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사건의 '리뷰'라고 할 만한 인터뷰군요. 참으로 우리가 가리고 싶어도, 모든 수를 동원해서 무마시키려고 해도, '진실의 블랙홀' 혹은 '진실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뿐인 것 같습니다.

만약 내가 진실을 표방해도 충실하지 않다면, 어딘가에서는 드러날 게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월간 인물과 사상 2006년 2월 인터뷰

뿌리치기 힘들었던 두 달 간의 유혹
PD수첩 최승호 CP·한학수 PD 인터뷰






CNN이 “근대 과학사상 최대의 뉴스거리”라고 논평한 황우석 교수팀의 사이언스 논문 조작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서울대 조사위원회는 1월 10일의 최종 발표를 통해서 황우석 교수팀이 데이터 조작을 통해 인간 배아줄기세포를 확립한 것처럼 논문 작성을 하였다면서 이는 “과학계와 일반 대중을 모두 기만하는 행위”라는 직설적인 비판을 가하였다. 줄기세포는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에 바꿔치기란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고, 줄기세포를 만드는 원천기술 또한 독창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서울대 조사위의 결론이었다.

조작을 위해 황 교수를 위시한 팀의 핵심 멤버들은 실로 대범한 거짓말을 늘어놓았고, PD수첩과 일부 진보언론, 그리고 우리 과학계의 희망으로 떠오른 젊은 과학도들에 의해 속속 폭로되는 진실을 덮기 위해 저들은 또 다른 거짓말로 대다수 국민은 물론 불치병 환자들의 기대를 짓밟았다.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최종 발표가 있었지만 아직도 많은 의혹들이 낱낱이 드러나지 못했다. 검찰 수사와 관계 부처를 통해 밝혀져야 할 내용들은 시시각각 늘어나고 있으며, 국정조사 요구도 거세지고 있다.

그러나 정부, 언론, 국회 등이 모두 이 사건에 주연과 조연으로 연루되어 있는지라 과연 그 조사가 제대로 될 수 있을지, 그리고 조사가 된다면 그 결과가 투명하게 공개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의 여론도 만만치가 않다. 국민들 또한 소위 황빠와 황까로 갈라서서 극한 대립을 해 왔고, 황우석 사기 행각의 전모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교주처럼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는 터라 우리 사회가 이 사건으로 드러난 문제들을 털고 일어나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질곡 속에서 희망의 작은 불씨를 보았다. 이 희망을 살려내기 위해 모든 걸 걸었던 PD수첩이 있었고, 사이언스의 권위에 용감하게 도전하여 조작을 밝혀낸 젊은 과학자들의 열정이 있었다.      



인물과 사상은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긴급 기자 간담회 다음날이었던 지난 해 12월 30일, MBC PD수첩 팀의 최승호 CP와 한학수 PD를 만났다. 이 시기는 12월 23일에 있었던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중간발표와 기자 간담회, 그리고 YTN의 청부 취재와 국정원의 개입 의혹 등을 통해 PD 수첩이 제기한 문제들이 대부분 사실로 들어나고 있었던 때였다. 언론은 거의 하루 종일 국민들에게 생명과학의 기초 공부를 열심히 시키고 있었던 터라 인터뷰는 MBC PD수첩이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두 PD의 내면에 집중하였다.

경영학을 전공한 한학수 PD는 어떻게 자신이 논문을 내는 일보다 더 어렵게 느껴지던 사이언스  표지 논문의 오류를 밝히는 그 무모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는지, 무엇이 모든 언론의 집중포화를 예상하면서도 취재에 착수하게 했는지, 취재 기간 동안 가장 어려웠던 유혹은 무엇이었는지, 상식적으로 모두지 믿기지 않는 그 대담한 조작이 어떤 조건 속에서 가능했는지, 그 동기는 무엇이었는지, 국민 전체가 MBC와 PD 수첩을 향해 돌을 던질 때 MBC 내부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한학수 PD의 가족들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 치루지 않으면 안 되는 대가가 무엇이었는지를 차분히 들려주었다.

지난 해 12월 30일에 최승호 CP와 한학수 PD를 동시에 인터뷰하기는 한 인물과 사상이 처음이었다. 이 날 인터뷰는 최승호 CP의 선약과 한학수 PD의 일정으로 인해 릴레이 인터뷰로 진행되었다. 이 인터뷰는 여의도 MBC 10층 시사 교양국에서 3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오늘 뉴스를 보니 과기부에서 서울대 조사위원외에 이런 저런 압력을 넣었더군요. 정부의 역할에 대해 하실 말씀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최승호 CP- 정부의 역할은 이번 사태의 하나의 중요한 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사태가 일어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집단들이 여럿 있는데, 저는 언론의 책임을 굉장히 크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책임도 만만치 않습니다. 정부는 상황을 투명하게 알리지도, 대책을 내놓아 국민들을 안심시키지도, 대안을 만들어 나가는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했습니다. 계속 은폐하려는 쪽으로만 움직였다는 것이 저희들 생각입니다.

오명 과기부 장관은 황우석 교수를 병문안하고 난 뒤 “영롱이를 검증할 필요가 있느냐, 스너피가 나왔는데…”라는 식의 이야기를 기자들 앞에서 서슴없이 했습니다. 스너피의 성과는 성과대로 인정을 하고, 영롱이에겐 이런 문제가 있었다고 투명하게 밝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국민들과 국제 사회로부터 정부가 신뢰를 얻을 텐데 말입니다. 과기부뿐만 아니라 청와대도 문제가 상당히 큽니다. 상황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황 교수팀에서 올라오는 일방적인 보고만을 듣고 거의 무 대처로 일관한 정황들이 곳곳에서 포착됩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발전되기까지, 과연 정부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부가 구멍가게 행정을 했지요. 젊은 연구자들의 쥐꼬리만 한 연구비까지 빼앗아서 황 교수에게 주었으니.
최승호 CP-사회 여러 분야에서 황우석 교수팀을 견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을 해 주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이 전혀 없는 정부였습니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라면 무조건 지원하자는 태도였지요. 민주노동당이라든지 여성계 쪽에서 계속 윤리 문제를 제기해 왔는데 정부가 귀를 닫고 오로지 성과에만 집착하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줄기세포 허브를 개설하는 자리에 나와서 윤리 문제가 자꾸 나오는데 이것이 발목잡기가 되지 않도록 정치권에서 준비를 해 주어야 한다는 발언을 했습니다. 윤리 문제의 제기가 발목잡기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고, 이후 정부의 대처에 상당히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논란이 커지자 이쯤해서 그만두자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11월말에 과학기자들의 윤리선언이 있었는데 과연 그 정도로 보도 행태가 달라질 수 있겠는지요?
최승호 CP-과학기자들이 윤리선언을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만 그것만으로는 어렵고, 언론 전체가 철저한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종경쟁이라는 것도 사실에 입각하여 충분한 검증을 거친 팩트를 찾아내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누구 입에서 어떤 말을 끌어낼 것인가에 더 집중한 측면이 강했습니다. 그런 말을 끌어내면 특종이라고 오판을 하는 경우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황우석 교수의 보도에 있어서 우리 언론은 계속 녹음기 역할만 해 오지 않았습니까. 황우석이라는 거대한 뉴스메이커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가 뉴스가 될 뿐 아니라 독자들에게 팔릴 것이라는 생각으로 무분별한 보도를 해 왔지요.

그 결과 국민들에게 엄청난 환상을 심어주었고, 그것이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결과적으로 부메랑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기반성을 하지 않는다면 언론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회복되기 힘들 것입니다.




-과학기자들이 각 언론사에 경쟁적으로 충원되었습니다만 그 전문성을 가지고 지난 몇 년간 황우석 교수의 우상화로만 치달았다는 느낌입니다. PD수첩이 다를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이었다고 보시는지요?
최승호 CP-저는 기자든 피디든 언론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진실을 규명하려는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드러난 진실을 포장하지 않고 투명하게 시청자들이나 독자들에게 알리려는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진실 규명의지만 있다면 실제 취재에 있어서의 전문성의 부족은 얼마든지 다양한 방법으로 채워 넣을 수가 있습니다.

한학수 PD는 줄기세포 전문가가 아닙니다. 경영학을 공부했지만 무엇이 진실인가를 반드시 찾아내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고민하고 문제를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논문을 백 번이나 읽었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에게 물어보고, 인터뷰를 해 나가면서 하나씩 진실을 찾아나간 것입니다. 과학전문기자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일천한 전문성이었지만 진실을 찾아낸 것은 한학수 PD이었지 과학전문기자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전문성, 좋지요. 하지만 전문성이 자기 동아리 안에서만 작동한다면 오히려 해악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이번 사태틀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진실규명 의지가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만 상황 자체를 올바르게 읽어 낼 수 있는 건전한 교양의 부족이 황우석 영웅 만들기의 나팔수로 언론을 전락시킨 것은 아닐까요.  
최승호 CP-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은 상식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측면입니다. 지금까지 과학 담당 기자들은 황우석 교수님을 성인처럼 만들어놓지 않았습니까. 그 우상화의 밑바닥에는 <사이언스>라는 엄청난 권위가 또 있었고요.

사실 <사이언스>에 실린 논문들 중에서도 취소된 것 많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언론은 <사이언스> 권위의 힘을 빌려서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자신들이 몇 년간 황우석 교수님에 대하여 쓴 기사가 있기 때문에 갑자기 그것과 다르게 보는 자기 부정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PD수첩이 투명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자기부정을 안 해도 됐기 때문인지 모르죠.(웃음) 황우석 교수에 대하여 단 한 번도 보도를 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때문에 엄청난 권위와 포장된 상식에 대해 객관적인 비판이 가능했습니다.  




