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19] 진심이 진리보다 앞선다

"아버지가 없는 집이나 싱글 맘들은 어떤 해결책이 있나요?"

온라인과 오프라인 할 것 없이 부모님들과 육아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데, 어떤 엄마가 제게 질문을 했습니다. 대답을 하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질문을 받는 순간 편부모 가정의 아이들이 꽤 많다는 것을 제가 잊어버리고 있었거든요. 군대 시절 일반 사병의 인사를 담당했었는데, 사단에 신병이 오면 작성하게 되는 신상명세서에는 편부모 가정이 무척 많았습니다. 그야말로 엄마와 아빠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부모가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사랑으로 표현하면 세 갈래의 사랑으로 아이를 안아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갈래는 부모 자신에 대한 사랑, 즉 자기애(自己愛)입니다. 동양에서는 자기애와 이기(利己)를 구분합니다. 두 번째는 엄마와 아빠가 서로 사랑하는 부부애(夫婦愛)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부모가 아이에게 향하는 사랑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라도 끊어지면 아이가 위태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티모시 윌슨은 미혼모 가정이 겪게 될 시련을 경고했습니다. 

10대 임신부들은 학교를 중퇴하고 미혼모로 살아가면서 가난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고, 그 자녀들은 아동 학대의 희생양이 되거나 위탁 보호 기관에 맡겨지고, 유치원 입학 전 평균 이하의 일반 상식과 수학, 읽기 능력을 보이고, 고등학교를 중퇴하며, 10대나 청년 시절에 구치소에 수감될 가능성이 전부 높게 나타난다. 그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우나 기타 관련 요인들을 감안하더라도 그렇다는 이야기다. 
- 티모시 윌슨, <스토리>(웅진지식하우스), 189쪽
※ 설문 결과는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가 2년에 한번씩 실시하는 'Youth Risk Behavior Survey'의 자료. 임신 관련 통계 : Stein & St. George (2009) ; Terry-Humen, Manlove, & Moore(2005) ; "Teen Pregnancy" (2008)

10대 미혼모라는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부모의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는 아이들에게 크고 작은 시련이 있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사회구조를 이겨낼 만큼 충분히 힘이 강합니다. 항간에 떠돌던 말 중에서, '무병장수(無病長壽)'라는 말이 이제는 '무병단명(無病單命) 다병장수(多病長壽)'로 바뀐 것처럼 불리한 여건이 서로의 사랑을 더욱 공고히 해주는 효과를 주기도 합니다. 잔병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몸을 돌아보니 오래 산다는 뜻입니다. 축구경기는 11명이 하지만, 한 사람이 퇴장을 당해서 10명이 싸울 때는 어떤가요? 그 팀이 당장 골을 먹고 질 것 같지만, 생각보다 잘 버팁니다. 모든 선수들이 자기 팀의 절박한 상황을 알기 때문입니다. 엄마 없는 아이와 아빠 없는 아이는 세 가닥의 사랑 중에서 한 가닥이 끊어졌지만, 핵심은 가닥이 아니라 '사랑'이지요. 촛불이 세 개면 무척 밝지만 두 개 또는 한 개 있어도 밝을 수 있죠. '빛'이 있다는 게 중요하니까. 장자는 도(道)가 펼쳐지지 않아 혼란스러웠던 시대에 도를 알고 있었지만 현실은 그렇게 살아갈 수 없음을 알고 안타까워합니다. "삶은 사는 것이고, 생활은 견디는 것이다"는 시인 김수영의 말처럼 가슴을 울리는 장자의 진심이 느껴집니다. 

비천하지만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물이다. 비루하지만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민중이다. 축소해야 하지만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정사다. 거칠지만 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법이다. 소원해지지만 본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의(義)이다. 친족을 편해하지만 넓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인(仁)이다. 절제로 일을 꾸미지만 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예(禮)다. 중화(中和)일 뿐이지만 바뀌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도이다. 신령스럽지만 유위(有爲)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천(天)(자연)이다.
- <장자> 11-8

나는 어릴 적에 다른 친구들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못 받고 자랐습니다. 아버지들은 방황하시고, 어머니들은 고생하셨죠. 원양어선을 타고 며칠 혹은 몇 달씩 집에 머무르지 않지만 집에 함께 있을 때는 나를 많이 사랑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어릴 적에는 나를 많이 사랑해주지 않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지만 아버지는 사랑해주지 못해서 많이 미안해 하셨고, 나에게 사랑을 많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존재 자체가 어마어마한 사랑이었죠. 이것을 다 커서야 알았으니 나는 아버지에게 불효자입니다. 나의 아버지처럼 자식을 사랑할 수 있는 여건이 잘 되지 않지만, 나름대로의 노력으로 사랑하려는 것은 동양철학에서 가장 중시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사서(四書) 중에서 가장 난해하다는 <중용(中庸)>의 핵심 개념은 '중용'이 아니라 '성(誠)'입니다. 우리말로 '정성'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중용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마음(誠之者)'이 <중용>이 꿈꾸는 인간상입니다. 

정성[誠] 그 자체는 하늘의 도요, 정성을 다하려고 애쓰는 것은 사람의 도다. 정성이라는 것은 굳이 애쓰지 않아도 중도(中道)에 맞고 힘써 생각하지 않아도 얻게 되어 조용히 도에 적중하니 이를 갖춘 사람은 성인(聖人)이고, 정성을 다하려고 애쓰는 것은 선(善)을 잘 가려내어 그것을 굳게 잡는 것이다. 그것을 널리 배우고, 그것을 따져가며 깊이 묻고, 그것을 신중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밝게 가려내며, 그것을 독실하게 행해야 한다. 
- 중용, 18장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심리학 연구로 회자되는 카우아이 섬 종단 연구 이야기를 보면 <중용>이 말한 '성(誠)'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미국 본토의 소아과 의사, 정신과 의사, 사회복지사, 심리학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학자들은 1955년 카우아이 섬에 태어나는 모든 신생아 833명을 대상으로 이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추적 조사하는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이렇게 10여년을 조사한 끝에 연구의 첫 번째 결과물은 1971년에 <카우아이의 아이들>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이 아이들이 18세가 될 때까지의 연구결과는 1977년에 두 번째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카우아이 섬 연구의 자료 분석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심리학자 에미 워너는 전체 연구 대상 중에서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201명의 아이들에 주목했습니다. 이들은 '고위험군'이라 불리는데, 다른 집단에 비해 훨씬 더 높은 수준의 학교 생활 부적응과 학습장애를 보였고 집과 사회, 학교에서 갖가지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예컨대 상당수가 폭력 사건에 연루되어 소년원에 들락거리거나 여러 차례 범죄 기록을 갖고 있거나, 정신질환을 앓거나 미혼모가 되어 있었죠. 그런데 에미 워너 연구원을 혼란에 빠뜨린 것은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72명의 아이들이었습니다. 이들 72명은 마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한 것이었습니다. 에미 워너는 오랜 연구 끝에 72명의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제대로 성장해나가는 힘을 발휘한 아이들이 예외 없이 지니고 있던 공통점이 하나 발견되었다. 그것은 그 아이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해주고 받아주는 어른이 적어도 그 아이의 인생 중 한 명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엄마였든 아빠였든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이모이든 간에, 그 아이를 가까이서 지켜봐주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서 아이가 언제든 기댈 언덕이 되어주었던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던 것이다. 
- 김주환, <회복탄력성>, 54쪽

