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9-03-09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야구 재밌었어요 그쵸? ㅎㅎ
전 8회쯤 되니까 이렇게 즐거운 경기를 봤으니 뭐 져도 상관없겠다 싶던데요. ^^
한중일 세나라 모두 그저 즐겁게 즐기는걸 너무 못하는거 아닐까요? 최선을 다한 경기였다면 승패를 떠나 박수를 쳐줄수 있을텐데 말이죠.

승주나무 2009-03-10 18:15   좋아요 0 | URL
저도 후반부만 봤는데 재밌더라구요..
4:0으로 이겼으면 재미 없었을 텐데.. 일본선수들이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을 보니까 더 재밌는거 있죠.. 저 나쁘죠^^

무스탕 2009-03-10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일본에게 지던날 다음 경기는 1-0으로 이길거야! 그래야해!
그래야 약이 박박 오르지. 1점만 내면 비기고 2점만 내면 이기는 경기인데 그 1점을 내지 못해서 지고 나면 얼마나 약오르고 허탈하겠어..
그랬거든요? 그랬더니 제 소원을 들어주느라 정말 1-0으로 이기더라구요.
으하하하~~~ 얼마나 재미있었는지요. ㅎㅎ

승주나무 2009-03-11 00:42   좋아요 0 | URL
ㅋㅋㅋ 백배공감~
 
 전출처 : 승주나무 > 기형도 시인 20주기를 찾은 특별한 문상객들


▲ 기형도 시인이 아끼던 수동 타자기로 집자한 <기형도 전집>이라는 글씨체는 이제 기형도의 상징이 되었다. 친필로 똑바로 쓰다가 타자로 된 시를 읽고 시인이 몹시 흐뭇해 했다는 일화를 생각하게 만드는 현수막이다.



20년 만의 제사를 찾은 문상객들

좀 특별한 문상을 다녀왔다. 벌써 20년이나 지난 기형도 시인을 추억하는 <기형도 시를 읽는 밤>에 초대됐다.
이 날은 기형도 시인이 좋아하는 진눈깨비는 아니지만 하루 종일 굵은 비가 내려 자연스럽게 음습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회를 맡은 '대중음악가' 성기완 씨는 "기형도 시인이 홍대 주변에서 서성거리다가 이곳(이리카페)로 들어왔을 것 같은 밤이다."라고 말했다. 3월5일 저녁 인터넷 서점 알라딘(www.aladin.co.kr/)과 기형도 시인의 주요 작품들을 출간한 문학과지성사(www.moonji.com/)가 공동으로 주최한 <기형도 시를 읽는 밤>에는 시인과 동시대, 같은 공간에서 부대꼈던 소설가 성석제, 시인 이문재, 황인숙 씨와 시인의 후배군인 김중혁, 한강(소설가), 함성호, 진은영, 최하연(시인) 등이 애써 준비한 시들을 낭독하며 독자들과 함께 했다. 이 시인, 소설가들은 다른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기형도에게 크고 작은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 기형도의 시 <안개> 일부


이 날 인상적이었던 것은 두 가지였다.
먼저 발디딜 틈이 없이 들어차 기형도를 추억하는 독자들이다. 알라딘에서 이날 밤을 위한 티켓 25장(1장당 2명)명을 내놓았을 때 티켓을 얻기 위해 정원의 10배인 250명이 신청을 했다. 저마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들려주며 기형도 시 읽는 밤에 참여하기를 희망했다. 인터넷에서의 열기를 말해주듯 그날은 자리가 없어서 맨바닥에 앉아서 행사를 즐길 정도로 빽빽했다. 기형도 20주기에 관심을 갖는 취재진은 뒤로 하더라도 시인이 생전에 갖고 싶었던 '독자'들이 20년이 지나도 잊지 않고 찾아와주었기 때문에 사회자도 "기형도 시인이 행복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형도는 생전에 끝내 시집을 독자에게 보여주지 못하고 사후에야 동료들에 의해서 작품집이 출간되었다) 주인공인 시인은 없고 나머지 사람들이 다 주인공이 되는 특이한 제삿날이라는 인상이었다.
행사에 참여한 문인들은 오늘의 행사를 위해 창작시도 쓰고 작품집도 읽고 했지만 저마다 기형도의 흔적들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었다. 기형도로부터 일부러 도망친 문인도 있었다. 그 사연이 참 다채로웠지만 그들에게 기형도의 '시 내음'을 맡을 수 있었다.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 기형도의 시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일부



▲ 소설을 쓰는 한강은 기형도 시집을 대학 1학년 때 보았을 때 겉이 앙상해 보였는데 내용은 전혀 앙상하지 않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의 시집에는 밑줄이 마구 그어져 있었다. 유일하게 밑줄이 하나도 그어지지 않았지만 기형도 시집 하면 생각난다는 <기억할 만한 지나침>을 낭독했다.