-PD수첩 재개 문제를 놓고 시사교양국과 보도국 사이에 이견이 있었던 것 같던데요.
최승호 CP-방송을 해야 한다는 기본 전제에 대해서는 100% 다 동의를 했지만 방송 시점에 대해서 사내에서 이견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저희들은 앞당기고 싶어 한 반면 보도국이나 다른 부서에서는 PD수첩이나 MBC가 받게 될 수 있는 역풍을 우려하여 너무 빠르지 않느냐는 입장이었습니다. 저희로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방송을 해야 한다는 의지만큼은 회사 내부에 확고했기 때문입니다. 저희들로서는 불만이 없지 않았지만 방송 자체를 막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MBC는 유리알처럼 투명하기 때문에 취재된 내용을 사전에 이야기하면 그것이 다 밖으로 나갑니다. 때문에 내부 구성원들에게도 취재 내용을 정확하게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방송도 하기 전에 팩트가 흘러나가서 혼란만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저희로서는 믿어 달라는 이야기뿐이 할 수가 없었어요. 회사의 명운을 좌지우지하는 그런 문제였단 말이죠.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저희를 믿어주셨습니다.  




-위기관리 능력이 미국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란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요. 이상호 기자의 X 파일 때도 그랬지만 MBC 경영진의 위기관리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많았는데요.    
최승호 CP-회사 간부로서 경영진의 결정에 대해 비판적인 언급을 하는 것이 부적절하게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저도 X 파일 당시의 전체적인 스탠스는 옳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좀 다릅니다. 방송을 해야 한다는 경영진의 의지가 확고했으나 변수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사실 YTN이 황우석 교수의 칼이 되어서 PD수첩을 쳤을 때, 저희들은 경영진에게 이 내용을 속속들이 보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저희들 책임도 있지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황우석 교수 쪽에서는 취재 윤리를 문제 삼으면서 방송을 못 하게 하려는 의도를 지속적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것을 총체적으로 인정을 하게 되면 방송이 어려워 질 수도 있었습니다. 저희는 경영진에게, “과도한 표현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법적으로 문제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경영진도 저희를 믿었기 때문에 녹취록 가져 와 보라고 하지 않았고요.

지금도 저희는 한학수 PD의 그 표현이 법적으로 문제될 만한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YTN의 “심지어 죽이러 왔다”는 보도의 여파로 상당한 혼란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회사의 결정이 좀 과도하게 내려진 측면도 있었지요. 그러나 그 결정이 어느 정도는 시청자들의 강력한 반발이나 사회 여론을 피해갈 수 있도록 해 준 것도 사실입니다. 진솔하게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는 부분도 필요했고요. 방송을 유보한 것은 불만이었지만 잘 모르겠어요. 유보 결정을 안 하고 방송을 강행했다면 어떤 상황이 전개되었을지는. 저희가 취재하여 방송한 내용은 전부 팩트로 드러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PD수첩을 여전히 비난하고 있습니다. 알만한 분들이 지금도 그러고 계세요. 오늘 딴지일보의 김어준 씨가 한계레에 쓴 글을 보니까 아, 참…(웃음) 어떻게 그렇게 생각을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듭디다. 그러나 그러한 여론이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 아닙니까. 거의 100%가 ‘PD수첩은 나쁜 놈들’이라고 하는 상황에서, 저희가 “취재한 내용은 맞습니다”라고 하면서 방송을 강행했다면 어떤 결과가 생겼을까요.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시간을 끄는 동안 <프레시안>과 브릭이라는 생물학연구정보센터의 젊은 과학자들이 2005년 논문의 문제점을 찾아내 주었지요. 이런 내용이 알려지면서 “그럼 PD수첩이 취재한 부분은 뭐지?…”라고 하는 생각을 국민들이 가질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PD수첩이 처음으로 광고 없는 방송을 했고, 심지어 방송사 문을 닫으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이때  회사 내부가 보인 반응이 궁금한데요.
최승호 CP-걱정을 많이 했지요. 광고뿐 아니라 시청률도 영향을 받았고요. 그러나 MBC에는 나름의 어떤 기질이라는 게 있어요. 회사가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옳다고 믿는 것을 방송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기본원칙을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어요. MBC 노조가 워낙 오랫동안 싸웠기 때문에, 그리고 직접 그 싸움을 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 회사의 간부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광고를 담당하는 부서에서는 굉장히 어려움이 컸을 것입니다. 저희들은 몸 둘 바를 몰랐고요.




-사과 방송 이후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고 하던데 다시 끊었습니까? 아니면 아직…
최승호 CP-담배라는 것이 다시 피우기 시작을 하면…근원적으로 담배를 끊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아직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끊기는 해야겠는데 마음에서 안 끊어지니!(웃음)




-<서프라이즈>를 비롯한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로부터는 아직도 조선일보와 비슷한 주장이 계속 올라오고 있는데요.  
최승호 CP-그 부분은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아요. 저는 너무 이념적인 지형으로 언론이 나뉘어져 있었던 것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해 왔습니다. 정부가 문제가 있으면 진보언론이든 보수언론이든 당연히 비판을 해야 하고, 정부가 잘하면 보수 언론이든 진보언론이든 잘했다고 칭찬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계속 이념적인 지형으로 갈라서서 정부가 잘해도 못했다는 쪽이 있고, 못해도 잘한다는 쪽이 있어 왔단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국민들의 마음이 모아지지가 않았지요. 실상을 정확하게 전달받지를 못하니까 우리나라가 어디 와 있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치의 공감대가 이루어지기 힘들었지요. 그런 부분들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의 경우도 처음에는 전체 언론들이 거의 다 똑 같이 황우석 띄우기에 열을 올렸지요. 함께 MBC를 포위하고 공격하는 양상이었습니다.(웃음) 나중에는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지는 현상을 보였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반성을 좀 제대로 하여서 무엇이 진실이냐, 라는 관점에 언론도 국민들도 충실해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사태의 핵심에 진실과 윤리의 문제가 있는데요. 최승호 CP께서는 언론이 진실을 추구하다보면 윤리 문제는 절로 해결된다고 보시는지요?
최승호 CP-그렇습니다. 저희들도 취재 윤리 문제를 위반했기 때문에 윤리에 대해 강하게 이야기할 처지는 못 됩니다만, 차이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학수 PD는 승부사적인 기질이 있지만 젠틀한 친굽니다. 기본적으로 누구를 협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나친 자부심인지 모르지만 PD수첩 팀은 대한민국 전체 언론 중에 가장 윤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PD수첩 팀의 누구라도 밖에 나가서 향응이나 선물 또는 단돈 5만원이라도 받으면 그냥 잘립니다. 사실 이번 취재 과정 중에는 한학수 피디에게 너무나 장애물이 많았어요. 피츠버그대의 김선종 연구원의 인터뷰 바로 직전에 중대한 증거를 발견했고, 이것은 엄청난 범죄행위라고 판단을 했습니다. 중대한 비밀을 알고 있는 김선종 연구원의 증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증언을 반드시 받아내야 되겠다는 생각이 한학수 PD로 하여금 오버를 하게 한 것입니다.  진실 규명 의지가 너무 강하다보니 불거진, 일종의 일탈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YTN은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MBC를 칠 수 있는 팩트만 확보할 수 있다면 과정의 윤리 문제는 괘념치 않겠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내부 고발자인 김선종 연구원을 인터뷰 자리에 그의 상사인 안규리 교수나 윤현수 교수를 데리고 갈 수가 있겠습니까.




-YTN은 그  순간만큼은 언론이기를 포기한 것이지요.
최승호 CP-그렇지요. 더군다나 체재비나 항공료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나온 팩트를 보면 최소한 체재비는 안규리 교수 쪽에서 부담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기자 사회의 관행은 아직까지도 취재원으로부터 출장비 도움을 받는 것 같습니다. 정부나 기업체로부터 출장비를 받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려운 회사들이 취재는 해야 하니까 도움을 받는다지만 그래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YTN의 미국 통행 취재에 대해 제가 청부 취재란 말을 했는데, 황우석 교수의 취재 요청에 응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체재비까지 제공받았다는 것은 언론으로서의 기본 인식이 없는 것 같습니다.  




-논픽션과 픽션을 섞는 우를 범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대다수 사람들은 공공의 적애서 설경구가 욕도 하고 두들겨 패면서까지 권력에 맞서는 장면을 보며 통쾌해 했습니다. 그랬던 국민들이 한학수 피디의 검찰 운운 정도로 그토록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이중성을 보니 굉장히 당혹스럽더군요.
최승호 CP-많이 억울했지요. 정서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비유가 참 재미있더라고요. PD수첩은 굉장히 과학적으로 뭔가를 해결하려는데 반해 과학자인 황우석 교수는 언론을 이용한 쇼맨십으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이번 일로 아직도 내용의 진실성 보다는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나 정서적인 호소가 대중들에게 더 영향력이 더 크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이를 계기로 우리 사회가 그럴듯한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서, “저것은 문제 있는 것 아니야, 도대체 내용이 뭐야?”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직접 만나 본 노성일 이사장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한학수 PD-노성일 이사장은 인상이 안 좋다고 하잖아요. 약간 브로커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고 하고.(웃음) 눈이 작다는 점 때문에, 그리고 그 동안의 일관되지 못한 진술 때문에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잘 안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노성일 이사장은 줄기세포가 없다는 것을 정말 몰랐어요. 엊그저께 노 이사장님과 인터뷰를 다시 했는데 황우석 교수님은 매매된 난자에 대해 이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더군요. 연구원 난자 부분도 네이처가 보도하기 전인 2003년 3월경에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노성일 이사장은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국익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연구원 다 댔지 배양기술 다 댔지 난자도 1-2차 다 합치면 1400여 개나 제공하지 않았습니까.




