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現象學)

 

1764년 《신기관 Neues Organon》에서 현상학이란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한 독일의 철학자 J.H.람베르트는 본체의 본질을 연구하는 본체학과 구별하여 본체의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을 현상학이라고 했다. 그 후 칸트는 물자체(物自體, 본체)에 관한 학문과 구별되는 경험적 현상의 학문이라 하였고, 헤겔은 감각적 확실성에서 출발하여 절대지(絶對知)에 이르기까지의 의식의 발전과정을 서술하는 것이라 하여 이것을 특히 <정신현상학>이라 불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E.후설을 중심으로 전개된 철학운동을 뜻한다. 이 운동은 당초 <사상(事象) 그 자체로>라는 표어와 같이 의식에 나타나 있는 것(현상)을 사변적 구성을 떠나서 충실히 포착하고, 그 본질을 직관에 의하여 파악, 기술한다는 공통적인 지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현상학은 19세기 후반의 신칸트 학파와는 달리 그 주관적인 구성주의(構成主義)를 배제하여 <객관으로의 전향>을 의도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사실에 한정시키는 것을 근본적 입장으로 하는 실증주의(實證主義)에도 반대한다. 현상학자들은 본질 파악의 방법에 의하여 논리학ㆍ윤리학ㆍ심리학ㆍ미학ㆍ사회학ㆍ법학 등의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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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48)

한동안 바쁜 일들로 제쳐두었던 일들을 주말에 밀린 빨래 해치우듯 해본다. 그간에 신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딱히 첫손가락에 꼽을 만한 책이 눈에 띄지 않았었는데, 며칠 전에 그에 값할 만한 책이 나왔다. 아마도 이 연재를 즐겨 읽어보시는 분이라면 맞히실 수 있을 것이다. 맞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1>(한길사)이 그것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신화학>은 전4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분량의 책이며, 말년의 레비-스트로스가 20년에 걸쳐 쓴 것이다. 해서 과연 언제쯤 국역본이 나올 것인가 궁금해 하던 차였는데, 생각보다는 빨리 책이 나왔다. 1권 '날것과 익힌 것'에 이어서 나머지 책들, 곧 2권 '꿀에서 재로', 3권 '식사예절의 기원', 4권 '벌거벗은 인간'도 곧 나오는 건지 궁금하고 곧 나오기를 기대한다. 내가 벌써 이 책을 읽어봤을 리는 없으므로 책에 관한 정보는 레비스트로스의 회고대담이나 2차문헌들에서 얻은 것이다. 대담이란 디디에 에리봉과 나눈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강, 2003)을 말한다. 레비-스트로스 입문서로 가장 추천할 만하다(나는 개인적으로 '사상'과 그 '사람'을 분리시켜서 생각하지 않는 버릇이 있다).

먼저, 상식적으로 알아둘 일은 <신화학>에서 다루어지는 재료들이 대부분 아메리키 신화라는 것이다(알다시피 지역별로 신화는 무궁무진하며, 거기에 대한 전문가들이 다 따로 있다. '세계의 모든 신화'의 전문가가 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세계 모든 민족'의 민족학자/인류학자가 된다는 게 가능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가령, 푸코의 스승인 뒤메질은 인도 신화 전문가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레비-스트로스는 신화들을 사고의 재료로 사용하여 개별적인 것 너머에 있는 보편적인 구조를 발견하고 기술하고자 한다는 것. 그가 '구조주의' 인류학의 대가인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론을 무리하게 적용하다 보면 신화의 개별성을 무시한 억지를 부릴 수도 있겠다. 이러한 억지에 대해선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민음사, 1996)에서 제기된 비판이 신랄하며 정곡을 찌르고 있다.

그렇다면,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은 '극복'의 대상이며, 극복된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그건 오이디푸스 신화의 구조에 대한 그의 분석을 떠올려봐도 알 수 있다. 신화들을 구성하는 신화소들을 분리/추출해낸 다음에 그가 하는 일은 그 신화소-카드들을 악보처럼 배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매우 아름다운 '사유의 논리'가 구성되게 된다. 그 아름다움에 견주면 현실과의 유관성은 여기서 이차적이다. 요컨대, 신화학자 레비스트로스를 지운 자리에서도 우리는 아티스트, 혹은 작곡가로서의 레비스트로스를 읽어낼 수 있는 것(그 자신이 클래식 음악의 열렬한 애호가였다). <신화학> 또한 음악의 악장 형식으로 구성돼 있어서 서곡에 이어서 변주곡이 나오는 식이다. 이러한 '형식'이야말로 가장 레비스트로스적인 것이다(이러한 '형식'의 기원은 그가 야콥슨에게서 시사받은 음운론이다). 해서 나의 제안은 신화학자나 인류학자로서보다는 음악가로서의 레비스트로스에 주목하는 것이 그의 <신화학>을 읽는 보다 재미있는 방식이 아닐까라는 것(신화들에 별로 관심이 없는 내가 굳이 이 책을 반가워하는 이유이다).

 

 

 

 

책의 역자는 임봉길 교수로 30년전 프랑스 유학시절에 이 책을 처음 읽었다고 하는데, 그런 인연이 좋은 번역으로 결실을 맺었으면 싶다. <구조주의 혁명>(서울대출판부, 2000)의 한 장은 임교수가 쓴 '레비스트로스와 구조인류학'이다. 참고할 만한 글이고, 레비스트로스 사상에 대한 자세한 해제는 (초보자가 읽기엔 좀 어렵지만) 김형효 교수의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인간사랑, 1989)를 참고할 수 있다. 초보자에게 가장 쉬운 책은 주경복 교수의 <레비스트로스>(건대출판부, 1996)이다. 문고본이어서 분량이나 가격 모두 부담이 없다. 최협 교수의 <부시맨과 레비스트로스>(풀빛, 1996)는 레비스트로스 입문서라기보다는 인류학 입문서로서 유용하며, 번역서 가운데에서는 에드먼드 리치의 <레비스트로스>(시공사, 1998)가 부담없다. 리치는 레비스트로스의 영국인 '제자'이며, <성서의 구조인류학>(한길사, 1996)의 저자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영향? 친족/민족 연구의 권위자인 이광규 교수가 자신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인류학자로 레비스트로스를 꼽은 적이 있다. 물론 그 경우는 <친족의 체계>라는 레비스트로스의 박사학위논문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경우이겠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레비스트로스는 모방하기 어려운데,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그의 방법론이 '음악적 재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두번째 책은 역시나 한길사의 그레이트북스로 나온 <왕필의 노자주>. 저자는 임채우 교수로 "왕필의 역철학 연구"로 학위를 받았고, 이미 <주역 왕필주>(길, 2000)를 역간한바 있다. 동양철학 책을 한두권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왕필(혹은 왕삐)이란 이름을 모를 수가 없는데(나는 김용옥의 책들에서 처음 소개받았다 '아마데우스 왕삐'!)), 삼국시대를 살았던 이 '천재'는 비록 23살의 나이에 요절했지만, 노자에 대한 가장 형이상학적이면서 권위있는 주석을 남겼다(비록 요즘은, 특히 재야에서 그의 주석을 비판하는 이들이 많아진 듯하지만).

