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지음 / 민음사 / 2003년 6월, 636쪽

 

李政權[이승만 정권] 때의 일이다. 펜 클럽대회에서 참석하고 돌아올 분들을 모시고 조그마한 환영회를 갖게 된 장소에서 각국의 언론자유의 실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끝에 모 여류시인한테 나는 “한국에 언론자유가 있다고 봅니까?”하고 물었더니 그 여자 허, 웃으면서 “이만하면 있다고 볼 수 있지요”하는 태연스러운 대답에 나는 내심 어찌 분개를 하였던지 다른 말을 다 잊어버려도 그 말만은 3,4년이 지난 오늘까지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시를 쓰는 사람, 문학을 하는 사람의 처지로는 <이만하면>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 언론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의 둘 중의 하나가 있을 뿐 <이만하면 언론자유가 있다고> 본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그 자신이 시인도 문학자도 아니라는 말밖에는 아니 된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소설가, 평론가, 시인이 내가 접한 한도 내에서만도 우리나라에 적잖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문학의 후진성 운운의 문제를 넘어서 더 큰 근본문제이다.

 

시고 소설이고 평론이고 모든 창작활동은 감정과 꿈을 다루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정과 꿈은 현실상의 척도나 규범을 넘어선 것이다. 말하자면 현실상으로는 38선이 있지만 감정이나 꿈에 있어서는 38선이란 타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이 너무나 초보적인 창작활동의 원칙을 올바르게 이행해보지 못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문학을 해본 일이 없고 우리나라에는 과거 십수 년 동안 문학작품이 없었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문학작품이 없는 곳에 문학자가 어디 있었겠으며 문학자가 없는 곳에 무슨 문학단체가 있었겠는가. 아마 있었다면 문학단체의 이름을 도용한 반공단체는 있었을 것이지만, 이 반공단체라는 것조차 사실에 있어서는 반공을 판 돈벌이단체이거나, 문학과 반공을 <이중으로> 팔아먹은 돈벌이단체에 불과하였다.

 

-- 『김수영 전집』, 「창작자유의 조건」 중에서

 

김수영은 자신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달라져야 할 것이 있다면 첫째도 언론자유, 둘째도 언론자유, 셋째도 언론자유라고 했다. 1퍼센트의 자유가 불허된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말한다.

 

가히 문학자의 지표로 삼을 만한 말이다. 언론의 자유란 언로(言路)가 막히지 않는 것이다. 이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예전에는 정권이 언로를 막았지만, 현재는 여론이 언로를 막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인터넷 폭력 등이 대표적 예이다.

 

예전에는 문학이 자유의 침해에 대항해 투쟁했다면, 이제는 '부당함‘에 대항해 싸워야 할 것이다. 부당하게 내몰린 사람들과 사회적 사각에 방치된 약자들만으로도 우리는 하나의 국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문학자는 항상 얼굴에 불만이 가득 해야 하며, 윗사람들이 보기에는 ’눈엣가시‘ 같은 사람들이어야 한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려는 자세는 ’약자들의 국가‘의 주권을 포기하고 부당에게 신탁통치를 의뢰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런 비타협은 문학도의 덕목으로 손색이 없다.

 

몇 십 년 만에 지식인들이 꿈에도 그리던 남북 문학자 연대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북한 작가가 남한의 문학상을 받기도 하고, 북한의 작품집에 남한 작가의 작품이 오르기도 하는 날이 온 것이다. 이것은 『고향』의 작가 이기영을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상과 정신의 통일을 이룩하고 수십 년 만에 찾아온 현실적 통일이자, 진정한 통일의 발판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세계의 결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상 속에서 굳건히 쌓이고, 기정사실화 되어야 한다. 미국의 인디언 출입 금지법과 우리의 국가보안법이 사문화되거나 사문화에 준하여 결국 폐기되고 마는 것도 현실의 투쟁만 국한하지 않고 우리들의 의식 속에서 이런 악습들을 극복했을 때에 따라오는 선물인 셈이다. 통일과 자유, 타당성 등도 마음 안에 꾸준하게 그려질 때 현실적으로 무색한 날이 가까워질 것이다.