-과학계에선 난자 200-300개만 있으면 줄기세포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이 공공연하다던데요.
한학수 PD-그것은 쉽지가 않아요. 2004년 논문이 242개에서 한 개의 줄기세포를 얻었다고 하잖아요. 사실은 난자 400여 개였는데 수를 줄여 발표한 것이긴 합니다만. 노성일 이사장이 제공한 것인 400개였거든요. 그런데 지금 그 한 개의 진위가 의심받고 있잖아요. 2004년 논문에서 줄기세포가 한 개 나왔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처녀 생식에 의한 돌연변이인지 실제로 재연가능성이 있는 인위적인 확립이었는지 논란이 되고 있거든요.

처녀생식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2004년 논문의 전제입니다. 논문 제목 바로 밑에 ‘이것이 처녀생식에 의한 돌연변이인지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말이 적혀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2005년 논문은 미즈메디 병원과 한나 산부인과의 것을 합쳐 1200개의 난자를 썼잖아요. 그래도 하나도 못 만들었습니다.




-줄기세포 논란 보도가 진보를 죽이기 위한 보수연합체의 대반격이 아니냐는 시각이 있는데요.  
한학수 PD-그런 면도 있고 그렇지 않은 면도 있어요. 왜 그러냐하면 저희가 난자 의혹을 보도했을 때 90% 정도의 국민들이 하지 말았어야 할 내용을 방송했다고 생각하였거든요. 당시 MBC를 지지했던 매체로는 한겨레,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정도였어요. 난자 의혹 방영 후 한겨레가 1면 톱으로 실어주었지요. 그때까지의 논쟁은 국익과 진실이었잖아요. 줄기세포에 관한 1라운드 논쟁에 대해 한겨레는 윤리와 진실이라는 차원에서 보도할 것을 했다는 논조였지요.

거기까지가 한겨레의 역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중요한 역할이었지요. 그러나 그 뒤에 진위 논란으로 가게 되니 한겨레가 주춤하더군요. 한겨레도 두려웠던 것 같아요.(웃음) “설마 황우석 교수가 전국민과 세계를 상대로 그런 사기를 쳤겠어”라는 의구심이 있었나 봅니다. 오마이뉴스도 마찬가지였고요. 진보를 자처하는 많은 평론가들, 심지어 민주노동당 게시판조차도 진위 논란은 대중과 유리된 것이라는 주장이 일부에게 계속 올라왔습니다. 저는 이번 일로 대한민국이 발가벗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생각하는 진심의 정도가 대단히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지요.

시민사회의 경우도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아요. 참여연대가 이 사건 전체 속에서 무슨 일을 했습니까? 참여연대 이름으로 성명서 한 장 나온 거 있나요? 그게 뭘 말하는 건데요? 진보를 자처했던 사람들이 파퓰리즘을 욕하고 인민주의를 탓했지만 자신 또한 거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 아닌가요? 사태가 마무리되어 가는 이 순간에 큰 시민단체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못 하잖아요.




-MBC 경영진이 희대의 특종을 두 건이나 해놓고도 갈팡질팡했다는 지적에 최승호 CP는 X파일과 이번의 경우는 달리 보아야 할 사안이라고 하던데 한학수 PD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한학수 PD-X파일의 보도에서 MBC가 뼈아픈 실책은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 사과하고, 취재한 내용에 대해서는 보도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 생각해요. 저희가 난자 방송을 하고 났을 때만 하더라도 취재윤리에 대해 좀 쉽게 생각한 부분이 있었어요. 김선종 연구원의 증언이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윤리 문제로 이렇게 강하게 공격해 올 줄은 미처 몰랐던 거죠. 잘못이 있었으니까 사과 방송을 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방송을 늦추고 PD수첩의 중단 결정까지 내린 것은 오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 최승호 CP와 저는 MBC 내부를 설득을 하자고 했어요. 그래도 안 되면 직을 걸고 나가서 기자회견을 할 생각이었어요. “우리를 구속하라”는 이야기까지 하려고 했지요. 그 상황까지 간다면 MBC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로 가기 전에 먼저 MBC를 설득해 보자는 것이었지요. 생각보다는 설득이 잘 되었습니다. 1주일 사이에 노동조합, 보도국, 회사 임원들까지 만나서 우리가 가진 정보를 다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결과 일주일 사이에 방송을 해야 한다는 쪽으로 회사 분위기가 변했습니다.

우리가 방송을 못 낸 것도 아니고, 다른 언론사가 먼저 내서 우리가 특종을 놓친 것도 아닙니다. 때문에 이번은 X 파일 경우와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분위기가 확실하게 반전될 수 있었던 것은 MBC 저변에 흐르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회사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해요. PD수첩의 최승호 팀장, 시사교양국의 최진용 국장 등이 보여준 PD 정신, 그리고 MBC가 없었다면 방송하지 못했을 겁니다.




-다른 언론이나 여론과 싸우는 것보다 내부를 설득하는 것이 더 힘들진 않았는지요.  
한학수 PD-제보를 받고 취재를 시작한 것이 6월 1일이었습니다. 사안이 중대한지라 보안이 새 나갈 경우 초기부터 압력이나 로비가 들어올 가능성이 컸습니다. 때문에 최승호 팀장, 최진용 시사교양국장까지만 알렸고, 경영진에게는 10월이 되어서야 간략한 보고를 했습니다.

물론 내부 진통이 있었죠. 회사가 무너지면 당장 거리로 나앉아야 하는 내부 구성원들 아닙니까. 때문에 구성원들이 그만큼 당사자로 진지하게 임했고, 언제 방송이 될 것인가에 대해 주목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어요. 취재 윤리에 대해 사과하고 나서 회사 구성원들한테 보고는 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제가 메일을 띄웠어요. 회사 내부에서 답변이 엄청나게 많이 왔어요. 일일이 답장을 못 할 정도였지요. 100여 통 가까이 왔나 봐요.

MBC직원이 그렇게 많지 않거든요. 답변 메일의 99%가 방송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보자는 내용이었어요. 외부에 나가 다니는 것도 힘들 때였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왔다 갔다 하는 저를 보면 모두 격려해 주었지요.




-가족사진이 인터넷에 돌고, 경호까지 따라 붙었던 걸로 압니다만 체감으로 느껴지는 압력이나 협박은 어느 정도였나요.
한학수 PD-방송 그 전날부터 가족사진이 인터넷에 유포되더니 방송 이후에는 저와 가족들을 찢어죽이겠다는 댓글이 공공연하게 붙더군요. 12월 6일에 2차 방송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YTN이 4일에 취재 윤리를 터뜨립니다. 그러나 저희는 12월 1-2일 사이에 가족들을 피신시켜요. 가족사진이 인터넷에 유포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12월 6일로 예정되어 있던 진위논란편이 방영되면 쉽지 않겠다고 판단을 했던 것이죠.

제게는 회사에서 경호팀을 붙였고, 회사 차량으로 출퇴근을 했습니다. 가족들을 제가 모르는 곳으로 피신시켰고 저도 다른 곳에서 출퇴근을 했어요. 가족들과는 쭉 헤어져 있다가 12월 24일 만났네요.(웃음) 애가 다섯 살인데 아직도 어린이집엘 못 가요. 어린이 집에 못 나간 게 한 달이 넘는데 앞으로도 한두 달은 못나갈 것 같아요. 애가 집에만 있어야 하는 게 안타깝죠. 가족들도 아직은 집 외출을 삼가고 있습니다. 차차 나아지겠죠.




-최승호 CP에게도 같은 질문을 드렸습니다만 흔들림이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한 힘이 무엇이었나요.
한학수 PD-우선은 제보자의 진실함이 있었어요. 최승호 팀장이 상식의 저항이란 표현을 썼는데 몇 가지 국면에서 문제가 잘 안 풀리거나 취재가 잘 안 될 때는 “황교수님 주장이 맞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취재 중반까지는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때마다 제보자가 진실하게 그런 것이 아니라고 바로 잡아주었습니다.

또 하나는 MBC 시사교양국의 문화적 토양입니다. 97년에 입사해서 내년이면 10년이 됩니다만, 사사교양국의 피디와 같은 경우에는 명예 하나로 살잖아요. 피디저널리즘이라고 하는 무식하면서도 끝까지 간다는, 취재가 부족해서 미숙하거나 거친 부분이 있을지언정 휘지는 않는다는 정신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게 아니겠나 싶어요.

어떤 분이 취재하는 것을 고깃배에서 낚시하는 것에 비유했어요. 낚시를 하다 보니 고래가 물었는데 어떤 언론인은 주변을 살펴보며 무섭다고 낚시 줄을 끊어버린 거예요. 그런데 PD수첩 팀은 배가 난파될지도 모르지만 모든 새우를 정말 괴롭히는 나쁜 고래가 물었기 때문에 끝까지 간 거죠. 계산을 좀 덜 하는 겁니다. 가야한다면 그냥 가는 겁니다. 안 그러면 제보자에게 부끄럽잖아요. PD수첩이면 일개 줄기세포 전문가인 자기 말을 들어줄 것이라고 믿고 찾아온 거 아니겠습니까.

결국 대한민국에서 우리를 선택한 것인데 도중에 접을 수 없지요. 우리가 접으면 해외언론으로 간다고요. 그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6개월 혹은 1년 이내에 진실을 정확하게 규명하지 못하면 뉴욕타임스로 가는 게 분명했기 때문에 이것은 제게 필사적인 것이었어요. 그러면 해외 언론으로부터 일격을 맞습니다. 그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그렇더라도 국민 영웅 황우석과 사이언스를 상대로 취재를 시작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한학수 PD-이번 취재를 하면서 몇 가지 국면이 있었습니다. 첫 난관은 제보자로부터 들은 내용을 어떻게 입증할 것이냐의 문제였어요. 사실 125년의 역사를 가진 사이언스 표지논문의 오류를 밝혀내는 것은 제가 사이언스에 논문을 내는 것보다 더 힘들 것 같았어요. 두려움을 느꼈죠.