삶의 고된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힘의 원동력이 되는 이러한 속성을 에미 워너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이들은 생명입니다. 생명이 온전히 자라나서 꿈을 펼칠 수 있게 만드는 일은 오로지 '사랑'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부모의 일은 그만큼 무겁습니다. 엄마 없는 아이의 아빠, 아빠 없는 아이의 엄마는 더욱 무겁습니다. 무거운 것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힘만큼은 온전한 부모님보다 편부모가 가질 수 있는 절박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두 부모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분들은 한목소리로 '전전긍긍'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자신의 육아 방법이 틀리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을 항상 하신다는 어머니, 아이에게 뭔가 부족하지 않을까 항상 전전긍긍한다는 어머니. 사랑에는 답이 없으므로 진리보다는 진심이 앞선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도 그 모습을 그대로 바라봅니다. 엄마나 아빠의 판단이 틀리다고 생각하거나 섭섭하다고 생각해도 부모님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아이는 마음을 열거든요. 답을 찾으려고 멀리서 헤매는 것보다는 자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되돌아보는 것이 아이를 대하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증자(曾子)는 임종을 앞두고 이 마음을 잘 정리했습니다. 

증자가 병이 나서 죽음이 가까워지자, 자기 제자들을 불러 놓고 말했다. "내 발을 펴 보아라. 내 손을 펴 보아라. <시경>에 이르기를 '전전긍긍하기를, 깊은 못 가에 서 있듯, 얇은 얼음판을 밟고 가듯 한다.'고 하였다. 이제부터 내 잘못을 면하게 되었음을 알겠다. 제자들아!"
- <논어>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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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18] 가족이 눈치 보지 않게 하려면

철학자 스피노자는 <에티카>라는 책을 쓰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마치 삼각형이나 사각형처럼 다루겠다고 선언합니다. 철학자들은 인간이 시계처럼 ‘자동기계’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가만히 보면 자동기계 같은 점이 참 많습니다. 인문학의 특징은 포장을 하지 않고 정직하게 바라본다는 점입니다. 인문학이 가족을 바라본다면 사랑이 넘치고 따뜻한 선의가 있는 모습만 보지 않습니다. 힘의 논리에 지배당하는 동물의 모습도 함께 바라봅니다. 가족 역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족 중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이 누군가요? ‘엄마’인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집단에서든 가장 힘이 센 자, 또는 왕을 중심으로 일상생활의 질서가 정해집니다. 아이들은 힘이 센 엄마에게 매달리고, 남편은 아내의 눈치를 봅니다. 이 글은 가족 중에서 가장 힘이 센 분을 위해서 썼습니다. 힘이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봤을 때 권력자가 부러워 보이고,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권력자는 피곤합니다. 견제를 많이 받아 시달리는 일이 많고, 견제를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모두들 자기 눈과 입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은 참 피곤한 일입니다. 정말 권력을 잘 쓰는 사람들은 권력의 중심에서 조금 비켜 서 있습니다. 스파르타의 입법가 리쿠르고스는 공화국을 세운 후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여 정치적 권력을 분산시켰습니다. 리쿠르고스에게 권력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운 후세의 스파르타 사람들은 독재정치가 될 요인이 아직도 강력하고 우세하게 남아 있다고 보고 군주의 폭력과 분노를 제어하기 위해서 왕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작업을 계속 했습니다. 이 중에서 테오폼푸스 왕이 남긴 말이 유명합니다. 왕비가 ‘선조들에게 물려받은 합법적인 권력’을 자식들에게는 더 적게 물려준다고 왕을 힐난하자 테오폼푸스 왕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더 적어진 것이 아니오. 왕의 권력은 더욱 커진 것이오. 왜냐하면 이 권력이 더욱 오래갈 것이기 때문이라오.”
- 프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왕의 절대적인 권력을 합리적인 수준으로 축소한 덕분에 스파르타의 왕들은 적들의 시기나 그로 인한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반면 스파르타의 이웃 국가인 아르고스나 메세나의 왕들은 자신들의 왕권을 너무나 철저하게 고수하며, 대중들의 요구에 조금도 굽히지 않다가 마침내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역사적 사실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 권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가르쳐줍니다. 사람은 단 두 사람만 모여도 권력관계가 생깁니다. 가족에 권력관계로부터 자유로울 리는 없습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절대 권력자의 복종’을 강조합니다. 절대 권력자 역시 복종하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절대 권력자가 복종하는 대상이 없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폐해를 살펴볼까요?