이 <노자주>에 대해서는 이미 김학목의 번역으로 <노자 도덕경과 왕필의 주>(홍익출판사, 2000)가 출간돼 있는데, 해석상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책세상에서 새로 나온 <노자> 번역/주해에서 저자인 임헌규 교수는 홍익출판사본에 대해서도 "왕필의 주석을 세밀하고 정확하게 번역해놓은 책"이라 평하고 있다. 함께 읽어볼 만한 책으론 김형효 교수의 <사유하는 도덕경>(소나무, 2004)가 있다. 오래전에 나온 <데리다와 노장의 독법>(정신문화연구원, 1994)의 업그레이드본인데, 역시나 임헌규 교수에 따르면, "<노자> 전체를 수미일관한 철학적 사유로 읽으려고 시도한 책"으로서 "다소 무리한 해석도 있지만, 근래에 연구된 가장 의미있는 연구서 중의 하나"이다. 아울러 백서본, 곽점본, 왕필본 등 주요 노자판본에 대한 비교주해는 이석명의 <백서노자>(청계, 1993)를 참조할 수 있다.

<노자>는 가장 심오한 사상을 담고 있다고 말해지면서도 분량이 부담없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해석과 주석에 도전해보는 책이다. (내가 더 좋아하는 책은 <장자>이지만) 나도 그런 축에 들어서 한때는 <노자> 영역본을 사모으기도 했었다(4-5권을 구했던 듯하다). 작년에 러시아에 있으면서 러시아어본 <도덕경>을 기꺼이 구해들었던 것도 그런 때문이다(이 책에도 상당한 분량이 주석이 포함돼 있다). 아직 여유가 좀 있지만, 아주 늙기 전에 모아놓은 텍스트들을 읽으며 <도덕경>에 대한 나의 생각도 적어두고 싶다. 이건 학구적 바람이기보다는 호사가적인 바람이다(*한길사의 신간 <왕필의 노자주는 생각해보니까 이미 나왔던 책이다. <왕필의 노자>(예문서원, 1997)가 그것이다. 나는 그 책을 갖고 있는데, 알라딘 검색만을 의지하다가 깜박 신간으로 착각했다. 수정된 사항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다시 살 필요는 없어 보인다).

 

 

 

 

세번째 책은 소설로서 중남미소설 선집인 <붐 그리고 포스트붐>(예문). 이 분야의 전문가인 송병선 교수의 번역이다. 우리가 알 만한 중남미 작가들이 대거 망라된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인데, 피서지에서 한번 읽어봄 직하다. 상식적인 문학용어로 알아두어야 하지만, "'붐(Boom)'이란 20세기 후반 세계문학의 중심으로 급부상한 중남미 현대소설을 일컫는다." 붐세대 작가들이란 말도 쓰는 듯한데, 그 다음 세대가 포스트붐이 되겠다. 교양함양 차원에서도 필독서. 이 책과 함께 꼽고 싶은 것은 열린책들에서 새로 나온 줄리안 반즈의 소설들이다. 반즈는 영국의 중견작가인데, 이전에 동연출판사에서 <플로베르의 앵무새>, <내 말 좀 들어봐>와 <10과 1/2장으로 쓴 세계역사>가 나온 적이 있고, 나는 이 책들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태양을 바라보며>를 포함해서 새로운 푸대에 담겨 출간된 것. 나는 그의 책들을 드문드문 읽었지만, 반즈는 유머가 있으며 신뢰할 만한 작가라고 생각한다(이른바 '돈되는 작가'인 것이다). <그녀가 나를 만나기 전>(문학동네, 1998)까지 포함해서 한번쯤 반즈의 세계에 푹 빠져보시길...

 

 

 

 

네번째 책은 다다이즘 예술가 만 레이의 '자화상'  <나는 Dada다>(미메시스). 나는 이름으로만 접해본 작가인데, 소개에 따르면 " 세잔과 피카소의 그림, 브란쿠시의 조각 등을 접하며 유럽 현대 미술에 매혹되었고, 1913년 아머리 근대 미술전에서 유럽의 첨단 회화 유파들의 그림을 보고 결정적으로 유럽 예술의 선진성에 경도되기 시작" "초기에는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은 회화 작품들을 주로 발표했다가 마르셀 뒤샹과 프랑시스 피카비아와의 만남을 통해 점차 다다이즘에 접근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론 문학적 다다이즘에 관심이 있어서(가령, Deridada는 어떤가?)  <다다와 초현실주의>(한길아트, 2001) 등을 사보기도 했다.

사전적 소개에 따르면, 다다이즘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성과 합리주의가 세계를 좋은 방향으로 이끈다는 믿음이 무너지자, 젊은 예술가들은 기성세대들의 편견과 인습에 도전하여 반예술적 부정과 파괴를 표현수단으로 하여 태동시킨 예술유파"이다. 철학자들 가운데는 무정부주의적 인식론을 주장한 과학철학자 파이어아벤트가 다다이스트로 분류되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선 하모니즘과 함께 다다이즘은 예술의 기본정신이기도 하지만, 이에 대한 관심은 충분했던 것 같지 않다. 만 레이의 자서전을 한번쯤 읽어보고 싶은 건 그런 정신의 시대사적 맥락을 구경해보기 위해서이다.

 

 

 

 

이제 마지막 한 권을 꼽아보기로 하자. 분야별 안배 차원에서 헬렌 피셔의 <왜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가>(생각의나무)로 낙착. 우선 믿을 만한 학자들이 추천하고 있다. "낭만적 사랑에 대한 번뜩임과 구체적 경험을 원한다면 소설을 읽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 본성의 중심부를 근본적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에드워드 윌슨) 그리고, "헬렌 피셔는 독자에게 인간의 열정, 그리고 그 결과로 일어나는 극도의 환희와 절망들을 잊을 수 없는 인상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인류라는 존재에 대해 지금껏 씌어진 가장 매력적이고 과학적으로 탄탄한 저서 중 하나다."(데이비드 버스)

사실 헬렌 피셔와는 구면인데, 나는 그녀의 <사랑의 해부학>(하서출판사, 1994)도 읽었고, <성의 계약>(정신세계사, 1999)도 읽었다. 데이빗 부스(=데이비드 버스)의 <욕망의 진화>(백년도서, 1995), 사라 홀디의 <여성은 진화하지 않았다>(서운관, 1994) 등도 그맘때 같이 읽은 책들이다. 모두 영장류 학자들이거나 인류학자들이다(버스는 성심리학자이면서 진화심리학자). 이번에 개정판이 나온 <제1의 성>(생각의나무)만 읽지 않았을 따름인데, 그건 자세한 리뷰들을 읽는 걸로 대체했기 때문이었다. 짐작에 신간은 <사랑의 해부학>의 업그레이드 버전인데,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저자는 사랑과 같은 우리의 강렬한 감정과 뇌의 생리학적 변화의 연관성에 주목한다.