1999년의 영롱이부터 시작해서 2005년의 논문까지 언론 보도가 지나치게 과장되고 들떠 있었기 때문에 그 동안의 기사를 부정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모든 언론이 나를 죽이려고 덤벼들 것 같기도 했고요. 세 번째 난관은 이미 신화로 자리 잡고 있을 뿐 아니라 어떻게든 황우석 교수님의 연구를 믿고 싶어 하는데 우리가 아무리 논문의 허구성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더라도 과연 국민들이 믿어줄 수 있을까 싶더군요.

첫 번째 과제는 미즈메디 병원의 1-15번 라인의 핑거 프린팅 자료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미즈메디 병원의 핑거 프린팅 자료를 확보하려고 했던 것은 황우석 교수팀이 수정란 줄기세포를 가지고 장난을 친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15개 라인 중에 몇 개가 일치하느냐를 알게 되면 쉽게 입증이 되는 것이거든요. 정말 그걸 어렵게 구했어요. 그런데 논문하고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 거예요. 첫 번째 입증에서는 실패한 거죠.

두 번째 과제는 환자의 체세포를 실제로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논문의 유전자 지문과 환자의 유전자 지문을 비교하여 일치하지 않으면 이 논문이 가짜라는 게 입증되는 것이거든요. 환자를 밝히기가 힘들었는데 다행스럽게 우리가 2번 라인의 환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고, 어렵게 그 환자를 만나서 머리카락을 얻어요.




-논문에서 2번 라인이 제일 중요했지요?
한학수 PD-그렇습니다. 그래서 2번 라인으로 지문검사를 해보니 이것은 논문과 일치했어요. 우리는 이 환자의 체세포를 가지고 두 개를 복사해서 올렸으리라 추정을 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황 교수님으로부터 줄기세포를 얻지 않으면 이것을 입증할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HLA 타이핑, 즉 조직적합성 면역 검사를 누가 했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안규리 교수님 팀이 했더군요. 서울대 검사의학과에서 한 것인데 우리가 실험실 장부를 확인해 보니 줄기세포가 14개가 나오더군요. 논문에는 11개를 만든 것으로 나오는데 장부에는 14개더라고요. 그때 뭔가 ‘야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4개의 줄기세포를 만들었다면 모두 발표하지 왜 11개만 하겠어요. 그래서 우리는 14개로 발표하려 했다가 수를 줄였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숫자에 문제가 있다는 부분적 증거를 찾은 거지요. DNA 지문검사, HLA 타이핑 검사, 그리고 테라토마 생체실험으로 줄기세포를 입증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그대로 따라간 겁니다. 그래서 테라토마 생체 실험을 실제로 한 것이 누구냐를 찾았지요.

논문에서 테라토마 실험을 했다고 나와 있는 사람은 안 했더군요. 이렇게 따지고 들어가다 보니까 결국은 줄기세포가 2개뿐이 없더라는 거죠. 그래서 2개를 가지고 11개로 부풀렸다는 추청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미국가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저희는 10월 19일에 미국에 도착해서 20일 김선종 연구원을 만났습니다. 미국 가기 전, 제보자 중 한 명이 황 교수님 팀이 외부에 분양한 2번 줄기 세포의 일부를 조금 얻어왔기 때문에 유전자 지문 검사를 의뢰를 하고 미국으로 떠났어요. 2번 3번을 가지고 11개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지고 미국으로 날라 간 것이지요.

10월 15일에 넘긴 유전자 검사의 결과를 10월 19일 밤에 받아요. 그런데 2번 라인의 지문 결과가 미즈메디 4번으로 나온 거예요. 최소 2-3번은 진짜일 것이라고 추정을 했는데 2번이 가짜로 나온 거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에 저희들 머리가 돌아버린 거죠. 정말 해도 너무 한다 싶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다음 날 김선종 연구원을 만나서 무엇인가를 얻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제가 사람을 족치는 사람은 아닌데 그때는 어떤 강박이나 조급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잘못했지요. 어떤 이유에서든 구속이 된다든지 검찰 조사가 진행될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되었죠. 여기까지가 윤리를 넘게 된 정황입니다.

그 다음 과제는 김선종의 증언을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증언은 증언일 뿐 증거가 아니잖아요. 황 교수님이 얼마든지 부정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실제 셀을 얻어야 했습니다. 김선종 연구원의 증언이 있었으니까 받을 수 있는 조건은 확보한 셈이었죠. 그래서 셀을 달라고 한 거예요. 그때부터 셀을 주네 마네 하는 과학적인 공방이 시작됩니다.

황 교수님이 처음에는 셀을 준다고 했는데 안 줬잖아요? 11월 6일에 셀을 인수받기 위해 갔는데 라인을 특정해 주지 않아서 못 받겠다 했지요. 어떻게 셀을 받을 수 있었는지 아세요? 우선은 문신용 교수님이나 안 교수님을 통해서 일종의 압력을 넣었어요. 그러나 안 줄 수 없게 만든 것은 우리가 황 교수님께 보낸 메일이었어요.

1차 인수에 실패하고 저희는 황 교수님께, 서울대 치대와 고려대 생명과학부에 셀이 나가 있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이틀 내에 그분들에게 협조를 구하겠다고 했습니다. 만약에 그분들이 셀을 주지 않으면 다시 이틀 내에 뉴욕의 슬로언 캐터링 암 센터의 스투더 박사에게 가겠다고 했지요. 당시 황우석 교수와 강성근 교수는 프랑스에 계셨는데 메일을 보낸 지 불과 48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바로 답 메일이 오더군요. 안 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2차 인수 때 다섯 개의 시료를 받았잖아요. 그것을 가지고 60개를 만들어서 우리 변호사가 15개를 보관했고 45개는 15개씩 두 곳에 시료를 맡겼는데 그 중에서 2번과 4번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15개로 또 다시 검사를 맡겼어요. 결국 45개 중에 서 1.5개가 나온 겁니다. 2번 라인은 확실하게 나왔지만 4번 라인은 겨우 알아 볼 정도로만 나왔으니까요. 때문에 저희는 황 교수님이 보내준 시료에 뭔가 문제가 있었지 않았나 의심을 하고 있어요. 그러나 저희가 그것까지는 입증을 못하고 있습니다.  




-바꿔치기 주장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이십니까. 어제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기자 간담회의 내용은 그 대목에 대해 뭔가 암시를 한다는 것 같은데.
한학수 PD-노정혜 연구처장의 발표만을 가지고 자작극이냐 바꿔치기냐를 쉽게 논단하기는 힘들어요. 다만 윤현수 교수의 주장이나 저희들이 만났던 줄기세포 전문가들, 혹은 저의 개인적인 판단을 놓고 본다면 바꿔치기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바꿔치기가 되려면 원래 있던 셀을 꺼내고 가져 간 셀을 집어넣어야 하는데 이것이 과자를 바꿔치기 하듯 할 수가 없어요. CCTV가 설치되어 있는 곳이고, 최소 30분 정도의 시간이 걸려야 바꿔치기가 가능하거든요. 그것도 전문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그렇게 바꿔치기를 했다고 하더라도 전문가들이 매일 같이 셀을 관찰합니다. 눈에 띄게 줄기세포가 확 자랐다거나 자라는 속도가 어제와 달라지면 전문가들의 눈이 그걸 발견치 못할 리가 없죠.  




-한양대 윤현수 교수가 제기한 황우석 연구팀의 자작극이 가능성도 희박하다는 뜻인가요?
한학수 PD-바꿔치기를 김선종 연구원이 했든, 권대기 팀장이 했든, 혹은 강성근 교수나 이병천 교수가 끼었든, 황우석 교수가 끼었든, 아니면 이 모든 사람들이 다 연루되었든 바꿔치기의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다는 거죠. 하나는 시간상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배양 접시를 바꿔치기하면 전문가들의 눈에 금방 띈다는 것입니다.

원래 미즈메디 수정란 줄기세포를 갖다 놓았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이 사안의 첫 번째 동기는 242개의 난자를 실용화시켜야 된다는 큰 부담이었습니다. 2004년 논문만으로는 실용화의 가능성이 매우 낮았으니까요. 사실 2004년의 논문에 대해 우리나라에서는 들떴지만 해외에서는 의료까지 가기 힘든 하나의 과학적인 발명 정도로 받아들였어요. “사람에게서도 체세포 핵이식을 통해서 줄기세포가 뽑아질 수가 있네”하는 정도였죠. 우리나라는 너무 오버했지요.

실용화에 대한 부담이 컸을 겁니다. 그리고 2004년 논문으로는 특허 자체가 힘들어요. "줄기세포가 처녀생식을 통해 유래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DNA 지문분석 결과는 이 세포가 체세포 핵이식을 통해 탄생했다는 점을 뒷받침한다"는 말이 논문의 제목 바로 밑에 붙어있다고요. 그러나 우리나라 언론은 특허 출원을 하면 그것으로 다 끝나는 것처럼 보도를 했어요.

과학적인 재현이 뒷받침이 되어야 특허가 인정됩니다. 그런데 2004년 논문에는 돌연변이의 가능성이 전제되어 있어요. 2004년 논문에는 이런 딜레마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번 사건의 동기에요. 그러나 동기만 있다고 해서 이 사건이 현실화될 수는 없지요. 그러면 이 동기를 현실화 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뭐냐?