“법조문에 따르면 당연히 유죄입니다만, 폐하께서 현명하게 헤아려 살펴 주십시오.”
- 사마천, <사기열전>, ‘혹리열전’

고대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경우 형법을 담당하는 관리가 사형이나 최고형을 내리기 전에 황제에게 허락을 받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예전에 교수형을 처할 때 대통령 결재를 맡거나, 미국에서 사형을 처하기 전에 주지사의 사인을 받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마천이 살던 시대에는 가혹한 관리들이 많이 있었는데, 황제의 눈치를 보면서 법조문을 고무줄처럼 바꾸는 폐해가 많았습니다. 법을 엄밀하게 집행하지 못한 관리의 태도도 잘못이지만, 애초에 이런 구조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바로 절대권력자인 황제의 잘못입니다. 집안의 권력자, 예컨대 ‘엄마’가 권력자라면 어떤 결정을 내리거나 아이들을 혼낼 때 엄마가 일일이 판단을 합니다. 하지만 엄마도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이렇게, 저런 경우는 저렇게 판단하기 쉽습니다. 엄마의 판단이 일관되지 않으면 판단에 영향을 받는 가족이나 아이들은 예측을 하기가 참으로 어려워집니다. 이것은 정말 피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엄마 역시 복종하는 원칙이 있다면 엄마의 눈치를 보는 일은 사라집니다. 
제가 알고 있는 노부부는 수십 년 동안 자식을 기르면서 두 가지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해 왔다고 말했습니다. 처 번째 원칙은 “아이가 잘못을 할 경우 아이의 해명을 들어보고 나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모르는 어떤 사정이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아이가 큰 잘못을 했을 때는 혼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큰 잘못을 하는 순간 아이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부부의 자제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두 가지 원칙 이야기를 했더니 “어릴 적에 잘못을 할 때 항상 이야기를 하게 해서 피곤하기도 했지만 내 마음을 설명할 수 있었서 좋았습니다.”라고 답하더군요. 원칙이 비교적 잘 지켜진 것입니다. 원칙의 생명은 집행입니다. 의지를 가지고 지키려고 해야만 원칙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원칙이 깨지면 잘못을 인정하고 깨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과정을 통해서 빛이 날 수 있습니다. 
원칙은 ‘명분’과 같습니다. 명분이란 어떤 사람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마땅한 것을 말합니다. 정치 역시 ‘명분’과 같습니다. 권력-원칙-명분의 관계가 깨지면 어떤 혼란이 찾아오는지 <맹자>에는 분명히 소개돼 있습니다. 

맹자가 양혜왕을 만나자, 왕이 말했다. “어르신께서는 천 리를 멀다고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셨으니, 장차 어떤 방법으로 나의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왕께서는 어찌 꼭 이익만을 말씀하십니까? 단지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어떻게 내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을까 하신다면, 대부들은 어떻게 내 고장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 하며, 선비나 백성들도 어떻게 내 자신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 하여, 위아래에서 서로 이익추구를 하게 되면, 나라는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만 량의 병차를 소유한 나라에서 그 나라의 국왕을 시해하는 사람은 반드시 천 량의 병차를 소유한 나라의 제후며, 천 량의 병차를 소유한 나라에서 그 왕을 시해하는 사람은 반드시 백 량의 병차를 소유한 고장의 대부입니다.”
- 맹자1-1

아이가 아직 어린데 ‘권력관계’를 벌써부터 생각해야 하는지 의아해하는 부모님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두어 살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잘 지켜보십시오. 힘에 의한 위계질서가 보일 것입니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권력관계의 구조를 비켜갈 수 없습니다. 
결국 아이들에게 원칙과 명분을 가르치고 부모가 몸소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면 가족을 지배하는 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시작이 아닐까 합니다. 민주주의는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을 허용하지 않는 정치 체제를 말합니다. 부모 역시 견제 받는다는 사실을 아이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장차 크게 어떤 일을 하려는 임금은 반드시 소환하지 못하는 신하가 있습니다. 상의할 일이 있으면 그에게 찾아갑니다. 덕망을 존중하고 도의를 즐기기를 이와 같이 아니한다면, 그와 더불어 어떤 일을 하기가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탕왕은 이윤에게 먼저 배운 뒤에 그를 신하로 삼았으므로 힘들이지 않고 왕이 되었고, 제환공은 관중에게 배운 뒤에 신하로 삼았으므로 힘들이지 않고 패업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천하의 각 토지는 비슷하고 덕행도 비등한데, 서로 뛰어날 수 없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기가 가르친 사람을 신하로 삼기 좋아하고, 자기가 가르침을 받은 사람을 신하로 삼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탕왕이 이윤에게, 환공이 관중에게도 감히 소환하지 못하였습니다. 
- 맹자4-2

그러면 이번에는 우리 가족을 지배하는 원칙을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원칙을 정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부부가 서로 협의하는 경우가 있고, 시간을 두고 원칙을 만들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원칙을 만들어가는 방법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우리 가족은 아이들과 함께 세운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부모라도 함부로 도와주지 않고, 아이가 반드시 도움을 청해야 도움을 준다는 원칙이 그것입니다. 막내 민서는 완력이 약하다 보니 차 문을 여는 게 서툽니다. 내가 차문을 열어주려고 했더니 민서가 화를 냅니다. 나는 힘 약한 아이도 스스로 하려고 한다는 걸 알고 그때부터는 함부로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차 문 열기 힘들어?’ ‘도와줄까?’ 물어봅니다. 아이가 도와주라고 하면 그때 도움을 줍니다. 동의의 절차를 밟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입니다. 그렇다고 도움을 요청할 때까지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아이의 행동을 보면서 자주 물어보고 의향을 물어보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아이가 과자 봉지를 뜯는데 힘들어 하면 힘든지 물어보고 도와줄까 물어봅니다. 어떤 날은 아이가 힘들어도 스스로 끝까지 과자를 까려고 노력할 때도 있고, 어떤 날은 도와달라고 도움을 청하는 날도 있습니다. 부모는 지레짐작하지 않고 질문을 하면 그만입니다. 이 원칙을 한동안 실천했더니 아이들이 먼저 도움을 청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원칙을 정하되 자주 물어보는 것 역시 하나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권력관계, 명분과 원칙은 어린 아이들의 생활과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어릴수록 민주주의 감각을 키워주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 어른들은 민주주의를 책을 통해서 배웠지만 이미 아이들은 민주주의 감각이 타고 났으니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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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17] 부모의 빠른 반응이 아이를 망친다


예전에 육아 초기에는 아이들 보기가 힘들고 귀찮아 TV를 자주 틀어줬습니다. 요즘은 같이 있을 때는 TV를 틀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아침 잠이 많은 아이들을 깨울 때는 어쩔 수 없이 TV를 틉니다. 아침에 아이들 깨우는 거 정말 힘들어요. 자는 아이를 깨우면 짜증을 내거나 울기 일쑤입니다. 단잠을 깨웠기 때문이죠. 아침에 울면 짜증으로 하루를 시작하니까 조심스럽게 깨우려고 노력합니다. 아이 옆에서 발 동동 구르는 모습을 보면 아침 요리를 하고 있던 아이 엄마에게 견제 들어옵니다. 