곧 소개에 따르면 "주로 책은 바로 알 수 없는 사랑의 매커니즘을 실험과 조사를 통해 분석해낸다. 책은 일단 흥분, 변덕, 나른함, 집착 등 사랑에 빠졌을 때 나타나는 증상은 시공간과 성별을 초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랑이 전 인류에 공통된 뇌의 작용에 따른 현상이기 때문이라는 것. 사랑에 빠졌을 때 세상이 달라 보이는 이유는 나의 뇌가 변하기 때문이고, 마찬가지로 사랑이 변한다면 그것은 나의 뇌가 변하기 때문이란다." A10신경이나 암페타민, 도파민 등의 호르몬 얘기들도 아마 자주 나올 법하다. 

윌슨의 주장대로, 이러한 대뇌생리학적 환원이 "인간 본성의 중심부를 근본적으로 이해"하는데 요긴하며 필수적일 수 있다. 하지만, 역시나 윌슨의 주장대로, "낭만적 사랑에 대한 번뜩임과 구체적 경험을 원한다면 소설을 읽어야 한다." 우리의 열정이 암페타민과 연관된다는 걸 피셔의 책은 말해주지만, 정작 그 암페타민이 분비되도록 해주는 건 (책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의 대상들이다. 책이 우리를 구원해주지 않는다는 건 그럴 만하다고 쳐도 책이 우리를 (사랑만큼) 흥분에 빠뜨리지 못한다는 건 씁쓸한 일이다(이젠 옛날의 '감정들'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 걸 생각해보라). 해서 우리의 책들은 보다 강(력)해질 필요가 있다. 암페타민 발산제라도 먹이든지, 주사하든지 하여간에...(우리의 떠나간 연인들이 되돌아올 리 없으므로...)

05. 08. 06. 

 

 

 

 

P.S. 본문에서 아깝게 거명되지 않은 책은  장 뤽 낭시 등이 쓴 <숭고에 대하여>(문학과지성사)이다. 장 뤽 낭시나 라쿠-라바르트는 '데리다 사단'에 분류되는 철학자들로서 '알튀세르 사단'의 랑시에르와 함께 앞으로 더 많은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책은 낭시가 편집한 것인데, "1984년에서 1986년 사이에 잡지 「포에지」에 발표된 일련의 '숭고 분석'에, 또 다른 네 편의 논문을 첨가한 총 여덟 개의 글을 싣고 있다. 숭고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들 그리고 숭고의 개념과 관련된 질문들을 다시 돌아본다." 흥미롭지만, 책의 가독성의 대해서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기에 장담하지 못하겠다.  

다행인 것은 이번에 칸트의 <판단력 비판>(책세상) 발췌역이 나왔다는 것(아무래도 박영사판 <판단력 비판>보다는 읽기 편하겠다). 특히, "미의 분석론"과 "숭고의 분석론"이 번역된바, 미학(특히 요즘 주목받는 숭고론)에 관심을 둔 이라면 반드시 읽어두어야겠다(같은 시리즈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도 <판단력 비판>의 단초를 보여주는 것으로 참고할 만하다). 칸트의 숭고론에 대해서는 리오타르의 강의 <칸트의 숭고미에 대하여>(현대미학사, 2000)도 참고할 만하지만 철학에 대한 소양을 좀 필요로 한다. 교양수준에서라면, '숭고'와 '시뮬라크르'를 다루고 있는 진중권의 <현대미학강의>(아트북스, 2003)이나 숭고에 대한 통시적인 안내를 시도하고 있는  안성찬의 <숭고의 미학>(유로서적, 2004)이 더 유용하겠다.

더불어 반드시 참고해야 할 책은 지젝 등의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 2005)로서 성적 차이에 대한 라캉주의적 견해를 소개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 성적 차이가 칸트의 숭고론에 대한 재독해, 즉 성별화된 숭고론의 양상으로 전개된다는 것(남성이 역학적 숭고에 대응한다면, 여성은 수학적 숭고와 매치될 수 있다). 특히 조운 콥젝과 지젝의 논문은 필독의 가치가 있다...

 

 

 

 

P.S. 오늘자(8월 8일) '한겨레' 문화란(17면)에 <신화학1>에 대한 리뷰가 실렸다. 지난 금요일에  대한 타블로이드판 북리뷰(책/지성 섹션)란에서는 신간으로 간단히 처리된 책이 갑자기 크게 다루어진 이유는 모르겠다(웬 뒷북?). 담당기자가 늑장을 부린 것인지도. 그런데, 늑장을 부린 원고 치고 좀 부실하다. 보도자료 이상의 내용을 찾아보기 어려운데다가 사실관계를 왜곡한 내용도 포함돼 있어서이다. "국내에 번역 소개된 레비-스트로스의 저술로는 <슬픈 열대>, <보다 듣다 읽다>,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등이 있다."고 했는데, <야생의 사고>(한길사, 1996)이 빠진 건 유감이다. 앞에서 나열한 책들이 '이론적인 저작'이 아니어서 "그의 지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긴 하지만, 그 '정수'를 전하기엔 아무래도 부족함이 있다."라는 진단은 <야생의 사고>를 고려했더라면 다소 완화되었을 것이다.

이어서 기자는 "반면 레비-스트로스의 본격 연구서인 <친족의 기본구조>를 비롯해 <오늘날의 토테미즘> 등은 아직 번역되지 못했고, <구조인류학>은 1950년대에 잠시 출판됐다가 절판된 상태다."라고 했는데, <토테미즘>은 주저라고 하기엔 소략한 책이며(이미 번역돼 있는 <신화의 의미>나 <인종과 역사> 같은 부류이다), <구조인류학>은 김진욱의 번역으로 1987년에 종로서적에 출간된바 있는 책이다(즉,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구할 수 있던 책이다). 웬만한 대학도서관에는 다 비치돼 있는 책에 대한 서지정보를 모르고 있다는 건 기자로서 직무유기다. 레비스트로스의 이론적인 '주저'라 할 <구조인류학>은 2권 분량인데(나는 영역본을 갖고 있다), 김진욱본은 제1권만을 옮기고 있다. 해서 레비스트로스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시급한 일은 <구조인류학>이 완간되는 것이다. <신화학>은 매년 1권씩 나온다고 하는데, 그 사이에 <구조인류학> 2권도 껴서 나왔으면 싶다.