첫째, 완벽한 짝퉁이 있다는 겁니다. 체세포 핵이식 줄기세포는 만들어지고 나서 수정란 줄기세포하고 외관상 구별이 안 되어야 해요. 만들어지는 과정을 탐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DNA 검사를 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속을 수밖에 없는 완벽한 짝퉁이 있는 거예요. 제가 범죄 심리학자가 된 것 같네요.(웃음)

두 번째 조건은 재연가능성이 없다는 거죠. 체세포 핵이식에는 30대 여성도 필요하지 않고, 40대 여성은 더더구나 필요하지도 않고 오로지 20대 여성의 싱싱한 난자가 제공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20대 여성의 싱싱한 난자를 뽑아서 당일 날 바로 가져와서 몇 시간 내에 체세포핵이식을 해야 하거든요. 20대 여성의 싱싱한 난자를 100-200개씩 얻을 수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대한민국 밖에 없어요. 사이언스에 논문을 내면 그 분야의 과학자들이 재연을 해 보잖아요. 궁금해서 재연을 해 본다고요. 오류가 있거나 조작이 가해졌다면 그 과정에서 다 탄로가 나지요. 그런데 체세포줄기세포는 재연이 안 되는 겁니다. 우선 그런 기술을 가진 나라가 영국, 미국, 호주, 일본, 그리고 유럽의 한 두 나라인 정도뿐인데다 설혹 기술을 가졌더라도 20대 여성의 싱싱한 난자를 100-200개씩 구할 수가 없어요. 때문에 검증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럽 쪽에서는 대체적으로 배아복제연구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한학수 PD-그런 나라가 많죠. 미국 쪽도 마찬가지구요. 그렇기 때문에 몇 년의 시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 같아요. 그래서 줄기세포주 은행에 기탁도 안 한 것 같고요. 일단 만들어 놓았다고 하면서 몇 년의 시간을 벌 수 있잖아요.




-A 제보자는 10년을 이야기했는데요.
한학수 PD-한 개라도 만들 가능성으로 10년을 본 것이지요. 황 교수님께서는 최소한 몇 년 정도를 철통 보안 속에서 시간을 끌 수 있다고 판단하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볼 때, 첫 번째가 사건의 동기라면 두 번째는 그것이 현실화 될 수 있는 조건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된다고 해서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황우석 교수님께는 이 세 가지가 다 있었던 것이죠. 참으로 대담하신 분이고, 참으로 대담한 담력을 가진 팀입니다. 2003년에 처음으로 줄기세포가 만들어진 이후로 국정원이 황우석 교수님을 마크를 하면서 보통의 랩과는 다르게 자기들 스스로 소통을 못하게 하는 구조가 만들어져 있었어요. 그런 고유한 특성과 황우석 교수님의 캐릭터와 결합되었기 때문에 이런 조작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황 교수님이 기자 회견을 하면서 ‘한 개만 되지 3개든 10개든 그게 뭐가 중요하냐’는 이야기를 하실 땐 제 귀를 의심했어요.
한학수 PD-저희가 겪어 본 황 교수님은 대단히 언변이 탁월하신 분이고, 남을 설득하는데 남다른 능력이 계신분입니다. 그 분과 인터뷰를 해 보면 며칠, 아니 몇 시간 있으면 드러날 거짓말을 가지고 대단히 자연스럽고 확신에 찬 인터뷰를 해요.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10월 30일 인터뷰도 불과 며칠 만에 내용이 거짓으로 드러났거든요. 우리가 모든 걸 알고 갔는데도 어떻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그렇게 하실 수 있는지….




-동일한 정보가 주어졌다고 하여 모든 언론이 PD수첩 팀과 결과를 만들어 낸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때문에 언론에게 더 중요한 것은 건전한 판단력과 확고한 세계관으로부터 나오는 용기가 아닐까 싶은데.
한학수 PD-모르겠어요. 제가 아니어도 그런 제보를 받았다면 저처럼 취재 윤리를 넘지 않으면서도 보다 치밀하게 잘 하실 분도 많을 것이라 생각해요.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포함되었기 때문에 열심히 한 것뿐입니다. 앞에서 6개월간의 취재를 하는 동안 몇 가지 국면이 있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부분적인 증거는 있지만 뭔가가 확실하게 안 잡혀서 힘들 때가 있었어요. 지금 복기해 보면 왜 그랬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의 가능성은 아까 말씀드렸던 자존심 문제에요. 슬로언 캐터링 암 연구센터에 2번 줄기세포가 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9월에 방영된 KBS 일요스페셜의 “황우석, 세계는 그를 왜 주목하는가”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서였어요. KBS가 슬로언 캐터링 암 연구센터에 가서 로렌스 스투더 박사를 찍은 화면을 보니까 2번 줄기 세포를 한국에서 가져와서 연구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두 달간 유혹을 계속 느꼈어요. 제가 슬로언 캐터링에 가지 않아도 스투더 박사한테 메일만 하나 보내면 되요. 나는 한국에 있는 MBC란 방송사의 프로듀서인데 당신이 연구하고 있는 2번 줄기세포의 진위 문제를 취재하고 있다, 2번 줄기세포의 핑거 프린팅을 해 보고 결과를 알려달라고 하면 하루도 걸리지 않고 나오거든요. 정말 두 달 내내 유혹을 느꼈지요. 힘들 때마다 메일을 보내버릴까 했었어요. 팀 내에서도 뉴욕타임스보다 하루 늦으면 어떠냐, 메일 한 번 쓰자, 라고 할 정도였어요.

하지만 그것은 못 하겠더라고요. 스투더가 핑거 프린팅을 하는 순간 그것을 우리에게 먼저 주겠어요, 뉴욕타임스에 먼저 주지. 세계관까지는 아니더라도 저는 MBC에 오기 전에도 그랬지만 오고 난 이후에도 아는 것은 그대로 보도하자는 생각이 있었어요. 저도 PD수첩에서 “사형제를 사형시켜라”, “불패신화, 무노조 삼성”, “음지의 절대권력 국정원” 등을 하면서 황 교수처럼 담력이 커져서 그런지…(웃음)

아무튼 취재가 중반 이상으로 넘어가면서 황 교수의 연구에 중대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 드러날 때, 그러니까 전체 그림을 확정적으로 잡지는 못했지만 부분적인 증거가 드러날 때, 최승호 팀장과 담배를 피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어느 시점에 가면 우리가 작두 위에 서야한다.” 난자의 윤리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는 작두 위에 서지 않습니다. 역풍이 분다 해도 우리가 죽고 살지는 않아요. 프로그램이 중단되거나 우리가 직을 걸고 기자회견까지 갈 필요도 없고요. 그러나 진위문제는 달랐습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MBC 시사교양국의 토양이 아니었나 싶어요.




-최승호 CP는 조선일보의 보도에서 살기를 느꼈다고 했는데요.
한학수 PD-방송사에 입사한지 10년이 다 되어 갑니다만, 이렇게 강력한 압박, 강력한 중압감, 이렇게 강력한 두려움을 느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삼성과도 다퉜고, 기무사와도 다퉜고, 국정원과도 다퉜지만 지금 같진 않았어요.

그 중압감의 정도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이 싸움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면 한학수 PD, 최승호 CP, 최진용 시사교양국장, 본부장, 사장 등의 목을 줄줄이 걸고 ‘작두 위에 서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제일 컸던 중압감은 이 작두 위에서 떨어지면 수많은 MBC 직원들의 모가지가 떨어질지 모른다는 점이었습니다. 솔직히 가족 생각도 났고요. 와이프가 7-8월경에 알게 되었는데 하지 말라고 말렸어요.




-왜 아니겠어요.
한학수 PD-그거 한다고 돈이 더 나오는 것도 아니니 하지 말라고 했죠. 하지만 저는 그런 놈인가 봐요. 설명을 잘 못하겠네요.




-이번 싸움은 진보진영조차도 국가주의, 국익 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사례가 아닐까 싶어요.
한학수 PD-저희가 이번에 한국 사회에 던진 질문은 세월이 지나면 한국 언론의 교과서에 실릴 것 같아요. 진실을 보도했는데 진실을 보도하지 말라고 한 것은 한국 언론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겪었던 싸움은 진실을 보도하지 못하게 하는 세력들을 향해 언론의 재갈을 풀어주라는 싸움이었지요. 국민이 진실을 보도하지 말라고 하는 이번 상황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것이 이번 사건이 던진 첫 번째 테마였지요.

두 번째 테마는 취재윤리와 저널리즘이었습니다. 결과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언론의 역할은 무엇이고, 취재 과정상에 무엇을 담보해야 하는가 하는. 그것은 생각보다 깊은 문제에요. 제겐 오버할 수밖에 없는 정황이 있었긴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언론인 저변에 흐르고 있는 과도한 선민의식이나 정의감이 저를 통해 표현된 것일 수도 있거든요. 주류 언론이 갖는 못 말리는 공격성이 저를 통해 드러났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취재윤리와 저널리즘이란 테마는 깊이 들어가 보아야 할 문제에요.

세 번째 테마는 “대한민국은 어디에 와 있는가?”였습니다. 이것에 진보와 보수의 싸움이라는 측면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뛰어넘어요. 87년 6월 이후 한국 사회가 민주화에 도전하면서 굉장히 다이내믹하게 도도히 흘러왔습니다만, 우리가 어떤 민주화와 선진화를 이루었는지에 대해 대단히 적나라하게 이 사회의 수준을 드러냈다고 보여 집니다.