“아이 안 깨우고 뭐해? 아이랑 자는 거야!?”

TV를 틀면 여러 가지 소리가 들리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되니까 잠자던 아이들이 하나둘 일어납니다. 이제부터는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만화 나오다가 광고가 지나가면 저거 갖고 싶다가 사달라고 하죠. 그러면 대답이 궁해집니다. 안 된다고 하면 또 ‘아빠 미워!’ 하면서 삐치고, 그렇다고 다 사줄 수도 없는 이야기고. 가끔 슈퍼마켓에 갈 때도 또봇 장난감 사 달라, 풍선껌 사 달라 요구가 끊임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울고불고 할 때가 있죠. 어머니들 마트에서 그런 경험 있으실 거에요. 아이들 마트 바닥에 드러눕고 엉엉 울면서 사 달라고 떼를 씁니다. 옆에 있던 어머니의 얼굴이 빨개집니다. 활극도 이런 활극이 없죠. 할 수 없이 아이가 사 달라는 것을 사주는 부모님들도 있는데 난는 그럴 때일수록 사 줘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노자를 비롯한 많은 심리학자들이 조언입니다. 

거두어들이려고 하면 반드시 베풀어야 하고 장차 약하게 하려면 반드시 강하게 해야 하고 장차 무너뜨리고자 하면 반드시 세워야 하고 빼앗고자 하면 반드시 줘야 한다. 이를 일컬어 보이지 않는 빛이라 한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기고 물고기는 연못을 벗어날 수 없으며 나라의 이로운 그릇은 남에게 보이면 안 된다.
- 노자, <도덕경> 36장

한 심리학자는 어떤 사람을 순식간에 불행해지게 하는 방법은 그 사람에게 거액의 돈을 건네주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 주장을 뒷받침이나 하듯 미국의 거액 복권 당첨자들 가운데 90퍼센트 이상이 불행한 결말을 맞이했다는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아이에게 함부로 무엇인가를 사주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사줘야 할까요? 그것을 사기까지의 과정을 만드는 게 좋습니다. 그 과정이 채워지면 사줘도 큰 문제가 없습니다. 예컨대 ‘크리스마스 되면 갖고 싶은 거 사줄 거야.’ 또는 ‘선행카드 10장이 되면 사주는 거야.’ 하고 룰을 정하면 아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아이는 물건을 쉽게 생각하고 교만한 마음을 품기 쉽습니다. 맹자는 흐르는 물에 비유했습니다. 

서자 : “중니(仲尼 : 공자)는 자주 물을 칭찬하면서 ‘물이로다. 물이로다!’ 하셨는데, 무엇을 물에서 취한 것입니까?”
맹자 : “근원의 샘물은 철철 넘쳐 흘러서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움푹 들어간 곳을 채운 뒤에 흘러나가 사해에 퍼져 나가니, 근본이 있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이것을 취했을 뿐입니다. 진실로 근본이 없다면 7,8월 사이에 비가 집중적으로 내려 배수로가 다 차도, 그것이 말라버림에는 서서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명성이 실정을 지나치면, 군자는 이를 부끄러워합니다.” 
맹자8-18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자성어 중의 하나가 바로 맹자의 영과후진(盈科後進)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참 재밌는 게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걸어갈 때 명령을 내리는 것은 머리이지만, 실제로 거기까지 데려다 주는 것은 발이란 말이죠. 하지만 머리는 사람만큼 이기적이기 때문에 의식하지 않으면 발이 고생하는지 잘 몰라요. 물이 가장 먼저 닿고 채워지는 것이 무엇인지 부모님들도 자주 헷갈릴 때가 많지요. '아이가 공부하는 게 아니라 아이 마음이 공부하는 것'이라는 말처럼, 아이의 마음이 편안하고 집에서 존중과 사랑을 받아서 자존감이 채워지면 알아서 공부를 하는 상태가 됩니다. 하지만 상황논리와 욕심 등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아이를 불편하게 하거든요. 동양철학에 회자되는 선비들이 조신하는 까닭은 행동한다는 게 그만큼 무겁기 때문이고,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죠. 아이가 울 때 반응을 너무 빨리 하는 부모님, 아이들이 싸움을 하면 덮어놓고 뜯어말리기부터 하는 부모님, 아이 또래 부모님이 학원이나 과외를 받는다고 하면 안절부절 못하는 부모님들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안타깝습니다. 강의를 할 때 어머니들에게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가 자신이 찜해둔 책이나 교육 프로그램을 구매하는 것이 좋은지 아닌지 하는 점입니다. 예컨대 “아이들이 마법천자문을 좋아하는데, 그것보다 한자 설명이 잘 된 책이 하나 있던데 사야 할까요?” 또는 “어린 아이들 글자 공부하기 재밌게 나온 책이 있다던데” 하며 물어봅니다. 그때마다 내가 하는 대답은 한 가지입니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저는 물어보면 저는 일단 ‘사지 말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걸 사는 과정에서 일정한 품을 들여야 하는데, 그만큼 품을 들였다면 엄마가 대답을 알고 있어요. 질문이 의미가 없어지는 거죠. 하지만 엄마가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은 품을 들이지 않았다는 말이거든요. 품을 들이지 않았다면 사는 것보다 사지 않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죠.”