정리하면, 레비-스트로스의 주저는 <친족의 기본구조>를 제외하면, <야생의 사고>, <구조인류학>, <신화학> 등이다. 한국어 레비-스트로스는 40% 정도를 카바하고 있는 셈. 이런 상황에 대한 기자의 결론? "그러니까 90년대 이후 한국 지성계를 휩쓸고 있는 구조주의 이론가 가운데, 유독 레비-스토르스만은 자크 라캉, 루이 알튀세르, 미셸 푸코 등과 전혀 다른 '대접'을 받았던 셈이다." 출간된 주저들을 견주어보건대 그렇다는 얘기인가? 그런데 라캉의 책은 무엇이 나와있는지? 좀 허술한 번역의 <욕망이론>(문예출판사) 말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무슨 '대접'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한국 지성계를 휩쓸[다]' 같은 문구도 교양없는 표현이다. 게다가 '구조주의'에 대한 무슨 붐이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우리가 무얼 산출해냈는가? 알튀세르는 저서도 얼마 안되지만, 푸코의 책들이 좀 출간된 걸 가지고 '휩쓸다'로 하는 것인지? 또, 휩쓸어서 무얼 하는 것인지?

어쨌거나 이번 <신화학>이 "명성은 있는데 그 실체는 분명치 않았던 레비-스트로스를 제대로 이해할 조건"을 마련해주었다는 데는 나도 동의한다(나로선 '이해할 조건'이 아니라 '음미할 조건'이라고 고쳐말하고싶지만). 그리고 "<신화학1>은 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한번쯤 도전해볼 만한 학술서"라는 데에도 동의한다(이면에서 얘기하는 건 책을 기자도 안 읽었다는 뜻이겠지만). 한데, 그 여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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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이야기
윌 듀란트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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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철학을 접하게 된 계기는 아주 우연한 일이다. 그러니까 현학적으로 말하자면, 외부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나는 내적으로 항상 불만에 가득차 있었고, 그것을 표출할 만한 기제를 마련하지 못했다. 나는 촌구석의 꼬마 아이에 불과했으며, 읽은 책이라고는 교과서가 전부였다. 나는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골을 떠난 것은 고등학생이 되어서였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넓은 세계에 발을 들여논 것은 대학생이 되어서였던 것 같다. 새로운 세계에서 친구가 찾아왔다. 나는 그 녀석이 주는 책들을 낼름낼름 받아먹었다. 그 중에 이 책이 끼어 있었다. 전혀 새로운 사고방식이었지만, 굉장히 익숙했다. 나의 거대한 물음표가 드디어 언어의 옷을 입는 순간이었다.

윌 듀런트의 성공은 대단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나온 번역서만 백 편 가까이 된다고 하니,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책에서는 철학의 주제들과 철학하기의 방법이 비교적 성실히 담겨 있다.

이 책을 처음 만난 지도 10년이 다 돼 가지만, 나는 '철학' 을 생각하면서, 번번이 이 책으로 되돌아오곤 한다. 이 책의 저자가 시대의 철학자들의 저서를 독파해서 그들의 언어로 서술했다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인문학적 뻥'에 불과하다. 그러면 세상의 번역가들은 모두 원 저자를 뛰어넘었다는 말인가. 그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도 좋은 '광고 효과'가 되지 못한다. 좀 더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저자의 사상과 문체를 현대에 가깝게 재구성해놓았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원저자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윌 듀런트가 살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저자를 통해 원저자의 생각을 우리 현실에 더욱 가까이 적용시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이야기햇듯, 철학사는 아니다. 그렇지만,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철학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이 현실의 문제와 철학의 기본적인 물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거나, 이 책이 철학사의 커다란 줄기를 비교적 '극적'으로, 혹은 '의미있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이 이야기에서는 사상보다 인물이 먼저 나온다. 인물의 성격과 시대, 사고방식이 전면에 내세워지며, 인물이 그것을 극복하거나 좌절하는 그림을 보여준다. 그것은 곧 우리가 겪게 될 일이기도 하다.

이 안에 있는 이야기를 상세히 다루기 위해서는 많은 지면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표적인 몇 사람의 '뻔히 알려지지 않은' 사례를 일별하는 것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나는 플라톤을 사랑하지만, 진리를 더욱 사랑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플라톤에 대한 선전포고이자, 철학의 사조를 둘로 딱 가르는 선언이 된다. 즉 근대철학에서 극명하게 나뉜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은 이로부터 흘러나온다. 추상적인 정신을 우위에 두느냐, 실재의 세계를 우위에 두느냐는 선택 자체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종합을 위한 시도는 철학의 가장 진지한 과제가 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정론을 인용하는 것이 나을 듯싶다.

행복에 대한 외부적 보조 중에서 가장 고상한 것은 우정이다. 사실상 우정은 불행한 사람보다는 행복한 사람에게 더 필요한 것이다. 행복은 서로 나누어 가짐으로써 증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정은 정의보다도 더 중요하다. 「사람들이 벗인 경우에는 정의는 불필요하지만 사람들이 공정한 경우에는 우정은 여전히 혜택이고」 「벗은 두 육체에 깃들 하나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정은 많은 벗들 사이에서보다 오히려 소수의 벗들 사이에서 가능하다. 「벗이 많은 사람은 벗이 없는 것과 같다.」「완전한 우정을 갖고 많은 사람들의 벗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문 중에서

친구가 많다는 것은 친구가 없다는 것과 같다는 역설적인 화법에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우정이란 두 육체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라는 그의 정의는 어떤 해설보다 우정의 의미를 잘 그려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 명의 철학자가 원천기술을 내놓으면, 다음 철학자가 그것을 도드라지도록 연구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스피노자의 다음과 같은 발견은 니체, 쇼펜하우어, 프로이트 등에게 영감을 주었다.

쾌락과 고통은 우리들의 욕망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우리는 어떤 사물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기 때문에 그 사물을 욕망 하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 사물을 욕망하기 때문에 사물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욕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물을 욕망 한다.  따라서 자유로운 의지는 없다. - 본문 중에서

쇼펜하우어는 이 패스를 받아서 수동적 의지론을 펼친다.

자연은 개인의 의지에 이바지하도록 지성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므로 지성은, 오직 사물이 의지의 동기가 되는 한에서만 사물을 인식하게 되어 있고 사물의 근본을 캐거나 사물의 참된 존재를 파악하게 되어 있지는 않다. - 본문 중에서

때문에 천재는 의지가 없는 인식의 최고의 형태라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천재론을 펼칠 때의 천재는 아마도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스피노자의 이야기 중에 '사과나무 이야기' 말고 익숙한 이야기가 있는데, '지복(至福)은 덕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덕 자체'라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 보상을 위해 노력을 하지만, 그 노력 속에 보상이 대부분 들어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철학자들은 오류와 실패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위대한 발견의 핵심 속성으로 파악한다. 사람은 성공보다 실패에 많은 것을 배우듯이 말이다.