많은 평론가들의 존재와 그들의 평론이 얼마나 두께가 얇았던 것인지를 보았습니다. 몇 명의 정치가의 수준 또한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심지어 몇몇 언론사는 언론사 통째로 저들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가를 의심하게 했습니다. 이것을 추스르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죠. 젊은 과학자들이 추슬러가고 있고, 서울대 조사위도 성찰적인 조사를 하잖아요. 많은 언론사들이 이미 사과문을 썼어요. 국민들도 스스로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자신은 과연 황우석의 무엇에 그렇게 열광을 했었고, 왜 그렇게 쉽게 믿었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저는 이런 진통을 겪어야 우리 사회가 더 성숙해 진다고 봐요. 이번 사태가 해결책은 제시하지는 못했으나 질문은 던졌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경험은 앞으로의 PD수첩의 방향이나 의제 설정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이라 생각하는지요.
한학수 PD-많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지금 환자의 줄기세포가 한 개도 없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보도에 공감을 보내고 있지만 설혹 PD수첩이 문제를 제기 했으나 11개의 줄기세포가 제대로 나왔다면 방송을 하지 말았어야 하느냐는 거죠.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PD수첩이 내부 제보자의 증언을 토대로 과학적인 방식으로 질문을 던졌는데 과학자가 정치적인 수사를 동원 하면서 정치적·비과학적인 방식으로 의혹만 증폭시키고 있다면 당연히 검증을 요구해야 하는 게 옳습니다. 국가주의라는 틀을 넘기 위해서는 개인의 창의적인 생각과 고유한 의지, 그리고 누가 어떤 의심을 품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의심을 용인해 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그런 의심의 역할은 언론 본연의 사명이겠지요. 우리는 이번에 언론·과학계·정부가 맺었던 삼각 동맹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이를 통해 국가주의를 넘어서는 다원화된 한국 사회, 개인이나 개별 언론사의 창의성과 고유한 의심을 들어줄 수 있는 한국 사회로 나가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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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01-22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글을 다 읽어도 황빠들 귀에는 종소리만 울릴걸요... 황우석이 구속되지 않는 이상.
'원천 기술' '바꿔치기' 'pd수첩 재수없어'
내 주위에만 그런건지...
 

<조선>은 황우석의 '입'이었다
고비마다 황 교수 이해 철저 대변... 진실 규명 앞장서 막아
텍스트만보기   특별취재팀(news)   
▲ 조선일보 노동조합이 발행하는 <조선노보> 768호
'황우석 사태' 보도에 대한 언론사들의 반성이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조선일보>도 노조를 중심으로 문제제기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일보 노조는 지난 22일자 노보를 통해 황 교수 사건과 관련한 자사 보도를 점검했다. 조선노보는 "줄기세포는 없는 것 같다"는 노성일 미즈메디병원 이사장의 발언이 나온 지난 15일 밤 편집국의 분위기가 "(2002년) 대선 개표가 끝난 직후처럼 침울했다"고 전했다.

또 "황우석에게 휘둘렸다"는 비판론과 "사과해선 안 된다"는 옹호론을 나란히 소개하면서 대체로 비판론에 무게를 실었다. 그러나 조선노보가 제시하는 궁극적인 방향은 "이번 사태의 후폭풍을 대비해야 한다. 조선일보를 못마땅해 하는 세력들은 분명 이를 계기로 공격 강도를 높일 것이므로 내부적 결속이 시급하다"는 것이었다.

자사에 대한 비판을 수용한 것 같지만 자성이 아닌 내부단합이라는 전혀 엉뚱한, 하지만 늘 조선일보가 그래왔던 대로 사익위주의 결론으로 향하고 있다.

더욱이 '비판론'조차도 조선일보 보도의 문제점을 호도하고 있다. 조선노보가 소개한 내부 비판론은 "우리 신문의 보도태도는 심정적으로 한쪽에 치우친 부분이 있다”는 정도다. 만약 그 정도의 편향성이라면 조선일보의 보도에서 일상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문제점이고 굳이 여기서 짚을 필요는 없다.

이번 사태에서 조선일보는 심리적 편향성의 오류에 빠진 정도가 아니라 사실추구를 적극적으로 왜곡하고 저지하는 역할을 해왔다. 특히 조선일보가 터뜨린 수많은 특종은 새로운 사실의 발견이라기보다는 진실로 가는 길에 1차, 2차, 3차 바리케이드를 놓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 대가로 애국적인 매체로 스스로를 부각시키려 했다.

지난 5일자 조선일보를 보자. 이 신문은 "황우석 교수팀이 MBC PD수첩의 '협박·회유 취재'에 시달리는 사이 일본이 줄기세포 관련 분야에서 또 다른 세계 최초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이 논문은 황 교수팀도 준비 중이었던 것이어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면서 마치 PD수첩이 황 박사팀의 발목을 잡아 일본에 선수를 빼앗긴 것처럼 보도했다.

<조선> 보도 편향성의 오류에 빠진 정도가 아니었다

▲ <조선일보>의 "'세계 첫 논문' 일에 선수 뺏겨"라는 제목의 보도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면서 보도 배경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당시 조선일보의 취재원은 황 박사팀에서 논문조작에 가담한 의혹을 받고 있는 서울대 수의대 이병천 교수. 이 교수는 "우리가 10개를 했다면 일본팀은 5개를 한 수준"이라며 "세계 최고 수준의 저널에 발표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최근 논란 때문에 손을 놓은 사이 일본이 좀 더 아래 단계의 저널에 발표해 김이 샜다"고 아쉬워했다고 조선일보는 전했다. 이 기사가 나가자 포털 사이트에서 '반 MBC'의 거센 광풍이 불었다.

조선일보가 지칭한 논문은 일본 오사카 부립대 연구팀이 자연교배로 얻은 수정란에서 줄기세포를 배양하는 데 성공했다며 지난달 16일 국제학술지 '분자생식 및 발달'(Molecular Reproduction and Development)에 게재한 논문(Isolation and characterization of embryonic stem-like cells from canine blastocysts).

그러나 전세계 1천여개의 과학저널을 소개하는 '윌리인터사이언스'(www3.interscience.
wiley.com) 기사에 따르면, 이 논문은 이미 지난 5월 29일 제출된 것으로 밝혀졌다. '분자생식 및 발달'은 8월 22일 이 논문을 채택했다.

MBC < PD수첩 >이 제보를 통해 황우석 박사의 난자매매 의혹 취재를 시작한 것은 지난 6월경이기 때문에 황 박사 팀이 < PD수첩 >의 '협박 취재'에 시달리기 전이다. 시간이 오래 소요되는 학술논문의 게재절차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쓸 수 없는 기사였고 논문의 진위논쟁을 황 박사팀에 대한 연구방해 논란으로 끌고가려는 의도가 숨어있다는 의심을 받기에 족하다.

사흘 뒤인 지난 8일 조선일보는 또다른 '특종'을 낚아 올린다. "배아줄기세포 핵심 기술 보유자로 미국 피츠버그대 제럴드 섀튼 교수팀에 파견된 서울대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원 3명 중 일부 연구원의 미국 영주권 신청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는 보도가 그것이다.

이 신문은 "영주권 신청이 구체화되어 받아들여질 경우 이들의 체미 기간이 장기화되고, 이 과정에서 복제 기술의 유출이 현실화돼 한미 간 '기술 분쟁'이 본격화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로 MBC는 일부 네티즌들 사이에서 '매국노' 수준으로 내려갔다.

기사가 그럴 듯했던 것이 황 교수팀 관계자뿐 아니라 국내 관계당국의 한 관계자 말을 인용, 객관성을 더하고 있기 때문. 조선일보에 따르면 관계당국의 한 관계자도 "현재 미국에 파견된 세 연구원의 동향에 대해 면밀히 체크하고 있다"면서 "미 영주권 신청 움직임에 대해서도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연합뉴스>는 제인 더필드 피츠버그대 대변인의 말을 인용, 황우석 교수팀에서 미국 피츠버그대 제럴드 섀튼 교수 연구팀에 파견된 한국인 연구원 3명의 미국 체류 신분에는 변화가 없으며 대학측이 이들에 대한 영주권 신속 처리를 요청한 적도 없다고 보도했다.

더필드 대변인은 또 피츠버그대가 현지 한국계 법무법인을 통해 한국인 연구원들의 영주권 신청을 신속히 처리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조선일보의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누구의 보도가 맞는지는 아직 가려지지 않았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대학 측은 그들의 체류신분이 'J1' 비자라고 확인했다. 보통 '방문교수나 방문연구원(visiting scholar)'에 발급되는 비자다. 이 비자 단계에서 바로 영주권 신청은 거의 불가능하다. 일단 'H1' 취업비자를 받은 뒤 몇년이 지나야 영주권 신청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황 교수팀 보호 위해 오보도 마다 않아

▲ <조선>의 12월 13일자. <조선>은 섀튼 교수와 안규리 교수가 통화한 내용을 받아 섀튼이 "300% 신뢰한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다음날 섀튼 교수는 "논문에서 내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도 한국인 이민 전문변호사의 말을 인용, 황 박사팀에 속한 연구원들이라면 이 과정을 속성으로 밟아 1년 내에 영주권을 받을지 모른다고 추측했다. 조선일보는 기사가 너무 앞서갔다고 판단했는지 한·미간 '줄기세포 기술 분쟁'의 최악의 국면으로 가지 않도록 한·미 당국이 '조정할' 가능성을 제기하는 흐름도 없지않아 향후 추이가 주목된다고 덧붙였다.

조선일보는 이렇게 모호하기 짝이 없는 표현을 통해 기사를 분식하고 있지만 이것 역시 추측일 뿐이다. 기사에서 한·미 당국이 나설지 모른다는 이 추측을 받쳐줄 어떤 근거도 없다. 이런 추측성 기사를 1면에 전진배치하면서 조선일보는 황 박사 논문의 진위논쟁을 국부 유출 논쟁으로 바꿔나갔다.

황 교수팀과의 직접적 접근이 가능했던 조선일보는 지난 13일에도 10일 섀튼 교수가 안규리 서울대 의대 교수와의 전화 통화에서 "<사이언스> 논문의 진정성을 300% 신뢰한다"고 말했다고 단독 보도했다. 이 신문은 안 교수의 말을 인용, 섀튼 교수의 '300%'를 강조하며 "이렇게 했음에도 황 교수팀의 사이언스 논문의 진정성이 훼손될 경우 황 교수에 대한 지지 입장을 표할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고 전했다.