우리 집에서도 가끔 전집을 들일 때도 있고 교구를 마련하기도 하고 아이를 위해서 교육 프로그램을 구매하기도 합니다. 그런 것들을 덮어놓고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고리타분한 일이죠. 하지만 선택하기까지의 과정을 충실히 지킵니다. 아이 엄마는 아이에게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기 전에 효과를 알아보고 카페 검색해서 구매했던 엄마들의 반응을 살펴보거나 직접 물어보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구매를 하면 후회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청춘이 없듯이, 흔들리지 않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나도 역시 첫째 민준이가 네 살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손가락 빨 때, 둘째 민서가 어린이집에 가서 불평하고 친구들 괴롭힌다는 얘기 들을 때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 부모의 마음이 느리냐 빠르냐 하는 점이라고 생각해요. 아이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 때 부모가 바로 대응하는 것은 어쩌면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는 기다려 주는 사람인데 아이와 같이 빨리 반응하면 아이는 더 불안해지거든요. 어떤 문제를 발견했다면 시간을 두고 그게 진짜 문제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현상인지 차분히, 하지만 객관적이고 철저하게 분석을 하면 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행동하고 개입하는 것은 치밀한 계산의 결과이어야 하는데, 서둘러 행동하면 항상 대가가 따르더라구요. 부모가 아이를 관찰해서 어떤 문제를 발견했다면 그것은 참으로 훌륭하고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그 문제가 진짜 문제인지 검증하는 과정 또한 필요합니다. 
한 어머니에게 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금은 ‘국민은행’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예전에 ‘주택은행’이 있었거든요. 그 어머니가 집을 장만하기 위해서 대출을 알아보러 은행에 갔는데, 주택복권 당첨금 13억원 주인에게 당첨금 받아가라는 안내판을 봤대요. 그걸 보면서 ‘13억이 나한테 온다면?’ 하고 고민을 해봤대요. 어머니는 지금 당신능력에 13억원을 조리할 방법이 없고, 그 당시 집 사느라 대출받은 7천만원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대요. 13억이 자신에게 온다면 적재적소에 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덜컥 들더라는 거죠. 
말이 나온 김에 ‘부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꺼내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유가(儒家)를 이야기할 때 지나치게 입신양명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선비들은 그 폐해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꿈 중에는 ‘돈 벌고 싶다’거나 ‘유명해지고 싶다’는 꿈이 참 많습니다. 돈을 번다는 게 어떤 건지, 유명해지는 게 어떤 건지를 알려주는 장자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언젠가 초(楚)나라의 위왕(威王)이 장주(莊周)가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후한 예물로 그를 맞아들여 재상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장주는 웃으며 초나라 사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천금(千金)이라면 막대한 이익이며, 재상이라면 높은 지위이지만, 그대는 천자가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바쳐지는 소를 보지 못했소? 그 소는 몇 년 동안 잘 사육되다 수놓은 옷이 입혀져 사당으로 끌려들어가오. 그때 가서 하찮은 돼지가 되겠다고 해봤자 어찌 그렇게 될 수가 있겠소? 그대는 빨리 돌아가 나를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마시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즐거워할지언정, 나라를 가진 자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오. 평생 벼슬하지 않아 내 마음을 즐겁게 하고자 하오.’”
- 사마천, <사기열전> ‘노장신안열전’

우리가 만약에, 조금 더 불행해졌다면 ‘부자 되세요.’ 광고 카피도 일조를 했다고 생각해요. 한 때 우리의 인사말이 ‘부자 되세요’였던 거 기억하시죠. 사람이 괜히 깜냥이라는 게 있는 게 아니죠. 어떤 사람은 1억원을 운용할 수 있는 깜냥, 어떤 사람은 10억원 깜냥, 또 어떤 사람은 조 단위의 깜냠 등등이 있겠죠. 그 깜냥을 넘어가면 사람은 살 수가 없어요. 만져보지 않아서 모른다고 할 수 있지만, 만져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는 게 동양철학이죠. 깜냥은 한계가 있지만 욕심은 한계가 없습니다. 동양과 서양이 합의하는 행복과 부유함의 기준은 ‘균형’입니다. 우리 가족이 연간 얼마 정도의 수입을 목표로 하면 좋을까요? 내 아이가 자라서 연간 얼마 정도 벌면 좋으신가요? 끝으로 부유함과 행복에 관한 한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은 어렵지만, 망치기는 참 쉽습니다. 

<행복연구저널 The Journal of Happiness Studies>은 1년에 5백만 달러를 버는 사람들이 1년에 10만 달러를 버는 사람보다 눈에 띄게 행복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돈이 행복지수를 증가시키는 경우는 오직 하나, 빈곤에서 벗어나 수입이 5만 달러 정도까지 오를 때뿐이다. 1년에 5만 달러 이상을 버는 경우, 재산과 행복은 제 갈 길로 간다. 
- 존 메디나, <내 아이를 위한 두뇌코칭>(한국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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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16] 동양의 시간에서 '나의 시간'을 찾다

길을 가다가 전화를 받습니다. 카드론 이자를 할인해주는 행사를 한다는 전화입니다. 이런 전화 요즘 너무 많이 와요. 텔레마케터도 사람이니까 최대한 정중히 거절하고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마지막 말에 내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번 달 30일까지 행사 기간이고, 그 후에는 더 높은 금리 적용되니까 생각해보세요. 

시간을 정해놓으면 시간이 자꾸 신경 쓰입니다.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하나 했었는데, 평생토록 집안일을 한 번도 하지 않은 남편에게 아내가 “빨래 좀 개켜줘. 7시까지 좀 부탁해.”라고 얘기합니다. 남편은 시큰둥한 반응이었지만, 7시가 임박했을 때 재밌는 일이 벌어집니다. 한 번도 빨래를 개켜본 적이 없는 남편이 빨래를 개키고 있는 겁니다. 시간이란 건 참 신기합니다. 누구나 하루 24시간이 주어지지만 24시간에 대한 감정이 워낙 다르기 때문에 시간에 대한 활용이 각자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간만에 주말에 가족과 개그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한 시간이 금방 가버리죠. 시간이 느리게 가다가 갑자기 빠르게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서울에 비해서 내 고향 제주도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는 느낌을 줍니다. 사람들도 천천히 걸어가지요.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내려서 지하철 5호선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내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합니다. 느린 시간에 있다가 무척 빠른 시간으로 옮겨 왔으니 내 몸도 그 리듬에 적응하는 거지요. 내가 동양철학을 보면서 가장 큰 도움을 받은 것은 ‘자기 시간’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성격이 굉장히 급하고 기분파에다 서두르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서두를 때마다 항상 넘어지고 빠뜨리게 됩니다. 동양철학은 인생 한두 해 살고 말 게 아니니까 마라토너처럼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라고 조언합니다. 