성석제 "'노인의 노안을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나라'라고 했을 것이다"

문인들은 기형도 작품 중에서 유난히 흔적을 깊이 남겼던 작품을 낭독했고 이 날을 위해 특히 시를 써오기도 했다. 이 시들은 '샘플링'이라고 하는데, 기형도의 시어를 서캐훑이해서 20주기에 어울리는 새 시를 하나 만든 것이다. 시인, 소설가들이 좋아했던 작품의 목록을 올려 본다.

기억할 만한 지나침(한강),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김중혁), 어느 푸른 저녁(성석제), 입 속의 검은 잎(이문재), 그 집 앞(황인숙), 빈집(백현진, 퍼포먼스)

낭독도 낭독이지만 이 날 문상 온 문인들의 재기발랄하고 날카로운 멘트들이 유난히 인상적이었다.

소설가 김중혁은 습작기에 시인에 대한 열망이 강했지만 시를 쓰지 못해 소설을 쓰게 됐으며 소설 속에 그 열패감이 남아 있다고 회고했다. 소설가로서 이 자리에 초대된 것은 자신이 유일하며(성석제는 시도 쓰고, 한강은 문체가 유려한 시 같으니까) 소설을 열심히 써서 기형도 낭독회에 초대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성석제는 기형도 20주년 소회를 묻는 사회자의 질문에 갑자기 '유인물' 이야기를 꺼냈다.
"낭독을 하려고 유인물을 보니 글자가 안 보여 혼났다. 이렇게 노인을 배려하지 않는 나라가 있을까? 아마 기형도가 살아 있었으면 이렇게 불평했을 것이다"
청중들은 이 소설가들의 재담에 그 날이 제삿날인줄도 모르고 킬킬거렸다. 황인숙 시인은 더 이상 보탤 것 없는 말로 기형도에 대한 감상을 정리했다.
"나잇살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도 참 살이 많이 쪘구나. 기형도도 살이 많이 쪘으련만."
이 말에 옆에 있던 이문재와 성석제가 몹시 흥분했다. 성석제가 한마디 거들었다.
"저는 보이는 곳에 나잇살이 있고, 안 보이는 곳에 노안이 있습니다."

기형도 시에 대한 시인들의 고뇌도 엿들을 수 있었다. 함성호 시인은 십 년만에 읽은 느낌이 '유치하다'고 말했다. 기형도는 죽었지만 자신은 살아서 시를 계속 써야 했기 때문에 시가 늙고 노련해지는 게 마음에 걸린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유치함으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나는 박제된 시와 나잇살 먹은 시를 동시에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문재가 이런 느낌에 대해서 좀 더 정확하게 지적해 주었다. 그는 "도대체 무엇이 젊은이(기형도)로 하여금 이토록 단정적이고 단호한 언사를 사용하게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이것은 기형도 시를 오랫동안 마주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공통적인 특징이다. 이 경우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는데, 기형도를 넘어서거나 기형도를 회피하게 된다.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 기형도의 시 <오래된 書籍(서적)> 일부


▲ 기형도에 관해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단짝친구 성석제다. 시인이 생을 마감한 3월 7일로부터 두 날 남짓한 때에 첫시집을(입 속의 검은 잎) 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노력 때문이다. 원재길, 조병준, 이영준, 후배 기자 박해연 등은 누구의 위임도 받지 않은 편집위원으로 자처하고 첫 시집과 전집, 최근 출간된 20주기 기념 문집 작업을 함께 했다. 기형도의 첫 시집을 황망히 엮고 지금은 작고한 김현 선생을 찾아갔을 때 김현 선생이 직접 원고를 받으며(선생은 당시 몸이 불편했다) 손을 꼭 잡아주셨던 그 손의 힘이 기억에 남아 있다고 회고했다.