섀튼 교수는 바로 이틀 뒤 황 교수팀에 대한 총체적인 불신을 표시하면서 논문 철회를 <사이언스>에 요청했다. 그러자 국내 언론들은 섀튼 교수가 오락가락 한다고 섀튼 교수에 화살을 돌렸는데 이것은 안 교수의 전언 나아가 이를 보도한 조선일보의 단독취재가 사실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이 역시 황 박사의 논문 조작의혹에 대한 초점을 분산시키는데 톡톡히 역할을 한 기사다. 안 교수가 황 박사팀의 일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입을 통해 섀튼 박사의 말을 전하는 것은 처음부터 신뢰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일이다.

조선일보는 21일에도 특종을 떠뜨리는데 "제럴드 섀튼 미 피츠버그대 교수가 황우석 교수에게 지난 9월 미화 20만달러(한화 약 2억원)의 지급을 요구한 것으로 확인됐다"는 것. 익명의 서울대 관계자를 인용해 이같이 보도했는데 결국 사실로 드러나기는 했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먼저 터뜨리는 대신 황 교수팀에 유리하게 이 사건을 끌고 나갔다. 돈을 주고 외국의 권위를 사려 했던 황 교수의 부도덕성보다는 섀튼 교수 요구의 과도함 쪽으로 논점을 몰고 갔다. 황 교수와 결별을 선언, 황 교수를 궁지로 몰아넣은 섀튼 박사에 대한 반감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충천해 있던 차에 이 같은 보도가 나오자 비난의 물꼬는 섀튼 쪽으로 터졌다.

조선일보는 이처럼 황 교수 쪽에 서서 사실을 추구하려는 시도를 육탄저지하는 대가로 황 교수로부터는 이례적인 대우를 받는다. 황 교수는 12월 들어 지금까지 공개 기자회견 이외 단 세 차례 개별 언론사와 인터뷰를 했는데 그 '수혜자' 또는 '거래자'는 모두 조선일보였다.

황 교수의 세 차례 인터뷰, 수혜자는 모두 <조선>

▲ <조선> 12월 6일자 황우석 교수 인터뷰 기사.
지난 11월 24일 '눈물'의 기자회견 이후 지방으로 잠적했던 황 교수는 언론과 연락을 두절하고 침묵을 지켜오다 11일 만에 처음으로 조선일보에 입을 열었다. 당시 기사가 압권이다.

"모든 것을 아주 접고 싶었습니다…."
5일 오전 9시30분 어렵사리 연결된 휴대전화를 타고 들려오는 황우석 교수의 목소리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MBC PD수첩의 '협박취재'에 시달리다 해명 기자회견을 하고 "세상이 싫다"는 말을 측근에게 남기고 지방 모처에서 칩거에 들어간 지 11일 만에 들려온 황 교수의 음성이었다.


황 교수가 인터뷰에 응해준 데 감격한 조선일보 기자는 쉽게 기자의 본분을 접었다. 기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국민들이 하루빨리 황 교수님이 연구실로 돌아오시길 바란다"고 기자가 말을 건네자 황 교수의 음색은 어둡게 변했다. "내가 그동안 심신이 너무 괴롭고 힘들었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의 목소리는 곧 '콜록콜록' 하는 기침 소리에 막혀 끊겼다. "몸이 이 상태라서, 몸살에 걸려서…."

'황 교수님'에게 몸살을 걸리게 한 < PD수첩 >에 대한 국민적 공분을 자아내려는 의도였을까. '음색이 어둡게 변했다' '콜록콜록'과 같은 인터뷰 본질과 전혀 관계없는, 감정을 자극하는 표현을 중간중간 집어넣는다. 기자가 인터뷰를 할 때 취재원의 건강을 확인하려는 취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기사가 다시 이어진다.

황 교수는 이어 한국에서 과학자로 살아가는 힘겨움을 토로했다. "이런 풍토에서 이런 과학이 무슨 희망이 있느냐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힘을 내시라"고 하자 황 교수는 "어찌됐든 상황이 이러니 기다려 주십시오. 상황이 사그라지고 과학을 과학으로 볼 수 있을 때(연구실로 돌아가겠습니다)…."

이 대목에 이르면 기자는 인터뷰하기 위해 전화를 건 게 아니었다. 마치 제자가 스승을 대하듯 위문하고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복귀를 재촉한다.

황 교수는 거듭 "이번주 중에는 복귀하시느냐"고 묻자 "조금 있다가 곧 뵙겠습니다"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황 교수는 다시 침묵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난 7일 서울대 병원에 입원해 수염을 깎지 않은 모습을 드러냈다. 많은 기자들이 병실 밖에서 황 교수의 말을 한마디라도 따기 위해 장사진을 치고 있는 동안에 조선일보는 두 차례나 유유히 전화로 인터뷰를 한다.

15일 노성일 미즈메디병원 이사장의 "줄기세포는 없는 것 같다"는 발언이 알려진 직후 이에 대한 황 교수의 반응이 초미의 관심사가 됐을 때 조선일보는 황 교수와 전화 인터뷰를 하고 이렇게 물었다.

"내 말을 국민에 알려달라" 황 교수 당부

▲ 12월 16일 <조선>은 황우석 교수와의 전화인터뷰 기사를 통해 "내 말을 정확하게 국민에게 알려달라"는 황 교수의 당부를 충실히 전달했다.
"노 이사장의 발언에 대해 해명해 달라." 이에 대한 황 박사의 답변은 조선일보와 자신의 음험한 거래를 단적으로 표현한다. "내 말을 정확하게 국민들에게 알려 달라."

그가 조선일보에게 원한 것은 그의 입장을 대변해 달라는 것이고 조선일보는 그 역할을 충실히 함으로써 단독 인터뷰의 기회를 계속 얻고 있었다. 나흘 뒤인 지난 19일 황 교수는 다시 조선일보에게 단독 인터뷰할 기회를 주며 2005년과 2004년 <사이언스> 제출 논문에 대한 과학계의 각종 의혹 제기 등에 대해 "사필귀정(事必歸正)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와 황 교수의 수상쩍은 관계는 제1단계인 난자기증 논란에서도 확인된다. 조선일보는 지난 11월 17일자에서 미국의 생명윤리사건 전문 법률회사 3곳에 연구원의 난자기증 논란에 대한 자문을 의뢰한 결과, 모두 연구원의 자발적인 난자기증이라면 법적·윤리적으로 문제 삼을 수 없다는 의견을 보내왔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미국도 줄기세포 연구에서의 난자기증 등에 대한 국립과학아카데미의 명문화된 윤리지침이 2005년에야 확정됐기 때문에" 그 이전의 난자기증에 대해서는 소급력이 없다고 지극히 우호적으로 보도했다.

이 보도는 조선일보의 단독보도였다. 출처는 '서울대병원의 세계줄기세포허브 관계자.' 역시 황 교수팀의 내부자다. 황 교수팀은 이처럼 '중요한' 의견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지 않고 조선일보를 통해 먼저 흘렸다.

이처럼 박사에 대한 조선일보의 보도는 조선일보 노보가 일부의 의견으로 지적한 것처럼 "심정적으로 치우친' 정도가 아니다. 한 언론이 얼마나 사회의 의사소통 과정을 중간에서 왜곡할 수 있는가를 그리고 왜곡을 통해서 얼마나 반사이익을 챙기려 했는지 보여주는 교과서적 사례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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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20 0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원래 '나와 누나와 화장실, 화장실, 화장실'은 한 편에 담으려고 했던 에피소드인데, 쓰다 보니 말이 많이 붙어서 3편으로 나누었다. '화장실'이 세번 나오는 것은 당연히 세 가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마지막 세 번째가 하이라이트가 된다는 의미도 된다. 화장실 시리즈 마지막에 오고야 말았다. 지금까지 들려준 이야기는 서론에 불과하다. 지금도 이 이야기를 쓸지 말지 고민이다. 일단 '깍두기' 님이 누나의 명예를 보장해준다고 했으니까 마지막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나와 누나와 화장실, 화장실, 화장실 - 엉덩이 이야기

그 때는 화장실에 관련된 이런 유머도 있었다.

병팔이는 맨날 화장실에 떨어진다. 그래서 친구에게 물어보니, 화장실에 떨어지려 하면 팔을 벌리라고 했다. 화장실에 간 병팔이는 팔을 벌려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병팔이는 너무 좋아서 '만세!'를 외쳤는데, 그와 동시에 다시 화장실로 빠지고 말았다.

이건 시시한 유머이지만, 그 당시 어린이들이 얼마나 화장실에 공포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려주는 대목이다. 나도 실제로 화장실 그 구멍에 빠지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화장실에 빠지는 것은 사소한 공포이지만, 나는 화장실 곳곳을 기어다니는 '구더기'가 더 무서웠다. 누나의 손전등으로 화장실 안을 살피면서 구더기가 꼼지락거리는 것을 종종 보아왔기 때문이다. 소문에는 구더기가 '사람의 살'을 좋아한다는 말도 있었다. 그리고 그 구멍은 어린이에게는 꽤 큰 편이었다.

지금 하는 고백이지만, 살작 엉덩이를 대 본 적도 있다. 그 덕분에 안심해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었다. 내 엉덩이가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엉덩이'에 관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누나와 나는 화장실 안에서 많은 추억을 녹였다. 하루는 서로 급하다고 다투었는데, 결과는 함께 동시에 '하자'였다. 다음은 그와 그의 남동생이 나눈 대화이다.

누나 : 승주(아! 가명을 쓸 걸 그랬다)야, 근 데 둘이 하기에는 구멍이 너무 작은 것 같아.