군자는 편안하게 머무르며 천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을 무릅쓰며 요행을 바란다. 
- <중용> 14장

무척 빠른 시간 안에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은 시간의 간섭을 엄청나게 많이 받습니다. 시간의 격한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흘리고, 헤어지게 됩니다. 유치원 버스 시간이 다 되었는데 아이가 밥 먹겠다고 고집을 부리거나 여유를 부리면 마음이 급해져서 아이를 혼내게 됩니다. 우는 아이를 보면서 후회를 하고, 그 날 아침은 아이나 부모나 모두 속상한 상태에서 시작하는 거죠. 시간은 결국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의 감정과 연결돼 있으며, 그것은 결국 성격과도 연결됩니다. 아이의 성격에 맞게 육아를 해야 하는 것처럼, 아이의 시간을 만들어주고 보호해주는 것도 무척 중요합니다. 부모가 덩달아 마음이 급해지면 아이는 자기의 시간을 찾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의 시간에 머물지 못하면 사람은 무척 불안해집니다. 누구나 자기의 시간이 있죠. 나는 순임금이 보여준 ‘자기 시간’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순임금은 밭에서 농사를 짓다가 황제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그런데 대단한 것은 밭일을 할 때나 나랏일을 할 때나 순임금은 자기 페이스를 유지했다는 겁니다. 

맹자가 말했다. "순이 깊은 산중에서 삶에 목석과 함께 살고, 사슴과 멧돼지와 놀아, 그가 깊은 산속의 시골사람과 다른 것은 거의 없었다. 그가 한마디 착한 말을 듣고 한 가지 착한 행동을 보게 되자, 마치 장강과 황하가 터져 나오듯, 도도히 흘러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 <맹자> 13-16

요임금은 순임금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테스트를 해본 결과 나라를 물려줘도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요임금은 그 자식 아홉 아들과 두 딸을 순임금에게 시집보내고, 백관들로 하여금 순임금을 섬기게 하고 나라의 곳간을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순임금은 단지 부모님이 자신을 인정해주고 사랑해주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사랑하지 않자 갈곳 없는 사람처럼 쓸쓸해 했다고 합니다. 순임금은 효(孝)를 상징하는 성인(聖人)으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사람을 현혹시킬 만한 미녀와 재산과 권력보다 자기가 사랑하는 가족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있었죠. 동양의 이상적인 삶은 자족하는 삶입니다. 자족하는 삶은 그냥 마음을 먹는다고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많은 방해와 간섭을 뒤로 하고 마음 편한 상태에서 자신의 꿈과 미래에 대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사람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부모님 역시 ‘자기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동양의 군자처럼 자족하는 삶을 살 수 있고, 아이의 삶 역시 자족하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부귀한 처지라면 부귀한 대로 행하고, 빈천한 처지라면 빈천한 삶을 살며, 오랑캐 땅에 처하면 오랑캐의 법에 맞게 처신하고, 환난을 당하면 환난기의 방식으로 행동하니 군자는 어디를 가든 자족하지 않음이 없다. 
- 중용 14장

그러면 이제부터는 시간을 어떻게 극복하고 자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지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자기 시간을 갖고, 자기 페이스를 누구나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이것을 이루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시간은 감정과 연결돼 있다고 했는데, 사랑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은 사랑이 가득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눠줍니다. 하지만 사랑을 별로 받고 자라지 못한 사람은 항상 사랑이 부족해서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빨아들이지요. 아주 사무적인 남자, 요구만 하는 사람, 좀처럼 이야기를 섞기 어려운 사람, 딴지를 잘 거는 사람 등 주위에는 사귀기 부담스러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사랑의 채워짐’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부담스러운 캐릭터가 된 것이죠. 이런 사람들과 사귀어야 한다면 별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손해를 보고 연민하고 사랑을 채워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사랑의 그릇이 크지 않아서 노력하면 충분히 채워줄 수 있지만, 이미 그 시기를 지나버리면 그릇은 커지고 사랑의 양이 적어서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기분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사랑이란 때로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기도 하니까요. 사랑과 마찬가지로 시간도 채워지면 자기의 시간을 찾아가기가 수월해집니다. 맹자는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과 관계를 해야 하는데, 공간과 시간의 제약까지도 극복할 수 있어야 자기의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맹자가 만장에게 일러 말했다. “한 고을의 우수한 선비는 바로 한 고을의 우수한 선비와 사귀고, 한 나라의 우수한 선비는 바로 한 나라의 우수한 선비와 사귀고, 천하의 우수한 선비는 바로 천하의 우수한 선비와 사귄다. 천하의 우수한 선비를 사귐으로써도 부족하다면, 또 나아가 옛사람을 논한다. 그의 시(詩)를 외고, 그의 책을 읽고도, 그 사람을 모른다면 되겠는가? 그래서 그 세대를 논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 나아가 옛사람과 친구로 사귀는 것이다.”
- <맹자> 10-8

내가 동양철학으로 육아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바로 '시간‘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동양철학이라고 부르는 중국 철학은 통일 진나라 이전의 사상서들을 말하는데, 대개 2,000년도 넘는 책들입니다. 2,000년이 넘는 시간을 자기 시간 안에 불러들였으니 그 혜택은 엄청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양에도 2,000년을 거슬러 오른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고전은 바로 시간이니까요. 나의 시간 안에 수천 년의 시간이 흘러 들어온다면 거기에는 내가 애타게 찾던 시간도 함께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80년이라면 고작 80년의 시간 동안에 나의 시간을 찾기는 어렵겠지요. 철학이나 역사만 놓고 보면 2,000년 정도지만, 생물학이나 천문학을 보면 수십억 년의 시간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단지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족(自足)과 편안함이니까요. <장자>의 첫머리에는 시간과 공간의 수많은 층위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 나옵니다. 대붕(大鵬)이라는 새는 등 넓이도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남명이라는 땅으로 날아갈 때는 물결이 삼천리이며 폭풍을 타고 구만리 상공에 올라 여섯 달이 되어야 쉰다고 합니다. 그리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살아갑니다. 그런데 ’한번 날면 늘릅나무와 빗살나무까지‘ 겨우 날아갈 수 있고, 간혹 도달하지 못해 넘어지기도 하는 매미와 텃새는 대붕을 비웃습니다. 사는 기간이 짧기 때문에 생각할 시간도 짧을 수밖에 없고 말도 역시 짧을 수밖에 없습니다. 