 

우리는 말의 길 뿐만 아니라 마음의 길도 애써 가꿔나가야 우리가 만나는 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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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전집 2 - 소설, 문학
김유정 지음 / 가람기획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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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유정'이라고 부르는 나의 오만불손함에 대해 항변코자 한다. 내게 있어서 유정은 '점순이'나 '이쁜이'처럼, '암팡스럽'거나 '숭글숭글한' 인물이다. 그것은 이야기 속에서 언뜻언뜻 비추는 그를 자주 접하게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유정을 접하게 된 계기는 어느 계간지에서 이문구(李文求)의 고백을 접하고 나서이다.

'언어는 유정에게 배우고, 정신은 동리에게 배웠지.'

이 말이 내게는 새삼 큼직하게 다가왔다. 일전에 유정의 소설 몇 편을 선배의 권유로 읽어본 일이 있어서 사뭇 공감이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결심이 유정의 전작품을 읽고 입말공부도 하고, 작품세계도 탐구해 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소설을 쓰고 싶은 문학도로서 임하는 탐구였다. 때문에 이 글은, 유정의 특정한 작품을 읽고 나서 쓰는 감상문이라기보다는, 유정의 작품들과 알려진 유정에 대한 사실을 토대로 쓰는 '김유정 감상'의 특징을 가짐을 미리 부언하는 바이다. 아직은 그의 전작품 중에 반 정도밖에 소화해내지 못했지만, 그의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국어사전은 물론, 대사전에다 별도로 김유정어휘사전도 참고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생소한 토속어 한자 한자를 찾아 읽으면서 얻은 것은 어휘뿐만이 아니었다. 4년 동안에 발표한 소설 치고 그의 소설에는 8천여 개의 어휘와 그 중에서도 83%이 토박이 말임을 알 수 있다.그것은 유정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이야기에 토박이말을 담아냈다는 점을 말해준다. 여기서 유정이 소설을 쓰는 이유를 엿볼 수 있다.

작가마다 소설을 쓰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무지한 대중을 계도하기 위해서 쓰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최고 지성의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고매한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글쓰기, 시대를 증언하기 위한 글쓰기도 있을 것이다. 유정의 경우는―썩 적합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세 번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서 있는 시대와 공간을 되도록 진솔하게 담아내고 싶어했던 것 같다. 거기에 들어가는 요소로서 토박이말이 있다. 그렇다고 유정이 우리말만을 숭상한 것은 아니다. 지역사회에서 쓰는 말이라면 일본어, 다른 외래어라도 가리지 않고 써넣었다. 그러나 유정에게서 언어만을 배워간다면 그것은 반도 못 배운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가 쓰는 언어는 그가 만들어낸―정확히 표현하자면 묘사해낸―인물들에 의해서―개성과 운명 등에 의해서―생명을 가지게 된 것이다. 때문에 김유정의 농촌은 그것이 가진 사회역사적 본질에 의해 매개되지 못한 채 묘사됨으로써 일정한 한계를 가진다등 여타의 비판은 설자리를 잃게 된다. 지역사회의 이해라는 것은 그 안의 구성원이 관찰하고 세심하게 기록해 놓은 자료를 토대로, 그 안에서 특징들을 추려내어 이론화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 사회역사적 본질이라는 말뜻도 이해키 어려운 척도로 가늠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렇게 이해된 지역사회의 본질이라면 그만큼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 유정은 인물들의 행위와 성격을 직접 평하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행위를 관찰하고 꼼꼼하게 묘사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직접 그들을 평가한 어떠한 말보다 더욱 가깝게 그들의 사회역사적 현실을 보며, 더불어 함께 웃을 수도, 가슴아파할 수도 있게 되었다.

우리는 유정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의 입심에 넘어가기는 하지만, 그의 세계에 함몰되는 것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유정은 우리를 함몰할 세계를 가질 만큼 독단가는 아니다. 오히려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한 걸음 물러난 숙연한 기록자로서 유정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춘호'나 그 밖의 여러 이름들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안정감에 있다. 그들은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이웃이며, 그 시대에 엄밀히 존재했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유정의 소설에서는 창조적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인물들을 누르는 운명의 무게가 너무 크기 때문에 인물들의 발버둥질이 더욱 애절하게 와 닿을 뿐이다.

