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코스 지음, 김병철 옮김 / 범우사 / 1999년 2월

폴리데크테스 왕도 오래지 않아 죽고 말았으므로, 왕위 계승권은 당연히 리쿠르고스의 것이었다. 실제로 리쿠르고스는 얼마 동안 통치를 하였다. 그러나 왕비인 형수가 잉태중임을 알게 된 리쿠르고스는 즉시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만약 태어날 아기가 남자아이라면 왕비의 소생이 왕국을 계승하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자신은 오직 후견인으로서 장차 출생할 아기를 대신하여 정무를 도와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섭정을 스파르타 인들은 프로디쿠스라고 부른다.

 


그런데 왕비로부터 리쿠르고스에게 비밀스런 제안이 전해졌다. 자신과 결혼을 하고 리쿠르고스가 왕위에 오른다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의 아기를 없애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리쿠르고스는 왕비의 사악함에 몸서리를 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거절의 뜻을 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왕비에게 친근감을 표시하면서 감사와 기쁨의 뜻을 전하는 사신을 보내었다. 그러나 아기를 강제로 유산한다면 왕비의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차라리 아기가 출생하는 대로 자신이 직접 없애버리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교를 통하여 마침내 왕비는 아기를 분만하기에 이르렀다. 왕비가 진통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리쿠르고스는 사람을 보내어 옆에서 모든 일을 지켜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만약 여자아기를 낳거든 여인들에게 맡기고, 남자아기를 낳거든 자신이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든지 상관하지 말고 즉시 자기에게로 데려오라고 일렀다.

 


때마침 리쿠르고스가 여러 원로원들과 함께 식사하고 있을 때 왕비가 남자아기를 낳았다. 아이는 곧 식사하고 있는 리쿠르고스에게 전달되었다. 리쿠르고스는 아기를 받아 안고 둘레에 앉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스파르타 인들이여, 그대들의 왕이 나셨소.”

 


말을 마친 리쿠르고스는 아기를 왕좌에 눕히고 카릴라우스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 이름의 뜻은 ‘만백성의 기쁨’이라는 뜻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리쿠르고스의 고귀하고 올바른 성품에 감탄하고 기뻐하였다.

- 『플루타르크 영웅전』, 「리쿠르고스 편 」

 


사람이 자기 몸 하나도 가누기 힘들다고들 하는데, 정계와 같은 곳에는 워낙에 대립과 암투가 강해서 양쪽이 만족할 만큼 행동하기가 어렵다. 대개 그 어려운 입장에서 유연히 벗어나는 사람들은 양쪽 중 어디에도 편중되지 않고 완숙한 제3의 대안을 내놓는다.

 


그것은 양쪽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만큼 서로 약점과 모순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맹자는 사람이 친분을 가지고 설득하거나, 살이 저미도록 간절하게 설득하는 것은 극복하기 어렵다고 했다. 결국 냉정함을 지킨다는 것은 아무리 상대가 달콤하고 강력하게 설득한다 하더라도 중심을 잃지 않고,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유혹과 설득 중 가장 이기기 힘든 것은 사회라는 조건이다. 사회의 조건에 따라 사람들은 희비가 엇갈리기도 하고, 자신의 꿈을 포기하기도 한다. 무턱대고 저항할 수도 없는 입장이고, 그렇다고 간, 쓸개 다 빼놓고 끌려갈 수도 없는 입장이다. 특히 리쿠르고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섭정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균형감각을 지키기 힘들다. 동양에도 주공이라는 사람이 어린 임금을 대신해서 섭정을 펼쳤는데, 인정(仁政)을 펼쳤음에도 주위의 모진 모함에 시달려야 했다. 권력의 핵심이나 일상의 자리에서나 선택을 언제나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한다. 어디서든 성공의 열쇠는 분위기를 압도하고 장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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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 지음, 김병철 옮김 / 범우사 / 1999년 2월, 350쪽 

 

호전적인 스파르타의 법률에도 은 나라와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번 전쟁하는 것은 금지하고 있다. 적군이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 익숙해지면 전쟁을 통해서 오히려 적을 훈련하고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다. 후세의 아게실라우스 왕은 이러한 점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왕이 자주 전쟁을 한 결과, 처음에는 상대도 되지 않았던 테베스가 라케다이몬과 세력을 겨룰 지경으로 강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날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아게실리우스 왕을 보고 안타르키다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전쟁을 원하지도 않았고 또 할 줄도 모르던 테베스 사람들을 훌륭한 전사로 만드시느라 그토록 애를 쓰시더니, 그 값을 톡톡히 받으셨군요.”

  - 『플루타르크 영웅전』, 리쿠르구스」 편 중에서

 

습관의 힘은 무섭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 사람은 죽음에도 익숙해질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 의해서 하나의 고착화된 이미지로 보인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더구나 그것이 내가 만든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옳은 소리를 한다지만 너무 자주 마음속의 이야기를 해버리면 진실의 의미는 이상하게도 상쇄되고 만다. 화를 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무는 개 짖지 않는다’라는 속담처럼 정말 무서운 사람은 자주 화내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무섭다.


습관과 함께 우리가 가진 적응력도 있다. 어디에 떨어지든 금세 적응해 버린다. 문학자나 철학자는 어디에든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작을 만들어낸다.


나는 내가 제일 무서울 때가 이미 어떤 일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잡고 있을 때이다. 거기에 이미 나는 없다. 어떤 일에 부딪치면 기계처럼 자동 동작이 나오는 것이다.


참 궁금하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만 신은 신비로운 것들을 보여주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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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드는 말을 들으면 그가 무엇에 눈이 가려 있는지를 알고, 마음 깊이 물들어버린 말을 들으면 그가 무엇에 빠져 있는지를 알며, 못된 말을 들으면 그가 어떻게 원칙에서 멀어졌는지를 알며, 그가 둘러대는 말을 하면 아쉬워하는 바를 안다.