대학 3학년 때 손에 쥔 유고시집 뒷장에 쓴 말 "1989년 7월 15일 나에게"

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
그날 마구 취한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 기형도의 시 <그 집 앞> 일부

2시간이라는 짧은 '의식'을 위해서 문인들과 음악인들이 오랫동안 준비했을 법한 재주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독자들이 말할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알라딘에 남긴 250개의 댓글을 보면서 독자들의 생생한 반응을 엿볼 수 있었다. 진행자 성기완 씨는 그 중에 몇 개를 소개하는 것으로서 위안을 삼아 달라고 요청했다.

제가 갖고 있는 기형도 시인의 유고시집 맨 뒷장에는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이 시집을 샀던 날짜가 적혀 있습니다. '1989년 7월 15일 나에게'. 시집을 구입한 이후 정말 책이 낡을 정도로 읽고 또 읽었더랬지요. (jure)

기형도가 죽은 날 대학 3학년이었던 몹시 오래된 독자가 들려주는 회고와 시집에 기록된 말이 청중들의 가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독자들은 자신의 경험 속에 자리잡은 기형도라는 숨겨진 공간을 슬쩍 끄집어내 보여주었다. 그들에게 기형도는 사라지지 않는 추억이다.

내가 그 시를 처음 알게 된 건 열일곱살 때 였는데 저는 지금 서른네 살의 아이 아빠가 되었어요. 그렇지만 기형도 시인은 언제나 그대로 이네요.. 15년이란 세월이 흘러 아이 아빠가 된 지금 기형도 시인이 쓴 <엄마생각>이란 시를 나의 아이도 함께 느꼈으면 좋겠어요 (비쿨)

네티즌 윤화는 수험생이었는지 현대시 문제집에서 <입 속의 검은 잎>을 발견해 문제를 풀다 말고 시에 빠져들었다고 말했다. 기형도가 교과서에 실린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문청'이라는 이름을 들었던 사람들은 문인이나 독자를 막론하고 기형도를 모방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나 보다. 네티즌 'mamasday'은 스무 살 때 기형도 시집을 산 이후로 시풍이 기형도의 그것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기형도가 시집에 잃은 사랑 이야기를 쓴 부분이 있어서 그런지 기형도 하면 '실연'이나 '슬픈 연애'라는 이미지가 덧붙었다. 특히 <빈집>이라는 시가 그러한데, 네티즌 'dudn'은 <빈집>을 처음 읽었을 때 잃었던 사랑을 기억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형도 시가 '그로테스크'라는 이름을 얻었던 것처럼(김현에 의해) 2~30대 독자들을 매료시킨 것은 그로테스크한 감수성이었다.

20살이 되어서 그의 시집을 읽고 저는 많은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 후부터 매년 칼바람이 불거나 눈이 오는 밤이면 자연스레 그의 시들이 생각나네요.
아마도, 그로테스크한 그의 시들이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닮아 있어서일까요. (아난)

네티즌 '타인의삶'은 "20대를 통과하면서 겪었던 현실에 대한 억한 심경과 분노"를 위로받았다고 썼다. 네티즌 'renee'는 '"이십 대의 밤, 외로이 앉은 새벽, 기형도의 시를 읽으며 내 삶과 영혼과 자유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고 말했다.

네티즌 로맨티스트는 "대체 기형도 시인은 왜 차별화가 되는건지" 궁금하다고 썼는데 수많은 댓글들을 보면서 그 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시를 읽는 독자도 시를 쓰는 시인도 몹시 희귀해졌다는 게 요즘 드는 생각인데, 기형도가 대중의 사랑을 잔뜩 받은 거의 마지막 시인이 아닌가 싶다. 정확히 말하면 대중들은 그의 '유령'을 사랑한 것이겠지만, 20살이나 먹은 나이 든 유령이 지금도 사랑을 잔뜩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재미있었다.


▲ 좌석이 없어서 맨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았어도 나쁘지 않은 기색들이었다.

◆ 기형도 시인의 주요 작품과 최근 출간된 20주기 기념 문집 ◆ 
 

 
▲ 2008년 여름 동요를 부르는 잡곡가(잡다한 노래를 짓는다고 해서) 백창우가 기형도 <빈집>이라는 시에 노래를 붙인 <빈집>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날 백재현 씨의 퍼포먼스 '빈집'과 비교하면 재밌을 것 같아서 첨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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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서재에 들어왔는데,

캡쳐가 기가 막히다.



 옛날에는 캡쳐 하기 이벤트를 많이 했는데..