우리는 유정이 대학을 다니다가 고향으로 내려왔을 적에 자신이 시대와 사람들에게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무척 고민을 했던 사실을 접할 수 있는데, 그 후에 야학을 시작했다고 한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그림을 연상할 수 있었다. 야학을 하며 문맹인 이웃들을 가르치는 유정의 가슴속에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그도 글자를 가르치며 아름다운 우리말에 충분히 세례를 받았을 줄로 안다. 여기서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길이나 시대적 조건, 주위 환경 등을 그려보는 것은 예비작가로서 나에게 하나의 큰 가르침이 된다. 즉, 자신의 힘과 시대를 두고 진지한 대화를 했던 순간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하면서도 유정다운 가르침은 바로 그의 이야기와 인물들을 통해 볼 수 있는 유정의 '사람됨'이다. 유정이 단순히 지식인이었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이쁜이가 그에게 속맘을 비춰줄 수 있었을까? 그야말로 촌스럽게 '점순이'가 '봄감자'로 사랑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유정의 사람됨과 닮게 유정의 인물들 중에 악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다 못해 '뚝건달 뭉태'도 악인은 아니다. 유일한 악인이라면 인물들을 기형적으로 변질시키고, 위에서 내리누르는 사회이며, 시대이며, 지겨운 운명이다. 때문에 유정의 모든 인물들은 운명의 피해자들이다. 그리고 개중에 몇몇 불쌍한 사람들은 피해자들의 피해자들이기도 하다. 유정은 악인을 따로 상정하지 않고서도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얼마 안 되는 소설가이다. 이 점은 내게 있어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갈등과 긴장은 언제나 선악의 대립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대립해야 할 필요도 없다. 유정의 인물들은 모두 같은 방향에 서서 '드러나지 않은 악'을 쳐다보고 있다.

이쯤 되면 내가 이 글의 서두에 왜 이문구의 고백을 집어놨는지 눈치를 챘을 줄 안다. 요컨대 내가 유정에게 배운 것은 아름다운 우리말이지만, 그 한 단어 한 단어에 풍성한 생명과 가치를 부여하는 유정의 정신을 배웠다. 그것은 작가 개인의 불순물을 남겨놓지 않고 제 몸을 녹여서 만들어낸 순수 결정체의 정신이며, 그 이면에, 숙연하지만 자신이 할 말을 놓치지 않고, 그것을 소설의 그릇에 온전히 담아내는 작가로서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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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이라는 '잘 나가는 청소년도서 전문 출판사'에게 오늘 퇴짜 메일을 받았다.

논술과 관련된 샘플 원고를 보낸 것에 대한 결과 방침을 받은 것,

이유는 '논술답지' 않아서..

인정한다. 재미있게 쓰려보니 늘어지고, '비논술'의 경향이 좀 많았던 것 같다.

자고로 '논술'을 대비하는 '도구서'라고 하면,

각 장마다 생각할 커리들을 많이 던져주고,

'논술문제'에 가까워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일..

술이라도 한 잔 마시고 싶은데, '낮'이니 그럴 수도 없고..

다시 써보자.

그보다 '논술적인' 글로,

그보다 강력하고 재미있고 흡인력 있는 내용은,

그보다 크고 놀라운 출판사를 향해서,

우리들의 암울한 논술 현실을 너머 '논술 미래'를 향하여

최소한 이정도까지는 재미있고 논술답게 써야 먹힐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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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세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소 고전총서 서양문학 4
B. 파스칼 지음, 김형길 옮김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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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의 설을 전후로 '미래'와 '현재'에 치중하던 나의 '읽고 쓰기'가 '과거'로 약간 이동했다. 지나간 글을 돌이켜 보고, 정리를 하자는 뜻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속도에 대한 반성'이다.

동양철학은 허투루로 배운 줄 아느냐! '느림의 미학'보다 중요한 미학은 '일시정지' 즉, '엑스캔버스하다(XCANVAS-hada)'이며, '돌아감'이다. '돌아감'이라는 말은 참으로 풍부하게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안성맞춤의 용어이다. '빙 돌아감'과 '회귀'와 '돌아가심'이라는 뜻이 모두 담겨 있다. 옛말에 '게으른 선비가 책장을 헤아린다'는 속담이 있다. 책을 읽다 보면 '권수'와 '페이지수'에 눈이 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텍스트와의 진정한 독대'를 이루기 위해서는 뒤로 돌아가 보기도 하고, 처음부터 다시 읽기도 하고, 아예 베껴써보기도 해야 하지 않을까. 나의 '과거 읽기'가 천박한 '쪽수 헤아리기'의 못된 병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에잇! 서두가 너무 길어졌다.