악한 일에 친절한 영혼이 존재할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오류 속에 진리의 정신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고 있다. -하버트 스펜서, 본문 중에서

철학의 이야기가 즐겁고 밝은 것만은 아니다. 철학으로 인해 평생 고통 속에서 살다 간 사람이 많다. 니체가 특히 그렇다. 니체의 열정적인 삶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피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나의 눈가를 축축하게 했던 이 자극적인 멘트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이 자극적인 이유는 너무나 시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니체의 인생은 한 편의 슬프고 격정적인 서사시이기도 하다.

「리스베드」하고 그는 물었다. 「왜 우느냐? 우리는 행복하지 않느냐?」-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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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사도 - 도킨스가 들려주는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 이야기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무정부적, 혁명적, 정력적, 악마적, 디오니소스적 열정의 타오르는 불꽃으로 가득하고, 창조하려는 엄청난 충동으로 넘치는 삶, 그것이 바로 성장과 행복을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의 삶이다

- <온들의 교장 샌더슨의 연설> 중 일부

 

이 책은 내가 읽은 도킨스의 두 번째 책이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이기적 유전자'를 1교시라고 한다면, 이 책은 '쉬는 시간'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확장된 표현형'이나 '눈먼 시계공', 혹은 '조상 이야기' 같은 책으로 넘어갔어야 했다. 그렇지만 소개글에 '대중을 향한 글'이었다는 문구가 '꽂혀서' 이 책을 다음 책으로 선정했다.

 

도킨스가 그리는 다윈 같은 사람은 너무나 수줍음이 많아서, 메모나 서한문을 보지 않고서는 그 사상의 큰그림을 보여주지 않는다. 도킨스는 다윈의 충실한 탐구자로, 시대와 과학수준의 간극을 메워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가 여기저기 기고했던 글들을 일별하는 것으로 그의 '칼럼니스트'의 면모를 볼 수 있게 된다. '대중적 과학자의 대중을 향한 글쓰기'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의 오래된 경서인 '대학(大學)'에 주자 서문을 보면, 옛 선현들이 학문을 하는 원리가 기록돼 있다. 즉 몸소 행하고 나머지를 학문에 정진하며(本之人君躬行心得之餘), 서민들이 일상에서 몸소 행하는 정도를 넘어가지 않는다(不待求之民生日用彛倫之外). 그래서 당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얻어듣지 않을 수 없고, 얻어들은 사람은 자신의 직분에 맞게 소화시킨다. 도킨스가 일상으로 파고든 이유는 그가 믿는 과학관에 잘 설명되어 있다.

 

과학은 무엇이 윤리적인지 판단할 방법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은 개인과 사회가 판단할 문제이다. 하지만 과학은 제기되는 질문들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으며, 판단을 흐리는 오해들을 말끔히 제거할 수 있다. - 본문 중에서

 

그가 볼 때 아직도 세상에는 비과학적 생각이 비과학적 경로를 통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때의 비과학적이라는 말은 전혀 근거가 없거나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뜻한다. 그는 자신의 준거틀을 바탕으로 부딪히는 문제들마다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다. 그가 논쟁에 익숙한 것은 이 때문이며, 다소 도발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즐거운 삶의 비밀은 위험을 무릅쓰며 사는 데 있다 - 니체(본문 중에서)

 

그것은 그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장점이자 단점이 되고 있다. 그러니까 어떤 경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그의 호감도는 '극단적'이고 '명확'하게 구분될 것이다.

 

그가 지니고 있는 또 하나의 신념은 '경직성 걷어내기'이다. 대중적 글쓰기 자체도 그렇고, 대중과 잦은 대면을 시도하는 것 역시 그러한데, 그것은 그의 글에도 여실히 드러나 있다. 시사적인 문제에 대해서 지면을 아끼지 않으며, 그가 사용하는 '독특한 유머'는 순전히 그의 의도 안에 있는 내용물이다. 어느 날 인터넷에 자신이 제안한 단어인 '밈'이 얼마나 인기를 얻고 있는지 검색해본 적도 있다. 거기서 '바이러스 교회'라는 신흥 종교에서 '성 다윈'을 따르는 '성 도킨스'로 우상화되어 있는(사실은 비꼬는) 말을 보고 흠칫했다고 술회한다.

뿐만 아니라 '상상의 동료'나, '마음 근육', '애정 어린 냉소'와 같은 독특하면서도 와닿는 언어 사용법은 그의 유쾌한 성향을 잘 보여준다. 유쾌한 문구를 하나만 들어보기로 하자.

 

125년이 지났으므로, 우리가 지금 접하고 있는 이론이 그가 원래 제시한 이론을 수정한 것이라고 예상하기만 하면 된다. 현대의 다윈주의는 다윈주의에 바이스만주의와 피셔주의와 해밀턴주의를 더한 것이다(거기에 기무라주의와 몇몇 다른 주의들을 덧붙인 것이라고도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다윈의 글을 읽을 때면, 나는 그의 말이 대단히 현대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끊임없이 놀란다. 그는 유전학의 모든 중요한 주제들에서는 심하게 잘못된 견해들을 내놓았지만, 그 외의 거의 모든 것에서는 정답에 도달하는 기이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아마 지금의 우리는 신 다윈주의자이겠지만, ‘신’이라는 접두어를 아주 약하게 발음하도록 하자. - 본문 중에서

 

이 책은 주지하듯이 신문에 냈던 칼럼, 책에 대한 서평, 추도사, 서한문 등 저술가가 일상에서 '글을 써야 할' 모든 지면의 흔적이 담겨 있다. 특히 종교와 권위, 전통과 같은 오래된 문제, 묻어두고 싶은 이야기들을 들춰내 지속적으로 따져 묻는(지면을 아끼지 않으면서) 부분은 가히 '도발적'이라 할 만하다. 뿐만 아니라 '배심제'에 대한 불만도 잔뜩 담아냈다. 토니 블레어 수상이나 찰스 왕세자에 대한 풍자도 삼가지 않으며, 자신의 라이벌인 스티븐 제이 굴드에 대해서는 '공정하고 애정어린 비판'을 가한다. 어느 면을 보더라도 우리는 글 속에서 아련한 애정과 열정, 과학의 공정성에 대한 진한 믿음을 볼 수 있다. 과학을 체화해낸 이 용감한 대변인은 언제, 어느 곳에 가더라도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리라는 믿음이 들 정도이다.

 

저자 서문과 편집자 서문, 역자 서문을 설레설레 읽었는데, 다 읽고 나서 보니 마지막 '딸에게 보내는 편지'가 이 책을 종합하는 부분이라 생각했다. 그 생각에 도달한 자신이 즐겁고 자랑스러웠지만, 머리말에 그런 내용이 있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무의식'이 결정적인 힌트를 준 모양이다. 이 책을 처음 잡은 사람은 앞의 머리말도 좋지만, 맨 마지막의 편을 머리말로 활용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뭐니뭐니해도 내가 도킨스에 가장 감사하는 이유는, '이기적 유전자'를 맨 처음 읽고 나서부터 지금가지 '종의 기원'이나 '대담'과 같이 나랑은 전혀 관계 없을 것 같은 '생물학'(또는 사회생물학)에 흠뻑 빠질 수 있게 한 그의 '대중적 글쓰기' 덕분이었다. 이 '밈'은 국내외의 학자들을 심히 자극시킨 모양이다. 아니면 이렇게 많은 종류의 '생물학' 서적에 내가 '즐거운 비명'을 지를 수 있었겠는가.