초나라 남쪽에 명령이란 나무가 있는데 오백 년을 봄으로 삼고 오백 년을 가을로 삼는다고 한다. 먼 옛날에는 큰 참죽나무가 있었는데 이것은 팔천 년을 봄으로 삼고 팔천 년을 가을로 삼는다고 한다. 그런데 팔백 년을 산 팽조는 지금껏 최장수라고 소문나서 사람마다 그와 같이 되기를 바라니 슬픈 일이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작은 것과 큰 것의 분별이라 할 것이다.
- <장자> 1-2

인생에는 두 가지 시간 선택이 있습니다. 짧은 인생 맘껏 즐기다 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나의 몸이 수십 수백억년 동안 살아간 우주와 함께 하고, 수천 수만 년 동안 살아간 인류와 함께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몸에 맞는 옷으로 입되 항상 자기와 다른 세계에서 다른 시간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인도’에는 수천 년의 시간이 공존한다는 말이 있는데, 인도뿐만 아니라 세상 어느 곳이든 아주 많은 시간들이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나의 시간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내 시간 안에 많은 시간이 있을수록 유리하겠지만 억지로 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님이 먼저 부모님에 맞는 시간을 선택하고 그 시간을 살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보고 배우니까요. 이것이 바로 동양이 말하는 ’자족(自足)‘하는 삶의 비결이며, ’자기 시간‘을 찾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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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15. 질문을 가지고 노는 육아법

태초에 질문이 있으라! 질문은 새로운 세상을 여는 문입니다. 인문학을 한마디로 말해 ‘좋은 질문을 던지는 기술’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질문의 가치는 엄청납니다. 나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그 사람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고 그 다음에 말을 듣습니다. 어떤 질문을 받는 순간 준비가 되어 있다면 표정은 여유로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의외의 질문을 받았거나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긴장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짧은 시간에 표정이 하는 말을 들으면 사실 대답은 표정의 확인일 뿐이죠. 나는 다름 사람에게도 자주 질문을 던지지만 나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질문을 던지면 ‘즉시’ 효과를 발휘하니까 평소에 좋은 질문을 만드는 연습을 합니다. 이 좋은 걸 육아에 쓰지 않는다면 얼마나 손해일까요? 때로는 질문은 긴 잠을 깨우는 맑은 죽비가 되기도 합니다. 맹자가 제나라에 머무를 때 제나라는 새로 종을 만들었는데, 종에 소의 피를 뿌리는 흔종(釁鍾) 제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나라 선왕은 관리들이 희생양 소를 이끌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양으로 바꾸라고 명령했습니다. 왕은 소가 부르르 몸을 떨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가여워 양으로 바꿨지만, 백성들은 왕이 소 한 마리를 아까워해서 구차하게 양으로 바꾼 것이라고 흉을 봤습니다. 제선왕은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답답한 지경이었습니다. 맹자가 한마디 질문을 던지며 왕의 마음을 풀어 주었습니다. 

왕은 백성들이 왕을 인색하다고 여긴 것을 이상하다 마십시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바꾸었으니, 저들이 어찌 그 마음을 알겠습니까? 왕께서 만약 그놈이 죄 없이 도살장으로 가는 것을 측은하게 여기셨다면, 소와 양을 어째서 가리셨습니까?
- 맹자1-7

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이나 양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이나 불쌍하기는 매한가지인데, 제선왕은 소가 끌려가는 것만 보았을 뿐 양이 끌려가는 것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소를 양으로 바꾸는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제선왕은 자기도 모르는 마음을 어떻게 알았느냐며 깜짝 놀랍니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통해서 진실을 드러냈는데, 이 방법을 산파술(産婆術)이라고 부릅니다. 맹자도 공자도 산파술의 대가였습니다. 공자가 어떻게 제자의 물음에서 질문을 뽑아내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자로가 공자에게 '강함'에 대해서 질문하자 공자가 대답했다. "남쪽 지방의 강함인가 아니면 북쪽 지역의 강함인가 아니면 너의 강함인가?“
- 중용 10장

질문을 하는 순간 질문을 받는 사람의 표정과 마음을 읽을 수 있지만, 질문을 하는 사람 역시 마음이 읽힙니다. 자로는 평소에 강인한 인물이어서 자기의 ‘전공’(?) 분야인 ‘강함’에 대해서 스승에게 질문을 하고 인정을 받고 싶은 욕심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공자는 제자의 이런 의도를 간파하고 ‘혹시 너의 강함을 말하는 것이냐?’고 되묻습니다. 질문에 이어서 공자는 ‘강함’이라고 해도 다 같은 ‘강함’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강함’이 있다고 설파합니다. 즉, 너그럽고 유연하게 가르쳐 주고 무도한 것에 대해 섣불리 보복하지 않는 것은 남쪽 지역의 강함이니 이것이 바로 ‘군자의 강함’입니다. 하지만 힘이 세고 싸움을 잘 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함은 ‘강한 자의 강함’이라고 구분합니다. 
아이들이 밥을 안 먹을 때, 전화기를 달라고 투정을 부릴 때, 엄마 아빠를 때릴 때, 침을 뱉을 때, 잠옷을 입고 유치원에 가겠다고 억지를 부릴 때 부모는 화딱지가 납니다. 한 대 쥐어박아주거나 큰소리로 혼내면 주눅이 들어서 행동을 멈추지만, 다음에는 더 심하게 행동합니다. 아이와 군비(軍費)경쟁을 계속 해야만 할까요? 
아이가 ‘문제의 행동’을 하면 머릿속에 역할극이나 소꿉장난을 한번 떠올려 보세요. 예를 들어 병원놀이를 할 때 아이는 한 번은 의사 선생님이 되기도 하고 간호사가 되기도 하고 환자가 되기도 합니다. 역할을 번갈아가면서 바꿉니다. 의사가 된 날은 청진기를 배에 들이대며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고, 간호사가 된 날은 의사의 말에 따라 주사를 놓는 일을 하고, 환자가 된 날은 어디가 아프다고 호소하는 시늉을 합니다. 병원놀이처럼 실제 세계의 역할도 계속 달라집니다. 다만 지금은 아이가 나쁜 행동을 하는 아이 역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조금 어른스러운 역할놀이로 이야기를 해볼까요? 세미나 놀이를 생각해 봅시다. 세미나를 할 때 발제자가 있고 토론자가 있는데, 아이들과 일상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로 아이들은 행동으로서 발제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서로 갖겠다고 싸우는 모습은 이렇게 질문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서로 자기가 갖겠다고 하거나, 두 친구가 서로 옳다고 주장하는 난감한 상황이라면 어떻게 중재하는 게 좋을까요?”