철학자가 가장 철학자다워 보일 때는 '모순'이나 '역설'을 이용해서 사상을 전개할 때이다. "쾌락과 고통은 우리들의 욕망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우리는 어떤 사물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기 때문에 그 사물을 욕망 하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 사물을 욕망하기 때문에 사물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다"라고 한 스피노자의 명쾌한 주장도 유쾌하며, "의미는 말에 품위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에서 품위를 얻는다"는 파스칼의 주장도 시원스러워서 좋다.

자타가 공인하는 파스칼의 미덕은 '간명한 문장'이다. 다른 말로는 '금언', '격언', '아포리즘', '잠언' 등 여러 가지 말로 불리기도 하는데, 파스칼 자신이 '늘어지는 문장'을 매우 싫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정신이 번뜩 하는 것은 한 줄이면 충분하다. 그것이 시가 영원히 살아남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랄리스트'는 '인간성' 자체를 탐구하는 사람들이다. 도덕적 사상이 전개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솔직담백한 각성이 필요하다. 때문에 '도덕'으로 가기 위한 '자기 반성'이 모랄리스트들이 주로 한 일이었다. 이 두 가지 키워드를 고르게 묻혀야 그 의미가 드러나므로 한쪽의 의미에만 너무 경도되지 않기를 바란다.

파스칼의 모랄리스트적 면모는 두 가지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처세'에 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보다 '근원적인 것'에 있다. 이 역시 서로를 염두에 둔 철학이기 때문에 양분하기 힘들다. 팡세의 구절 중에

남을 효과적으로 훈계하고 그의 잘못을 지적해 주려 한다면, 그가 사물을 어떤 측면에서 보고 있는가를 관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사물은 보통 그 측면에서는 올바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올바른 점을 인정하면서 그의 잘못된 다른 측면을 지적해 주어야 한다. - 본문 중에서

라는 내용을 보자. 이것은 '처세'와 더욱 연관이 있겠지만, '근원적인 것'을 무시하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파스칼의 철학은 근원적인 것이 처세적인 것을 향하며, 처세적인 것은 근원적인 것을 줄기차게 향하는 구도로 정리돼 있다.

파스칼의 '근원적인 사유'를 이야기할 때 가장 어울리는 말은 '모순'이다. 철학자든 문학자든 모두 이 동굴에서 태어났다. 파스칼은 철학, 문학, 과학에 두루 걸쳐 있기 때문에 그의 '모순'은 보다 강력한 힘을 갖는다.

인간의 위대성은 자기의 비참함을 아는데 있다. 나무는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자기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위대한 일이기도 하다. - 본문 중에서

위대성과 비참함은 묘하게 중첩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안정된 '의미'를 이룬다. 모순과 역설이 '강력한 철학'의 동력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들의 타성에게는 '경종'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바꾸어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철학자는 간단히 앞과 뒤의 말을 바꿈으로써 놀랄 만한 의미를 만들어낸다. 습관과 본성은 어떠한가.

습관은 제2의 본성이며, 이 제1의 본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런데 본성이란 무엇인가? 습관은 본성적이 아니라고 말해서는 안될까? 습관이 제2의 본성인 것처럼 이 본성 자체가 제1의 습관이 아닐까? - 본문 중에서

이것뿐만 아니다. 방정식에 비유하자면, 우리는 좌변과 우변을 거꾸로 두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아예 중요 지수를 빠뜨리는 일도 많다. '잃어버린 지수, 언어'를 되돌리는 일도 철학자의 역할이다. 문학자와 철학자가 자꾸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들은 '창조자'가 아니다.

나의 저작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의 저작에는 이미 많은 사람의 저작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저작'이라고 해야 한다. - 본문 중에서