 

브로노프스키의 말처럼 21세기는 과연 '생물학의 시대'이다. 수학-물리학-생물학으로 이어지는 과학 정신의 '핵심과목(?)'은 타당하고 장구한 서사를 이루고 있으며, '말과 글'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언어 수단을 '생물학' 또는 '과학'에 초점을 맞춰, 그 거리가 가까워질 수 있도록 매일같이 고심하고 있는 그는 분명 선각자이거나 선각적 지식인이다. 맹자가 그려낸 '선각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깨닫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나중에 깨달은 사람을 일깨우는[覺後覺] 의미의 '선각자' 말이다.

 

하늘이 이 사람(선각자)을 세상에 나게 한 것은 ‘먼저 안[先知]’ 이로 하여금 ‘나중에 안[後知] 이’를 일깨우기 위함이며, ‘먼저 깨달은[先覺]’ 이로 하여금 ‘나중에 깨달은[後覺] 이’를 일깨우게 하기 위함이다.

天之生此民也 使先知覺後知 使先覺覺後覺也 《맹자》, <만장 상,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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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5 1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06-09-26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감사함다^^
 

논문조작, 검색신공으로 밝혀냈다
2006-01-26 14:18 | VIEW : 19,659


아릉아릉=아릉~(브릭) ?
도깨비뉴스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출처를 찾습니다’ 코너와 기타 다른 코너들을 통해 인터넷에 떠도는 기이하거나 신기한 사진들의 출처를 찾아드렸던 ‘아릉아릉’입니다.

온 국민을 실망과 좌절에 이르게 한 ‘황우석 교수팀의 줄기세포’ 문제가 현재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난자윤리와 관련한 각종 문제로 시작되었던 황우석 파문은 연말이 다가오자 ‘논문의 진실성’에까지 그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온갖 음모론과 언론플레이가 난무하고, 황교수를 지지하는 국민들과 이를 비난하는 국민들 사이에는 걱정스러울 만큼 국론분열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또한 과학계를 넘어서 정치사회적인 문제로까지 확대되어 심각한 국가이익의 손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최초 문제 제기
작년 12월 5일 새벽 5시 28분 브릭(생물학연구정보센터, http://bric.postech.ac.kr)에 anonymous라는 누리꾼이 ‘황교수팀 2005년 사이언스 논문 조작 의혹’을 최초로 제기하였습니다. 12월 6일 00시 19분에는 ‘아릉~’이라는 다른 누리꾼이 ‘DNA fingerprinting 데이타’에 대한 의혹을 또다시 제기하게 됩니다. 아릉~은 그날 밤을 새면서 관련 전공자들과 밤샘 토론을 하였습니다. 12월 7일 22시 46분에는 직접 작성한 12페이지짜리의 구체적인 자료를 가지고 다시 그 문제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 날 이후 황우석 교수팀의 줄기세포 문제는 ‘논문 내용의 진실성’에 촛점이 맞추어진 채 해가 바뀌면서까지 치열한 진위 공방을 벌였으며 현재는 조작 주체와 관련 공범들은 누구이며 그 배후 사정은 무엇인가에 대해 검찰이 수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쯤이면 짐작하시겠지만 도깨비뉴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릉아릉’과 브릭의 ‘아릉~’은 동일인입니다. ‘아릉아릉’을 줄여서 ‘아릉~’이라고 닉을 쓰게 되었습니다. ‘아릉~’ 역시 ‘음모론’의 깃털 정도로 지목된 현상황에서 본인에 대한 잘못된 정보들에 대해 나름대로 해명을 하기 위해 기자들의 손이 아닌 직접 글을 적는 것이 가능한 도깨비뉴스를 통해 밝히고자 합니다. 지금부터 제가 브릭을 찾아가게 되었던 이유와 그간의 전개 과정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브릭을 찾게된 계기
저는 지방의 한 국립대에서 생명과학 계열의 박사과정에 재학중입니다. 2005년 사이언스 논문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12월 5일 오후 1시 44분 ‘프레시안’이 보도한 내용이 각종 포털사이트에 실리면서 접하게 되었습니다. 난자윤리 문제가 그토록 오랫동안 문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그 문제에 깊이 있는 관심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때까지 줄기세포 분야에서 두 번이나 세계적인 업적을 내놓아 국가의 위상을 드높였던 ‘황교수팀’이 본연의 연구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이토록 휘둘리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혼란스러웠을 뿐입니다. 또한 모 방송사 프로그램과 해당 방송사를 ‘무릎’ 꿇리도록 한 국민들의 놀라운 힘에 놀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브릭의 anonymous가 제기했던 ‘논문 사진 조작’ 문제는 난자윤리 문제와는 달리 ‘논문’으로 능력의 대부분을 말하는 과학도로서 눈과 귀를 의심하게 만든 실망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때까지도 황교수팀의 논문은 전공분야가 아니었기에 내용을 보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학과사무실에 비치해 둔 사이언스 논문의 표지를 보면서 자랑스러워했을 뿐입니다. 2005년 논문을 ‘부록(Supporting Online Material)’까지 자세히 살펴보게 된 것은 12월 5일이 처음이었습니다. 먼저 언론에서 얘기한 ‘사진 조작’이 실제 있었는지 하나하나 확인해 보았습니다. 믿기 힘들었지만 사실이더군요. 줄기세포가 제 전공분야는 아니지만 그 논문에 실린 많은 데이타들을 만들기 위한 기술들 중에는 저와 관련된 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 부분에 자연스레 눈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DNA fingerprinting 데이타였습니다.


본격적인 문제 제기

본인의 경험과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 바로 보이더군요. 이거 이상하다 싶어서 부록의 내용들도 하나하나 살펴보았습니다. 모두 100건에 달하는 그림들을 일일이 비교하면서 살펴본 결과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기사소재가 나온 ‘브릭’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 게시물 이후 무섭게 글들이 올라오더군요. 하루종일 그 게시판에 상주하면서 올라오는 글들을 살펴보았습니다. Anonymous가 제기한 2쌍 이외에 또 다른 사진도 찾아져서 결국 5쌍으로 늘어났습니다.