이렇게 질문으로 해석하면 아이들이 싸우는 것이 단순히 투정으로만 보이지 않고 진지하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부모가 중재하는 입장, 아이들은 다투는 입장이 되지만 나중에는 아이들이 중재하는 입장으로 바뀔 여지는 충분하죠. 가정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은 학교나 사회에서 때로는 이런 방식으로 때로는 저런 방식으로 펼쳐집니다. 결국 사회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들의 기원은 ‘가정’에 있는 셈입니다. 
둘째 민서를 차에 태우고 어린이집에서 집으로 가려고 합니다. 민서가 차의 앞자리에 앉았는데 안전벨트를 매지 않아서 벨트를 메라고 말을 했습니다. 

“민서야, 안전띠 매야지!”

민서는 “안전띠 아니거든, 안전벨트거든!”이라고 소리칩니다. 이것도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안전띠와 안전벨트의 연관관계가 무엇인가?”

그제서야 나는 민서에게 “민서야, 안전띠와 안전벨트는 같은 말이야.”라고 말해줍니다. 민서는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안전벨트를 맵니다. 사실 아이들은 온몸으로 부모에게 질문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없는 질문’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있는 질문’을 발견하고 끄집어내는 것이죠. 때문에 아이와 함께 하는 모든 상황은 이렇게 질문으로 번역하는 게 가능한데, 번역을 하면 부모는 어떻게 대응할지 감을 잡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질문으로 번역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니까 아이의 행동을 질문으로 한번 번역해보기 시작하면 점점 쉬워질 테니까요. 
동양의 질문법 중에서 가장 감명을 줬던 것은 이른바 '나 질문법‘이었습니다. 어떤 현상을 보면 거기서 ’나‘를 발견해내는 방법입니다. 모든 현상에는 ’나‘가 반영돼 있는데, 감춰져 있다 보니 ’나‘를 찾아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가 없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 문제에서 ’나‘가 사라질 때 문제의 원인도 사라지고, 해결의 가능성도 사라집니다. 그 현상에 ’나‘가 없었다면, 왜 그 현상이 내 옆에 있는 것이고, 왜 나에게 온 것일까요? 바로 ’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감춰진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나 질문법‘을 배워야 합니다. 지금부터 ’나 질문법‘의 응용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부모님 강연을 하면 질문을 많이 받는데, 그때마다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 아이가 자존감이 너무 낮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아이는 책을 혼자서 읽는 법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아이는 책을 읽고 나서 책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라면 잘 못 하는데 걱정이에요.” “우리 아이는 학습만화에만 빠져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머니들은 아이의 부정적인 특징을 분석하는 데 전문가 같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그러면 아이의 좋은 점은 뭔가요?” 라고 물어보면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 질문법‘은 부모님이 생각하는 의문을 더 나은 질문으로 바꾸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부모님이 아이에 대해서 떠오르는 질문에 ‘나’를 담아 보면 됩니다. 
“우리 아이가 자존감이 너무 약한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은 “나의 어떤 태도가 아이의 자존감을 약하게 만들었을까요?”로 바꿔서 질문을 해결하려고 하면 훨씬 더 나은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이가 책을 항상 읽어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라는 질문 역시 “내가 어떤 모습을 보였길래 아이가 스스로 읽는 방법을 알지 못하게 되었을까요?”로 바꿔보면 문제가 분명히 보입니다. 이게 효과를 발휘하는 까닭은 애초에 어머니들이 던졌던 질문에는 ‘나’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자존감이 약한 이유가 부모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이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 질문법’은 아이가 잘못한 원인이 부모에게 있다는 말이기 때문에 부모로서는 억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던지면서 문제의 원인을 가만히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부모와 만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가 왜 부모에게 책을 읽어달라고만 하고 스스로 찾아서 읽을 줄 모를까요? 스스로 찾아서 읽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인데, 그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부모입니다. 결국 원인은 부모에게 있는 것이죠. 맹자는 문제의 궁극적인 원인을 좇아서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잘 썼는데, 어찌 보면 집요해 보이지만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 바른 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맹자가 평륙에 가서, 그 대부에게 말했다. "그대의 창을 가진 병사가 하루에 세 차례나 대오를 이탈하였다면, 이를 없애버리지 않겠습니까?" 
공거심(대부) : "세 차례까지 기다리지 않습니다."
맹자 : "그렇다면 그대가 대오를 이탈함 역시 많을 것이오. 흉년과 기근이 든 해에 그대의 백성 중에 늙고 허약한 사람의 시체가 개천이나 산골짜기에 굴러다니고, 젊은이는 흩어져 사방으로 떠나간 사람이 거의 천 명이나 될 것입니다." 
공거심 : "이것은 공거심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맹자 : 이제 다른 사람의 소와 양을 받아서 그를 대신하여 그것을 기르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그를 대신하여 목장과 풀밭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목장과 풀밭을 찾았으나 찾아낼 수 없었다면, 그 주인에게 그것을 되돌려 주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우두커니 서서 그것이 죽는 것을 빤히 보고 있겠습니까?"
공거심 :  "이것은 공거심의 잘못입니다."
- 맹자4-4

맹자는 제나라의 왕에게도 이 사례를 이야기하고 청문을 한 끝에 왕에게 “이것은 과인의 잘못이오.”라는 대답을 들어냈습니다. 연애를 할 때는 상대방이 궁금하고 호기심이 생기고 알고 싶습니다. 모든 게 의문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상대방이 궁금하지 않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지요. 별로 관심이 생기지 않으니까요. 궁금함은 사랑입니다. 육아를 하면서 아이와 어떤 일을 경험할 때 궁금한 부모와 궁금하지 않은 부모에 따라서 반응이 전혀 달라집니다. 궁금함은 사랑의 시작이고, 궁금하지 않음은 사랑의 끝입니다. 아이의 행동을 질문으로 번역해서 스스로에게도 던져 보고, 아이와 물음표(?)를 서로 나누면서 대화를 계속 하면 사랑은 떠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애착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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