서재지기의 방문자수가 0000이 될 때까지 9999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댓글을 다는 짜릿함~~

그런 이벤트 이제는 잘 안 하나 보다^^

6만힛 된 기념으로 올려본다..
즐찾수 자랑하는 건 아니구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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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09-03-06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대단하네염
6만 힛 추카추카 ^*^

stella.K 2009-03-06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해 봐.

마늘빵 2009-03-07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만 힛 축하해요. :)
 
다르푸르 탈영병 "성폭행 하지 않으면 상관에게 고문당해"

오늘은 신문을 보는데 수단 탈영병이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 주었다.

정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것들이었다.
오죽했으면 그는 비인간적 범죄를 더 이상 참아낼 수 없어서 탈영했다고 하니 말은 다 한 것 같다.

예전에 서당에서 훈장님께 맹자를 배우던 시절에 '측은지심'이라는 말을 배웠다.
맹자는 측은지심의 예로 유명한 '우물 이야기'를 든다.

아이가 우물을 향해 기어가는 모습을 보면 당장 달려가 아이를 구하려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친구들에게 아이를 구한 것을 자랑하려고도 아니고,
아이의 부모님께 칭찬을 받고 싶어서도 아니다.
마음에서 불쌍다하는 생각이 올라오기 때문에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이 이타적이고 선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른바 '성선설'의 주요한 근거가 되었다. 수천 년 동안...

훈장님은 막가파를 예로 들며
그들은 잘 사는 사람에 대해서는 여지 없이 잔인하게 살해했지만,
가난한 여성은 풀어준 일을 지적하셨다.


다루푸르 잔자위드 민명대, 레바논의 팔랑헤당 민병대가 이토록 잔인하게 사람들을 학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마치 마우스 클릭하듯이 방아쇠를 클릭하고 칼로 그들은 잔인하게 살해하거나 신체부위를 절단하고 여성들을 성폭행하고, 어린아이들을 가차없이 죽인다.

이것을 당해보지 않고서는 그 슬픔과 고통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까. 사람은 왜 꼭 당해 봐야 그 고통을 체감하게 될까.

좀 사소하지만 나에게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이 일이 2003년부터 올해까지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6년간 30만명이 사망했고 250만명이 난민이 되었다니... 아 21세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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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 언론자유에 <이만하면>이라는 중간사는 있을 수 없다

 

  李政權 때의 일이다.  
펜 클럽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분들을 모시고 조그마한 환영회를 갖게 된 장소에서 각국의 언론자유의 실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끝에 모 여류시인한테 나는 『한국에 언론자유가 있다고 봅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 여자 허, 웃으면서 『이만하면 있다고 볼 수 있지요』 하는 태연스러운 대답에 나는 내심 어찌 분개를 하였던지 다른 말을 다 잊어버려도 그 말만은 3,4년이 지난 오늘까지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시를 쓰는 사람, 문학을 하는 사람의 처지로서는 <이만하면>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적어도 언론자유에 있어서는 <이만하면>이란 中間辭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언론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의 둘 중의 하나가 있을 뿐 <이만하면 언론자유가 있다고> 본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그 자신이 시인도 문학자도 아니라는 말밖에는 아니된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소설가, 평론가, 시인이 내가 접한 한도 내에서만도 우리나라에 적지 않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문학의 후진성 운운의 문제를 넘어서 더 큰 근본문제이다.
  

- 김수영 산문전집 <창작자유의 조건> 중에서

 정말 김수영다운 멘트다. 나는 김수영 시집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김수영 산문집은 내 영혼을 받치는 기둥으로 삼고 있다. 얼마 전 군대 간 친구에게 연필자국 짙게 묻은 이 책을 선물할 때의 아쉬움이란.. 참고로 김수영이 말한 이정권은 이명박이 아니라 이승만을 말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걸 언론자유에 빗대서 표현하면

"1%의 언론자유가 없다는 것은 100%의 언론자유가 없다는 것과 같다. 100%의 언론자유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은 사실상 그곳에 언론의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장자 - 비싼 월급에 눌려 말하지 못한다면 제사 때 쓸 돼지고기와 다를 게 없다
 

 장자가 강가에서 놀고 있었는데, 나라의 지체 높은 관리가 천금을 들고 와서 관직을 맡아달라고 사정했다.
장자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관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비싼 돈을 받고 관직에 들어가는 것은 제사에 바쳐지는 돼지와 같다. 제사에 바쳐지는 돼지는 삼시 세끼 진귀한 음식을 먹고 안락한 생활을 즐긴다. 하지만 그 돼지의 종착역은 머리가 잘리는 제삿상이다.
오로지 제삿상에 좋은 머릿고기를 올리기 위해서 그렇게 좋은 대우를 받은 것이다. 나를 제삿상의 머릿고기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제발 나를 귀찮게 하지 말아 다오."- <장자> 중에서



장자의 낭만적이고 유유자적한 생활에 신비감을 가지고 있다 보니 장자가 언론자유에 대해서 무척 중요한 말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돈을 받으면 그 때부터는 입이 막히는 것이다.