詖辭에 知其所蔽하며, 淫辭에 知其所陷하며, 邪辭에 知其所離하며, 遁辭에 知其所窮이니라.

- ꡔ맹자ꡕ , 「공손추 상」 2


맹자는 바르지 않은 말을 하는 사람은 분명 뭔가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기울어진 부분을 잘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때로는 그것이 그가 의도한 것이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게 빠져드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들은 자신들이 꾀가 많거나 기술이 좋아서 온전히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빤히 보고 있는 사람 앞에서 술수를 부리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말은 서로에 대한 약속이기 이전에 자신에 대한 약속이자, 진실에 대한 약속이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진실에 닿아 있어야 말로서의 품위와 의의를 지킬 수 있다. 그러나 말로서 말을 무마하고, 진실까지 어떻게 해보려는 사람들은 이미 듣는 사람에게 정당하지 못한 약점을 노출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오래 속일 수 없다. 지금까지 속여 온 것도 그들의 기술 때문이 아니라 그에 대한 믿음 곧 진실의 힘 때문이었다. 진실의 힘이 다 떨어지면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오랜 길을 돌아 진실로 다가가는 말은 있다. 그러나 진실에서 멀어지는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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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건 / 이원길 / 신원문화사, 326쪽(1,2회 두 권)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어느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시장 구석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이 둘이 뭔가를 두고 말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 아이들은 공자를 보더니 공자에게로 와서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첫 번째 아이가 말했다.



‘선생님, 우리는 지금 해가 언제 가장 커지느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요, 저는 해가 아침에 궁궐보다 더 크게 보이기 때문에 그 때가 가장 커진다고 생각해요. 중천에 떠버리면 주먹만해져서 미미하잖아요.’



두 번째 아이가 금세 대든다.



‘아니야! 선생님,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는 옷을 벗고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흐르기 때문에 가장 큰 거에요. 해는 뜨거운 불덩이로 이루어졌는데, 가장 뜨거울 때가 가장 클 때니까 한낮이 해가 가장 클 때가 아니에요.’



모두 공자에게 의견을 물었다. 고심하던 공자는 이내 입을 연다.



‘음,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누구의 이견이 옳다고 딱히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아이들은 실망하면서 돌아갔으나, 제자들은 뭔가 깨닫는 바가 있었는지 저마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 ꡔCEO 공자ꡕ 중에서





사람은 세상에 오래 살아갈수록 덕과 지성이 쌓여간다. 덕과 지성과 함께 커지는 것은 그에 따르는 명예이자 기대치이다. 대학교수나 학교 선생이라고 하면 아이들의 질문을 청산유수처럼 해결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때문에 아무리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나름대로의 대답을 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고 내가 나의 기대치에 이끌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을 하려고 애쓴 적은 없는지 반성을 하게 된다.





만약 초등학교 초년생 같은 조카가 내게 뭔가를 물었을 때 나는 ‘모른다’고 용감히 대답할 수 있을까. 우리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속으로 진실은 숨어버린다. 우리들은 당연하다고 치부된 말의 쓰레기장을 뒤적이며 당연하지 않은 것을 발굴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학자들이 자신의 학문에 단순히 솔직할 수만 있더라도 지금처럼 낙후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한탄하기도 한다. 진정 우리가 의지하고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할 수 없다’라고 듣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우리에게 ‘인간’이 아니라 ‘신화’가 되어 버린다면 그와 우리는 서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진실은 용기 있는 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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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우리가 삶에 걸고 있는 기대는 진실로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삶이 우리들에게 걸고 있는 기대인 것이다.”

우리는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멈출 필요가 있다. 그 대신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매일같이, 또는 수시로 삶에게 질문을 받는 존재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대답은 반드시 말과 명상이 아닌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처신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궁극적으로 삶의 의미는 삶의 문제에 대해 올바른 대답을 찾아내야 한다는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리고 개개인의 앞에 끊임없이 놓여지는 삶의 과제를 수행해 나가는 것이다.

- 빅터 플랭크, ‘죽음의 수용소에서’ 본문 중에서


빅터 플랭크 박사는 실존적 정신요법의 창시자이다. 인간의 정신을 히스테리로 세분화시키지 않고, 인격 단위로 판단하는 것이다. 우리가 삶에게 의미를 묻는 것이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의미를 묻고 있다는 의미심장한 표현은 니코스 카잔챠키스의 말을 연상하게 한다.


“신은 죽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살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신을 가지고 목적에 맞게 살렸다 죽였다 한다. 신은 우리의 논쟁 유무와 관계없이 자유로운 존재다. 그 자유를 인간적으로도 존중할 필요가 있다.”


어제 2호선을 타고 집에 가는 길에 한 부부가 타더니 에어컨을 틀지 않았다고 지하철공사에 전화를 하라고 부인한테 이야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당연하고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으면 불만을 거침없이 토로하는 것은 현대인의 익숙한 습성이지만, 이런 것들이 소중하기만 한 사람들에게는 그저 참을 만한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누리는 시대가 얼마나 오랜 과정과 대가를 겪고 난 것인지 알기 때문에 쉽게 불평하지 않는다. 다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을 두고 불합리하고, 부당한 처사에 대해서 성토할 뿐이다.


자연과 세상의 모든 위대한 것들과 약자들은 말을 좀처럼 하지 않지만, 그것이 곧 침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 귀가, 내 눈이 어두울 뿐이다. 뭐라고 하는지 잘 안 들리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힘겹게 세상과 ‘대화’라는 것을 시도해야 한다. 그것이 정정당당하기도 하다. 세상은 나의 민원창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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