나 : 아니야, 누나 엉덩이가 대빵 커서 그래. 나는 이렇게 조그맣잖아.

누나 : 구멍에 넣지 못하면 옆으로 샐 텐데, 그러면 또 청소해야 되잖아.

나 : 그럼 누나가 나중에 싸등가!!(짜증 좀 섞임)

누나 :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나 : 엉덩이 두 개를 같이 있으면 함께 쌀 수 없으니까, 내가 엉덩이를 누나 거 위로 해서 쌀게.

누나 : 그러다가 네 똥이 내게 묻으면 어떡해?

나 : 뭐 닦으면 돼지..(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누나 : 아니 그게 아니라, '똥독'이 그렇게 심하다잖아. 나 똥독 오르면 어떡해..

나 : 에잇! 그러면 누나가 엉덩이 올리면 되잖아. 내가 똥독 걸릴게. 빨리 싸기나 해

누나 :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나 설사란 말야. 니가 나중에 싸라..응?

나는 씩씩거리며 화장실 밖으로 나왔고, 화장실 밖에서 자꾸 '아직 멀언(멀었어)' '아직 멀언' 하면서 소리를 질렀고, 화장실 문도 자꾸 걷어찼던 것 같다.

누나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똥이 멈춰서 안 떨어져, 어떡해?'

그날 밤 긴 시간 동안 동생과 누나는 화장실 안팎에서 실갱이를 벌였다는 슬픈 이야기는 이로써 끝을 맺는다. 다음에는 좀 '청결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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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2006-01-20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편부터 읽으면서 정말 아련한 추억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걸 느껴요.
변소와 구더기에 얽힌 추억....저도 정말 많았는데....페이퍼에 쓴 적도 있죠^^
누님의 명예는....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
어렸을 때 이 정도 추억이 없는 사람 있겠어요?^^

갑자기 어렸을 때 세 살던 집 주인이 똥간을 안 퍼줘서 똥이 산처럼 싸인 변소에서 어디다 볼일을 봐야할지 난감해하던 기억이 떠오르네요ㅡ..ㅡ;

승주나무 2006-01-20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공감하신다니 다행입니다. 저는 자신을 유난히 '유난히'로 보는 경향이 있어가지구요. 공감을 할 이야기가 맞겠죠. 제가 이상한 게 아니죠???
 

나와 누나의 화장실 문화

우리집 화장실이 수세식으로 바뀐 것은 작년이다. 언제나 우리집 화장실은 밑이 뚫려 있었고, 돼지는 없었지만, 똥을 떨어뜨리면 밑에서 '퐁' 하고 똥물이 튀어오르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주로 '쉬아'는 밭에다 하거나, 아니면 '싱크대'(아~ 이거까지 밝혀야 되나?), 목욕탕 같은 데다 하는 편이었다.

'검정고무신'에 보면 '기영이'도 그 문제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을 한다. 엉덩이를 손으로 막을까. 그네를 타면서 타이밍에 맞춰 떨어뜨릴까. 참 공감이 가는 만화였다.

먼저 나의 이야기다. 아마 국민학교 2학년쯤의 일일 것 같다. 나는 화장실에서 주로 머리를 잘랐다. 조금씩 조금씩, 어쩌다가 그런 '요망한' 습관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티는 잘 안 났다. 그 때는 뭔가를 자르는 게 참 좋았던 것 같다. 그 해에 내 친구 녀석이 가위를 가지고 품바처럼 '철렁 철렁'하면서 놀았는데, 거기다 손을 댔다가 잘라먹을 뻔한 일도 있다. 암튼 그 때 그 시절은 엉뚱하면서도 참으로 '위험한' 시기이다. 그런데 문제의 그 날은 좀 많이 잘랐다 싶었는데, 학교에 가자 애들이 배꼽을 잡고 웃는 것이었다. 내 사촌형도 내 반에 오더니 '완전 원숭이'라며 웃어댔다. 그냥 원숭이도 아니고, 완전 원숭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알아둘 것. 어린이가 거울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머리를 자르면 '원숭이' 모양이 나온다. 그 별명은 국민학교를 졸업해야 떼어낼 수 있었다.

우리 누나는 참 이상하다. 화장실 갈 때마다 맨날 나를 데리고 간다. 텔레비전에서 재미있는 거 하고 있을 때는 더 짜증났다. 그것은 누나가 읍내로 유학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누나는 화장실 갈 때마다 손전등 큰 걸 들고 갔다. 그 전까지 우리 집에서는 손전등을 쓸 일도 없었고, 쓴 적도 없었는데, 순전히 누나 화장실용으로 산 것 같다. 화장실에 맨 처음 가면 손전등을 켜고 화장실 구멍 안을 구석구석 비춘다. 안에서 귀신이 나와서 손을 내민다는 것이다. 내가 두 학년 어렸지만, 어린 내가 봐도 그건 좀 아니다 싶었다. 암튼 그렇게 한 5분 정도 확인을 한 후, 일을 보는데.. 나는 밖에서 기다리는 편이다. 달도 보고, 쥐새끼 소리도 듣고, 귀뚜라미 소리 같은 것도 들리고, 어쩔 땐 파도가 모래를 쓸어담는 소리도 듣는다. 그리고 '승주야', '승주 있니', '승주 안 갔지' 하는 소리를 1~2분 간격으로 듣는다. 나는 그때마다 대답을 해주어야 한다.

어느 날은 못 미더웠는지,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라는 거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누나는 완전 미쳐 있었던 것 같다. 근데 이상하게 그때마다 난 항상 그 좁은 화장실 안에 들어가서 누나가 일을 다 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지금도 궁금한 것은 내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었느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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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제목을 '누나와 똥 이야기'로 하였다가, 누나와 똥을 함께 쓰는 것은 아니다 싶어 제목을 위와 같이 바꾸었다. 게다가 이 이야기는 나의 어린 시절과 '화장실'에 얼킨 이야기이므로, '똥'은 2선으로 내려가야 한다.

미식가 돼지를 돋통(통시, 돼지우리와 화장실을 함께 쓰는 제주도 특유의 양식)에 두지 마라

우리 삼촌네 집에는 돼지를 키웠다. 그런데 화장실은 '없었다'가 아니라 있긴 있었다. 그러니까 돼지우리에 돌담으로 구멍을 만들어서 거기 앉을 수 있게 만든 것이 화장실이다. 우리들이 쓰는 수세식 화장실이 맨 처음 등장한 것은 1960년대 이승만 정권 시절이었는데, '고려호텔'이라는 곳과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두 곳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겨울이 되면 좌변기가 차가워져 일 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눈치 빠른 한 정치인이 미국 유학 갔다가, 좌변기 커버를 가지고 와서 이승만 대통령한테 바쳤는데, 굉장히 흡족해 하였다고 한다. 그 사람은 후에 장관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를 '변기통 장관, 좌변기 장관' 하였다고 한다.

그건 그렇고, 문제는 이 놈의 돼지와 나의 신경전이다. 녀석이 '똥맛'을 아는지, 돼지우리에 떨어진 '식은 똥'보다는 '갓 데운' 인분을 또 그렇게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돼지놈이 그 구멍과 좀 떨어져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날도 급했지만, 돼지가 구멍 가까이 있어서, 돌멩이를 던져서 거리를 좀 떨어뜨렸다.

그래서 겨우 구멍 위에 앉을 수 있었는데, 밑이 축축하고 뜨끈뜨근한 것이었다. 이 '느낌'은 상상만 했지, 실제 경험한 적은 없었는데, 아니 이 놈의 돼지가 혀로 넬롬 내 엉덩이를 핥는 게 아닌가. 지금 생각하면 거의 비데 수준이었겠지만, 녀석은 이빨로 내 '똥'뿐만 아니라, 엉덩이도 씹어먹을 태세였다. 나는 하마터면 우리로 떨어질 뻔했고, 거의 졸도 직전까지 갔다. 지금도 돼지 멱따는 소리를 들으면 그 때의 공포가 몰려온다.

공교롭게도 '돼지의 공포'는 그 일뿐만이 아니다. 주위가 바다여서 여름이면 가까운 바다에서 헤엄을 친다. 나는 그렇게 헤엄을 잘 치는 편이 아니다. 그래서 모래사장하고 가까운 바다, 그러니까 내 목 정도 오는 곳에서 놀고 있었다. 가까운 언덕에서는 어른들이 '돼지'를 잡고 있었다. 그 때의 장면은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 '공포'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일단 낮은 절벽에서 돼지를 떨어뜨린다. 돼지가 기절을 하면 몽둥이로 살짝 다듬어 주고, 용접공이 쓰는 그 센 불로 돼지를 '그을린다.' 물론 이것은 '돼지 잡기 시나리오'다. 그날은 당연히 '시나리오' 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돼지는 낭떠러지가 낮았는지, 기절하지 않고 그대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것도 내가 설레설레 헤엄치고 있는 곳을 향하여, 나를 향하여 정면으로 헤엄쳐 왔다. 그 멱 따는 소리를 내면서... 끔찍했다. 나는 소리를 질렀고, 울었다. 주위의 사람들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사람들이 돌을 던졌다. 다행히 돼지는 나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방향을 틀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에 '웰컴투 동막골'을 보았는데, 멧돼지가 신하균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오는 장면을 보고 또 그 '공포'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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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2006-01-20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데....ㅎㅎㅎ 우리 조상들은 현명했다니까요^^

승주나무 2006-01-20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그 느낌을 유추해보면, 돼지의 혀는 굉장히 깨끗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휴대폰을 거울삼아 잇바디의 고추가루를 남김없이 제거하듯, 그 놈도 입청소는 깔끔하게 했던 것 같아요^^ 그 느낌을 유추한다는 게 불가능하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