급암 - "한무제 당신은 말로만 착하지만 속은 구렸어"를 면전에다 대고 한



 '급암'(한무제 때 활약했던 신하로 직간하기로 유명했음)은 한무제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폐하께서는 속으로는 욕심이 많으면서 겉으로만 인의를 베풀려고 합니다."라고 대들었던 신하였다. 한무제는 급암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마음속으로 급암을 존경했다.

일찍이 한무제가 장막 안에 있을 때 급암이 들어와서 일을 보고하려고 했다. 이때 천자는 관을 쓰고 있지 않았으므로 멀리서 급암을 바라보고 장막 뒤로 몸을 피하고 다른 사람을 시켜 보고를 재가하도록 했다. - 사기열전, 급정열전

하지만 급암은 중용되지 못하고 한직에 머무르다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맹자 - 한 치를 구부려 열 자를 얻는다면 언젠가는 열 자를 구부려 한 치를 얻을 날이 온다


맹자가 전국을 왕래하면서 아끼는 제자들을 데리고 다녔는데, 그 중에서 진대라는 제자가 선생님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안타까워서 한마디 한다.

"선생님은 제후들을 만나서 뜻을 펼치시면 될 것을 왜 그렇게 고지식하게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번 자세를 숙여서 제후들을 만나면 작게는 패자가 되어 천하를 호령할 것이고, 크게는 선생님이 뜻하시는 왕업을 달성하실 수 있으실 텐데 말이죠. 옛말에 한 치를 구부려 한 자를 얻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 한 치(尺)은 한 자(尋)의 1/10이다.

맹자는 제자의 말에 그 사정을 상세히 이야기해주며 마지막으로 의미심장한 말을 해준다.

"네가 한 치 한 자를 이야기하는 것은 사사로운 이로움으로 대의를 설명하니 어불성설이다. 사정이 그와 같다면 한 자를 구부려 한 치를 얻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맹자의 마지막 말은 언론과도 관계 있지만, '민주당'에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한다.

'언론자유'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여기에는 '적당히'라는 중간사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호리지차 천리지말(毫釐之差千里之末). 손톱 만큼한 차이가 나라를 무너뜨리는 상황까지 가게 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언론의 자유'로 향해 있다. 언론의 자유는 한 치의 땅뙤기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가냘픈 유리그릇을 요즘은 스태인레스그릇 쯤으로  생각해 함부로 입을 놀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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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ia 2009-03-05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장자는 접때 얘기해주신 책이에요!
맹자집주도 보관함에 넣었고(언제읽을지는 모르겠어욤^-` ㅎㅎ)
음- 사기열전은 어떤 책이 좋은가요?

승주나무 2009-03-05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존하는 판본은 까치가 괜찮지 않나 싶습니다. 을유문화사판이 좋은데 절판이더라구요. 을유판이 가독성은 좋죠.. 쉬운 언어로 먹기 좋게 썰어 놓았으니^^

Alicia 2009-03-05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승주나무님 고맙습니당^^ 이렇게 빨리 댓글 달아주시구-
실은 누가 좀 물어봐 달랬어요 :)

승주나무 2009-03-05 17:54   좋아요 0 | URL
글쿤요.. 저도 놀랐습니다. 그 분이 조금 더 기다려주실 수 있다면 김영수 씨의 사기 완역을 기다리시라고 하십시오. 김영수 씨는 <난세에 답하다>는 책을 쓰신 분인데, 중국에 수십 번 다녀오시면서 사마천에 가장 미친 한국인이거든요^^

제가 알라딘에 들어와 있어서 이렇게 빨리 댓글답니다.

Alicia 2009-03-05 23:56   좋아요 0 | URL

아, 사기 읽고 계시답니다 지금요. ^^
전 다른고전 안읽고 장자부터 읽어도 괜찮을지 살짝 걱정이에요.
그래도 우화내용은 옛날옛날에 몇개 본 적 있어서 그 익숙함에 기대어 시작해보려해요. 고맙습니다- 승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