파스칼은 그의 학문 영역 만큼이나 사유의 스펙트럼이 넓다. 단순히 한 문구씩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유익하고 놀라운 이야기가 많다. 그리고 요즘도 많은 문필가들에게 인용되는 단골 문구인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는 말과 같이 파스칼은 '실존 철학'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종교' 이야기이다. 우리는 '신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종교를 부정하지만, 파스칼은 '신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종교를 긍정한다. 신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신이 아니라 인간과 다름 없는 어리석고 미천한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그의 화법이 어김없이 드러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는 신이나 종교에게 무리한 '인간적 강요'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팡세의 상투적인 수식어로 빠지지 않는 것이 '미완성'이라는 꼬리표이다. 물론 파스칼이 '필생의 역작'을 의도로 작업을 하다가 요절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다면 너무 '무책임한 독자'가 되어버리지 않을까? 그것을 '완결'짓는 것은 파스칼이 아니라 '나'가 아닐까. 모든 '완결'된 저작들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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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2-02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어진 서두가 재밌습니다.
저도 <팡세> 읽어보고 싶어서 한 권 사두고는 못 읽고 있네요.
이상하단 말예요.
어떤 책은 그 책 속의 몇 줄을 아는 것만으로 전부 읽은 것처럼 생각돼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승주나무 2006-02-02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몇 줄을 하고 싶어서 그 사람은 그 '두꺼운' 책을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도 다시 읽고 싶은 책입니다.
"학자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고서도, 15분간 더 이야기를 했으면 하는 충동으로 가득 차 있다." <본문>

가넷 2006-07-26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국내에 나온 <팡세> 중에 이 책이 가장 좋을까요?
 

열자(列子)는 도둑질이라는 말을 가지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국씨(國氏)는 큰 부자고 향씨(向氏)는 큰 가난뱅이인데 향씨가 국씨보고 부자 되는 방법을 물었더니 국씨 대답하기를 도둑질을 해서 됐노라고 했다. 향씨가 들은 대로 도둑질을 하다가 잡혀 죄를 짓고, 있던 것까지 뺏기고 분해 국씨한테 가서 질문을 했더니, 국씨가 말하기를 “너 어떻게 도둑질을 했느냐” 했다. 향씨는 제 한 대로 대답했더니 국씨는 듣고 말하기를 “도둑질하는 도를 그렇게도 모른단 말이야? 내 일러줄 터이니 들어보아라. 하늘에 시(時)가 있고 땅에 이(利)가 있다. 나는 천지의 시, 이 , 구름, 비, 산과 못의 나고 자라는 것을 도둑질해서 내 곡식을 키우고 내 집을 짓고, 뭍에서는 새, 짐승을 도둑하고 물에서 고기를 도둑해서 산다. 도둑질 아닌 것이 없지. 그것이 다 하늘이 낸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 네가 도둑질했다는 금은옥백(金銀玉帛)은 사람이 모아놓은 것이지 하늘이 준 것 아니다. 죄 얻어 마땅하지 않느냐?” 했다. 향씨가 그 말을 듣고도 알 수 없어 동곽(東郭) 선생한테 가서 호소했다. 동곽 선생은 대답하였다. “네 한 몸부터 도둑질한 것 아니냐? 음양의 화(和)를 도둑해서 네 생을 이루고 네 몸을 담았는데 하물며 그 밖엣것이겠느냐? ……국씨의 도둑질은 공도(公道)다. 그러므로 재앙이 없고, 네 도둑질은 사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진 것이다. 공사(公私)가 있다는 놈도 도둑이요, 송사가 없다는 놈도 도둑이다. 공(公)을 공으로 하고 사(私)를 사로 하는 것이 천지의 덕이다. 천지의 덕을 아는 사람을 누가 도둑이라 하겠느냐? 누가 도둑 아니라 하겠느냐?

 

 

사람은 사람에게 쉬이 상처를 준다. 그들은 수심이 가득하고, 자신의 불행에 대해서 탓한다. 행복한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든 불행하든 관심이 없다. 언제 어느 때든 자신은 할일이 있기 때문이다. 불행할 때는 그에 맞는 일을 하고, 행복할 때는 또 그에 맞는 일을 하지만, 정작 불행과 행복 자체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들은 그것을 시간낭비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은 인간과 인간 외의 공간에 대해 밝은 사람들이다. 과학이 만약 모든 사실들을 근본까지 파해쳤으면 발전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한계까지 제대로 간 것이다. 그 이상 시도하는 것은 한심한 짓이라는 것을 잘 안다. 사실 그 이상에는 온갖 거짓이 끼어들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여행을 떠나는 것, 자연과 가까이 있으면서 영향을 받는 것들은 모두 하늘을 훔치는 일이다. 자연에 기댈수록 점점 가슴은 커지고, 눈은 밝아진다. 훔쳐야 될 귀한 것들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한한 곳에서, 쓸모 없는 것들을 훔치는 사람들은 항상 가난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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