제가 가진 의문에 대해, 제가 제기할 문제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 싶었습니다. 결국 12월 6일 00시 19분에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글을 올린 후 전공자들과 밤을 새면서 토론하였습니다.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들도 많이 계셨는데, 아무래도 글로만 설명하려니까 이해시키기 힘들었습니다. 12월 7일 오후에 문제 제기가 가능한 DNA fingerprinting 자료들을 편집한 뒤 아래한글 파일로 만들었습니다. 문서작성과 간단한 이미지 편집은 10년 넘도록 아래한글을 사용해 왔기에 그다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힘든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날 밤 다시 한번 밤샘 토론을 벌이고자 자료를 올리고 토론을 하게 되었지요. 이 문제제기에 의해 ‘논문 진실성 문제’라는 새로운 화두는 일파만파로 번져나갔고, 더불어 ‘사진 조작’의 증거들이 브릭을 넘어 다른 사이트에서도 계속해서 올라오게 됩니다. 그런 것은 누가 시키는 것도, 누가 배후에 있는 것도 아닌 누리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진 것이지요. 제가 anonymous의 문제제기를 통해 브릭으로 이끌려갔듯이 말입니다. 그곳이 바로 사이엔지(http://www.scieng.net)와 디시 과갤(http://www.dcinside.com)입니다. 자연스레 그곳으로도 발길이 옮겨졌습니다. 일부는 일본의 2ch과 미국의 과학자들이 조작 사진을 발견하게 되고, 이것이 다시 디시 과갤을 통해 공개되었습니다. 브릭 게시판의 경우 첨부파일을 올릴 수 없기 때문에 주로 디시 과갤을 통해 황교수팀의 다른 사진 조작은 물론 미즈메디 자체 논문에서 발견된 조작사진들을 올리거나 혹은 정리해서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였습니다.


‘아릉~’은 ‘특정집단’의 사주를 받고 있다?
브릭, 디시 과갤, 사이엔지 등의 누리꾼들은 논문 조작과 관련한 ‘사실’을 지속적으로 찾아내고 제시하면서 논문의 진실성에 대한 토론을 해 나갔던 데 비해 황교수팀과 이를 지지하는 측에서는 지극히 비상식적인 언론플레이와 각종 음모론을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애초부터 잘못된 방식입니다. 그런 것은 혼탁한 정치판에서나 통용될 방식이라고 봅니다. ‘논문의 진실성’을 논하는데 음모론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특정 개인이나 특정 집단을 무릎 꿇리기 위해 ‘겁’을 주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이 제기하는 수많은 음모론은 오히려 그들 스스로를 편협한 사고의 틀에 가두는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객관적인 상황판단이나 놓여진 사실을 무시한 채 제기하는 음모론은 한번 빠지게 되면 그 속에서 파생되는 새로운 의문들로 인해 더 이상 결론을 얻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게 됩니다. 그러다 다음 음모론, 또 다음 음모론... 진정으로 황교수팀을 생각하고 황교수팀을 도울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폐기했어야 할 방식이었습니다.

일부에서는 ‘아릉~’은 깃털이고 배후가 따로 있거나 ‘단체’가 일을 벌이고 있다는 의문을 제기합니다만 사실이 아닙니다. 물론 자료의 양이나 이미지 편집, 글 내용의 다양성 등이 그런 오해를 가져올 수 있겠으나, 아래한글, 워드, 그래픽 프로그램, 웹문서 작성 등은 오랜 경험이 있었기에 비교적 쉽게 해 낼 수 있었고, ‘방대한 정보’의 경우 도깨비뉴스에서 보여주는 ‘검색신공’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혼자 했습니다. DNA fingerprinting 데이타에 대한 의혹은 혼자 한 것이 맞고, 그 이후 추가로 나온 사진 조작 문제들은 브릭, 디시 과갤, 사이엔지, 일본 2ch, 미국과학자 들의 공동작업(?)에 의한 것입니다. 아, 그리고, 저 남성입니다.


도깨비뉴스를 찾지 않았던 이유
도깨비뉴스도 황교수팀과 관련한 큼지막한 이슈들로 그 당시 많은 글들이 올라왔습니다만, 전문성이나 내용의 깊이에 있어서 원하는 논의를 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또한 찾아오시는 독자분들의 댓글 역시 격한 감정만을 쏟아내는 글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진득한 논의를 하기가 힘들었지요. 브릭을 찾아서, 브릭에서 논의를 전개하게 된 이유일 수도 있으나 이것은 사이트 특성이기 때문에 제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지요.


같지만 같지 않은 게시판, 댓글 문화
현재 대부분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채용하고 있는 ‘게시판’과 ‘댓글’ 문화는 인터넷 강국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의 독특한 문화현상이며, 세계 어느 나라도 갖추지 못한, 훌륭하고 아름다운 인터넷의 소중한 ‘문화자원’입니다. 우리나라만큼 게시판의 종류와 기능이 다양하고 각 게시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곳은 전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게시판’ 문화를 통해 다양한 이슈에 대해 무제한에 가까운 논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고, ‘댓글’ 문화를 통해서는 그 이슈에 대한 실시간적인 반응들을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댓글’ 문화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채용하고 활성화시킨 곳은 디시인사이드(1999년)와 웃긴대학(2000년)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부작용도 아시다시피 만만치 않습니다. 광고, 도배, 그리고 최근 그 심각성이 도를 지나친 악플러 문제... 이번 황교수팀의 줄기세포 파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게시판과 댓글을 통해 쏟아지는 엄청난 정보들 중에서 실제 의미 있는 것은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대다수 포털사이트들이 보여준 댓글들의 수준은 극악에 가까웠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불쾌하게 받아들이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결과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게시판과 댓글’이라는 시스템은 동일하지만 그 곳에 담기는 내용에 따라 ‘옥’이 될 수도 있고 한낱 ‘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댓글 문화에 대한 자정 노력을 강력히 시도하겠다는 포털사이트들의 보도가 있더군요. 사실 어떤 식으로 제재를 하던, 시스템을 일부 바꾸던 도배질과 악플러들은 양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근본적으로는 누리꾼들의 인식이 바뀌어야겠지만 모든 누리꾼들에게 그러한 상식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에 게시판과 댓글에 상주하면서 의견을 개진하는 다른 누리꾼들이 적절히 통제하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것은 ‘게시판 관리자’와는 별도로 여러분들의 몫이지요. 며칠 전 서프라이즈에서도 똑같은 경험을 한 바 있는데, 댓글을 통해 나름대로 처음으로 ‘해명’을 시도했으나 한 누리꾼의 끊임없는 도배로 인해서 그곳을 나와버렸던 적이 있습니다.


‘아릉아릉’으로 활동하다
도깨비뉴스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출처를 찾습니다’ 코너를 통해서였습니다. 제가 다른 인터넷 사이트에서도 ‘상담자’ 역할 비슷하게 댓글을 많이 달고는 합니다. 물론 예전에는 고정닉 없이 그때그때 달랐었지요. 곤란에 빠진 경우나 궁금한 것이 있을 경우 그 해답에 대해 해당 URL을 알려주는 댓글을 달아주었습니다.

2005년 8월 25일 출처를 찾습니다 코너에 ‘캥거루 물고가는 뱀?’이라는 글이 올라왔는데, 이 글에서 CJ맨과 더불어 정확한 출처를 찾아준 Python이 저인데, 이때부터 이 코너를 쭈욱 찾아오고 있습니다.
http://www.dkbnews.com/bbs/view.php?id=findorigin&page=3&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53

주로 신기하거나 기이한 사진들을 도깨비뉴스 편집자분들이 찾지 못해서 따로 모아두는 곳인데, 제 ‘취미’에 딱 맞는 코너더군요. 이후 몇번 다른 글에 유동적인 닉으로 댓글을 달다가 ‘아릉아릉’이라는, 여동생이 키우는 고양이들이 내는 의성어를 고정닉으로 해서 활동하게 되었고, 독자분들이 ‘검색의 신’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시더군요. 현재는 모 방송사의 작가들에게 프로그램 소스를 제공하고 있는데, 요즘은 좀 뜸하네요... *^^*

도깨비뉴스를 만든 김현국 이사는 PC 통신시절 하이텔에서 pctools라는 아이디로 유머작가로 맹활약하신,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분인데, Central Point Software의 대표적인 도스 프로그램인 PC tools와 동일한 아이디를 사용하셨지요. 엽기발랄한 인터넷 사건 사고들을 모아서 사이트를 만드셨기 때문에 예전에도 가끔씩 찾아오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다 덜컥 ‘출처를 찾습니다’ 코너 덕분에 고정적으로 활동하게 되었지요.


검색신공, 나도 할 수 있다!
많은 도깨비 분들이 검색에 특별한 비법이 있느냐, 놀랍다 이런 말씀들을 하시는데 ‘검색’에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 실망스런 대답인가요? *^^*

우선 주제를 비교적 정확하게 잡아내야 합니다.
출처불명의 사진이 주어졌을 때 일단 사진에 붙여진 ‘제목’, 함께 주어진 ‘글내용’을 잘 파악해 둡니다. 사진 속에 들어 있는 숨어있는 ‘힌트’들도 잘 살펴봅니다. 힌트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는데, 글, 숫자, 기타 특이한 사항들을 파악해 두면 나중에 도움이 됩니다. 또 한가지 들자면 사진이 언제 촬영되었는가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검색엔진이든 특정 게시판에 들어가서 찾든 방대한 인터넷에는 수많은 같은 사진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사진촬영시기를 알아야 보다 정확한 출처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래픽 프로그램이나 기타 플러그인을 이용하면 쉽게 사진의 정보(Exif 정보)를 통해 사진이 언제 인터넷에 등장하게 되었는지 유추할 수 있습니다.

도깨비에 올라오는 사진들은 국내의 대표적인 유머관련 사이트나 포털사이트 등에 반드시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웃긴대학, 오늘의 유머, 개그맨, 디시 인사이드가 대표적이지요. 그리고, 포털의 경우 다음 아고라, 네이버 붐, 엠파스 유행게시판, 야후 재미존 등에 사진 자료들이 풍부하게 있습니다. 간혹 외국의 사진도 올라오는데 그건 조금 다른 기술이 필요하겠지요. *^^*


검색 엔진으로는 구글, 네이버, 엠파스, 야후, 네이트 순으로 찾아봅니다. 검색 엔진마다 각각 특징이 있고, 검색 방법에 따라 특정 카테고리만을 선택해서 할 수도 있는데, 때로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지요. 블로그, 커뮤니티, 이미지, 웹문서, 뉴스 등 다양한 카테고리가 있는데, 사진의 성격에 따라 적절히 취사 선택해야 합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사진을 보면 대략 어느 사이트에 올라온 것일까 짐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100% 그런 것은 아닌데, 이것은 웃대 스타일, 이것은 디시 스타일... 뭐 이런 식입니다. 아마 사이트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성향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결과라고 봅니다. 그리고, 한번에 바로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일단 Exif 정보가 살아 있는 것을 찾는 것이 중요한데 검색엔진에서 그런 것을 찾기만 하면 비교적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쉬운 경우 키워드 몇 개만으로 5분 정도면 찾을 수 있고, 웬만큼 막막한 사진이 아니라면 대개 20-30분만 집중하면 찾을 수 있습니다. 관심이 가는 사진이라면 유사한 주제의 다른 사진들도 함께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지요.

한가지 편견을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은 아무리 처음 본 사진이라도 일단은 이 사진이 ‘합성은 아니다’라는 믿음을 갖고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 사진 속 숨은 힌트를 놓칠 수 있답니다. 합성사진의 경우 검색엔진에서 찾아보면 아무리 재미있어 보여도 많이 퍼져 있지 않습니다. 진짜일 경우에만 쫘~~악 나오는 편이지요. ‘캥거루 물고가는 뱀?’이라는 주제에서도 많은 댓글에 ‘합성이네’라고 단정해 버리시는 분이 많던데, 재미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런 생각을 사진을 보자마자 갖게 되셨다면 출처 찾는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

사진에 담긴 힌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댓글’입니다. 꼭 최초 출처가 아니더라도 ‘댓글’에는 사진의 정체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단서가 담긴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댓글에서 모든 걸 알아버리기도 하지요.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서 구사하면 70-80% 정도는 찾아낼 수 있습니다. 간혹 ‘단계별 후룸라이드 유형’과 같은 시리즈 사진일 경우 일일이 순서대로 찾아다녀야 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필요한 주제도 있지만... 이 사진의 경우 황교수 지지 사이트에서 ‘아릉~’이가 이런짓 하고 있더라면서 돌려보고 있더군요.


검색신공과 황교수팀 문제가 무슨 관계?
무거운 주제로 시작했는데 뜬금 없이 검색에 관한 얘기가 나와서 뜨악하셨을 텐데, 이런 능력(?)이 황교수팀의 문제를 바라보고 풀어나가는데 개인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팀이다, 배후가 있다라는 터무니없는 억측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하구요. 무슨 말인가 하면, 많은 논문들의 사진들을 서로 비교해서 찾아내고, 학술 관련 자료나 언론에 나오는 수많은 자료들을 정리하고 추적하면서 문제를 풀어나가고 의견을 개진하는데 위의 검색신공 능력이 도움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애초에 ‘팀’이니 ‘배후’니 이딴 것은 없다는 얘기죠. 또한 논문에 관한 최초 제보자는 anonymous라는,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은 분이고, 아릉아릉(아릉~)은 그 뒤를 따라간 많은 누리꾼 중에 한 명이라는 사실!

황교수팀과 관련한 많은 다른 얘기도 있지만 이 글의 주제는 아릉아릉=아릉~이고 아릉~이 의혹 받고 있는 것들에 대한 해명이기에 여기서 마칠까 합니다.

도깨비뉴스 독자 = 아릉아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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